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세 편/ 이창원

[윤행원]

옛촌

전주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전주 토박이 직원의 안내로 유명하다는 막걸리 집을 찾았다. 한 주전자에 막걸리 세 병을 담아 주는데 가격이 만 이천 원이었다. 서울 식당에서는 한 병에 3천 원이니 순간 비싼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주가 공짜로 나온다니 기대해볼 만했다.

정말 그랬다. 처음 식탁 위에 놓이는 안주는 조기탕과 계란탕을 포함하여 무려 열댓 가지가 넘었다. 삶은 오징어와 찐 새우, 꽁치구이, 파전, 멍게, 소라 닮은 조개(삐뚤이라 부른다), 다슬기, 굴, 미역무침 등 여러 가지 해산물과 당근, 오이, 고추 등 채소류, 돼지 머리, 번데기 등 기억도 다 할 수 없는 안주들이 조그만 접시에 담겨 한 상 가득 채워졌는데, 모두 막걸리 안주로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놀란 건 추가로 한 주전자를 더 주문하면 새로운 안주가 다시 나온다는 것이었다. 주문하는 주전자 수가 늘어 갈수록 다시 따라 나오는 안주는 더욱 고급스러운 안주였다.

네 명이 네 주전자를 비우고 나니 삼합과 간장게장, 족발 등이 상 위에 놓였다. 간장게장에 비벼 먹으라고 밥까지 나왔다. 미처 다 먹지 못한 접시 위로 새 접시가 3층으로 쌓여 윗 접시 밀어내고 아래 접시 안주 집어먹기도 하며 정말 유쾌하게 배불리 먹었다. 공짜는 언제든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그때부터 나의 전주 맛집 기행과 더불어 막걸리 집 순례가 시작되었다. 전주 막걸리 집은 삼천동, 경원동, 평화동, 서신동 등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후에 알고 보니 막걸리 촌은 전주시에서 관광객 유치 목적으로 지원하는 사업 중 하나였다.

먼저 집에서 가까운 평화동 막걸리 촌으로 갔었는데 여기는 특이하게 식당 한 편에 계란을 내 키만큼 쌓아 놓고, 그 옆에는 누구나 마음껏 계란 프라이를 해 먹을 수 있도록 식용유와 휴대용 가스렌지를 비치해 놓고 있었다. 계란 프라이 안주를 먹고 싶으면 셀프 서비스로 몇 십 개를 구워 먹어도 아무 소리 안 했다. 정말 인심 좋은 동네였다.

경원동은 해산물 안주가 좋았던 것 같고, 삼천동은 안주 종류의 다양함, 평화동은 마음에 드는 한 가지 안주를 무제한 주는 것 등 집집이 가격과 술맛은 다 같거나 비슷하지만, 어느 곳 어느 집에 가더라도 전주 막걸리 집 특유의 장점들은 한 가지씩 가지고 있었다.

여러 군데를 다녔었지만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은 서신동 ‘옛촌’이었다. 여기는 처음부터 여러 가지 안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첫 주전자에 삼계탕과 족발, 돼지고기 넣은 묵은지 김치찜을 준다. 두 번째 주전자에 파전과 계란 후라이, 고등어 등 제철 생선구이, 세 번째에 삼합과 산 낚지, 네 번째에 전복과 전복죽, 다섯 번째 정도 가면 간장게장과 밥이 나왔던 것 같다.

각각의 안주 한 접시가 서울에선 모두 몇 만원씩 할 만큼 고급스러웠고 그 맛도 모두 혀가 녹을 정도였다. 어느 안주 하나 맛없는 것이 없었으며 그것도 인원이 많으면 양도 더 많이 주었다. 동료들과의 화젯거리 중 하나가 안주를 몇 단계까지 먹었는가였다.

막걸리를 먹는 방법은 병 밑에 가라앉은 하얀 부분까지 다 흔들어 먹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주전자 수를 늘리기 위해 막걸리를 흔들지 않고 위 맑은 술만 주문하여 먹고 있었다. 먹는 양이 적은 나는 술집 여사장에게 맑은 술로 세 병씩 넣지 말고 두 병씩만 넣어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었는데 사장은 웃으면서 그렇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보통 한 식탁에 네댓 명이 앉아 먹지만 우린 7~8명이 앉아 먹은 적도 있었다. 인원이 많으면 당연히 막걸리 주전자를 빨리 비우게 될 것이고 더 고급스러운 안주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여사장도 그냥 웃으며 별말을 안 하는 것이 내가 더 많은 주전자 수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옛촌에 반한 나는 회사에 어떤 좋은 일이 있기만 하면 이 집을 추천하였고, 주위 여러 곳에서 모여드는 직원들의 직급이나 남녀 구분 없이, 오고 싶은 사람들은 다 오라고 하여 모두 함께 어울렸다.

이 집은 어느덧 단골이 되었고 여사장도 첫 주전자부터 배부른 안주보다 내가 좋아하는 그 날의 특별한 생선 안주들을 주었으며, 특히 전복과 전복죽은 첫 주전자 안주로 주었던 적도 있다.

막걸리 집에 가면 내가 강조하는 철칙이 하나 있다. 첫째는 술 먹고 싶은 사람만 올 것이며, 두 번째는 무조건 일 인당 만원을 갹출해서 먹는 것이었다. 만원이면 충분했었다. 직원들도 만족했고 또 나도 부담이 없어 좋았다. 이 전통은 내가 떠난 다음에도 계속되었고 지금도 이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주 막걸리 집을 다녀 온 사람들이 놀라는 것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먼저 많은 공짜 안주에 놀라고, 맛에 놀라고, 마지막으로 터무니없이 싼 술값에 놀란다고 한다. 나는 술집 분위기에도 놀랐다.

엊그제 옛 직장 동료로부터 막걸리 한잔 하러 오라는 연락을 또 받았다. 전주를 떠난 후 옛촌을 못 잊어 해마다 한 두 번씩 내려갔었지만 퇴직 후에는 그 횟수가 뜸해졌었다. 옛 동료들은 가끔 막걸리 집에서 술 먹다가 내 생각이 난다며 전화기 한 대를 붙잡고 교대로 돌아가며 술집 분위기를 전하곤 한다.

내가 전주를 떠날 때 직원들이 지어 준 아호가 '옛촌'과 '청목' 이었다. 옛촌의 여사장은 잘 있을까? 올 여름엔 '옛촌' 맛을 봤으면 좋겠다.

옛날 여름

내 고향 경남 합천은 남에서 동으로 커다란 황강이 흐르고 있다. 옛날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를 가르는 국경이었기도 한 넓은 강이다.

이 강의 백사장은 은빛 모래사장이 넓고 길게 펼쳐져 있는데 어른, 아이 모두에게 즐거운 놀이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강에서 놀다 지치면 모래성을 쌓았고, 강가의 버드나무 숲에서 매미를 잡으면서 놀았다. 어른들은 색색의 양산 아래서 얼굴만 햇빛을 가리고 모래찜질을 했다. 또 밤이 되면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러 삼삼오오 모여들었고, 서로가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져 목욕을 하곤 했었던 기억이 난다. 여기저기서 목욕하는 처녀들을 유혹하는 총각들의 휘파람 소리가 요란한 밤이기도 했다.

나는 어릴 때 이곳에서 자주 놀았다. 여름이면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서 헤엄치기, 피라미 잡기로 한여름을 보냈다. 여름방학이면 뒷집 친구를 따라 소 먹이러 가는데 소들끼리 산으로 보내놓고 우린 강물에서 놀기가 바빴다.

당시 우리학교 선생님 한 분이 끈을 맨 대바구니를 목에 걸고 강물을 따라 내려가며 피라미 낚시를 하던 모습은 지금도 아련하다. 어린 우리는 고기몰이를 하고 조금 더 큰 애들은 커다란 막대기를 들고 기다리다 몰려 온 고기 위를 내리쳐서 기절한 고기를 잡기도 했다. 또 커다란 돌멩이를 물속에 던져 놓고 셋을 헤아린 다음 일제히 물속으로 다이빙하여 누가 먼저 돌을 찾아오는지 내기도 했었다.

아버지는 투망으로 고기 잡기를 좋아하셨는데 나는 대나무로 만든 커다란 살림망을 들고 따라다녔다. 그러다 깊은 물 속 나뭇가지나 커다란 돌 틈 사이에 투망이 걸리면 물속 잠수질로 걸린 투망을 걷어 내곤 했다. 엄마는 잡은 고기로 추어탕, 아니 잡어탕을 끓이셨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가끔 고향에 가면 식당에서 파는 추어탕을 맛보는데 엄마가 끓여 주신 그 맛이 나지를 않는다.

직장 발령으로 경북 영천에서 근무할 때였다. 영천시 인근에 있는 강에 피라미나 은어 잡는 사람들이 가끔 보였다. 옛 생각도 나고 아이들과 기나 긴 여름날 오후를 즐겁게 보내기 위해 투망을 샀다. 옛날 아버지가 투망 던지시던 모습을 생각하고 던져 봤지만 아버지처럼 동그랗게 펴지질 않았다. 옛날 아버지의 연습 방법이 떠올라 빈 테니스장에서 열심히 연습한 결과 어느 정도 펴지기에 아이들을 데리고 강에 가서 피라미를 잡았다.

아이들은 처음 하는 놀이에 마냥 즐거워했고, 고기가 잡히면 비명을 지르며 잡힌 고기들을 살림망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문제는 요리였다. 튀김을 했었는데 튀김이 물렁물렁하고 뼈가 억세어 맛이 없었다. 그 때 큰딸이 한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고기는 먹는 맛이 아니라 잡는 맛이야, 그치 아빠?”

어쩐지 아버지의 체면이 깎인 것 같아 미안해하고 있는데 저 멀리 모래사장에서 피라미 튀김을 파는 천막이 보였다. 우린 그 쪽으로 가서 주인아주머니에게 피라미튀김을 사 먹으며 튀기는 방법을 배웠다. 튀김가루에 멸치 다싯물, 후추, 소금을 넣어 두 번 튀기라고 가르쳐 주었다. 실제 아주머니가 하는 방법을 옆에서 지켜보며 배우고 그대로 따라 했더니 튀김이 아니라 바삭바삭 고소한 과자와 같았다.

그 후 해마다 여름이면 우리 가족들은 강이나 계곡을 찾아 투망 던지는 즐거움으로 휴가를 보내곤 했다. 직장 동료들과 때론 친척들이나 친구들과도 천렵을 가곤 했었는데 고기를 잡으면 튀김은 으레 내가 담당을 하곤 했다.

튀김이나 조림, 매운탕을 맛보려면 준비물이 많다. 먼저 피라미 낚시를 챙겨야 하는데 낚싯바늘 위에 까만 털실 같은 것이 달린 것으로 대여섯 틀을 준비해야 한다. 6~7m쯤 되는 긴 낚싯줄 하나에 바늘은 20개가 달려 있는데 양쪽 끝에 고추 지줏대를 세우고 줄을 묶은 다음 팽팽히 당겨 피라미가 다니는 길목을 찾아서 흐르는 물 위에서 낚싯바늘이 춤을 추게 설치하면 된다.

이 낚시의 묘미는 조림용이 될 만큼 제법 큰 고기들이 낚인다는 것과 밤새 그대로 설치해 두었다가 이튿날 새벽에 가보면 바늘 하나하나마다 매달린 고기가 은빛 배를 반짝이며 춤을 추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어항으로 고기를 잡는 것이다. 줄을 연결한 어항 속에 떡밥을 비벼 넣고 깊은 물 속에 가라앉혀 돌로 눌러 고정한 다음 줄 끝을 커다란 돌에 묶어 놓으면 된다. 이 고기들은 모두 매운탕으로 우리들의 입맛을 즐겁게 했다.

마지막으로 튀김용 피라미를 낚는 견지낚시는 지렁이와 떡밥을 준비해야 한다. 강이나 계곡에서 며칠 놀다 보면 별다른 놀이거리가 없어 지루하기 마련인데 견지낚시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고 재미도 있다. 튀김은 견지낚시로 건져 올리는 새끼손가락 정도의 크기가 제일 연하고 맛이 있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이 계속되면 옛날여름이 생각난다. 그 때의 즐거운 추억과 그리움이 가슴에 아련하게 밀려오는 게으른 한낮이다.

군침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다. 집에서 쉬고 있을 큰 사위를 불러 양재천으로 걷기운동 하러 나갔다. 맑은 하늘에 햇볕은 좋았지만, 찬바람이 매섭다. 모자와 장갑, 그리고 옷을 단단히 입었는지라 코끝은 시리지만 빠르게 걸으니 금방 몸이 더워진다.

강에는 주먹만 한 예닐곱 마리의 새끼오리들이 한가로이 놀다가 사람이 다가가니 풀숲 속으로 숨어 버린다. 한 무리의 비둘기들이 길에 앉아 먹이를 주워 먹고 있다. 요즘 비둘기들은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은커녕 먹이를 얻어먹기 위해서인지 날아가지도 않는다. 강가의 갈대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한 떼의 참새들이 후루룩 날아간다.

어릴 때 시골에서 아버지와 참새 잡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취미로 사냥을 자주 다니셨는데 호랑이를 잡은 적도 있었고, 노루, 산돼지, 토끼, 꿩, 오리 등 종류도 다양했다. 큰 형, 작은 형들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사냥을 참 많이도 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엄마는 반찬이 없으면 새벽 잠자는 아들 중 아무나 깨워 뒷산 가서 꿩 한 마리 잡아 오라고 엽총을 들려 내 보내기도 하셨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던 가을 늦은 오후면 아버지는 아들들을 데리고 영창리 대나무 숲으로 참새 잡으러 자주 가곤 하셨다. 저녁 해 질 무렵, 들판에서 벼 이삭을 먹던 참새들이 모두 대나무 숲으로 모여들면 대나무밭은 그야말로 참새들의 지저귐에 귀가 따가웠고 비둘기도 질세라 같은 숲에 잠자리를 찾아 들었다. 아버지가 대나무 숲 근처에서 엽총으로 숲을 향하여 한 방 쏘면 참새들이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실탄에 맞아 떨어지는 놈, 놀라서 떨어지는 놈, 옆 친구가 떨어지니 덩달아 같이 떨어지는 놈 등 비 오듯 떨어지는 참새들을 구경나온 동네 아이들과 같이 얼른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망태기에 주워 담았다. 조금 늦어지면 정신 차린 참새들이 다시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동작이 빨라야 했다.

저녁엔 으레 숯불구이를 해 먹었었는데 껍질을 벗기고 굵은 소금을 뿌려 머리까지 오도독 씹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발갛게 드러난 가슴살은 또 어떤가. 뼈도 연해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큰 형네로 설 쇠러 가곤 했었는데 동생의 산탄총을 가지고 같이 비둘기 사냥을 간 적이 있었다. 요즘 같은 겨울철이면 산비둘기들이 들판으로 내려와 보리밭을 파헤치던지 추수 끝난 논에서 벼 이삭을 주워 먹든지 한다. 또 전깃줄에 앉아 저물어 가는 겨울 저녁 해를 보며 상념에 잠겨 있는 놈들을 노린 것이다.

동생은 요즘 시골 인심이 워낙 야박해서 총을 들고 사냥을 하면 금방 지서에 신고해 버린다며 동네 안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말고 주민들의 눈에도 띄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천천히 농로를 운전하다가 보리밭에서 먹이를 주워 먹고 있는 비둘기를 보면 차 안에서 총을 쏘곤 했다. 또 전깃줄에 앉아 노는 비둘기 보고도 한 방 쏘고, 너무 멀면 밭두렁에 몸을 숨기고 살살 기어가 얼른 한 방 쏘고 주워 오곤 했다.

참새만큼 오도독 씹는 맛은 없지만, 비둘기구이도 별미이다. 참새든 비둘기든 매끈하게 벗겨진 가슴살 위에 굵은 소금을 살살 뿌릴 때, 숯불에 떨어진 소금 툭툭 터지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옛날 포장마차에서는 참새구이를 참 많이도 팔았었는데 어느새 메추리구이로 바뀌더니 요즘은 그마저도 구경할 수가 없다.

합농시절

합농살이 몇 해던가

똥통을 헤어보니

합농 온 지 삼 년이라

삼천 통이 넘는구나

합농은 내가 졸업한 경남 합천에 있던 '합천 농업고등학교'를 줄인 말이다. 이 노래는 흘러간 노래 중 하나인 ‘타향살이’ 곡에 가사를 약간 바꿔 불렀던 노래로 농고 선배들로부터 구전으로 전해 내려져 오던 우리 학교 전통 노래였다.

나 또한 친구들이랑 가끔 불렀던 노래이기도 하다. 지금은 당시 몇 번을 퍼 날랐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화장실에 넘쳐 나던 분뇨를 학생들이 농장으로 퍼 나르면서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럴 땐 정말 슬퍼지기도 하여 어린 나이들임에도 장래를 보장할 수 없는 시골 농업고등학교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서로 신세 한탄을 하기도 했다.

부모님들의 교육열과 함께 집안 형편이 좀 괜찮았던 친구들은 초등학교 졸업 후 이미 도시로 떠나 버렸고, 중학교 다닐 때나 졸업 후에도 많은 친구들이 대도시로 떠났다. 남은 우리들은 그저 무사히 고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하는 것이 학교 다니는 목표의 전부였다.

실제로 농고 1학년을 마치자 졸업 후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고 가끔 말하던 친구가 부산 한전 연수원으로 떠났다. 그 친구는 입버릇처럼 ‘지금이라도 졸업장만 주면 바로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하곤 했었기에 우린 그 친구의 용기를 부러워하며 밀주 파는 집에서 막걸리 한 말을 받아 와 넷이서 밤을 새워 이별주를 마셨다.

나 또한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까지 입학은 했었지만, 공부는 고사하고, 중학교 때부터 매달 치르는 중간고사 때마다 등록금을 가져와야 시험 치게 해 줄 수 있다는 선생님의 독촉에 시험도 못 치고 집으로 쫓겨 오곤 했었기에, 차라리 외지로 나가 기술이나 배우는 게 천 번 만 번 옳다는 그 친구에게 우리 모두 경의를 표하며 나중에 잘되면 한자리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작은 형의 뒤를 이어 연식 정구선수가 되기 위해 정구부에 들었다. 그러나 두 달쯤 가방에 정구 라켓을 끼우고 무게를 잡으며 여학생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던 나는 학교 ‘연구생’이 되면 등록금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조건에 반해 화훼와 채소를 담당하는 연구생이 되었다.

화훼원예와 채소원예를 맡은 학생은 나랑 두 명이었는데 우린 새벽에 등교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일요일도 없었고 심지어 방학 때도 학교 농장에서 숙식하며 일을 했다.

우리가 맡은 온실은 약 20여 평의 유리 온실이었는데 그 안에 많은 꽃을 키우고 있었기에 아침 일찍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야 하고 수업 시작 전에 물을 주었다. 오후에는 분갈이와 비료 주기, 번식을 위한 꺾꽂이 등을 했다. 또 매주 두 번씩은 오후에 리어카에 꽃 화분을 가득 실어 당시 읍내 각 다방에 잘 피운 꽃들을 배달하고 시들어 가는 화분을 다시 학교로 가져와 살리는 일을 했다. 그런 날은 밤이 깜깜해서야 집에 돌아가곤 했는데, 같은 연구생 친구와 둘이 힘들게 화분 실은 리어카를 밀고 끌며 밤늦게 학교로 돌아가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이 다른 친구들에게 들키면 서글퍼지기도 했다.

인근 야산을 돌아다니며 찔레꽃을 뿌리째 캐와 살린 뒤 뿌리 위 약 10~15cm 지점을 잘라 장미를 접목했고, 라일락 등 괜찮은 꽃나무 가지를 약 15~20cm 정도 잘라 모래판 위에 삽목을 했으며, 베고니아 잎을 가위로 잘라 옆삽을 하기도 했다. 삽목 중에 선인장 삽목이 제일 쉬웠다. 선인장을 자르던지 새끼를 떼어 내어 일주일 정도 그늘에서 말린 후 모래판에 꽂아 놓으면 거의 다 잘 살았던 기억이 난다.

화훼원예 시험 시간에 ‘꽃 이름 백 가지 쓰기’가 출제되었는데 나는 온실 입구 오른쪽에 있는 꽃 이름부터 차례로 써 나가니 백 가지가 훨씬 넘었던 기억도 있다.

여름 방학 때, 농장에서 숙식하며 선생님과 함께 김장용 배추씨와 무씨 뿌리던 일, 목줄을 메어 둔 염소가 돼지우리 쪽으로 담을 넘다가 발이 땅에 닿지를 않아 목이 졸려 죽은 일, 한밤중 소 새끼 낳을 때 뒤에서 구경만 하던 일, 돼지새끼 낳을 때 낳은 새끼를 옆으로 들어내야 어미돼지 엉덩이에 눌려 죽지 않는데 겁이 나 들어가지도 못해 당황하던 일, 여름 모기에 잠 못 들어 농장 숙소 앞 평상에서 밤새 모깃불을 피우던 일들이 새삼스럽다.

당시 농장에는 농장을 돌보는 전문 일꾼이 한 분 계셨는데 키가 커다란 그분을 우린 ‘백 상’이라고 불렀었다. 백 상은 농장 한복판에 있는 집에서 살며 주로 돼지나 소, 염소 먹이 주는 일과 과수원을 지키며 논을 돌보는 일을 했었는데 능숙한 솜씨로 어린 연구생들을 참 많이 도와주었다.

송아지 낳을 때나 돼지 새끼 낳을 때는 주로 백 상이 다 처리했고 우리는 잔심부름이나 하며 뒤에서 구경만 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가끔 백 상의 눈을 피해 과수원의 사과나 배를 따 먹기도 하고 수박 서리도 하곤 했다.

“백 상, 그 땐 정말 미안했소.”

그때를 생각하면 힘든 음지생활이었지만 참 많은 것을 배웠던 좋은 경험이었다. 지금 사회생활을 하면서 삽목이나 꽃 키우고 나무 키우는 일은 다른 보통 사람보다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살다 보면 항상 어렵고 하기 싫은 일 등 음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마음먹기에 따라 오히려 음지가 양지가 되는 일이 더 많으니 나의 합농시절도 그만하면 괜찮았던 같다.

[윤행원]

이창원 선생님, 수고 많았습니다.
초벌구이삼아 약간 수정을 했습니다.
그 이상은 동인지 편집위원님들에게 맡기면 어떨까요.

[이창원]

예^^ 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편집위원님들께 맡길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