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은 달빛도 숨을 죽였다 찰싹이는 파도만 간간히 귀청을 때리고 갔다 먼 곳의 낙지잡이 배인지 장어잡이 배인지 호롱불 같은 등불만 깜박이고 있었다
말없이 선창가에 앉아 술을 마셨다 누구랄 것도 없이 그날 밤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꼴깍이며 넘어가는 소주 한 모금마저 미안하다는 듯 호흡을 낮췄다 너무 고요하면 주위의 것들도 덩달아 침잠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어둠은 얼굴을 가린 채 제자리를 고수했고 우리는 말없이 하나가 되었다
하늘엔 별이 총총, 은하계의 은하란 모두 이곳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하현달이 거금도를 넘어가기 전이었다
별들이 아침을 불러오기 직전, 우리 중 제일 연장자인 이 씨가 말을 꺼냈다 무음이었다
짭조름한 갯내음이 훌륭한 안줏거리가 되어준 밤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둠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전언이었다
내 마음의 실루엣 -지팡이
소리로 가득한 거리를 두더지 게임하듯 두드리며 걸어가고 있어
비 오는 날이면 소리는 다듬어지지 않는 합주곡으로 튀어 올라 나는 허공을 더듬게 되지
빛과 그림자는 내게 사치일 뿐 소리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때론 파열음을 만나기도 해
이럴 때 엉뚱한 생각의 파장은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가 되었다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날쌘 매가 되기도 해
생기발랄한 나의 사고思考는 눈에 보이지 않는 너머까지 손을 흔들게 하지
세상은 별일 없다는 듯 흘러가는데 홀로 고독한 나는 그들이 닿지 못할 손길 밖에서 소리의 걸음만 천천히 따라가고 있어
누구 하나 손 잡아주지 않는 거리를 비에 젖으며, 허방 짚어가며 걸을 때 사람들은 총총히 네온 불빛 비추는 건물 사이로 빨려들어 가듯 사라져 가고
느린 걸음의 실루엣 하나, 절뚝이며 빗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어
정자 엄마의 사냥
정자네 엄마가 사냥을 나간다 맨손에 바구니, 호미 하나 달랑 들고서 돌문어 사냥을 나간다 허리춤엔 단단히 동여맨 신발 한 컬레와 날이 선 각오가 앞장서서 걷는다 드디어 도착한 큰 바위 밑 돌문어집 힐끗, 바위의 눈치를 본다 손을 바위에 집어넣어 문어와 사투를 벌일 시간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동태를 살핀다 손가락 레이더망에 포착되는 순간, 잽싸게 낚아채야 한다 노련한 항해사가 조류를 해석하듯 바위 밑 동태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 해적처럼 변덕스런 문어에게 지게 된다 정자 엄마는 손을 좌로 30 우로 90도 꺾는다 드디어 어른 팔뚝만 한 문어, 손아귀에서 바둥댄다 밀물, 급하게 수문을 닫자 고요해진 바다 위로 갈매기 난다
독도에 닿은 법
내 머리에는 뿔이 달렸어 헤엄치다 보면 나의 블랙홀에 먹잇감이 포획되곤 하지 하루가 무료해지면 지그시 눈을 감고 바닷물에 몸을 맡겨 파도에 이리 저리 밀리고 밀리다 보면 어느새 나는 독도에 이르러 눈을 뜨지 비행청소년은 괜히 생기는 게 아니야 이성을 억누르지 못할 때 비행은 시작되는 거지 그럴 때 설왕설래가 우후죽순으로 자라곤 해 나도 비행청소년이 되고 싶어 허튼소리 하는 놈들을 이 뾰쪽한 뿔로 냅다 들이받고 싶어 나의 깊고도 둥그런 블랙홀에 빨아들여 몇 날 며칠을 되새김질해가며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어 하지만 영양가 없는 말들로 내장을 채우고 싶진 않아 코도 풀지 않고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 저들 종국엔 세종대왕도 저들의 왕이라고 우겨댈 게 뻔해 차라리 그 검고 흉악한 속내를 갈매기 먹이로나 던져줄래 비수같이 푸른 독도의 바닷물로 괭이갈매기의 부리를 닦게 할래
김명숙_제1회 (사)한국아동문학회 신인문학상 동시 등단. 초등학교 5학년 음악교과서 "새싹" 저자. 가곡 46곡/ 동요 80곡 발표. 제54회, 57회 4.19혁명 기념식 행사곡 "그 날" 작시. 제60회 현충일 추념식 추모곡 "영웅의 노래" 작시. 부천예술상, 한국동요음악대상, 도전한국인대상(문학부분), 시흥문학상 우수상, 제5회 오늘의 작가상, 방송대문학상 수상 외 다수. 시집 『그 여자의 바다』
첫댓글 김명숙 시인님,
시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바다가 들려주는 서정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잘 감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