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이끼 / 이윤학
까맣게 밤꽃이 떨어져 널린 마당을 어둠이 서둘러 덮으러 온다 장맛비 맨땅을 타작하다 멈춘 사이 산등성이 안개비 촘촘해진다 밤나무에 맺힌 빗방울이 마저 떨어져 지렁이가 기어간 마당 자갈들이 들썩거린다 삐뚜름한 걸음걸이로 주먹 하나 등 뒤로 틀어쥐고 언덕길 올라온 그는 부르르 떨면서 대롱거리는 마루의 전등을 켜고 원두막을 향해 누워 구시렁거린다 헛간에 웅덩이를 파고 들어앉은 억세진 털가죽을 덮은 개가 눈에 불빛을 담고 묶인 몸을 뒤척인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집 나간 여자가 구두 굽으로 토방을 찍으며 개에게 딴청부리는 환상, 혼잣소리 울린다
[ 감 상 ]
이윤학 시인의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이라는 기가 막힌 제목의 시집에는 집 나간 여자, 집 떠난 엄마가 자주 나온다.
그의 곁에는 아마도 빈자리가 오래 있었을 것이다. 부재의 문제가 힘 있게 표현되는 이유는 그것이 사랑의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운 이에게 듣고 싶은 애정과 관심의 말을 환청으로 듣는 홀로 사는 남자의 체화 된 고독이 뼛속까지 스민다. 이 시속에서 주변의 사물들은 이 한 구절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까맣게 밤꽃이 떨어져 널린 마당을 덮으러 서둘러 오는 어둠, 산등성이 안개비, 대롱거리는 마루의 전등, 헛간에 웅덩이를 파고 들어앉은 억세진 털가죽을 덮은 개, 그 둘러선 물상들의 웅성거림과 뒤척임 속에서 그 사람의 환청을 듣는 절체절명의 한 순간을 잡아낸 시인의 마음이 실은 기다림에 쉼 없이 소모되어 보았다는 것이다.
‘온다’, ‘떨어져’, ‘기어간’, ‘떨면서’, ‘켜고’, ‘구시렁거린다’, ‘뒤척인다’, ‘울린다’ 여러 동사들로 이어진 시 전편에는 제목에서처럼 “우산이끼” 같은 고요함과 적막이 있다. 소소한 움직임 속의 쓸쓸한 적막을 그려내는 솜씨가 각별하다.
플로티노스가 말한 바와 같이 눈이 태양과 같지 않고서는 태양을 볼 수 없다는 것처럼 동일성의 원리에 비추어보면 이윤학 시인의 인식은 선험적으로 비관적이다.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내가 불러 온 것인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간드레를 들고 드나드셨던 광부 아버지와의 추억을 보석처럼 간직하는 것을 보면 그 자신도 가출을 감행할 만큼 떠나고 싶었던 가난한 그 고향의 아들인 것이다. 그가 가진 어떤 파장이 조응하여 그를 가평으로 안동으로 오지를 떠돌게 하는 것 같다. 그 좋아하는 술도 끊고 출판사를 직접 운영하면서 책을 찍어내고 있는 그의 여생이 그의 시에서처럼 “활짝 핀 낮 별들이” 머무는 밝은 미래였으면 좋겠다.
나금숙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