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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적 교회의 방해요소
머리와 지체의 역할을 빼앗는 것 - 목사
계속해서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주도하시고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하는 유기적 교회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현대 교회의 직책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목사’라는 직책이 그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유기적 교회와는 달리 인간 지도자 중심의 교회로 전락시키게 하는 직책입니다.
리더십이 열쇠?
이전에 남가주에 있는 유명한 대형교회인 새들백교회의 세미나에 여러 번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 릭 워렌이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리더십이 교회 부흥의 열쇠라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부터 30여 년 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그 당시에 소위 잘 나가던 미국의 교회들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 성장과 부흥에 관한 책이란 책은 전부 탐독했고, 미국 전국을 돌아다니며 부흥 일로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공한 목사들이 제시하는 성공 비결들이 서로 상반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강해설교로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목사들이 있는 반면, 제목설교가 교회 부흥의 열쇠라는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 목사들도 있었습니다.
릭 워렌은 목사들이 저마다 부흥의 열쇠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판이한 것에 잠깐 헷갈렸지만, 곧 그들 모두에게 있는 공통점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리더십입니다. 리더십이 있는 목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흔히 자신이 설교로 교회를 부흥시켰다든지, 성령운동으로 부흥시켰다든지, 또는 새벽기도로, 주일학교 시스템으로, 제자훈련으로, 구역조직으로, 가정교회로, 셀그룹으로… 등등 목사들이 교회 성장의 열쇠라고 주장하지만 그 방법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면 결과가 신통치 않는데, 그 이유는 바로 리더십에 있다는 것입니다. 리더십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교회 밖의 이 세상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고, 다양한 지도자의 모델이 제시되곤 합니다. 물론 교회는 성경에서 지도자의 모델을 찾습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모세, 여호수아, 다윗, 느헤미야 등 탁월했던 지도자들이 오늘날의 교회에도 요구된다며 그 이름들이 자주 오르내립니다. 하지만 이런 구약성경의 탁월한 지도자들은 교회의 지도자가 따라갈 모델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태복음 23:10).
이 말씀이 교회에 인간 지도자가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오늘날의 목사라는 직책이 신약성경에 있는가?
프랭크 바이올라는 그의 책 이교에 물든 기독교 163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목사, 그는 개신교 신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다. 목사가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의 마음속에 얼마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 종종 예수 그리스도 자신보다 더 잘 알려지고, 더 높이 칭송받고, 더 철저하게 의지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들에서 목사를 제하면 대부분은 공황상태에 빠져버린다. 목사를 제하면 우리가 아는 개신교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목사는 현대 교회의 독보적인 초점이요, 대들보요, 중심부이다. 그는 개신교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에 커다란 모순이 있다. 성서 전체에 현대 목사의 존재를 지지해주는 구절은 단 한 개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초대교회에서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현대 교회의 독보적인 목사라는 직책이 신약성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매주 설교를 도맡아 하고, 축도권을 갖고, 조직을 거느리고, 성례를 주도하고, 재정을 주관하고, 최종 결정권을 가진 존재, 마치 국가의 원수나 군대의 사령관이나 기업의 회장 같은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가 성경엔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조직에는 그런 총수가 꼭 있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다릅니다. 그런 막강한 지도자가 있으면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이 유명무실해집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에베소서 4:15-16)
즉,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 감당해야 할 역할 대부분을 현대 교회의 목사라는 직책이 차지해버립니다. 따라서 교회라는 조직은 잘 돌아가지만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세워지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이런 류의 지도자를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직책의 존재가 신약성경적인 교회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지도자가 필요치 않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신약 성경적 교회에는 지도자가 필요 없다는 뜻입니까? 오늘날 소위 가정집에서 모이는 교회들 중에 ‘지도자가 있으면 안 된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면 되지 꼭 지도자가 있을 필요가 뭐 있느냐는 식의 주장을 합니다. 과거에 지도자들에게 덴 사람들인데, 이것 또한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주장입니다.
신약 성경적 교회는 하나님의 목적인 교회를 바로 알고 경험한 사역자(일꾼)가 도와줘야 세워질 수 있음을 그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유기적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돕는 지도자가 꼭 있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의 교회들은 이런 역할을 감당한 사역자들에 의해 바로 세워졌습니다. 베드로, 요한, 바울, 바나바, 디모데, 디도…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역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지도자의 존재가 아니라 그 지도자의 역할입니다. 현대 교회의 목사처럼 교회가 지도자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교회 안에 직책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오늘날의 목사라는 직책에는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지도자가 자신의 역할만 충실히 하면 교회에 도움이 되지만 현대 교회의 담임 목사처럼 평생토록 교회 안에 둥지를 틀고 머리와 지체가 감당해야 할 역할을 거의 혼자 도맡아 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아주 해롭습니다. 지도자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 위의 에베소서 4:15-16절이 글자 그대로 실현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 바로 앞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에베소서 4:11-14)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자와 교사 같은 사역자들이 성도들로 하여금 사역(“봉사”라는 번역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하게 해서 그 성도들이 교회를 세우는 것임을 이 말씀이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들의 사역이라고 할 때 그것은 현대 목사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역할 대부분을 말하는 것입니까? “봉사”라고 번역이 되어 있어 교인 역할이 무슨 성가대원, 식사당번, 청소당번, 안내위원, 헌금위원, 주차위원, 주일학교 교사 같은 것들인 줄 아는데, 여기서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나중에 살펴볼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도자의 사역은 성도들이 사역하도록 자신은 교회의 기초만 놓고 뒤로 빠지는 것인데,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린도 전서 3:5-7)
바울은 교회를 밭에서 자라는 식물에 비유해서 사역자의 역할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심고, 물을 주는 것, 즉 사역자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은사를 받은 대로) 교회의 기초 작업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사도의 은사를 가졌고, 아볼로는 교사의 은사를 가졌는데, 고린도교회는 그런 은사가 아주 대단한 것인 줄로 착각하고는 그것에 집중했다가 교회 안에 시기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고린도교회에 바울이 위의 말씀으로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 즉 바울 자신과 아볼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란 교회의 기초를 놓고 뒤로 빠지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든, 선지자든, 복음 전하는 자든, 목자와 교사든, 기초 작업을 하고나서 뒤로 물러났다가, 필요하면 다시 교회를 도와주고 또 뒤로 물러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사역자의 표준 역할임을 신약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 목사라는 직책은 씨를 뿌리고, 물도 주고, 거름 주고, 비료 주고, 농약 뿌리고, 가지치기하고, 자라게도 하고, 열매까지 맺는… 대부분을 도맡아 합니다.
집으로 말하면, 기초 놓고, 기둥 세우고, 벽돌 쌓고, 대들보 놓고, 지붕 안장까지 도맡아 하는 셈입니다. 그렇지 않다고요? 섬기는 종들도 많다고요? 현대 교회의 목사라는 직책과 섬기는 종이 과연 공존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엔 목사라는 직책, 특히 담임 목사라는 직책이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또 그 직책이 지역 교회의 간판일 뿐만 아니라 CEO나 마찬가지이지만, 성경에는 이 직책을 지지해주는 증거가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극히 드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제도권 교회가 신구약 성경을 동원해서 이 직책의 존재를 교묘하게 뒷받침해왔으므로 성경이라면 깜빡 죽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먹혀들기 때문입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20년 가까이 그런 식으로 믿었었습니다. 물론 마음 저 한 구석에는 이것이 억지로 갖다 맞춘 것이라는 생각이 늘 있었지만 말입니다.
성직제도의 오류
목사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성직자라는 잘못된 개념이 아직도 현대 교회들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구호 중 하나인 “전신자 제사장 주의(Priesthood of All Believers)”를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설교하며 강조하기까지 하지만, 교회의 실제적인 삶에서는 그것이 공허한 교리에 불과합니다.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으로 이분화 되어있는 게 현실이고, 좀 깨어있다 하는 목사들이 소위 ‘평신도 사역’이라는 것으로 교인들 중의 소수에게 활동 공간을 조금 넓혀줬을 뿐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기적 교회, 즉 믿는 사람 모두가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후 비성경적인 성직주의가 뿌리를 내리면서 지난 2천 년 가까이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성직주의는 2세기 때 등장한 단일 감독체제, 즉 감독 한 사람이 교회의 전권을 쥐고 있는 제도에서 시작해서 3세기 때 시프리안이 이것을 구약의 제사장제도와 연결시켜 카톨릭의 사제를 거쳐 종교개혁 이후에 목사로, 그리고 지난 5백 년 동안 요지부동 그대로 이어 내려와 오늘날에 이른 것입니다. 이 성직주의라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임명한 특별한 계급의 사람이 꼭 있어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초대교회 그 어디에도 이런 개념이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프랭크 바이올라는 이교에 물든 기독교 166 페이지에서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오늘날의 목사들이 초대교회엔 없었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기독교 신앙 안에서 그런 월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가? 이 이야기의 뿌리는 뒤엉켜서 복잡해졌고, 인류가 타락한 시점까지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인류의 타락과 함께 하나님께 인간을 인도해 줄 눈에 보이는 지도자를 갖고 싶어 하는 염원이 사람들 속에 잠재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역사를 통틀어 인간사회들은 특정한 계급의 종교 지도자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숭상해왔다. 주술사, 무당, 마술사, 요술쟁이, 마법사, 점쟁이, 박사, 그리고 제사장이 모두 아담의 타락 이래로 우리와 함께해왔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언제나 특별한 훈련, 특별한 복장, 특별한 용어, 또 특별한 삶의 방식으로 특징지어진다…
사람을 영적 중재자로 세우려 하는 타락한 인류의 추구는 리더십의 계급구조에 대한 집념이다. 모든 고대 문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계급적인 사회구조로 되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사도 시대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런 계급구조를 교회생활에 도입해서 적용시켰다.”
초대교회엔 기능으로서의 ‘목자(shepherd)’는 있었어도 계급으로서의 ‘목사(pastor)’라는 직책(성직)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사도들이 죽고 난 후에 어지러운 틈을 타서 이단을 대처하고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세상의 계급구조가 교회 안에 침투하여 성직계급인 감독(목사)이 출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재자라는 막강한 권세를 부여받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이 심각한 오류가 정통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 내려와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과 몸 안의 지체들의 역할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역자의 기능과 교회 지체들의 기능
사역자가 성직계급이 아니라면 그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다시 에베소서 4:11-12절의 말씀으로 가서 사역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주님께서 주신 기능이 바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자와 교사 같은 사역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직계급이 아니고 기능(function)입니다. 그들의 역할은 교회를 대표하거나 사역을 도맡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온전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사역을 잘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즉, 성도들이 피차간에 사역하도록 뒷받침해주는 기능입니다.
여기서 성도들의 사역이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봉사활동이 아닙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슨 성가대원, 식사당번, 청소당번, 안내위원, 헌금위원, 주차위원, 주일학교 교사 같은 것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개역성경이 ‘봉사의 일’이라고 번역을 해놔서 혼동을 일으킵니다. 영어 버전들은 대개 ‘work of ministry’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이 원문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교회 안의 모든 성도가 담당하는 사역을 뜻합니다.
성도의 사역은 바로 다음의 15절에 나오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말씀도 개역성경이 ‘참된 것을 하여’라고 번역함으로써 무슨 말인지 모르도록 헷갈리게 했는데, 이것의 올바른 번역은 ‘진리를 말하여(speaking the truth)’입니다. 즉, 성도들의 사역은 교회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진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교회의 지체들이 사랑으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낼 때 교회 안에 그리스도가 풍성해져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수준까지 자라나게 된다는 것이 에베소서 4:15절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역자들의 역할은 성도들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한시적으로 복음을 올바로 전하고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가르쳐서 성도들이 말씀의 사역을 하도록 하는 것이 사역자의 역할이지, 자신이 교회에 둥지를 틀고 자리를 차지한 다음(계급) 말씀 사역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래의 말씀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골로새서 3:16)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교회 안에(“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해서 그들이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사역을 하라고 하는 대목입니다. 교회생활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것이지 성직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혼자 설교하고 혼자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사역자가 교회를 처음 세울 때는 임시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기능을 담당해야겠지만, 때가 되면 이것이 교회 모든 지체의 사역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구조에서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제자훈련이나 셀교회 또는 가정교회를 하면 가능합니까?
필자가 연구하고 경험한 바로는 이런 구조들이 평신도 사역이라는 미명아래 오히려 계층을 더 많이 양산해서 유기적 교회가 되는 것을 방해하곤 합니다. 이런 구조들은 전통교회보다는 개량이 되긴 했지만 결국 지도자에게 ‘기생’하게 하는 것에 있어서는 전통교회나 다름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려면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하는 ‘자생’을 통해 ‘공생’해야 하는데, 평생 지도자에게 ‘기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는 신약성경이 추구하는 교회가 세워지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에베소서 4:16)
모든 지체가 자신의 분량만큼 그리스도를 드러내서 공생을 할 수 있는 교회의 토양일 때 위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현대 목사의 직책은 바로 이것을 방해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현대 목사와 같은 직책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초대교회에 현대 목사와 같은 막강한 직책이 없었던 증거는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들에 쓴 아홉 개의 편지들 중 “감독들과 집사들” 즉 교회에서 지도자의 기능을 행하던 사람들을 언급한 편지는 빌립보서가 유일합니다. 나머지 여덟 개 편지들 그 어디에서도 교회 지도자를 지칭한 적이 없습니다.
빌립보서에서도 그냥 “감독들과 집사들”이라고 하지 않고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성도 더하기 감독들과 집사들. 빌립보교회에만 감독들과 집사들을 언급한 이유는 아마 지도자들인 그들 중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들 중에 알력이 있었으므로 특별히 그들을 지칭한 것일 뿐입니다.
또 “감독들과 집사들”이라고 한 것을 볼 때 1세기 지역교회의 지도자는 여러 명이었지 담임이니 단일 감독이니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의 연장자로서 지체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그들을 보호하는 형이나 오빠 또는 누나 같은 사람들이었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사역을 도맡아 하는 현대 담임목사와 같은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존재가 있으면 그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려 하고, 몸의 지체들은 위의 구절과 같은 기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지난 2천 년을 지나오면서 이렇게 저렇게 왜곡되고 변질되어 신약성경이 말하는 원래 교회의 모습이 사라진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진리를 바로 알고자 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십여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 이후로 이것이 사실임을 피부로 느껴왔습니다. 20년 가깝게 목회에 올인했었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 또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기적 교회에 관해 깨달은 것을 여러 사람에게 소개했을 때, 의외로 많은 사람이 거부반응을 일으키거나 아예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뭔가에 세뇌 당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종교인들. 그래서 기독교 안에 맹신, 미신, 광신이 판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잘못된 전통을 생각 없이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
저의 견해를 대변해주는 것 같은 글이 인터넷상에 있기에 아래에 인용합니다. 신앙에 관한 글은 아니고, 생각 없이 그냥 무턱대고 아무거나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을 개탄하면서 어떤 분이 쓴 글인데 아마 이 내용이 교회 안의 교인들에게도 딱 들어맞을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자초지종도 모르면서 큰 소리 치는 사람은 대부분 상대방의 논리 정연한 설명을 듣기를 두려워하거나 귀찮아합니다. 주로 정신이 게으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합니다. 자기보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자기가 모르는 분야를 공부하고 이해해서 확실히 그 내역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손쉽게 진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머리를 조아리고 그 사람의 설명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는 노력조차도 하기 싫어하거나 못하는 사람이 고학력자 중에도 의외로 많습니다.
그냥 자기 밥상에 삼시 세 때 밥만 올라오고, TV의 화면만 꺼지지 않는다면 그냥 오합지졸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검증도 하지 않고 빈 머리통에 주워 담기를 원한답니다. 그건 바로 길거리에서 남이 피우다가 버린 담배꽁초나, 먹다가 버린 빵조각을 빈 깡통에 주워 담는 ‘지식의 거지’와 같은 행위입니다.
그래서 요즘의 젊은 가장들, 소위 white collar 라고 지칭되는 젊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깊게 사고하고 분석하는 것을 몸서리치도록 싫어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럴 능력이 없어 보이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의 사고능력이 컴퓨터처럼 생각의 버튼을 누르자마자 바로 그 답이 나와야 하니 깊게 사고할 시간이 없나봅니다.”
성경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한참 멀어진, 지난 2천 년 동안 변질되어온 기독교 전통에 대해 따져보거나 검증을 하거나 할 생각 없이 무조건 그냥 받아들이는 오늘날의 교인들도 아마 위에서 지적한 부류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신자 제사장주의를 외치면서도 실지로는 성직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는데, 저는 이 성직주의가 유기적 교회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해로운 요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 거룩한 직분과 그렇지 않은 직분이 존재하고, 기름 부음을 받은 종과 기름 한 방울도 바르지 못한 평신도가 존재하고, 평생 설교만 하는 계층과 평생 설교를 듣기만 하는 계층이 존재하는 한 신약성경이 추구하는 유기적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성직이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구약에 있었던 성직이 신약에 와서 사라져버리고 없는 것일까요? 구약시대에 일반 백성들과는 따로 구별된,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거룩한 직분 말입니다. 이것에 관해 적어도 개신교인이라면 아래와 같은 성경구절들을 근거로 해서 이론적으로는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6)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계 5:9-10)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약의 모든 제도도 다 폐하시고 완성하셨으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성직자요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이 성도(‘거룩한 사람들’, 신약성경에 50번 이상이나 등장)임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교회 안에 성직이 따로 있고 특권 계급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의 이유는 이미 앞에서 반복해서 강조했던 ‘성경을 보는 눈’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이 하늘에서 떨어진 책인 줄 아는 사람들에게 설교자들이 구미에 따라 구약과 신약 가릴 것 없이 갖다 이용하는 통에 혼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제사장, 왕, 총독 등 지도자 계급을 오늘날의 목사와 동일시하게끔 세뇌시켰다는 말입니다. 모세, 아론,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나단, 엘리야, 엘리사, 느헤미야… 같은 사람들의 직분이 신약에 와서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져보지도 않고 믿는, 즉 자신이 구원 받고 복을 받고 천국에 가려는 목표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에 있으면, 어느 시대에든 다 똑같이 적용된다는 어처구니없는 논리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이 세상의 계급제도가 1세기 말 이후로 교회에 도입되어 성직자 계층이 굳어져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모든 지체가 몸을 이루는 유기적 교회는 물 건너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짜리 교회'(이남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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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도들의 사역이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봉사활동이 아닙니다. 무슨 성가대원, 식사당번, 청소당번, 안내위원, 헌금위원, 주차위원, 주일학교 교사 같은 것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개역성경이 ‘봉사의 일’이라고 번역을 해놔서 혼동을 일으킵니다. 영어 버전들은 대개 ‘work of ministry’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이 원문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교회 안의 모든 성도가 담당하는 사역을 뜻합니다.
성도의 사역은 바로 다음의 15절에 나오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말씀도 개역성경이 ‘참된 것을 하여’라고 번역함으로써 무슨 말인지 모르도록 헷갈리게 했는데...
에베소서 4:11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 겸 교사로 주셨으니
에베소서 4:12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이것의 올바른 번역은 ‘진리를 말하여(speaking the truth)’입니다. 즉, 성도들의 사역은 교회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진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교회의 지체들이 사랑으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낼 때 교회 안에 그리스도가 풍성해져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수준까지 자라나게 된다는 것이 에베소서 4:15절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역자들의 역할은 성도들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한시적으로 복음을 올바로 전하고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가르쳐서 성도들이 말씀의 사역을 하도록 하는 것이 사역자의 역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