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30일 [주님 부활 대축일] - 파스카 성야
복음: 마르 16,1-7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겸손의 땅, 갈릴래아!
김양회 요한 보스코 신부님은 남아프리카 여행 중에 요하네스버그 국제공항에서 앙골라 가는 비행기를 놓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면세점에서 아프리카 토속품들을 보다가 정신이 팔려 미처 시간을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실력도 좋지 못해서 출입국 직원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을 만나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는 것은 괜찮았지만 자신이 신부라는 것은 밝히기가 너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사제가 영어도 못하고 비행기도 놓치고 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서도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직업에 대해 질문을 했고 신부님은 결국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사실대로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도 성심성의껏 도와주어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를 작은 수수료만 내고 타고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참조: 김양회 신부, 부르면 희망이 되는 이름, 바보 같은 신부]
우리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교만해졌을 때 그 부끄러운 곳을 무화과 잎으로 가렸습니다.
그렇게 낮아지려 하지 않는 모습은 상대로부터 오는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황창연 신부님 강의 중 어떤 사람이 교통법규를 위반하였는데 경찰에 불응하며 저항했고 결국에는 경찰서장 불러오라고 화를 내다가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저 경찰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낮아지기가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이스라엘 땅을 지리적으로 보자면 높은 곳이 유다지방이고 낮은 곳이 갈릴래아 지방입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물이 풍부하여 아름다운 자연은 자랑하지만,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산지로 올라갈수록 광야가 펼쳐짐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이 넘치는 갈릴래아 호수와 죽음의 바다인 사해만 보아도 이 지리적 상징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줍니다.
낮아져야만 생명이 넘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부활하신 당신을 만나려거든 갈릴래아로 오라고
여인들을 통해 제자들에게 일러주게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갈릴래아’는 문자적이고 지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입니다.
그 날 예수님은 당신 무덤 앞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뒤 밤에는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곧이곧대로 믿어 진짜 갈릴래아로 갔다가는 절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호수 주변으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이 있고 예수님도 거기서 태어나시고 거기서 자라셨으며 거기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갈릴래아와 반대되는 개념은 사해를 포함한 유다지방입니다.
갈릴래아의 풍요로움에 비해 유다는 높고 척박하고 메마릅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부활 대축일 성야미사 때 읽는 7개의 독서는 어떻게 갈릴래아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알려줍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독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물이 풍부한 에덴동산에 아담을 살게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에덴동산이 갈릴래아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모든 인간이 은총이 사라지고 메마른 유다 광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는데 그 갈릴래아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교만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게 하여 믿지 못하게 합니다.
제3독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집트는 유다 광야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들을 억누르고 있었던 파라오는 뱀의 상징이고 교만의 상징이며 사탄의 상징이고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자아’의 상징입니다.
그 영원한 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길은 오로지 주님께서 파견하신 모세를 믿고 따르는 것뿐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건너게 하였듯이, 새 모세 그리스도는 당신 피로써 우리를 뱀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카인이 아벨의 피 때문에 그 땅에 살 수 없게 된 것처럼,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야
홍해를 건너 파라오의 지배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제4독서는 이렇게 우리를 우리 자신의 속박에서부터 자유롭게 구원해 주실 새 모세,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마치 죄로 간음한 우리 부정한 신부들을 찾아 나서시는 신랑처럼 당신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주실 분입니다.
제5독서에서는 이를 더 명확하게 말합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구원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는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술과 젖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메마른 땅의 ‘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생명의 물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성전 오른 편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왔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성령의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갈릴래아란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성령을 받는 이들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제6독서 바룩서에서는 구원의 신랑이 오실 날이 머지않았음을 예언하며 빨리 죽음의 땅인 교만에서 지혜의 샘을 찾아 떠나라고 재촉합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을 인도했던 별처럼 우리의 길을 결코 잃지 않게 하시기 위해 ‘빛’을 마련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제7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는 마지막으로 그 교회를 통하여 오는 ‘성사’를 통해 우리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주님이 주인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결국 교만으로 끊긴 은총의 샘물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다시 뿌려 우리 자신을 갈릴래아 호수처럼 생명이 넘쳐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아버지께 무언가를 요구하던 처지에서 종으로라도 써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로마서에서 우리 자신의 교만을 죽여 그분의 종으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분을 따르려면 우리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아 당신 자신의 뜻을 죽이신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야만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어 부활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야 하는 길은 한없이 겸손하여져서 성령으로 가득 차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풍요로운 갈릴래아 지방이 되어야 그 안에 주님께서 아담으로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시는 말씀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마태 18,3-4)와 같은 내용인 것입니다.
어린이가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하는 처지임을 아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 조건 없이 그리스도의 뜻에 순명해야만 살 수 있는 죽은 땅의 처지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겸손해져야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도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종으로라도 써 달라고 청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를 깨닫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30일 [파스카 성야 (부활 성야)]
마르코 16,1-7
빈 무덤 앞에서
언젠가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밤 9시 경 공동묘지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너무 늦어 안 되겠다 돌아가자, 이 시간에 무슨 성묘냐?
남들이 하는 대로 평범하게 살아야 된다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분을 모시고 글쎄 그 시간에 공동묘지에 도착했습니다.
하필 묘소는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가 능선 부근에 주차를 한 후 또 한참을 걸어 내려간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때 맞춰 밤안개마저 여기저기서 무럭무럭 피어올랐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밤에 보는 공동묘지는 낮과는 새삼스럽게 달랐습니다.
늘 쉽게 찾던 묘지였는데, 그날따라 찾지를 못하겠는 것입니다.
밤이슬을 맞으며 안개 사이를 헤치며 이 묘역 저 묘역 찾아 헤매는데 때맞춰 산짐승 울음소리까지 크게 들려왔습니다.
당시 부모님과 함께 밤 성묘를 갔었는데도 불구하고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머리카락이 자동으로 곤두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에 세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도 저와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아직 동이 트기도 전입니다.
아마도 세 여인은 예수님을 여윈 슬픔에 그 밤을 뜬 눈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여명이 밝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내달렸을 것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겨냅니다.”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던 예수님,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목숨까지 걸고 사랑했던 예수님께서 저리도 비참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다니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이제 그녀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생각 한 가지는 예수님의 시신에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어젯밤 서둘러 치룬 매장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신들에게 참 사랑을 일깨워주신 분, 새 삶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을 위해 남아있는 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골몰했습니다.
여인들은 있는 돈을 탈탈 털어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서둘러 최고급 수의와 향유를 들고 갔을 것입니다.
너무나 황당하고 경황없었던 어제였기에 다시금 차분하고 꼼꼼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신 새벽에 무덤을 향해 달려갔던 것입니다.
무덤에 다다르기 전 세 여인에게는 고민꺼리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통상적인 유다인들의 무덤은 동굴 형에다가 개폐 형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흙을 파서 관을 묻고 다시 흙을 덮는 봉분형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자신을 위해 미리 준비해둔 무덤이었는데, 이 무덤은 한 마디로 동굴 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동굴방 안 바닥에 안치했습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는 큰 돌을 굴려 막았습니다.
입구를 막은 돌을 옆으로 굴려야만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여인들로서는 힘에 벅찬 일이었기에 그리도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가에 도착했을 때 그 걱정꺼리는 덜었습니다.
이미 무덤 문이 열려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즉시 다른 걱정이 엄습해왔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세 여인이 서둘러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혼비백산했습니다.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무덤 속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천사였겠지요.
그 천사는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 계시지 않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과 정성이 극진하면 그 마음이 하늘에 닿아 하늘을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여인들의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주님을 향한 극진한 사랑은 머지않아 주님 부활 체험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예수님 빈 무덤 사건,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역사와 신앙 안에서 큰 획은 긋는 중요한 대사건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그냥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의 시신으로 그냥 무덤 안에 남아계셨더라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의미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창시자의 무덤에 대한 의미 부여가 대단합니다.
작은 조각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회당이나 법당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는 창시자 예수님의 무덤이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빌리셨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소유의 무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바로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바로 예수님의 진정한 부활을 의미합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만왕의 왕임을 드러내는 확증입니다.
빈 무덤은 참으로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빈 무덤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부활을 만천하에 알리는 부활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죽음을 이겨냈음을, 예수님의 겸손과 순명이 죽음의 세력조차 물리쳤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강론>
(2024. 3. 30. 토)(마르 16,1-7)
<희망>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1-7)”
1) 예수님 수난 당시에, 사도들과 신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음은 끔찍하고 생생한 현실이었고, 예수님의 부활은 비현실적인 일,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분명히 예수님 혼자서 고독하게 겪으신 일이지만, 사도들과 신자들도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슬픔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죽음과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사도들과 신자들이 겪은 고통은, 수난의 고통을 직접 겪으신 예수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사도들과 신자들이 겪은 고통과 슬픔은 예수님보다 더 큰 고통과 슬픔이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장례를 치를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고인보다 유가족의 고통과 슬픔이 더 클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죽은 당사자가 어떤 고통과 슬픔을 겪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어떻든 남아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너무나도 큰 슬픔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금방 그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활이 죽음보다 더 생생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다음에는 그들을 짓누르던 ‘큰 슬픔’에서 벗어나서 ‘큰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크게 슬퍼했던 그만큼 크게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부활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들과 박해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두려운(무서운) 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살인자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고, 그자들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 자체를 부정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순시기를 제대로 지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부활절이 그렇게 크게 기쁜 날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래서 특별히 간절하게 주님께 의지하거나 간청할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부활절이 그렇게 크게 기쁜 날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2) 어떤 중병에 걸려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실에 들어가야 하는 환자 입장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 수술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수술이라면, 또 수술 도중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예고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수술실에 들어가는 환자는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어느 정도 죽음을 체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실 마취에 빠져 있는 시간은 죽어 있는 시간과 별로 다르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직접 겪어 본 사람들은 모두 공감할 것입니다.)
하여간에 환자가 죽을 각오를 하고서 수술실에 들어가는 것은 ‘희망’ 때문입니다.
잘 되기를 바라는 희망, 이대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
(희망은 없고 절망 상태라면 수술 받기를 포기할 것입니다.)
그랬다가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난 다음에,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고, 병의 치료도 잘 될 것이고, 곧 건강을 되찾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그것은 곧 부활을 체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죽는 줄만 알았는데, 살아 있구나!” 라는 느낌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새로운 인생을 선물로 받은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한 번 더 제대로 살아볼 기회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합니다.
부활 체험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3)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힘은
바로 ‘희망의 힘’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를 바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에 희망이 없다면 살아갈 이유도 힘도 없게 됩니다.
죽지 못해서 사는 경우는,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죽음 너머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에 하는 생활입니다.
그 희망의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활 신앙’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신앙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부활 신앙’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기를 바라는 ‘희망의 신앙’입니다.
<믿음에서 희망이 생기고, 우리는 그 희망이 주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순서를 바꿔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기를 희망하니까, 즉 부활을 믿고 싶으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