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mission company'였다.
모태신앙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아주 자연스런 결정이었고 신생회사에서 큰 꿈을 펼쳐보고 싶었다.
안정된 여느 회사들 보다 할 일은 많겠지만 가능성이 더 클 것이라 믿었다.
그 생각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그 회사에선 1년에 두 차례씩 회사 수련회를 떠났는데 그 때마다 당시 한국 교계의 가장 큰 어른 중 한 분이셨던 '고 옥한흠 목사님'께서 멀리 강원도까지 오셨다.
수련회 장에서 우리 직원들과 함께 3박4일간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시면서 '소명과 비즈니스'에 대한 강의를 많이 해주셨다.
그 말씀들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우리들에겐 바로 둘도 없는 사표였고 좌우명이었다.
진정한 영적 스승이셨다.
그 분의 잔잔한 울림과 표상들은 지금도 우리들 가슴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목사님의 큰 아들, '성호 씨'도 우리 회사의 직원이었다.
나의 한참 후배였다.
그는 오래 재직하지 않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회사를 일찍 떠났다.
다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속절 없는 세월 속에서 거목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한동안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었다.
'옥 목사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년 9월 2일.
우리의 영적 멘토는 수많은 제자들에게 주옥같은 미션을 심어주시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셨다.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스승님을 다시 뵐 수 있을거라 믿지만 뜻하지 않은 별리는 큰 고통이었고 애절한 슬픔이었다.
그 분이 가신지 거의 반 년이 지난 2월 어느날 신문에서 '성호 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곧바로 스크랩을 했다.
부자지간의 배움과 인간적인 애증들이 가감없이 기술되어 있었다.
원문을 그대로 소개해 본다.
* * * * * *
"어쩌면 아버지는 없었던 것과 같아요. 늘 '빈자리'였습니다.
아버지를 필요로 할 때 존재감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 부재(不在)를 부재로 느껴본 적도 없죠.
제가 아버지가 된 뒤로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뿐이고, 아버지는 속으로만 미안해했을 뿐이고…."
지난해 9월 별세한 고(故) 옥한흠 사랑의교회 목사는 한국 개신교계의 거인이었다.
2만여 목사·선교사 제자와 수만 신도들에게 그는 영적인 아버지와 같았다.
정작 그의 맏아들 옥성호(44)씨는 "나에게 아버지는 영원히 실종된 존재"라고 했다.
교회의 부흥을 이끈 그 거인은 집에선 '없는 존재'와 다름 없었다.
언제나 일과 세상에 시달리던 우리의 아버지들처럼.
그런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장남 옥성호씨가 책을 썼다.
제목은 '아버지, 옥한흠'(도서출판 국제제자훈련원).
성호씨가 아버지를 또렷이 기억하는 순간은 3년간 미국유학을 마치고 아버지가 돌아온 때.
초등생 3형제는 어머니와 경남 진영에서 살았다.
아들은 아버지가 서먹해 '충성!'이라고 거수경례를 했다.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씻자"고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시골집 앞마당 수돗가에서 어린 아들들을 씻겨줬다.
중학생이 된 성호가 감기를 앓고 있을 때, 아버지는 방에 들어와 젖은 수건을 몰래 널어주었다.
그가 기억하는 단 두 번의 '애정 표현', 그것으로 전부였다.
미국서 공부한 아버지가 택한 건 고통스러운 교회 개척의 길이었다.
"월급 목사로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연구한 '제자 훈련' 철학을 실천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신 거죠.
안정된 생활을 원했던 어머니와 다투기도 많이 했어요.
어머니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아버지가 너무 미웠죠."
성호씨는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를 할 때, 남의 집 2층에 세들어 사는 게 부끄럽고 싫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버지에겐 언제나 가족보다 교회와 성도가 먼저였다.
졸업식때도 아버지 얼굴은 보기 힘들었다.
가족사진도 13년 전 1998년 6월에 찍은 것이 마지막이다.
성호씨의 책 표지에 있는 옥 목사와 성호씨 모습 역시 "할아버지와 아빠 둘이 찍은 사진이 없어 섭섭하다"는 성호씨의 딸이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아버지는 '매주 가정 예배를 드리자'는 약속조차 지키지 못했다.
두세 번 하고 말았다.
"고2 때, 새로 산 가정예배 교재에서 처음 재미를 느끼고 늦게 귀가하신 아버지 뒤를 쫓아 들어갔을 때, 옷도 벗지 않은 채 이부자리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힘없는 모습을 봤어요."
더 이상 가정예배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옥 목사는 생전 세 아들에게 줄곧 "너희가 목사가 되겠다고 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말했다.
목회자의 자질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았던 아버지는 "너희는 모두 목회자로서 자질도 소명도 부족하다.
행여라도 아버지를 믿고 목회한다는 소리 할 생각 말라"고 했다.
"목회자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다. 한국은 목사가 너무 쉽게 되고, 또 너무 많아서 문제다."
2007년 초 성호씨가 세태에 물든 신학을 비판하는 책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내려고 했을 때, 아버지의 말은 이랬다.
"너는 왜 그렇게 세상을 삐딱하게 보니? 다른 건 몰라도 내 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사람으로 각인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성호씨는 아버지에게 '내지 않겠다'고 거짓말하고, 몰래 책을 펴냈다.
그러나 그 책이 개신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자 아버지는 마냥 기뻐했다.
아들의 재능을 본 여느 아버지가 그러하듯.
이후 성호씨는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로 두 권을 더 펴냈다.
강철 같기만 하던 아버지는 지난해 3월, 40여년 만에 처음 성호씨에게 눈물을 보였다.
지난해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금메달을 딴 뒤, 식사자리였다.
"연아가, 연아가… 그 작은 몸으로 얼마나 힘들었겠니. 너무 자랑스럽고 대견해서…."
또 다른 눈물은 병실에서 봤다.
항암 치료차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아버지의 옆 얼굴로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성호야, 내가 왜 이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나처럼 재미없게 산 사람이 또 있을까?"
성호씨는 "아빠 젊을 때 누가 카바레 가서 춤추자고 하면 재밌었을 것 같으세요?
아빠는 평생 자신에게 가장 만족을 주는 삶을 사신 거예요"라며 한참을 달래야 했다.
옥한흠 목사는 "그렇지, 그런 거지?" 하며 그제서야 눈물을 삼켰다.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특허 관련 벤처기업 미국 지사장으로 일하던 성호씨는 미국 생활을 당분간 접고 지난달 귀국했다.
"목회자가 될 생각은 없다"는 그는 현재 사랑의교회 출판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버지 개인이 아니라 목회자 옥한흠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싶어서다.
그러나 성호씨는 안성의 아버지 묘소를 잘 찾지 않는다.
거기 가면 늘 '빈자리'였던 아버지의 그 '빈자리' 마저 사라졌음을 느끼게 될 것 같아서다.
성호씨의 휴대전화 번호는 옥 목사가 생전에 쓰던 그 번호다.
밖에서는 수만 신도를 이끌었지만 집에서는 한없이 무심했던, 평생 사랑을 설교했지만 자식에겐 사랑을 표현할 줄 몰랐던 그 아버지의 번호다.
(옥한흠 목사는)
교회 연합과 갱신 운동을 이끈 개신교계 지도자.
1972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78년 사랑의교회를 개척했다.
그가 주도한 평신도 교육 프로그램 ‘제자훈련’은 ‘제2의 종교개혁’으로 불리며 교계 전반에 확산됐다.
대형 교회들이 세습 논란을 빚던 2003년 정년을 5년 남기고 만 65세에 조기 은퇴해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 * * * * *
밖에서 위대한 지도자였던 아버지.
모든 분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뛰어난 리더.
그러나 안에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가 보다.
성직자의 자제들이, 정치인이나 사업가의 가족들이 의외로 방황으로 점철된 청소년기나 눅눅한 터널 같은 중장년 시기를 겪는 경우를 주변에서 자주 목격한다.
논리의 괴리 때문이다.
가르침이나 설교, 스승의 앞 뒤 모습에 대한 불일치 등이 가정에선 아주 미세한 것까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식이 장성하여 세상을 헤아릴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주변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이든, 발생하는 어떤 상황이든 이해하고 수용하게 된다.
하물며 자기의 부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는가?
나이를 먹었다는 건 바로 그런 넉넉한 가슴이 생겼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예민한 청소년기엔 좀 다른다.
밖에서 위대한 아버지가 안에선 그렇지 못할 때 그들은 종종 심각한 방황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수도 있다.
성호 씨가 그런 케이스였다는 얘기는 아니다.
누구든지 그럴 개연성이 있다는 말이다.
부모가 어떤 인생을 사셨든 평생 동안 자녀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큰 성공은 없지 싶다.
자식의 입에서 "저도 아버지처럼 살고 싶어요"란 고백이 나온다면 부모로서 이 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이다.
우리 어른들은 오늘도 성공과 행복을 향해 바삐 뛴다.
참다운 행복과 진정한 성공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곰곰이 되새겨보는 3.1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마다 그 가치는 다르겠지만 성공의 기준이 물질이나 권력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라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하며 자산이다.
수많은 문헌이나 경전들에서 알려주는 선현들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도 결국은 '사람만이 세상의 빛이요 소금'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어떤 부모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아직도 창 밖으론 차갑고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다.
비오는 날,
오늘 같은 날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꼭 함께 나누고 싶은 노래가 있다.
'Adieu Jolie Candy'
DAUM에서 그 음악을 제공하지 않아 구입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 너무 안타깝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글을 마무리 한다.
편안한 공휴일 보내시길.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2011년 3월 1일.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