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날짜 : 2019년 7월 27일(토)
북촌 제1경
금호문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
창덕궁이 건설되면서 함께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호문이라는 명칭은 이미 중국 당나라 서쪽에 위치한 궁성문을 지칭하던 것이었다
창덕궁 금호문의 경우 당초에는 별도의 이름이 없었으나, 1475년(성종 6) 국왕의 지시로 서거정(徐居正)이 대궐의 문 가운데 호칭이 없는 문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금호문이라 불렸다
금호문은 창덕궁 서쪽에 위치한 행랑의 출입문으로,
조정 관원들이 주로 출입하는 문이었다
야간에도 관원의 출입문으로 사용되었고, 흉서가 투입되기도 하였으며, 과거 시험 때에는 응시자의 출입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연산군대에는 금호문의 수비를 강화한다는 취지하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의 예에 따라 수직군사 60여
명에게 창과 칼 등을 소지하게 하였다
1645년(인조 23)에는 사람들의 출입이 많아 인근에
있는 서연청(書筵廳)에서 세자가 강독을 하기 어려울 정도이므로 폐쇄하고 대신 단봉문을 개방한 적도 있었으나, 일시적인 조치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개방되었다
금호문은 이후에도 몇 차례 일시적으로 폐쇄되기도
하였다
금호문은 정치적으로도 주목되는 문이다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들이 창의문(彰義門)을 지나
궁궐로 들어간 문이 금호문으로, 당시 금호문 수문장
박효립(朴孝立)이 문을 열고 반정군을 맞이했다
금호문을 통해 궁궐로 들어간 반정군은 장작더미에
불을 질렀다
불을 지른 것은 반정군들이 가족들에게 “궁중에서 불이 나지 않으면 모두 달아나서 빠져 죽으라.”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관광객의 출구로 사용되고 있다)
♤ 금호문 의거
송학선은 1926년 4월 28일 오후 1시 10분경 순종의
성복제(成服祭)에 참석하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창덕궁으로 들어가던 일본인 3명, 즉 국수회 지부장 다카야마(高山孝行)와 부회 의원 사토(佐藤虎次郎)·이케다(池田長次郎) 일행을 사이토(총독)로 오인하고 비수로 찔러 다카야마를 죽이고 나머지는 부상을 입혔다
그런데 송학선의 의열 투쟁은 당시 일부 의열 투쟁의
경우처럼 어떤 특정한 주의나 사상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재판 예심 때 재판관에게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우리 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죽이지 못한 것이 저승에 가면서도 한이 된다”고 말하였다
이는 그의 의거가 순수한 민족적 의분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비록 그 원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이 의거는 순종 서거 후 동요하고 있던 학생층과 일반 대중의 민족 의식을 크게 자극시키는데 충분하였다
송학선은 붙잡힐 당시 부근에 있던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만세를 불러라”고 몇 차례 호소하였고,
또 이 사건은 신문지상에 보도되어 학생들의 민족적
의분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의 공판정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몰려들었던 것은 이런 사실을 그대로 증명한다
금호문의거 자체는 비록 실패하였으나 당시 국내외에서 조직적인 무력 항쟁의 길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빈발하고 있던 의열 투쟁의 하나로서 민족운동을 고무하여 6·10만세 운동의 발발을 자극하는 구실을 하였다
♤ 송학선(宋學善)
1897년 2월 19일 한성부 태생으로 어릴때 가세가 기울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어렵게 자랐다
성인이 된 뒤로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기구 가게에 다녔으며, 1926년 거사 무렵에는 병으로 가게를 그만
두었다가 완치된 상태였다
1926년 4월 26일 순종이 사망하자 빈소가 마련된
창덕궁 앞에서는 호곡을 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모여
들었다
고종은 망국의 상징이었고 일본인들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에 비통함이 더욱 컸다
금호문(金虎門)은 창덕궁의 서남문으로 빈소의 출입구였으며, 송학선은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이 이곳으로 드나드는 것을 보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처단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26일, 27일 양일간 이 곳에서 칼을 품고 사이토를 기다리다가 사흘째인 4월 28일 창덕궁에서 조문을 하고 나오는 일본인 세 명이 탄 무개차 안에 사이토가 탄 것으로 착각하고 이 차를 습격하여 경성부회 평의원 다카야마, 사토, 이케다 등을 찔러 다카야마를 죽였고, 이중 사이토로 오인한 사람을 찔러 중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달아나던 중 그를 추격하던 조선인 순사 오환필을 찌른 후 휘문고등보통학교 인근에서 일본 경찰과 격투 끝에 현장에서 붙잡혀 1926년 11월 10일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인 1927년 5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사건 당시 미혼으로 자손은 없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개천절 행사 발상지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29, 원서동 181)
1909년 대종교에서 음력 10월 3일을 환웅이 지상에 내려왔다하여 개천절로 정하고 이곳에서 첫 행사를치렀다
♤ 개천절(開天節)
개천절이 시작된 것은 국조단군을 모시는 대종교에서 1900년 1월 15일 교문(敎門)을 다시 열면서 단군조선을 건국하였음을 기리는 날로 정하여 경하식을 거행하는데서 비롯되었다
당시의 개천절 행사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식민지배하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이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정부가 계승하여 음력 10월 3일에 지내던 행사를 양력 10월 3일로 바꾸어 지금의 개천절이 되었다
♤ 대종교(大倧敎 - 단군교檀君敎)
단군을 교조로 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이다
대종교의 자체적인 입장은 과거로부터 이어오다 백봉이 드러낸 한민족의 고유한 신앙을, 나철이 다시 복구(중광重光) 했다는 것이다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경전으로, 삼진귀일을 교리로 한다
흔히 단군을 '숭배'하는 종교라 오해받는데, 물론100% 틀린 것은 아니지만 주신은 상제(上帝), 즉 하느님이다
환인, 환웅, 단군을 삼신 '한얼(한군의 정신)님'이라 부른다
즉, 민족의 뿌리에 위치, 따지고 보면 이 종교에서의 단군은 기독교의 예수와 비슷한 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총본사는 서대문교 홍은동에 있고, 대종교의 교당을 '시교당'이라 부른다
교단을 대표하고 통괄하는 교주격 직위로 '총전교(總典敎)'가 있다
1대 교주인 나철이 중심이 되어 1909년 음력 1월 15일, 오늘의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에서 오기호 등 발기인 10명과 함께 모아 단군교(檀君敎)라는 이름으로 개창한 것을 시초로 본다
1910년 8월 1일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개명했다
이 과정에서 정훈모를 중심으로 한 일부 신도가 단군교 교명의 고수를 명분으로 삼아 분립하였다
일제는 1911년 종교취체항으로 민족종교를 탄압하기 시작, 대종교 교단 지도부는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914년 아예 북간도 화룡현 청호로 총본사를 옮겼다
1916년 음력 8월 15일에 교주 나철이 대종교 성지인 구월산 삼성사에서 일본의 폭정에 통분하여 동포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후 김교헌이 2대 교주가 되었다
김교헌 시기에 대종교는 종교조직으로서 체계가 갖춰지기 시작한다
대종교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항일 무장투쟁으로, 1920년 청산리대첩에 가담했던 북로군정서군이 바로 대종교가 양성한 조직인 대한군정부의 이명(異名)이다
가담한 주요 인물로는 서일, 현천묵,김좌진, 이범석 등이 있고, 장병들은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상해 임시정부가 발족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인이었다
독립전쟁사에 기록된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의 실질적인 지휘부는 대종교였다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이상용, 김동삼, 이범석 등 애국지사들이 그들이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정인보를 비롯해 김두봉, 이극로 등도 대종교인이었다
김두봉은 1916년 구월산에서 나철이 순교할 때 시봉하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 교도 수가 60만 명을 넘어섰고, 환국 이후 대종교는 민족 종교의 적통으로 인정받아 초대 정부의 제1 교단으로 등록되었다
당시 대종교의 지식인들이 정부의 고위관리로 입각해 활동했다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교육이념에 홍익인간이 채택되었고 단군 연호, 개천절, 한글 전용 등이 시행되었다
홍익대, 단국대, 경희대 등이 대종교 교인에 의해 설립된 대학이듯이 대종교 역사 자체가 교육과 독립운동이었다
♤ 대종교와 관련 있는 대학
- 국학대학
초대 이사장 집안부터 초대교장, 초대학장 위당 정인보까지 모두 대종교 관련 인물이었다
물론 대종교 교단차원의 설립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종교측 자료에는 홍익대학과 함께 교단내의 대표적 교육기관 설립이라고 되어 있다
이후 1967년 우석(友石)대학교에 흡수되어 없어졌고, 그 우석대학교도 1971년 고려대학교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만다
(전북 완주군과 충북 진천군에 분산 위치되어 있는 현재의 우석又石대학교와는 다른 대학이다)
- 홍익대학교
학교명 부터가 단군의 홍익인간에 따온 것이다
대종교 지도자였던 독립운동가 이흥수가 사재를 출연 재단법인 홍익학원으로 1948년 8월 설립되었으나 친일 정치권력의 강압 등으로 인하여 재단이 바뀌면서, 1960년대 이후로는 대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 단국대학교
학교의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장형이 1914년 대종교에 입교, 원로원참의(元老院參議)를 지낸 교단의 원로급 인사이다
단국이라는 교명도 단군과 애국을 뜻한다
- 신흥대학(경희대학교 전신)
1911년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이어 1947년 설립된 신흥대학의 설립자인 초대 부통령 이시영 역시 대종교의 원로원장·사교(司敎)·도형(道兄) 등으로도 선출되었던 대종교 원로급 인사였다
1960년 경희궁에서 이름을 따와 경희대학교로 개칭하였다
♤ 나 철(羅喆)
1863.12.2(음) 전남 보성군 금곡부락(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나용집(羅龍集)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5.12.30(음)일 밤에 서대문역 앞에서 단군교(檀君敎)에 입교(入敎)하였다
자는 문경(文卿)이고 호는 경전(耕田, 혹은 經田)이다
본디 이름을 두영(斗永)이라 하였으나, 과거와 벼슬길에 오르면서 인영(寅永 혹은 仁永)을 사용하여 인영으로 널리 알려졌다
1909년 대종교를 중광(重光)할 당시, 외자인 철(喆)로 개명했고 호를 홍암(弘巖)이라 바꿨으며 당호(堂號)를 일지당(一之堂)으로 하였다
1909. 1.15(음)[47세] 단군교(대종교)를 중광(重光: 다시 일으킴)하고「단군교포명서」를 발행하였다
1910. 8. 5(음)[48세] 단군교를 전래의 교명인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1916년 8.15(음) 구월산 삼성사에서 고유의 제천의식인 선의식(襢儀式)을 거행한 후 유서를 통해 김교헌에게 교통(敎統)을 전수하고 순명(殉命)하여, 11월 20일(음) 유언에 의해, 백두산 기슭인 만주 화룡현 청파호 언덕에 봉장되었다
♤ 1907년 홍암 일행이 을사5적 처단을 위해 의혈지사들을 모집하자 전국 각지에서 이에 호응해왔고, 이들은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거액의 거사 자금을 모아 의거에 나섰고, 의거는 비록 실패로 돌아가 홍암이 유배 10년형을 선고받는 등 법적 처벌을 받았지만 장거 소식은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10년 유배형을 받고 무안군 지도로 유배 갔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풀려난 홍암은 마지막 4차 항일외교를 마치고 돌아와 1909년 단군교를 중광(重光, 다시 일으켜세움)하게 된다
항일외교와 을사5적 처단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뒤의 결단이다
사도시 터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98-7)
♤ 사도시(司導寺)
조선시대 궁중의 미곡과 장(醬) 등의 물건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고려시대는 비용사(備用司)를 두어 궁중의 미곡을 맡았는데, 충렬왕 때 요물고(料物庫)로 고쳤다
1392년(태조 1) 7월에 고려의 제도에 따라 요물고를
설치하여 관원으로 종5품의 사(使) 1인, 종6품의 부사 1인, 종8품의 주부(主簿) 2인을 두었다
1401년(태종 1) 7월에 공정고(供正庫)로 개칭되고,
1422년(세종 4) 9월에 다시 도관서(䆃官署)로 고쳐졌다
그 뒤 1460년(세조 6) 5월에는 도관서를 혁파하여
사선서(司膳署)에 합하였다가 1467년 4월에 사선서를 사옹원에 합속시키면서 도관서를 다시 설치하였다
뒤에 사도시로 고쳐 ≪경국대전≫에 법제화하였다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관상감 터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98-9)
♤ 관상감(觀象監)
조선시대에 존재하였던 기구로, 천문학, 지리학(地理學)·역수(曆數 : 책력)·측후(測候)·각루(刻漏) 등의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오늘날의 기상청에 해당한다)
1466년(세조12) 서운관(書雲觀)을 관상감(觀象監)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506년(연산군12) 시력서(司曆署)로 낮추었다가 중종 즉위 후 복구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 때 관상소(觀象所)로
개칭하였다
1907년 폐지되었다
이곳에서 천체관측기구인 간의(簡儀), 축소형인 소간의·규표(圭表)·해시계·물시계 등 천문기기를 개량하고 발명하는 일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휘문고등학교 터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98-9)
♤ 휘문의숙(徽文義塾, 휘문고등학교)
1906년 민영휘(閔泳徽)가 종로구 원서동 관상감(觀象監)터에 교사를 신축하여 휘문의숙(徽文義塾)으로 개교하였다
고종으로부터 '휘문'이란 교명을 하사받았으며, 학생수는 고등소학과 65명, 중학과 65명이었다
본래 휘문의숙의 전신은 1904년 9월 민영휘가 구국사업의 일환으로 종로구 경운동에 있던 자택에 개설한 광성의숙(廣成義塾)으로 학생 수가 증가하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면서 학부(學部)의 정식 인가를 받아 휘문의숙으로 개교하게 된 것이다
1908년부터 교복을 착용하였다
1918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22년 4원 수업년한이 4년에서 5년으으로 연장되었다
1938년 4월 휘문중학교로 교명을 바꾸었으며,
1946년 7월 수업년한이 6년으로 개편되었다
1951년 9월 학제개정에 따라 휘문중학교와 분리되어
휘문고등학교로 개편되었으며,
1978년 1월 강남구 대치동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
하였다
♤ 민영휘(閔泳徽)
1852년(철종 3)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영준(泳駿)이며, 자는 군팔(君八), 호는 하정
(河丁)이다
춘천유수 윤도호(斗鎬)의 아들, 1877년(고종1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당시 민씨 척족의 세력을 타고 정계에 등장했다
1884년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을 진압, 사대당 내각에 들어갔고 1886년 참의내무부사·도승지), 이듬해 주차일본판리공사를 역임, 이어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
1894년 동학혁명 토벌을 기도했으며, 6월 좌찬성에
올랐다
그후 갑오경장으로 민씨 척족과 함께 실각, 탐관오리로 논죄되어 임자도(荏子島)에 귀양하게 되었으나 탈출, 평양으로 잠행하여 벽동의 청나라 포대에 잡혔다가 중국으로 도망갔다
이듬해 대사령으로 귀국, 중추원의장·시종원경·헌병대 사령관·표훈원총재를 역임, 훈일등팔괘장·태극장·
태극이화대수장 등을 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정부에 의해 자작이 되었고, 거액을 투자하여 천일은행(한국상업은행과 한빛은행을 거쳐 현재 우리은행)과 휘문의숙을 설립했다
♤ 민영휘의 휘를 따서 휘문고등학교를, 민영휘의 처
안유풍의 풍을 따서 풍문여고를 설립하였다
관상감 관천대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75, 계동 140-2)
조선 시대 천문관측 기관인 서운관이 이 언덕에 있었는데, 세조 때 관상감으로 바뀌었다
이 유적은 천문관측 기구인 소간의를 설치해놓은 대(臺)인데, 임진왜란 때 훼손되어 관천대만 남아 있는 것이다(보물 제1704호이다)
신라 첨성대(경주), 고려 첨성대(평양 -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현재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창경궁의 관천대(보물 제851호)와 더불어 우리나라 천문학의 역사와 천문학 기기의 발전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 창경궁 관천대
1688년(숙종 14)에 축조된 것인데 높이 2.2m의 화강암대를 쌓고 그 윗부분에 가로 2.4cm, 세로 2.3m 정도의 넓이로 소간의를 세울 대를 두었다
흔히 소간의대 또는 첨성대라고도 불렸다
계동궁 터 (서울시 종로구 계동 147-2)
처음에는 숙종의 아들인 연령군이 살다가 죽은 후 연령군의 사당이 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아들인 이재원의 소유가 되었으며,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 때 개화파의 주장에 따라 고종과 명성왕후가 머물렀기 때문에 궁(宮)이라 불렀다
♤ 계동궁(桂洞宮)
1884년(고종 21) 12월, 갑신정변 때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강요로 창덕궁에서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그곳에서 근신들이 개화당에 의해 참살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고종은 창덕궁으로 환궁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경우궁
보다 협소한 계동궁으로 다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개화당은 그들의 배후세력인 일본과 적대 관계에 있던 청나라의 군대가 공격해 오더라도 방어에 유리했기 때문에 계동궁에서 신정권의 기초를 가다듬은 후
창경궁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고종은 그 후 곧 환궁하였지만 창덕궁에서도 가장 협소한 관물헌(觀物軒)에 머물렀다
♤ 완림군 이재원(李載元)
이재원은 1831년(순조 31)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정응晸應)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고 흥완군의 형 흥녕군(창응昌應)에게 입양되었으며 고종의 4촌형이다
1864년(고종1) 대원군이 집권하자 도승지, 대사헌,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1866년 한성부판윤이 되고 1868년 경복궁중건 때에는 종정경(宗正卿)으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겸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 의해 영의정에 추대되었으며 갑신정 이 실패한 뒤에도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판돈녕부사, 이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890년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1891년 종정경으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1899년 완림군(完林君)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제생원 터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75, 계동 140-2)
조선초의 서민 의료기관 터
조선조 말엽 이 터에 계동궁(桂洞宮)이 들어섰다
♤ 제생원(濟生院)
제생원은 1397년(태종) 조준(趙浚)의 건의에 의해
지방의 향약재 (鄕藥材)를 수납하여 혜민국(惠民局),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와 같이 궁민(窮民)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설치되었다
제생원은 또 동녀(童女) 수십명을 선발하여 진맥, 침술을 가르쳐 부녀자의 질병을 치료하게 하는 의녀(醫女)를 양성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459년(세조 5) 혜민국에 합병되었다
태조가 칠순을 맞이하여 헌수(獻壽 환갑, 칠순 등에서 술잔을 바침)하고 특별사면령을 내리고, 제생원에 명하여 환과고독을 살피라고 했다
환(鰥홀아비)과(寡과부)고(孤고아)독(獨자식없는 자)은 4가지 외로운 사람을 뜻한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총독부에 의해 구휼기관으로 설립됐다
이에 따라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을 위한 맹아부, 고아를 위한 양육부, 정신병 환자를 위한 의료부로 세분되었다
♤ 이곳(현대빌딩)은 2002년 9월부터 대북 불법송금
사건의 관련 조사를 받던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회장이 2003년 8월 4일 투신 자살한 근,현대사의 아픔인 장소이기도 하다
휴식공간(카페) onion 입니다
이상으로 계동길 걷기를 마칩니다
더운 날씨에도 끝까지 함께 하신 모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님들 모두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