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의 시세계/정영자-
1. 머 리 말
한국 문단의 80년대는 사회현상과 함께 희망과 좌절의 시대라고할 수 있었다. 따라 서 문화적 성숙과 사회발전을 위한 변혁시대의전환기였으며 80년대 초기에 시문학 이 강세를 보였다. 70년대 시문학의 부정적 현상으로 시인들의 낡아서 허물거리는시관, 안일한 작시법, 시대착오적인 자기 영상론(影像論)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시는 종래의 전 통적인 시관에 얽매여 안주하려는 경향과 그러한 안정 위주의 시단 풍토 속에 새로 운 시 방법을모색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70년대가 순수와 참여의 대립 상이 도출된 시대였다면 80년대는 이와 같은 이분법의 세부적인것이 분화되는 과정 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의 시단은 매우 활발하였다. 많은 시 동인지와 부정기 간행물이 잇달아 출간 되었으며, 그 속에서 많은 새로운 시인들이 주목할 만한 시를 발표하였다. 80년대의 새로운 시인들은 양에서 뿐만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커다란 성과를 보여 주었다. 최승자는 8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방법론적인 거 칠음과 부드러움, 현실을 부정 파괴함으로써 가지는 새로운 창조적 정신, 욕설과 비 판이 가지는 전혀 새로운 강렬성을 던지는 신선한 충격파의 시인이다. 그는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이 시대의 사랑> 외4편을 발표함으 로써 시단에 등장하였으며 1981년 첫시집 『이 시대의 사랑』, 1984년 『즐거운 일 기』, 1989년 『기억의 집』, 1993년 『내무덤, 푸르고』를 발간하여 처절한 비극적 파괴성과 강렬한 부정적중언성, 그리고 가련한 사랑의 서정성을 표현하고 있다. 도시화·산업화된 현실 속에서 치유될 수 없는 여성적 삶의 한계와 과격한 자기폭 로와 부정적 인식을 통한 평등한 삶의 패턴을 희구하고 시어의 과격성을 통한 소외 된 삶의 극복 에너지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어두운 시대의 비관주의적 맞섬이 라는 현실대응의 맥락을 가진다. 그는 이성복·황지우 등의 형태적 파격성과 내용적 과격성을 함께가진다. 1) 이 책에서는 그러한 최승자 시의 변모과정과 내용적 특성을 고찰하여 비극적 파괴 성과 강렬한 부정성이 가지는 새로운 삶과 정신에의 그리움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 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최승자 시의 변모과정
최승자의 시는 철저한 자기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그의시는 자기고발, 자기 증언이다. 형이상학적인 환상세계에 머물지 않는다. 시의 적절한 비유는 딱 부러지 는 거칠고 황폐한 자기 벗기기에서 노래된다. 때문에 그의 고통스러운 사랑 속에서 키워지고 지켜지는 우리 시대의 현실적인 사랑이 있다. 김치수는 『이 시대의 사랑』의 해설에서 최승자 시의 철저한 부정의식을 들어, 그 것은 철저한 긍정의 바램 때문에 가능하며 자기 삶의 비관주의적 방법론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평가하였다. 2) 언제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에서 그의 정직성은 드러난다.
(전략) 물러서 라 나의 외로움은 장전되어 있다. 하하, 그러나 필경은 아무도
1) 성민엽 편, 『오늘의 문제 시인 시선』, 학원사, 1987, p. 229. 2) 김치수, 「사랑의 방법」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 지성사, 1981, p.95
오지 않을 길목에서 녹슨 내 외로움의 총구는 끝끝내 나의 뇌리를 겨누고 있다. -<외로움의 폭력>에서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자화상>에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구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찌기 나는>에서
최승자의 시문학은 증언적 체험을 통한 자기해체에서 시작되고있다. 때문에 우리들 의 노래 이전에 '나의 이야기'를 하며 비극적 삶의 양상과 버림받고 망가진 자신의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화실한 감동에의 여파를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이다. 자기 내면세계의 성찰과 강렬한 부정의식 속에서도 부드러운 그리움과 추억 속의 사랑을 아끼고 있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개 같은 가을이>), "추억이 컹컹짖는다"(<과거를 가 진 사람들>), "오오 벼락치는 그리움에"(<술독에 빠진 그리움>)와 같은 강렬한 시 어를 구사하면서도 그의 시는부드러운 인간서정의 따뜻함으로 흐르고 있다. 때문에 그의 시는 한국 현대 전통서정시의 변종이며 부정적 현실비판시의 개량종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서 이 시대의 진정한 사랑을 찾는 작업으로서의 비극적 인식 으로 출발하는 자아와 현실상황은 너무나 비극적이다. 한국 전통서정인 한스러움· 사랑·이별·그리움·고독으로는 풀릴 수 없는 이 시대의 사랑이나 그리움은 격렬 한 분출 이미지로 나타난다.
사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겨지고 갑작스런 배고픔으로 찾아오는 이 별. -<여자들과 사내들>에서
움직이고 싶어 큰 걸음으로 걷고 싶어 뛰고 싶어 날고 싶어
깨고 싶어 부수고 싶어 울부짖고 싶어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치고 싶어 까무러쳤다. 십년 후에 깨어나고 싶어 -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 전문 전략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 <청파동을 기억하는가>에서
이별이지만 현실적 파괴성은 지렁이에 내리는 송곳의 찔림으로극렬한 표현법을 사 용하고 있다. 첫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서도 파괴성은 .기존의 어떤 존재도 부정 하는 비극적 인식으로 되어 있다. 모든 질서와 윤리를 남김없이 깨고 부수는 파괴의 행위는 실천의의미를 더욱 크게 부각시킨다. 오래도록 지속되는 진실한 사랑과는 거리가 있는 이 시대의 사랑을 부정하는 첫시 집의 시는 두 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에서는 더욱 구체화된 비극적인 파괴성이 나타나고 있다.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밥에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를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꽃병에 꽃아다오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에서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중략) 나쁜 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흘러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
- <Y를 하여>에서
두 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에서도 그의 관심은 사람과 사랑 속에 머물고 불행한 사랑의 현실성을 사실적인 비유로써 표현한다. 그의 사랑논리는 독특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꺾어 주기를 바라는 한국적 여인상에서 변모되 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의 복수는 버림에 대한 욕설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거야' 식의 집요한 복수심과 끈적거리는 재생적 패턴을 가진다. 그의 『즐거운 일기』는 결코 즐겁지 않은 일기로 가득찬 내용이다. 역설은 더욱 현실의 허망함과 적나라함을 돋보이게 하는 한 방법이다. 일상생활에서 갖는 욕망 이나 충동은 거의 무한정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방향감각이 없고 자의 적이며 이것 들을 방임상태로 두면 심한 마찰과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된다. 최승자의 시는 이러한 충돌과 혼란을 포괄의 입장에서 조정하고있다. 리차드가 그 의 상상력론에서 포괄의 시(Inclusive Poetry)를내세우고 비극이 지닌 카타르시스의 단면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있다. 3) 최승자는 초기시집에서 두 번째 시집으로 오면서 역설의 진술형태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의 역설은 모순어법(oxymoron)을 사용하기도 하고 작품의 부분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체 구조에 관계되는상황의 역설로도 나타난다. 4) 역설은 세계인식을 위한 한 방편이다. 최승자의 역설은 단절의
3) 1. A. Richards, 『Principles of Literary Criticism』 , pp. 245-246. 4) Alex Preninger (ed), 『Encyclopedia of Poetry and Poetics』, p. 598.
미학을 가지 기보다는 처절한 아픔 속에서도 인간적인 사랑과 여유를 가지고 망가 지고 허물어진 사랑과 사람에 대한 철저한 증오를 가지고 있지 않다. 때문에 너를 죽이고 말겠다는 살기 등등한 표현을 하면서도 '개새끼 못잊어'라는 그 특유의 신 휴머니즘을 만날 수 있다. 최승자는 두 번째 시집에서 세계인식의 한 방법으로 역설의 드라마를 펼치면서도 그의 파괴성, 비극성, 부정성을 늦추지 않고 있다. 세 번째 시집, 『기억의 집』에 오면 그의 죽음의식은 한결 부드러워지고 삶 속에 공유하는 죽음으로 변하고 있다.
저무는 어디 선가 굶주린 그리운 눈동자들이 피어나고 한평생의 꿈이 먼 별처럼 결빙 해가는 창가에서 나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나라 그 물빛 흔들리는 강가에 다다르고 싶다. -<기억의 집>에서
목구멍과 숨을 위해서는 동사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밟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이제 가야만 한다>에서
새들은 잠시 낮게 낮게 가라앉고 산발한 그리움은 밖에서, 밖에서만 날 부르고
쉬임 없는 파문과 파문 사이에서 나는 너무 오랫동안 춤추었다
(중략)
오래 전에 내 눈속 깊이 가라앉았던 별, 다시 떠오르는 별. 오래 갈구해온 나의 땅에 다시 피가 돌고 돌아와 이제 내 울타리를 고치느니, 허술함이 여 허술함이 여 버려 진 잡초들이 이미 내 키를 넘었구나.
- <돌아와 이제>에서
재생적 패턴의 강렬한 이미지와 회귀본능의 자연스러움은 한결삶과 사람을 바라보 는 시선이 넓고 깊어졌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만큼 시인 자신의 개인사적인 심층의식도 문제되겠지만 조금씩정돈되어지는 현실 과도 맞물려 열려진 정신으로 포용하는 여유로움을 갖게 된 것이다. 때문에 세 번 째 시집에서는 다급함이 없어지고눈물겨움이나 고통을 자기 삶의 한 활력으로 이용 하고 있다. 두 번째 시집에서 희곡의 지문형식을 첨가하여 못 다한 설명적표현을 하고 있었으 나 세 번째 시집에서는 이와 같은 방법이 줄어들고 시가 한결 다듬어지고 간결해졌 다. 특히 시를 통한 최승자의시론을 만나는 시편이 4편이나 보인다. 네 번째 시집, 『내 무덤, 푸르고』에 오면 자신의 상처와 슬픔과공포를 무기로 정 직한 글쓰기를 하는 최승자의 뿌리깊은 허무의식과 부정적 인식이 다시금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불길한 세기말을 온몸, 온 정신으로 살아낸 투철한 영혼의 비망록5)이다. 그 가 시집 『기억의 집』에서 새로운 집을 짓고자 하는 노력으로 보인 바와 같이 기 존의 집을 "허공의 집", "파괴의집"으로 설정하고 새로운 집 짓기의 건설적인 꿈을 가졌으나 시집『내 무덤, 푸르고』에 오면 최승자의 시들은 세월, 즉 흐르는 시간에 대한 저항의 기록6)으로써 "세월의 집"을 가지고 자신에 대한 회의와 현대자본주의 의 속물 근성을 천착하고 있다.
3. 최승자의 시의 내면세계
(1 ) 파괴성 최승자의 시세계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가지는 도시 문명인의 좌절과 비극적 인식 에 닿아 있다. 과거보다는 더욱 불안과 공포는 가중되고 인간의 욕구는 섬세하게도 다양화되어 있 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두려워할 것이 감소되었음에도 공포의 습관은 그 대로 작용하고 있다. 최승자는 <희망의 감옥>이라는 역설을 통하여 이 시대의 희망을 갈구하는 시인이 며 일반적인 안주 위주의 행복론에서 보다 자극적이고 적극적인 행복을 위하여 기 존의 체재와 존재를 파괴하는 행동적인 삶을 표현하고 있다.
내 희망이 문을 닫는 시각에 너는 기여코 두드린다. 나의 것보다 더욱 캄캄한 희망 혹은 절망으로, 벽도 내부도 없이 문만으로 서로 닫혀진
5) 이광호, 「세기말의 비망록」 , 최승자 『내 무덤, 푸르고』 문학과 지성사,1993, p. 84. 6) 이혜원, 「죽음과 사랑의 기록들」 , 『시와 사상』, 1994, 여름 창간호. p. 251.
이 열린 희망의 감옥.
네 절망의 문을 닫는 시각에 나는 기여코 두드린다. 너의 것보다 더욱 캄캄한 절망 흑은 희망으로.
<희망의 감옥 1 > 전운
그의 시는 80년대의 강렬한 메시지 전달을 위한 미학의 무조건회생이라는 과격성을 가지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는 강렬하게 전혀 낯설다. 그리고 포근하고 따뜻하다. 여기에 최승자 시의매력이 있다. 또한 탄력적인 시적 긴장이 유지된다.
사방팔방으로 바람, 바람소리. 바람 파도에 포위된 집, 누울 곳 없는 삼십칠 세. 없는 꿈과 있는 현실, 그 사이에서 바람- 바람 소리가 날 흔들어댄다
영원히 뿌리 없는 허공의 방, 허망의 집. 허망하고 허망하여 이 집을 파괴합니다. 이 집을 복원하지 마십시오. 행여, 이 위에 기념 건물을 세우지 마십시오. 명실공히, 이 집은 파괴의 집입니다 -<파괴의 집>전문
하나의 정거장일 뿐, 지상의 영원한 집은 없다. 이미 깨어진 너의 집은 없다. -<前夜>에서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파괴는 현실적인 세계의 현상적 파괴일 뿐만 아니라 인간실 존의 파괴적 양상을 함께 뜻하고 있다. 자학적이며 냉소적인 파괴성은 철저하게 복 원의지를 기피하고 있다. 그의 파괴에는 연민이나 슬픔 혹은 분노의 격렬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파괴를 통한 자기 기쁨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달려라 시간아 꿈과 죄밖에 걸칠 것 없는 내 가벼운 중량을 싣고 쏜살같이 달려라 풍지박산되는 내 뼈를 보고 싶다 뼈가루 먼지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흐흐흐 웃고 싶다.
- <버려진 거리 끝에서>에서
꿈과 죄밖에 가진 것 없는 몸마저 시간을 뚫고 달려 풍지박산으로 흩어지는 뼈가루 와 그 웃음은 슬픔이나 고독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변혁 계기의 새로운 자아형성이며 전혀 새로운 집의 건축이다. 때문에 최승 자는 이 시대의 공간적 제 물체에 대한 새로운 개조없이는 아름다움이 없고, 자아 의 철저한 해체 이후에 새로운 자아를 만들 수 있다는 파괴지향의 창조적 시인이 다. 따라서 그의 창조정신은 파괴에서 출발하고 그의 파괴는 기존의 질서와 관념을 철저히 배격하고, 적극적으로 그 실체를 파헤치고 공격적인 도전으로 파괴한다 때 문에 그의 시는 운동적, 실천적 양상이 바탕되어 소위 80년대 민중현장시의 또 다 른 모습을 보여 주면서도 가락과 유연성, 더깊은 사유로 인하여 음미되는 시가 된 다. 절규와 구호로서의 시, 선동과 함성으로서의 시가 아닌 존재철학의 시인 것이 다.
(2) 비극성 최승자의 비극성은 죽음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죽음 즐기기라는 달콤한 죽음에의 유혹이 가득하다. 죽음은 지상의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현실적 인 문제이다. 죽음은 '과일 속의 씨앗'처럼 존재하는 현실이다. 과일 속의 씨앗이 과일을 무르익게 하듯이 인간 속의 죽음도 인간의 삶을 성숙케 하는 것이다. 쇼펜하워는 죽음은 철학을 주재하는 신, 죽음이 없었던들 인간은철학적 사색을 하 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최승자의 죽음의식은 철저한 비극정신을 통한 영원한 정신을 가지고자 하는 자아상 승과 자아확립의 한 변형이다. 그는 즐거이 현실의 비극적 상황을 제재로 하여 시 를 쓴다. 정과리는 최승자 시의 비극을 '방법적 비극'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7) 무참한 절망 과 좌절 속에 새로운 환희와 깨달음을 가지는 방법론적 비극원용인 그의 시적 표현 방법은 독특하다.
죽고 싶음의 절정에서 죽지 못한다, 흑은 죽지 않는다 드라마가 되지 않고 비극이 되지 않고 클라이막스가 되지 않는다.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견뎌내야 할 비극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물을 건너갈 수밖에 없다. 맞은편에서 병신 같은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비 극> 전문
두드려라, 안 열린다. 두드려라, 만에 하나 열릴지도 모르니까. 두드려라, 안 두드리면 심심하니까.
슬퍼하기 위해
7) 정과리, 「방법적 비극, 그리고」, 최승자,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p. 105.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물러가라 모든 밝음 물러가라 모든 빛들 쉬잇, 우리 모두 조용히 하자. 흐르는 물결 위에서 그녀를 그대로 잠들게 하자. 그러나 모든 기억하는 자들의 머리 위로 밤은 오고 나는 나의 별에 잠시 걸터앉아 흘러온 길과 흘러갈 길을 바라본다.
만경 창파 시간 위에 몸 띄우고 한 사람 온 뒤에 또 한 사람 오는구나. 한 사람 간 뒤에 또 한 사람 가는구나.
사라져라 사라져라 물밀어라 물밀어라 뭇별들 사이로 소리없이 사라져라, 물밀어라.
- <시간 위에 몸 띄우고> 전문
최승자의 비극은 서러움이기보다는 강렬성이다. 소극적인 기다림의 비극적 인식이 아니라 과격하게 도전하고 부딪치는 비극이다. 움직이며 실천하는 비극이다. 따라서 그의 비극적 인식은 분명히 긍정하면서도 그의 비극적 내용은 강렬한 에너지를 뿜 고 있다. 이것이그의 비극적 제 인식이 가지는 그 특유의 개성이다. 이러한 비극적 인식의 결과론으로 나온 것이 새로운 창조를 모색하는 수많은 파괴성과 부정성 이 다. 최승자 시는 비극적 인식의 파괴가 그 주조를 이루는 내용적 형식으로 되어 있고 그 형태적 형식은 희곡의 지문을 잘 원용하여 시적 긴장도를 완화하면서 충분히 주 제와 그 분위기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최승자의 시는 비극을 주조로 한 희곡양식을 원용하고 있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있는 애련과 공포의 정을 통해 감 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함8)에 이르고있다.
(3) 부정성 파괴성이 인간이 가진 조건과 창조에 대항하는 적극적인 자세라면 부정성은 그 조 건과 창조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이다. 최승자는 죽음 지향의 시를 선호하며 삶과 존재에 대한 냉소적인 거부의지를 보이 고 세계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통하여 통속적인 상황을 거부하고 있다. 그가 가지는 세계는 절대이상의 세계이며, 지금은 그 절대세계가 부재하는 소외된 현실 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부모와 절대자에 대한 거부, 연인에 대한 거부를 통하여 절실하게 혈연과 절대자를 찾는 절규를 들을 수 있으며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피맺힌 추억을 갈구하며 '그'를 찾고 있다. 고통과 죽음이 그의 시집 전편을 덮어 흐르고 있지만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세 번째 시집, 『기억의 집』에 오면 절대적 절망과 피할 길 없는 부정이 조금씩 변모되고 있다. 세계와의 관계를 보다 긴밀하고 유연하게 유지하려는 태도로써의 발전이 있다.
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겸 기 도 하지 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이제 가야만 한다>에서
오래 갈구해 온 나의 땅에 다시 피가 돌고 돌아와 이제 내 울타리를 고치느니 -<돌아와 이제>에서
8)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극단적인 부정과 죽음이 함께 하는 강렬한 그의 파괴적 괴벽은 타인과의 관계를 모 색한다.
저 혼자 자유로워서는 새가 되지 못한다. 새가 되기 위해서는 새를 동경 하는 수많은 다른 눈(眼)들이 있어야만 한다. -<희망의 감옥·7>전문
흙은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무한무한 증가한다. 우리가 무한무한 태어나고 우리가 무한무한 죽어가므로,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흙을 생산하므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죽음으로써. - <희망의 감옥·8> 전문
그의 적나라한 부정성은 차츰 완화되고 새가 되기 위하여 타인과의 관계가 이루어 져야 하고 우리의 삶과 죽음 때문에 흙이 창조적으로 증가하는 원리에 이른다. 사 람과 세상을 보는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의 문명비판적 요소를 현실 그 자체 의 묘사나 서술로써 끝내고 있다.
가물거리는 정신의 한 끝을 헤집고 나와 다시 다른 한 끝에서 침몰하기 위하여 원효대교, 그 허상의 다리를 넘어 섬으로 진입하는 사람들 유해 색소의 햇빛에 조금씩 들끓으며 발효하기 시작하는 거대한 반죽 덩어리 - <여의도 광시곡>에서
오 들끓는 식욕으로 다가오는 라면, 고통과 쾌락의 두 약재로 빚어진 우리 시대의 당의정을 아시는지?
- <아시는지>에서
환경공해와 쾌락의 추구로 소비하는 도시인의 허탈하고 황폐한 생활 그대로의 사실 적인 묘사를 보이고 도시의 한 향상을 통하여 자연적이고 본래적인 인간성으로서의 회귀와 자연보존에 대한 향수와 그 순수함을 소망하는 자연회귀, 자연 귀일의 노장 사상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것은 현대문명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며 현대 도시인의 지향 없는 삶에 대한 부정 이다. 그것은 잘못되고 있는 현상에 대한 묘사이다. 이것은 증언적 요소가 가지는 시적자아의 강렬한 자기존재의 부정보다는 약하다.
절망하기 위하여 밥을 먹고 절망하기 위하여 성교한다. -<과거를 가진 사람들>에서
아직도 곧잘 희망에 푸릇푸룻 데쳐지고 절망에 달달 볶여지고 자포자기에 폭폭 고아지는 나는 수억 년 전부터의 원시적 아메바. -<토악질>에서
음식문화의 제 양식을 원용하며 삶의 양상을 비유하는 여성적 섬세함을 보이면서도 그의 시는 힘이 있다. 박력있는 음률이 시적 긴장감을 더욱 조이고 있다. 다만 자신 의 생을 부정함으로써 현세적인 새로움을 더욱 갈구하는 치열한 삶의 제 양상을 만 날 수 있는 것이다. 까뮈가 말한 바 아무리 초보적인 반역도 역설적으로 말하면 질서에의 희구를 나타 내고 있는 것이다. 9) 그의 부정의식은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존재와 세계에 대한 기대이고 그 이상이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질서창조의 동기를 가진다.
(4) 서정성 그의 시는 파괴적이며 비판적이다. 전면적 부정이다. 모든 질서·윤리·존재·현실 자체마저도 부정하며 존재와 세계에 대한 처절한 거부의지를 가진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이념시도 아니며 실천적 운동차원의 시도 아니다. 처연한 서정과 아프게 멍든 상처 속에서도 키우고 가꾸는 그리움이 있다. 그의 시 에 매력적이란 용어를 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평화 -<사랑하는 손>전문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한 세월 위에 또 한 세월을 눕히고 나는 이제 가야 합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근원적으로 피비런내나는 이 세상의 고요 속으로
9) 알베르 까위, 『반항적 인간』, 일신사, 1986, p. 38.
나는 처음으로 내려서겠습니다. -<하산>에서
새들은 항시 낮게 낮게 가라앉고 산발한 그리움은 밖에서, 밖에서만 날 부르고
쉬임 없는 파문과 파문 사이에서 나는 너무 오랫동안 춤추었다.
이젠 너를 떠나야 하리.
어화 어화 우리 슬픔 여기까지 노저어 왔었나 - <돌아와 이제>에서
최승자의 처연한 서정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그 아쉬움의 여운 속 에 머물고 있다. 때로는 격렬하게 거부와 부정과 파괴로 나타나기도 하고 욕설과 도전으로도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특이한 서정성은 사람에 대한 집요한 관 심과 그리움에 있다. 특히 <사랑하는 손)과 <해남 대흥사에서>는 손을 소재로 하여 사랑의 현시성과 존 재의 쓸쓸함을 나타내고 있다. 안식과 평화로 만나지는 손의 의미는 가여운 안식과 평화로 묘사된다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주체가 가지는 존재의 의미는 이미 각기의 객체를 인정하고 합일할 수 없는 두 손의 잠시 만남에 기인되는 고독과 한 계를 가지는 것이다. 손의 의미는 남에게 제일 먼저 내어 줄 수 있는 관계의 시작이다. 악수나 만남의 예의로 손을 마주하는 것이 우리 생활의 보편화된 양상이다. 그의 손은 육체적 부분의 서정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 이면서 사람과 사람 속을 관통하는 사랑의 확인이기도 하다. 그리움 속에서, 자기 자신의 격변기 속에서 이제 사람을 떠나야 하는 원리는 모성 회귀이며 자아회귀이고 원형적 패턴이다. 밖에는 그리움, 자신의 내면 세계에서는 갈등의 양상을 겪으며 결국 깨달은것은 단단한 자기세계의 구축이며 그 누구를 기 다리고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묵상하던 타인이 아닌 자기 본래의 심성과 자기 세계로의 방향전환이 되는 것이다. <下山>에서도 세계로 되돌아 오는 깨달음을 묘사하고 있다. 피나고 상처난 절망과 파괴는 결국 통과제의라는 성숙된 삶을 공유하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서정은 목가적이고 전원적 이며 유유자적하는 자기도취와 환상의 세계에서 벗 어나고 있다. 있다면 이 현실과 시적자아의 적나라한 증언적 내면세계가 있을 뿐이 다. 때문에 그의 시는 매우 정직하며 절실하다 독자의 거리는 바로 그 정직한 전달 에 의하여 조정되는 것이다.
(5) 강렬성 현대인은 복잡하고 다양한 정신적 상황 속에 놓여 있다. 때문에 시문학도 복잡한 인간 정신의 내부를 파헤치는 처절한 진실이 요구된다. 또한 인간의 경험도 이성과 감성을 포괄하는 복잡성으로 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적 변환을 나타내기 위해서 는 시어의 강렬성, 시문장의 과격성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엘리어트에 의하면, 시인의 정신은 무수한 감정·형상·어구를 파악하고 저축하는 수용기이며, 시를 쓸 때에는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전 체를 형성하게 된다. 10)위와 같은 요소들의 결합은 결국 시의 전체적 강렬성을 가 지게 된다. 최승자는 시의 강렬성을 통하여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
10) T. S. Eliot,'Tradition and Individual Talent', "The Sacred Wood"(London: Methuen Co., Ltd), 1920, 1957, pp. 53-54.
으며 그 강렬성을 통한 비극적 인식으로 화해되고 구원되고 있다.
흐르는 물처럼 네 게로 가리. 물에 풀리는 알콜처럼 알콜에 엉기는 니코틴처럼 네 게로 가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 균처럼 삶을 거머잡는 죽음처럼. -<네게로>전문
움직이고 싶어 큰 걸음으로 걷고 싶어 뛰고 싶어 날고 싶어
깨고 싶어 부수고 싶어 울부짖고 싶어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치고 싶어 까무러쳤다 십년 후에 깨어나고 싶어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 전문
예전에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때 시계가 멈춰버렸죠 그래서 이젠 자야 할 시간도 없어졌어요.
때때로 옛일로 잠 안 오는 밤엔 피가 나도록 피가 나도록 이빨을 닦읍시다. 당신은 동에서, 나는 서에서.
-<중년 식 으로) 전 문
(전략) 지랄처럼, 간질 발작처럼 펜지꽃들 미칠미칠 피어나 텅 빈 봄의 전면을 뒤덮고, 오 가벼운 약속의 시간들이며 흐르는 잠과 하품과 구역질의 시간들이여.
만월처럼 現世의 독이 차오르누나.
-<봄의 略史>에서
흐르는 물에서 현대문명사회의 나쁜 요소인 알콜·니코틴·카페인·매독균처럼 네 게로 가겠다는 집요한 메시지는 <네게로>에서 보여지는 강렬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 시대의 문명의 이기와 이 시대의 문명과 쾌락 때문에 독버 섯으로 돋아난 새로운 병균까지 되어 가겠다는 의지는 폭발적인 의지와 집요함으로 나타나고 비명을 지르고 까무러치고 싶은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는 강렬한 그의 시론이다. <중년식으로>에서는 그리움으로 하여 잠이 안 올 때 피가 나도록 이빨을 닦자는 시적화자의 요구가 강렬하다. 이빨을 닦는 작업을 통하여 그리움을 나타내는 특이 한 방법은 최승자의 전혀 새로운 감수성 이 다. "지랄처럼, 간질 발작처럼/펜지꽃들 미칠미칠 피어나"는 <봄의약사>는 낯설게 하기 의 두드러진 표현이다. 11) 낯설게 하기는 전혀 새로운 감각적 표현을 통하여 강렬 한 이미지의 표출을 시도한다.
4. 맺음말
최승자는 전혀 새로운 시인이다. 감수성의 전통성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여성시인 이면서도 그 저변에는 사랑과 그리움의 따뜻한
11)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 용법
물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 죽음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러한 질문에 대하여 죽음 즐기기라는 전혀 역 설적인 방법을 통하여 이 시대의 사랑과 이 시대의 결코 즐겁지 않은 일기를 시로 표현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문학적 기교나 예술지상주의의 낭만성으로 이 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독자적이고 처절한 자기 삶의 증언적 구체화를 통하여 진 실로 맞물려 가는 체험을 보여 준다. 그의 시는 고통과 고독으로 절여져 있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고독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 시대의 삶과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그러한 방법론에 있어 비 극적 파괴성, 부정적 서정성을 강렬하게 나타냈을 뿐이다. 그의 시는 앞으로도 변모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삶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 선이 더욱 따뜻해질 것이라는 미래지향적인 방법론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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