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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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2일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출범.
영국의 25년 통치 마감
영국의 피터 만델슨(왼쪽) 북아일랜드
담당 장관과 아일랜드의 데이비드 앤드
류스 외무장관이 2일 더블린에서 북아
일랜드 자치를 개시하는 문서에 서명한
뒤 축배를 들고 있다.
북아일랜드 자치정부가 2일 0시(이하 현지시각)를
기해 영국으로부터 통치권한
을 공식 이양받았다. 이로써 1974년 이후 계속돼온
영국의 직접 통치는 25년만에 끝나고, 신-구교간
권력 공유의 자치 체제로 들어섰다.
지난 69년 영국 잔류를 희망하는 개신교
도들과 아일랜드에 합병을 원하는 가톨
릭교도들간에 충돌이 일어난 이래 지난 30년동안 3500여명이 희생된 북아일랜드 사태는 이제 새로운
협력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북아일랜드 초대 자치정부는 2일 오후 역사적인
첫 회의를 갖고, 향후 북아일랜
드 운영 방향 등을 논의했다. 자치정부 수
반인 ‘수석장관’을 맡은 데이비드 트림블
얼스터연합당(UUP) 당수는 “자치정부는 더 이상
협상 장소가 아니다”라면서 “우리
는 북아일랜드 주민들을 위해 책임있는 제도를
갖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2일 오전 영국의 북아일랜드 담당 장관
과 아일랜드 외무장관은 ‘아일랜드 남-북 위원회’
설치에 관한 문서를 교환했다. 아
일랜드 정부는 이어 북아일랜드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헌법 2조와 3조 등
관련조항을 삭제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앞서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은1일 하원
에서 통과된 ‘통치권 이양법안’을 공식 재
가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의회 연
설을 통해 “북아일랜드의 항구적 평화를 위해서는
아직도 갈길이 멀다”면서“그러나
우리는 거대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고 말했다.
버티 아헌 아일랜드 총리는 “무장 해제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고 신뢰를 구축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면서 IRA의 무장 해제를 촉구했다.
▶2008년 '한국 중문학 태두(泰斗)'
차주환 서울대 명예교수 별세
▶2007년 오늘,
우고 차베스(Hugo Chávez)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언론통제, 종신 대통령 등을 꿈꾸며 제안한 개헌안이 국민 투표에 의해 부결되었다
제56·57·58·59대 대통령 임기 1999년 2월 2일 ~ 2013년 3월 5일
1954년 7월 28일 베네수엘라 Sabaneta에서 출생~2013년 3월 5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사망
그는 볼리바르 혁명의 지도자로서 사회주의 추진과라틴 아메리카 통합을 지향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미국의 대외 정책에 맞서는 반미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차베스는 직업 군인으로서 1992년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97년 제5공화국운동당(Fifth Republic Movement)을 창당하였다. 1998년 빈민층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2000년과 2006년 재선되었다. 국내적으로 우고 차베스는 대규모 미션(프로그램)을 시작하여 빈부격차, 부정부패, 질병, 문맹, 영양 부족과 빈곤 등의 사회 문제를 퇴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포퓰리즘적 정책과 국제유가 하락으로 인해 실업률과 물가는 폭등하고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떨어졌으며, 베네수엘라 경제는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또한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해 삼권분립과 민주주의를 파괴하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2002년에 있던 미국이 후원한 우익들의 쿠데타 시도와 파업을 극복한 뒤 2004년 국민 소환 투표에서 승리했다.사회주의 해방자, 빈민 영웅과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 반미주의, 극좌의 이미지 사이에서 차베스는 현재 라틴 아메리카 정치에서 가장 복합적이고도 찬반을 불러일으키는 인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2009년에 조지아의 자치 공화국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를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차베스는 2012년 10월 대선에도 출마, 엔리케 카프릴레스(Henrique Capriles) 미란다주 주지사를 누르고 4선에 성공하였다. 당시 암 투병 중이었으며, 위독해지자 2013년 1월 10일에 열릴 취임식을 무기한 연기하였고,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2013년 3월 5일 향년 59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2002년 로또복권 발매 시작
2일 첫선을 보인 온라인 추첨식 복권 ‘로또(lotto)’ 가 비교적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고 있다. 로또 복권은 이미 번호가 인쇄된 기존 추첨식 복권과 달리 고객이 직접 번호를 고르는 복권.
로또 시스템 운영사업자인 KLS 컨소시엄은 4일 “지난 2~4일 사흘 동안 하루평균 10억원대의 매출을 기록, 우리나라 전체 복권 매출액의 50% 가량을 점유한 것으로 집계됐다” 고 밝혔다.
온라인 추첨식 복권 ‘로또(lotto)’
▶2002년 장병희 영풍 명예회장 사망
▶2002년 기아차 국내업체로는
처음으로 중국형 신차 현지 합작생산
▶2001년 미국 최대 에너지 기업인
엔론사. 뉴욕법원에 파산 신청
▶199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의 기·예능보유자
하보경 사망
▶1997년 9개 종금사 영업정지
▶1990년 마샬군도, 유엔안보리
신탁통치로부터 독립
▶1990년 일본인 최초 우주비행사,
소련 우주선 ‘소유즈 11호’ 승선
▶1989년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 몰타회담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왼쪽 가운데)과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1989년 12월 2일 지중해 몰타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회담 후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우리는 미국을 더이상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반세기 가까이 인류를 짓눌러 온 냉전체제 붕괴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 역사적 순간을 연출한 주인공은 부시 미국 대통령이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공산권에 자유화 바람이 불어 닥치는 시대 상황을 지켜보던 부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군축협상이 1990년에 예정되어 있었지만 부시는 고르파초프에게 여러차례 친서를 보내 회담을 재촉했다. 부시의 노력은 몰타섬에서의 함상 비공식 회담을 이끌어냈다.
이틀간의 회담 후 미소 정상은 3일 소련 여객선 막심 고리키호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세계가 냉전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 회담은 실질적 실천에 대한 합의 도출은 없었으나 양국 지도자간의 신뢰를 확인하고 앞으로 상호협력 가능성을 높인 점에서 성공한 회담이었다는 판단이다. 부시는 유럽에 배치된 재래식무기와 화학무기의 대폭 감축과 대소 경제제재 완화를 약속했다. 몰타 회담으로 부시는 냉전 종식을 몇 단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8년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첫 여성 총리 취임
▶1984년 오늘,
인도의 보팔에서 가스 폭발 참사 사망자는 6천9백 명이었고,
중경상자와 후유증에 시달리는 불구자, 성장이 멈춰 버린 어린이 등 50여만 명이 피해를 당함.
‘보팔에 정의를!(Justice in Bhopal now!)’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시대가 달라져도 비슷한 상황이 주기적으로 되풀이된다는 이야기다.
그 덕분에 우리는 역사적인 사건을 보면서 반성하고 교훈을 얻는다. 만약 그 역사를 잊어버린다면 똑같은 결말을 맞게 될 테니 말이다.
2012년 9월 27일 경북 구미시 산동면에서 일어난 ‘불산가스 누출사고’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을 절실하게 떠올리게 한 사건이다.
28년 전 인도 보팔에서 일어났던 ‘보팔 대참사(Bophal disaster)’에서 교훈을 얻어 철저히 대비했다면 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보팔 대참사의 전말은 이렇다. 때는 1984년 12월 초, 장소는 인도 보팔에 있는 유니언 카바이드(Union Carbide Corporation)의 공장이다.
이 공장의 직원이 농약과 살충제를 만드는 데 쓰는 ‘메틸 이소시안산(Methlyl IsoCyanate)’을 저장하는 610번 탱크의 온도가 갑자기 올라가고 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메틸이소시안산은 1차 세계대전 때 독가스로 쓰인 ‘포스겐’과 ‘시안화 가스가’ 섞인 맹독성 화학물질이다. 이를 보관하는 탱크 내부는 섭씨 0도로 유지돼야 하는데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당황한 공장 측은 할 수 있는 모든 안전 대책을 총동원했지만 저장탱크의 온도는 내려가지 않았다. 속수무책으로 시간만 흐르고 계속 온도가 높아지던 610번 탱크의 콘크리트에는 균열이 생겼다.
결국 610번 탱크는 폭발했고, 42톤 규모의 메틸이소시안산 가스가 본격적으로 유출되기 시작했다.
뒤늦게 도착한 경찰이 주변을 차단하고 12월 3일 새벽 1시에 비상경보를 발령했다. 그러나 가스는 이미 퍼질 대로 퍼진 뒤였다.
공기보다 무거운 이 유독가스는 지상에 낮게 깔려 도시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깊은 잠에 빠져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런 고통에 깨어났다.
눈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고, 숨이 턱턱 막히며 토할 것 같은 증상이 계속됐다.
새벽 2시 즈음 병원에 실려 온 환자 중에는 입에 거품을 문 사람도 있었고 이미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인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유독가스로부터 멀리 도망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가스가 퍼져나가는 속도가 더 빨랐기 때문이다. 가라앉은 가스는 키 작은 아이부터 덮쳤고 주민들은 극심한 호흡곤란과 폐부종 증상을 보이며 죽어갔다.
사고 다음 날 보팔 시내에는 동물 사체가 가득했다. 하루 만에 사망자가 8,000여 명이나 발생했으며, 사고 이후 후유증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2만 명이 넘는다.
도시 전체에 시체가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시신들은 강에 던져지기도 했다. 주변 공기와 물이 오염되고 먹거리도 찾기 어려워 사람들은 고통 속에 죽어갔다.
이 대참사의 원인은 안전관리가 미비하고 비상대책이 부족했다는 데 있다. 메틸 이소시안산 저장탱크는 온도가 올라가면 내부 압력이 높아질 우려가 있어 항상 저온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때문에 안전수칙에 따라 철저하게 감독해야 하는데, 보팔 공장의 시설은 안전시설이 제대로 구비돼 있지 않았다.
보팔이 인구 밀집지역인데도 불구하고 최대한 설계비용을 줄이기 위해 검증되지 않은 설계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이뿐 아니다. 공장의 안전관리도 소홀해 사건 발생 당시에도 가장 기본적인 조기 경보체계마저 작동되지 않았다. 1981년 포스겐 가스 누출로 위험성이 보고 됐지만 시정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
유니언카바이드사의 책임이 명백한 것이다.
그럼에도 유니언카바이드는 피해자 보상과 후유 장애 치료, 선천성 기형을 타고난 2세들에 대한 대책 등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았다.
보팔 참사 피해자 대표로 인도 정부가 유니언카바이드에 요구한 보상금은 33억 달러였지만, 1989년 인도 대법원은 4억 7,000만 달러를 받는 것으로 판결 내렸고 이후 민사 책임도 인도 정부가 떠안게 됐다.
2004년이 돼서야 그동안 지연됐던 보상금 지급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이뤄졌고, 57만 명 이상의 피해자가 보상금과 구호 프로그램을 받게 됐다.
폐기물 처리와 오염된 수질 관리, 사고 생존자와 2세에 대한 집단 의료보험도 도입됐다. 1984년에 일어난 사고 처리계획이 20년 후에나 확정된 것이다.
당시 사고책임자에 대한 형사소송도 이로부터 6년이 지나서야 나왔다. 26년 만에 내려진 판결이었지만 형량이 말도 안 되게 가벼웠다.
법원이 유니언카바이드의 당시 책임자 7명에게 과실치사 협의로 내린 처벌은 ‘징역 2년에 벌금 약 250만 원’이 고작이었던 것.
이들 7명은 모두 보석으로 풀려났고 법원에 항소신청을 했으며, 특히 최고경영자였던 미국인 워런 앤더슨은 법정에 나타나지 않아 인도인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1984년 보팔 사고 희생자 중에는 아기를 사산하거나 유산한 경우가 많고, 그 당시 어린이들이 성장해 출산한 아이 중에는 선천적으로 기형인 경우도 보고 됐다.
기형이 아니더라도 심장질환, 언청이, 정신지체 등 여러 가지 장애를 갖는 경우도 많다. 이렇듯 보팔 대참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인구밀집 지역에 위험한 화학물질을 다루는 공장을 세우면서 안전대책을 충분히 마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팔 대참사와 구미 불산가스 누출사고는 닮은 점이 있다.
또 주민들에게 독성이 강한 화학물질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과 사고 수습이 허술해 피해를 더 키웠다는 점도 비슷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된다.
보팔 대참사와 구미 불산가스 누출사고에서 얻은 깨달음을 잊지 않아야 다시는 이런 사고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침묵의 봄’의 저자 레이첼 카슨이 했던 말을 되새겨야 한다.
▶1983년 특정 재래식무기 금지
협약(CCW) 발효
▶1983년 미국 우주선 콜롬비아호
과학자들 우주서 아연과 알루미늄
합금 성
▶1983년 소련 폭격기 9대 독도근해 출현
▶1982년 스페인 사회당수 수상
▶1980년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 자살
▶1980년 대청다목적댐 준공
▶1977년 아랍강경국 수뇌.
반(反)사다트 회의
▶1976년 오늘,
미국 B1 폭격기(초음속) 제작 발표.
▶1975년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 수립,
왕제 폐지
▶1972년 서울시민회관 화재로 53명
사망
▶1971년 아랍에미레이트연합,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8년 신탁은행 개점
▶1965년 베트 레이더 유도 미사일을
개발한 미국의 물리학자 드라이든 사망
▶1962년 인도 파키스탄에 불가침조약
제안
▶1961년 서기연호 사용 법령공포
▶1961년 MBC 개국
▶1961년제3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
개막(프랑스 파리)
▶1961년 국토건설단설치법 공포
▶1961년 재향군인회 결성
▶1961년 세제를 전면 개편(호별세,
교육세 폐지. 재산세 신설)
▶1956년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 82명,
`그란마호`를 타고 멕시코를 출발해
쿠바섬 상륙. 쿠바혁명 시작
쿠바혁명과 카스트로, 체 게바라
1956년 오늘, 82명의 망명 쿠바인을 태우고 멕시코를 떠난 요트 그란마 호가 항해 일주일 만에 쿠바 해안에 상륙했다. 이들을 이끈 이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카스트로는 이보다 3년 전 바티스타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병영을 습격한 일로 수감됐다가 풀려나 멕시코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쿠바인들을 규합했다. 그란마 호에 탄 이들은 카스트로와 함께 바티스타에게 대항하는 게릴라전을 전개하기 위해 다시 쿠바에 잠입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낡고 작은 배인 그란마호는 연료도 떨어지고 파도에 떠밀리는 바람에 좌초했다. 목표 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용하게 상륙했지만 쿠바 정부군에 발각돼 공격받는 바람에 또 큰 타격을 입는다.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20명. 이들은 정글로 들어가 본격적인 게릴라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골리앗에게 맞서는 다윗의 싸움이었지만 쿠바인들은 독재정권 대신 이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다. 혁명군은 잇따라 군사적 승리를 거두면서 세력을 확장해 불과 2년여 뒤인 1959년 1월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는 기적을 연출한다.
쿠바 혁명의 두 주역 중 카스트로는 올해로 50년 (2019년 현재는 카스트로가 사망하고
2016년,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집권하고있다)장기 집권하고 있다. 세계의 다른 독재자들이 그의 사라졌음에도 그는 천수를 누리고 있다. 반면 체 게바라는 혁명정부 요직을 지내기도 했지만 볼리비아 정글에 뛰어들어 게릴라전을 벌이다가 사살돼 전 세계 젊은 이들의 영원한 우상이 됐다.
▶1954년 석공광부 7천여명 파업
▶1954년 미국, 대만 상호방위조약 조인
▶1952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당선자 내한
아이젠하워(왼쪽)는 당선 직후인 12월 2일,
당선자 자격으로 한국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방한했다.
▶1951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개시
▶1947년 장덕수 전 동아일보 부사장
피살
▶1946년 이승만 도미. 남한 단독정부
수립 주
▶1945년 알바니아 총선(민주전선 압승)
▶1944년 이탈리아계 프랑스 작가
필리포 마리네티 사망
▶1942년 시카고대 페르미, 우라늄
핵분열 연쇄반응실험 성공
페르미, 우라늄 핵분열 연쇄반응실험 성공
미국 시카고대 실험원자로에서 우라늄 핵분열의 연쇄반응 실험이 성공했다.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페르미(Fermi, Enrico, 1901~1954)의 지도로 행해진 이 지속적 연쇄반응장치의 최대출력은 0.5w에 불과했지만 이 성공은 원자력 이용의 개막을 의미했다.
11월 중순 시카고대 운동장에 실험원자로가 완성되자 천연우라늄과 흑연이 격자모양으로 쌓아올려졌다. 1942년 12월 2일 오후 2시20분 우라늄과 흑연더미는 57층 높이가 됐고 원자로가 마침내 임계(臨界)에 달하자 핵분열의 연쇄반응이 실현됐다.
실험을 지휘한 페르미는 193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을 계기로 미국으로 이주했고 제2차대전이 발발하자 원폭개발계획(맨해튼계획)에 참여, 원폭제조 연구에 몰두했다.
▶1929년 베이징원인 두개골 발견
▶1923년 오페라 소프라노 가수
칼라스 출생
▶1918년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 사망
▶1915년 원세개 황제를 잠칭
▶1911년 혁명군 남경 점령
▶1902년 한국 최초의 극장 협률사,
일반인을 상대로 `소춘대유희(笑春
臺遊戱)` 공연
▶1901년 질레트, 일회용
안전면도기 발명
안전성을 강조한 질레트 면도기의 초기 광고
<최초의 질레트 면도기 인지는 확인이 않되고
오래된 면도기는 맞음>
▶1899년 미국-영국 사모아군도
분할협정 체결
▶1897년 러시아 금본위제 채택
▶1885년 그리스 작가 카잔차키스 출생
▶1823년 먼로 미국 대통령, 고립주의
외교노선 천명
▶1814년 `새디즘`이란 용어를 낳은
프랑스의 작가 사드 사망
▶1804년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나폴레옹대관식 다비드(프랑스) 1806-7년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나폴레옹(1769-1821)은 자신의 대관식을 가진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위해 로마교황 피우스 7세도 참석했다. 대관식 때, 교황이 나폴레옹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주려고 했지만 자신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에 무릎 꿇는 것을 두려워 한 나폴레옹은 교황의 손에서 왕관을 빼앗아 자기 절로 썼다.
나폴레옹에게서 대관식 그림을 위탁받은 궁정화가 다비드는 위의 이런 난처한 장면을 피면하기 위하여 나폴레옹이 황후 조세핀에게 관을 씌워주는 장면으로 나폴레옹이 교황에게서 관을 빼앗아 쓰는 장면을 대체했다. 나폴레옹의 흠모자이고 추종자인 다비드는 또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결혼 반대로 대관식에 참여하지 않은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마저 그림에 등장시켜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관을 씌워주는 모습을 내려다보도록 화면 중앙에 배치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대관식의 그림은 나폴레옹 일가의 가족사진을 방불케 한다. 나폴레옹의 형과 동생 그리고 5명의 여동생과 조세핀 전 남편의 두 아들까지 모습을 나타낸다.
다비드의 그림“나폴레옹의 대관식”은 나폴레옹의 가족사일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제국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화폭이기도 하다. 이 그림에는 수많은 역사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대신, 장군, 귀부인, 붉은 옷을 입은 주교, 각국의 사절들이 등장한다. 다비드는 지어 자신의 얼굴까지 이 그림에 등장시킬 정도로 나폴레옹과 나폴레옹 제국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자유, 평등, 우애를 부르짖은 프랑스 혁명은 다비드의“나폴레옹의 대관식”이란 그림의 탄생과 함께 의미를 퇴색하고 군주제의 시작을 선언했다. 이 그림은 권력을 추구하고 폭력을 사랑한 나폴레옹의 집념을 여실히 잘 보여준 정치적 예술작품이다.
다비드의“나폴레옹의 대관식”은 역사적인 화폭이든 나폴레옹제국을 선전하는 정치적 예술작품이든과 상관없이 나폴레옹과 다비드라는 두 인물의 후퇴를 잘 알려는 그림임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폴레옹은 군사력으로 여러 차례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한 기치가 확실한 프랑스 공화주의자였다. 혁명 덕분에 프랑스 공화국의 최고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은 국민들에게 혁명의 아들로 여겨졌고 그 자신도 이 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혁명의 아들이라기보다 오히려 18세기의 아들이었으며 가장 잘 깨우친 전제군주였다.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한동안 공화제 혁명을 계승하고 있었지만 야심만만한 그는 곧 나폴레옹제국을 세우고 해외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혁명자로부터 황제로 되어 거듭되는 침략전쟁으로 평화를 이탈한 나폴레옹의 결말은 묘비에 이름도 없이“여기에 눕다(Ci-Gît)”라는 말만 새겼을 뿐이다.
다비드 역시 기치가 선명한 혁명자이고 예술이라는 무기로 프랑스 공화제 혁명의 선두에서 달렸다. 프랑스 공화제의 수립을 위해 왕당파와 싸울 때 다비드는 자신의 예술작품으로 국민을 깨우치고 고동 시켰다. 하지만 그는 왕당파의 복벽으로 두 번 투옥 되었을 때 혁명자로서 입장이 선명하지 않았고 나폴레옹에 의해 석방된 후, 좌익인 자코뱅주의자에서 우익인 보나파르트주의자로 전변하고 나폴레옹의 궁정화가로 되어 나폴레옹제국을 위한 어용예술을 한다. 그가 어용적인 예술을 했던 것과 상관없이 그의 예술작품은 무한한 생명력을 과시하지만 결과는 다비드도 혁명을 이탈한 나폴레옹 개인 궁정화가로 퇴색되고 만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폴레옹과 다비드는 영원한 혁명자일 것이다. 단지 그들이 처음에 하던 혁명과 후에 하였다고 생각하는 혁명은 집념과 이념이 달랐을 뿐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평화를 이탈하고 국민을 이탈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침략에서 프랑스를 구하고 공화제를 위해 왕당파를 진압하긴 했지만 자신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대외침략으로 타국 국민들과 자국 국민들을 전쟁의 도가니에 밀어 넣은 것이다. 다비드는 국민들에게 공화제 혁명의 정당성을 선동하기 위해 예술을 했지만 나중에는 나폴레옹제국의 정당성을 선동하기 위해 어용예술을 한 것이다.
▶1547년 잉카 문명을 멸망시킨 스페인의 멕시코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사망했다.
코르테스 [Cortes, Hernan, 1485~1547.12.2]
1547년 12월2일 스페인 군인 에르난 코르테스가 62세로 죽었다. 코르테스는 스페인 사람들이 흔히 콘키스타도레스(정복자들)라고 부르는 16세기 초 아메리카 탐험가들 가운데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아스테크 문명을 파괴한 코르테스는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피사로 못지않게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정복자였지만, 스페인 왕실과 줄곧 좋은 관계를유지했던 피사로와 달리 신대륙에서의 잦은 월권 행위로 스페인 왕실과 마찰을 빚었다.
하급 귀족 출신의 코르테스는 19세에 대서양을 건너 쿠바에서 탐험가로서의 생애를 시작했다.
중앙 아메리카 탐험대장이 돼 스페인군을 이끌고 유카탄 반도에 상륙한 그는 자신의 발자국을 원주민의 피로 물들이며 멕시코 내륙으로 쳐들어가 아스테크 제국 황제 몬테수마 2세를 포로로 잡은 뒤 그 지역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임무를 벗어난 반란으로 간주돼 쿠바에서 진압군이 왔지만, 코르테스는 이들을 제압함으로써 스페인 왕의 노여움을 샀다.
그 즈음 멕시코에서 원주민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몬테수마 2세도 제 신민들의 돌팔매에 맞아 죽었다.
잔혹한 학살과 파괴로 이 반란을 제압하며 식민지를 건설한 코르테스를 본국 정부도 할 수 없이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그는 1540년 스페인으로 귀국한 뒤 왕의 냉대 속에서 쓸쓸히 죽었다.
코르테스를 박대했던 스페인 왕 카를로스1세는 카를 5세라는 이름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를 겸했던 유럽 최고의 권력자였다.
만년에 유럽 군주들 사이에서 고립되자 신성로마제국 제위와 스페인 왕위를 동생과 아들에게 각각 물려주고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지만, 재위시에는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대륙 대부분과 아메리카 대륙의 상당 부분이 그의 통치권 아래 있었다.
프로필
그레이스
https://youtu.be/27s_uRiqtRA
첫댓글 오늘의 역사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역사 잘 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오늘의 역사 감사합니다~영아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