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사는 원홍의 이 말에 갑자기 표정이 어둡게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살면서 겪었던 세 차례의 스토커들의 그 징그러운 표정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여의사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떤 남학생이 계속해서 귀찮게 따라다녔다. 의대지망생이었던 여학생으로서는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늘 교문 부근에 있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뒤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여학생이 일부러 편의점에 들러서 시간을 보내고 나오면, 그 남학생도 길가에 서서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면서 기다린다. 여학생이 다시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면, 남학생 역시 자세를 가다듬고 뒤를 쫓는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더러운 스토커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고 고민을 하게 되고, 무섭고 해서 성적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고3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스토커 하는 놈이 얼굴이라도 괜찮으면 차라리 나을 텐데, 키도 작고, 뚱뚱하고, 얼굴은 어디 시멘트에 공중낙하를 했는지 찌그러진 상태 그대로 펴지도 못한 것 같았다. 그 얼굴에 걷는 모습을 가끔 고개를 뒤로 돌려 쳐다보면, 방금 전 롯데리아에서 먹은 햄버거가 그대로 식도를 역류하여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래서 옆에서 걸어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얌전하게 생긴 여학생이 계속 방구를 끼는 것으로 오해를 받았다.
여학생은 고민하고 고민하던 끝에 부모님께 도움을 청했다. 그랬더니 육사 출신의 아버지가 그 남학생을 만나 단숨에 끝을 내주었다. 여의사는 결국 아버지의 도움으로부터 공부업무를 방해하는 최초의 적을 물리치고, 학업에 전념한 결과 의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스토커 때문에 좋은 대학교에는 원서를 내지 못하고, 지방에 있는 의대를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지방에서 주말에 서울까지 올라오려고 버스를 탈 때마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 중에서 그 스토커처럼 못생긴 사람이 있으면, 그 옛날 더러운 생각이 떠올라 하지 않던 멀미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학생은 고속버스를 탈 때마다 멀미약을 상비약으로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그때 그 스토커가 인물만 평범하고 괜찮았더라면 멀미약까지는 먹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여학생은 정말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다.
여자 의대생이 1학년 가을 학기에 또 이상한 스토커가 출현했다. 학교 부근에 있는 원룸을 얻어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같은 건물 다른 원룸에서 생활하고 있는 같은 대학교 4학년 남학생이 정현옥에게 필이 꽃혔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현옥이 원룸에 들어갈 때면 꼭 비슷한 시간에 먼저 도착해서 출입문 입구에 서 있거나, 몇분 뒤에 따라 들어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이상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되풀이되고, 현옥을 쳐다보는 시선이 강렬하고 음흉하고 고등학교 시절에 스토킹 당해 본 경험이 있는 터라, ‘아! 나를 스토킹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놈은 너무 교묘한 방법으로 하고 있어, 의도적인 스토킹이라고 단정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현옥은 무서웠다. 더군다나 서울과 달리 그곳은 낯선 객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스토커 때문에 원룸을 갑자기 빼서 이사하기도 곤란했다.
현재 있는 원룸은 비교적 월세도 싸고 생활하기에 아주 편했다. 또 고민이 시작되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신의 주변에는 이상한 남자들이 계속해서 달라붙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옥의 친구들은 스토킹 당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현혹보다 더 예쁘고 몸매 좋은 여학생들도 사정은 다 비슷했다.
현옥이 볼 때 스토킹을 하는 남자들은 모두 정신질환자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관계도 없고, 전혀 상대가 될 수도 없는 여자를 쫓아다녀서 괴롭히기만 하고,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텐데, 그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현옥은 스토킹 하는 남자들의 심리상태, 정신상태를 의학적적으로 파고들어가다보니 나중에 자연스럽게 정신과 전문의가 되었던 것이다. 현옥 입장에서 볼 때 무척 이상한 인생의 아이러니였다. 두 번의 스토킹을 당하다보니, 정신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성형외과 전문의사를 꿈꾸고 있었다.
두 달 정도 계속하던 스토커는 어느 날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자취를 감추었다. 현옥은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 홀가분했지만, 한편으로는 허전했다. 궁금하기도 하고, 그 사람이 현옥을 해치지만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게 해주는 오징어나 땅콩 같은 역할도 하고 있었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중에 우연한 기회에 주변 사람들에게 들어보니, 그 스토커는 술에 취해 늦은 시간에 원룸으로 돌아오다가 뺑소니 트럭에 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했다. 현옥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욱 무서워졌다. 원룸에 들어서는 순간, 앞과 뒤에는 그 스토커의 유령이 무표정하게 현옥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은 현옥에 대한 원망과 한을 담은 무섭고 슬픈 표정을 짓기도 했다. 현옥은 하는 수 없이 그 원룸에서 이사를 했다. 학교 바로 앞에 있는 다른 원룸으로 옮겼다.
그 후 오랫동안 현옥은 스토킹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렸다. 주변에서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라고 권유도 하였고, 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태권도를 배우라고도 했다. 남학생을 사귀어서 보디가드 역할을 시키라고 했다. 어떤 친구는 다른 여학생과 룸을 같이 쓰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남학생과 동거를 권유하기도 했다. 모두 현실성이 없는 말도 되지 않는 조언이었다.
현옥이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친구의 소개로 그 대학교 총학생회장을 만났다. 양조장은 아버지가 그 시의 시장까지 지냈고, 그 지역에서는 돈이 많은 유지로 소문이 났다. 이름이 양조장이라서 마치 술을 만드는 작업장으로 오해할 소지도 있었지만, 성이 양씨고, 이름이 조장이라서 그렇지, 조장은 술을 한 모금도 못했다. 술을 조금이라도 마시면 얼굴이 완전히 빨개지고, 고통스러워했다.
조장은 그 지역에서 가장 명문인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성적으로는 당연히 서울대학교에 갔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조장을 서울로 보내지 않고, 그 지역에서 최고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도록 했다. 대학교에서도 공부보다는 학생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나중에 졸업한 후에도 그 지역에서 계속 남아 일을 하다가 국회의원이 되기를 바랬다.
아버지 지론은 지방자치가 본격화되고, 이제 대한민국도 전 국토가 균형있는 발전을 하려면, 서울이나 수도권에 사람들이 몰려서는 안 되고, 각 지역의 사람들이 그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까지는 지방 출신들이 공부 잘하면 모두 서울이나 부산으로 몰려가고, 그곳에서 직장생활이나 의사 또는 변호사로 일하다가 출세하고 돈을 벌고 성공하면 다시 출신 고향으로 돌아와서 낙하산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을 하거나 시장 군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면서 그래서는 절대로 나라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떠들었다.
조장의 아버지가 원래 그 도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모든 교육을 마치고, 평생을 그 도시에서 활동을 해서 성공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전직 시장이며 회사의 회장인 조장의 아버지에게 토를 달지 못했다. 만일 조금이라도 반대의견을 냈다가는 그 날로 아버지의 눈에 나게 되고, 아버지는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고,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는 충격으로 며칠 간 앓아누웠다.
아버지는 건강이 회복된 다음에는 반대의견을 감히 건방지게 낸 사람을 지역에서 매장시키기 위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최소한 한 달 동안 매장사업에 몰두했다. 이러한 반대의견제시자매장사업에 소요되는 예산은 아무리 큰 돈이 들어가도 아버지가 혼자 부담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런 사람을 그대로 두면 지역은 망한다. 그리고 논둑에 작은 구멍이 생겼으면, 그 즉시 호미로 막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방치했다가는 나중에 가래로 막아도 못막는다. 지역의 원로에 대해 반항하고, 건방진 악의 뿌리는 초기에 완전히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버지도 점점 나이가 먹어가면서 급격하게 늘어나는 반대론자에게 아무 것도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조장이 대학교를 선택할 무렵에만 해도 아버지의 기세등등함으로 그 지역에서 하늘을 찌르고, 바다를 누를 정도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이 때문에 조장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명령하는 대로 지방대학교에 들어갔고, 1학년 때부터 학생회 활동에 전념을 하여, 마침내 4학년 때에는 총학생회장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현옥은 서울에서 프라이드를 가지고 살다가 고등학교 막판에 재수 없게 어떤 나쁜 놈의 스토킹의 마수에 걸려들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들어가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 도시의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다니면서도, 항상 자신은 서울의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자부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현옥은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도 늘 아래로 내리깔아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대학 학생들과 데이트 할 생각도 전혀 하지 않고 4학년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조장은 전혀 달랐다. 지방대학에 다니고 있지만, 모든 의식과 행동, 사고는 서울대생 이상이었다. 자부심도 마찬가지였다. 조장은 자신이 미국의 하바드대학이나 영국의 옥스퍼드대학, 일본의 동경대학에 다니는 이상의 강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지역에 대한 애향심과 자부심이 또한 대단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지방 유지로서 돈도 많았기 때문에, 학교 앞에 원룸을 얻어 마치 도지사 관사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남자는 일찍이 독립심을 가져야 한다는 이유로 대학교에 입학하자 원룸을 얻어주면서 분가하도록 했다. 자동차도 국산차를 사주었다.
그리고 나중에 아들이 국회의원이 되어 대통령까지 하려면 내조를 잘 할 여자를 얻어야 된다면서, 아들에게 연애를 해도 반드시 인물도 좋고, 머리가 좋은 여자를 얻어야 한다고 ‘명심보감’에 나오는 공직자의 배필의 조건을 100번 이상 강조했다.
그래야 대통령으로서 외국에 국빈방문할 때 한국의 퍼스트 레이디로서 손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일 처음부터 영부인감을 잘못 선택해서 볼품 없는 외모나 머리가 나쁜 여자를 얻으면 대한민국의 국격을 국제사회에서 크게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 조장의 아버지의 매우 고루하고 낡아빠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아버지의 이론과 의견은 그 지역 사회 유지들 사이에서는 크게 공감을 얻었고, 다른 유지들도 며느리감 구할 때 조장의 아버지가 만든 ‘아인슈타인 공식’ 같은 신이론을 도입해보았지만, 대부분은 실패했다. 외모야 서울 가서 비싼 돈 들여 성형수술로서 고침으로써 경우 합격점에 들었지만, 머리 나쁜 것은 왠만한 약을 먹거나 뇌수술을 해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역의 유지 몇 사람은 아버지에게 며느리 선발조건을 다소 완화해달라고 간곡하게 청원도 했지만, 아버지는 조선시대 흥선 대원군보다 더 완고해서 조건을 글자 한자 고쳐주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조장은 데이트 상대로 미리 좋은 여자를 최우선으로 골랐다. 그러다 보니까 대학교 2학년때부터 본격적으로 연애를 했지만, 총 49명의 여자들 모두 ‘머리 부문’에서 통과를 못해 아버지께 알현을 시켜드릴 수가 없었다. 그 점을 늘 불효하고 생각하면서 자책하고 지냈다.
그러다가 우연히 소개를 받은 현옥과 한 달 데이트를 해보고 나서, 조장은 현옥이야말로 자신이 처음 보는 여자 천재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고 감격하고 흥분한 것 이상으로 조장은 놀랐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현옥은 조장이 데이트 상대로서 50번째였는데, 그것은 미국의 50개주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장은 더욱 현옥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아버지에게 새로운 천재의 발견 사실을 보고했다. 물론 전화나 말로 한 것이 아니라, 평소 중요한 사항을 보고하듯이 서면으로 깨끗하고 논리정연하게 써서 우편으로 아버지에게 보냈다. 조장이 올린 친서에 대해 아버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동안 49명의 여자들을 거쳤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전혀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조장에게 여자선발권한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지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결혼정보회사에 선금을 많이 주고 특별주문을 해놓았다. 이때 아버지가 제시한 조건은 ① 명석한 두뇌, ② 영부인 자질, ③ 활달한 사교력이었다.
결혼정보회사에서는 다른 중매건은 모두 제쳐놓고 3개월 동안 후보를 골랐지만 끝내 구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이곳에서는 도저히 그런 세가지 조건을 갖춘 여자를 구할 수 없으니, 서울이나 로스엔젤레스, 또는 파리에 있는 세계적 명성이 있는 국제결혼정보회사에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랬더니, 조장의 아버지는, ‘나는 그런 곳 필요없고, 이 지역 출신의 참한 아가씨를 구해야 한다.’고 단칼에 잘라 말했다. 결혼에 있어서도 ‘신토불이’. ‘순토종’ ‘향토성’이론을 고집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장이 또 어떤 여대생이 있는데, 머리가 천재라고 보고서를 올리니, 아버지는 안 봐도 뻔하다고 생각하고 찬성 반대 의견을 표시하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던 간에, 조장은 현옥이 마음에 들고, 현옥 역시 조장의 매력에 빠졌기 때문에 두 사람은 본격적인 데이트를 시작했다. 정치학과에 다니고 있는 조장은 졸업준비에도 바빴고, 총학생회장으로서의 역할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데이트를 해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동안 49명의 많은 여자들을 상대로 데이트를 했기 때문에, 연애의 기술은 탁월했다. 조장은 1학년 때부터, 에릭 프롬이 쓴 ‘사랑의 기술’을 비롯해서 사랑에 관한 서적을 섭렵했다. 국내서적으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섹스 테크닉 20일 단기정복법’, ‘함부로 사랑하지 마라’ 등 수십가지의 책을 독파했다.
돈도 많고 인물도 좋았고, 머리도 천재이며, 사교력, 리더십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한번 조장과 연애를 한 여자들은 비록 자신들이 엄격한 선발기준에 못미쳐서 탈락했지만, 탈락한 이후에도 간단히 끝내지 않고, 조장을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