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정사 투신한 극작가 김우진의 무덤이 무안군 관내에 소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난달 31일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 몰뫼산을 찾아갔다.
마을 사람들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고, 산꼭대기 정상 어느 부위엔가 상석에 이름자가 적혀 있다는 소식만 접했을 뿐이다. 등산로도 없는 산을 헤집고 정상을 향해 오르기를 30여분, 벌초조차 되지 않은 초라한 묘지를 산 정상에서 만났다.
<문학사 김우진지묘> 관내에 초혼(招魂)이 있는 사실조차 몰랐던 나에게 김우진의 작품세계가 새롭게 고찰되고 있는 학계의 관심에 따라 기사화 해보기로 했다.
나홀로 묘지
<전남 무안 청계에 있는 김우진의 쓸쓸한 초혼묘>
생전에 부는 누렸으나 고독하게 문학생활을 추구했던 그의 삶처럼 지금의 무덤 역시 나홀로 묘지였다. 시신이야 당시 윤심덕과 투신 정사해 찾지를 못했지만 아들 김방한 (서울대 교수 역임, 2002년 작고) 씨는 아버지의 원혼을 불러 초혼묘를 썼다.
당시 김우진의 부친인 김성규씨의 소유였던 몰뫼산 정상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가 문학을 했던 목포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더구나 동서남북이 확 틔여 묘지가 아니더라도 등산객은 이곳에서 한번쯤 휴식을 취하며 호연지기를 길러 봄직한 명당이기도 했다.
몰뫼산 역시 해발 200여미터로 월출산에 버금이야 아니지만 기암괴석들로 발길을 멈추게 했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진달래가 봄기운을 물씬 풍겨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근근히 김우진의 묘지를 찾았을 때 무성한 잡초는 인생무상을 느끼게 했고, 등산객의 발길이나마 그리워졌지만 등산로조차 없는 현실은 그마저도 무심케 했다.
목포시 김성규·김우진 박물관 추진
김우진의 유족들은 2002년 7월 김성규·김우진의 유품 모두를 목포시에 기증했다. 총 141점(김성규 초상화 3점 제외)인 유품 속에는 김우진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사진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고려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겠다고 기증을 요구했지만 유족들은 고향인 목포에 기증을 결정, 이에 따라 목포시는 현재 구 동양척식회사 건물에 8억 원의 예산을 들여 개보수 중이며 빠르면 금년 중에 개관한다는 입장이다.
김우진의 생애
<극작가 김우진(1897∼1926.8.4)>
김우진(1897∼1926)은 1920년대 대표적인 비평가이자 극작가로 평가받아 왔다.
안동 김씨 성규의 장남으로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김우진의 호는 초성(焦星) 또는 수산 (水山)이며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북초등학교) 졸업에 이어 일본 구마모또농업학교를 거쳐 19세에 곡성 출신 정점효(鄭點孝)와 결혼, 1924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1926년 8월4일 동갑나기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투신정사, 당시 세인들의 관심이 모아졌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씨와 1남(방한, 2살), 1녀(진호, 8살)가 있었다.
<극작가 김우진과 자녀>
문학인으로의 열망
김우진은 농업학교 시절에 시작에 심취했고, 대학 때부터 연극을 시작, 1920년 조명희, 홍해성, 고한승, 조춘광 등 유학생과 함께 연극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창립한데 이어 1921년 동우회순회연극단을 조직 국내 순회 공연을 했다.
이때 소요되는 공연비 일체와 연출을 담당함은 물론 아일랜드 극작가 던세니가 쓴 상연 작품『찬란한 문』은 그가 직접 번역한 작품이다.
대학 졸업후 목포로 귀향해 영농사업체인 상성합명회사(祥星合名會社)의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문학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창작활동에 몰두, 시(50편), 희곡(5편), 소설(3편), 평론(20편) 등 총 78편의 작품을 남겼다.
문학세계
희곡 분야는 그의 문학적 근대성을 작품으로써 가장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장르라 할 수 있다.
「正午」,「이영녀」,「두더지시인의 환멸」,「난파)」,「산돼지」가 창작희곡이고 번역작품으로「위렌부인의 직업」이 있다. 특히「이영녀」는 3막극으로 목포 유달산 밑 사창가의 처참한 생활을 자연주의 수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1926년에 쓴「난파」는 복잡하게 얽힌 유교적 가족구조 속에서 현대적인 서구윤리를 지닌 한 젊은 시인의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산돼지」는 좌절당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하는 모습과 함께 그의 사상인 사회 개혁을 역설하고 있다.
또 평론 분야는 김우진이 이론으로 가장 탄탄한 근대성을 과시했던 분야다. 그 중「소위 근대 극에 대하여」,「자유극장 이야기」,「사옹의 생활」, 「구미」극작가론은 탁월한 논문으로 평가받고 있고, 「창작을 권합네다」는 표현주의를 체계적으로 소개한데 이어 전통적인 인습타파를 작품주제로 삼은 한국작가들에게 표현주의가 가장 알맞은 창잡법이라는 논지를 폈다.
아울러「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아관 계급문학과 비평가」라는 논문을 통해 계몽적 민족주의와 인도주의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밖에도「조선말 없는 조선문단에 일언함」에서는 순수한 조선어의 부흥과 개량을 역설했고, 새문전의 제정과 사전의 필요성, 구비전설과 민요, 동요 수집을 촉구한데 이어 우리의 독특한 시가율을 가질 것과 외국문학의 우리말 번역, 신문잡지의 대중화 등을 주장했다.
이처럼 자기가 겪은 시대적 고통을 희곡 속에 적절히 투영함으로써 계몽적 민족주의나 인도주의 내지 감상주의에 머물렀던 기성 문단을 뛰어 넘은 표현주의작품으로 실험한 우리나라 유일의 극작가로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신극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도 평가받고 있다.
김우진 정사
1926년 8월4일 김우진은 예술적 애정관계를 맺고 있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29세의 나이에 투신정사(投身情死)했다. 당시의 신문에서는 지식인의 어처구니없는 종말에 대해서 반신반의와 무책임한 처사에 대한 질책으로 보도됐다.
다음은 1926년 8월5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머리기사에는 실린 전문이다.
“지난 삼일 오후 열한시에 하관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사일 오전 네시경에 대마도 엽흘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녀자 한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엿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수색하엿스나 그 종적을 찻지 못하엿스며 그 선객 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시 북교동 김수산(30), 녀자는 경성부 서대문뎡 이뎡목 이백칠십삼번디 윤수선이라 하엿스나 그것은 본명이 아니요 남자는 김우진이요, 녀자는 윤심덕이엿스며,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일백사십원과 장식품이 잇섯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이십원과 금시계가 드러 이섯는데 련락선에서 조선사람이 정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정사 당시 신문 기사>
「사의 찬미」
윤심덕
<소프라노 윤심덕(1897∼1926)>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대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차즈려 가느냐"(이하 생략)
이 곡은 러시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곡인 「다뉴브 강의 잔 물결」에 김우진이 가사(?)를 붙였고, 윤심덕이 노래했다.
우리 나라 최초의 대중가요인「사의찬미」를 부른 윤심덕은 암울한 일제 강점기시대에 지성인으로 자질을 마음껏 부르다 애인 김우진과 바다에 몸을 던진 풍운아였다.
윤심덕(1897∼1926)은 평양에서 출생, 경성여고를 졸업한 교사출신이고, 동경음악학교 성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김우진의 소개로 도쿄 유학생들이 결성한 신극운동단체인 토월회에 가입해 영화(동도)를 각색극화한 여주인공 안나 역을 맡기도 할만큼 연극배우이며, 우리 나라 최초 대중 가수 및 소프라노 가수로 활약했다.
이후 일본에서 김우진과 함께 귀국하다 현해탄에서 투신정사 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바 있는 윤심덕은 1926년 8월4일 정사 당시 현금 140원(2002년 물가지수 환산, 33만원)이 있었다 한다.
박금남 <오마이뉴스 2003-04-03 18: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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