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가 지난 2021년 3월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잠들어 계신
홍·유릉 앞에 조성한
복합문화공간인
‘리멤버(REMEMBER) 1910’
시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남양주 리멤버 1910'
중부일보 기사 입력 : 2022.09.22. 16:43, 수정 2022.09.22. 17:43
김규원 남양주시청 학예연구사
널리 알려져 있듯이 박물관을 의미하는 영어의 뮤지엄(museum), 프랑스어의 뮤제(musee), 독일어의 뮤제움(Museum) 등은 모두 고대 그리스의 뮤즈(Muse)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 안의 보물 창고인 무세이온(museion)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박물관은 서기전 3세기경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무세이온에서 비롯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세계 최초의 박물관 형태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박물관이 등장한 것은 1909년 창경궁에 ‘제실박물관’을 개관하면서부터이다. 100년 넘게 우리와 함께 한 박물관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곳일까? 한때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의무적(?)으로 방문하거나 방학 때 숙제를 하기 위해서 찾던 박물관은 그저 지루하고 재미없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박물관의 체험·교육프로그램이 활성화되면서 박물관은 시민들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삼삼오오 들려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문화공간으로 변하였다. 특히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이 늘어나면서 박물관은 학예사를 비롯한 전공자들의 리그에서 시민들이 재능기부를 할 수 있는 공간이자 제2의 삶을 보내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수도권 지역의 새로운 문화도시로 떠오르고 있는 남양주시는 지난 2021년 3월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잠들어 계신 홍·유릉 앞에 복합문화공간인 ‘리멤버(REMEMBER) 1910’을 새롭게 조성하였다. REMEMBER 1910은 시민들이 우리 민족의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인 경술국치가 일어난 해이자, 이석영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국 광복을 다짐하며 중국 만주로 망명을 떠난 1910년을 기억하고자 하는 남양주시의 다짐을 의미한다. 아울러 무명의 독립투사들의 피와 땀, 정신을 이어받아 지난 날의 아픈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다짐하는 역사문화공간이기도 하다.
남양주 독립운동가 102분의 명단을 새긴 ‘독립의 계단’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REMEMBER 1910은 역사법정, 역사감옥, 독립의 계단, 미디어 홀 등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역사법정 ; 반민족행위처벌 특별법정’은 청소년들이 직접 판사와 검사, 그리고 변호인이 되어 을사오적 등 친일파를 심판하며 올바른 역사관을 수립할 수 있는 곳으로 학교와 청소년 단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대표적인 공간이다.
REMEMBER 1910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정년 퇴임한 중·고등학교 선생님, 지역 문화활동가 등 모두 10여 명으로 구성된 ‘시민도슨트(Docent)’선생님들이다. 시민도슨트는 약 3개월에 걸친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특이한 점은 일반적인 도슨트처럼 단순히 전시 관람만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전시 및 교육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는 등 학예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8월부터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남양주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특별기획전 '대한독립만세를 잇다'를 기획, 운영하고 있다. 시민도슨트는 활동비를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명예가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누가 강제로 시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남양주를 사랑하는 분들이 조금이나마 자신들의 재능을 지역에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활동이다.
근래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지역을 상징하는 문화공간을 조성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크고 웅장하게 건물을 짓는다고 해서 저절로 멋진 문화공간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의식 있는 지자체와 열정 넘치는 학예사, 그리고 그 누구보다 지역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시민들이 서로 만났을 때 시민들이 언제나 찾을 수 있는 진정한 랜드마크로서의 문화공간이 탄생한다. REMEMBER 1910이 개관한 지 1년 만에 남양주의 ‘마인드마크’로 자리잡는 데에는 그 누구보다 남양주를 사랑하는 시민도슨트의 역할이 매우 컸다. 앞으로도 더욱 멋진 활동을 기대해 본다.
‘리멤버(REMEMBER) 1910’에
전시되어 있는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의
흉상
이석영, 독립운동 명문가 이회영 일가의 숨은 영웅
《그 뜻 누가 알리오!》, 노항래, 도서출판 은빛
우지원 기자 basicform@naver.com 11:42:34
우리문화신문 기사 등록일 : 2021.07.26.
영석 이석영(穎石 李石營).
그 이름을 세간에 묻거든 십중팔구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할 것이다.
그만큼 이석영 선생은 역사에 기록 몇 줄 남기지 않은 채 조용히 스러져갔다. 한때는 조선을 주름잡는 권문세족의 후계자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재산은 조선 팔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엄청났고 벼슬은 고종을 지척에서 보좌할 만큼 높았으며, 집안 또한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삼한갑족이라 불리는 명문가였다.
그러나 망국은 오고야 말았다. 나라의 녹을 받던 이들은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협력할 것인가, 묵인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아도 됐다. 그저 묵인만 하면, 그때까지 누리던 것을 그대로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이석영과 그의 형제들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다시 없을 선택을 한다. 누대에 걸쳐 쌓은 재산과 지위,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가 전체가 만주로 떠난 것이다.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렇다. 올해 6월 남산예장공원에 개관한 ‘이회영기념관’의 주인공인 우당 이회영 선생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형이 바로 이석영 선생이다. 그러나 이석영 선생의 존재는 아는 이도 적을뿐더러, 걸출한 독립운동가로 이름 높은 두 동생의 명성에 가려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하긴, 그간 사회 각층에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이회영 선생조차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형편이니, 이석영 선생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이 집안의 독립운동을 가능케 했던 숨은 기둥이자,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섯 형제의 둘째이자, 만주 지역 수많은 조선인을 독립투사로 길러낸 장본인이었던 이석영 선생을, 이제는 기억해야 한다.
저자 노항래는 어렵사리 선생의 기록을 모으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 약전 《그 뜻 누가 알리오!》를 펴냈다. 필자는 우당 이회영 선생을 존경하여 관련 책을 여러 차례 읽었으나 그때마다 이석영 선생의 존재는 스쳐 지나가듯 서술되어 자세히 알 기회가 없다가, 마침 이석영 선생 약전을 발견하고 무척 기쁜 마음으로 읽게 됐다.
이 책을 읽으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그는 누군가의 형으로만 기억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물이다. 이 집안의 독립운동은 이석영 선생이 전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기에 가능했다. 바로 그가 구한말 만석꾼 이유원 대감의 양자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은 당대의 손꼽히는 거부였기 때문이다.
이석영 선생은 1855년(철종 6년)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유승은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후일 이조판서에 올랐다. 위로는 형 건영이 있고, 아래로 네 명의 남동생 철영, 회영, 시영, 호영이 있는 여섯 형제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어릴 적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우나 첫 번째 부인과 20대 초 사별했고, 과거에 몇 차례 응시했으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헌헌장부에다 “잘생기고 반듯해서 이웃들이 가장 탐내하던 아들”이라는 전언이 있다. 여섯 형제의 우의가 장안에 소문이 날 만큼 좋아 모두가 부러워했다.
그가 서른 살이 되던 1885년, 삶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 영의정을 지낸 거물급 관료이자 한양 인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였던 친척 이유원의 양자로 입적된 것이다. 생부 이유승은 아끼던 둘째 아들을 보내려 하지 않았으나, 이유원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양자 입적을 청원할 정도로 간절히 염원한 끝에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되었다.
당대 최고 권력자의 양자로 입적된 그는 곧 조정에 출사해 관료 생활을 시작한다. 연로한 양부 이유원은 3년 뒤 세상을 떠났고, 양부의 재산은 대부분 이석영 선생에게 상속되었다. 이유원은 세칭 ‘가오실 대감’으로 불렸는데, 이는 양주(현재의 남양주) 가곡리의 옛 지명 ‘가오실’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양주 대부분이 이유원의 땅이었을 만큼 광활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구한말 10대 부자, 한양 3대 부자로 꼽히던 이유원의 재산을 상속받은 이석영 선생은 자연히 거부가 되었다. 관직 생활 또한 무난히 이어가며 고종의 측근 관료로 활약했으나 1894년 이후부터는 관직을 거부하며 칩거했다. 그리고 1904년 쉰 살의 나이로 모든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고, 이후에는 육영사업에 매진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그리고 1910년, 완전히 국권을 빼앗긴 뒤인 9월의 어느 날, 여섯 형제는 가문의 명운을 건 일생일대의 회의를 시작한다. 당시 그들은 명실상부한 대한제국 최고위급 사회지도층이었다. 여섯 형제 모두 크고 작은 관직을 맡았던 고종의 신하들이었고, 양반 학인으로 배우고 익히기를 게을리하지 않던 지식인이었다.
이 회의에서 여섯 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해 일가 전체가 만주로 떠나기로 결의한다. 일제의 눈을 피해 헐값에 처분한 재산은 약 40만 원, 1969년 《신동아》가 환산한 가치로는 약 600억 원이었다. 이 재산의 대부분은 이석영 선생이 소유하던 땅에서 나온 것으로, 그의 결단 없이는 마련할 수 없는 자금이었다.
마침내 1910년 12월 30일, 여섯 형제와 40여 명의 일가는 서울을 떠났다. 당시만 해도 그 여정이 20년이 넘는 긴 싸움이 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이후 만주에서 여러 차례 고비를 넘겨 가며 조선인이 살 땅을 사들이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조선인 학교를 세운다. 이석영 선생은 이 모든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묵묵히 지원하며 힘을 보탰다.
(p.90) …이석영은 경학사 발기인 명단에 이상룡에 이어 두 번째로 기재되어 있다. 이때 이석영은 동생들에게 피력했다고 한다. “앞으로 나는 뒤에서 일하겠다. 앞에 나를 내세우지 않도록 하라. 무엇보다 내가 돈 가진 것을 알면 필경 여기저기서 달려들어 우리의 대사를 그르칠 수가 있다.” 그 뒤부터 이석영이 도모하고 참여하는 일에서 재정은 이석영이 뒷받침하지만, 조직의 직위나 일은 동생들, 다른 지인이 맡게 된다. 이석영은 모든 단체나 운영체에서 후견자 역할만 충실히 할 뿐 나서지 않았다. 돈 가진 걸 드러내지 않고 대사를 그르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
그러나 그의 재산도 화수분이 아니었다. 10년 동안 각종 독립운동 사업에 자금을 아낌없이 쏟아붓자 만석 재산도 바닥을 드러냈다. 1920년 말, 점점 심해지는 일제의 만주 침탈로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고 민족학교 육영사업도 더는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이 무렵 이석영 선생은 고령에다 무일푼이 되어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p.132) …나이는 환갑을 훌쩍 넘었고, 몸은 병들었다. 무엇보다 더는 독립운동 사업을 벌이고 뒷받침할 재산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석영은 회영, 시영이 앞서서 독립운동을 벌이면 뒤를 돌보고 뒷받침하는 양상이었는데, 1920년 즈음부터는 사실상 일선에서 물러서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남은 일들은 또 다른 이들, 후대들, 새로이 사업에 나서는 선각자, 독립운동가들의 몫이었다. 그의 때가 다 간 셈이었다. 그는 그로부터 14년여를 더 살다 갔다. 짧지 않은 날들이다. 그 14년을 추정해보면 느리고 길게 서산에 해가 지듯 그렇게 한 삶이 스러지는 시간이었다. 안타깝고 슬프고 숙연한 시간이다.
그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이회영 선생 또한 굶기를 밥 먹듯 했고, 도저히 생계를 이어갈 수 없어 아내는 국내로 들여보내고 아들과 딸은 보육원에 맡겨 길렀다. 임시정부를 지켰던 동생 이시영 선생 역시 국내에서 들어오는 독립운동 헌납금에 의지해 죽이라도 먹는 날과 굶는 날을 반복하고 있었다.
여섯 형제의 자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흥무관학교에서 보고 배우며 항일투사로 자라났고, 이석영 선생의 큰아들 이규준과 작은아들 이규서 역시 독립운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아버지 이회영을 따라 위험한 항일결사조직에 복무하던 이규준은 1928년 북경 석가장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p.148) 얼마 후 풍문에 석영의 아들 규준의 소식이 북경에 들이닥쳤다. 기둥 같은 장남이 비명에 갔다는 것이었다. 독립투쟁 과정에서 죽은 시신이라도 찾는 것은 사치였을까? 어디서 어떻게 적이 놓아둔 덫에 걸렸는지, 규준은 비밀 약속 장소에 도착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우민 심문조서 등 병사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역시 시신 수습과 장례가 죽음이라는 건 틀림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식 잃은 이석영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첫아들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남은 둘째 아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둘째 아들 이규서는 동생 이회영을 일제에 밀고하는 일에 가담해 버렸고, 결국 독립운동 동지들에게 1933년 처단되었다. 이석영 선생은 어떤 경로로든 그 죽음의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끔찍이 아끼던 동생 이회영을 죽음에 이르게 한 아들, 그리고 그 하나 남은 아들마저 잃게 된 노인의 심정. 그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일까. 그는 1934년, 80살을 일기로 영면한다.
(p.167) 그리고 해가 바뀌어 갑술년 새해 벽두 음력 1월 4일 이석영은 곡절 많은 한 삶을 마쳤다. 그 자신 일생의 영화를 포기하고 아들들은 모두 독립운동이라는 커다란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비명에 가 절손된 이석영은 상해 프랑스 조계 허름한 집 다락방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조선에 남았더라면,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민족의 고통을 지켜보며 영달을 누리느니 모든 걸 버리고 맞서 싸우는 길을 택했다. 이 나라를 지켜내야 할 ‘내 나라’로 생각하는 진정한 주인의식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은 나라와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회지도층으로서 책임을 졌고, 자신들이 가진 모든 걸 내놓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통감하기는 커녕 자신이 누려온 것들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는 기득권층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상류의 태도를 행동으로 보여준, 한국 역사에 보기 드문 진짜 상류층이었다.
이석영 선생이 이토록 풍상을 겪고 자손마저 절손된 것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는데, 마침 서평을 쓸 무렵 기적처럼 반가운 기사를 보았다. 이석영 선생의 잃어버린 증손녀를 찾았다는 기분 좋은 기사였다. 저자가 이 집안의 독립운동에서 여성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을 아쉬워했던 만큼, 이를 계기로 더 많은 기록이 발굴되어 이 가문의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졌으면 한다.
저자는 연구자들이 보기에는 많이 미흡할 것이며 자료조사 중 느낀 감동을 필력이 부족해 온전히 옮기지 못하였다고 겸양하였지만, 이석영 선생의 인생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의 서사, 관련 독립운동사까지 오롯이 복원해낸 저자의 노고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진정 가슴이 뭉클해지는 경험이었다.
‘리멤버(REMEMBER) 1910’에 있는
역사법정(반민족행위처벌 특별법정)
재현 공간
‘리멤버(REMEMBER) 1910’에 관한
안내문
‘리멤버(REMEMBER) 1910’에 있는
이석영 선생 6형제와
대한민국을 빛낸 대표적인 위인 6명이
서로 손을 마주 잡고
글로벌 시대를 이끌어 가는
한민족의 기상을 표현한
상징 조형물인
'빛을 잇는 손'에 관한
안내문
영석 이석영(穎石 李石營)
목차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2. 생애
백사·이항복(李恒福)의 10대손이며 이유승(李裕承)의 6형제 중 둘째 아들로서 조선 말기의 개화파 문신 귤산 이유원(李裕元, 1814년 ∼ 1888년)에게 입양되어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임하려(林下廬)에서 살았다. 21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장례원소경을 거쳐 종2품 가선대부에까지 오른다. 1910년 가장 먼저 독립 운동에 뛰어든 동생인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년 ~ 1932년)의 권유로 가곡리의 모든 땅과 재산을 처분하여 형 건영(健榮, 1853년 ~ 1940년), 동생 철영(喆榮, 1863년 ~ 1925년) 회영(會榮), 시영(始榮, 1869년 ~ 1953년) 호영(1875년 ~ 1933년) 등 6형제와 그의 가족들은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주를 하였다. 당시 6형제가 가지고 간 돈은 엽전 26가마였으며 그중 이석영은 가곡리의 소유 전답 6,000석 토지를 매각하여 현금 40만원(당시 쌀 1석은 3원이었음)을 내어놓아 가장 많은 액수였다.
많은 사람들이 여타 매체를 통해 6형제가 삼한 갑족으로 대대로 갑부 집으로 아는데 실제로 방송에서 나오는 남양주 땅은 죄다 이석영이 양자로 들어간 이유원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이유원은 흥선대원군 시절 유명한 부호였는데 집권 초기에 정치 자금을 제공한 걸로도 유명하다. 당시 기준으로 이석영은 조선의 부호 순위 4위라고. 경기일보에 따르면 이석영이 물려받은 액수는 현재가치로 1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석영이 유별나게 부자고 나머지 형제의 부도 대단해서, 명동성당 주변이 6형제 집안의 땅이었다. 오늘날에도 우리 나라에서 가장 비싼 동네인 서울 도심의 땅들을 형제끼리 나눠가지고 있었다는 말. 그리고 그러한 땅들과 재산을 모두 처분해 독립 운동을 위해 쓴 것도 더더욱 놀랍다.
6형제는 제일 먼저 한인 자치 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국내에서 모여든 청년들에게 구국의 이념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켜 조국 광복의 중견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 강습소를 개소하였다. 이것이 바로 신흥 무관 학교의 전신이다. 1911년 4월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하니 변영태, 성준용, 김련 등 40명이다.
신흥 강습소의 본관과 사옥을 준공하고, 1913년 신흥 중학교로 개칭하고 군사반을 두었다. 1919년 중학교를 폐지하고 신흥 무관 학교로 개칭하니 1920년 폐교 때까지 10년간 2,100명의 독립군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은 청산리 대첩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때 이석영의 큰 아들 이규준(李圭俊)은 항일 독립 운동가가 일제의 회유로 변절하여 독립 운동 진영에 피해를 주는 자들을 체포 암살하는 ‘다물단’의 단장으로 활동하던 중 북경에서 암살되었다. 이규준의 동생인 이규서는 일제에게 회유당해 변절해서 자신의 숙부인 이회영을 밀고해서 죽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밀정이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규서는 상해한인청년당의 이사를 맡으면서 독립운동에 관여했지만 이회영 사후, 밀고 사실이 발각되어 독립 운동가들에 의해 끌려가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김구가 상해의 친일파를 연쇄처결하도록 결심하게 되며, 결국 다음 해에 옥관빈 피살사건까지 이어진다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 내용 역시 김구가 공식 발표한 주장이 아니다.
총독부 문서에는 옥관빈에 대해 ‘배일선인’·‘불령선인’ 이라는
언급은 있을지언정 그가 총독부의 밀정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옥관빈이 친일밀정인지 정부와 학계에서 진상규명에 나섰고 증거없는 무혐의라 결론났다
이규서의 밀정설 역시 확인이 필요하다.
신흥무관학교의 실질적 설립자 이석영은 가난에 지쳐 두부 비지로 연명하다가 굶어서 별세하였다. 화도읍 가곡리에 이석영이 살던 이하려의 터에는 노거수 은행나무만 서 있으며, 원찰인 보광사(普光寺)가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3. 기타
이규준의 후손은 1927년 일제에 의해 몰살당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3명의 딸이 있었으며, 이들이 이규준 사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와중에 딸들은 호적상의 부친 또한 다른 이름으로 올라가 있어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입증할 증거를 대만에서 발견하여 보훈처는 확보한 자료와 유전자 검사 결과 등을 종합해 외부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독립유공자 후손 확인위원회'에 상정해 2022년 2월 23일 세 딸의 자녀 중 10명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최종 확인했다고 밝혔다.
남양주시에서 이석영을 기리기 위해 이석영광장과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을 만들었다. 이석영광장에는 1910년대 독립운동에 관한 작은 전시관과 빵집들이 있다.
‘리멤버(REMEMBER) 1910’에 있는
조각작품 '빛을 잇는 손'
‘리멤버(REMEMBER) 1910’에 있는
미디어 홀
‘리멤버(REMEMBER) 1910’에 있는
회의실
‘리멤버(REMEMBER) 1910’에 있는
카페
‘리멤버(REMEMBER) 1910’에 있는
안중근 의사 수감실 재현공간에 관한
안내문
‘리멤버(REMEMBER) 1910’에 있는
안중근 의사 수감실 재현공간
‘리멤버(REMEMBER) 1910’에 있는
일제 시대 독립운동가 수감실
재현공간
‘리멤버(REMEMBER) 1910’ 앞에 있는
이석영 광장에 관한
안내문
‘리멤버(REMEMBER) 1910’ 앞에 있는
이석영 광장
홍유릉과 후궁 묘에 관한
안내도
남양주 홍릉과 유릉에 관한
안내문
홍유릉(洪裕陵)
대한제국 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洪陵), 순종과 두 황후의 무덤 유릉(裕陵)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다. 일단 능원은 따로지만 바로 옆에 붙어있기 때문에 홍유릉으로 합쳐 부른다. 소재지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이름을 따서, 때론 '금곡릉'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외에도 엄밀히 홍유릉에 포함된 곳은 아니지만 바로 곁에 영친왕·이방자의 묘로서 조선 왕릉의 격식으로 조성한 영원(英園), 그리고 회은황세손 이구의 묘인 회인원(懷仁園)을 포함한 2기의 원(園) 및 의친왕·의친왕비가 합장된 의친왕묘와 덕혜옹주묘를 포함한 왕자녀의 묘 2기, 그리고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 귀인 이씨묘, 삼축당 김씨묘, 귀인 장씨묘, 의친왕의 첩인 수관당 정씨묘, 수인당 김씨묘를 포함한 후궁의 묘 5기가 홍유릉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어 대한제국 황실의 가족 묘역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대한제국이 선포 후 2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친 후 남북한 모두 공화정이 들어섰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며, 대한제국이 황제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유일한 황제릉(皇帝陵)이기도 하다.
조선왕릉 중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었기 때문에 다른 왕릉에 비해서 가장 최근에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홍유릉 근처에 광해군묘가 있는데 이쪽은 폐위된 까닭에 왕릉이 아니다. 또 광해군묘보다는 멀지만 같은 남양주 안에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 묘소도 화도읍에 있는데 원래 서울 공덕동에 있던 것을 남양주로 이장하였다. 비록 부자관계지만 실제로는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장례식에도 불참하였을 정도였는데 을미사변 이후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선왕릉 중에서는 최초로 조선왕조 이후의 시대(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유일한 왕릉이다.
홍릉(洪陵)
조선의 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의 합장릉 형식의 황제릉.
명성황후 사망시엔 서울시 청량리에 안장했으나 고종 사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전하여 같이 안장했다. 유릉과 더불어 석물과 침전 등을 황제릉의 형식으로 구성했는데, 그렇다고 중국 황제릉 형태를 그대로 가져온 것은 아니고 기존 한국 왕릉 특유의 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명나라 홍무제가 안장된 효릉(孝陵)의 묘제를 참고했다.
유릉(裕陵)
대한제국 2대 황제인 순종효황제과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의 능. 고종의 홍릉옆에 있다. 홍릉과 더불어 홍유릉으로 많이 불리는 편이며 드물게 한 봉분에 세 사람을 같이 모신 것이 특징.
홍릉과 마찬가지로 순명효황후 민씨 사망시엔 양주 용마산(현 서울 광진구 능동 서울어린이대공원)에 안장해 유강원(裕康園)이라 했으나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비였던 민씨를 황후로 추존해 유릉(裕陵)으로 높여졌다. 순종 사후 남양주시 금곡동 홍릉 근처로 이전하여 함께 안장했으며, 순정효황후 윤씨가 1966년 사망하자 3명의 부부가 함께 안장됐다.
4. 홍릉과 유릉 명칭 비화
왕실의 예법에 따르면 왕비가 왕보다 먼저 사망하면 일단 별도의 능호를 사용하며, 국왕이 승하한 후 왕비와 함께 합장할 때 새로이 올린 국왕의 능호를 따르게끔 되어있었다. 가령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및 계비 인목왕후의 경우 1600년 승하한 의인왕후에게 유릉(裕陵), 1608년 승하한 선조에게 목릉(穆陵), 1632년 승하한 인목왕후에게 혜릉(惠陵)이라 능호를 올렸지만 최종적으로는 선조의 능호인 목릉을 따랐다.
그런데 고종의 경우 명성황후는 이미 1895년 을미사변으로 먼저 비명에 갔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할 당시에는 대한제국이 문을 닫은 상태였으며, 더군다나 일제는 한일합방 조약을 맺을 때 '왕공족의 분영은 묘로 한다'는 왕공가궤범 200조의 규정을 만들어서 대한제국 황족이 이후에 죽더라도 새로운 능(陵) 또는 원(園)을 만들지 못하도록 막아둔 상태였다. 따라서 이 규정을 따른다면 고종의 무덤은 일반 백성과 같은 '묘'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이전에 조성된 능들은 이 규정의 해당사항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을 옮겨서 합장하는 방식을 취하면 이를 피할 수가 있었다. 즉 고종의 경우는 명성황후의 무덤으로 이미 만들어져 있던 '홍릉'에 고종이 안치되는 식이다. 이는 왕이 뒤늦게 사망하면 새로운 능호를 올리던 원래 예법과 약간은 어긋나더라도 일단은 새로 능을 만든 게 아닌지라 규정(왕공가궤범 200조)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일제는 이왕가(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를 일본 천황가 보다 아래지만 화족보다 높은 지위로서 우대할 것을 경술국치 때 보장했다. 그래서 이왕가 내부적인 방침에 일제가 세세하게 간섭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고종과 순종의 능이 예법에 맞게 조성될 수 있었다.
따라서 1897년 청량리에 조성된 명성황후의 홍릉을 남양주 금곡동으로 이전하면서 동시에 고종황제와 합장하는 형태로 지금의 홍릉이 완성됐다. 마찬가지로 1926년 승하한 순종 또한 1905년 용마산에 먼저 조성돼 있던 순명효황후의 유릉을 남양주 금곡 홍릉 옆으로 이전하면서 동시에 합장하는 형태로 지금의 유릉이 되었다.
여담으로 이장된 후 비어진 홍릉 자리에는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의 무덤인 영휘원(永徽園)과 그녀의 손자이자 영친왕의 장남인 이진의 무덤인 숭인원(崇仁園)이 조성되었다. 현재도 '구 홍릉' 지역으로 흔히 '홍릉로'란 도로명이 있으며, 홍릉 수목원이 위치하고 있다.
매표소 앞에 있는
홍릉.유릉 역사문화관
홍릉.유릉 역사문화관에 전시되어 있는
홍릉과 유릉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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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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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과 순명황후와 순정황후의 능인
유릉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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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릉 관람권
순종과 순명황후와 순정황후의 능인
유릉
유릉의 재실
순종과 순명황후와 순정황후의 능인
유릉
순종과 순명황후와 순정황후의 능인
유릉
유릉 정자각의
내부 모습
유릉의 비각
유릉의 비각 안에 있는
묘비
유릉의 비각에 있는
묘비의 비문
번역
유릉의 수복방
유릉의 수복방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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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과 순명황후와 순정황후의 능인
유릉
유릉의 제정
유릉의 제정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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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릉과 홍릉의 사이에 있는
연지
유릉과 홍릉의 사이에 있는
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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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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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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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의
재실
홍릉의
정자각(좌)과 비각(우)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
홍릉 비각
홍릉의 비각에 있는
묘비
홍릉의 비각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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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
영원으로 가려면 통과해야 하는
홍릉 옆에 있는 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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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재실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 영왕 이은과
그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안장되어 있는
무덤인
영원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 영왕 이은과
그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안장되어 있는
무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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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英園) : 영친왕 부부의 합장묘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 영왕 이은과 그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안장되어 있는 무덤. 이곳은 영친왕이 생전에 황제에 오른 적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서, 고종 이전 다른 역대 조선왕릉들처럼 제후국의 왕릉 양식으로 능원을 조성했다. 홍유릉과 영원을 비교해보면 황제릉과 제후왕릉의 차이점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 영왕 이은과
그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안장되어 있는
무덤인
영원
영원(英園)의 묘비
영원(英園)의
묘비 비문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 영왕 이은과
그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안장되어 있는
무덤인
영원에 관한
안내문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 영왕 이은과
그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안장되어 있는
무덤인
영원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 영왕 이은과
그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안장되어 있는
무덤인
영원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의
차남이자, 마지막 황세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회은황세손 이구가
안장된 무덤인
회인원(懷仁園)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의
차남이자, 마지막 황세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회은황세손 이구가
안장된 무덤인
회인원(懷仁園)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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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인원(懷仁園)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의 차남이자, 마지막 황세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회은황세손 이구가 안장된 무덤.
한동안 봉분만 남아 있었으나, 문화재청의 심의(2021년)를 거쳐 지금은 원(園)의 격에 맞게 주변에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영원(英園)의 정자각
영원(英園)의
정자각과 비각
2024년06월16일(일요일) 남양주시 [홍유릉&백봉산&천마산] 산행기
산 : 남양주시 [홍유릉&백봉산&천마산]
[한북정맥 수원산 부근에서 뻗어나온 천마지맥은 주금산을 필두로 철마산~천마산~백봉산~예봉산을 지나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곳에서 맥을 다한다. 수도권 동쪽의 장벽을 이룬 산줄기답게 자연스레 운해 명소인 산이 많다. 그 중에서도 고도가 높고, 남양주 시내에 접해 있어 접근이 쉬운 천마산은 소문난 雲海 명산이다.]
산행코스: [금곡역 1번 출구~(0.7km)~리멤버1910~홍유릉 탐방(탐방 이동거리 3.5km)~리멤버1910~(5.3km)~백봉산 정상~(2.2km)~마치고개~(3.5km)~천마산 정상~(3.2km)~천마산입구종점.수진사 정류장] (18.4km)
산행일 : 2024년06월16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남양주시 금곡동 최저기온 18도C, 최고기온 31도C]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8시간29분 소요)
07:31~09:45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종로3가역으로 가서 1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회기역으로 간 후 경춘선으로 2차 환승하여 금곡역으로 이동 [2시간14분 소요]
09:45~09:57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404-278 번지에 있는 금곡역 1번 출구에서 산행출발하여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번지에 있는 경기 남양주시 경춘로 946 지하1층에 있는 리멤버1910으로 이동
09:57~11:33 홍유릉(洪裕陵)을 [리멤버1910~홍릉.유릉 역사문화관~홍유릉 매표소~유릉~연지~홍릉~홍릉 옆 쪽문~영원~회인원~덕혜옹주 묘~의친왕 묘~후궁 묘역(수인당 묘&수관당 묘&귀인 장씨 묘&삼축당 묘&광화당 묘)~리멤버1910]의 동선으로 탐방
[홍유릉 개장시각 : 오전 9시]
[시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남양주 리멤버 1910'
중부일보 기사 입력 : 2022.09.22. 16:43, 수정 2022.09.22. 17:43
김규원 남양주시청 학예연구사
널리 알려져 있듯이 박물관을 의미하는 영어의 뮤지엄(museum), 프랑스어의 뮤제(musee), 독일어의 뮤제움(Museum) 등은 모두 고대 그리스의 뮤즈(Muse)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 안의 보물 창고인 무세이온(museion)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박물관은 서기전 3세기경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무세이온에서 비롯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세계 최초의 박물관 형태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박물관이 등장한 것은 1909년 창경궁에 ‘제실박물관’을 개관하면서부터이다. 100년 넘게 우리와 함께 한 박물관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곳일까? 한때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의무적(?)으로 방문하거나 방학 때 숙제를 하기 위해서 찾던 박물관은 그저 지루하고 재미없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박물관의 체험·교육프로그램이 활성화되면서 박물관은 시민들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삼삼오오 들려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문화공간으로 변하였다. 특히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이 늘어나면서 박물관은 학예사를 비롯한 전공자들의 리그에서 시민들이 재능기부를 할 수 있는 공간이자 제2의 삶을 보내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수도권 지역의 새로운 문화도시로 떠오르고 있는 남양주시는 지난 2021년 3월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잠들어 계신 홍·유릉 앞에 복합문화공간인 ‘리멤버(REMEMBER) 1910’을 새롭게 조성하였다. REMEMBER 1910은 시민들이 우리 민족의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인 경술국치가 일어난 해이자, 이석영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국 광복을 다짐하며 중국 만주로 망명을 떠난 1910년을 기억하고자 하는 남양주시의 다짐을 의미한다. 아울러 무명의 독립투사들의 피와 땀, 정신을 이어받아 지난 날의 아픈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다짐하는 역사문화공간이기도 하다.
남양주 독립운동가 102분의 명단을 새긴 ‘독립의 계단’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REMEMBER 1910은 역사법정, 역사감옥, 독립의 계단, 미디어 홀 등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역사법정 ; 반민족행위처벌 특별법정’은 청소년들이 직접 판사와 검사, 그리고 변호인이 되어 을사오적 등 친일파를 심판하며 올바른 역사관을 수립할 수 있는 곳으로 학교와 청소년 단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대표적인 공간이다.
REMEMBER 1910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정년 퇴임한 중·고등학교 선생님, 지역 문화활동가 등 모두 10여 명으로 구성된 ‘시민도슨트(Docent)’선생님들이다. 시민도슨트는 약 3개월에 걸친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특이한 점은 일반적인 도슨트처럼 단순히 전시 관람만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전시 및 교육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는 등 학예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8월부터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남양주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특별기획전 '대한독립만세를 잇다'를 기획, 운영하고 있다. 시민도슨트는 활동비를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명예가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누가 강제로 시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남양주를 사랑하는 분들이 조금이나마 자신들의 재능을 지역에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활동이다.
근래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지역을 상징하는 문화공간을 조성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크고 웅장하게 건물을 짓는다고 해서 저절로 멋진 문화공간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의식 있는 지자체와 열정 넘치는 학예사, 그리고 그 누구보다 지역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시민들이 서로 만났을 때 시민들이 언제나 찾을 수 있는 진정한 랜드마크로서의 문화공간이 탄생한다. REMEMBER 1910이 개관한 지 1년 만에 남양주의 ‘마인드마크’로 자리잡는 데에는 그 누구보다 남양주를 사랑하는 시민도슨트의 역할이 매우 컸다. 앞으로도 더욱 멋진 활동을 기대해 본다.]
[홍유릉(洪裕陵)
목차
1. 개요
2. 홍릉(洪陵)
3. 유릉(裕陵)
4. 홍릉과 유릉 명칭 비화
5. 원(園)과 묘(墓)
5.1. 영원(英園)
5.2. 회인원(懷仁園)
5.3. 의친왕묘(義親王墓)
5.4. 덕혜옹주묘(德惠翁主墓)
5.5. 귀인장씨묘(貴人張氏墓)
5.6. 광화당묘(光華堂墓)
5.7. 삼축당묘(三祝堂墓)
5.8. 수관당묘(修觀堂墓)
5.9. 수인당묘(修仁堂墓)
6. 홍유릉 연혁
7. 교통편
8. 기타
1. 개요
홍유릉(洪裕陵)
대한제국 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洪陵), 순종과 두 황후의 무덤 유릉(裕陵)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다. 일단 능원은 따로지만 바로 옆에 붙어있기 때문에 홍유릉으로 합쳐 부른다. 소재지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이름을 따서, 때론 '금곡릉'이라 불리기도 한다. 각 왕릉은 아래 목록 참조.
이 외에도 엄밀히 홍유릉에 포함된 곳은 아니지만 바로 곁에 영친왕·이방자의 묘로서 조선 왕릉[1]의 격식으로 조성한 영원(英園), 그리고 회은황세손 이구의 묘인 회인원(懷仁園)을 포함한 2기의 원(園) 및 의친왕·의친왕비가 합장된 의친왕묘와 덕혜옹주묘를 포함한 왕자녀의 묘 2기, 그리고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 귀인 이씨묘, 삼축당 김씨묘, 귀인 장씨묘, 의친왕의 첩인 수관당 정씨묘, 수인당 김씨묘를 포함한 후궁의 묘 5기가 홍유릉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어 대한제국 황실의 가족 묘역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대한제국이 선포 후 2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친 후 남북한 모두 공화정이 들어섰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며, 대한제국이 황제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유일한 황제릉(皇帝陵)이기도 하다.[2]
조선왕릉 중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었기 때문에 다른 왕릉에 비해서 가장 최근에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홍유릉 근처에 광해군묘가 있는데 이쪽은 폐위된 까닭에 왕릉이 아니다. 또 광해군묘보다는 멀지만 같은 남양주 안에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 묘소도 화도읍에 있는데 원래 서울 공덕동에 있던 것을 남양주로 이장하였다. 비록 부자관계지만 실제로는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장례식에도 불참하였을 정도였는데 을미사변 이후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선왕릉 중에서는 최초로 조선왕조 이후의 시대(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유일한 왕릉이다.
2. 홍릉(洪陵)
조선의 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의 합장릉 형식의 황제릉.
명성황후 사망시엔 서울시 청량리에 안장했으나 고종 사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전하여 같이 안장했다. 유릉과 더불어 석물과 침전 등을 황제릉의 형식으로 구성했는데, 그렇다고 중국 황제릉 형태를 그대로 가져온 것은 아니고 기존 한국 왕릉 특유의 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명나라 홍무제가 안장된 효릉(孝陵)의 묘제를 참고했다.
3. 유릉(裕陵)
대한제국 2대 황제인 순종효황제과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의 능. 고종의 홍릉옆에 있다. 홍릉과 더불어 홍유릉으로 많이 불리는 편이며 드물게 한 봉분에 세 사람을 같이 모신 것이 특징.
홍릉과 마찬가지로 순명효황후 민씨 사망시엔 양주 용마산(현 서울 광진구 능동 서울어린이대공원)에 안장해 유강원(裕康園)이라 했으나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비였던 민씨를 황후로 추존해 유릉(裕陵)으로 높여졌다. 순종 사후 남양주시 금곡동 홍릉 근처로 이전하여 함께 안장했으며, 순정효황후 윤씨가 1966년 사망하자 3명의 부부가 함께 안장됐다.
4. 홍릉과 유릉 명칭 비화
왕실의 예법에 따르면 왕비가 왕보다 먼저 사망하면 일단 별도의 능호를 사용하며, 국왕이 승하한 후 왕비와 함께 합장할 때 새로이 올린 국왕의 능호를 따르게끔 되어있었다. 가령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및 계비 인목왕후의 경우 1600년 승하한 의인왕후에게 유릉(裕陵), 1608년 승하한 선조에게 목릉(穆陵), 1632년 승하한 인목왕후에게 혜릉(惠陵)이라 능호를 올렸지만 최종적으로는 선조의 능호인 목릉을 따랐다.
그런데 고종의 경우 명성황후는 이미 1895년 을미사변으로 먼저 비명에 갔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할 당시에는 대한제국이 문을 닫은 상태였으며, 더군다나 일제는 한일합방 조약을 맺을 때 '왕공족의 분영은 묘로 한다'는 왕공가궤범 200조의 규정을 만들어서 대한제국 황족이 이후에 죽더라도 새로운 능(陵) 또는 원(園)을 만들지 못하도록 막아둔 상태였다. 따라서 이 규정을 따른다면 고종의 무덤은 일반 백성과 같은 '묘'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이전에 조성된 능들은 이 규정의 해당사항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을 옮겨서 합장하는 방식을 취하면 이를 피할 수가 있었다. 즉 고종의 경우는 명성황후의 무덤으로 이미 만들어져 있던 '홍릉'에 고종이 안치되는 식이다. 이는 왕이 뒤늦게 사망하면 새로운 능호를 올리던 원래 예법과 약간은 어긋나더라도 일단은 새로 능을 만든 게 아닌지라 규정(왕공가궤범 200조)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일제는 이왕가(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를 일본 천황가 보다 아래지만 화족보다 높은 지위로서 우대할 것을 경술국치 때 보장했다. 그래서 이왕가 내부적인 방침에 일제가 세세하게 간섭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고종과 순종의 능이 예법에 맞게 조성될 수 있었다.
따라서 1897년 청량리에 조성된 명성황후의 홍릉을 남양주 금곡동으로 이전하면서 동시에 고종황제와 합장하는 형태로 지금의 홍릉이 완성됐다. 마찬가지로 1926년 승하한 순종 또한 1905년 용마산에 먼저 조성돼 있던 순명효황후의 유릉을 남양주 금곡 홍릉 옆으로 이전하면서 동시에 합장하는 형태로 지금의 유릉이 되었다.
여담으로 이장된 후 비어진 홍릉 자리에는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의 무덤인 영휘원(永徽園)과 그녀의 손자이자 영친왕의 장남인 이진의 무덤인 숭인원(崇仁園)이 조성되었다. 현재도 '구 홍릉' 지역으로 흔히 '홍릉로'란 도로명이 있으며, 홍릉 수목원이 위치하고 있다.
5. 원(園)과 묘(墓)
5.1. 영원(英園) : 영친왕 부부의 합장묘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 영왕 이은과 그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안장되어 있는 무덤. 이곳은 영친왕이 생전에 황제에 오른 적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서, 고종 이전 다른 역대 조선왕릉들처럼 제후국의 왕릉 양식으로 능원을 조성했다. 홍유릉과 영원을 비교해보면 황제릉과 제후왕릉의 차이점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5.2. 회인원(懷仁園)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의 차남이자, 마지막 황세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회은황세손 이구가 안장된 무덤. 한동안 위 사진처럼 봉분만 남아 있었으나, 문화재청의 심의(2021년)를 거쳐 지금은 원(園)의 격에 맞게 주변에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5.3. 의친왕묘(義親王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과 그의 부인 의친왕비 김씨(이름 김수덕)가 안장된 무덤.
5.4. 덕혜옹주묘(德惠翁主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막내(고명)딸인 덕혜옹주의 무덤.
5.5. 귀인장씨묘(貴人張氏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후궁이자 의친왕 이강의 생모인 귀인 장씨의 묘.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초장지는 알 수 없으나 1911년 고양군 둑도면 모진2리로 이장하였고, 1965년에 서삼릉 능역 내로 이장하였으며, 다시 2009년에 홍유릉능역 내로 이장하였다.
2009년 귀인장씨묘의 이장과 관련하여 의친왕의 8남이자 귀인장씨의 친손자인 황손 이갑 씨가 가족들도 모르는 상황에서 묘가 이장되었다며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으며, 의친왕 9남 "덕수장씨 묘 이장 몰랐다" 기사, 이에 대해서 문화재청에서는 의친왕의 딸인 이해원씨의 이장 신청과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장을 결정한 것이라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낸 경과가 있다. 문화재청 입장
5.6. 광화당묘(光華堂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후궁이자 이육의 생모인 광화당의 묘이다.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5.7. 삼축당묘(三祝堂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후궁인 삼축당의 묘이다.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5.8. 수관당묘(修觀堂墓)
의친왕의 측실이자 이건의 생모인 수관당의 묘.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5.9. 수인당묘(修仁堂墓)
의친왕의 측실이자 이우, 이주, 이곤의 생모인 수인당의 묘.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6. 홍유릉 연혁
1897년(광무 1) : 고종 황후 명성황후의 홍릉 조성(현 서울 청량리 홍릉수목원 경내)
1900년(광무 4) : 황제릉의 형식으로 현재의 자리에 홍릉 공사
1905년(광무 9) : 순종 첫 번째 황태자비 순명비의 유강원 조성(현 서울 어린이대공원 근처)
1907년(융희 1) : 유강원을 유릉으로 높임
1919년 : 홍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고종과 합장함
1926년 : 유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순종과 합장함
1964년 :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부인 의친왕비묘 조성
1966년 : 순종 두 번째 황후 순정황후를 유릉에 합장함
1967년 : 고종 후궁 광화당 귀인 이씨의 묘 조성
1970년 :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영원 조성, 고종 후궁 삼축당 김씨의 묘 조성
1971년 : 영원을 현재의 자리로 옮김
1989년 : 고종 딸 덕혜옹주의 묘 조성, 의민황태자비 이씨를 영원에 합장함
1996년 : 의친왕묘를 현 서삼릉 경내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의친왕비와 합장함
2005년 : 황세손 이구의 회인원 조성
2009년 : 귀인 장씨묘와 수관당 정씨묘를 현 서삼릉 경내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김
7. 교통편
경춘선 금곡역에서 올 때: 23번 버스 환승 / 도보(15분 소요)
중앙선 도농역이나 청량리역 쪽에서 올 때 버스: 1-4, 23, 30, 65, 330-1(좌석버스), 1330-2, 1330-3, 1330-4, 1330-44(직행좌석버스)
경춘선의 배차간격이 상당히 길고 서울 동북부 지역 외에서 상봉역까지 접근하기 어려우니 가급적 경의중앙선을 이용하기 바람.
기타 버스노선: 168(시내버스), 땡큐61, 땡큐88-1, 땡큐99(마을버스), 1000, 1100, 1200(직행좌석버스)
8. 기타
홍유릉 권역의 입장료는 2020년 기준 1,000원이다. 그 외 영원 이하 다른 황실 일원들의 무덤은 무료입장이다. 그리고 남양주시민에 한해 50% 할인이 적용된다.
홍유릉 주변 산책로는 금곡동 주민들이 자주 찾는 운동코스이다. 매년 8월 15일에는 정기적으로 걷기 대회도 열리고 있다.
고종 황제가 대한천일은행(우리은행 전신)의 설립을 지시했고, 고종의 7남인 영친왕이 천일은행 2대 은행장을 맡았다는 인연 때문에 매년 1월 1일 우리금융지주 회장과 우리은행 은행장 등 우리금융그룹 고위 임직원들이 이 묘원을 참배한다. 우연인지 아닌지 홍유릉이 위치한 금곡동은 거주/유동인구가 감소하고 있지만 우리은행 지점이 계속 영업중이었다.(2022년 철수 및 무인화기기만 남음)
홍유릉 앞 경춘로와 면한 땅에 한때 '목화웨딩홀'이라는 예식장 건물이 있었다. 인근 평내호평 및 다산(도농.지금) 일대의 개발 전에 잠시나마 호황을 누리기도 했으나 몰락 이후로는 영업만 종료되고 흉물로 방치되다 철거되고 '이석영광장'과 'REMEMBER 1910'이라는 기념관 겸 카페가 조성되어 있다. 건축 당시부터 문화재 구역에 예식장이 건설되었다는 자체가 논란이 생겨 웨딩홀 폐업 이후 매입하여 리모델링하거나 철거하자는 주장이 주민들과 시민단체 등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2019년에 시 주도로 해결해서 나온 결과물이 우당 이회영의 형이자 출생지가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인 독립운동가 영석 이석영 선생 및 독립운동을 기리면서 시민 휴식공간도 겸한 광장인 것.]
11:33~13:33 금곡실내체육관 앞에 있는 백봉산 등산로 입구로 진입하여 경기 남양주시 평내동 산 97-1 번지에 있는 백봉산(590m) 정상으로 이동
[백봉산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평내동, 와부읍, 화도읍
백봉산은 남양주에 있는 산으로 천마산과 이어져 있다. 백봉산(590m)은 잣봉산, 묘적산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1910년 이후 평내동 일대에 잣나무가 많아 잣나무 백자를 써서 백봉산으로 이름 붙였다. 백봉산은 도심과 인접하여 접근성이 뛰어나며, 높이는 낮으나 산세가 아름답고 동쪽으로 한강을 끼고 있어 전망이 뛰어나며 일출·일몰로도 유명해 시민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또, 2020년 남양주시에서는 백봉산 정상에 전망대를 설치하여 인생 사진을 남기기 위한 많은 등산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백봉산 전망대는 길이 25m의 목재 데크 보행로를 따라 6.5m 높이에 오르면 천마산을 시작으로 희야산, 운길산, 예봉산, 검단산, 그리고 서울 외곽을 형성하는 관악산에서 북한산~도봉산과 불암산~수락산 등 서울과 남양주 일원의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백봉산의 남쪽에는 신라시대 때 세워진, 오래된 사찰인 묘적사가 있어 장년층과 가족 단위 산행객에게 오래전부터 사랑받아 왔다. 백봉산을 오르는 등산코스는 7개가 있으며 이 중에서 3코스에서는 7층 석탑과 300년 수령의 보리수나무가 있는 천년고찰 묘적사를 방문할 수 있으며, 1코스에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순종과 두 황후의 무덤인 홍유릉도 만나볼 수 있다.]
13:33~13:53 백봉산 정상 전망대에서 파노라마 풍경을 사진촬영 후 휴식
[2020년 11월 27일 준공한 새로운 백봉산 정상 전망대는 총 높이 6.5m로 나무보다 높은 위치에서 조망이 가능해 남양주 전 지역과 하남, 잠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손바닥 모양으로, 일출과 일몰 모두 조망이 가능해 지역 명소로 떠오를 듯하다.]
13:53~14:30 천마지맥을 따라서 경기 남양주시 호평동 산 21 번지에 있는 마치고개로 이동
[마치고개는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과 화도읍 묵현리를 연결하는 높이 240m의 고개이다. 마치고개는 조선 시대부터 알려진 고개이며, 옛날에는 도둑이 많아서 한낮에도 무리를 지어서 넘어가야 할 만큼 험준하였다. 일례로 임꺽정이 천마산의 마치고개를 주 무대로 활동하였다는 설도 전한다. 한편 천마산과 마치고개 밑에 있는 지역을 먹고개, 먹갓, 묵동이라고도 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마치현(磨峙峴),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마치(馬峙)로 기록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마치’와 ‘말티’라는 명칭을 함께 쓰고 있는데, ‘말’과 ‘마’는 모두 ‘산’ 혹은 ‘산정’이라는 의미의 ‘마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말티고개 혹은 마치고개는 ‘산에 있는 고개’ 혹은 ‘산정에 있는 고개’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마치고개는 북쪽에 있는 천마산, 남쪽에 있는 백봉산에 오르는 길과 연결되어 있다.
1980년대에 마치고개 아래에 마치터널이 생기면서 이용이 감소하였다. 지금은 남양주 다산길 7코스인 마치고개길[남양주시청-약수터-백봉산-마치고개-임도-가곡리은행나무]과 13코스인 사릉길[사능역-된봉-관음봉-천마산 정상-마치고개]에 포함되어 지역의 주요 등산로로 활용되고 있다.]
14:30~16:22 천마지맥을 따라서 경기 남양주시 오남읍 팔현리 산 14 번지에 있는 천마산(812m) 정상으로 이동
[천마산 르포] 동네 뒷산에서 마주한 ‘고산준령 해돋이’의 감동!
글 김기환 차장 사진 주민욱 기자
월간산 기사 입력 : 2020.01.03. 11:27
남양주 천마산 일출산행… 호평동 수진사에서 오전 6시 전에 출발해야
산 위에서 해돋이를 보며 한 해를 시작하는 등산 애호가들이 많다. 해맞이 행사를 하는 전국의 유명산들이 늘 인파로 붐비는 이유다. 가능하다면 높고 멋진 산에서 신년 해맞이를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하지만 먼 길 떠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면 아쉬운 대로 동네 뒷산을 찾기도 한다. 그런데 의외로 가까운 산을 올라 경험한 해맞이도 느낌이 좋은 경우가 많다. 기대하지 않았다가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남양주시 천마산天摩山(812.4m)은 오래 전부터 수도권 주민들의 산행지로 인기를 끌던 곳이다. 특히 경춘선 열차를 타고 오가며 즐기던 낭만이 서려 있는 산이다. 하지만 산 주변이 개발되며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이제 많은 건물로 둘러싸인 도시 속의 뒷산이 됐다. 산을 찾는 이들도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도시의 확장으로 천마산의 겉모습은 변했지만 자연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산길로 접어들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우거지고 식생이 잘 보존되어 있다. 봄이면 골짜기에 많은 야생화가 꽃을 피워 아름다운 화원으로 변한다. 무엇보다도 망대처럼 우뚝 솟구친 정상 조망이 시원하다.
서울과 경기 일원에 솟은 산봉들이 대부분 눈에 들어올 정도로 사방으로 막힘이 없다. 해돋이를 감상하기 좋은 입지를 지닌 곳이다.
천마산은 주변 개발로 교통망이 좋아지며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됐다. 수도권 광역전철을 이용해 접근할 수도 있어 대중교통도 좋다. 하지만 신년 해맞이를 위해 이른 시간에 이동하려면 자가용 차량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호평동의 수진사 기점이 주차가 편하고 산행 시간이 비교적 짧아 일출산행 코스로 적당하다. 12월 초, 신년 해맞이 산행 코스 답사를 위해 천마산을 찾았다.
수진사 입구 공영주차장에 도착하니 새벽 5시 30분. 온 세상이 깜깜한 어둠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남양주시의 2020년 1월 1일 일출 시각이 오전 7시 47분임을 고려할 때 출발하기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에 초행길을 더듬어 가야 할 상황이라 천천히 산행을 시작했다. 늦어서 일출을 놓치느니 조금 일찍 도착해 추위에 떠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갈림길 많아 신중하게 산길 선택해야
깜깜한 아스팔트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드문드문 가로등이 세워져 있었지만 진행 방향을 판단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됐다. 스마트폰의 지도앱으로 수시로 현 위치를 확인하며 걸었다. 여느 도시 근교산과 같이 천마산도 산길이 좀 복잡한 편이다. 샛길이나 갈림길이 많은 데 비해 이정표는 친절한 편이 못됐다. 신중하게 사전에 계획한 등산로를 찾으며 이동했다.
포장도로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드니 완벽한 어둠이 주변을 둘러쌌다. 헤드램프 불빛에 의지해 바로 앞의 돌계단을 밟으며 부지런히 걸었다. 새벽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쉬지 않고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20분쯤 지나자 눈앞에 넓은 임도가 나타났다. 배낭을 벗어두고 잠시 숨을 돌리며 살펴보니 건너편 숲에 ‘천마산야영교육장’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등산인들이 ‘천마의 집’이라고 부르는 시설물이다.
임도를 따라 널찍한 고갯마루로 올라서니 한층 밝아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밤에서 새벽으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시작된 산길은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산자락 주변 도시의 야경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어왔지만 시원하게 조망이 터지는 곳은 없었다. 산행에 집중하며 계속 고도를 높여 전망데크까지 진행했다.
“와! 저기 멀리 잠실의 고층빌딩이 보이네요. 생각보다 야경이 좋아서 감동입니다.”
사진기자 주민욱씨가 답답한 숲에서 벗어난 것이 기뻤는지 탄성을 질렀다. 널찍한 전망데크는 서울의 동쪽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장소였다. 북한산 줄기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한강 주변으로 펼쳐진 도시의 불빛이 아기자기하게 늘어서 있었다. 서쪽에서 번진 불그스름한 기운이 하늘을 뒤덮은 모습도 환상적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주변 모습이 해돋이가 다가옴을 알리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한참 동안 주변을 촬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정상이 코앞인데 아직 일출 시간이 30분이나 남았기 때문이다. 바람이 적은 곳에 머물면서 추위를 피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이 많이 몰리는 새해 첫날이라면 무조건 정상에 올랐을 것이다. 정상부가 좁아 좋은 자리를 잡으려면 먼저 가서 버텨야 한다. 그래도 천마산은 특별한 해맞이 행사가 없어 크게 복잡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천마산은 은근히 높고 가파른 산이다. 비교적 짧은 수진사 기점의 산길을 이용해도 정상까지 1시간 20~30분쯤 걸린다. 게다가 막판에 통과해야 하는 긴 계단 구간도 만만치 않다. 시간에 쫓기면 정상 직전의 급사면에서 오버페이스로 탈진할 우려가 있다. 천마산에서 해맞이를 하려면 겨울산행 준비를 철저히 하고 여유를 가지고 올라야 한다.
경기도의 명산들이 한눈에 들어와
긴 암릉을 이룬 천마산 정상에 서면 경기도의 명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북쪽으로 굽이치며 뻗어나는 산줄기가 철마산과 주금산을 거쳐 축령산으로 연결된다. 주금산 뒤로 솟은 운악산과 명지산 줄기가 화악산의 웅장한 산세와 겹쳐지며 장쾌함을 뽐낸다. 해가 뜨는 방향인 동남쪽 멀리 솟은 용문산을 중심으로 백운봉과 유명산, 중미산 등이 하나의 커다란 산괴를 이루고 있다. 산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무척 큰 곳이다.
“일기예보는 맑음인데, 동쪽 하늘에 구름이 가득한데요. 이러다가 천마산 일출을 제대로 촬영하지 못하면 어쩌죠. 다시 와야 하나요?”
사진기자 주민욱씨가 삼각대를 설치하며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동쪽 용문산 정상부가 가릴 정도로 짙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이 상태라면 구름이 해를 가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구름 아래로 보이는 시야는 좋았다. 멀리 있는 작은 산들이 선명하게 드러난 모습에 희망이 보였다. 어차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붉은 빛이 돌던 동쪽 하늘은 더 이상 밝아지지 않았다. 구름이 워낙 두터웠던 탓이다. 하지만 그 낮은 구름과 땅 사이에 벌어진 공간에 새빨간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늘과 대지를 구분하는 신비로운 기운이 지평선을 따라 길게 펼쳐졌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색다른 형태의 일출이 시작됐다. 특히 용문산 주변이 유난히 빛났다. 태양이 올라올 길을 열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산줄기 위로 떠오른 태양은 신기하게도 붉고 동그란 모습을 온전히 보여 줬다. 그리고는 구름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이날의 천마산 해맞이는 분명 성공적이었다.
해돋이 촬영을 끝내고 시계를 보니 오전 8시였다. 평소 같으면 아침을 먹으며 출근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새벽부터 서두른 덕분에 천마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는 행운을 잡았다. 뭔가 큰일을 해낸 것 같은 뿌듯한 기분이 드는 아침이었다. 이제는 무사히 하산만 하면 일출산행은 모두 끝난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천천히 하산 계획을 세웠다. 새벽에 출발한 수진사에서 올라온 산길이 상태가 가장 좋지만, 같은 길을 다시 걷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른 코스를 택했다. 정상에서 스타힐리조트 방면으로 이어진 능선을 타고 가다가 호평동 주차장 쪽 임도로 내려서기로 했다. 그런데 유순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능선 하산길이 제법 험했다.
경사가 급한데 시설물도 거의 없어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했다.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곳도 많아 길이 미끄러웠다. 1시간 반에 걸쳐 무사히 내려오긴 했지만, 사람들이 이곳을 피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코스는 해맞이를 위한 야간산행 코스로는 적합지 않다. 겨울 산행 경험이 많지 않은 이들은 올라온 길로 하산하는 것을 추천한다.
산행 가이드
천마산은 정상을 중심으로 산길이 방사형으로 뻗어 있다. 교통이 편한 남쪽의 천마산역과 평내호평역 방면에서 산을 오르는 이들이 많다.
산행코스는 화도읍 묵현리 군립공원사무소~심신수련장~뾰족봉~정상 왕복 코스가 가장 인기 있다. 취재팀이 답사한 남양주시 호평동 수진사 입구~큰골(임도)~천마의집~꺽정바위~정상 코스와 큰골~천마의집~약물바위샘(돌핀샘)~정상 코스도 찾는 이들이 많다. 각각 2시간~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오남읍 팔현리 오남저수지 기점 다래산장~천마산계곡~약물바위샘~정상 코스와, 다래산장~절골~천마의집(혹은 꺽정바위)~정상 코스를 잇는 원점회귀 코스를 따르면 비교적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약 4시간. 장거리 산행을 즐기는 등산인들은 천마산~백봉산 종주나 천마산~철마산~주금산 종주를 추천한다. 꼬박 하루가 걸리는 장거리 종주가 가능하다.
일출산행이 주목적이라면 호평동 큰골을 타고 천마의 집~꺽정바위를 거쳐 정상에 오른 다음 돌핀샘~~큰골로 하산하거나 또는 돌핀샘에서 천마산계곡을 따라 하산하는 코스가 좋다. 천마산계곡을 따라 내려서다 무너진 콘크리트 교각이 보이는 지점에서 계류를 건너면 절골을 거슬러 능선 너머 큰골로 돌아올 수 있다. 약 3시간 30분 소요.
정상에서 남쪽 스키장 방면으로 이어진 능선을 타고 수진사로 내려설 경우 산행 거리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정상부의 경사가 급하고 바위지대가 험해 조심할 필요가 있다. 정상에서 1시간 거리의 능선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임도로 내려선 뒤, 임도를 타고 큰골로 손쉽게 넘어갈 수 있다.
교통
천마산 산행 기점인 평내호평역이나 천마산역은 경춘선 전철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천마산역 1번 출구에서 168번 버스를 타면 천마산 입구까지 운행한다. 걸어서 갈 경우 25분 정도 소요된다. 택시를 이용할 경우 기본요금 거리다. 평내호평역에서 수진사 입구까지 마을버스가 운행하지만 자주 다니지 않아 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버스는 청량리, 지하철 2호선 강변역, 잠실 등지에서 탈 수 있다. 호평동 큰골 입구까지 들어가는 버스는 강변역 1115-2번, 잠실역 1115번, 경동시장 2227번, 청량리 165번, 1330-1, 석계역 65-1번 등지에 있다. 165번 버스만 수진사 입구까지 들어간다. 문의 천마산관리소 031-590-2733.
해맞이 산행을 위해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수진사 입구 공영주차장이나 천마산관리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을 수 있다.
맛집(지역번호 031)
호평동 수진사 입구 주차장 주변에 맛깔나게 음식을 하는 업소가 여럿 있다. 산길 입구의 두부만드는집(595-9933)은 직접 만든 순두부가 일품이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식사로는 칼국수와 만둣국 등이 있다. 바로 옆 회사랑(591-5600)은 비교적 저렴하게(광어·우럭 1만~4만 원) 해산물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 밖에 천마산 순두부(559-8849), 만나닭갈비(595-5788) 등이 있다. 수진사 입구에 위치한 카페 자작나무(551-9933)는 간단한 음식과 차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파스타와 비빔밥, 빵 등을 취급하는 업소로 분위기가 좋다.]
16:22~17:10 천마산 정상에서 파노라마 풍경 사진을 촬영 후 집에서 준비해간 음식으로 식사
17:10~18:14 천마산 임꺽정바위를 거쳐서 경기 남양주시 호평동에 있는 천마산입구종점.수진사 정류장으로 하산하여 산행 완료
18:14~18:20 천마산입구종점.수진사 정류장에서 상봉역으로 가는 남양주 165 버스 승차 대기
18:20~19:33 남양주 165 버스를 타고 천마산입구종점.수진사 정류장에서 상봉역 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13분 소요]
[버스 운임 : 1,650원]
19:33~19:38 상봉역에서 고속터미널역으로 가는 7호선 전철 승차 대기
19:38~21:02 7호선을 타고 상봉역에서 고속터미널역으로 가서 3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연신내역으로 간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1시간24분 소요]
홍유릉 종합안내도
[백봉산&천마산] 산행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