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는 여배우라면 한 번쯤은 시도해보고 싶은, 하지만 섣불리 맡았다가는 캐릭터의 기에 눌릴 수 있는 역할. 그러나 가끔은 마녀가 되기 위해 태어난 듯한 배우들도 있다. 최근 할리우드 박스오피스를 점령하고 있는 [말레피센트]의 안젤리나 졸리. 하지만 그녀 이전에 이미 마녀 포스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좋은 마녀', '나쁜 마녀', '이상한 마녀'가 되었던 30명의 여배우를 만나 본다. 마녀 캐릭터를 맡았던 횟수와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등을 감안해 순위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로맨틱 퀸 중 하나인 산드라 블록이 마녀 캐릭터를?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프랙티컬 매직](1998)은 마녀 집안에서 태어난 두 자매의 로맨스. 언니 샐리(산드라 블록)와 동생 질리언(니콜 키드먼)은, 누군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면 그 남자는 반드시 불운의 사고로 죽게 되는, 모진 운명과 맞서 싸워야 한다. 마녀 캐릭터라고는 하나, '일반적인' 블록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미녀와 야수]의 현대적 각색인 [비스틀리](2011)는 마녀의 저주로 '킹카'에서 괴물 같은 외모로 변해 버린 카일(알렉스 페티퍼)과 린다(바네사 허진스)의 러브 스토리다.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켄드라 역을 맡은 배우는 메리-케이트 올슨. 길게 나오진 않지만 범상치 않은 헤어와 패션 스타일 그리고 눈 화장으로, '틴에이저 마녀'의 강한 인상을 남긴다. 원래는 린제이 로한에게 제안이 갔지만 거절했다고. 로한보다는 올슨 쪽에 한 표!
배우 인생 최초의 악역으로 [백설공주](2012) 의 '이블 퀸'을 선택한 줄리아 로버츠. 동화사상 가장 악독한 여왕이자 마녀이며 질투의 화신인 이 역할을 소화하기엔, 그녀는 여전히 너무 귀엽고 우아하며 아름다웠던 게 사실. 미스 캐스팅 논란도 있었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코믹 톤을 생각하면 그녀 스타일의 마녀가 정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촬영 내내 아이들에겐 자신이 [백설공주]에서 이블 퀸 역을 맡았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아직 어린아이들이 혹시나 정신적인 혼란에 빠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던 [47인의 낭인] 이야기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47 로닌](2013)에서 키라 영주(아사노 타다노부)의 심복이자 주술로 모든 음모를 꾸미는 마녀 역을 맡은 배우는 [퍼시픽 림](2013)의 마코였던 키쿠치 린코. 2% 아쉬운 느낌이 있긴 하지만, 메이크업과 컴퓨터 그래픽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아 영화의 가장 역동적인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섹슈얼하면서도 잔인한 마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대의 요부 중 하나였던 베로니카 레이크가 [내 사랑 마녀](I Married A Witch) (1942)에서 마녀 제니퍼가 될 수 있었던 건 트레이드마크인 '오른쪽 눈을 가린 피커부 헤어 스타일' 때문인 듯. 17세기 마녀로 몰려 화형당했던 그녀는 번개에 의해 20세기에 저주가 풀리고, 자신을 박해했던 울리 가문의 후손이자 주지사 후보인 월레스 울리(프레드릭 마치)를 결혼 전날 사로잡는다.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로 레이크의 치명적이면서도 사랑스러운 이중적 매력을 살렸다. 레이크와 마치는 사이가 안 좋았는데, 현장에서 레이크는 마치에게 종종 마녀처럼 짓궂게 굴었다는 후문.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의 보니 파커로 강한 인상과 함께 등장한 페이 더너웨이는 1970 ~ 80년대 할리우드에서 '쎈 역'을 도맡았던 연기파 배우. [슈퍼걸](1984)에선 크립톤 행성에서 온 '오메가 헤드론'으로 지구 정복을 꿈꾸는 마녀 셀레나 역을 맡았다. 영화 자체는 혹평으로 무참하게 박살 났지만, 더너웨이의 마녀 연기는 헬렌 슬레이터의 슈퍼걸이 지닌 밋밋함을 채우는 카리스마였다.
히치콕의 [현기증](1958)으로 영원히 기억될 배우 킴 노박. 그녀가 같은 해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찍었던 또 한 편의 영화가 있으니 바로 [사랑의 비약] (Bell Book and Candle) (1958)이다. 마녀 집안의 질리언 홀로이드(킴 노박)가 이웃으로 이사 온 핸섬한 남자 셰퍼드 핸더슨(제임스 스튜어트)을 사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앞에서 언급했던 [내 사랑 마녀]와 흡사한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다. 그녀가 고양이로 남자에게 주문을 거는 대목은 이 영화의 명장면.
샘 레이미 감독이 [오즈 그레이트 앤드 파워풀](2013)을 준비할 때 올리비아 와일드, 에이미 아담스, 블레이크 라이블리, 케이트 베킨세일, 키이라 나이틀리, 레베카 홀 등 적잖은 여배우들이 마녀 후보로 떠올랐다. 여기서 감독은 동생 테오도라를 고약한 형상으로 만들고, 글린다와 처절한 혈투를 벌이는 에바노라 역할에 힐러리 스웽크와 미셸 윌리엄스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고. 이때 에이전시에서 받은 시나리오를 읽은 레이첼 와이즈는 당장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고, 두 시간에 걸친 미팅 끝에 에바노라 역을 따냈다. 악역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녀였기에 다소 의외였지만, 결과적으로 나름 괜찮은 캐스팅이었던 셈.
이름은 낯설지만 [오즈의 마법사](1939) 의 사악한 서쪽 마녀는 모두 알 듯. 그녀에게 이 캐릭터는 50년 연기 생활을 압축하는 아이콘이었다. 어릴 적부터 L. 프랭크 봄의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를 즐겨 읽었던 그녀는 자신이 영화 [오즈의 마법사] 캐스팅 물망에 올랐다는 소문을 들은 상태에서 제작자의 전화를 받았는데, 자신이 먼저 마녀 역할을 맡겠다고 강하게 요구했고, 자신의 캐릭터를 '원하는 것을 전혀 이루지 못하면서 끊임없는 좌절에 빠진 여성'으로 설정했다. 녹색 톤의 메이크업을 하고 지우는 과정에서 피부에 엄청난 고통을 안기도 했다고. 이 역할로 그녀는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는데, 흥미롭게도 배우가 되기 전 그녀의 첫 직업은 유치원 교사였고 실제로는 아이들을 매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영화 초반 에바노라에 의해 나쁜 마녀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착한 마녀 글린다. 에바노라에게 아버지를 잃었다. 원래는 에바노라 역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레이첼 와이즈에 의해 역할 바꿈이 있었다. 오스카(제임스 프랑코)와 함께 오즈 왕국을 지키는 글린다 역과 함께 윌리엄스는 1인 2역을 하는데, 바로 오스카의 캔자스 시절 애인 애니 역도 맡은 것. 오스카에게 실연의 아픔을 안겨주고 다른 남자와 약혼하는데, 샘 레이미 감독은 애니의 딸이 도로시라고 설정했다.
모델 출신으로 본드 걸을 거쳐 [엑스맨] 시리즈에서 진 그레이가 되었던 얀센은 [헨젤과 그레텔: 마녀 사냥꾼](2013)에서 마녀들의 수장 뮤리엘이 된다. 182cm의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거친 마녀 사냥꾼 남매를 압도하는 힘을 지닌다. 재밌는 건 그녀가 이 역할을 맡게 된 계기. 그녀는 [브링잉 업 바비](Bringing Up Bobby)(2011) 라는 영화를 연출하면서 상당 부분 직접 제작비를 조달했고, 그 결과 적지 않은 은행 빚이 생겼다고. 마녀들의 리더 뮤리엘 역의 제안을 받았을 때, 가릴 것 없이 즉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고 한다.
40대 후반에 데뷔해 TV 단역을 전전하던 무명 배우는 한 편의 영화로 호러 팬들에게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긴다. 샘 레이미 감독의 [드래그 미 투 헬](2009)에서 노파 가누쉬 역을 맡은 라버.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에 이토록 파워풀한 마녀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경이로울 뿐. 이 영화로 호러 전문 매거진 '팡고리아'의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오즈 그레이트 앤드 파워풀]에서 가장 마녀다운 마녀는? 아마도 밀라 쿠니스가 맡은 테오도르일 것이다. 순정파였지만 언니에게 속아 심장이 단단해지는 사과를 먹고 고약한 외모를 지니게 된 테오도르는 1939년 버전의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서쪽 마녀의 계승자. 밀라 쿠니스는 어릴 적 [오즈의 마법사] 학교 연극 무대에 선 적이 있으며, [요절복통 70쇼](1998)에 나왔을 땐 도로시 패러디 캐릭터를 맡은 바 있었다고. 한편 쿠니스는 마녀 메이크업을 위해 촬영 때마다 4시간이 소요되었고, 지우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데 피부 트러블 때문에 두 달 동안 고생했다.
동화의 온갖 모티프가 뒤섞인 테리 길리엄 감독의 [그림 형제 - 마르바덴 숲의 전설](2005). 여기서 모니카 벨루치는 '거울 여왕'으로 등장해 아름다운 외모로 인간을 유혹해 생명을 앗아가고 자신의 젊음을 위해 어린 소녀의 피를 마신다. 아름다움과 마성이 결합된 치명적 매력이 거울이 깨지듯 파멸해가는 모습이 인상적. 우마 서먼이 거절했고 니콜 키드먼이 스케줄 문제로 사양한 역할을 벨루치가 훌륭하게 해냈다. [마법사의 제자](2010)에선 발타자르의 연인인 베로니카로 등장하는데, 그녀는 전설의 마녀 모건 르 페이를 몸 속에 봉인한 여성이다.
아서왕과 아버지가 다른 남매인 모건 르 페이는, 아서왕과 근친적 관계를 맺어 모드레드를 낳았으며 마법사 멀린 못지 않은 능력을 지닌 인물. [원탁의 기사](1953)의 앤 크로포드부터 최근엔 [마법사의 제자](2010)의 앨리스 크리게까지 수많은 배우가 이 역할을 맡았지만, 최고봉은 [엑스칼리버](1981)의 헬렌 미렌일 듯하다. 미렌의 리즈 시절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수많은 남성 캐릭터들 사이에서 확고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당시 공연했던 7년 연하 리암 니슨과 연인이 되기도 했다.
처음으로 마녀가 되었던 건 [프랙티컬 매직]. 천형과도 같은 마녀의 혈통을 이어받은 질리언 오웬스 역을 맡았는데 이런 설정은 [그녀는 요술쟁이](2005)에서도 반복된다. 자신이 마녀인 걸 감추고 평범한 여성의 삶을 살고 싶은 이자벨. 그는 우연히 TV 쇼에서 마녀 캐릭터를 맡게 되고, 해프닝이 이어진다. 키드먼의 마녀는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편. 차라리 [투 다이 포](1995)의 수전 스톤이 더 마녀다워 보인다. 한편 [그녀는 요술쟁이]의 이자벨 역을 위해 제니퍼 애니스턴, 드류 베리모어, 킴 베이싱어, 산드라 블록, 제니퍼 코넬리, 카메론 디아즈, 안젤리나 졸리, 애슐리 쥬드, 줄리안 무어, 기네스 팰트로, 사라 제시카 파커, 미셸 파이퍼, 멕 라이언, 줄리아 로버츠, 샤를리즈 테론, 우마 서먼, 리즈 위더스푼, 르네 젤위거, 나오미 왓츠 등 40명 정도의 여배우가 물망에 올랐다.
[록키 호러 픽쳐 쇼](1975)나 [악마의 키스](1983) 같은 영화에 출연하긴 했지만, 배우 자신이 예사롭지 않은 캐릭터를 맡은 건 아마도 [이스트윅의 마녀들](1987)부터. 존 업다이크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작은 마을에 사는 세 명의 싱글 여성이 한 남자들 통해 자신들의 '마녀성'을 일깨우게 된다는 이야기다. 서랜든은 조신한 음악 교사 제인 스포포드로 등장하는데, 원래 셰어가 맡을 예정이었지만 알렉산드라 역을 선택했고, 이후 캐스팅된 서랜든은 자신의 캐릭터가 무엇인지 모른 채 현장에 나왔다고 한다. '마녀 서랜든'의 절정은 [마법에 걸린 사랑](2007)의 나리사 여왕. 만화의 세계에서 뛰쳐나온 그녀는 말 그대로 마녀 본색을 드러내며 뉴욕 거리를 활보하고 급기야 드래곤으로 변한다.
왠지 서너 작품 정도는 너끈히 마녀 캐릭터로 등장했을 것 같은, 딱히 메이크업 없이도 충분히 마녀 역할을 해낼 것만 같은 안젤리카 휴스턴. [아담스 패밀리](1991)의 모티시아나 [에버 애프터](1998)의 계모 역할이 있긴 했지만, 그녀가 마녀가 된 건 [마녀와 루크](1990)가 유일하다. 하지만 그 임팩트는 대단한데…. '대마녀'(Grand High Witch)로 등장해 마녀들의 집회를 이끌며 무대에서 얼굴 가죽을 뜯어내며 본색을 드러낸 장면은, 극장에서 수많은 아이의 울음보를 터트렸다는 후문이다. 원래는 셰어도 물망에 올랐지만, 아무리 봐도 안젤리카 휴스턴이 적역.
빗자루를 타고 다니고, 이상한 주문을 외우며, 정제를 알 수 없는 신비의 약을 제조하는 '전형적인 마녀'의 모습을 만나고 싶다면 [호커스 포커스](1993)의 마녀 위니프레드를 만나 보시길. 베트 미들러 특유의 호들갑스러운 카리스마가 잘 나타난 이 영화는, 우리가 동화에서 익숙하게 접했던 마녀 캐릭터를 보여준다. 여동생 마녀로 나오는 새러 제시카 파커의 앳된 모습도 인상적. 베트 미들러는 자신의 모든 영화 중 [호커스 포커스]의 마녀 역할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한 바 있다.
1934년생으로 올해 여든 살이지만 아직 '현역'인 진 마쉬. 그녀의 첫 마녀 경험은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를 쓴 L. 프랭크 봄이 서쪽 마녀가 죽은 후 새롭게 등장시킨 '맘비'라는 마녀 캐릭터였고, TV 시리즈에서 잔뼈가 굵었던 진 마쉬는 1985년에 나온 [오즈의 마법사](Return To Oz)(1985)에서 맘비 역을 맡아 어린이 관객들을 바짝 긴장시켰다. 다음 작품인 [윌로우](1988)는 조지 루카스가 제작하고 론 하워드가 연출한 액션 어드벤처. 바브모더 여왕 역을 맡은 진 마쉬는 사람을 동물로 순식간에 바꿔 버리는 흑마술을 선보인다. 그리고 TV 시리즈 [닥터 후]의 '시즌 26'(1989)엔 아서왕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녀 모건 르 페이 역할을 맡아 명실공히 1980년대를 대표하는 마녀 전문 배우로 등극한다.
헤르미온느가 마녀라니... 다소 의외라고? 왠지 모를 부정적 뉘앙스가 있지만 '마녀'는 사실 중립적인 단어. 마법을 행할 수 있다면 모두 '마녀'라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호그와트 출신의 우등생 마법사 헤르미온느를 마녀 명단에서 뺄 수 없을 것이다.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선한 마녀인 셈. 흥미로운 건 최근 어느 사이트에서 엠마 왓슨의 14대 조상 중 한 명이, 16세기에 마녀로 낙인 찍힌 인물이었다고 주장한 것. 다행히 화형은 면했지만, 마법을 부린 혐의로 사회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그 어떤 캐릭터도 가능할 것 같은 틸다 스윈튼이 마녀 캐릭터를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의 '하얀 마녀'는 그녀가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캐릭터이며, 오롯이 틸다의 것인 '오직 그녀만 가능한' 역할이기도 하다. 미셸 파이퍼가 거절한 역을, 원작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수락한 스윈튼은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존재인 '하얀 마녀' 역할을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위압적인 비주얼을 갖추었고, 길지 않은 출연 분량에도 불구하고 잊지 못할 모습을 선사한다.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통틀어 수많은 '이블 퀸' 캐릭터가 있지만,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2012)의 라벤나 여왕만큼 인상적인 사례는 찾기 힘들 것이다. 여기서 라벤나는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나, 좀 더 복합적인 캐릭터로 그려지며 외모보다는 힘과 권력에 집착하는 여왕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가 연기하는 데 영감을 받았던 캐릭터는 [샤이닝](1980)의 잭(잭 니콜슨). 외딴 호텔에 갇혀 광기를 발산하는 소설가 잭의 모습에서, 거대한 성에 살며 서서히 미쳐가는 라벤나 여왕의 모습을 떠올렸다고 한다.
저주에 걸려 매로 변한 [레이디 호크](1985), 배트맨을 괴롭히던 '캣우먼'이 된 [배트맨 2](1992), 늑대인간의 연인이 된 [울프](1994), 요정의 여왕 티타니아로 등장한 [한여름 밤의 꿈](1999), 다크 포스 가득한 집안의 리더가 된 [다크 섀도우](2012)... 굳이 마녀 역할을 맡지 않아도 될 만큼 미셸 파이퍼의 필모그래피는 신비로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럼에도 굳이(!) 마녀가 된 영화는 1987년 작품 [이스트윅의 마녀들]. 세 마녀는 뒤늦게 자신들의 마력을 깨닫고 밀랍 인형을 만들어 대릴 밴 혼(잭 니콜슨)을 혼내주는데, 여기서 파이퍼는 신문사에 다니는 현실적인 여성 수키 리지몬트 역을 맡았다. 그녀의 진짜 마녀 연기는 [스타더스트](2007)에서 잘 드러나는데, 마녀 라미아로 등장해 싱싱한 젊음을 갈구한다. 이 영화들 외에도 오묘한 외모 때문에 종종 마녀 제안을 받았던 그녀. [프랙티컬 매직]이나 [나니아 연대기] 등 대부분 역할을 거절했다.
고상하고 지적인 영국 배우? 엠마 톰슨은 의외로 마녀 캐릭터와 친숙하다. 트릴로니 교수 역을 맡은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점술학을 가르쳤던 그녀는, [내니 맥피 - 우리 유모는 마법사](2005)에서 메리 포핀스보다 과묵하고 묵직한 느낌의 특급 유모 맥피가 된다.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원작을 판권을 획득하고 각색하기까지 장장 9년을 바친 영화로, 맥피는 7명의 아이를 홀로 키우는 세드릭(콜린 퍼스)의 집에 유모로 들어가 공포스러울 정도의 개구쟁이들을 지팡이 마법으로 돌본다. 다섯 가지 가르침을 전하는 맥피. 트레이드마크는 뻐드렁니와 사마귀인데, 아이들이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마다 외모가 개선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또 한 번 마녀로 등장한 영화는 [뷰티풀 크리처스](2013). 주연을 맡은 앨리스 엥글러트의 고뇌하는 틴에이저 마녀 캐릭터가 조금 밋밋했다면, 엠마 톰슨의 세라핀이 그 아쉬움을 채운다.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오가며 디즈니가 만들어낸 수많은 마녀 중 가장 착하고 아이들의 절친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는 단연 [메리 포핀스]. [내니 맥피]의 선배인 이 영화는, 말썽꾸러기 집안에 들어온 '마법 유모'와 아이들의 이야기. 포핀스는 뱅크스 패밀리의 두 아이와 함께 신나는 어드벤처를 경험한다. 디즈니를 대표하는 뮤지컬로 "슈퍼칼리프래질리스틱익스피알리도셔스!"(Supercallifragilisticexpialidocious!)는 이 영화가 알려주는 '기분이 좋아지는 주문'이다.
최근 가장 각광 받는 '쎈 캐릭터' 전문 배우 중 한 명인 에바 그린이 마계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딘 영화는 [황금 나침반](2007). '마녀들의 여왕'이며 300살 먹은 세라피나 페칼라로 등장하는데, 원작자인 필립 풀먼이 영화를 보며 그녀의 연기에 감탄해 직접 편지를 보낼 정도로 원작의 '마녀 필'을 제대로 살렸다. 이후 TV 시리즈 [카멜롯](2010)에서 마법사 모건 르 페이가 되어 다시 한 번 강한 인상을 주었던 그녀는 [다크 섀도우](2012)에서 뱀파이어 바나바스 콜린스(조니 뎁)와 대결하는 마녀 안젤리크가 된다. 앤 해서웨이나 제니퍼 로렌스 등이 경합을 벌였지만, 역할을 거머쥐며 팀 버튼 사단에 합류했다.
여전사 캐릭터에 집중하던 졸리는 판타지 에픽이 유행하던 2000년대 중반 [베오울프](2007)의 '물의 마녀'가 되면서 처음으로 마녀가 되었다. 당시 그녀가 물에서 나오는 신은 컴퓨터 그래픽과 결합되며 숨 막히는 비주얼의 장면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그녀는 [말레피센트]를 통해 현재 가장 '핫'한 마녀가 되었는데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제작자로 참여하기도. "어릴 적부터 이 캐릭터에 매료되어 있었다"는 그녀는 시나리오가 구현하고 있는 말레피센트의 캐릭터가 지닌 입체적인 면에 끌려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복수와 질투보다는 화해와 모성성을 추구하는 마녀가 바로 졸리가 원했던 말레피센트의 모습이었던 듯. 액션 장면에선 역시 '졸리답게' 웬만한 장면은 직접 스턴트를 해냈다.
대표적인 동양 마녀. 단순한 중성적 매력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흐리고 인간계와 마계를 자유자재로 오갈 것만 같은 임청하만의 카리스마는 [동방불패](1992)와 [백발마녀전](1993)에서 정점에 달한다. 강력한 힘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신체 절단 하드고어 액션을 밥 먹듯이 하는 잔인함을 지녔으면서도, 항상 진정한 사랑 앞에서 고통받는 모습은 임청하라는 배우가 지닌 독특한 감성의 결. 이후 몇 편의 영화에서 [동방불패]나 [백발마녀전]의 연예상의 연장선에 있는 '요기' 깃든 캐릭터를 맡았지만, 앞의 두 영화에 비할 만한 임팩트를 주진 못했다.
어찌 [해리 포터] 시리즈의 벨라트릭스와 [빅 피쉬](2003)의 유리눈 마녀뿐이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에서 붉은 여왕이 되어도, [스위니 토드](2007)에서 이발사의 아내가 되었을 때도, [파이트 클럽](1999)에서 말라 싱어 역할을 맡았을 때도, [프랑켄슈타인](1994)의 엘리자베스였을 때조차 그녀에겐 뭔가 불길하고 사악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첫 마녀 경험은 TV 미니시리즈인 [대마법사 멀린](1998). 영미권 배우들에겐 마녀 연기의 교과서와도 같은 모건 르 페이 역을 맡았다. 이후 [빅 피쉬]에서 1인 2역을 맡아 청순한 제니와 섬뜩한 마녀를 한 영화에서 모두 보여준 그녀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벨라트릭스를 통해 마녀계를 평정한다. '데쓰 이터' 중 가장 강한 캐릭터 중 하나로 시리우스 블랙(게리 올드먼)을 죽였던 벨라트릭스. 본햄 카터는 자신의 캐릭터를 "순혈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디스트에 인종주의자"로 설정하고 연기했다고 하는데, 평론가들은 그녀의 연기에 대해 "너무나 빛나는, 하지만 아직도 충분히 활용되지 않은 재능"이라는 극찬을 바쳤다.
영화사상 최초의 마녀는 누구였을까? 마녀에 대해 본격적으로 처음 다루었던 영화를 벤야민 크리스텐센 감독의 스웨덴 영화 [마녀들](Haxan)(1922)를 꼽는다면, 마렌 페데르센은 명실상부한 '첫 마녀'일 것이다. 오직 이 영화 한 편만을 찍고 영화계에서 사라진 페데르센. 혹시 그녀는... 진짜 마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