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
신화 |
● 수로왕(首露王/?~199)
가락국(駕洛國)의 시조(재위 42∼199). 수릉(首陵)이라고도 하며 김해김씨의 시조이다.
42년(신라 유리왕 19) 금관가야 9부족의 추장인 9간(干)이 구지봉(龜旨峰)에 모였을 때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합(金盒) 안에서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를 얻었다. 반 나절 만에 여섯 개의 알은 모두 사람으로 화하였는데 수로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키가 9척이고 팔자 눈썹이며 얼굴은 용과 같이 생겼는데, 처음으로 사람으로 화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달 보름에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비로 삼았다.
● 수로왕릉(首露王陵)
경남 김해시 서상동(西上洞)에 있는 가야시대의 왕릉. 사적 제73호. 보호구역 5만 61 m2.
원형 토분으로 봉분에 다른 시설은 없다.
1580년(선조 13) 영남관찰사 허엽(許曄)이 왕릉을 수축하여 상석·석단·능묘 등을 갖추었고, 1647년(인조 25)에 능비를 세웠으며, “駕洛國首露王陵”이라 새겼다.
1884년(고종 2) ‘숭선전(崇善殿)’이라 사호(賜號)한 침묘(寢廟)를 개축하였으며,
안향각(安香閣)·신도비각·석양(石羊) 등을 설치하였다.
능의 전면에는 가락루(駕洛樓)·연신루(延神樓)·회로당(會老堂) 등의 건물이 있다.
● 수로왕신화(金首露王神話)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이자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인 수로왕에 관한 신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실려 있는 수로왕의 탄생부터 즉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말한다. 건국신화의 표본인 단군(檀君)신화·동명왕(東明王)신화·혁거세(爀居世)신화 등과 맥락을 같이하나 신이 준 신탁(神託)에 의한 신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인간은 그것을 받아 쓴 것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3월의 재계일(齋戒日)에 구지봉(龜旨峰)에 9간(干:족장)들이 203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모였을 때, 하늘로부터 “하늘이 나로 하여금 이곳에 새로 나라를 세워 다스리라 명하므로, 내가 거기로 내려가고자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합(金盒)을 받았는데, 몇 시간 뒤 그 알 속에서 나온 아기들이 6가야국의 왕이 되었으며, 그 중 가장 먼저 나와 ‘수로’라는 이름으로 불린 키가 가장 큰 인물이 김해김씨의 시조이자 금관가야의 건국자라는 줄거리이다.
이 신화는 하늘의 신이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 등 9족장들이 부족을 다스리는 부족(9간) 연합사회의 통치자로서 인간사회에 내려왔다는 것과, 인간사회가 그를 환영의 극치인 ‘춤과 노래’로 스스럼없이 맞아들여 왕으로 삼은 영신(迎神)신화라는 데 특색이 있다.
"수로왕 신화는 주몽, 혁거세, 탈해, 알지 등과 같이 난생신화로서 수로와 탈해가 벌이는
시합은 다른 부족에서 모시는 신보다 자기들이 받드는 신이 더 우월함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아유타국(인도) 공주와의 결혼으로 무대가 멀리 인도로 옮겨졌고 불교적인 색채가 반영된 것을 엿볼 수 있다.
수로왕의 부인 허씨는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반도 동남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낙동강은 태초로부터 이 고장의 젖줄 노릇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지만
나라의 이름도 없었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다만 이곳에 몰려온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아홉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마을마다
간(干)이라고 하는 추장이 있었다.
그들은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귀간 등 아홉 사람인데 이들을
통틀어 구간(九干)이라고 했다.
이들은 추장으로서 각기 자기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솔했다.
아홉 마을에 사는 사람은 모두 7만 5천
명이나 되었는데 이들은 그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밥을 먹는 정도의 생활을 하였다.
이 지방에서는 매년 3월 첫 뱀의 날을 계욕일이라고 해서
계단을 만들어 놓고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냈다.
아홉 마을의 어른과 여러 마을 사람들이 모여 풍년을 비는 제사였다.
아홉 마을이 힘을 합해서 지내는 제사이기 때문에 성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음식을 정성들여 차려놓고 경건한 마음으로 풍년이 들기를 빌었다.
제사가 끝나면 물가에 가서 목욕을 하고 마음껏 음식을 먹고 마시고 춤과 노래로 즐겼다.
이 날도 아홉 마을
추장들은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한창 제사가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바람이 불더니 어느새 화창한 날씨로 변하였다.
구간들은 어리둥절한 채 서서 구지봉을 바라보았다.
구지봉에는 안개 구름이 감돌고 있었다. 이 때,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이 삼백 명의 사람들은 구지봉으로 달려갔다.
조금 전에 들리던 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들리는데 그것은 사람의 소리 같이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를 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곳에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우람한 목소리였다.
"우리들이
있다."
구간들이 대답했다.
"내가 있는 이 곳이 어디인가."
"구지봉이다."
"그러면 잘 듣거라. 나는 황천(皇天)의
명령으로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이곳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이렇게 노래하여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
이 노래를 외치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게 되어 더욱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니라."
구간들은 이 말을 듣고 무리들과 함께 모두
기쁜 마음으로 노래하고 춤추었다.
그런 뒤 얼마 되지 않아서 그들은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하늘 한 가운데에서 자주빛 줄이 구지봉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그들은 신기한 생각이 들어서 줄끝을 찾아보았더니 붉은 보자기에 금합이 싸여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금합을 열어
보았다.
아, 그랬더니 금합 속에는 해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들어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모두 놀랐으나 또 한편으로는 신비로운 일이어서 기쁘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알들을 향해 수없이 절을 했다.
조금 뒤에 그들은 알을 다시 싸서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갔다.
아도간은 금합을 아도간의 집 탑(榻- 깔거나 눕는 좁고 기다란 의자) 위에 모셔 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에서 왜 여섯 알을 보냈는지 그 뜻을 몰랐다.
그들은 그저 뭔가 좋은 일인 것 같아서 기뻐할 따름이었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아도간은 금합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금합을 열었다.
그랬더니 여섯 개의 황금알은 모두 사내아이로 변해 있지 않은가. 그들은 모두 용모가 빼어나게 잘 생겼다. 아도간은
그들을 상에 앉히고 모두 엎드려 절을 하였다.
사내아이들은 무럭무럭 커갔다.
십여 일이 지나자 그들은 키가 9척이나 되고 얼굴은 용 같았으며, 눈썹은 여덟 가지 색으로 되었는데 눈동자는 둘씩이나 되었다.
그들은 금빛 알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김(金)이라 하고 가장 먼저 태어난 사내아이를 수로(首露)라고
불렀다.
구간들은 그들을 임금으로 대하여 무질서했던 이곳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김수로를 첫 번째 임금으로 모시었다.
나라는 대가야 또는 대가락이라 하였는데 이는 6가야 중에 하나였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는데 다섯 가야는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였다.
대가락을 이룬 여섯 가야국은 동쪽으로는 황산강, 서쪽으로는 창해,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동북쪽으로는 가야산에
이르렀다.
수로왕은 왕위에 오르자 임시로 궁궐을 짓고 거처했다.
임시로 지은 궁궐은 말할 수 없이 검박했다. 풀로 만든 지붕은 이엉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만든 계단은 석 자를
넘지 못하게 하였다.
수로왕이 즉위한 이듬해 봄에 수로왕은 신하들과 함께 새 도읍지를 정하기 위하여 신답평으로 갔다.
수로왕은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곳은 여뀌 잎사귀처럼 좁다랗고 길기는 하나 산천이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16나한 같은 신물이 늘 여기서 지켜줄 것이오.
구지봉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줄기가 우뚝 솟았는가 하면 거기서 시작하여 다시 세 번, 그리고 이곳에 이르기까지 다시 세 번, 이리하여 모두 일곱 번을 솟아오른 형상이 마치
칠성(七聖)이 살 만한 곳이오.
이곳을 개척하여 나라의 터전을 열어놓으면 마침내 훌륭한 나라가 될 것이오."
수로왕의 말을 들은 신하들은 모두
왕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도성을 만들 계획이 마련되었는데, 외성의 둘레가 1천5백 보였으며 그 안에 궁궐과 여러 관서의 청사와 무기고 및 창고를 건축할 터를 잡았다.
그 뒤 수로왕은 명령을 내려 새 궁궐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그 해 시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이월에 마쳤다. 수로왕은 새 궁궐로 옮겨가서 나라 일을 부지런히 보았다.
태평한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용성국의 왕자 탈해가 바닷길을 따라 가락국으로 왔다. 그의 키는 석 자이고 머리통의 둘레는 한 자였다.
그는 홀연히 수로왕의 궁궐로 들어와서 소리쳤다.
"수로왕은 들으시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왔소이다."
수로왕은 뜻밖의 침입자를 대하고 위엄있게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왕위에 오르도록 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렸다.
그런데 그대가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서 왕위에 오르겠다니 내가 줄 수 없다. 어찌 나를 따르는 백성들을 너에게 맡기겠는가."
이 말을
들은 탈해는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좋다. 우리 서로 나와서 재주를 겨루어 승부를 정하자."
수로왕은 좋다고 했다.
두 사람은 재주를 겨루는데, 탈해는 한 마리의 매가 되어 하늘 높이 올라갔다.
이것을 본 수로왕은 금새 독수리가 되어 그의 뒤를 쫓아 올라갔다.
그러자 탈해는 참새가 되었다. 수로왕은 얼른 새매가 되었다. 이게 모두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탈해는 제
모양으로 돌아왔다. 수로왕도 역시 자기 모양으로 돌아왔다.
기세가 등등하던 탈해는 수로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미처 대왕을 알아보지 못하고 경솔하게 행동한 것을
사과 드립니다.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쫓기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대왕께서 살생을 싫어하신 인덕으로 압니다.
제가 외람되게 왕위를 다툰 것을 진실로 사과드립니다."
수로왕은 인자하게 웃으며 그를 용서했다.
탈해는 올 때와는 달리 풀이 죽어서 바다로 나가 배를 타고 떠났다.
수로왕은 탈해가 이곳에 머물러 반란을 일으킬까 경계하여 수군 오백 척을 내어 탈해를 쫓았다.
탈해는 그곳에서 빠져나와 신라 쪽으로 달아났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수로왕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은 더욱 높아갔다.
그런데, 한 가지 백성들에게 근심이
있었다.
그것은 왕께서 훌륭한 배필을 맞이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루는 구간들이 수로왕을 찾아 뵙고 아뢰었다.
"대왕께서 이 땅에 강림하신 이래로 나라가 번창하고 있으나 아직
좋은 배필이 없으니 걱정입니다.
아뢰옵기 외람되오나 저희들에게 있는 처녀 가운데서 좋은 처녀가 있으면 고르시어 왕비로
맞이하십시오."
수로왕이 대답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오. 나와 짝하여 살 왕비도 하늘이 주실 것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구간들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쓸쓸하게 수로왕의 곁에서 물러 나왔다.
그 뒤 수로왕은 왕비가 올테니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며 유천간에게 가벼운 배와 날쌘 말을 이끌고 남쪽바다에 있는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게는 승점 땅에 나가 있다가 빨리 알리라고 말했다.
신하들은 너무 뜻밖의 일이라 아무 영문도 모르고 왕이 시키는대로 했다.
유천간은 왕명을 받고 쏜살같이 망산도로
나갔다. 바로 그때, 가락국 앞 서남쪽 바다에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으로 향해오는 것이 보였다.
망산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천간은 횃불을 올렸다. 배는 마구 달려와 앞을 다투어 상륙하려고 하였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은 이 광경을 보고 대궐로 달려가 왕에게 아뢰었다.
수로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그리고 구간을 보내어 그들을 영접해 오게 했다.
구간들이 달려가 왕후를 모시려 했다. 그러자 왕후는 입을 열었다.
"나와 그대들은 평소에 알아온 터수가 아닌데
어찌 내가 경솔하게 따라가겠소."
유천간 등은 왕에게 돌아가 왕후의 말을 전했다.
왕은 왕후의 말이 그럴 듯하여 신하들을 데리고 대궐을 나서서 서남쪽 60보 가량 되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장막을 치고 임시로 행궁을 마련하여 왕비를 기다렸다.
"지금 대왕께서 마중을 나와
계십니다."
수로왕의 신하가 달려가 말했다.
왕후는 이 말을 듣고 배를 벌포 나루에 매어놓고 뭍으로 올라 언덕에서 잠시 쉬었다.
그런 다음 왕후는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에게 예물로 바쳤다.
왕후는 자기를 따라온 신보, 조광의 내외와 노예 등 20여 명을 이끌고 사신의 안내를 받아 왕이 와서 임시로 머물고
있는 행재소 가까이 갔다.
수로왕은 왕후의 행차를 멀리서 바라보다가 그가 가까이 오자 행재소를 나가 그를 맞이하였다.
"멀리서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소. 과인은 그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소."
수로왕은 그를 장막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수로왕은 왕후를 모시고 먼
길을 따라온
시종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귀한 선물을 내린 다음 편히 쉬도록 하였다.
드디어 저녁이 되었다.
수로왕은 왕후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왕후는 조용히 왕을 항하여 입을 열었다.
"저는 아유타국(지금의 인도)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씨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금년 5월의 어느 날입니다.
부왕과 왕후는 지난 밤 꿈에 황천상제를 뵈었다고 하면서 상제는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준 신령스러운 사람이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저를 보내어 짝을 짓게 하라는 분부를 하였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에게 곧 이곳으로 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배를 타고 이곳에 와서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왕후는 약간 수줍은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로왕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신령을 받고 태어나서 공주가 언젠가 이 나라에 올 것을 알았소.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고 권하였으나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를 맞이했으니 더 이상 기쁜 일이 어디 있겠소."
수로왕의 말을 들은 왕후도 그 기쁨을 형언할
길이 없었다.
그들은 하늘이 이루어준 결합이었으므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었다.
두 밤이 지난 뒤에 왕후를 따라 온 시종들과
배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배에 딸린 사람들에게 각각 쌀 열 섬과 베 30필을 주었다.
수로왕은 왕후를 맞이한 뒤로 더욱 나라를 잘
다스려 대가락국의 기틀을 바로 잡아나갔다. 그리하여 나라는 점점 융성해갔다.
그의 나이 157세가 되던 해 봄에 세상을 떠났다.
백성들의 슬픔은 대단했다. 그들은 구지봉 동쪽에다 장사를 지내고 왕후가 처음 와서 내린 나루터가 있는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치마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綾峴)이라 하였다.
그리고 붉은 돛대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불렀다.
※ 만남의 인연을 맺어준 허황옥 | |||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설화의 얼개를 보면, 16살의 아유타국(阿踰陀國:아요디야) 공주 허황옥은 하늘이 내린 가락국 왕을 찾아가 배필이 되라는 부모의 분부를 받들고 기원후 48년에 2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붉은 돛을 단 큰 배를 타고 장장 2만5천리의 긴 항행 끝에 남해의 별포 나룻목에 이른다. 영접을 받으며 상륙한 다음 비달치고개에서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르고는 장유사(長遊寺) 고개를 넘어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행궁에 가서 상면한다.
하늘이 내린 황금알에서 태어나 배필도 역시 하늘이 점지할 것이라고 믿어오던 가락국 시조 수로왕은 허황옥을 반가이 맞이한다. 둘은 2박 3일의 합환식(결혼식)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온다. 그 후 140여 년을 해로하면서 아들 10명과 딸 2명을 두었는데, 둘째와 셋째에게 왕비와 같은 허씨 성을 따르게 하여 그들이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아들 가운데 7명은 지리산에 들어가 선불이 되고, 왕후는 189년 나이 157살에 생을 마감한다. 한국의 ‘국제결혼 1호’로 피의 만남(섞임), 곧 혈연이다. 그 만남이 있었기에 수백만 김해 김씨와 허씨가 왕후를 시조 할머니로 모시고, 오매불망 할머니의 고향을 찾아가기도 한다.
사실 허황옥설화는 수로왕의 천강난생(天降卵生) 같은 신화소는 거의 없고, 역사적 사실에 바탕하였거나 그것을 반영한 설화다. 단, 어떻게 그 시대에 멀고먼 인도에서 어린 나이에 배를 타고 올 수 있었는지, 왕후의 내한이나 불교적 행적을 말해주는 물고기 무늬나 석탑 등은 후세의 ‘조작’이 아닌지 등등 몇 가지 왕후의 정체성과 관련된 논란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 논란을 내용별로 묶어보면, 기원전 3세기 인도 갠지스강 중류에서 크게 번성한 태양조 불교국 아요디야에서 왔다는 설, 아요디야에서 중국 쓰촨(사천)성 푸저우(보주)를 거쳐 양자강 하구에서 황해를 건너 온 일족이라는 설, 타이 방콕 북부의 고대 도시 아유타와 관련이 있다는 설, 일본 규슈 지방에서 도래했다는 설, 기원초 중국의 전후한 교체기에 발해 연안에서 남하한 동이족 집단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종합하면, 다들 외래인이라는 데는 견해를 같이하고 있으나, 외국 어디인가에서는 크게 인도와 비인도의 두 지역으로 나뉜다.
달마가 서쪽에서 왔듯이 열여섯살 아유타국 허황옥이 서쪽에서 온 까닭은‥ 다들 나름의 전거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나, 몇 가지 현존하는 문헌기록과 유물들을 근거로 하는 인도설이 좀 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주로 상황론에 입각한 연역법을 따르는 비인도설 쪽 논리는 짐짓 미흡해 보인다. 철학과는 달리 역사를 연역법으로 추리하면 왕왕 빗나가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는 항시 일회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만남, 문명의 만남이라는 교류사관에서 본다면, 그녀가 어디에서 온 누구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우리는 세계와 어떻게 만났는가, 세계에 대한 우리 마음의 여닫이는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을 살피는 일이다. 설혹, 그녀의 정체가 허구라고 할지라도 우리네 선조들은 어떻게 그녀라는 ‘허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와 만나고 있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제를 짚어보는 의미인 것이다.
허왕후는 혈연뿐만 아니라, 우리와의 불연(佛緣), 즉 부처님과의 인연, 불교와의 인연도 맺어주었다. 우리의 많은 고대국 건국신화에서 유독 가락국만이 그 건국이 불교와 관련지어진다. 수로왕은 건국한 다음해에 궁성터를 찾아다니다가 신답평(新畓坪)이란 곳에 이르러 이 곳은 비록 땅은 좁지만 16나한과 7성이 살 만한 곳이어서 궁성터에 적격이라고 말한다. 16나한이란 석가의 16제자이고, 7성은 도를 깨우친 사람들로서 모두가 최고의 불자들이다. 그리고 4년째 흉년이 들자 왕은 부처님께 청하여 설법을 하니 흉년을 몰아온 악귀들이 제거되었다고 한다. 가락국을 일명 ‘가야국’이라고 하는데, 이 ‘가야’란 말은 인도어로서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나 코끼리, 가사 등에서 그 어원을 찾고 있다.
수로왕의 이러한 행적은 불교국 아요디야의 공주, 허황옥과의 결합에 따라 가락국 불교의 초전을 더욱 굳혀간다. 특히 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 보옥선사는 가락국의 국사로서 불교의 가락국 초전에 디딤돌을 놓는다. 김해 불모산(佛母山) 장유사에 있는 선사의 화장터와 사리탑 및 기적비, 그리고 왕과 왕후가 만난 곳에 세워진 명월사(明月寺) 사적비에는 선사의 초전활동을 말해주는 유물과 기록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지리산에 들어가 왕후의 일곱 아들을 성불케 하고 칠불사를 짓기도 한다. 그 밖에 가락국의 불교 초전을 알리는 유적유물은 적지 않다. 이 모든 것은 왕후의 도래를 계기로 일어난 불사들이다. 이러한 불사들은 가락국에 국한되지 않고, 200년께는 딸인 묘견(妙見)공주를 통해 일본 규슈까지 파급되니, 백제 불교의 일본 공전보다 무려 250년이나 앞선 일이다.
비인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체로 이러한 불교의 가락국 초전을 부정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시대에 인도로부터 뱃길이 트일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서〉‘지리지’에 보면, 기원전 3세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때부터 중국은 남양 각지와 해상교역을 하며, 기원 전후에는 지금의 부남(扶南:베트남)으로부터 인도 동남단의 황지(黃支:칸치푸람)까지 해로가 개척되어 11개월이면 오갔다. 아직 고증이 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뱃길이 한반도 남해안까지 이어졌다고 한들, 무리 무근이라고 일축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허황옥의 내도는 문물의 교류라는 또 하나의 결과를 가져왔다. 왕후가 소지한 옥합에는 수놓은 비단옷이나 갖가지 금은주옥의 장신구 패물과 함께 차의 씨앗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흔히들 9세기 초 신라 흥덕왕 때 대렴(大廉)이 당나라로부터 차종을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보다 900년 전에 허왕후가 최초로 가져다 심은 차종에서 유명한 죽로차(竹露茶)가 자라났고, 머리, 귀, 눈을 밝게 한다는 등 가야인들이 구가한 차의 9덕은 오늘의 다도로 이어지고 있다. 묘견공주는 불교와 함께 차의 씨앗과 부채도 일본에 건네주었다고 한다. 수로왕은 왕후 일행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蕙草)로 빚은 향기로운 술을 대접하고, 무늬와 채색이 고운 자리에서 잠을 자게 배려하며, 비단옷과 보화까지 하사한다. 왕후가 타고 온 배의 뱃사공 15명에게는 각각 쌀 열 섬과 비단 삼십 필씩을 주어 돌려보냈다. 가야인들의 열린 마음과 너그러움이 밴, 첫 인도인들과의 만남이고 나눔이었다.
왕후는 올 때 파신(波神)의 노여움, 즉 풍랑을 막고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배에 파사석탑(婆娑石塔)을 싣고 왔다. 높이가 120㎝ 정도밖에 안되는 이 자그마한 석탑은 고려 중엽까지는 김해의 호계사에 보존되어 있다가 지금은 허황옥릉에 인치되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귀중한 석탑은 한낱 뭉그러진 돌덩어리 다섯개를 쌓아놓고 무슨 탑이냐고 하는 비아냥거림까지 받아왔다. 그러나 한 후손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오늘은 그 원상이 거의 복원되었다. 김해의 한 병원 원장인 허아무개씨는 200회나 넘게 탑을 찾았고, 돌이 우리나라에 없는 파사석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며, 탑은 초기 인도 스투파의 축소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렇게 보면, 이 석탑이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불탑인 셈이다. 허씨는 평범한 의사다. 역사와 그 해석은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몫이다. 이와 같이 2천년 전 이 땅에 온 허황옥은 혈연과 불연, 그리고 교류의 인연을 맺어준 메신저와 교류인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우리와 함께 있다. 문명은 이러한 메신저와 교류인들에 의해 알려지며 서로 주고받는다.
|
수 ~~~ 수없이 많은 카페들 중에 빨노파
로 ~~~ 로 오신 님이여 그대가 진정
왕 ~~~ 왕이로소이다.
전설의
무희
일제강점기와 분단의 비극을 몸으로 부대끼며 산 예술가
20세기 초반 한반도의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식민지 정치 현실에서 허덕이며 희망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때 그런 암담한 환경을 뚫고 높이 무대 위로 도약해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이 되어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무용가 최승희였다.
어떤 장르의 예술이든 사회적, 역사적 환경을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때로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예술이기
때문에
환경을 벗어나 더 높은 경지로 날아 오를 수도
있다.
정치적 상황이 매우 어둡거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나라에서 위대한 문학가나 미술가가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도 예술이 가진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인도의 전통 복장을 하고 있는 최승희
아름다운 코리안 댄서
1930년대 한반도에는 그 이름이 희망 자체인 사람들이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과
코리안 댄서로 해외에 그 명성을 드높인 최승희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 중에서 최승희는 해외에 나가 한국의 이름을 당당히 밝히고 한국의 춤을
당당히 공연했다는 점에서 더욱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37년 구미 각국 순회 공연부터 시작한 최승희의 해외 공연은 눈부신 성공을
이루었다.
당대 서구의 많은 예술가들이 최승희의 춤에 흠뻑 빠졌다.
그 중에는 피카소와 장 콕토 등도 있었다.
최승희는 해외공연 시 자신을 언제나 코리안 댄서라고 명시했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의 댄서로 오해받기 싫다는 강한
의지였다.
식민지 한반도의 사람들은 최승희의 당당함과 용기에 환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환경에 깊이 영향을
받고,
또 그 환경을 벗어나 높이 도약한 뛰어난 예술가였다.
힘차게 도약하는 최승희
총명하고 예술적인 소녀
최승희(1911-?) 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한
소녀였다.
소학교를 월반에 월반을 거듭하여 4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였다.
숙명 여학교에 다니던 열 여섯 되던 해, 최승희에게는 인생을 결정할 사건이
생겼다.
당시 한국에 공연을 온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본
것.
최승희는 이날 이후 자신의 앞날을 무용가로 결정하였다.
그녀의 집안에서도 최승희의 선택을 환영하였다.
일찌감치 개화한 집안에 기라성같은 엘리트 형제들을 둔
덕분에
최승희는 축복 속에서 이시이 바쿠의 수제자로 들어갈 수
있었다.
머리가 좋고 예술적 감각이 누구보다 뛰어났던
최승희는
이시이의 무용단에서도 곧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시이 무용단에서 가장 춤을 잘 추는 무용가로 성장했다.
이시이를 따라 일본 동경으로 무용을 배우러 갔던 최승희는 첫 번째 한국 귀국
때
이미 프로 무용가로서 자신의 독무대를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부채춤 추는
최승희>
한국무용의 체계를 잡다
최승희의 무용관은 다분히 사회적이며 민중적이었다.
그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무용을
좋아했고
예술이 상류 계급에만 봉사하는 것을 단연코
거부했다.
최승희는 안락한 이시이 무용단의 1급 무용수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한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가시밭길을 걷는 심정으로 불모지 한국에 무용 문화를 심으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1929년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린 최승희는 곧 이어 한국 전통무용에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한국의 전통무용 속에서 백성과 어우러지는,
그녀가 생각하는 참다운 무용의 형태를 발견했다.
그녀는 많은 한국 전통무용 전수자를 쫓아다니며 그들의 무용을 사사한다.
그리고 그것을 신무용과 과감히 접목시킨다.
그녀는 새롭지만 여전히 한국적인, 아름다운 무용 춤사위를 만들어
냈고
직접 무용수로서 그 아름다움을 구현하였다.
<최승희의 장고춤>
생존하기 위해서
때로 너무 뛰어난 예술가들은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쉽게 정치적으로 이용된다.
일본은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최승희가 코리안 댄서로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전쟁을 목전에 둔 일본으로서는 최승희가 너무 좋은 선전
도구였다.
일본 군부는 최승희에게 ‘전선 위문 공연’을 강요한다.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가장 자랑스러운 세계적 무용가가 된 최승희가
전선을 돌며 공연을 하는 것은 일본군의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될 뿐 만 아니라
이미 구미에서 명성을 얻은 최승희였기에 외국에 대한 선전효과도 아주 컸다.
1942년부터 2년 간 최승희는 일제의 총칼 아래서 하는 수 없이
만주와 중국 본토 등지를 떠돌며 전선 위문공연을 다녀야만 했다.
이것이 그녀의 삶에 있어서 가장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되었다. <전설의 무희 –최승희>
월북과 그 이후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일제 시대부터 사회주의 문학을 하던 문학가이자 이상주의자였다.
원래부터 무용을 통해 사람들과의 공감을 추구하였던
최승희에게
안막은 더 할 나위 없는 배우자였다.
1945년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한반도의 정치 상황 속에서 최승희는 남과 북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남편을 따라 월북의 길을 택한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월북 후 얼마 되지 않아 숙청 당하고 만다.
최승희 또한 1969년 정치적으로 숙청 당하고 그 이후 함경도 일대를
떠돌다
80년대 초반에 죽었다고 한다.
최승희와 안막의 예술가적이며 이상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일 현실
정치는
한반도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최승희와 손기정>
한 명의 천재적 예술가를 키우는 것은 훌륭하든,
훌륭하지 않든 그 예술가가 처한 주변의 환경일 것이다. 그리고 때로
예술가는
혼탁하고 어지러운 환경을 벗어나 높이 비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 천재 예술가를 키웠던 바로 그 환경이 예술가의 발목을 낚아채기도 한다.
우리에겐 천재 무용가 최승희가 있었다.
그녀는 식민지의 핍박 받는 한국의 예술가로 태어나 세계적 예술가로
성장하였지만
결국 그 한국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에 날개 꺾인 비운의 운명을 살아야만
했다.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 최승희의 생과
춤
<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정수웅 엮음. 눈빛 간)은 "이사도라 던컨이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을 무용으로 재현하여 그러나 최승희는 최근까지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극적인 예술가였다.
일제 때 친일을 했으며, 해방 후 월북을 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그에 관한 책은 한때 불온서적 취급을
받았다.
북한에서도 그는 통치이념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말년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탄생 90주년을 즈음으로 최승희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북한에서도 최승희의 묘를 애국열사릉 으로 이장시켜 정치적으로 복권시켰다고 한다. 최승희의 사망시기는 80년대초로 알려졌으나 확실치 않다.
이 자료집에는 20세기 격동의 시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산 현대무용가 최승희의 개인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자료, 무용가로서의 활동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진과 자료 등 보기 드문 자료 등이 다수 수록돼 있다.
자료집에 따르면 1911년 11월 서울 수운동에서 출생한 최승희는 26년 일본 현대무용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제자로
들어갔다.
1930년 2월1일 최승희의 신무용발표회가 처음으로 경성공회당에서
열리면서
무용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최승희는 기방이나 지방 춤꾼들로부터 전통춤을 익혀 전통무용과
현대무용과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31년 5월9일 최승희는 스무살의 나이로 와세대대 러시아문학과에 다니고 있던 한 살 위의 안필승과 결혼했다. 안필승은 와세다대 졸업
후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따서 안막(安漠)으로 개명했다.
34년 최승희는 일본 청년회관에서 제1회 발표회를 열었다. 엮은이는 "그때 저명한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최고의 무용가가 탄생했다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한다.
무용을 시작한 지 10년, 조선과 일본의 저명인들이 최승희 후원회를 만들었다. 발기인에는 여운형,마해송,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포함돼
있었다.
36년 최승희는 베를린 올림픽 우승자 손기정과 함께 억압받은 한국인의 우상이 되었다.
37년 최승희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첫 해외공연을 가진다. 그러나 최승희의 공연포스터에 '재퍼니즈 댄서'라는 소개에
자극받은
재미동포들의 반일운동으로 공연은
중단됐다.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갈 수 없었던 최승희는 뉴욕
할렘가에서 1년 가까이 그림 모델 등을 하며 버텼다.
<잡지모델로 일하던 시절의 최승희>
38년 12월17일 최승희는 고대하던 유럽 공연의 기회를 잡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두번째로 큰 극장인 샬르 플레엘에서
최승희는 유럽에서 첫번째 공연을 가졌다.
초립동 춤이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최승희는 후에 김백봉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는 이상하다. 내가 초립동 춤을 추고 난 지 일주일 만에 파리 전체에 그 초립동 모자가 퍼지더라. 그만큼 유행에 민감한
곳이란다".
<족두리를 쓴 최승희>
브뤼셀,로마,헤이그 등 유럽 순회공연을
끝내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최승희는
대망의 무대인 '예술의 전당' 국립극장 샤이오에
섰다.
관중 속에는 당시 피카소,장 콕도, 로망 롤랑 등 문화예술계 명사들이 있었다.
프랑스의 <피가로>지는 최승희에 대해 "선이 아주 환상적인 동양 최고의 무희"라고 격찬했다. 당시 파리 공연에서 주목받은 춤은 최승희를 대표하는 춤으로 평가받는 '보살춤'이었다.
유럽 공연의 성공으로 다시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최승희는 30년대 후반 유럽,미국,중남미 등에서 1백50여회의 공연을 해 동양의 무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최승희는 41년 12월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만주와 중국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위문공연에 투입되어야
했다.
공연 횟수가 1백회가 넘을 정도로 그는 관동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끌려가 공연을 해야
했다.
최승희는 몽고를 돌아 다른 전쟁터로 이동할 때 운강석굴을 방문했다. 운강석굴은 약 1천5백여년전에 만들어진 중국 최대의 석굴사원이다.
동굴에슨 5만1천개 정도의 불상이 조각돼 있다. 최승희는 이 거대한 불교예술에 큰 감명을 받아 불상의 다양한 자세를 무용으로
승화시켰다.
<석굴암의 벽조>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최승희의 보살춤>
일본 군부로부터 예술가들에 대한 압력이 더욱 강해지는 가운데 최승희
부부는
만주의 일본군을 위문한다는 명복으로 중국으로향했다.
그 후 최승희는 두 번 다시 일본 땅을 밞을 수 없었다.
45년 8월 해방이 됐으나 중국에 있던 안막은 청년시절부터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있던 처지여서 해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몹시 고뇌했다고 한다.
결국 45년 8월말 안막은 중국내 조선인 공산군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한편, 최승희는 이듬해 김백봉을 비롯한 제자들을
데리고
중국 천진에서 조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해방 후 서울에서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다. 친일파로 몰린 최승희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 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회에서건 내가 조선의 딸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승희는 북한에 가 있던 안막으로부터 강력한 요청을 받고 46년 7월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최승희는
평양에도착하자마자
김백봉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김백봉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최승희 동무 살러 왔소, 다니러 왔소"라고 물었다. 김일성은"살러 왔다"는 최승희에게 원하던 대로 대동강변
요정이었던
동일관 자리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다.
북한 무용동맹위원회 위원장이 된 최승희는 50년 6월초 2백명의 대규모 예술단과 역시 단원이었던 딸 성희를 데리고 모스크바에
갔다.
소련 각지를 돌며 공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최승희와 딸
안성희>
6.25 전쟁 때 평양이 유엔군에 점령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건물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최승희는 52년 김일성과 주은래의 배려로 중국 북경에 오게 되었다.
엮은이는 "최승희는 중국 고전무용을 발굴하고 현대화하는 데 힘을 쏟아
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무용에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최승희 류"라고 전한다.
최승희에게 매료되었던 주은래는 최승희의 춤 가운데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53년 7월 6.25 전쟁이 끝나자 최승희는 평양으로 돌아갔다. 54년 남편 안막은 문화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었고,
2년 뒤에는 문화선전부 부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엮은이는 "최승희 부부의 위세는 마치 뜨는 해와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59년 최승희 가족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북한 정권 내부에서 대규모 숙청이 단행된 것이다.
안막도 이때 숙청당해 강제노동 끝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승희는 이런 위기상황 아래에서도 무용교재인 <조선민족무용기본>(1957)을 남겼다.
이 교본은 남한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뒤늦게 출판(1991.동문선)되기도 했다. 한국춤의 기본동작을 문자와 그림으로 자세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무용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 최승희의 생과 춤
<신간> 사진과 자료로 보는 최승희
출처 : "관점이 있는 뉴스 - 프레시안" (www.pressian.com)
2004-06-12
최승희는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에 비유되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무용가다. <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 (정수웅 엮음. 눈빛
간)은
지난 90년대 초부터 10여년간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중국.미국.러시아.프랑스 등을 돌며
수집한 최승희의 사진과 자료를 모은 것으로, 최승희가 살아간 치열한 삶과 예술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엮은이는 우리 무용사에서 최승희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이렇게 말한다.
"이사도라 던컨이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을 무용으로 재현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처럼
최승희는
중국 운강석굴의 조각에서 영감을 얻어 <석굴암의 벽조>라는 무용을 창작하고 그의
제자들이
실크로드 선상의 <돈황무용>을 천년 만에 재현했다".
그러나 최승희는 최근까지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극적인 예술가였다.
일제 때 친일을 했으며, 해방 후 월북을
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그에 관한 책은 한때
불온서적 취급을 받았다.
북한에서도 그는 통치이념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말년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탄생 90주년을 즈음으로 최승희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북한에서도 최승희의 묘를
애국열사릉 으로 이장시켜 정치적으로
복권시켰다고 한다. 최승희의 사망시기는
80년대초로 알려졌으나 확실치 않다.
이 자료집에는 20세기 격동의 시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산 현대무용가 최승희의 개인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자료,
무용가로서의 활동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진과 자료 등 보기
드문 자료 등이 다수 수록돼
있다.
자료집에 따르면 1911년 11월 서울 수운동에서 출생한 최승희는 26년 일본 현대무용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제자로
들어갔다.
1930년 2월1일 최승희의 신무용발표회가
처음으로 경성공회당에서 열리면서 무용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최승희는 기방이나 지방 춤꾼들로부터
전통춤을 익혀 전통무용과
현대무용과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31년 5월9일 최승희는 스무살의 나이로
와세대대 러시아 문학과에 다니고
있던
한 살 위의 안필승과 결혼했다.
안필승은 와세다대 졸업 후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따서 안막(安漠)으로
개명했다.
34년 최승희는 일본 청년회관에서 제1회 발표회를 열었다. 엮은이는 "그때 저명한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최고의 무용가가 탄생했다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한다.
무용을 시작한 지 10년,
조선과 일본의 저명인들이 최승희 후원회를 만들었다.
발기인에는 여운형,마해송,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포함돼 있었다.
36년 최승희는 베를린 올림픽 우승자 손기정과 함께
억압받은 한국인의 우상이 되었다.
37년 최승희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첫
해외공연을 가진다.
그러나 최승희의 공연포스터에 '재퍼니즈 댄서'라는 소개에
자극받은 재미동포들의
반일운동으로 공연은 중단됐다.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갈 수 없었던 최승희는 뉴욕 할렘가에서 1년 가까이 그림 모델 등을 하며
버텼다.
38년 12월17일 최승희는 고대하던 유럽 공연의 기회를 잡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두번째로 큰 극장인 샬르 플레엘에서 최승희는 유럽에서 첫번째 공연을 가졌다.
초립동 춤이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최승희는 후에 김백봉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는 이상하다. 내가 초립동 춤을 추고 난 지 일주일 만에 파리 전체에 그 초립동 모자가
퍼지더라. 그만큼 유행에 민감한 곳이란다".
최승희의 쌍검무(34년 일본 청년회관에서 열린 제1회 발표회-좌)
최승희의 쌍검무(34년 일본 청년회관에서 열린 제1회 발표회-우)
브뤼셀,로마,헤이그 등 유럽 순회공연을 끝내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최승희는 대망의 무대인 '예술의 전당' 국립극장 샤이오에 섰다. 관중 속에는 당시 피카소,장 콕도, 로망 롤랑 등
문화예술계 명사들이 있었다. 프랑스의 <피가로>지는 최승희에 대해 "선이 아주 환상적인
동양
최고의 무희"라고 격찬했다.
당시 파리 공연에서 주목받은 춤은 최승희를 대표하는 춤으로 평가받는 '보살춤'이었다.
유럽 공연의 성공으로 다시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최승희는 30년대 후반 유럽,미국,중남미
등에서
1백50여회의 공연을 해 동양의
무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최승희는 41년 12월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만주와 중국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위문공연에 투입되어야
했다.
공연 횟수가 1백회가 넘을 정도로 그는 관동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끌려가 공연을 해야 했다.
최승희는 몽고를 돌아 다른 전쟁터로 이동할 때 운강석굴을 방문했다.
운강석굴은 약 1천5백여년전에 만들어진 중국 최대의
석굴사원이다.
동굴에슨 5만1천개 정도의 불상이 조작돼 있다.
최승희는 이 거대한 불교예술에 큰 감명을 받아 불상의
다양한 자세를 무용으로
승화시켰다.
<석굴암의 벽조>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일본 군부로부터 예술가들에 대한 압력이 더욱 강해지는
가운데 최승희 부부는 만주의 일본군을
위문한다는
명복으로 중국으로 향했다.
그 후 최승희는 두 번 다시 일본 땅을 밟을 수 없었다.
45년 8월 해방이 됐으나 중국에 있던 안막은 청년시절부터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있던 처지여서 해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몹시 고뇌했다고
한다.
결국 45년 8월말 안막은 중국내 조선인 공산군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한편, 최승희는 이듬해 김백봉을 비롯한 제자들을 데리고 중국 천진에서 조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해방 후 서울에서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다.
친일파로 몰린 최승희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
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회에서건 내가 조선의 딸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승희는 북한에 가 있던 안막으로부터 강력한
요청을 받고 46년 7월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최승희는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김백봉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김백봉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최승희 동무 살러 왔소, 다니러 왔소"라고 물었다.
김일성은 "살러 왔다"는 최승희에게 원하던 대로 대동강변 요정이었던 동일관 자리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다.
< 석굴암의 벽조(1943) >
북한 무용동맹위원회 위원장이 된 최승희는 50년 6월초 2백명의 대규모 예술단과 역시 단원이었던 딸 성희를 데리고 모스크바에
갔다.
소련 각지를 돌며 공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6.25 전쟁 때 평양이 유엔군에 점령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건물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최승희는 52년 김일성과 주은래의 배려로 중국 북경에 오게 되었다.
엮은이는 "최승희는 중국 고전무용을 발굴하고 현대화하는 데 힘을 쏟아 지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무용에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최승희 류"라고 전한다.
최승희에게 매료되었던 주은래는 최승희의 춤 가운데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주은래가 특히 좋아했다는 최승희의 춤 <신노심불로>
53년 7월 6.25 전쟁이 끝나자 최승희는 평양으로 돌아갔다. 54년 남편 안막은 문화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었고, 2년 뒤에는 문화선전부 부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엮은이는 "최승희 부부의 위세는 마치 뜨는 해와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59년 최승희 가족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북한 정권 내부에서 대규모 숙청이 단행된 것이다.
안막도 이때 숙청당해 강제노동 끝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승희는 이런 위기상황 아래에서도 무용교재인 <조선민족무용기본>(1957)을 남겼다.
이 교본은 남한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뒤늦게 출판(1991.동문선)되기도 했다.
한국춤의 기본동작을 문자와 그림으로 자세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무용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왼쪽부터 30년대초 최승희, 검무, 무당춤 >
<
왼쪽부터 30년대 최승희, 승무, 보살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