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새 언약 안에서 온전한 찬양을 받으심
2017년1월15일(일)
지난번에 “예수로 말미암은 영원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를 말씀했다. 조금 더 말씀하고자 한다. 성경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21~22절이다.
(히13:20,21.)
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찬양을 받으시려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또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는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레 되는 날에 쉬셨다고 했고 그날을 복 주어 거룩하게 했다고 했다.
창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했다. “그 앞에 즐거움으로~”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찬양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고 또 우리를 나와 여러분을 창조하신 것은 온전한 찬양을 받으시려고 그래서 지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데 그 모든 것들로서는 온전치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찬양이 있어야 온전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예를 들어 배를 만들었는데 키가 없다면 배를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운항을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만물을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지어놓으셨어도 그것을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온전한 창조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을 온전케 해야 한다. 그것을 온전하게 찬양하도록 그렇게 해야 된다는 말이다. 사람이 아니면 그것을 온전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만들기는 다 만들어 놓았는데 사람이 없으면 온전하게 안 된다는 말이다. 오케스트라를 보면 여러 종류의 악기가 있다. 수천만원짜리 악기도 있지만 아무리 좋은 악기가 있더라도 그것을 연주할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악기로서는 완전하지만 소리가 나고 오케스트라가 되어야 가치가 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온전하다는 뜻이다. 불어서 좋은 소리가 나게 하는 것, 이것이 온전하다는 뜻이다. 사람의 역할이 그런 역할이다.
그래서 “모든 일을 마치고 이레 되는 날에 쉬셨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을 복주어서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말은 참~~ 복된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다가 말고 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일을 완성하고 쉬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갖추어주시고 쉬셨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도 이 일을 위해서는 온전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온전하게 지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쉴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 마무리가 안 되었으니까 어떻게 쉬겠냐는 것이다.
배를 건조하는 사람이 키가 안 되었는데 어떻게 일을 끝냈다고 하겠는가. 그러니까 사람은 큰 배의 키와 마찬가지다. 아무리 배가 좋아도 키가 안 좋으면 갈 수 없다.
“쉬셨다.”는 것은 지으신 모든 것이 그의 찬양의 제물이 되기에 온전하게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쉬셨다.”는 말은 안식이라는 말인데 지으신 모든 것이, 특별히 사람이 찬양의 제물이 되기에 온전하게 되었다는 이런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쉬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말이다.
그는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분이지 시작만 해 놓고 마는 분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 인생을 여기에서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은 정말 귀중하구나.’하게 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쁜 것도 많지만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보면 너무 너무 귀중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일 이 목적을 버린다면 우리 스스로를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다 온전한 것이 아니다. 아~~ 사람처럼 문제가 많은 것도 없고 또 사람처럼 악한 것도 없다. 자기 동족을 무기를 가지고 죽이는 짐승이 없다. 그런데 사람만 그렇게 한다. 그러니까 악하기로 하면 인간이 제일 악하다. 최고로 악한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까 내가 저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저런 인간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비참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인간을 보면 너무 너무 귀중하고 존귀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면 내 인생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른다. 내가 하나님을 버리면 나를 버리는 것이다.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버리면 귀중한 자기를 어디 가서도 찾을 데가 없다.
부모가 왜 중요한가?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버려도 부모는 나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가 귀중한 것이다. 부모 안에 가야 자식이 가치가 있지 부모 밖에서는 가치가 자꾸 떨어진다. 회사에 가면 나는 기능밖에 되지 않는다. 일을 잘하냐 못하냐만 보지 다른 것은 보지 않는다. 일을 잘하면 쓰고 일을 못하면 안 쓰는 곳이 회사다. 사회가 그런 곳이다.
그러니까 내 인생이 어디에 가야 정말 사람대우를 받겠냐는 것이다. 사람대우를 받으려면 부모에게 가야한다. 그래서 부모가 중요하다. 남들은 다 욕하는데 부모만은 속으로 욕을 하지 않는다. “아~~ 저놈 새끼” 하면서 욕을 하면 옆에 사람이 진짜로 그런가 보다 싶어서 동조해서 “그래 그래 저놈 새끼 나쁜 놈의 새끼야.” 이렇게 하면 부모 속은 그런 것이 아니고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한 말인데 옆에 있는 사람은 진짜로 미워해서 한 말이다. 그러니까 속으로 얼마나 안 좋겠나. ‘너는 너 자식한테 그렇게 하지.’이렇게 생각한다. 부모 밖에는 진짜로 나를 귀중하게 생각할 분이 없다. 심지어는 남편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다. 부부간은 필요할 때는 너무너무 중요하게 생각한다.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다 버릴 수 있다. 그것이 부부간이다. 그런데 부모는 아무리 필요하지 않아도 버릴 수가 없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부모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버리면 내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둥이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하지만 하나님이 없으면 자기는 뭔가?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를 사람이라고 찾을 사람도 존재도 없다.
하나님은 시작하고 완성하신 분이다. 그런 속에 우리 인생이 귀중한지! 우리가 어떻게 생겼기 때문에 귀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목적 때문에 우리가 귀중한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 귀중하다면 늘 내가 불안하다. 내가 변경되니까. 시험을 봐서 선생님이 나를 귀중하게 여기는 것과 부모가 나를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다르다. 선생님이 나를 귀중하게 여겨주면 참 좋다. 그런데 선생님은 항상 시험성적을 본다. 그러면 선생님이 귀중하게 여겨주면 여겨줄수록 늘 불안하다.다음에 성적을 올리지 못하면 어쩌겠는가? 그래서 항상 불안하다. 그런데 부모들도 자식들에게 그런 생각을 가지고 대해버리면 아이들이 죽는다. 학교는 그렇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부모는 그렇게 대하지 않아야 된다. 그래야 아이들이 산다.0점을 받아왔더라도 그것도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자랑스럽게 내놓으면 0앞에 1을 붙이면 10점이고 0자를 더 붙이면 100점이야 하고 들어오는 아들이 있으면 그것은 100점이다. 그런 관계가 된다면 아이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부모들까지도 선생님처럼 대해버리면 아이들이 죽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뭐가 하나님이 필요해? 내가 벌어서 내가 밥 먹고 사는데 하나님이 왜 필요해? 밥이야 자기가 벌어서 먹지만 자기를 사람되게 할 분은, 사람으로 여겨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사람을 지으시고 쉬셨다는 이것보다 복된 말이 없다. 그래서 이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너를 귀중하게 생각하는데 네가 이것을 거부하고 아니라고 나가면 너는 죽는다는 것이다. 누가 죽여도 아무도 책임지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죽이기야 하겠는가. 그런데 나가면 누가 알아주는가? 아무도 알아줄 사람이 없다.
나는 그런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이 너무나 복이 된다. 옛날에도 복이 되었지만 지금은 더 복이 된다. 그런 분을 알면 알수록 더 복이 된다. 옛날에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못하고서도 감사했다. 그러니까 어떤 다른 일이 오면 감사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감사가 너무 약하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없으면 내 인생이 아무것도 없구나하고 생각하니까 감사하지 않을 수가 도저히 없다. 나를 위해서도 감사를 해야 된다. 내가 살기 위해서도 감사를 해야 되고, 내 가치를 인정하기 위해서도 감사를 해야 된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 누가 죽으라고 했는가? 살라고 했지.
그는 먼저 모든 것을 지으시고 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게 하자.” 하였는데 이 뜻은 사람을 통하여 자신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분배하는 것이다.
그는 먼저 모든 것을 지으시고 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게 하자.” 하였는데 이 뜻은 사람을 통하여 자신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겠다는 뜻이다. 이 다스리는 말은 임금이 백성을 다스린다는 그런 다스림이 아니고, 총과 칼을 다스리는 그런 통치가 아니고, 하나님의 복을 하나님의 어떠함을 사람에게 복이 될 하나님의 어떠함을 분배한다는 뜻이다. <오이코노미아>라는 말인데 분배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나눠줄 자가 있어야 분배가 된다. 스스로는 줄 수가 없다. 왜?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에게 와서 줄 수가 없다. 중간에 나눠줄 사람이 필요하다.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심어주고 사람은 그것을 받아서 인격으로 배양하여 만물에게 적합하도록 분배하는 것이다. 마치 흙이 씨를 받아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만들고 그것들을 주인의 가솔들에게 나누어 먹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심어주고, 그것을 받은 사람이 자기 인격 안에서 배양해야 된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지식으로 바꾼다거나 교리로 바꾼다거나 이런 식으로 바꾸어서 사람들에게 분배하면 하나님은 교리적인 하나님이 된다. 지식의 하나님이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인격으로 배양되어야 된다. 인격이 뭐라고 했는가? 사람의 위치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 위치로 배양해야 된다. 그러면 만물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양이 된다. 교리로 배양을 하면 못 받아들일 사람이 생긴다. 제도로 배양을 해도 못 받아들일 사람이 또 생긴다. 무엇으로 해도 못 받아들일 사람이 생긴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으로 배양을 하면 사람뿐만 아니라 만물도 다 받아들일 수가 있다.
인격으로 배양한 것만이 참된 양식이 된다. 심지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도 무엇으로 소화시켜 나오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이 성경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모른다. 교회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성경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 그것이 성경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성경은 나눠 먹인 사람 때문에 그런 것이다. 심지어는 사람을 장작더미 위에 앉혀 태워 죽이면서까지도 성경 말씀을 가지고 했다. 그러니 이 성경 말씀이 사람 죽이는데 사용되면 죽이는 말이 되고 살리는데 사용되면 살리는 말이 되는 것이다. 사용하기에 따라서이다. 칼이라는 것이 그렇다. 전쟁터에 나가면 적과 싸우는 무기가 되는 것이고 주방에서는 음식하는 칼이 되는 것이다. 똑같다.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누가 이것을 분배하느냐? 사람이 분배한다. 사람이 분배하려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그 자리에서 분배해야 한다. 그리고 배양을 해야 한다.
우리는 그 배양하고 소화시키는 그 작용을 통해서 생명이 살아가고 있다. 오늘 우리가 아침에 밥을 먹은 것도 뱃속에서 미생물들이 먹어서 다 소화를 시킨다고 한다. 좀 징그럽기는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그 미생물들 구더기 같은 것들이 먹어서 소화를 시켜서 내 놓은 똥을 우리가 먹고 사는 것이다. 지렁이가 싸놓은 똥을 우리가 먹고 산다. 왜? 소화를 시켜놓았기 때문이다. 요즘에 아토피가 많은데 이런 말이 있더라. 아토피가 왜 생겼느냐는 연구한 결과를 써놓은 것을 보니까 옛날에는 우리 뱃속에 회충이 있었다. 쉽게 말하면 지렁이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그래서 생겼다고 한다. 그러니까 완전하게 고치려면 지렁이를 몇 마리 키워야 한다. 그러면 아토피가 없다고 한다. 신기하지 않은. 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지렁이가 배양해 놓은 것을 먹어야 아토피가 안 생기는 가보다. 지렁이가 자기가 먹어서 소화해서 내 놓은 물질을 먹어야 하는 것 같다.
만민이 다 하나님을 은혜로 받아들이려면 인격으로 배양을 해야 한다. 예수님이 예수님의 인격으로 배양을 했을 때는 은혜가 되었다. 은혜. 모세가 자기의 인격으로 배양을 했을 때는 율법이 되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퓨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하는 말이 그 말이다. 같은 하나님 말씀이고 같은 하나님 뜻인데 두 분다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고 뜻만 본 것이다. 뜻을 가지고 왔다. 그 뜻을 모세라는 기계를 통해 배양을 하니까 율법이 나왔고 예수라는 기계를 통해서 배양을 하니까 은혜가 나왔다. 그러니까 분배하는 사람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분배하는 사람에 달려있다.
마치 흙을 보면 흙이 씨를 받는다. 그러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만든다. 흙에서 그 씨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열매로 만들어 낸다. 씨는 독이 있는 것도 있다. 그런데 이것을 잘 배양해 내게 되면 좋은 것이 된다. 그래서 열매를 배양해서 주인의 가솔들에게 나눠준다.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흙은 아주 쓸모가 없는 것이지만,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흙을 그냥 먹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흙이 씨를 갖다가 배양을 해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열매가 되는 것이다. 인간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데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서 인격으로만 배양을 하면 사람을 살리는 약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신기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에게 보이신 것은 하나님은 만물에게 자신의 어떠함을 만물에게 분배하려고 사람을 지으시고 창조를 완성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본 것은 하나님 자신의 어떠함을 만물에게 분배하려고 사람을 지었다. 사람에게서 분배되어야만 하나님의 어떠함이 가장 완전하게, 가장 온전하게 분배가 되는구나. 이렇게 알아졌다. 그러니까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참기름을 짜려면 참기름 틀이 있어야 한다. 기름틀이 있어야 한다. 설탕을 만들려면 원당을 가져다가 그 기계에 넣어야만 설탕이 된다. 그 기계에 넣지 않으면 엿처럼 끈적 거리기만 하지 설탕이 되지 않는다. 요즘에는 가랑 엿도 먹어보니까 손으로 만들지 않고 기계로 만드는 것 같다. 그러니까 기계로 만든 것과 손으로 만든 것이 모양이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분배한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하여금 이러 이렇게 하게 하자.”
그러므로 하나님 찬양은 그를 분배하는 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왕은 은혜의 창고를 열고 관리들은 그것을 백성에게 적합하게 분배하면 백성들은 왕에게 감사의 찬양을 들릴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창조는 하나님의 뜻은 그 분배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모세를 통해서 분배된 하나님인 여호와는 무서운 하나님이다. 자비롭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그런 하나님이었다. 네가 이것을 행하면 살고 이것을 행하면 죽을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었다. 오른 손에 축복을 가지고 있고 왼손에는 저주를 가지고 있는 그런 하나님이었다. 그분을 통해서 나온 열매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통해서 나온 열매는 그것이 아니었다. 죽을 사람도 살려내는 열매였다. 죽은 자도 살려내는 열매였다.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를 살려내는 열매였다. 그러니까 결국 사람에 달려있다. 결국 하나님의 모든 것이 온전하게 되려면 사람에게 달려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나님의 길을 막을 수도 있고 열수도 있다. 다윗의 열쇠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인생을 아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하나님을 무시하면 하나님이 나를 무시한다는 말이다. 네가 하나님을 무시하면 하나님이 너를 버릴 것이다. 왜 그런가? 내가 하나님을 무시하면 내가 저절로 무시가 돼버린다. 저절로 내 스스로가 무시되어 버린다. 내가 스스로 무시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알아서 해라. 존귀함을 받고 싶거든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고 그냥 쓰레기가 되고 싶거든 하나님을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이러면 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창세기 1장1절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 하였는데 2절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배회하였다.”고 하였다. 왜 땅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늘의 관리자였던 천사들의 일부가 거역했기 때문이다. 관리자 문제였다는 것이다.
왕은 은혜의 창고를 열고 그 백성에게 나눠 주라고 했다. 그런데 그 밑에 신하들이 가서 다 띵가 먹고 쌀 주라고 했는데 보리 주고 이러면 임금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 임금은 맨날 보리만 준다고 된다. 분배하는데 달렸다.
옛날에 군대에 그런 말이 있다. 오늘은 특식이다. 소고기 국이다 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요즘에는 군대에도 그렇지 않은데 옛날에는 배고픈 시절이니 소고기 국이라고 하니 얼마나 목이 마르게 기다리고 있겠는가. 그런데 말갛게 기름만 둥둥 떠 있고 고기는 없다. 고기는 다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소가 장화를 신고 지나갔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 군대에서 하도 배가 고파서 그때 당시 군대에서는 소원이 실컷 자 봤으면 실컷 먹어 봤으면 그 두 가지가 소원이라고 한다. 우리 때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요즘에는 먹고 싶은 데로 먹으니까 그런 것이 없다. 그러니까 그것도 소고기가 부대원 백명 분이 나왔는데 오면서 다 잘라 먹고 사병들에게는 갈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름만 몇 덩어리 끓여서 준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만유를 사랑하고 만유에게 자비를 베풀려고 다 준비를 해 놓았는데 분배할 자가 중간에 다 띵가 먹어버리면 꼭 그 모양이 된다.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이 앉을 자리가 없더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때는 천사들이 관리자들이었다. 중간관리자들이 아까 말한 대로 다 떼어먹어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이 오니까 앉을 자리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고 말았다. 관리자에 달렸다. 회사의 사장들은 자기 부하들이 어떻게 하면 일을 잘할 것인가, 정직하게 할 것인가, 떼먹지 않을 것인가, 맨날 그런 것만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리 사람을 지을 때 그것밖에는 못하도록 지어놓았다. 딱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배양해서 분배하기에 딱 맞도록 만들어놓았다. 여기에 들어가면 사람이 완전하다. 그런데 이것을 벗어나서 다른 것을 하면 전부다 불완전하다. 뭔지 모르게 안 된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잘못 만들어놓았는가?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고 만다. 자기가 지금 잘못되어 있는 줄은 모르고 하나님이 잘못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잘못 창조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다.
중간 관리자가 잘못되어서다. 중간 관리자가 좋은 것을 떼먹어서 그렇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안 먹을 것을 먹였다. 그래서 사람이 그렇게 돼버린 것이다. 천사들의 일부가 거역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 사탄, 마귀라고 한다. 천사 중에 거역한 일부를 보고 마귀, 사탄이라고 한다. 관리자 문제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일을 맡기려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일을 맡기려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관리자를 도저히 믿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종류의 존재를 만들어서 자기 관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천사와 사람은 종류가 다르다. 천사는 영물이다. 영물이 아닌 존재가 사람이다. 사람이 영물이 되려고 생각하면 마귀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어찌하든지 영물이 되려고 애를 쓴다.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보려고 영물이 되려고 애를 쓴다. 특별히 종교에서 그렇고 동양사상에 그런 것이 많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물에게 질렸으니까 영물이 거역을 했으니까 영물이 아닌 인간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영물이 되려고 하면 속는 것이다. 신령해지려고 생각하거나 영적인 것이 되려고 생각한다. 요즘 영성훈련이라는 것이 많다.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영, 영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유가 있다. 왜? 영으로 만든 천사에게 당했으니까. 영물인 그 천사에게 당했다. 그러니까 영이 아닌 다른 존재를 만들어야 한다. 또 똑같은 것을 만들면 또 당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미련한 일을 하시겠는가.
이것이 아주 중요한 말이니까 깊이 새겨두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영이라는 그 존재들에게 천사들에게 자기의 창조가 훼손되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지을 때는 사람을 지었다. 사탄이 되고 싶거든 마귀가 되고 싶거든 영물이 되려고 그쪽으로 가고, 하나님의 분배자가 되려면 사람이 되어야 된다.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어떠함을 분배할 수가 있다. 사람만이. 천사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아담은 원래 이 목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자기 위치를 이탈하여 딴 길로 갔기 때문에 그 이후 하나님은 온전한 찬양을 받지 못하신 것이다. 아담은 천사-관리들이 위치를 이탈하여 중간에서 혼란을 일으킨 것과 같은 노선으로 들어간 것이다.
아담은 원래 이 목적으로 지음을 받았다. 천사로 안 되는 것을 하게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떠함을 분배하기 위해서 지음 받았다. 그런데 또 우리가 영물이 되려고 생각하면 되겠는가? 우리가 또 영물이 되려고 하면 우리도 또 똑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아담이 그래서 결국은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네가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은 너는 영물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 위치를 이탈하여 딴 길로 갔다. 그 이후 하나님은 온전한 찬양을 받지 못했다. 사람이 제 위치를 떠나 가버렸으니까 껍데기는 사람인데 속은 딴 생각을 갖고 있는 놈이니까 거기서 온전한 찬양이 나오겠는가? 온전한 찬양이 나오지 못한다.
아담은 천사라는 관리자들, 이것들을 따라서 위치를 이탈한 그 천사, 사탄, 이 길을 따라 갔다. 그들이 하나님이 창조한 땅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으신 땅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올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대 혼란이 벌어지게 되어 이 사람은 이렇다 하고 저 사람은 저렇다 하고 하나님이 왜 이러냐, 하나님이 왜 저러냐는 이런 질문이 수없이 많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런 일이 생길 때는 하나님을 원망한다. 아프리카에서는 왜 굶어죽고 미국에서는 왜 배 터져 죽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모르니까 대답을 못한다. 하나님을 믿어서 그렇게 묻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묻는다. 이것이 혼란이다.
아담이 이탈한 후 나타난 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여 피를 흘린 것이었다. 그때 죽임을 당한 아벨은 예수 오실 때까지 제단 아래서 자신의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다고 했다(계6:10참).
계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아담이 이탈한 후에 나타난 것이 무엇이냐? 아담의 역사를 아주 짧게 썼는데 핵심을 써 놨다. 가인을 낳고 아벨을 낳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 나무 뒤에 숨었다는 것하고 하와와 동침하고 하와와 둘이 연합해서 하나님을 분배하라고 했는데 둘이 동참해서 낳은 것이 가인과 아벨이다. 아담의 전체가 이것 밖에 없다.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이 속에 전부를 포함하고 있다. 모든 인간의 문제 인류의 문제를 다 포함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가인과 아벨! 가인과 아벨이 나타났다.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가? 두 사람이 찬양을 하겠다고 갔다.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리겠다고 갔다. 제물을 드렸다는 말은 감사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대접한다고 갔다. 그런데 그 때 가인은 아벨을 죽였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간 자리에서 피를 흘렸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간 자리에서 이것이 종교 안에 있다. 우리 기독교 안에 이것이 있다. 우리 기독교다 남의 기독교가 아니고 우리 기독교 안에 그렇게 해 왔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피를 흘렸다. 하나님 앞에 옳게 하려고 피를 흘렸다. 이것이 가인과 아벨의 역사다.
그러니까 누가 가인과 아벨 되라고 했습니까? 저절로 그렇게 했다. 그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면서 피를 흘리면서 다 하나님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그런 명분으로 피를 흘렸다. 나는 깡패다 하고 죽인 것이 아니다. 나는 도둑놈이다 하고 죽인 것이 아니다. 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명하노니 너는 지옥으로 가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하고 보냈다. 불에 태워 죽였다. 그러니까 그 때 흘린 피가 지금도 흐르고 있다.
그 때 죽임을 당한 아벨은 예수 다시 올 때까지 제단 아래서 자기 원통함을 신원하고 있다. 나는 원통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러고 있습니까? 이것 좀 해결해 주세요? 이렇게 신원하고 있다. 계시록 6장 10절에 가보면 그렇게 말했다. 제단 아래서 신원하는 영들 영혼들이 있다. 원통하다! 원통하다!! 분하다 이것 아닙니까! 사람들 속에 이것이 깔려있다. 사돈이 논을 사면 왜 배가 아픈가? 원통하고 분하니까! 예수 오실 때까지 사람들이 속에 이것이 안 끝난다. 원통하고 분한 것이 안 끝난다.
내가 C.C.C 에 들어가서 김준곤 목사님을 알게 되었는데 내가 그 분을 통해서 감동을 받았다. 6. 25 때 이분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부인이 학살당했다. 그 때 어린 아이가 있었다. 그 때 어린 아이를 놓고 세 명이 학살을 당했다. 그러니까 옛날 말에 가장 저주스러운 말이 무엇이냐 하면 어린 자식 두고 상처한다는 말이 있다. 이것처럼 저주스러운 말이 없다. 그런데 그분은 그런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분은 그것을 원수를 원수로 갚으려고 하지 않고 이것은 몰라서 그렇구나! 하나님 몰라서 그렇구나! 이렇게 알았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복음화시켜서 근본적으로 심성을 바꿔야 되지! 누구한테 복수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알았다. 그래서 민족복음화 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을 들으면서 감동이 되었다. 아 그렇구나! 원수를 갚는 다고해서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수를 갚으면 또 나오고 갚으면 또 나오고 계속해서 뒤집어지고 그렇다. 삼국지를 봐도 그렇고 무협지를 봐도 다 그렇다. 중국 사람들은 무협지도 많이 읽고 이런 일들을 하도 많이 해 봐서 만만디처럼 그래 이러면 이러고 저러면 저러고 “너 하는 것은 나는 몰라”이러면서 산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다 못해봐서 그런지 아직도 한이 남아 분한 일만 나오면 남의 일에 다 들고 일어선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여순사건 때 어느 경찰관한데 조금 심하게 당했다고 한다. 그 사람이 큰 다음에 6.25가 돌아왔다. 그래서 복수를 했다. 그 집에 가서 그 집식구 일곱 명을 논바닥에 내 놓고 다 총살시켜버렸다. 그런데 다시 경찰이 후퇴했다가 수복이 되었다. 그 경찰이 와서 보니까 자기 집 식구들이 다 죽을 것을 보고 또 그 사람 집에 찾아가서 일곱 식구를 다 끄집어 내 놓고 총살시켜 버렸다. 묘하게 그 집도 일곱 식구였다. 그래서 양쪽 집안이 다 죽었다. 그러니까 복수는 또 복수를 낳고 복수는 또 복수를 낳고 끝이 없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로 말미암아서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계속 더해 간다. 모르니까 모두 복수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복수하면 대대로 이어가게 된다. 이런 인간으로서는 완전한 찬양이 불가능하다. 내 속에 그런 아벨의 피가 흐르고 있는 한 참된 찬양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므로 온전한 찬양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강해지면 가인이 되고 약해지면 아벨이 되는 인간의 본성으로는 온전한 찬양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온전한 찬양은 단 한도 없었다. 이렇게 볼 수 있다. 예수님 이전 까지는 온전한 찬양은 이 땅에 없었다. 이렇게 봐도 가언이 아니다.
사람은 강해지면 가인이 되고 약해지면 아벨이 되는 것이다. 아벨 따로 가인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강해지면 누구나 다 가인이 되고 약해지면 누구나 다 아벨이 되는 것이다. 이 인간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온전한 찬양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강한자로 찬양해도 온전한 찬양이 아니고 약한 자로서 찬양해도 온전한 찬양이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벨은 참 의인이고 물론 서경에 그렇게 표현한 데가 있다. 그런데 아벨은 온전한 의인이 못 된다. 왜냐하면 원통해서 지금 울부짖고 있으니까 안 된다. 원통해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온전한 의인이 되겠는가! 의인이 되도 온전한 의인이 안 되고, 선해도 온전한 선한 사람이 안 되고, 찬양을 해도 온전한 찬양이 안 되고 이것이 인간의 문제고 갈등이다.
그래서 만물이 탄식하고 있다고 그랬다. 성경에는 만물이 탁식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저들이 허무한데 굴복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인가? 본문에 있는 말씀은 영원한 언약의 피로 우리의 대 제사장이 되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온전한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본문에 있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영원한 언약의 피로 우리의 대 제사장이 되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온전한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말 성경이 번역이 조금 어렵게 돼서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
양의 큰 목자이신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낸다. 이러니까 말이 안 맞는다.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언약의 피로 대제사장 되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하나님은 바로 그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리신 그 예수로 찬양 받으시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번역해 읽으면 좋다. 영원한 언약의 피로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그분은 바로 그 언약의 피로 찬양되신 그 분의 이름으로 그분 안에서 온전한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자기피로 남의 피가 아닌 자기피로 아론은 남의 피로 제사장이 됐다. 동물의 피긴 하지만 그런데 예수는 자기 피로 제사장이 됐다. 그러니까 이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다. 왜냐하면 과거에 동물로 제사를 드릴 때는 영원한 것이 안 됐다. 왜냐하면 장차 언젠간 올 것을 예비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기 피로 언약을 세우셨다.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사람 자신의 피로 언약을 세우기를 원한다. 나 자신으로 찬양하기를 원하신다. 내가 무엇으로 찬양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소유로 찬양하고 그것으로 찬양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찬양하기를 원한다. 잘 되었으니 찬양하고, 못 되었으니 또 원망하고 이것이 사람이다. 광야를 40년 지나온 동안에 좋으면 찬양하고, 안 좋으면 원망하고 이랬다. 형통하면 찬양하고, 막히면 원망하고 이랬다. 이것이 사람이다. 그런데 영원한 언약의 피로 우리의 제사장이 되었다. 자기 피로 우리의 제사장이 되었다. 그분 안에서 그분으로 찬양 받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분으로 찬양을 해야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말끝마다 이런 말을 한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찬양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하는 이런 말이 나온다. 그 말의 뜻이 무엇이냐 하면 이 뜻이다. 그냥 예수 이름을 빌려다가 하면 되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면 안 된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기만 하면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이름으로 나가면 승리한다!” 그것도 아니다. 십자군이 그래서 실패하게 되었다. “예수 이름으로 나가면 승리한다.” 이래가지고 나가서 실패했다.
이스라엘도 그런 때가 있었다. 법궤만 가지고 나가면 이긴다. 한번은 법궤를 가지고 나가서 이겼다. 그래서 “아! 법궤만 가지고 나가면 이긴다!” 이렇게 해서 다음에 법궤를 가지고 나갔는데 법궤를 빼앗겨 버렸다. 뺏기고 돌아 왔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것이었다. 자기 자신이 아니고 지금 군사력은 없는데 법궤만 들고 나가면 이기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법궤를 빼앗겨서 상당히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다. 하나님이 거기서 재앙이 내리고 해서 법궤가 다시 돌아왔다. 그러니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면 되는 것인가?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되는 것인가? “예수 이름으로 뭐 한다.” 이러면 되는 것인가 하면 그런 것이 아니다. 내용은 그 말이 맞기는 맞는 말인데 내용이 없으니까 안 되는 것이다. 내용은 무엇인가? 새 언약, 자기 피로, 자기 영원한 피로 언약을 세우신 그 예수, 그 예수로 찬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래서 여호와께서는 새 언약을 세우셨고(렘31:31,2) 예수는 이 언약을 이루셨다(요1:14). 그는 자기 피로 새 언약, 즉 영원한 연약을 세우시고(눅21:19,20)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담 안에서 옛사람을 청산하고(롬6:10참) 다시 일으키심을 받으심으로 새 생명의 주가 되신 것이다(행3:15).
렘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눅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롬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행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예수는 이 언약을 이루었다. 하나님께서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겠다.” 이렇게 새 언약을 세우셨다. 이것을 예수께서 이루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하는 것은 예레미아 31장에 있는 말씀을 실재로 성취했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이 말은 새겨졌다 이 말이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 하겠다. 그는 자기 피로 새 언약을 세웠다. 자기 피로 세운 영원한 언약 그것이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영원한 언약을 세웠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아담 안에서 옛 사람은 청산하고 다시 일으키심을 받음으로 새 생명의 주가 되셨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담 안에서는 옛 사람이 청산되고 다시 일으킴을 받음으로 새 생명의 주가 되어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
죽으심에서 마귀와 세상을 물리쳤고, 다시 살아나심에서 만민에게 분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왔다. 아담은 위치를 이탈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아오지 못했으나 예수께서는 인격을 지키고 만유에게 분배할 영원한 생명을 가져 오신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위한 찬송이시다. 할렐루야!
예수는 죽으심에서 마귀와 세상을 물리치셨고 다시 살아나심에서 만민에 분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온 것이다. 아담은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는 인격을 지키고 만유에게 분배할 영원한 생명을 가져 오신 것이다. 그 자리에서 예수 위치에서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 위치에서 찬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위치에서 이름으로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치에서 찬양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 이름은 그 위치이다. 그 이름은 그 존재이고, 그 자격이다. 그 이름은 그분의 자격이고 그분의 존재고 그분의 위치이고 그렇다. 자, 그분 안에서 그분의 생명 안에서 그렇게 해야 진짜 찬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물을 드리자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를 통하여 찬미의 제물을 드릴 수 있는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양을 드리자! 이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를 통해서 찬미의 재물을 드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는 분명히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찬미가 되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찬양이 되었다.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되셨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기의 자랑이고, 인간 편에서는 찬양이 된 것이다.
옛 언약 안에서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인 방법 중의 하나로서 어떤 제물을 통하여 자기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미 낡은 것이며 객관적이고 의식적인 것들로서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히13:14참).
히13: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다. 옛 언약 안에서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인 방법 중에 하나로 어떤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다. 세계 모든 인간이 대부분이 다 그렇다. 어느 민족이든지 신에게 재물을 드릴 때 어떤 것을 가지고 드린다. 동물제사를 드리든지 곡식으로 제사 드리든지 하여간 제사를 드릴 때는 어떤 것을 가지고 제사를 드린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이미 낡아진 것들이다. 옛날 그 시대에는 그런 제사가 사람들에게 감동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가끔 가다 길가에 보면 새차를 앞에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돼지 대가리를 갖다 놓고 차 앞에서 절하고 있다. 이런 것도 자기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행위다. “교통사고를 안 나게 해주십시오.”하고 기원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모르겠는데 돼지는 안 치어서 무사할 것이다. 돼지는 자기를 바쳤으니까 그 차가 돼지는 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돼지머리 갖다놓고 제사를 드렸으니까 그 차의 신이 돼지머리만 알지 그 사람을 몰라 볼 것이다. 차의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딱 보니까 돼지가 한 마리가 있으니까 저 놈이 나한테 제사를 드린 놈이구나하고 피해주겠지만 이 신이 가만히 보니까 돼지머리가 아닌 것이다. 다 낡아진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이미 낡은 것이며 객관적이고 의식적인 것들로서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예수께서는 자기피로 새 언약을 세우시고 그 피로 그 언약을 이루셨다.
예수께서는 자기피로 새 언약을 세우시고 그 피로 그 언약을 이루셨다.
새 언약은 사람이 직접 제물이 됨으로서 제사가 되는 것이다. (요4:23참) 우리는 그가 죽으실 때 함께 죽었고 그가 살아나실 때 함께 살아났다(롬6:5~11참). 우리는 그와 연합되었음으로 그와 함께 찬송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와 연합하여 다시 난자들은 다 하나님의 온전한 찬양의 제물이다.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새 언약은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직접 제물이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내가 제물을 드리려면 동물을 갖다 드리면 되는데, 새 언약은 자기로 제물이 되어야 된다. 그래야 제사가 된다. 어느 곳에 예배를 드려야 되는지를 물었다. 당신들은 예루살렘에 예배할 데가 있다하고 우리 조상들은 그림신산에서 예배하라고 했는데 어디 가서 예배를 해야 되느냐고 사마리아 여자가 물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오니나 곧 이때라. 그때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다.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실제로 예배하느리라고 대답했다. 바로 그 대답이 이 대답이다. ‘어디 가서 예배를 해야 됩니까? 무엇으로 제사를 드려야 됩니까?’하는 물음이었는데, 새 언약은 내 자신으로 직접 제사가 되어야 된다.
어떻게 내가 직접 제사가 되는가? 예수님이 제사를 드리는 것은 봤는데 우리는 어떻게 제사가 되는가? 이것이 우리가 예수와의 연합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다. 연합이 없이는 무슨 수를 써도 안 된다. 기도를 천만번 해도 안 될 일이고, 무엇을 천만번 해도 안 될 일이다. 연합이 아니면 안 된다. 어떻게 우리가 그와 같이 제사를 드리겠는가? 우리가 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제사를 드리겠는가? 어떻게 제사를 드리겠는가?
우리는 그가 죽으실 때 함께 죽었다.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보려면 내가 나를 꼬집어 볼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보면 된다. 나를 꼬집어보니까 아직 죽지 않고 살았다. 이렇게 하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라. 그러면 그 사람은 죽었다. 그 사람은 죽었는데 나는 안 죽은 것이 아닌가? 나는 안 죽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죽은 자리에서 나도 죽은 사람이다. 뛰어 내리지 못한 자리는 나도 뛰어내리지 못한다. 예수는 뛰어내리지 못하는데 나는 뛰어내릴 수 있는가? 예수는 그 자리에서 죽는데 나는 안 죽을 수가 있는가? 그것이 바로 나다. 남이 아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나다. 우리들 자신이다. 자기를 보지 말라. 자기를 보면 절대로 안 된다. 불교에서는 자기를 보고 있다. 자기가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이 어디까지 왔는가를 보고 있다. 백날 봐도 소용없다. 죽은 사람을 봐야 된다. 한 사람만 제대로 보면 된다. 꼭 예수여야 되는 이유는 다음에 또 얘기하겠다.
그 사람을 보면 내가 피하지 못하게, 도망갈 수 없도록 나도 그 안에 죽은 사람이다. 잘 보라. 늘 내가 얘기한다. 이것이 안 되면 아무것도 안 되기 때문에 늘 얘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되면 한꺼번에 모든 것이 된다. 이것이 되면 돈오돈수(頓悟頓修)가 되고, 이것이 안 되면 아무것도 안 된다. 물론 문밖까지는 오지만 문 안에 못 들어간다. 기왕 대구교회에 왔으니까 문 안에 들어가서 안방에 들어가야 될 것 아니겠는가. 그냥 문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가려면 대구교회나 다른 곳이나 매 한가지다.
그가 죽을 때 우리는 함께 죽었다. 바울은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한다. 언제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못 박힌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한다. 그가 죽은 자리에 우리가 지금 죽어있다. 조금도 틀리지 않다. 그분과 내가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내가 꼬집어서 안 죽었기 때문에 안 죽은 것이 아니고, 나는 죽은 그 사람의 운명 안에 있다. 살아 있을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얼마 안 되고 어차피 우리는 도로 죽을 사람이고 지금도 죽을 사람이다. 못 박아놓으면 예수와 똑같다. 예수와 똑같은 사람이다. 조금도 틀림이 없는 사람이다.
예수와 내가 틀린 곳은 어디인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일 때는 틀리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할 때 다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보니까 다르다. 하나도 맞는 데가 없다. 딱 여기에 오면 딱 하나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버린다. 다른 데는 다 좋아하고 이것은 버린다. 참 이상한 일이다. 생각해보라. 사람들이 어디를 보고 다 따라 왔는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것을 보고 따라 왔다. 저가 누구인가? 누구이길래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가?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몰려왔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니까 와~ 나사로가 죽은지 사흘이 되었는데 냄새가 났는데 살아났네 하고 사람들이 막 따라 왔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니까 와~ 이적이구나하고 따라 왔다. 다 그렇게 되고 싶으니까 다 좋아했다. 그냥 간 것이 아니고 진짜로 좋아서 갔다.
제자들은 그때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열두 광주리의 부스러기를 먹을 때 분명히 제자들이 나서서 모았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분명히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는데 열두 광주리가 나오느냐는 것이다. 얼마나 신기했겠는가! 그리고 얼마나 희망이 넘쳤겠는가! 우리 주님이 저런 분이다. 너 큰 소리 마라. 머지않아 나는 국무총리하고 너는 장관하고... 그래서 그 어머니가 뒤따라 가면서 신이 나서 주여 내 아들 둘이 있는데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이다. 그때 장면을 생각해보면 너무너무 신났을 것이다. 대통령이 될 사람만 뒤따라 다녀도 너무너무 신날 것이다. 이 사람이 틀림없이 된다, 국회의원 될 사람만 뒤따라 다녀도 신날 것이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될 사람이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도 모를 것이다. 자기 돈 내고 따라 다닌다.
그런데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는 베스다 광야를 한 번 생각해보라. 얼마나 신나는 광경이었겠는가! 그런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보고는 다 가버렸다. 바로 자기를 버리고 간 것이다. 그 특이한(특별한) 사람을 보고는 따라 갔는데 바로 자기를 보고는 다 도망 가버렸다. 바로 자기가 거기에 있는데 바로 자기를 버리고 가버렸다. 자기를 버리고 갔으니까 뭐가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3년 후에 바닷가에 가서 고기를 잡으니 재미가 있겠는가? 그 신나는 광경을 보고 다니다가 그물을 던지려고 하니까 내 팔자야, 내가 왜 이 모양인가 했을 것이다. 변화산의 찬란한 모습과 꿈이라도 다시 한번, 이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꿈도 꿔지지 않는다. 참 답답한 일이다. 자기를 버리고 갔다. 그런데 자기를 버리고 간 줄을 몰랐다. 우리가 예수를 버리면 나를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예수를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버리면 나를 버리는 것이다. 어디 높은데 가서 찾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굉장한 데 가서 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데 있겠지, 나는 이런데 있는 사람이야, 나는 여기 있는 사람이야, 나는 이 위치에 있는 사람이야. 이런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의 정위치! 정해진 위치, 영원히 변치 않는 내 위치는 바로 예수 안에 있다. 나는 이것이 너무너무 신난다. 나는 이 자리가 너무너무 좋다. 세상에 어떤 자리와도 바꿀 수가 없다. 이 자리에 오니까 아무것도 거침이 없다.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도 없다. 세상은 그대로 다 있다. 높아도 상관이 없고 낮아도 상관이 없다. 높은 것은 높은 것대로 인정하고, 낮은 것은 낮은 것대로 인정하고, 아무것도 나에게 손상이 안 된다. 옛날에는 나보다 높은 것을 인정하려면 자존심이 상한다. 나보다 낮은 것을 인정하려면 기분 나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높으면 한 없이 높아도 상관이 없다. 아무리 높아도 나와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나도 좋고 자기도 좋고 다 좋다. 세상 사람들은 높여주면 다 좋아한다. 싫어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왜 못하는가? 자존심 때문에 못한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보고 잘한다고 하면 좋은데 그것을 못한다. 왜? 내 자존심 때문에. 그런데 이 자존심이 어디로 가버리고 없는지 내 자존심은 십자가에 있고 거기는 없으니까 마음대로 높여도 상관이 없다. 내 자존심은 다른데 있다. 여러분도 자존심을 거기에 맡겨놓으면 세상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 맡겨놓을 것도 아니다. 거기에 원래 있는 것이다. 거기서 여러분의 자존심을 찾으면 거칠 것이 아무것도 없어진다. 세상의 아무것도 문제가 안 된다. 스룹바벨 앞에서 태산이 평지가 된다고 한다. 우리 앞에서 세상이 평지가 된다. 인생이 너무너무 쉬워진다. 아무것도 없다. 너무 쉽다.
그가 죽을 때 나도 죽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나도 먹었다. 이것을 우리가 몰랐다. 지금도 잘 모른다. 대구교회 와서 알았다. 대구교회 오니까 선악과가 얼마나 많은지! 순모임을 가도 선악과, 어디를 가도 선악과다. 하도 많이 봐서 이제 알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이것이 훨씬 쉽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더 쉽다. 죽을 때 함께 죽었다.
그가 살아나실 때 함께 살아났다. 죽을 때만 함께 죽고 살아날 때 함께 살아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죽을 때 함께 죽었으면 함께 살 줄로 믿노니. 내 말이 아니고 바울의 말이다.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살아도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 할렐루야! 너무너무 신기하다. 그 사람 안에서 함께 죽었는데 왜 이렇게 신나게 살아나는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거침이 없는지 모르겠다. 그분과 함께 죽었는데 죽음이 없다. 그분과 함께 죽었는데 사망이 다시 있지 않다. 이것이 살아난 것이다. 내가 살아났다. 내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까 지금 죽어있는가? 내가 그분과 함께 죽었는데 그분과 함께 살았다. 박수가 많이 나와서 좋다. 이 박수가 온 세상에 퍼졌으면 좋겠다. 온 세상에 박수가 퍼지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우리는 그와 연합되었다. 그가 죽은 자리에서 우리도 죽었고, 그가 살아나신 자리에서 우리도 살았는데, 이것이 연합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와 함께 찬송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 제물 자체가 찬송이다. 옛날에는 제물을 가지고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지금은 제물 자체가 예배이고 제물 자체가 찬양이다. 예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산에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이때라. 아들이라는 말이다. 아들이 예배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와 연합되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찬송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와 연합하여 다시 난자들은 다 하나님의 온전한 찬양의 제물이다. 우리 자체가 하나님 찬양의 제물이다. 예수가 하나님 찬양의 제물이듯이 우리도 하나님 제물의 찬양이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께 찬양하자! 위치를 이탈한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두렵고 떨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라고 밖에는 전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큰 목자요 대 제사장 되신 예수님 안에서는 우리도 그분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찬양의 제물들이 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께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옛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두렵고 떨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라고 밖에는 전해주지 못했다. 모세가 정말 놀라운 사람이지만 40일 40주야를 산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런데 어떤 하나님을 경험했는가? 빽빽한 구름(깜깜하다는 말임)과 나팔소리와 뇌성소리와 땅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을 봤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인지한 것이다. 그렇게 나왔으니까 율법을 보면 다 빽빽한 구름과 나팔소리와 땅이 진동하는 소리다. 자기가 본대로 그렇게 밖에는 전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의 큰 목자되신 예수님, 우리의 위대한 목자되신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에게 전해주신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아버지다. 우리의 큰 목자! 이 <크다>는 말이 아주 재미있는 말이다.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자랑스럽다는 뜻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목자다. 옛날에 모세는 반은 자랑스럽고 반은 무서운 분이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분이다. 그런데 왜 내가 그분을 자랑하지 않겠는가. 여러분 직장에 가서 왜 그분을 자랑하지 못하는가? 그분을 자랑하면 여러분이 자랑스러워져야 된다.
나는 내가 이분을 자랑하면 내가 자랑스러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랑한다.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부끄러우면 못하는 것이다. 부끄러우면 예수가 부끄럽다는 말이다. 예수가 왜 부끄러운가? 예수를 자랑하면 할수록 신이 나야 된다. 왜냐하면 한 운명이니까. 다른 것은 나도 숫기가 없다. 어디를 가도 자랑을 잘 못한다. 그런데 이것만은 자랑한다. 자랑하는데 내가 하나도 부끄럽지 않고 또 내가 교만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뭘 성취해서 자랑하면 내가 교만하지 않으려고 해도 교만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히말라야 산에 올라갔다 왔다면 내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자랑을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 속에는 내가 히말라야를 정복했다는 자랑이 있다. 그 자랑은 못한 사람에게는 자연히 저절로 교만이 돼버린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자랑을 해도 교만이 안 된다. 왜냐하면 내 연약함을 통해서 죽음을 통해서 본 것이기 때문에 자랑은 되는데 교만이 안 된다. 그래야 이 자랑이 온전하다. 자랑이 되는데 그 안에 교만이 섞여버리면 온전한 자랑이 아니다. 의로운데 불의한 것이 섞여버리면 온전한 자랑이 못된다. 예수를 자랑하는 것은 우리가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
우리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 대제세장 되신 예수님 안에는 우리도 그분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찬양이 되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도 온전한 찬양이 된다.
우리의 목자 예수는 고귀하고 폭 넓으며 자랑스러운 분이시다(megados). 아멘.
우리의 목자 예수는 고귀하고 폭이 넓고 자랑스러운 분이다. 메가톤급이라고 하는데 <메가>라는 말이 희랍어에서 나온 말로 <크다>라는 말이다. 그 속에는 <넓다>라는 뜻도 있고 <자랑스럽다>는 뜻이 있는데, 나는 자랑스럽다는 말이 제일 재미있다. 우리 예수님은 자랑스러운 분이시구나.
목적을 두시고 인생을 지으신 이에게, 흙으로 인생을 빚으신 이에게, 이것만 생각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목적이 없이 지어졌다면 정말 흙덩어리에 불과하다. 하나님 목적이 없는 인생이 있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격하려고 한다. 배격하면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있으니까 하나님 목적이 있다. 목적이 있고 내 인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내 인생이 얼마나 복된가! 하나님이 나에게 목적을 둔 것이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흙덩어리를 가지고 인생을 빚었다고 한다. 사람이 있다. 우스운 이야기다. 그런데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다. 흙 같은 나를 빚어서 사람이 되게 한다. 그러니까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여러분 흙 이상 다른 것이 되는가? 한 번 계산해보라. 내놓아보라. 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 흙에 불과하다. 땅속에 들어가면 다 흙이다.
그런데 흙이 인간이 되어서 지금 내가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찬양을 하지 않겠는가! 사탄에게 노예가 되어서 끌려 다니면서 이리저리 방황하던 인생을 해방시켜 주신 그분에게 왜 내가 찬양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천사와 인간 사이를 방황했다. 천사냐? 인간이냐? 그 사이를 인간이 전부 방황했다. <채털리부인의 사랑>을 읽어보면 천사와 인간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든 문학이 다 그렇다. 단테의 <신곡>이 무엇인가? 지옥에서 천당까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것이다. 인간 이성 속에는 항상 이 두 가지가 있다. 지옥과 천당이 같이 있고, 천사와 동물이 같이 있기 때문에 천사가 된다면 한참 가다보면 공허해지고, 동물이 된다고 한참 가다보면 너무 비참해지는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이다. 모든 문학 작품들이 다 그 이야기다. 그 안에서 방황하는 이야기인데 그것을 재미있게 써놓았기 때문에 소설이 되는 것이다. 사탄에게 노예가 되어서 그 사이에 살면서 미화를 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참하게 생각하면 불행하니까 미화를 시켜서 아름답게 소설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인생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했다. 천사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인생으로 하나님 아들이 되게 했다. 예수를 보니까 인생으로 하나님 아들이 된다. 인생이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다. 유대인은 인간을 보고 죄인이라고 한다. 헬라인은 인간을 보고 불완전한 존재라고 한다. 동양사상 특히 중국사상은 만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은 다른 동물들 중에 제일 나은 놈이라는 말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아주 좋은 말이 아니고, 만물 중에서 제일 나은 놈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그렇게 밖에 안 되는데 하나님이 표현이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한다는 이보다 더 큰 축복이 또 어디 있겠는가! 크고 위대하고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참 하나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아들 안에 포함하신 하나님.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영광이고 우리의 자랑이고 우리의 행복이다. 만일 이분이 없다면 우리가 자랑거리가 뭐가 있는가? 아무 자랑거리가 없다. 내가 지금 나이가 이렇게 들어 무엇을 자랑하겠는가?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나이 먹은 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데 나이 먹은 것이 뭐 자랑이 되는가. 노인들이 젊은 아이들에게 말 잘못했다가는 혼난다. 젊은 놈이 나이 먹은 어른에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면 나이 먹은 게 뭐 자랑이냐고 한다. 두 말 못한다. 무섭다. 옛날처럼 위아래 생각하는 아이들이 아니다. 지난번에 어느 형제님이 나와서 말한 것처럼 젊은 사람이 뭐라고 해도 미안하네라고 해야지 젊은 놈이 잉크도 마르지 않게 와서 나이 든 어른에게 그럴 수 있느냐고 했다가는 더 무안을 당한다. 나이 든 것이 자랑이냐고 하면 두 말 못한다.
우리의 영광, 우리의 자랑, 우리의 행복!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여러분 생각해보라. 나의 영광이 무엇인가? 나의 자랑이 무엇인가? 나의 행복이 무엇인가? 내놓은 것이 있는가? 내가 세상에서 무엇을 얻어서 내 자랑을 삼겠으며, 무엇을 얻어서 내 행복이라고 하겠는가? 할 것이 없다. 나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생각을 많이 해보고 하는 말이다. 많이 해보았는데 아무것도 없다. 친구들도 다 일찍 가버리고 없고 그 사람들을 봐도 가버리고 나니까 아무것도 없다. 나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지금 나의 영광이 무엇인가? 나의 자랑이 무엇인가? 나의 행복이 무엇인가? 예수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나는 돈도 있다, 나는 지위도 있다, 뭣도 있다고 하더라도 시시한 소리 하는 것이다. 금방 사그라들 것이다. 그리고 자랑하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는 줄 아는가? 자랑하면 뒤에 가서 다른 사람들이 욕한다. 왜냐하면 자기는 하고 싶은 것을 못했으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얻은 것은 남한테 자랑도 못한다. 자랑하면 욕만 얻어먹는다.
그런데 우리의 영광이신 예수, 우리의 자랑이신 예수, 우리의 행복이신 예수는 우리가 끝없이 자랑할 수 있다. 이것이 행복이다. 나한테 영원한 자랑거리가 있다. 금강산도 두 번 자랑하니까 자랑할 것이 없다. 무엇을 보고 오니까 몇 번 자랑하고 나니까 자랑할 것이 없다. 또 그 소리 하네 한다. 금강산에 가면 신기한 것이 많다고 한다. 수정바위 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을 보고 오면 진짜 놀랄 것이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이야기하면 듣기 싫다고 한다. 전에 들었는데 또 하네 한다. 나는 돈 주고 갔다 왔는데...
영원히 쇠하지 않는 자랑,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자랑을 가지려면 예수가 자기 것이 되어야 된다. 내가 여러분에게 예수를 그냥 공짜로 주었다. 걸어 다니는 예수를 줘도 못 가지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여러분에게 내가 주었다. 꼼짝 못하시는 예수를 주었으니까 여러분이 갖기에 달렸다. 여러분이 쫓아가도 도망갈 분도 아니다. 돌아다니는 예수는 아무리 말해보았자 여러분이 갖지 못한다. 꼼짝 못하는 예수를 여러분에게 내놓았으니까 그래도 못 가지면 어찌하겠는가? 그러면 입에 넣어주어야 되는데...
예수 자랑! 이분을 평생 자랑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 아무리 자랑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 이런 자랑이 있다는 것, 인생이 늙어서 자랑이 있다는 것. 노인정에 가면 옛날이야기를 자랑하고 있다. 젊었을 때 만주에서 돌아다니고 어쩌고 했다고 한다. 효령 넘어가는 곳에 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만주 봉천, 지금의 심양에서 자기 집까지 둘이 넉 달 동안 걸어왔다고 한다. 굉장히 몸이 좋다. 아들들이 모두 태권도장을 한다. 그런데 늙으니까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 영감님 아들들이 많아서 용돈도 드리고 하니 좋지 않으냐고 하니까 용돈이 쓸 데가 없다고 한다. 술 밖에 드시지 않았다. 나이가 드니까 술도 못 드신다고 한다. 봉천에서 걸어오던 그 자랑은 다 어디를 가고 없다. 봉천에서 여기가 어딘가? 거의 천리길을 걸어온 셈이다. 젊었을 때는 대단했을 것 같다. 기골이 장대하고 장군감이다. 그런데 자랑이 없어져버린다. 모든 자랑이 끝난다.
예수 자랑만 남는다. 지금부터 아예 예수 자랑만 하라. 예수 자랑만 하려고 작정하면 된다. 그러면 예수 자랑은 끝이 나지 않는다. 여러분 나이부터 예수를 자랑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많이 자랑하겠는가! 나는 늦게 자랑하게 되어 억울하다. 젊었을 때부터 자랑했으면 좋을 텐데, 젊었을 때는 잘 몰라서 긴가민가해서 한다고 하긴 해도 잘 모르고 하니까 온전한 자랑을 못했다. 젊었을 때부터 복음 전하다고 했는데 복음이 뭔지 모르고 했으니까 전하면서 기뻤던 일이 별로 없다. 내가 그 말씀 때문에 재미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예수를 전해서 내가 신이 났던 적은 정말 없다. 지금 여러분에게 예수가 정말 자랑거리가 된다면 여러분 인생은 보나마나 나보다 몇 십배 더 영광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천당에서 내려다봐도 환히 보이도록, 대구교회 형제들만 영광이 확~ 보이도록... 서울에 불빛이 확~ 비치는 것처럼 우리 형제들의 불빛이 확 비치면 그것이 다른 영광과 비교가 되겠는가. 아벨의 신원하는 그 피와 같겠는가.
예수 자랑! 주님이 우리에게 축복하시고 새로운 길을 주셔서, 나에게도 이런 은혜를 주셔서 여러분에게 자랑할 수 있게 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사람이 무엇이관대 이렇게 사랑하시고 인생이 무엇이관대 이렇게 권고하시는지!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도 감사하고, 숨을 코에 불어 넣었다는 것도 감사하고, 주님이 주신 어느 것 하나도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고 그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인생을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형제들을 이렇게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나보다 더 많이 축복해 주셔서 이리하여 주님의 영광과 찬양이 수십배로 불어나게 되기를 원하고, 수백배로 확장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