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의 숨은 지사,
인쇄인『강은기 평전』 출판기념회 식순
▢ 개회사 : 정동익(사월혁명회 상임의장)
▢ 고 강은기선생 약력 보고
▢ 내빈 소개
▢ 축사
- 임채정 전 국회의장
- 인재근 국회의원
- 정동익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 이해학 목사
- 박성극 전민동 회장
- 박상희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
▢ 평전내용 중 고 강은기선생의 생전 연하장 시 낭독
- ‘송군영민送軍迎民’
▢ 축하의 노래
- 류민용(소설가, 전민동 전회장)
▢ 저자의 답례인사
▢ 광고
▢ 폐회
고 강은기선생 소개
평생을 인쇄업에 종사하며 산 강은기는 1972년 박정희정권의 10월 유신발표에 맞서 세진인쇄를 창립하여 이 땅의 민주화의 역사적 사명과 직업으로서 인쇄 일을 양손에 쥐고 살았다. 194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철학적 사고와 사회정의감에 익숙하여 약관의 나이에 4.19혁명의 대열에 몸소 체험하였다. 그 후 일부 탐욕스런 군부세력의 음모로 자행된 반역사적인 5.16쿠데타를 목도하고 절망하여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하여 근 2년 동안 행자생활을 하였다. 이를 계기로, 모태 기독교인의 가슴 한켠에 불교철학이 담겨 종교간 화해와 소통의 다리가 되어주었다. 류영모. 함석헌. 김재준. 서남동. 안병무. 장준하 등 선지식과 친견 사사하면서 진보적인 역사와 기독교사상의 기초를 다졌다. 중학동창이며 동지인 이해학목사와 함께 행동하는 신앙인으로서 독재정권의 반민주 역행의 어두운 길목에서 민주화열망의 사사건건의 시국사건에 개입.수용하여 의기 드높은 성명으로 포효하게 하고 압제의 언 땅을 녹이는 불쏘시개_이른바 '민주화의 P'를 끊임없이 제공하였다. 민주주의와 인권회복, 정의와 평화통일을 갈망하며 1972년 말 전남대 함성지 제작을 시작으로 1973년4월22일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와 박형규목사 구속사건’으로 알려진 ‘기독인 신앙선언문’을 손수 인쇄한 뒤로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성명서나 선언문 거의 대부분을 그의 손을 통하여 나부끼게 하였다. 진보 역사의 반석 같은 믿음과 고난 받는 민중에 대한 자비에서 우러나온 지사적 자세와 불굴의 강인함으로 능히 무거운 짐을 져왔기에 1973년 긴급조치1호로 구금된 이후 가장 많은 수사당국의 구금. 연행인물로 알려졌다. 그 중에서 긴 고초는 유신체제의 영구화를 저지하기 위해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의 사형선고 후 ‘김재규 항소이유서’를 인쇄하여 제공한 일로 1980년 3월31일 연행. 대전교도소에 구속되어 1년 1개월여 기간 모진 고문을 겪으며 지낸 시절이었다. 개혁교회 ‘회원교회’의 회원으로서 황영환과 교회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게 앞장서며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선례를 남겼으며 이때 동지들에게 보낸 ‘送軍迎民송군영민’의 연하장은 전두환 군부독재의 소멸과 민주주의를 향한 간절한 소망이었다. 상급학교 진학을 스스로 거부하고 스스로 ‘무식한 놈’으로 살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세속의 명리를 탐하지 않고 강자에 굴하지 않으며 약자를 섬겼다. 민주화운동에 몸 바치면서 그에게 빚진 동지들의 명부인 ‘외상장부’는 진정 이 땅이 민주주의가 고루 꽃피어 열매 맺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향기로운 거름으로 묻혔다. 앞에 나서기를 마다한 그가 앞장서 열성을 바친 모임은 한국인쇄문화운동협의회(1988년 창립 초대회장), 김근태를 지원 활동하는 국민정치산악회(1995년 창립 초대회장), 고향출신 민주인사들이 1984년부터 활동하는 전북민주동우회(2002년 회장)였다. 60평생 민중들의 고샅길에서 좀스럽게 정의의 활자를 뽑아 찍어 나르는데 주야불철 몸을 돌보지 않은 그는 어느 날 급습한 췌장암으로 투병하다가 2002년 11월 9일 이승의 연을 접었다. 그를 기리는 동지들의 정결한 마음을 모아 마석 모란 공원에 민주사회장으로 장례를 엄수嚴修하고 2003년 선생의 작고 1주기에 ‘지사志士 고 진주 강은기의 묘비’를 세웠다. 그 후 2005년에 민통련에서 그에게 창립 20주년 기념 공로상을 헌공獻供했다.
* 고 강은기 선생 연보
1942년 전북 남원 쌍교리에서 부친 강용갑, 모친 진차정의 장남으로 태어남.
1956년 용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원중학교 입학
1958년 남원중학교 3학년 졸업 4개월 남기고 자퇴
1959년 남원의 인쇄소에 취업하여 2년 동안 활판 인쇄기술 배움
1960년 3월 30일 상경. 이후 응암동 나300호 공동체 생활
1960년 4월 19일 4월 혁명의 대열에 참여함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발발 후 실망하여 5월말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출가
1963년 환속
1963년 남원중학교 동창인 이해학과 만남. 다시 응암동 나300호 공동체 생활
1964~1971년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인쇄공으로 일함. 이 시기에 흥사단, YMCA 등에서 류영모, 함석헌, 안병무 등을 만나고 수강. 개혁, 참여, 민중신학과 역사현실에 대한 성찰을 통해 시대 사명에 동참함
1972년 유신쿠데타에 맞서 세진문화사 설립(이후 세진인쇄로 운영) 이후 70~80년대 줄곧 유신반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이루어지는 곳에 쉼 없이 인쇄유인물을 제작하여 제공함
1973년 수도권도시선교사업위원회(KMCO) 시위에 참가하여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보름간 동부경찰서에 구금. 한통련 기관지 ‘민족시보’ 관련으로 중앙정보부에서 10일간 조사 받음
1975년 5월 17일 함석헌 선생 주례로 남원 양씨 양희선과 결혼(슬하 1녀 강신영, 1남 강동균)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서 제작 건으로 성남경찰서 연행
1978년 인권운동 관련 유인물 제작 건으로 서부경찰서 연행
1979년 허병섭 목사가 의뢰한 유인물 관계로 동대문경찰서 연행. 박형규 목사의 저서 해방의 길목에서 제작 중 중부경찰서 연행
1980년 ‘김재규 항소이유서’ 제작 건으로 구속, 5월 3일 서대문 구치소 수감.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관련으로 징역 3년 선고받고 1년 1개월간 투옥. 이후 많은 사건 유인물 제작으로 연행, 구류 및 구속됨
1988년 9월 3일 한국인쇄문화운동협의회 설립, 초대회장이 됨
1995년 국민정치산악회 창립, 초대회장이 됨
2002년 5월 전북민주동우회 회장. 췌장암 발병으로 백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 11월 9일 영면,
‘민주사회장’으로 장례 엄수 후 마석 모란 공원묘지에 안장
2005년 4월 민통련 창립 20주년 행사에서 공로상 수상
* 송군영민送軍迎民
겨울산하
부풀었던 갑자년도 그냥 가네
가야 할 것은 가지 않고-
그러니
봄이 와도 民의 싹은 나지 않고
여름이 와도 民의 푸르름은 없다
여름이 와도 民의 열매는 맺히지 않고
겨울이 와도 民의 눈은 나리지 않는다
다만
독사 두 마리가 땅속으로 들어갈 줄도
모르고
깡마른 겨울 산하를 횡행한다
독사의 배 밑에 깔린
혼절당한 民의 힘이여
솟구치어라
솟구치어라
여기서 질문을 받는 것은, 독사 두 마리가 누구누구냐는 것이다. 이들은 독사 두 마리의 지적 확인에 대한 호기심만 있지 독사로부터 당한 민의 고통엔 멀리 서 있다. 민의 고통을 안다면 분단현실을 잠시라도 외면할 수 없고, 독사는 바로 분단의 원흉 아닌가. 그런데 독사가 누구냐 하는 자기 앎의 충만감에 빠져 있다. 즉 소문에만 민감하고 소문에만 탐닉하는 무리들이다.
1985년 1월 1일 밤 記.
통일전년統一前年
___ 님
날 좀 봐
살아 있으므로 죽어 있는 나를
그래서 나는
살아 있는 너를 죽어 있는 것으로 본다.
새핸
자리 좀 바꿔보자
작은 것들도 살아 숨쉬게
나를 봐
죽은 것으로 살아 있는 나를
그래서 나는
죽어있는 너를 살아 있는 것으로 본다.
새핸
따로 사는 것을 버리자
함께 살게
1993년 말에
통일을 비는 말
강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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