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 요보비치 아니, 앨리스가 돌아왔다.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 세 번째 영화이자 완결편의 부제는 '멸망'이다. 그러나 영화 바깥으로 나와서 보면 이 말은 지독한 반어법이다. 게임 원작 영화의 문법을 정교하게 다듬어, 새로운 정서의 액션 블록버스터 계보를 만든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매력을 짚어본다.
밀라 요보비치는 고백한다. “이 영화는 원래 3부작이 아니었어요. 단 하나의 영화로 만들어졌고 후속편이 나올 계획도 없었죠.” 3천2백만 달러로 제작해 2002년 개봉한 <레지던트 이블>은 스튜디오 대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힘든 저렴한 상업영화였다. 평단의 반응도 절망적이었다. '시카고 트리뷴'의 로버트 K. 엘더는 “심지어 팩-맨보다 더 형편없는 플롯과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1편과 4천3백만 달러를 투입한 2편은 모두 제작비의 3배를 호가하는 수입을 올리며 슬리퍼 히트작(작은 규모로 성공을 거둔 영화를 지칭하는 말)이 된다.
전편들의 성공에 힘입어 1억 달러의 제작비를 쏟아 부은 3편 <레지던트 이블 3: 인류의 멸망>(이하 <인류의 멸망>)은 명실 공히 규모로 승부하는 블록버스터의 꼴을 하고 있다. 뤽 베송의 <제5원소>에서부터 SF에 어울리는 끼를 보여온 밀라 요보비치도 빨간색 실크 슬립에서, 망사 민소매로 한층 보이시해지더니 이번엔 웨스턴 부츠에 쌍권총. 쿠크리 칼을 찬 터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밀라 요보비치가 <에이리언> 시리즈 시고니 위버의 뒤를 잇는 새로운 유형의 여전사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성공을 가능케 한 매력은 무엇일까?
게임 원작 영화 문법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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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레지던트 이블>이 조용한 파장을 일으킨 첫 번째 진원지는 일본 캡콤 사에서 1996년에 발매한 비디오 게임 <바이오 해저드>(영문제목 <레지던트 이블>)의 유저들이었다. 이 게임은 사방팔방에서 밑도 끝도 없이 몰려드는 좀비 떼와 돌연변이 괴물들을 처치하면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서바이벌 호러 어드벤처다. 한 번 실수는 곧 끝이다. 폐쇄된 공간. 언제 어디서 좀비들이 기습할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생존을 위해 전진한다. ‘서치 & 디스토리’라는 단순한 논리를 근간으로 삼지만 스토리는 탄탄했다. 공포스런 영상과 사운드, 연출력으로 그래픽 면에서는 최고의 명작이라 칭송받는 작품이다. 새로운 버전이 출시될 때마다 더욱 강력해지는 괴물들과 스토리는 오랜 팬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 어떤 스릴러영화보다 긴장감이 흐를 뿐 아니라 게임의 스토리나 오락성은 장르영화가 가진 그것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기대감을 안고 영화 <레지던트 이블>을 본 원작 게임 팬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폐쇄된 공간의 공포라는 게임 <바이오 해저드>의 정서를 잘 그렸다는 평가와 원작을 무시했다는 평이 팽팽히 맞섰다. 논쟁은 게임 속 히로인 질 발렌타인이 등장하는 2편에서도 이어진다.
이는 게임의 영화화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뭉친 제작팀이 고수한 “원작을 뛰어넘으려 하지 말고, 하나의 팬픽션(fanfiction, 팬들이 만들어내는 외전 스토리)을 완성해가는 기분으로 임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칙은 매번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가장 성공적인 게임 각색의 툴로 자리 잡게 된다. <레지던트 이블>을 만든 건 원작 게임의 영화화를 최초로 구상한 콘스탄틴 영화사의 번 아이칭어, 로버트 컬저(2006년 또 다른 게임 원작 영화 를 제작했다), <모탈 컴뱃>의 폴 앤더슨, 또 하나의 성공적인 게임 원작 영화 <사일런트 힐>을 제작한 사무엘 하디드 등 게임 원작 영화를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제작자들이 모여 만든 드림팀이었다. 이들은 캐릭터만 차용하고 스토리나 다른 요소들은 원작과 다른 방향으로 굴절시켜 원작 게임 팬들에게 실망을 안기거나, 영화 자체적으로도 캐릭터에 끼워 맞춘 허술하기 짝이 없는 엉성한 스토리로 자멸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각본을 쓴 폴 앤더슨 감독은 원작 게임에서 ‘다국적 거대 기업 엄브렐러가 T-바이러스를 응용한 생물병기 연구를 극비리에 진행하다 바이러스 누출사고가 일어나 생물학적 위험(바이오 해저드)사태가 발생한다’는 세계관만을 빌려온다. 그 위에 앨리스라는 캐릭터를 창출해내고, 서사의 꼴을 갖춘 팬픽을 완성해 일반 영화 팬들도 끌어안았다.
시리즈 1편은 원작 게임 1, 2편의 설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사고가 난 지하 연구소에 갇힌 생존자들의 사투라는 전제를 제외하고는 원작의 향수를 느낄 수 없는 SF호러 액션물이다. 이에 비해 2편은 표면적으로 원작 게임 '바이오 해저드 3'의 캐릭터와 ‘외전’의 성격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요소들을 대폭 수용했다. 게임 속 주인공인 질 발렌타인의 외모를 빼 닮은 시에나 길로리가 질 발렌타인 역을 맡고, 카를로스도 등장한다. 또한 원작 게임 3편에 추가된 추적자 네미시스를 전편과 유기적으로 엮어 등장시킨다. 실제 게임처럼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협력해서 극복해나가는 진행구조도 갖추고 있다. 물론, 애초부터 공포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은 극본은 더욱 강력하고 화려한 밀라 요보비치의 액션을 선보이는 데 할애된다.
영화의 진행도 비디오게임 스타일의 사건 전개방식을 접목했다. 설명은 게임 브리핑 화면과 간결한 정보로 대신하고, 1편의 지하 연구소에서 주어진 3시간이나, 2편 라쿤 시티에서 주어진 하룻밤처럼 한정된 시간을 제시한다. 게임에서 임무를 하나씩 완료할 때마다 다음 판으로 넘어가듯 에피소드가 전개된다. 그 덕분에 생존유지를 위한 게임처럼 신속한 액션과 상황판단을 요하는 숨 가쁜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스피드한 진행과 감각적인 영상, 좀처럼 쉴 틈을 주지 않는 파워풀한 음악은 오락영화로서의 미덕을 발휘한다.
장르 횡단의 이종 교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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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게임을 알아야만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영화는 사람들에게 친숙한 장면들을 통해 정서를 공유하기도 하고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만의 고유함을 만들어갔다. 물론 기존의 호러, 좀비영화 팬들과 원작 게임 팬들에게 <레지던트 이블>은 지대한 관심과 지탄을 동시에 받는다.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가장 독특한 지점은 여성이 극을 이끄는 액션영화라는 것이다. 앨리스와 함께 1편의 레인 역을 맡은 미셸 로드리게즈, 2편의 질 발렌타인 역에 시에나 길로리, 3편에선 드라마 <히어로즈>의 알리 라터를 원작 게임의 오리지널 인물인 클레어로 등장시킨다. 두 여자 주인공은 관객을 영화로 몰입하게 하는 요소이자 주인공이 여자인 게임과 영화의 괴리감을 메워준다. 특히 모든 스턴트 신을 직접 소화해내는 밀라 요보비치의 존재는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중추다. 솔직히, 이 시리즈는 그녀의 누드로도 숱한 화제를 모았다. 영화 시리즈의 오리지널리티는 그녀에게 의해 구축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편 초반의 샤워실에서 기절했다 깨는 장면은 3편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리고 1편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으로 꼽히는 레이저 빔도 3편에서 리바이벌된다. 2편에서 얼떨결에 살아남은 L.J(마이크 엡스)는 네미시스에게 ‘최소의 전투력’이라 평가받은 금장 데저트 이글 권총을 3편에서도 가지고 나온다. <인류의 멸망>은 이런 소소한 부분들로 알 만한 사람들만 아는 전편과의 연계성을 위트 있게 드러낸다.
형식적으로 이 시리즈는 좀비가 등장하는 것 외에 B급 공포영화의 전통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블 헌터> <화성의 유령들>을 비롯 수많은 호러, 좀비영화들에서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거대 다국적 기업의 음모라는 반자본주의적 세계관과 2편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조직에서 버림받은 노동자 계급이라는 점에서는 좀비영화 특유의 블랙코미디적인 특징도 보인다. 조지 로메로 감독에게 바치는 오마주 혹은 패러디라 볼 수밖에 없는 2편의 총포상 장면, 다음은 누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주변 인물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공포영화의 관습도 차용했다. 3편에서 생존자를 구출하고 기름과 식량을 찾아 이동하는 클레어 호위대는 원작 게임보다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시리즈와 <새벽의 저주> 등 좀비영화에서 이어져 오는 무전취식과 개조차량 판타지를 계승한다.
고어영화 팬들에게도 익숙한 장면들이 많다. 신기한 괴물이 피 칠갑 비주얼을 선사하는 잔혹 영상들이 즐비한 까닭이다. 특히 1편에서 사지를 도륙하는 레이저 빔의 충격과 원 없이 많은 좀비들의 머리를 박살내고 총알을 박아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장면이 만인에게 회자된다. 주구장창 불을 뿜는 각종 총기가 등장하기 때문에 밀리터리 팬들의 관심도 받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는 게임 세대를 위한 컨셉 영화다. 2편에서 코미디 배우 마이크 엡스가 분한 L.J가 차로 좀비들을 들이받으며 “GTA(또 다른 잔혹한 막가파식 게임) 10점!”을 외치는 것은 게임 팬들에게 “영화의 세계관이 너희들과 똑같다”며 손을 내미는 것이다. 게임과 흡사한 화면구도와 시점, 스피드한 편집, 역동적인 카메라 앵글은 많은 게임 팬들에게 인정받았다. 마릴린 맨슨과 나인 인치 네일스 출신의 찰리 클로저 등이 작업한 박진감 넘치는 배경음악 또한 화끈한 액션을 받쳐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다.
이런 다양한 색깔을 가진 덕분에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는 좀비물, 호러, SF 등 장르영화 팬들과 게임 팬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혼합된 B급 정서를 화려하게 포장해 액션으로 소화한 것은 이 시리즈가 전세계적인 흥행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키워드임이 분명하다. B급 영화와 비디오게임에서 따온 것들을 영민하게 조합한 정서와 시종일관 달리는 영상은 게임과 각종 장르 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블록버스터, 불멸의 좀비 군단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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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레지던트 이블>의 강점은 좀비 이상의 창조물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공상 과학적인 발상이 이 영화에 스며들어 있어요.” 1편의 감독이자 전체 시리즈의 제작자겸 각본가인 폴 앤더슨의 이 말은 상기해볼 만하다. 게임이 버전업할 때마다 새로워지듯 영화 시리즈도 거듭할수록 새로움을 찾았다. 원작 게임 속 공간을 벗어나 마지막으로 안착한 땅은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를 배경으로 한 미래의 사막이다. 서부영화의 황량한 바람이 휑하게 불고 있는 미래의 사막. 포스트-묵시록 SF영화에 맞아 떨어지는 배경이다.
3편 <인류의 멸망>의 연출자인 러셀 멀케이(<하이랜더>)가 각본을 받자마자 떠올린 것은 포스트 묵시록의 대표작 <매드 맥스> 시리즈였다. “첫 번째 영화는 폐쇄공포증 같았고, 두 번째는 축축한 밤거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막이다. 이것은 매우 서부영화 같고 미래적이다. 오싹하다”고 소감을 늘어놓는다. 원작 게임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포스트 묵시록의 세계에 당도한 앨리스는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인류의 생존과 악의 처단이라는 두 가지 영웅의 임무가 주어진다.
3편 <인류의 멸망>은 분위기뿐 아니라 스케일도 대폭 확장했다. 라쿤 시티를 날려버리며 소멸된 줄 알았던 T-바이러스가 지구를 뒤덮었다는 것. 인류는 멸종위기에 처해 있으며 폐허로 변한 지구는 좀비천국이다. 2편에서 살아남은 카를로스(오데드 페르)와 생존자들은 클레어가 이끄는 클레어 호위대에 가담해 살아간다. 아이를 포함해 대략 서른 명의 사람으로 형성된 이들은 스쿨버스, 구급차, 뉴스 트럭과 유조차를 타고 음식과 물, 생존자를 찾아 떠돌아다니지만 점차 지쳐가고 절망에 빠져든다. 그러던 중 네바다 주의 한 마을에서 앨리스의 도움을 받게 되고, 이 과정에서 엄브렐러사의 추적망에 앨리스는 다시 포착된다. 이에 앨리스 프로젝트를 ‘인류의 미래’라고 여긴 아이작 박사(이아인 글렌)는 지휘체계도 무시한 채 여러 가지 실험을 감행한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불멸의 괴물 타이란트로 변이한다.
기본 설정도 그렇거니와, 신성불가침의 절대 강자인 것 같던 엄브렐러사가 내부 갈등을 빚는 등 <인류의 멸망> 스토리는 원작 게임과 완전한 작별을 고한다. 앤더슨은 “게임에 충실하면서 약간의 변형을 갖는 것은 큰 도전”이라고 밝힌 바 있고, 러셀 멀케이도 “엄브렐러의 라스베이거스 지하 비밀기지의 디자인과 색감에서 보듯이 게임을 그대로 옮기는 것에 대해서 매우 단호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제작진의 말일뿐. 실제 영화는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가 고수해왔던 게임 속 공간의 구현과 게임의 진행방식, 속도감, 게임을 하듯 앨리스만 따라다니면 되던 내러티브를 이번 편에서는 고이 접어뒀다. 대신 좀 더 일반적인 대작 영화 공식을 따른다. 심지어 흥행을 의식해 의무적으로 삽입한 클리셰들, 이를테면 앨리스와 카를로스 간의 억지 로맨스가 등장하고, 앨리스는 인류의 미래를 짊어진 초능력까지 겸비한 영웅적인 인물로 탈바꿈한다. 이쯤에서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제작 및 각본가인 폴 앤더슨은 각색이 아닌 블록버스터 액션영화 제작에 욕심을 보이는 듯하다. 산발적으로 터지는 놀라움을 제외하고는 공포와 서스펜스, 스릴러의 자리에 액션 활극이 채워졌다. 2편부터 시도된 블록버스터화 작업을 통해 <인류의 멸망>은 게임과 다른 블록버스터의 공식을 철저히 따르는 액션물로 탈바꿈했다.
<인류의 멸망>을 시리즈의 궁극이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원작 게임과 너무 멀리 떨어져버린 선택에 대한 판단도 내려지지 않았다. 제작사는 완결편이라고는 말했지만 전작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음 편을 위한 스토리를 열어놓고 영화는 끝난다. 다소 밋밋한 블록버스터로 일단락된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가 다시 계속된다면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가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