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일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마태오 28,8-15
관심만 있으면 부활은 저절로 믿어진다. 그러나 관심이 없는 이유가….
신자들과 면담할 때 제가 가장 중점으로 삼는 것은 미사만 나오지 말고 레지오와 같은 단체에 들어가
친교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것입니다.
미사만 나와서는 신앙의 발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신앙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 결과가 공동체이며 그 소속감에서 신앙의 참 행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신자들은 이것을 매우 꺼립니다. 성당엔 나가야 하는지 알지만, 내가 숨기고 싶은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자꾸 물어보는 게 싫은 것입니다.
만약 자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엄마가 자신의 가정사를 모르는 본당에 이사 왔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그 본당에서 적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사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죽은 게 본인 탓이라고 부모는 느낄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상처를 건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본당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하느님 사랑을 그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삶이 참 부활의 삶이라고
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상처는 그 부활의 삶으로 가는 길을 막습니다.
만약 그 부활의 삶이 레지오 단체라고 한다면 상처 있는 사람은 그 레지오 단체에 대해 전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명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들의 발목을 잡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여 많은 유다인들이 그들의 말을 듣고는 부활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있는 상처가 나의 탓이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탓이건, 아니건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습니다.
그런데도 그 상처 때문에 공동체와 하나 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나의 영광’을 추구하고 ‘세상이 주는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 집착하면 결국 하늘로 오를 수 없습니다.
‘예수는 역사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신문기자로 그리스도인들의 헛된 신앙을 깨버리려고 성경과 역사를 연구하다가 결국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실화인데 그가 쓴 책은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로 볼 수 있는 것은 믿으려고 하지 않고 그냥 알려고만 해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는 신문사와 같은 입장에 설 수 없습니다.
그 신문사는 종교색채를 띠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전 경비병들에게처럼 부활의 증거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고 믿으려고만 하면 누구나 쉽게 믿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은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보려고 달려가는 노력만 있으면 믿어질 수 있습니다.
저도 하.사.시.를 통해 예수님을 알려고 했던 것 덕분으로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이나 세상에서의 성공에 대한 애착이 끊어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 열 권의 책을 5년에 걸쳐 끝까지 읽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참 부활의 갈릴래아인 신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비행기를 탄 순간은 신학생 때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날 때였습니다.
몇 년 동안 돌아올 수도 없고, 말 한마디도 못 하는 나라로 갈 때 저는 정말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비행장에는 저를 배웅하러 많은 사람이 나왔었는데, 저는 그들과 지내는 것이 참 행복했습니다.
그들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이후로 참 많이도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쁘게 비행기를 탔던 순간이 언제였을까요? 바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올 때였습니다.
이탈리아 쪽으로는 오줌도 누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정이 떨어졌습니다.
하늘로 오르는 것을 부활이라고 한다면, 그 부활은 내가 지금 발붙이고 있는 곳에 정이 떨어져야 합니다.
그냥 사는 게 힘들어서 무조건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붙이고 있는 곳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영광이 기대되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말려도 스스로 부활을 믿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영광만을 바라면 결코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오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실 자기 영광만 찾는다면 그는 유익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신학생들은 자기 나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방학 때 여러 신학생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일자리를 얻어 자기 집에 돈을 보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신학교로 돌아갈 수 없고 사제가 될 수도 없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내가 지상의 부활을 원한다면 천상의 부활은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1일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마태오 28,8-15
“평안하냐?”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발현하셔서 처음으로 건네신 말씀들을 묵상해봅니다.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로 돌아가신 예수님이셨는데, 그리도 억울한 죽음을 당하셨는데,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철저한 외면과 배신을 당하면서 죽어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던지신 말씀은 이랬습니다.
“평안하냐?”
구원자로 오신 자신을 그토록 혹독하게 다루었으며, 결국 그토록 험악한 꼴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후 인간세상을 향해 던진 첫 마디가 “평안하냐?”였습니다.
그분의 어조에서는 조금의 분노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간 당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도 않으십니다.
오직 우리들 걱정뿐입니다.
“평안하냐?”는 한 마디 말 안에는 이런 예수님의 심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간 나 때문에 얼마나 걱정들이 많았느냐? 실망도 많았겠지?
내면의 두려움도 컸겠지? 이제 안심하여라.
내가 이렇게 다시 살아나지 않았느냐?”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다정한 어조로 ‘내 형제들’이라 칭하면서 미리 용서를 베푸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제자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당신을 찾아오기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친히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분께서 위기에 처했을 때 외면하고 떠나간 부당한 제자들이었지만, 조금도 꾸짖지 않으십니다.
제자로서 그릇된 행동 앞에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잘못이 하늘을 찌를 듯 크다 하더라도 그저 참아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목격한 여인들의 행동을 한번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꿈에 그리던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놓치고 싶지 않은 내면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또 사라지실지 모르는 예수님, 그분이 떠나고 난 뒤 남게 될 허탈감, 실망감이 두려워 여인들은 예수님의 발을 꼭 붙든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에서 발을 잡았겠지만 어느 정도 인간적, 이기적인 욕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나를 살리신 예수님, 그래서 목숨 바쳐 사랑했던 예수님을 또 다시 놓치고 싶지 않은 생각에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보다 큰 세계로 나아가셔야 할 부활의 예수님이십니다.
좁은 인간관계의 사슬을 끊고 더 많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비상하셔야 할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종전의 현존방식을 탈피하십니다.
그분은 이제 이스라엘을 벗어나 전 인류를 상대하셔야 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나만의 예수님, 마리아 막달레나만의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만민의 하느님이 되신 것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낡은 방식으로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예수님 추종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전처럼 돌아가시거나 사라지시거나 우리를 버리고 떠나가실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영광스럽고 영적인 새로운 현존양식에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시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되셨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마다 언제든지 다가오시는 사랑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강론>
(2024. 4. 1. 월)(마태 28,8-15)
<신앙고백, 증언, 선포>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마태 28,8-15).”
1) 여자들의 ‘두려움’은 ‘무서움’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일에 대한 경외심과 놀라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무서워하지 마라.”가 아니라 “놀라지 마라.”입니다.
여자들의 ‘기쁨’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에 대한
믿음에서 생긴 기쁨입니다.
만일에 여자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즉 천사가 전해 준 부활 소식을 안 믿었다면,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평소의 신앙생활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올바른 믿음에서 참된 기쁨이 생깁니다.
혹시라도, 누구든지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또는 기쁨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표시가 됩니다.>
여자들이 ‘예수님 부활 소식’을 사도들에게 전한 일은, 신앙고백이며 증언이고 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언이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널리 알리는 선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선교활동도, 또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활동도,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선교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일이며,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고, 그리고 복음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는 선포입니다.>
2) 경비병들이 본 일은,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일과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옆으로 굴린 일입니다.
경비병들의 ‘두려움’은 ‘무서움’입니다.
그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습니다(4절).
경비병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본 것은 아닙니다.
또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12절의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라는 말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무덤에서 한 일을 알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순간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천사가 돌을 굴린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 밖으로 나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기 위한 일이 아니라, 무덤이 이미 비어 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일입니다(6절).>
3) 사제들은 예수님의 무덤에서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뻐하기는커녕 예수님의 무덤에서 일어난 일을 덮어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 부활’은 달갑지 않은 일, 믿기 싫은 일, 인정하기 싫은 일이었습니다.
‘부활’이라는 일 자체를 안 믿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부활을 믿더라도 자기 자신의 부활만 희망하면서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의 부활은 바라지 않는 태도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유대교의 권위와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사제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자신들의 권위와 영향력의 추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의 상실로,
즉 재산과 권력의 상실로 이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4) 사도들과 신자들은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 라고 증언하면서, 그 ‘만남’을 예수님 부활의 증거로 내세웠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 증언 자체를 헛소리라고 비웃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증언했을 때, 페스투스 총독이 바오로 사도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한 일이 대표적인 예입니다(사도 26,24).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덤에서 시신을 훔친 다음에 부활하셨다고 선전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안 믿는 사람들의 머리로는 ‘합리적인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이라는 일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 부활을 증명할 수 있는 ‘물적 증거’는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사도들과 신자들의 증언만 있을 뿐입니다.
무덤에서 시신을 훔친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주장도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일 뿐입니다.
결국 이 논쟁은 ‘물적 증거로 증명할 수 없는 신앙’과 ‘물적 증거로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의 충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기쁨과 희망 속에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인생은 허무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안 믿는 사람들은 목적지 없는 유랑 같은 인생을 살면서 ‘인생은 허무하다.’ 라는 말만 하다가 끝나버립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