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1일 오늘의 역사
2023년 태국 방콕, 촌부리, 푸껫 등의 체감 온도는 54도호 폭염 지속
2023년 러시아 전투기 우크라이나 공격도중 실수로 자국 도시 폭탄 투하
러시아 수호이(Su)-34 전투기가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40㎞ 떨어진 벨고로드에 폭탄을 떨어뜨려 강력한 폭발이 발생했다.이 폭발로 도로에는 직경 20m의 큰 구멍이 뚫렸다. 차 4대와 아파트 4채가 손상된 것으로 확인됐다. 인명피해는 부상자 3명으로 사망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벨고로드주 주지사 뱌체슬라프 글라트코프는 폭발사고가 일어난 당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주민을 대피시켰다. 사고는 기계적인 결함인지 조종사 실수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2021년 인도네시아 해군 잠수함 낭갈라함 실종 전원사망
독일산 재래식 1천400t급 잠수함 낭갈라함은 21일 오전 3시 25분(이하 자카르타 시각 기준)께 발리섬 북부 96㎞ 해상에서 어뢰 훈련을 위해 잠수한 뒤 실종됐다.
탑승자는 49명의 승조원과 사령관 1명, 무기 관계자 3명이며, 낭갈라함은 해저 600∼700m까지 가라앉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됐다.
낭갈라함은 잠수 중 침수가 발생하면서 전력이 끊기고, 통제력을 잃어 심해로 가라앉았을 가능성이 크다.
인도네시아 해군 최고위 관계자는 기자회견에서 "낭갈라함의 전기가 끊긴 상태에서 산소 비축량은 72시간에 불과하기에, 토요일 오전 3시가 구조 시한"이라고 발표했는데, 아무런 흔적도 못 찾은 채 구조 시한이 지나버렸다.
잠수함 전문가들은 "낭갈라함은 건조된 지 40년이 지난 재래함이고, 최대 잠항심도가 250m라서 수심 600∼700m까지 가라앉았으면 사고 당시 이미 찌그러져 탑승자들의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전했다.
2019년 우크라이나 대선 코미디언 출신 블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후보(41세) 당선
2019년 스리랑카 콜롬보 등 9곳에서 연쇄 폭발 테러 사망 최소 290명 부상 500명 이상
2014년 버마 최장기 양심수 우윈틴 세상 떠남, 사후 제4회 진실의 힘 인권상(2014) 받음
2012년 원로 작곡가 김성태 별세
'산유화' '동심초' '이별의 노래' 등 주옥같은 가곡을 남긴 원로 작곡가 김성태(金聖泰·102)
김 명예교수는 연희전문학교 상과 졸업반 때인 1934년 첫 동요 작곡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출간했으며, 1946년 서울대 음대 창설 당시부터 교수와 학장으로 봉직했으며,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과 예음문화재단 대표 등을 지냈다. 1945년에는 스승인 작곡가 현제명, 지휘자 김생려 등과 한국 첫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현 서울시향)을 창단해서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는 100곡에 가까운 가곡을 비롯해 실내악과 독주곡, 관현악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으며, 대한민국 문화훈장과 예술원상, 아시아영화제 최우수 영화음악상 등을 수상했다.
2010년 사마란치 전 IOC위원장 별세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89)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으로 체육 관료를 거쳐 1980년 제7대 IOC 위원장에 당선된 사마란치는 2001년 자크 로게(벨기에) 현 위원장에게 자리를 넘길 때까지 21년간 IOC를 이끌어 왔다. 사마란치 아래에서 올림픽은 최대의 스포츠 이벤트로 성장했다. 그러나 1999년엔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뇌물 스캔들에 휘말려 위기를 맞았다. 미 솔트레이크시티가 올림픽 유치과정에서 거액의 뇌물을 IOC 수뇌부에 뿌렸다는 폭로로 사마란치는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이는 결국 그가 권좌에서 물러나는 원인이 됐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통해 한국 스포츠와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쎄울(Seoul), 코레아”라고 1988년의 올림픽 개최지를 발표한 이가 그였다. 구소련과 미국의 대립으로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과 1984년 LA올림픽이 각각 반쪽 대회로 치러진 상태에서 사마란치는 적극적으로 서울올림픽을 지지하고 후원했다. 그는 또 한국의 국기(國技)인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 대회부터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사마란치는 시드니올림픽 남북한 공동 입장을 막후에서 적극적으로 중재해 성사시켰다.
2008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국가태풍센터 개소.
2008년 광주광역시 광주원음방송 개국.
2008년 참여정부 때였던 2008년 2월 중순에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의 전산망이 해킹당한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2007년 프로야구 이대호 사직구장 최초 장외홈런 기록.
2004년 황우석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윤덕용 한국과학기술원 신소재공학과 석좌교수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상 수상
2001년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에 농둑만 선출
베트남의 실질적 최고지도자인 공산당 서기장에 농둑만(61) 국회의장이 당선됐다. 베트남 공산당은 제9차 전당대회 사흘째인 2001년 4월 21일 실시한 투표에서 보수파인 레카피유(70) 후임으로 앞으로 5년간 당과 국가를 이끌어갈 신임 서기장에 개혁 성향의 농둑만을 압도적 지지로 선출했다.
소수민족인 따이족 출신인 농둑만은 뛰어난 친화력과 온화한 성품, 개혁 이미지 등으로 국민들의 높은 인기를 얻고 있으며,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호치민의 숨겨진 아들로 소문이 나 있다.
토목기사 출신인 그는 1958년 ‘공산 혁명’ 에 가담한 뒤 1963년 정식으로 공산당원이 됐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 북부 박타이성 토목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으며 1986년 제6차 전당대회를 앞두고 공산당 중앙상임위원이 됐다. 1991년 공산당 정치국원이 된 그는 1992년 국회의장에 올랐다. 레카피유 전 서기장이 미국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던 것과는 달리, 농둑만은 대미관계도 좋은 편이어서 미국과의 관계가 원활해진 것으로 평가됐다.
2000년 러시아 의회,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
러시아 하원은 21일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omprehensive Test Ban Treaty·CTBT)’ 을 승인했다
지난달 26일 대통령에 당선된 블라디미르 푸틴 당선자의 강경 이미지에 대해 국제사회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 안보위원회는 이날 강력한 새 군사 독트린을 발표했다. 대통령궁 발표에 따르면 신 군사 독트린은 “러시아 연방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모든 수단들이 실패하거나 효과적이지 않을 경우, 핵무기를 포함해 모든 군사력과 동원 가능한 수단의 사용을 염두에 두고 있다” 고 돼있다.
이 독트린은 러시아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경우 러시아에 핵 선제공격권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신 군사 독트린은 지난 93년 채택된 독트린을 개정한 것이며, 푸틴 당선자의 주도로 이날 승인됐다. 신 군사 독트린을 논의하는 회의석상에는 러시아 고위 군 관리들과 에너지업계 대기업의 총수 2명이 참석했다.
1999년 동티모르 독립지지 게릴라와 반대파 무장 민병대 평화협정에 서명
‘독립이냐, 잔류냐’를 놓고 유혈극을 빚어온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독립지지 게릴라와 독립 반대 무장 민병대가 21일 상호 폭력 사용 중단을 명시한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CNN은 이날 독립 지지파 지도자 사나나 구스마오가 가택 연금중인 자카르타의 안가에서 협정에 서명한데 이어, 친(親)인도네시아 민병대 지도자들이 동티모르 주도(主都) 딜리에서 서명을 마쳤다고 보도했다. 이날 평화 협정 서명은 인도네시아 군사령관 위란토 장군과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카를로스 벨로 주교의 입회하에 이뤄졌다.
독립반대 민병대 지도자 바실리오 아라우조는 서명식이 끝난 뒤 이번 협정이 “양 세력간 휴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폭력 사태를 중단하는데 합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동티모르는 지난 75년 인도네시아의 침공으로 강제합병됐으며, 이후 20여년간 무장투쟁과 내전으로 전체 인구 80만명 가운데 20만명이 희생됐다. 오는 7월 유엔 감시하에 자치안에 대한 주민투표가 실시될 예정이지만, 투표가 다가옴에 따라 독립 지지파와 독립 반대파의 해묵은 갈등이 격화, 지난 한주일 동안 양 세력간 방화 폭력 살인극으로 30여명이 숨졌다.
1999년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 사퇴
조중훈 대한항공 회장이 회장직을 사임, 대한항공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또 조양호 대한항공 사장은 대한항공 회장에 선임됐으나 경영일선에서는 손을 뗐고 심이택(60)부사장이 전문경영인으로서 대한항공 새 사장에 선임됐다.
대한항공은 22일 서울 소공동 해운센터 본사빌딩에서 이사회를 열고 “조중훈 대한항공 회장이 근간 발생한 항공기 사고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지고 회장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조 회장은 이에 따라 한진그룹의 회장직만 수행하게 됐다. 대한항공은 “조양호 사장은 회장으로 선임됐지만 일선 경영에서는 물러나며 전경련 부회장직과 국제민간항공기구(IATA) 집행위원 등 대외적인 업무만을 담당한다”고 밝혔다.
조 그룹 회장은 대한항공 회장직 사임 후 발표문을 통해 “그간의 실책과 허물은 모두 내가 짊어지겠다”면서 “새로 취임하는 회장과 사장이 서로 힘을 합쳐 미래에 대비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1998년 쿠바와 도미니카 외교관계 정상화(1959년 6월 26일 외교관계 단절)
1996년 체첸 독립 상징 조하르 두다예프 사망
조하르 두다예프(52) 체첸반군 대통령이 1996년 4월 21일 사망했다. 체첸 출생인 두다예프는 모스크바에서 공군학교를 졸업, 전투기 조종사로 출세가도를 달려 소련공군 소장으로 예편한 이색적인 인물이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인 1991년 11월 체첸 독립을 선포한 뒤 러시아와 힘겨운 투쟁을 계속해 `체첸독립운동의 영웅`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죽음은 위성 이동통신을 통해 모스크바와 전화 협상을 하다 이 전화 주파수를 추적한 러시아군의 미사일에 맞아 폭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러시아 정보기관은 전화 통화를 역추적해 이동전화의 전파를 잡아낸 뒤 두다예프 전화의 주파수를 입력한 유도 미사일을 준비했다. 러시아 전투기는 두다예프의 이동전화 주파수 추적 장치를 장착한 공대지미사일을 탑재하고 게히추 마을 부근으로 출격, 두다예프가 모스크바측과 통화하는 것을 포착한 뒤 미사일을 발사했다. 당시 두다예프는 러시아군에 위치가 발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제 지프 니바를 타고 이동하면서 통화를 하고 있었으며 통화가 길어지면 끊었다가 다시 걸곤 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러시아 전투기는 미사일 발사 시간을 4번이나 놓치고 5번째에 성공했다. 두다예프가 탄 지프는 완전히 박살났으며 두다예프를 비롯, 함께 탑승했던 측근도 그 자리에서 숨졌다. 두다예프의 자리를 이은 젤림한 얀다르비예프도 4월 29일 피살됐다.
1993년 지하철 4호선 상계-당고개 구간 운행개시
1993년 제49회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ESCAP)가 방콕서 개막
1989년 덕혜옹주 사망
덕혜옹주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여났다
1931년 옛 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다케유와 정략결혼을 하는 등 인생이 불우했다
1962년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에서 거주하다 1989년 4월21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1984년 한국-카타르, 경제기술무역협정 체결
1983년 한국여성개발원 개원
1980년 사북사태 발발
1980년 4월 21일. 국내 최대의 민영 탄광인 강원도 사북읍 동원탄좌에서 사북 노동자 총파업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사북탄광촌 어용노조 지부장이 회사측과 짜고 그해 노조원의 임금인상률을 노조측이 요구하던 42.75% 가 아닌 20% 로 몰래 서명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회사와 어용노조의 담합사실이 전해지자 분노한 노조원들이 지부장에게 몰려가 임금인상 경위 등을 추궁하며 4월 17일부터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던 중, 4월 21일 오후 5시쯤 광부를 가장해 농성장에 잠입했다가 신분이 탄로 나 지프차를 타고 도망치던 경찰이 수십 명의 노동자가 앞에 있는데도 그대로 질주, 4명의 광부들을 다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동료가 죽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탄광촌에 퍼지자 흥분한 노동자들이 몰려들어 경찰과 충돌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농성이 유혈폭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노동자들은 임금 30% 인상과 상여금 400% 지급, 어용노조 지부장 사퇴 등을 요구하면서 거의 전원이 들고 일어나 노조 사무실과 광업소 사무실, 정선경찰서 사북지서 등을 점거했다.
정선경찰서와 이웃 장성·영월 경찰서 병력이 총동원되고 서울에서 500여 명의 기동경찰이 급파되었다. 대규모 경찰 병력이 투입됐지만 저항하는 5,000명의 시위대를 당해내진 못했다. 하지만 경찰관 1명이 숨지고 경찰과 광부 160여 명이 부상하는 등 양측 모두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마침내 4월 24일, 광부 측과 정부 측 대표는 밤샘 협상 끝에 노조 집행부 사퇴, 상여금인상 등 11개항의 협상안을 타결지었다.
1980년 한국의 시인. 문학평론가. 영문학자 송욱 사망
1979년 로디지아 정부 초대수상에 무조레와 주교 취임
1978년 KAL기 소련 무르만스크에 비상착륙
승객 97명과 승무원 13명을 태운 파리발 서울행 대한항공 보잉 707기가 1978년 4월 21일 오전 북극항로를 비행중 항로 잘못으로 소련 영공에 진입, 전투기 총격을 받은 후 무르만스크시 남쪽 2백마일 켐마을 부근의 얼어붙은 호수에 비상착륙했다. 총격때 승객 2명이 사망, 10명이 부상을 당했다. 소련당국은 억류됐던 탑승자를 3일 만에, 기장과 항법사는 10일 만에 석방했으나 기체는 미송환됐다. 항로 실수의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다
1977년 충북대, 청원군에서 20만년전 동물벽화 발견
1975년 티우 남베트남대통령 사임
1971년 14년간 장기 집권한 아이티 대통령 장 클로드 뒤발리에 사망
1967년 과학기술처 공식 설립
1965년 한국-감비아 국교 수립
1961년 황윤석 판사 변사사건
1961년 4월. 4 19혁명 1주년을 맞아 19일과 20일은 전국적으로 각종 이유를 내건 데모 시위가 밤늦게까지 벌어졌다.
이런 소용돌이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 기미가 보이던 21일, 라디오에서 충격적인 뉴스가 발표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판사 황윤석의 의문사였다.
이날 오전 9시경 서울시 중구 신당동 자택 방에 숨져있는 황윤석씨를 시아버지 손병도씨가 발견,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우리나라 여판사 1호, 황윤석 판사, 그녀는 192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학가 황의돈의 딸이었던 황윤석은 어려서부터 철학과 문학에 관심이 컸으나,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게 됐다.
스물 셋 나이로 고등고시에 합격한 황윤석은 이듬해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판사가 됐다.
황윤석의 죽음이 신문, 라디오를 통해 떠들썩하게 보도되자 검찰은 사건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담당 검사에 오탁근 부장검사를 배정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황윤석의 시체해부 결과 밝혀진 것은 베나드릴이라는 약물이 검출되었을 뿐이었다. 이렇듯 황윤석 판사의 사인이 뚜렷하게 규명되지 않자 항간의 관심도 점차 커져만갔다. 그러나 때마침 5.16군사 쿠데타가 발생해 묻혀버리고 말았다.
1960년 소설가 이무영 사망
1960년 브라질, 브라질리아로 천도
1960년 4월 21일, 브라질이 수도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브라질리아로 이전했다. 해안을 따라 밀집해 있는 인구 편중을 시정하고 내륙 개발을 목적으로 한 천도(遷都)가 결정된 것은 1955년. 민주사회당 주셀리노 쿠비체크 대통령의 선거공약이었지만 1889년에 이미 제국헌법에서 규정했던 사항이었다.
브라질의 첫 수도는 1549년 포르투갈인들이 정한 살바도르였고, 이후 1763년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겼다가 이날 다시 브라질리아로 옮겼다.
쿠비체크는 대통령에 당선되자 7억달러의 차관을 빌려 ‘50년을 5년으로’라는 구호 아래 브라질의 현대화와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 신수도 건설과 공업성장 등 대대적인 변화를 모색했다. 리우에서 600마일 떨어진 중부의 광대한 고이아스 고원에 위치한 브라질리아는 천재 건축가인 루시오 코스타와 유엔 빌딩 설계자인 오스카 니마이어 등의 설계로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날개를 펼친 제트기 모양의 시가를 하고 있다. 수도건설로 내륙개발의 전기가 마련됐다는 평가와 함께 열정적 브라질 사람들의 생활습관과 동떨어져 사람들이 정 붙일 곳이 없고, 산업시설 부족으로 물가도 비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1950년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50년 한국은행법 국회 통과
1946년 `케인즈 경제학`의 창시자 케인즈 사망
영국 케임브리지셔에서 태어난 케인즈는 영국 최고의 교육기관인 이튼고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공무원이 되어 인도부 및 재무부에서 근무했다.
1911년~1945년 영국의 대표적 경제잡지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자로 있으면서, 재무성 수석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 후 재무상 고문, 국민상호보험회사 사장, 투자회사의 경영자, `뉴 스테이츠먼 앤드 네이션`지의 사장, 브레튼우즈 협정 영국대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총재, 20세기 문예운동의 하나인 블룸즈버리그룹 회원, 음악미술장려회 회장 등을 지냈다. 케인즈는 경제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철학, 고전, 사상 및 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케인즈 경제학`의 원전은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다. 케인즈는 1930년대 대공황시대의 대량 실업을 배경으로 집필한 이 책에서 흔히 `케인즈 혁명`으로 불리는 유효수요의 이론을 제창했다. 그는 이 책에서 고용을 늘리려면 자유방임주의를 폐기하고 소비와 투자, 곧 유효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공공 지출 등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실업의 원인을 유효수요의 부족에서 찾고, 유효수요의 창출을 위해 정부가 조세, 화폐, 금융, 재정 등 경제 전반에 걸쳐 간섭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944년 주기철 목사 순교
1938년, 한국 종교계가 질곡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조여오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부쩍 강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이미 1936년 5월에 신사참배를 용인하는 로마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를 참배하고 있었고 같은 해에 안식교도 신사참배를 시작했다.
감리교·성결교·성공회 등도 뒤를 따르자 1938년 2월 일제의 강압으로 장로교 평북노회마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그러나 숭실학교·숭의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들은 스스로 폐교(1938년 3월)까지 하며 항의의 뜻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와중에 1938년 8월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가 두 번째로 투옥됐다. 평소 교회를 수호하겠다는 결의를 거듭 밝혀온 데다 과거에도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을 주도했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8년 9월 9일, 주 목사가 투옥된 틈을 타 한국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평양에서 열린다. 친일 목사들에 의해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회의를 지켜보던 교인들이 곳곳에서 흐느꼈다.
“나는 하나님께 상소하오”라고 외친 교인은 경찰에 끌려갔다.
일제는 회유와 협박, 심지어는 고문까지 자행하며 주 목사의 의지를 꺾어보려 했으나 주 목사는 완강했다.
마침내 일제는 산정현교회를 폐쇄시키고, 1940년 9월 네 번째로 그를 투옥시킨다. 목사직까지 박탈했다.
1944년 4월 21일 밤 9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예감한 주 목사는 눈을 감았다.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 죽음을 앞둔 마지막 기도였다
1941년 그리스, 독일에 항복
1926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출생
1915년 배우 안소니 퀸 출생
1910년 `톰 소여의 모험` 작가 마크 트웨인 사망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이 1910년 4월 21일 사망했다. 향년 75세였다. 트웨인의 소설들은 우리 독자들, 특히 어린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주로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인의 삶과 변경인의 정신을 노래한 그의 소설들은 가장 미국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트웨인이 가난한 개척민이었던 부모를 따라 미시시피강가의 해니벌로 이주한 것은 네살때였다. 이후 인쇄소 견습공을 거쳐 미시시피강의 수로 안내인이 된 22살때까지의 삶은 마크 트웨인의 작품세계에 짙게 투영돼 있다. 그가 본명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 대신에 사용했던 필명 마크 트웨인은 강의 뱃사람 용어로 안전수역을 나타내는 `두 길` 표시의 부표를 뜻한다.
1861년 남북전쟁이 터지면서 그는 수로 안내인을 그만두고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야성과 유모를 결합시킨 처녀 단편집 `캘러배러스 카운티의 명물 뛰어오르는 개구리`(1867)는 그를 단번에 명사로 만들었다. 그는 대표작 `톰 소여의 모험`(1876) `미시시피강의 생활`(1883)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 등을 남겼다
1903년 러시아군, 용암포 강점
1898년 미국, 쿠바독립 승인
1864년 독일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 출생
1838년 자연주의 철학자-작가 존 무어 출생
1835년 미국의 면직공업 창시자 슬레이터 사망
1830년 영국 기어자전거 발명가 제임스 스탤리 출생
1816년 영국 소설가 샬롯 브론테 출생
1782년 독일의 유치원 창시자, 교육개혁가인 프리드리히 프뢰벨 출생
1699년 프랑스 극작가 장 라신 사망
1657년 신성로마제국 페르디난도 3세 사망
1571년 명종실록 인쇄
1142년 프랑스 스콜라 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 사망
프랑스의 스콜라 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가 1142년 4월 21일 63세로 사망했다. 1079년 프랑스 낭트에서 태어난 그는 22세 때 파리로 가 기욤으로부터 논리학과 수사학을 공부했고, 파리 성당 학교의 교수 시절에는 문필과 강연에도 크게 활약했다.
중세 스콜라 철학과 신학을 논쟁하는 자리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그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를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여제자 엘로이즈와의 사랑이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아벨라르의 명성이 한창이던 1118년이었다. 39세의 남자와 18세의 여자였다. 첫 눈에 반한 그는 그녀를 유괴까지하며 결혼했으나 둘간의 결혼을 반대한 엘로이즈 삼촌의 사주로 그는 극부가 잘리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아벨라르는 수치심과 절망, 그리고 삼위일체설을 제창한 그의 저서 `신의 일체성과 위격에 관하여`가 1121년 스와송 공의회에서 사설(邪說)이라는 이유로 분서(焚書) 선고를 받자 부르타뉴의 생메다르 수도원으로 가 신앙과 학문에 전념했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또 논쟁했다.
그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그린 `나의 불행한 이야기`는 당시 유럽 독서계를 풍미했고 심지어 교황청안에서도 몰래 읽혔다고 전해진다. 여자도 수녀가 됐지만 둘은 서로 편지만 주고받았을 뿐 만나는 것을 자제했다. 편지도 남녀간의 사랑이 아닌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사랑만을 담았다. 엘로이즈는 그가 사망하자 22년동안 그의 무덤을 지키기다 63세로 생을 마감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600년이 지난 뒤 루소의 소설 `쥘리 또는 새 엘로이즈`에서 다시 부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