광복절 기념 주일 예배 설교 모음(5편)
순 서
(1) 8.15 해방과 애국(사48장10, 잠14장34)
(2) 8.15 광복절 잊지 말아요(시편146편6-7)
(3)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로마서9장1-3)
(4)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갈5장1-)
(5) 광복과 희년(시126편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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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15 해방과 애국(사48장10, 잠14장34)
<광복절기념주일설교/ 2001-08-15>
성경본문: 이사야48:10; 잠언14:34
이사야48:10
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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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4:34
34.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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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8.15 해방을 맞이 한지 54번째 되는 날입니다. 36년 동안 나라를 빼앗기고 온갖 고통과 슬픔을 당하다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능력으로 나라를 되찾은 날입니다. 그 기쁨도 채 가시기 전에 6.25동란이란 처참한 전쟁을 치르며 이 나라가 폐허가 되고 거지처럼 가난하여 세계에 손벌리고 얻어먹던 나라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 만큼 부강한 나라가 되어 세계를 향하여 선교하는 나라가 된 것을 생각하면 무엇으로 다 감사하고 찬송할지 알 수 없습니다. 36년 동안이나 국토를 빼앗기고 말도 빼앗기고 성도, 이름도 빼앗겼다가 다시 찾게 된 것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계시고 6.25때 부산까지 밀려 내려갔으나 기적적으로 UN 군이 상륙하여 공산군을 몰아내고 이만큼 부강한 나라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말세에 마지막 주자로 선교하는 민족으로 쓰시기 위함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한국의 사명
세계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과 민족을 들어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말세지말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제사장 나라요, 선교의 사명을 부여받은 나라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봅시다.
① 한국은 고난으로 연단 받은 나라입니다.
이사야 48장 10절에 "보라 내가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은 많은 고난으로 연단 받은 나라를 들어 쓰십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요셉의 생에를 보십시오. 누구보다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세계 어느 나라 보다 고난을 많이 받은 나라입니다. 한국은 5,000년 동안 수많은 외적의 침략을 받으며 고난을 당하였고 일본에게 36년 동안 온갖 핍박과 고난과 슬픔을 당하면서도 나라가 망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은 사상 그 유례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동족상잔의 전쟁이었습니다. 부산까지 밀려 내려갔지만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말세에 하나님이 쓰시려는 섭리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② 한국은 약소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소 민족을 택하여 쓰십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우리 한국의 국토 3분의 1 만큼도 안돼는 약소민족이요 인구 몇백만 밖에 안됩니다. 하나님은 크고 강대한 나라에 영적 사명을 맡기시지 않습니다.
신명기 7장 7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개인을 선택하시는 것도 멸시받고, 비천하고, 가난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자를 들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
③ 한국은 신앙이 돈독한 나라입니다.
세계 선교 여행을 다녀보면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힌두교, 모슬렘교, 불교와 짬뽕이 되어서 예수 믿는다는 교회가 참 많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한국교회 만큼 말씀의 기초 위에 서서 제대로 믿고, 제대로 기도하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게다가 인도는 8억의 인구를 가졌지만 힌두교 국가로, 마귀로 꽉 찬 나라이며, 중국은 12억의 인구를 가졌지만 아직도 공산주의 국가이고 인도네시아는 1억의 인구를 가졌으나 모슬렘 국가나 다름이 없고, 일본도 경제력이 있어 보이지만 800만가지 귀신을 섬기고 기독교인은 영점 몇 퍼센트도 안돼는 귀신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100여년 만에 25% 이상의 신자를 가진 나라입니다.
한국에 신학교가 너무 많고 목사, 신학생이 너무 많다고 비난을 받지만 남북이 통일되고 중국에도 마음놓고 선교할 수 있게 되면, 그 많은 목사, 신학생도 모자르게 될 것입니다.
④ 한국은 순교의 피가 많은 나라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 부흥의 씨앗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순교의 피가 많은 나라를 들어 쓰십니다.
시편 79편 10절에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중에 알리소서"라고 했습니다.
순교의 피가 많은 나라를 열방중에 알리시는 하나님입니다. 대원군 때에도 많은 순교자가 나왔고 왜정 때에도 많은 목사와 신도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많이 순교했습니다. 6.25때에는 535명의 목사와 셀 수 없이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말세에 들어 쓰십니다.
⑤ 한국은 기도를 많이 하는 나라입니다.
세계에서 매일 새벽기도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떡 먹듯이 하는 교회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한국처럼 기도원이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시편 50편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아무나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도의 영을 부어 주셔야 됩니다. 스가랴 12장 10절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개인이나, 교회나, 기도하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⑥ 한국은 복음의 열매를 잘 맺는 나라입니다.
마태복음 21장 4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탄생한 나라이지만 2,000년 동안 복음을 빼앗기고 복음은 로마를 거쳐 독일과 영국으로 왔고 그 후 미국을 거쳐 아시아 한국으로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한국만큼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영성이 잘 발달한 나라는 없습니다. 따라서 한국만큼 성령 충만한 나라도 없다고 봅니다. 우리교회만 해도 1971년에 100명에 불과 했으나 이제 머지않아 10만 명에 도달할 것입니다.
⑦ 한국은 셈족의 후예입니다.
창세기 9장 26절에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에게 각각 축복과 저주를 내렸는데 셈에게는 영적인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함은 종의 종이 되는 흑인의 조상이 되었고, 야벳은 백인의 조상이 되어 물질의 축복을 받아 창대케 되었습니다.
⑧ 한국은 선천적으로 하나님의 찾는 나라입니다.
신에 대한 명칭 가운데 한국의 "하나님" 처럼 성경 적인 칭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 즉 유일신을 의미하고 "한" 은 "크신 분, 위대하신 분"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범신론적인 이름이지 기독교적인 칭호가 아닙니다. "하늘님" 즉 막연하게 범신론적 의미가 들어있으므로 "하느님" 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 애국가에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만세"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 선민 이스라엘의 풍습과 사상과 같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 일찍이 이런 예언적인 시를 읊었습니다.
"오! 코리아여!
그대 옛날에 아시아의 황금시절에
밝은 등불의 하나였도다.
이제 그대 등불 다시 밝여라.
그대 온 동방을 비치는 밝은 등불이 되리라\
우리 주위의 여러 나라가 공산화되는데도 지리적으로 가장 취약한 한국은 공산화되지 않았습니다.
2.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으려면
①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대 로마 제국은 외부적인 조건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소돔 고모라성은 의인 10명도 없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해 없어 졌습니다.
잠언 14장 34절에 "의는 나라도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신실하고 정직한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덴마크 나라는 인구 500만에 작은 돌작밭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이지만 지상 낙원이라 할만큼 잘 사는 나라입니다. 그 이유는 그 국민은 정직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그 나라 제품은 시험해 볼 것도 없이 믿고 잘 사갑니다. 여행하다가 물건을 놓고 와도 틀림없이 찾아줍니다.
우리 나라도 정직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준법정신입니다. 선진국민은 준법 정신이 강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탈세라면 큰 죄로 여깁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신자들도 탈세할 수만 있다면 한다고 놀랍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고의를 행하면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했습니다. 공의를 행하고 정직한 사람이 그 많은 사람 중에 하나도 없어서 멸망시켰다는 말씀입니다.
② 책임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위대한 성도들이나 위대한 민족이나 국가는 모두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나라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1-3절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이 땅에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는 발발하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이 민족을 사랑하여 IMF의 채찍으로 징계하심을 깨닫고 온 국민이 각성하도록 기도하고 따라서 무역 흑자가 계속 되어 외채를 갚고 IMF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고 따라서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겠고, 또한 부정 부패가 없어지고 공의가 춤을 추고, 진리가 소리 높여 노래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없어지는 나라가 되기 위해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③ 구령사업에 힘쓰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교회가 부흥하고 국내 복음화와 해외선교에 힘쓰는 나라가 될 때 그 나라는 번영하고 복 받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구라파가 기독교 인구가 그렇게 많으면서도 선교에 힘쓰지 않을 때 바이킹족, 해적들의 침략을 받아 그들에게 끌려간 부녀자들이 전도해서 예수 믿고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이 덴마크, 노르웨이, 스위스 같은 나라들입니다. 재정 러시아에 그렇게 기독교 인구가 많았지만 안일주의에 빠질 때, 공산주의라는 몽둥이로 두드려 부서져 비참한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한 맺힌 소원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 하나라도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조지 화이트필드는 "주여, 나에게 영혼을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을 가져가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으며,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장은 성령세계를 받고 열심히 선교하여 그 모라비안 교도들이 20년 동안 선교 사업한 것이 큰 교단이 200년 동안 한 일보다 더 컸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복음이 필요한 나르는 다 내 나라이다"고 했고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어디서나, 언제나 영혼구원"이라고 표어를 가지고 쉴새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후예들에게 "당신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외에 아무 일도 하지 마시오 그러므로 이 일로 시간을 보내고 이 일로 쓰임 받도록 하시오. 보시오 당신이 얼마나 설교했느냐, 또는 얼마나 많은 일에 관심을 가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최선을 다해 영혼을 구원했느냐가 문제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데려와 회개케 하시고" 라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영국을 무혈혁명으로 구원하기까지 했습니다. 영혼 구원에 힘쓰는 개인, 교회, 국가를 축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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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8.15 광복절 잊지 말아요(시편146편6-7)
성경본문: 시146:6-7
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7.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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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8.15 광복절 기념 주일입니다. 어느 나라 왕이 학자들에게 "인류의 역사"라는 제목을 주며 책을 써오라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연구한 학자들은 상당히 두꺼운 책이된 인류의 역사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책을 본 왕은 "너무 부피가 많구나. 좀 줄여서 쓸 수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학자들이 다시 간추려 썼습니다. 그런데도 왕은 너무도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 네 번 줄여서 쓰던 학자들이 나중에는 단 한 장의 글을 써 가지고 와서 그것이 인류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단 한마디 "고 난"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옳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고난 없는 인간 생활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나 사회나 나라나 어느 곳에도 이 고난과 불행과 비극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에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태도는 그 고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될 수만 있으면 고난과 시련을 피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 파묻혀 있는 보화를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 제일 첫 머리에, <나, 너, 아버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 우리 어머니>라는 말이 나온다면서요???
상당히 가족적이고 평화스럽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옛날 옛날에 우리는 애굽의 노예였었다>라는 말이랍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갈 때부터, 민족교육, 민족의식을 강하게 심어주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이스라엘 사람(유태인)들은 전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다가도 젊은 사람들이 한 몫 거들려고 다 나라 안으로 몰려든다지 않아요. 한데 그 상대가 되는 아랍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국내에 있던 젊은 사람들이 군대에 끌려 나갈까 봐, 다 나라밖으로 나간대요.
이스라엘이 작은 나라인 거 여러분들이 아시지 않아요. 그래도 유럽하고 아랍의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도 큰 소리하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뭐냐???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민족교육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을 잊지 말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신6:12-13).
사람들이 지난날을 잊지 않고 그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역사의 신기원을 교육적인 종교행사로 구별하여 절기로 지키면서 그들의 신앙과 생활의 근간을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어느 때나 희망이 있었고 삶의 용기와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망각증처럼 나쁜 병은 없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의 유랑생활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민족의 혼을 지키고 제2의 해방을 맞은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출해 주신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부귀와 영화를 누릴 때도 이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고 교만에 빠지지 않고 율법/성경을 지키며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을 받은 지 58주년이 되는 8.15 광복절을 맞이하였습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6년 동안 삼천리 강산 2천만 민족을 몽땅 통째로 삼킨 지 날짜로 계산해서 12,771일만에 일본은 한국을 토해냈습니다. 그것이 해방이고, 그것이 8.15입니다. 12,771일 동안 그 사람들이 우리 한민족을 얼마나 짓밟았는지 몰라요. 그걸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인들에게 가한 그들의 살인 만행, 착취, 고통을 어찌 여기서 다 말할 수 있겠어요??? 일본을 위해서 바치라니 어린 것들의 먹을 것까지 긁어가며 바쳤고(그 당시 우리 나라 어린이들의 사망률이 세계에서 제 2위에 해당, 한국 사람의 수명은 44살이었다), 한국 사람이 한국말 하다가 학교 선생에게 걸리면 다리가 부러지게 얻어 맞았습니다(1945년에 보면 문맹자가 77%로, 한글을 아는 사람이 23%에 불과했다. 해방된 이듬해에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분이 더 많아져서 문맹자가 41.3%로 나타나고 1947년에는 29.4%로 급속히 문맹자가 줄어 들었다).
1937년 7월 소위 국민징용령을 공포해서 무력으로 강제 징용된 인원이 480만 명, 전부 젊은 사람들이 징용되어서, 일본 본토와 남양군도 사할린 등지에 강제로 끌려가 노예 노동을 한 사람이 153만 명입니다. 여러분, 숫자를 좀 유념해서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 중 사망자가 속출하면 군사 기밀이라고 해서 가족들에게 죽었다는 통지도 안했어요. 나가노에 있는 어떤 대본영에서 수백 명 집단 학살당했고, 오끼나와 열도에서는 2,000여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이 밖에도 도처에서 집단 학살당한 유골이 여기저기서 나왔어요.
1943년에 이른바 조선여자 정신대를 만들어서 12살부터 40살까지의 한국 여성들을 징발해서 종군위안부로 적어도 20여만 명이 성적(性的) 노리개로 유린당했습니다. 가슴 아픈 얘기죠. 12살이면 초등학교 5, 6학년입니다. 그런 어린애들을 붙들어 내보낸 거예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남태평양 라바울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박옥련씨는 현재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나눔의 집>에서 살고 계십니다.
이분의 얘기속에,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사병을 상대했답니다. 오후 4시부터 7시까지는 하사관을 받았대요. 오후 7시부터 밤 10시까지는 장교들을 받았대요. 그래서 하루에 적은 날에는 20명, 많은 날은 30명 넘게 상대를 해줘야했었답니다. 그러니까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계속! 시간을 따져 보니까 15시간인데요 30명 이상을 상대하려면 30분에 한 사람 꼴, 만일 식사시간을 빼면, 20분이나 15분에 한 사람씩을 상대했어야 됐을 거예요. 12살입니다. 상상할 수 있어요??? 그것이 남입니까??? 우리 누나이고 우리 언니입니다. 이렇게 짓밟힌 거예요. 상상할 수 없는 얘기지요??? 끔찍한 얘기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본래 정조 관념이 세계적으로 이름난 민족입니다. 정조를 생명과 같이 생각했지 않습니까??? 은장도가 왜 생긴 겁니까??? 고려시대, 이조시대에 여성들이 가슴 깊은 곳에 은장도를 품고 다녔습니다. 왜냐하면 욕을 당하게 되면,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자결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은장도를 가슴에 품고 다니는 민족이 한국 여성들입니다. 한국 여성들의 정조는 생명하고 바꾸는 거예요. 춘향이가 왜 유명합니까??? 한국 민족역사에 길이길이 두고 그 사람을 찬양하는 이유가 뭡니까??? 정조를 지켰다는 얘기 아니예요!!!.
1944년 징용제를 실시해서 약 21만 명의 한국 청년들을 강제 징집해서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21만 명 중 살아 돌아온 청년은 약 5만 명, 나머지는 다 죽었어요.
모든 자유와 모든 주권을 뺏긴 채 독재보다 더한 전제정치 밑에서 탄압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그들은 기독교 말살정책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탄압과 말살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만행을 용납지 않으시고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탄(1945년 8월 6일 아침 9시 15분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끼 하늘에 B29 미국 비행기가 나타나 폭탄 3개를 투하)의 크고 무서운 채찍으로 징계하사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누가 이 오만불순하던 일본의 천황의 목소리를 이렇게 낮아지게 만들었으며 떨리게 만들었는가???
공의의 통치자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운행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때 온 국민은 한곳에 모여서 눈물 흘리며 애국가를 봉창하지 않았던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닮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에 (시146:6-7)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주신 8.15 광복절이 만물을 지으시고 세계를 공의로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로 알고 이 시간 뜨거운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요???
이 민족이 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신화에 나오는 단군을 국조신으로 섬기려는 배은망덕한 생각과 행동은 대대에 영원히 버려야 합니다. 아 멘.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지나간 역사를 잊지 말자는 거예요??? 그럼요???
그런데 우리는 과연 우리 역사의 신기원을 이루게 된 이 해방의 사건을 어떻게 재음미하면서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미래의 아름다운 나라를 일구어 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36년 동안 일제의 억압을 잊은 듯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과소비현상에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타락한 오늘의 현실을 우리는 통회하며 새로운 역사의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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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로마서9장1-3)
설교자 : 조재진목사/설교일 : 2010년 8월 15일
성경본문 : 로마서 9:1-3
○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관심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2. (1절에 포함)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출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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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전, 지난 1945년 8월 15일에 하나님은 우리민족에게 “해방”이라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일제 강점시기에 우리 민족과 교회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아픔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날의 감격과 기쁨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과 민족의 정신
우리가 세계역사를 살펴보면, 한 민족이 어떤 신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민족의 정신세계와 그 운명이 결정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은 유교라는 종교의 바탕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중국의 민족정신은 공자와 맹자의 도인 유교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인도인들은 힌두교라는 토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피 속에는 힌두교가 흐르고 있습니다. 베트남과 스리랑카와 태국과 미얀마, 캄보디아는 불교권의 나라입니다. 이천년 동안 이어온 불교라는 나무에 맺힌 열매들입니다. 아랍과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슬람권입니다. 그들의 문화는 이슬람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차이는 여호와 신앙과 알라 신앙의 차이입니다. 영국의 품위와 일본의 품위의 차이는 그 지성이나 경제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사상과 비기독교적인 사상의 차이에서 찾아야 합니다. 높은 인격적인 자아는 높은 인격적인 신관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서민들의 피 속에 기독교 신앙이 흐르고 있는 독일이나 영국, 북구라파의 나라들에서 민주주의가 꽃피고, 현대과학이 나왔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힘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많은 학자들은 미국정신의 뿌리는 청교도 신앙과 서부 개척정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신앙위에 미국이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화폐인 달러에 보면, “In God we trust"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미국의 경제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시14:1에서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만 어리석은 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던 북한 주민들도 불행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는 인생, 하나님모르는 인생이 가장 불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소망은 돈에 있지 않습니다. 권력이나 지식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에게만 희망이 있습니다. 한 개인도 그렇지만 한 민족도 하나님 신앙을 받아들일 때, 그 민족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민족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이 땅에 뿌리내리면서 우리나라는 근대화를 이루었습니다.
몇 년 전 하와이 연합감리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을 때, 잠깐 시간을 내어 하와이를 돌아볼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승만 대통령이 개척했다는 한인교회에 들리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언제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역사 문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문서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회심하게 된 것이 1899년 한성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이었습니다. 그는 배재학당에 들어가서 미국의 많은 선교사들과 서양문화를 접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서구의 학문과 선교사들을 만난 것은 현실적인 활동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배제 학당시절에 선교사님들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해주신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는 평생 처음으로 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옵소서”
그랬더니 갑자기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자신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평안이 깃들면서 자신이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답니다. 그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기도하는 순간, 그의 삶이 변화된 것입니다.
이렇게 옥중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한국 민족을 정신적, 도덕적으로 거듭나게 하려면 기독교 신앙밖에 없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다른 동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도하게 되었는데, 이상재, 김정식, 홍재기 등 독립협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양반 지식인들과 더불어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02년 12월 28일, 감옥 안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기독교 신앙을 기초로 나라를 세우려고 참 많이 애를 썼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군대 안에 군목제도를 설립한 것입니다.
하나님 신앙위에 세워진 나라와 하나님 없는 사상위에 세워진 나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이 다르듯이 한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박정희대통령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씨가 세계를 순방하고 돌아와서는 그 다음 주일에 정동제일교회에 나가 등록했다고 합니다. 세계를 다니고 보니까, 하나님 믿는 나라와 그렇지 않는 나라가 너무 달랐다는 것입니다.
정말 한국교회가 이 민족을 책임질 수 있을까요?
우리 대한민국에 기독교가 들어 온지 125년이 지났습니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습니다만 우리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그 동안 기독교 신앙은 크게 세 단계로 발전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포교의 단계입니다.
1888년의 기록에 의하면 기독교인으로 세례 받은 사람의 숫자가 고작 25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기름부음의 사건이후 1922년까지 기독교인의 숫자는 23만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이 때 일어난 운동이 ‘백만인 구령운동’ 이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아픔인 6.25를 겪으면서 백만 명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포교의 단계에 있어서 수많은 전도부인, 권서가 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신앙부흥의 단계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난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엄청난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주로 사경회 중심으로 복음이 증거된 반면, 이때에는 주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부흥회 중심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저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체험했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에는 기독교인의 숫자가 일천만 명이 되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세 번째 단계는 제자훈련을 통해, 혹은 여러 가지 신앙훈련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믿음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으로 한 가정이 변하고, 도시들과 나라들이 변하는 단계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기독교 문화를 통해 사회와 한 나라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세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 세 번째 단계에 이미 들어섰고, 성도들 한 명 한 명이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드러낼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발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천년 기독교 역사는 이런 방향으로 흘러왔습니다. 물론 지금도 복음도 지속적으로 증거 되어야 하고, 그래서 포교활동을 해야 하고, 또 부흥회를 통한 신앙부흥운동도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정말 한 개인이, 한 가정이, 그리고 도시와 나라들이 변화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 생각에는 아직까지 아닌 것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우리 사회에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나라의 여러 정책에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져야 할텐데... 지금쯤이면, 좋은 그리스도인 정치인이 나와서 한국의 정치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가고, 교육이나 문화, 그리고 사회 각 분야에 우리 주님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워지고,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의 역사가 아직까지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교회의 발목을 붙잡고, 교회의 영적 영향력을 넘어뜨리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병들고 잘못된 신앙, 기복신앙과 성공주의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기심을 가진 성도들, 변화되지 않고 불신자의 욕구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성도들, 세속적인 가치에 너무 찌들린 교회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부도덕한 일들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병들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교회는 세속적인 가치로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목회를 성공이라는 잣대로 보아서도 안됩니다. 교회는 성공이 아니라 성숙을 말해야 하고, 자기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인도의 아버지,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간디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인도인들은 간디를 ‘마하트마’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위대한 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간디는 태양 같은 존재요, 위대한 혼입니다. 요즘 간디의 무덤은 세계 많은 정치인들과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다녀가는 명소가 되었는데, ‘라즈 갓’이라고 불리는 이 기념 묘소의 화강암 벽에는 ‘간디의 망국론’이라고 알려진 ‘일곱 가지 사회악’이라는 그의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간디가 지적한 ‘일곱 가지 사회악’은
첫째, 원칙 없는 정치,
두 번째는 노동 없는 부(富),
셋째는 양심이 마비된 쾌락,
네 번째 도덕적 가치 없는 지식,
다섯째 도덕성 없는 상업,
여섯째 인간성 없는 자연과학,
일곱째 자기희생 없는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간디는 원칙없는 정치를 사회악의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그리고 희생없는 종교도 사회악 중의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간디의 이런 통찰력이 무섭습니다. 저는 목사니까 ‘자기희생 없는 종교’라는 말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종교가 자기희생 없이 자기 배만 채우기 시작하고, 자기만을 알고 이기적이고 기복적이 되면 결코 한 민족과 한 사회를 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회의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간디가 외친 일곱 가지 사회악이야말로 오늘 우리 사회의 현상을 그대로 지적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회악의 으뜸이라는 ‘원칙 없는 정치’는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이요, 희생없는 종교는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국의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성경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하고, 교회가 이 나라와 민족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에 서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그치지 않는 고통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에게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독특하고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민족입니다. 구원의 믿음이 저들의 조상들로부터 전해졌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온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기의 동족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큰 근심,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본문 1-2절, 그리고 3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에 보면, 그는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큰 근심과 고통은 바로 ‘자신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은 비록 이방인의 사도이지만,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어느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자기 민족, 유대인들이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겐 근심거리였고, 고통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말할 정도로 자기 동족이 구원받는 것을 간절하게 소원했습니다. 여기 에 나오는 ‘저주’라는 헬라어 단어는 ‘아나데마’입니다. 이 말은 멸망, 심판, 즉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무서운 멸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이 바로 ‘아나데마’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멸망이 자기에게 오는 한이 있을지라도,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구원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은 자기 생명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동족이 구원을 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강력하게 민족의 구원을 소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바울이 마음이 단순히 편협한 민족주의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민족애는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번영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민족 전체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신앙적인 차원의 민족애,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만 편안하고 무사하겠다는 것, 나만 구원받겠다는 생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대로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망하더라도 ‘나만 잘되는 돼’ 라는 마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가를 의심해 보는 것이 좋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가족이나 자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멸망의 길로 걸어가는데 결코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족들 가운데 아직도 믿지 않는 식구들이 있는데,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정말로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너무 분명한데 어떻게 그냥 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오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멸망의 길로 걸어가는데,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만이 아니라 모세 역시 자기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큰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자손을 진명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 생명을 걸고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하나님, 이 백성이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백성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우리 주님 역시 장차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탄식하며 우셨습니다.
누가복음19:41-42에 보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족인 유대인의 구원을 위하여 탄식하며 우셨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모세의 기도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의 탄식에서 민족을 사랑하는 끓어오르는 애국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민족애, 나라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를 바라는 신앙적인 애국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간혹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정치적인 성향을 가지고 상대편을 비방합니다. 보수니, 진보니... 물론 그럴 수 있지만,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정치적인 입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앙적인 애국심이어야 합니다.
애국하는 믿음
오늘 광복기념 감사 예배를 드리면서,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이 애국심으로 승화되기를 바랍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사랑을 나라 사랑과 동일시했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다 애국자들이었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감리교회는 민족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많은 민족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관순 누나, 이준 열사, 전덕기 목사님, 김구선생님 이분들은 모두가 다 우리 감리교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믿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와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법을 지키고, 국민으로서 모든 의무를성실하게 행하는 것, 납세의 의무나 국방의 의무를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라를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 신앙위에 세워지도록, 우리 민족이 하나님 믿는 민족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애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2:1-2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국회의원 등 모든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나라가 망하면 신앙생활도 바로 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면 교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고요하고 평안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라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간 과거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보았습니다. 6·25라는 동족상잔의 처참한 전쟁도 겪어보았습니다. 그때 우리 민족은 위기였습니다. 교회는 문을 닫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나라의 역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 기도위에 세워진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경의 전기에 보면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일어났던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국회에 모여 매우 중요한 안건을 심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상인 처칠이 앞 의자에 머리를 파묻고 졸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국회의장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일국의 수상이 한 나라의 중요한 의제를 의논하는 마당에 어떻게 졸고 계십니까?” 그때 처칠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졸다니요? 나는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의장이 다시 “아니 하필이면 이런 때 여기서 기도를 하십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처칠이 벌떡 일어나더니 천둥같은 호령을 했다고 하지요 “아니 이때에 기도하지 않는다면 언제 기도하라는 말입니까? 나라의 중요한 일들이 논의되고 있는 바로 이 자리가 기도하는 자리가 될 수 없다면 어디에서 기도하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이때가 바로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시기입니다. 천안함 사건으로 인해 남북한의 긴장이 고조되고 혹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장로 대통령이 국민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상황은 더 어렵습니다. 권력 세습을 위해 북한 주민들을 더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지하교회 성도들을 체포하고 3명을 사형시켰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정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한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블레셋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을 건져주셨습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 믿는 민족이 되도록, 그래서 우리 애국가처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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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갈5장1-)
성경본문 : 갈5:1-
○ 그리스도인의 자유
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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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 된지 64주년이 되는 광복절이었습니다. 해방 된지 5년 만에 6.25전쟁으로 나라는 초토화 되었고, 국토는 분단되고, 부전자원도 없는 지구상의 최 극빈 국이 우리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어제 아침 신문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대한민국 파워 세계 13위”라고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자유의 힘입니다.
지난 7월 18일 “(사)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 사업회”주관으로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제44주기 추모식이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설교한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난 10년간 북한을 6번 다녀왔다.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이승만 대통령께 세 가지 측면에서 고마운 마음을 느끼곤 한다.
첫째, 1948년 8월 15일에 건국하지 못하고 6.25전쟁을 맞았더라면 공산화가 되었을 것이다.
둘째, 자유민주주의를 대한민국의 체제로 선택한 것.
셋째, 북한이 남침하였을 때에 최상의 외교력을 발휘하여 미국과 유엔을 움직이고 국민들의 단합을 이루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신생독립국 150여 개국 대부분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을 따라갔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선견지명으로 대한민국을 공산독재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도입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람들 따라 여러 가지 대답이 있겠습니다만 가장 간결하고 포괄적인 뜻을 담고 있는 답은“자유함을 누리기 위함입니다.”라는 대답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이 오셨습니까?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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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 1절에“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도“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도“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모신 목적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으면 그것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나라 잃은 유태인들이 독일의 히틀러에게 당한 고통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히틀러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유대인 40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는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아우슈비츠가 양적인 면에서 잔악함을 보여주는 곳이라면 중국 하얼빈시 근처에 위치한 일본 관동군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일명 이시이 부대)에서 저질러진 잔악함은 질적인 면에서 인간이 인간에 대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는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일본은 1932년 육군 관동군 소속으로 생화학전 연구를 위해 731부대를 하얼빈에 설립해 1945년 패망할 때까지 치명적인 대량 살상 생화학 무기를 연구하면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극악한 인간 생체실험을 했습니다. 암호명“마루타(통나무)”특별계획은 중국, 한국, 러시아 등 인근 국가 민간인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고, 잔인하게 영아, 노인, 임산부까지 실험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부대를“이시이 부대”라고 하는 이유는 교토제국대학 의과대 출신 군의관 이시이 시로 중장이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해 부대를 운영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대에서 한국인을 포함한 1만 명 이상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일본군은 이 부대에서 살아있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해부, 동상 실험, 전염병 실험 등 30여 가지 생체실험을 했습니다. 마취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장기를 적출하고, 출혈 연구를 위해 팔다리를 절단하고, 그 잘라낸 것을 다른 쪽에 붙여보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뇌, 폐, 간 등을 자라내기도 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화염방사기를 사용하기도 했고, 각종 세균을 주사하고, 벼룩을 이용해 세균을 대량으로 감염시키기도 했습니다.
팔다리를 몽둥이로 내리쳐 골절시킨 후 얼마나 견디는가를 보기도 했고, 영하 50도의 추위에 발가벗겨 밖에서 걷게 했고, 인체 부위마다 피부를 도려내고 콜레라균, 탄저균, 매독균을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또한 목을 매달아 죽기까지의 시간을 쟀고, 신장에 말 소변을 집어넣기도 했고, 극저온과 고압의 방에 마루타를 넣어 관찰하고, 온도와 화상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불이나 뜨거운 물에 넣기도 했습니다. 원심불리기에 사람을 넣어 죽을 때까지 돌리기도 했습니다.
바닷물을 혈액에 직접 주사하여 반응을 살피기도 했습니다. 영하 40~50도의 추위에 발가벗긴 다음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쏘아 몇 명까지 죽는가를 관찰하는 실험도 했습니다. 이러한 생체실험을 위해 베이징, 장충, 난징, 광저우를 비롯해 싱가포르까지 생체실험부대를 만든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731부대에서 배양한 세균을 가지고 세균폭탄을 만들어 하얼빈 근처 마을을 대상으로 생체 피폭실험을 한 뒤, 저장성 닝보, 산시성 허베이, 산동성, 허난성 등에 투하해 많은 피해를 입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균탄이 미군을 대상으로 실전에 활용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렇게 마루타로 희생된 사람의 숫자는 1만 여명으로 추정되는데 중국의 노력으로 명단이 밝혀진 희생자는 1463명이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한국인 희생자는 심득룡, 이청천, 이기수, 한성진, 김성서, 고창율 씨등 6명입니다.
인간백정 이시이 시로가 전후 도쿄 국제군사법정에서 밝힌 마루타는 총 3850명으로 그 가운데 중국인 3034명, 러시아인 562명, 한국인 254명이라고 했습니다.
더욱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731부대에 근무했던 많은 사람들은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며 눈물로 용서를 빌었지만, 정작 책임을 져야할 왕이나 일본총리는 이 부대의 존재와 만행에 대해“그런 일 없다.”는 말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 없는 나라, 자유 없는 인간의 처지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생명입니다. 자유 없는 삶은 삶이 아닙니다. 이 자유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1. 육신의 자유는 공짜가 아닙니다.
오늘 설교제목“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것은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기념 공원에 새겨진 문구입니다. 이 공원에는 한국전 참전 군인들이 판초 우의를 입고 행군하는 군인들의 동상이 있고, 비문에는 “우리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나라의 자유를 위해 달려갔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딸과 아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는 글과 함께“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The freedom is not free).”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독립투사들이 피를 흘렸습니까?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습니까?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대항하여 싸우다 죽은 연합군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우리들이 누리는 자유가 있기까지 독재와 싸우다 피를 흘린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처럼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피를 먹고 자란 오늘의 자유를 길이길이 누리며 후손들에게 값진 유산으로 남겨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려면 역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날 역사를 잊으면 아니 됩니다. 같은 일이 되풀이 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염려스러운 것은 우리는 역사를 너무 쉽게 잊는 것 같습니다. 행정안전부 등 각종 여론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56.6%가 6.25가 언제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답했고, 중,고생의 절반 이상이 북한의 남침인 것을 모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심지어 육군사관학교 신입생도의 34%가 우리의 주적이 미국이라고 답한 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몇 년 전에 인천 자유공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6.25동란에서 우리나라를 건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야단한 적이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통일의 방해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의식을 유태인에게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에게 600만 동포가 희생당한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까지 종려나무 600만 구루를 가로수로 심어놓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바드야샘이라는 600만 동포의 희생자 추모관을 세워 놓고 해마다 유치원 어린이들부터 모든 학생들로 하여금 그곳을 찾도록 하여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에 대한 최후의 항전지인 사해가 내려다보이는 요새 마사다에 중학생 이상의 학생들은 1년에 한 차래씩 반드시 그곳을 찾도록 하여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우리 역시 잊으면 아니 됩니다.
2. 영적 자유도 공짜가 아닙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자유를 빼앗기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자유는 누리거나 잃든지 하더라도 그 자유는 이 세상에서의 한정된 자유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자유는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원한 자유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영혼의 자유를 얽어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탄의 미혹으로 범한 죄악입니다. 이 죄악이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이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고자 즉 영원한 자유를 주시고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거룩한 피가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야할 영적 자유란 어떠한 것입니까?
1) 탐심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모든 죄악의 뿌리에는 탐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탐욕입니다. 죄의 근원에 대해 야고보서 1장 15절에 말씀하시기를“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탐욕을 부리지 않고 하나님의 마씀을 따라 살아가도 풍성하게 누리는 축복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1절~7절에 말씀하시기를“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하셨습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충동이 있습니다.
소유에 대한 충동,
향락에 대한 충동,
창조에 대한 충동이 그것입니다.
대개 우리가 자유를 얻으면 소유에 대한 충동을 느끼게 되고 향락을 누리고자 하는 충동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소유와 향락에 대한 탐심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리고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지갑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스스로 절제하고 자제하는 삶입니다. 탐심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성공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모두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우상숭배의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누리던 자유마저도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셨습니다.
북한의 공산당 치하에서 고생했던 김선도 목사님의 경험담입니다.
“그 당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의 자유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니까 밤에는 캄캄한 지하실에서 모여 서로 아는 찬송가를 부르고, 아는 성 구절을 외우연서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고 부르짖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유엔군의 참전으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너무나 감격하여 흰옷을 입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백화점과 소비조합의 관리를 맡았던 공산당원들이 모두 철수하자 기독 청년들이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유를 얻고 나니까 사람들의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좋아보였던 어떤 사람은‘오늘 저녁에는 예배를 드리지 말고 백화점에 가서 쓸 만한 물건들을 가져옵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어머님이 그 말을 듣고‘우리가 자유롭게 예배드리기 위해 그토록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는데, 이제 와서 예배는 안보고 물건을 가져오자니 도대체 이게 웬말입니까? 우리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기어코 백화점으로 가서 물건들을 잔뜩 가 져다가 쌓아 놓았습니다. 그 후에 저는 그들의 생활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탐심의 노예가 되어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아니하고 재산도 모으지 못하고 자식도 잘못되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4장 2절에“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탐심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때에 우리는 내적인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탐을 낸다고 하여 얻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탐욕이 아니라 도리어“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하셨습니다.
2. 두려움과 절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믿을 때에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두려움에서부터 자유를 얻어야만 참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로버트 앤드류라는 사람이 말하기를“인간이 불안하고 불만족해 하는 것은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 한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했을 때는 언제나 불만족스럽게 살아가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의지할 때에 우리의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8장 32절에도“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셨습니다. 참 진리를 마음에 가진 사람은 참으로 자유한 사람이요, 진리 안에서 두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8.15 해방 직후, 일본 헌병들이 귀국하자 북한 어느 동네에 청년들이 치안대를 조직하여 마을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갑자기 중국의 마적 떼가 몰려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다 두려워서 산으로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마적 떼가 아니라 신의주에 갇혀 있던 우리의 애국지사들이 고향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두려운 마음이 있으면 조그만 일에도 두려워 떨면서 용기와 의지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930년대, 미국에 경제 공황이 일어났을 때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불황에 대한 두려움보다 두려움에 대한 생각이 더욱 두려운 존재이다.”외적으로 닥치는 불안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 불안한 공포심을 갖는 그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내 생명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나를 위탁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믿게 될 때에 두려움에서의 참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3). 절망의 위기에서 얻는 자유입니다.
삶의 위기에 처할지라도 인내와 투지를 가지고 쉽게 포기하지 않을 때에 참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최대의 전략은 우리 스스로가 낙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월남은 무기나 군인이 부족해서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월남 국민들 마음속에 이젠 그만 포기하자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유를 잃고 보트 피플(boat people)이 되어서 이리저리 표류하는 불쌍한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고통스럽지만 눈물로 씨를 뿌린 사람은 때가 되면 기쁨으로 단을 거둘 때가 오는 것입니다. 소망을 굳게 잡고 인내하며 쉽게 낙심하지 아니하고 노력할 때에 축복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자유의 날이 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빅토르 프랭클린이라는 유태인 정신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군 게슈타포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다 빼앗긴 채 동족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말하기를“어떤 핍박이라도 그것에 항거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을 수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나치들이 자기를 박해한다 할지라도 그 박해에 항거하는 자신들의 자유만은 빼앗지 못한다고 하면서 끝까지 그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어느 가정에 소아마비로 허리 아래를 전혀 쓰지 못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그를 어디든지 업고 다녔습니다. 교회에도 늘 업고 다니며 열심히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교회 목사님을 찾아와서 아들의 장래에 대해서 의논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권면하기를 “그 어머니에게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 아들로 인해 집사님 댁이 복을 받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아들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공부하여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휠체어가 아니면 한 발자국도 갈 수없는 아들은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가 고희동 교수입니다. 그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절망하지 아니하고 끝내 자유함을 얻은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자유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자유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오늘의 자유를 우리들은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지난날 우리민족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를 잊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자유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잘 받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탐심의 유혹을 이기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풍성함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두려움과 절망을 이기고 승리의 자유함을 누리기시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셨기 때문입니다.
펴온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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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광복과 희년(시126편1-)
< 광복절기념주일설교>
성경본문 : 시126:1- 6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시85:1, 행12:9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욥8:21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사43:19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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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쇠사슬 풀리고/ 자유의 종소리 울린다/
우리의 가슴에 눈물이 샘솟고/ 우리의 강산에 새 봄이 오던 날/
아∼ 동무야, 그 날을 잊으랴/ 우리의 생명을 약속한 그 날은/
8월 15일/ 8월 15일/.....
이 노래는 제가 12살 되던 해에 우리 학교와 마을과 고을의 아이들과, 청년들과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목이 터저라고 불렀던 8.15 해방의 노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꼭 50년 전의 노래였습니다. 사실상 그 때 우리는 처음에 큰 의미도 모르고 부르기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저희가 일본 학교에서 서러움을 받고 교육받던 일을 새로 깨달은 후에는 이 노래가 저희 어린 가슴들에게 정말 감격이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8.15 노래가 해방 기념절을 맞이할 때마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정에서 불려졌다고 생각됩니다.
광복(光復)이란 말은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관계되어 1940년 중국 중경(重慶)에서 조직된 광복군이나, 또 국내외 여러 곳에서 조직된 광복단, 광복회 등의 이름들이 우리들의 기록에 남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광복절이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므로써, 우리 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빼앗긴 국권을 되찾은 날을 기념하는 날을 뜻합니다. 아울러 그로부터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기 위하여 제정된 기념일로 되었습니다.
’희년’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한 여러 축복의 절기들 가운데 최대의 절기를 뜻합니다. 이것은 7년 안식년을 일곱번 지난 다음해가 50년 되는 해인데, 히브리말에 요벨( )이고 헬라말은 아페세오스 세마시아( )로 번역되었는데 그 본래의 뜻은 ’면제의 표’ 혹은 ’면제 년’의 뜻이 있습니다.
이 50년이 되는 해는 1년 동안 모든 토지를 쉬게 하고 그 해 모든 땅에 파종과 수확을 중지하고, 자연 생산된 농산물은 그야말로 나그네와 모든 짐승들의 것이 되게 하였습니다. 모든 히브리인의 집에 살고 있는 종들은 자유인으로 되돌려 보내고, 팔렸던 땅도 본 주인에게로 되돌아오고,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해 7월 10일은 대속죄일로 정하고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어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50년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외의 해로 삼으라고 하였습니다(레25:8-17).
우리는 이러한 내용들의 배경을 갖고 우리 민족과 교회가 맞는 8.15 절기를 ’광복 희년’이라는 제목을 정해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설교의 제목은 분명히 정치적인 의미도 있고, 기독교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됩니다. 광복 희년은 해방 50주년의 해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Ⅰ. 광복 희년은 국권 회복의 민족사적 경사를 기억나게 합니다
사실상 우리나라 역사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국치년(國恥年)(1910. 8. 29)이래 36년간,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 나라의 국권(통치권, 국토, 국민)이 송두리채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망국의 비운을 씹었습니다. 이 어간에 우리의 역사는 절단이 나고, 문화와 예술과 전통은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세계 패권주의 망상은 날로 득세하기 시작하여 저들은 마침내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일본이 이른바 대동아 전쟁을 일으킨 후 이 땅과 이 나라 백성은 완전히 전쟁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을 기하여, 드디어 일본은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게 되고, 이 나라는 36년만에 광복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8.15 해방은 이 나라 민족사적 입장에서 볼 때 첫째로, 국권 회복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이씨조선(李氏朝鮮) 500년의 기나긴 왕조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셋째로, 자유 민주주의를 국시(國是)로 하는 새로운 국호(國號) 대한민국이 탄생하는 새 시대의 장(章)을 열었습니다.
해방 후 약 3년간에 넘도록 미 군정하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될 때까지(1948. 8. 15) 우리 나라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의 혼란기를 겪었습니다. 그 혼란기의 내용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의 대결이었습니다. 그 결과 끝내 남북이 양단 된 반 쪽 정부 수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후 자유당 이승만 정부의 장기 집권의 독재와 6. 25사변, 그 후 민주당 장면 정부의 9개월 정치의 무능, 그로 인한 박정희 군사혁명 정부시대, 그것을 이어가던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 그리고 다시 문민정부 시대를 맞은 오늘의 김영삼 정부에 이르기까지 5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비록 반쪽의 땅에서나마, 우리는 50년간 온갖 역경과 수난 속에도, 주권국가로서 민주주의를 국시로 세계 열강과 함께 공존하여 왔습니다.
Ⅱ. 광복 희년은 수난 종교인 기독교 신앙의 승리를 맞는 경사입니다
저는 일찍이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은 ’20세기 극동 아시아의 새 출애굽’이라고 하는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의 군국주의 압제 아래에서의 자유와 해방이요,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저 무서운 일본의 소위 ’천조대신’ 이른바 ’태양신의 아들’ 숭배에서 해방을 받은 신앙자유입니다.
일제 36년간의 탄압 아래 한국의 기독교는 이중 수난을 겸하여 받았습니다. 그 하나는 국권을 빼앗긴 동족으로서 함께 받은 민족적 수난이요, 또 하나는 기독교 신앙의 이유 때문에 받는 특수한 수난이었습니다.
일본이 한국기독교에 가한 신앙 압제의 정체는 이른바 신도(神道)(the shinto)입니다. 이 신도는 일본의 토착적인 미신종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저들이 이름 붙인 이른바 ’가미’란 말이 ’신’인데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실제로 그 수는 무한이고, 일반적으로 8만으로 추산되는 많은 신을 모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신(가미)은 ’영(靈)’인데 만물은 다 영을 가졌다고 하므로, 실제로 신도는 범신론적인 자연숭배였습니다. 이 영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경배(숭배)를 통하여 저들은 복을 받는 다고 믿었습니다. 일본의 천황(天皇)은 , 그 중에도 태양신의 직계이기 때문에 마땅히 경배의 대상으로 숭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 천황은 현인신(現人神)으로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연 숭배 사상에서 발전하여 조상 숭배의 사상이 생기게 되어 일본인의 가정마다 ’가미다나’라는 신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화 하는데는 이러한 신도(神道)사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일본은 이 땅 전역에 신사를 짓고, 우리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한국 백성에게 강요한 신사참배입니다. 저도 일본학교에 다니면서 매일 매일 학교에 등교할 때와 하교할 때 동쪽에 만들어 놓은 동산 가운데 ’신사’ 앞에 가서 두 손을 모으고 세 번 합장하고 절을 하는 신사참배를 하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만들거나, 절하지 말라고 하신 성경의 계명을 믿는 기독신자들에게는 큰 사탄의 정체였습니다.
그래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운 한국의 모든 기독교 학교와, 교회, 신학교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순교적 신앙의 항쟁이었습니다.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기독교 학교들은 결국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목사들에게는 강단에서 추방령을 내리고, 함구령, 금족령을 내렸습니다. 주일예배 시간을 제한하고, 주일 근로동원으로 예배를 방해했습니다. 나중에는 목사가 교회 앞에 행할 설교와 찬송까지 간섭을 하였습니다.
끝까지 항쟁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투옥을 시키고, 국외로 추방을 시켰습니다. 맨 나중에는 한국에 있는 여러 교파들을 통폐합하여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으로 노속시키고 말았습니다(1945. 8. 1).
미국 장로교 외지 선교 보고에 의하면 이러한 핍박 때문에 당시 5,000여 곳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중에서 1,200여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2,000여 신도가 투옥이 되고, 50여명의 종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는 아픔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70만을 헤아리던 프로테스탄트 교회 신자의 수는 그 반으로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1945년 8월 18일을 기하여 한국 전역에 산재하는 기독 신자들을 진멸 할 계획을 세워 놓고 은밀히 진행 중이었음이 해방 이후 저들의 비밀문서에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그루터기를 남겨 주시기 위하여, 택자를 위하여 환난의 날들을 감하사 3일전에 일본을 심판하고 항복하도록 역사를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떨어트려 연합군에게 항복하게 만든 것이 그 해 8월 15일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날 8월 15일은 하나님이 이 땅에 해방을 주시던 그 날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 마치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저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저들의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대사(大事)였습니다.
시온의 영광은 빛이 나고, 매였던 종들은 감옥에서, 암혈에서, 토굴에서, 외국에서 되돌아오는 신앙 자유의 축복이 오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교회당 종탑 위에 종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전쟁 도구를 만들기 위하여 예배당의 종을 떼어 가고, 우리 백성들의 집에 있던 모든 놋그릇, 은그릇을 다 빼앗아 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쇳소리가 울리는 종소리보다는 신앙양심이 진동하는 감사와 감격의 소리는 더 진하고 아름답고, 거룩했습니다. 어떤 경우든 8. 15해방은 이 땅에서 수난 받던 기독교의 최후 승리를 알려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III. 광복 희년은 복음의 나팔소리를 크게 불러야 할 새 출발의 신호였습니다.
해방을 받은 이 땅의 백성은 결코 행복하지를 못했습니다. 잃어버렸고, 빼앗겼고, 없어져 버린 모든 분야는 그야말로 황무지요, 허허벌판 같았습니다.
남북이 양단 되는 이데올로기의 분쟁을 위시하여, 남한만의 정부수립, 경제 재건, 교육재건 등.....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만 되는 우리들은 그 어느 분야, 그 어느 사건 하나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다가 1950년에 일어났던 6. 25사변은 이 강산 전부를 초토화시키고 말았습니다. 3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참상은 문자 그대로 비참 뿐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이승만 정부의 장기독재, 장면 정권의 무능, 그로인한 장기적인 군사혁명의 공포정치가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놀라운 기적이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6. 25 비극을 통하여 수많은 순교자가 다시 생겼습니다. 그 전쟁의 비극 속에서 오히려 이 나라 방방곡곡에 교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군사 혁명정부의 공포정치는 그의 반기독교회적인 성격이 농후했습니다. 경제적인 곤경이 우리를 슬프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배당이 비온 뒤의 죽순처럼 일어났습니다. 한 때 이 나라의 유행어 중에 ’섯다하면 예배당’이고 ’생겼다 하면 다방’이라고 하는 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만도 4만이 훨씬 넘고, 1,000만이 넘는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외국에서든지 한국인이 사는 곳에는 교회가 서게 됩니다. 이 나라 각계 각층에 복음증거의 단체들이 파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근년에 와서 한국교회는 마음과 눈을 열어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계복음화 운동을 위하여 선교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지금 비 공식 통계에 따르면 평신도 선교사까지 합치면 8,000여명이 넘는 이 땅의 크리스챤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서 예수 복음의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확실히 광복 희년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확실하고 분명한 역사의 표징은 광복 희년 50년간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늘의 반시동안 고요한’ 어간이었습니다(계8:1). 그렇다고 광복 희년의 어간이 결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교육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태평성대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엄청난 진통 속에서 우리 한국 교회는 신앙과 예배와 전도와 선교의 자유를 누리면서 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도 이 나라가, 비록 반쪽이지만 문민 민주시대를 꽃피웠다는 자체는 한국이 받은 정치적 이적입니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기독교인들의 교회성장과 함께한 영의 이적이요, 복음의 이적입니다. 2,000년 기독교 선교 역사상 지난 50여년 동안 한국 기독교회가 받은 축복은 가히 기록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미증유 축복이요, 이적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아직까지 응답 받지 못한 한국교회의 소원이요,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문제 앞에 확실한 확신과 사명을 가집니다.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의 주역을 감당할 종말론적인 사명의식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은 이 놀라운 세계선교 사명의 진행을 위하여 조국의 통일까지 허락하고 말 것입니다.
결코 존재하는 세계와 세계역사는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주장하는 사람들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는 구속운동의 수단으로 사람들의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마24:14).
그러므로 사실상 이 나라의 장래는 민주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알고 보면 교회와 교회가 받은 사명 수행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광복 희년의 역사적 의미를 바로 새기고,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의 나팔을 크게 부는 희년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 아멘 -
석원태 목사/ 경향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