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해설
서정적 자아에서 창출하는 시적 진실
--김효진 시집 『새벽 별을 걸고』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1. 자아 인식에서 성찰하는 “나”의 존재의식
현대시의 창작에서 시인들이 먼저 착안(着眼)하는 것은 대체로 시야에 펼쳐진 자연 풍광이나 삶의 현장에서 생성하는 다양한 형상들과 상응(相應)하면서 거기에서 감성적으로 추출한 이미지가 언어를 통해서 분사(噴射)되는 시인의 진실의 한 부분에서 중점적으로 몰입하면서 한 편의 작품을 창작하는 시의 위의(威儀)를 살필 수가 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을 시학(詩學)이나 시법(詩法)에서는 외적인 보여주기(showing)에서 내적인 들려주기(telling)로 변화해서 상호 융합으로 하나의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 시창작의 진수(眞髓)라는 것이 보편적인 강론이다.
여기 김효진 시인의 첫 시집 『새벽 별을 걸고』를 일별하면서 이러한 논지(論旨)를 먼저 살피는 것은 김효진 시인의 작품들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형상들이 바로 먼저 제시한 시법에서 다채롭게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시 읽기에 감응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통해서 발현하는 미적세계의 공감으로 우리 인간들의 삶에서 영원한 진실을 탐구하는 것으로서 일찍이 영국의 시인 워즈워스가 말한바와 같이 “시란 힘찬 감정의 발로이며 고요로움 속에서 회상되는 정서에 그 기원을 둔다. ”는 정의에서 시가 제시하는 메시지들은 바로 인생관이나 가치관 형성에 크게 기여하는 기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그의 작품에서 자신을 어떻게 발견하고 아직도 미확인인 인식의 세계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존재의 의미를 재조명해 보기로 하자.
모진 추위 이겨내고
봄볕 마당가에
비로소 눈을 뜨는 연녹색 향연
맨발로 걷는 산길에는
그들의 속삭임 들려온다
한 때는
보고도 모르는 청맹과니로
한 때는
듣고도 알지 못하는 귀막쟁이로
수십 년 살았는데
이제사 들리네
꼬막손 연초록 잎새
눈뜨고 기지개 하면
저도 모르게 손을 쭈쭈 내민다는 것을
어서 자라서
폭양의 강 건너
달빛 쏟아지는 가을 달밤에
화려한 단풍으로 온 산 불태운 뒤
귀밑머리 희끗 해서야 알게 되었다
천지를 뒤덮는 함박눈은
차라리 고요하다는 것을.
--「녹음」 전문
김효진 시인은 우선 외적인 사물 “녹음”에서 자신의 감정을 이입(移入)해서 자기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외적 사물과 내적 관념의 상호 보완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최상의 시법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연녹색 향연 녹음에서 먼저 “그들의 속삭임 들”을 수 있는 예지(叡智)가 생성하고 “한 때는/ 보고도 모르는 청맹과니로/ 한 때는 / 듣고도 알지 못하는 귀막쟁이로/ 수십 년 살았는데/ 이제사 들리네”라는 어조로 자아를 인식하는 계기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결론으로 적시한 바와 같이 “달빛 쏟아지는 가을 달밤에/ 화려한 단풍으로 온 산 불태운 뒤/ 귀밑머리 희끗 해서야 알게 되었다”는 인생 연륜이 이만큼 흐른 뒤에 비로소 자아를 명징(明澄)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그의 사유(思惟)의 정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간과(看過)할 수 없는 그의 사유는 모진 추위와 봄볕 마당가에서부터 폭양의 강 건너 가을 달밤 그리고 화려한 단풍이라는 사계절이 바로 한 생명의 과정이 “귀밑머리 희끗 해서야”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실감하게 되는 인식의 정감을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 가니 내 시계도 병들었다
영욕을 함께 한 시절
낡고 병들어 원인 모를 고장이라
병명도 같다
지난해 입춘 무렵 코로나로 묶여버려
세월도 비틀 거린다
사람들과 차단된 채
밀폐된 공간에서 기약 없는 석방 기다리며
세월을 죽이고
나 또한 죽이고 있다
토막 나고 도둑맞은 세월의 한 토막
어디에서 찾을까
잃어버린 세월은
누가 채워 줄 것인가.
--「가버린 세월」 전문
다시 김효진 시인은 “나”에 대한 인식의 강도(强度)를 한층 업그레이드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세월이라는 외적인 무형의 형태에서 자신의 정서를 이입시키는 시법을 이해하게 되는데 세월과 “내 시계”가 상보(相補)하면서 해법을 탐구하는 시적인 전개에서 그의 인식은 바로 시계가 고장나는 것과 같이 나도 “영욕을 함께 한 시절/낡고 병들어 원인 모를 고장”이라는 스스로의 병명을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난 날 코로나로 온 세상이 삭막할 때 그는 “밀폐된 공간에서 기약 없는 석방 기다리며/ 세월을 죽이고/ 나 또한 죽이고 있다”라는 절망의 시간에서도 “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인식은 더욱 가멸차게 “어디에서 찾을까” 또는 “누가 채워줄 것인가”하고 스스로를 자책(自責)하거나 성찰하는 어조로 작품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에 대한 인식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집을 보고/ 혼자 술을 마시지만/ 나도 유유자적 외롭지는 않다.(「고독」 중에서)”거나 “다 시친 이불 걷고/ 일 끝난 저녁 무렵/ 방구석 실뭉치에 묻혀 있던/ 나는 바늘도 아닌 골무였음을(「골무」 중에서)”, “나도 한때는 거친 세상을 견뎌온/ 저 나목(裸木)이었으리.(「나목」 중에서)”, “나를 낯설게 하던 거울 앞에서/ 창문의 눈을 털어내며.(「거울」 중에서)”, “누구나 그렇듯 / 나 또한 몽상가였다/ 숨 막히는 척박한 환경/ 몽환 중 비치는 환상을 좇아/ 일탈을 꿈꾸며 견딘 시절이(「꿈」 중에서)” 그리고 “언젠가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멍한 눈/ 모두가 빠져나간 빈 마당/ 적막에 쌓인 바람만 분주한데/ 나만의 성찬을 준비하는데/ 눈물이 흐른다(「그런 줄 몰랐다」 중에서)”는 등과 같이 나에 대한 그의 집념은 영원한 탐구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2. 불망의 은혜의 재생과 사모곡
김효진 시인에게서 다시 눈여겨 보아야할 작품들은 모정(母情)에 대한 불망(不忘)에 대한 회상을 통한 효심(孝心)의 상기로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또다시 어머니와의 정감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인들은 어머니에 대한 정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해 보지 않은 시인은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의 생명을 탄생시킨 모태(母胎)로서의 한없이 지엄(至嚴)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지극한 사랑의 원류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 창출은 시간과 공간성을 두고 재생하거나 사유의 지향점을 다시 투영하는 시법을 읽을 수 있는데 시간은 아시는 바와 같이 생전이냐, 사후(死後)냐 하는 문제이다.
그는 작품 「유월」 중에서 “한참 동안 조용하여 들여다보면/ 세상모르고 잠든 나/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라는 어조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유월의 이미지에서는 6.25 전쟁의 포화(砲火) 속에서 “핏덩이 싼 포대기/ 삼십 리 길을 걸어/ 본가로 피난 간/ 어머니”가 “잠든 나”를 들여다보는 생전의 상황에서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작품 「유월 하늘」 중에서도 절실한 애환(哀歡)의 모정으로 전개하고 있어서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그리고 작품 「그리움」 중에서도 “지난번 다회(茶會) 모임 이후 건강은 어떠신지요.
제가 출가 이후/ 뵙지 못한 속가의 어머님 소식 듣고/ 며칠째 잠 못 이루고/ 정진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라는 당시의 진솔한 그리움이 적나라하게 현현되고 있어서 생전에 돈독했던 모정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후덕한 인상에 자애롭던 어머니
푸근한 엄마 품도
가끔은 아픔이었다
오래전 떠나셨지만
다 하지 못한 미안함
그래서 시(詩)를 쓴 지 십 년 토록 부르지를 못했다
새벽녘 어느 날에도
저녁노을 붉어가는 어느 날에도
꿈에라도 만나면
마음 다소 덜어질 텐데
무에 그리 번잡하고 걸리적거려
제대로 챙기지를 못했는지
아직도 닦아드리고 싶은
어머니의 눈물
꿈으로만 차오른다.
--「모정(母情)」 전문
이 모정은 어머니가 생전에 베푼 사랑을 사후에 못다한 아쉬운 효심으로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회상하는 어머니는 “후덕한 인상에 자애롭던 어머니/ 푸근한 엄마 품도/ 가끔은 아픔이었다”는 모정의 원류에서 정감하는 애절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오래전에 떠나신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미안함에 지금 참회(懺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꿈에라도 만날 수만 있다면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리고 싶은 효심은 “꿈으로만 차오”르고 있어서 안타까운 심려가 그의 간절한 기원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심연(深淵)에 잠재한 모성애에 대한 천성불멸(天性不滅-임어당의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인 이어령 교수도 “어머니에게는 잔잔한 물결같은 사랑만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향수가 서려 있다. 정신적 고향인 어머니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과 같이 김효진 시인도 사모곡(思母曲)에 대한 불망의 간절한 효심을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별고 없으셨나요
화는 아직도 풀리지 않으셨나요
가신지 스무 해가 되도록 기별 한번 없으니
기일이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신 큰이모 편에 소식은 들었지만
제게는 아무 기별 없으시니
아직 화가 풀리지 않으셨나 했습니다
올해도 모란은 가득 피어
씩씩하게 자라는데
새까만 고목에도 봄꽃들 환하게 피어
꽃보라로 날리는데
가시고 난 후
해 저무는 동구밖에서
까까머리로 매일 기다리는 꿈을 꿉니다
저도 아버지를 용서했습니다
이제는 두 분 초심으로 돌아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시길.
--「어머니 전상서 」 전문
일찍이 우리의 김남조 원로시인도 「그 먼길의 길벗」 중에서 “어머니! 이렇게 부르면 지체없이 격렬한 전류가 온다. 아픈 전기이다. 아프고 뜨겁고 견딜 수 없는 전기”라고 했다. 김효진 시인은 이처럼 극락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때늦은 편지를 보내면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제게는 아무 기별 없으시니/ 아직 화가 풀리지 않으셨나 했습니다”는 어조로 보아서 생전에 아버지와의 약간 불화스런 일들을 모두 용서했으니 “이제는 두 분 초심으로 돌아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시길.” 자식으로서 간절히 화해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애원(哀願)의 편지가 저승까지 도달해서 이제는 평안한 영혼으로 영생하기를 지극한 정성으로 간곡하게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작품 「달의 의미」 중에서 “세월 지나 늙어서 보니/ 사랑과 배려가 얼마나 어설펐는지/ 자유로운 지금에야 후회로 느껴져/ 원 없이 효도를 하고픈데// 좋은 병원/ 좋은 음식/ 좋은 여행 / 해드리고 싶은데// 그래서 달의 뒷면 수심까지 / 말끔히 걷어내 드리고 싶은데.”라는 그의 효도를 충심(衷心)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3. 친자연과 서정적 자아의 형상화
김효진 시인은 자연을 사랑하는 서정시인이다. 시야에 펼쳐진 만유(萬有)의 자연을 모두 자기의 소유인양 자연과 소통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자연인의 심성으로 만물들과 친교하면서 그들이 내뿜은 향기에서 그들과의 진지한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누구나 친자연적인 여망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겠으나 특히 시인들은 자연 현상들이 계절의 순환에 따라서 그 모습이 변화하면서 우리 인간들에게 띄우는 묵언의 향연(饗宴)은 언제나 위대하고 거룩한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어서 우리 시인들은 누구나 자연현상을 노래하지 않은 시인은 없었다.
일찍이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은 “자연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신학(神學)까지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그로부터 배우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연을 깊이 존중하는 사람들”이란 말로 친자연의 범주(範疇)에서 생활하는 온유(溫柔)한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시인들의 노고는 경하(敬賀)할만한 일일 것이다.
달이 떠야만 볼 수 있는 게 너였구나
한낮 열기 식어가는 해어름
비로소 꽃잎 열고 미소 짓는 너
반백 년 넘는 시간
까마득히 잊고 지낸 세월
헤아리지 못한 마음 미안하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긴 밤 눈물과 회한
꽃향기 흐드러진 제방 둑에서
손잡고 물어봐야겠다
왜 그리
그리워했는지.
--「달맞이꽃」 전문
김효진 시인은 먼저 광야(曠野)에 산재(散在)한 자연의 풍광에서도 꽃에 대한 심경(心境)이 대단한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봄이면 지천으로 아름다운 소식과 동시에 계절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꽃에 심취하고 그들과 많은 교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밤에만 피는 “달맞이꽃”에서 시선이 멈춘다. “한낮 열기 식어가는 해어름/ 비로소 꽃잎 열고 미소 짓는 너”와의 대화는 “기약 없는 기다림에/ 긴 밤 눈물과 회한‘이며 ”왜 그리/ 그리워했는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달맞이꽃의 꽃말은 기다림이지만 그는 “반백 년 넘는 시간/ 까마득히 잊고 지낸 세월/ 헤아리지 못한 마음 미안하다”는 어조에서 얼핏 수긍할 수 있듯이 그 기다람은 누군가에 대한 애절한 사연이 내포된 한편의 고백적인 사랑시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그가 심오(深奧)하게 도취한 화훼류(花卉類)에 대한 의미 부여는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연분홍 치마폭에 지리산 진달래 계곡 헤매고 헤맸다(「진달래」 중에서)
-하려한 치맛자락 날리다가/ 수상한 시절 바람에/ 꽃무리로 날리는 꽃(「벚꽃」 중에서)
-해가 기웃한 늦은 오후/ 산안개 마을로 내려와/ 종탑을 감싸 안으니/ 종소리 은은히 가라앉 는다(「들국화」 중에서)
-너는 한때 흑장미였다가/ 짙은 흑갈색 코스모스였고/ 깊은 가을볕 아래 구절초이기도 했다 (「코스모스」 중에서)
-억새꽃 만발한 능선/ 해원 향해/ 나지막이 부르던 이름(「바람」 중에서)
-길고 긴 겨울/ 매서운 추위를 지마 만나니/ 기쁨 더 새로운 꽃잎이다(「목련」 중에서)
그리고 김효진 시인이 자연 서정에 몰입하는 것은 시간성 곧 계절적인 감응(感應)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사계결 춘하추동의 변절기(變節期)에 따라서 그 모습을 변화하는 섭리(攝理)에서 그는 다시 다채로운 자연현상을 목도(目睹)하고 서정적인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빈 들녘 연 사흘째
비가 내린다
이 비 그치면 모두 떠날 것인데
낙엽도 가을의 흔적도
마지막까지 남은
가지 끝 붉은 감도
서리 내린 하얀 아침에
헤픈 웃음지며 널브러지겠지
건너마을 느티나무 집 늙은 과수댁
길다란 장죽 물고
씨부럴 징허게도 오는구마이
서늘한 한기 어깨 추스르며
가느다란 흰 연기에 추연한 넋두리
보름 전 산으로 간 작은 아버지
콜록 기침 입에 물고
아따 씰데 없이 마이도 오네
나락 말릴 걱정 고추 말릴 걱정
저녁연기만 골목 가득 잦아든다.
--「늦가을 들녘에 내리는 비」 전문
그는 먼저 늦가을이다. 가을에 대한 소재의 상황 설정과 전개가 많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그의 체험과 사유와 가장 친근한 “빈 들녘”과 “건너마을 느티나무 집 늙은 과수댁”, “보름 전 산으로 간 작은 아버지”, “저녁연기만 골목 가득” 그리고 “추연한 넋두리”와 “나락 말릴 걱정 고추 말릴 걱정” 등의 현실적인 상황에서 그가 조화롭게 정감적으로 풀어나간 시법에서 계절적인 시간성과 농촌 현장의 공간 개념이 적절한 융합을 이루면서 완성된 작품에서 공감을 유로(流露)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사계절 전체에서 착목(着目)하는 사물들의 변화는 상응(相應)하는 표현이 부족하겠지만 김효진 시인은 아주 다양하게 이미지화하는 특성과 중간중간에 “씨부럴 징허게도 오는구마이”나 “아따 씰데 없이 마이도 오네” 등의 방언(方言)도 동시에 구사함으로써 시 읽기와 이해에 설득력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정감으로 표출한 가을 소묘는 대략 다음과 같이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 소묘 : 가을이 익어갈수록/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세월
-어느 가을 : 가을 새벽 차가운데/ 햇살은 떨다 가고/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
-다시 가을 : 아직 풀리지 않은 비밀처럼/ 가을이 다시 머물고 있다.
-만추 1 : 하늘도 깊어가고/ 낙엽들도 떠날 채비를 한다
-만추 2 : 가을이 깊어갈수록/ 우리 계절도 깊어가겠지
-만추의 저녁에 : 늦은 밤 전해 온/ 친구의 비보(悲報)/ 촛대 불 높이고/ 술잔을 당긴다.
-단풍이 물들려면 : 물이 흐르듯/ 우리도 흘러왔고/ 단풍도/ 저 혼자 붉어지는 것이 아니다
-낙엽 2 : 저무는 뒷길에/ 노을이 깃들면/ 남루한 문학(文學)도 같이 저문다.
이렇게 제재(題材)로만 등장한 가을이 작품의 계절향기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는 봄과 겨울에 대한 정서의 지향도 그냥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봄바람 : 저 멀리 하구에 봄 물결/ 눈부시게 찬란한데/ 간밤 여우별/ 그대 간 곳 따라간 뒤
-봄이 오는 소리 : 강 건너 먼 지평에/ 안개인지 아지랑이인지/ 눈을 흐리는데
-꽃샘 바람 : 막바지 몸부림인지/ 긴 꼬리처럼 꽃샘바람 매섭다
-고향의 봄날 : 윤사월 꽃가루 날리고/ 홀씨 검불 산골 외딴 동네/ 계곡 깊은 바람
-조춘 : 눈 덮인 큰 산 천태령(天泰嶺)에서/ 바람에 찬 새재(鳥嶺) 마루턱을/ 훠어이 넘다가/ 갓 나온 참꽃을 보고 묻는다.
-첫눈 : 시인의 빈 술잔엔/ 낡은 낙엽의 흔적/ 툭 떨어져/ 나처럼 흔적만 남긴다.
-겨울비 : 외줄기 산길마저 끊기고/ 비 내리는 창가에/ 촛불 켜고 새는 밤
-눈길 위의 발자국 : 자그맣고 또렷한 선으로/ 눈길 위에 찍힌 발자국
4. 시를 향한 집념과 시어(詩語)의 발굴
김효진 시인에게서 다기 주목할 일은 시를 향한 집념이 대단히 강하다는 점이다. 그는 이미 시창작 학습을 통해서 그 이론과 작법에 통달해서 많은 습작의 기회를 거쳐서 오늘 이 시집을 상재하게 되었으나 그가 구사하는 언어나 시적 발상과 동기가 그의 정서와 사유의 범주가 인생론과 더불어 광범위하게 확대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방 안 가득 묵향/ 새벽빛 물들 때/ 갈고 닦은 각필로/ 하루 중 겨우 허락된 시간/ 한 줌 명료의 시간에/ 토혈 찍어 시를 쓴다 (「벼루」 중에서)”는 그의 일상적인 여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에 대한 열정과 지향하는 인생관이 고차원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보편적인 생활과 동시에 생성하는 지적인 사유가 작품의 원천이 되는 점을 잘 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선지를 수십 장째 버린다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그 솜씨로 자화상을 그리려니
온전하게 나올리 있나
과시욕만 지나쳐
지난 행로 포장으로 끄적이니
부끄런 줄 모르고
서점 서가에 내어놓을 일 없건만
흔적 없이 조용히 살다가는 일 도리라
자화상 자서전 생각도 안 했건만
소신과 염원으로만
시를 쓰고 그리며
왔다가는 기미만 남기려네.
--「자화상」 전문
그의 자화상은 진솔한 고백이다. 그는 지필묵(紙筆墨)으로 화선지에 자화상을 그려보지만 온전한 진실은 아직도 탐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경위를 과시욕과 행로의 포장이라고 부끄러워하면서 겸손의 신념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시가 또는 시집이 시중의 서점 서가에서 진열되어 팔릴리도 없다는 자격지심(自激之心)의 자정(自凈)으로 “흔적 없이 조용히 살다가는 일 도리라”는 명민(明敏)한 가치관의 개념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소신과 염원으로만/ 시를 쓰고 그리며/ 왔다가는 기미만 남기려네.”라는 어조로 자신을 정리하고 있어서 그가 인생을 영위하는 최상의 심력(心力)은 시를 탐구하면서 한생을 마무리한다는 비장한 심려(心慮)를 읽을 수 있게 한다.
깊어가는 가을
문득 깨어 시를 쓴다
어느 아득한 날
하숙방 책상 위에 흰 봉투 하나
그녀의 결혼식이었다
그녀 덕에
시를 알고
시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시만 남기고 가버렸다
많은 세월 흐른 뒤에 만난
여전히 알 수 없는 마음처럼 혼란할 때
지나가던 영국인 한마디 한다
*시는 태어나는 것이지 만드는 게 아니다
*The poem is born, not made (영국 속담)
--「시(詩)」 전문
다시 김효진 시인은 “시”에 대한 접근을 소박한 회상으로 재생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부제로 주를 붙였듯이 “시는 태어나는 것이지 만드는 게 아니다*The poem is born, not made (영국 속담)”라는 작법의 조언까지 첨언(添言)하는 시인의 위치에서 모든 사물의 형상을 챙겨보는 예지와 무한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관념의 세계를 섭렵(涉獵)한 듯 시와의 동행은 그를 인생행로의 조언자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미국의 현대시인 카알 샌드버그는 시란 인간의 언어라고 하는 매우 가소성(可塑性)이 있는 재료로 행해지는 한 예술이라고 했는데 김효진 시인은 시를 창작함에 있어서 언어의 조탁(彫琢)에 많은 노력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뉘, 달뜬, 부산스런, 그린비, 우멍한, 마츰, 불목하니, 일만무제, 갓밝이, 목강스럽다, 고추바람, 추연한” 등등의 언어를 작품 속에 대입해서 시의 위의나 품위를 상승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어서 언어의 발굴이나 응용은 시인들의 책무이기도 하리라.
많은 시인들이 이 시어(poetic diction)에 집착하는 연유는 언어의 결핍이나 부족은 좋은 시를 창작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편견(偏見)도 있지만 어쨌거나 시인은 우리 말과 글을 많이 습득함으로써 다양한 매체들과 교감할 수 있어서 결국 시창작에 필수라는 논지가 성립한다.
김효진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