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날짜 : 2020년 6월 13일(토)
관수교 (서울시 종로구 관수동 129와 중구 수표동 122 사이)
이름은 조선시대 이 근처에서 청계천 준설사업을 담당하였던 관청인 준천사(濬川司)가 수위(水)를 관측(觀)하였다는데서 유래하였다
건립 배경에는 슬픈 역사가 담겨있다
일제는 현재의 남산 예장동 일대를 일본인들의 전용공간으로 만들면서 통감부와 통감관저, 일본군 주차군 사령부(조선헌병대) 등을 세웠다
(주차군 사령부는 1908년에 용산으로 이전하고 이 자리에는 조선헌병대가 들어섰다 - 우리 군 수도경비사령부가 있었으며 현 남산골공원 이다)
이른바 왜성대이다
왜성대에서 순종이 머물던 창덕궁에 가려면 종로를 거쳐 남대문로를 통해 빙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일제는 자신들이 편하게 오갈 수 있게 왜성대와 창덕궁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길을 뚫었고, 청계천을 통과하는 다리로 놓은 것이 바로 관수교였다
(창덕궁과 조선헌병대까지 일직선으로 쭉 뚫려있었던 것이다)
즉, 관수교는 일제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1918년에 처음 세운 다리였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 당시 사라졌고, 2000년대 진행된 청계천 복원공사 때(2005년 9월) 7번째 다리로 재건되었다
수표교 (서울시 중구 수표동 43과 종로구 관수동 20 사이)
수표교는 만들어질 당시(1420년, 세종 2)는 그 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라 불리었다
1441년(세종 23) 다리 앞에 개천(開川, 청계천)에 흐르는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 보물 제838호)를 세웠다
(처음 다리를 세울 때는 나무로 만든 다리였다)
다리 아래에 ‘在長通橋東橋西中央立石標刻尺寸之數 凡雨水以知深淺(장통교 동쪽에 있고, 다리 서쪽 중앙에 석표를 세우고, 척촌을 새겨서 무릇 빗물의 깊고 얕은 것을 알았다)’고 기록하였다
그 후 1760년(영조 36)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庚(경)·辰(진)·地(지)·平(평)’이라는 글씨를 새겨 물높이를 4단계로 측정하였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라 부르게 되었다
원래 이 다리는 청계천 위에 놓여 있었는데,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철거되어 일시 신영동으로 이전되었다가 1965년에 장충단공원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터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105, 관수동 152-1)
한국 천주교회의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은 북경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Grammont, 梁棟材, 1736~1812, 요셉) 신부에게 1784년 2월경 세례명을 베드로로 정하고 세례를 받고 귀국, 그해 9월(음력)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42~1792), 정약용(丁若鏞, 요한, 1762~1836)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崔昌顯, 1759~1801, 요한), 최인길(崔仁吉, 1765~1795, 마티아), 김종교(金宗敎, 1754~1801, 프란치스코)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복음 선포 기능을 수행하는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신앙공동체가 출발하게 되었다
이벽의 집터는 정약용 '여유당전서'의 기록에 근거하여 수표교 남쪽, 현 표석 청계천 건너쪽으로 추정되나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이곳에 설치하였다
이벽은 사망 후 선산이 있는 포천의 화현리(현 포천군 내촌면 화현 3리)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두 부인도 훗날같은 무덤에 합장되었다
1979년 6월 21일 이들의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대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천진암에 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 1785년(정조 9) 서학이 문제가 되어 아버지가 그를 말리다가 자살하자 충격을 받고 천주교를 배교하였는데 이듬해 유행한 페스트에 걸려 사망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전태일 기념관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105, 관수동 152-1)
2019년 3월 완공되었으며, 2019년 4월 30일 정식 개관되어 1-3층이 전태일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4층은 노동 허브로, 5층은 노동권익센터가 입주하여 이용되고 있다
벽면에는 1969년 12월일19일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가 조형되어 있다
김수영 생가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96, 종로 2가 57-6)ㅍ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 158번지에서 아버지 김태욱과 어머니 안형순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터에는 ‘YBM 어학원’이 들어서 있다
신간회 본부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104, 종로 2가 55-1)
1927년 1월 창립 당시 신간회는 국일관 남쪽에 있던 이갑수의 저택(종로구 관수동 143) 사랑채를 얻어 사용하였는데,
그 뒤 종로3가 파출소 뒤편으로 옮겼다가, 1929년 이 곳 종로 2가 덕원빌딩 2층으로 이전하였다
♤ 신간회(新幹會)
1927년 2월 15일에 사회주의, 민족주의 세력들이 결집해서 창립한 항일단체로, 1931년 5월까지 지속한 한국의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단체는 전국구는 물론 해외 지부까지 두고 있는 단체로 회원 수가 3~4만여 명 사이에 이르렀던 대규모 단체였다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조선민족운동의 대표단체로 발족했다
사회주의계, 천도교계, 비타협 민족주의계, 기타 종교계 등 각계각층이 참여했으나, 자치운동을 주장하던 민족개량주의자들은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1929년 6.10만세 사건 등에도 많은 역할을 하였으나 내부 갈등을 겪는 등으로 결국 1931년 5월 16일 창립대회 이후 처음으로 연 전체 대회에서 찬성 43, 반대 3, 기권 30으로 신간회는 해소안을 가결하고, 창립 4년여 만에 사실상의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새 단체 조직을 안건으로 해 논의를 진행하려 했으나 일제 경찰의 강압으로 신간회는 완전한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 종로 2가 덕원빌딩은 유한양행의 창립터이기도 하다
1926년 유한양행의 창립자 유일한은 미국의 사업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1926년 12월10일 덕원빌딩에 미국식 약방인 '유한양행' 을 창립한다
유한양행은 자신의 이름을 딴 유한(柳韓)과 세계로 통한다는 뜻의 양행(洋行)을 합친 말이며, 유한양행의 상징마크인 버드나무는 서재필 박사가 제작하여 선물한 것으로, 지금까지 90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 번도 변경된적이 없는 장수 로고이다
♤ 유일한의 원래 이름은 유일형(柳一馨)이었으나, 1911년(16세) 때 미국 네브래스카州 헤이스팅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유일한(柳一韓)이라는이름을 사용한다
국일관 (서울시 종로구 수표로 96, 관수동 20)
1920년 무렵 문을 연 유흥음식점
1921년 7월 27일 영업규칙 위반으로 당시 종로경찰서로부터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가 그해 8월 12일 심진택(沈振澤)의 명의로 다시 허가를 받아 재개업을 하였다
주로 장사하는 신흥부호의 출입이 잦았고, 당시 명월관(明月館)·장춘관(長春館)·식도원(食道園) 등과 함께 한국요리 전문점으로 이름이 높았다
1934년경 경영주인 최남(崔楠)은 당시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기붕(李起鵬)을 지배인으로 고용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혼란기에는 간첩사건으로 연루되었던 기생 김소산도 국일관에서 일하였다
한국전쟁 뒤부터는 정객·기업가 등의 출입이 잦았으며, 당시 송죽관(松竹館) 등과 함께 일류요정으로 손꼽혔다
국일관의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개점 당시부터 현재까지 존속되어온 상호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1997년 ‘국일관프라자’라는 현대식 첨단복합빌딩으로 변신하였고, 2000년 12월에는 지하 7층 지상 15층 초현대식 건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국일관프라자는 현재 국일관 드림팰리스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관원 터 (서울시 종로구 수표로 90, 관수동 144)
3·1운동 당시 학생단 독립운동을 태동시킨 곳으로 중국음식점 대관원이 있던 곳이다
1919년 1월 27일의 대관원(大觀園) 모임은 중앙YMCA 회우부 간사 박희도가 학생회원 모집을 명목으로 주선한 자리였다
모임에 참석한 전문학교 학생들은 김원벽·한위건·김형기를 비롯해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 경성전수학교의 윤자영·이공후,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주종의, 그리고 보성법률상업 출신으로 대종교회에 근무하고 있던 주익과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배화여학교 교사로 있던 윤화정 등 10명이었다
밤 9시부터 11시까지 2시간에 걸쳐 관수동 화교촌에 위치한 중국요리점 대관원에서 진행된 이날 모임에서는 세계 정세와 파리강화회의 상황 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학교끼리 연락을 취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의견이 제출되었으나, 찬성론과 시기상조론으로 나뉘어 결론을 보지는 못했다
대관원 모임은 서울 시내 전문학교의 대표가 될만한 학생들이 한 데 모였다는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회합이었다
이후 학생 독립운동의 주도체로서 학생단의 조직구도가 이날의 모임을 통해 그 윤곽을 잡았기 때문이다
피맛골을 지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로 북쪽에만 피맛골이 있는걸로 안지만 남쪽인 이곳에도 피맛골이 있었다)
피맛(避馬)골에 관한 설
설 1)
조선시대에 서민들이 큰 길을 지나다가 벼슬아를 만나면 엎드려 절을 해야만 했다
이런 일이 빈번해지자 서민들은 마차를 피해서 뒤편의 좁은 길로 다니게 되었다
이 좁은 길을 따라 주점이나 국밥집 등이 생겨났고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다
말을 피하는 골목이라 피맛(避馬)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설 2)
지금의 세종로는 조선시대 한양의 중심 도로로 주로 남들에게 피마(避馬)할 필요가 없는 고관대작들이 지나다녔다
왕이나 고관대작의 행차에는 '휘이 물럿거라~ ㅇㅇ대감 행차시다~'라며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거덜꾼들이 있었고, 이 거덜 행렬과 만나면 아랫계급 사람들은 피마 예법에 맞취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했다
그러다 보니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들은 이 거덜행렬과 만날 때마다 말에서 내려야 해서 지각하기 일쑤였다
이로 인해 업무상 차질이 심해지자 결국 조정에서 하급관리들이 바로 내달릴 수 있는 길을 만들었고 이 길 이름이 피맛길이 된것었다
설 3)
말과 소달구지가 지나가는 종로대로는 말똥과 소똥이 너무 많아 걷기에 적합한 길이 아니었다
특히 비가오는 날이면 오물투성이라 악취도 심하고 걷기엔 최악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로대로가 아닌 뒷길로 다녔고 피맛길이 된것이다
붉은선 부분이 조선시대의 피맛골이다
서울극장 스타벅스에서 차 한잔으로 오늘의 일정을 마친다
을지로3가역을 출발하여 종로3가역까지 오늘도 일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우리 님들 모두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ㅁ^
첫댓글 학창시절 만났던 을지로와 청계천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