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23 사무엘상 16장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8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9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10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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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문장 가르기
7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하나님께서 키와 용모를 보지 말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의 용모와 키를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용모와 지를 보는 자를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나의 외모를 봅니다. (왕을 주소서 참조)
하나님은 나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십니다.
11 그(내)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고 하십니다.
-내가 가기까지 하나님이 식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12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하나님께께서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십니다.
-내가 그라고 하십니다.(기다리던 자, 바라던 자, 택한 자, 기름부을 자)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십니다.
13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성령타임
1.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하나님께서 키와 용모를 보지 말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의 용모와 키를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용모와 자를 보는 자를 버립니다.
사무엘도 사람인가보다 그렇게 이방 왕들을 부러워하고 왕을 구한 이스라엘백성들을 보고 가슴앓이를 했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눈에 좋아 보이는 것에 마음이 간 모양이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 중에 멋진 아들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 다음 아들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지만 그도 아니었다. 그렇게 일곱 명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아마도 사무엘은 이새 앞에서 머쓱해졌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람의 용모를 보지 말라고 하신다. 이미 키와 용모를 내세우는 자는 버렸다고 하신다. 키와 용모로 따지면 사울왕을 따를 자가 없다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고 하신다. 아니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외모를 중시하는 자를 버리신다고 까지 하신다. 에서와 야곱의 예를 들어보면 아버지 이삭은 눈에 보기 좋은 에서를 택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외모보다 중심을 보시고 야곱을 택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다른 아들이 있느냐고 물은 후 남은 아들을 데려오라고 했다. 그가 오기까지 내가 식사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했다. 마침내 들에서 일하던 다윗이 사무엘 앞에 불려 나왔다. 들에서 일하던 다윗의 모습은 어떠할까?
몇 년 전에 사과 농사를 지은 적이 있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밭에 나가서 세 시간 가량을 풀을 매고 돌아왔다. 오는 도중에 너무나 덥고 목말라서 음료를 사기 위해서 밭 근처에 있는 조그만 슈퍼에서 들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가관이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땀으로 범벅되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또 손은 흙먼지 투성이었고, 옷은 흙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내가 느끼지는 못하였지만 내게서 땀 냄새 또한 많이 났을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그랬는지 아니면 이 지역의 정서(불친절)가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주인 아낙이 퉁명스럽게 내게 반말을 했다. 그녀 말투가 너무 불쾌해서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래본들 무엇하랴. 그냥 오늘 뭐 밟았다는 마음으로 웃고 나오고 말았다. 이 지역 정서가 외모를 많이 따져서 그런 모양이다.
지금 들에서 양을 치다가 헐레벌떡 뛰어온 다윗의 모습이 혹시 내 모습과 같지 않았을까 싶다. 양 냄새, 땀 냄새, 샌들을 신었기에 흙먼지 가득한 발, 커친 손, 헝클어진 머리 등등 - 그가 집으로 들어올 때 이런 냄새들로 가득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때 가족들은 그를 보고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얼굴을 찌뿌리지 않았을까 싶다. 더럽고 냄새난다는 등...., 그런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내가 기다리던 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신 것을 보니 외모를 보지 않으신 것 같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신 이유는 지금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외모는 보지 않으신 것같다. 나 자신을 바라보면 가문이나 학벌이나. 문벌이나 또 재물 등 외형적인 것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나를 택하신 것이다.
십여 년 전에 나의 동기들이 예산에 내려온 일이 있었다. 그들 중에 20세에 신학을 한 젊은 동기가 있었다. 무슨 이야기 중에 그가 혼잣소리로 비웃는 것을 들었다. “참 저런 사람도 쓰시네!” 그 소리를 들었지만 못들은 체 했다. 또 어떤 친구는 내가 목사가 된 것에 대하여 의외라고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택하심에는 후회가 없으시다고 하셨다. 어떤 연유로 나를 택하셨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그 판단 기중이 아닌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자격은 누가 주는가?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격에 대하여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격은 우리를 쓰시는 분이 정해주신다. 이새나 사무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선에서 하나님께서 자격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인물, 배움, 체격 등등 또한 이새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자격을 준비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용모와 키를 배격하고 오직 중심을 보신 것이다. 그러므로 택하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쓰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쓸 곳이 있기에 택하신 것이 아닌가? 인간의 잣대인 용모와 키에 미달된 사람이 다윗이었다. 다윗은 제구와 물매만 가졌다. 왼손잡이 에훗은 단검하나였고, 소모는 목동삼갈 그가 가진 것은 소모는 막대기 하나였다. 늙은 모세는 양치는 지팡이 하나뿐이었다. 또한 기드온은 항아리가 전부였다. 입다는 정실 아들들에게 쫓겨난 자였다. 하나님이 택한 이들은 모두 세상이 보는 키와 용모에 한참 미달 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시고 기름을 부어 주셨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는 자를 택하지 않으시는가?
왜 키와 용모를 버리는가?
에서를 보면 에서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고 가문의 장자권도 하찮게 여겼다. 한 끼 먹으면 없어질 팥죽 한 그릇에 거룩한 장자권을 팔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에서의 행동을 보고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하셨다. 그뿐 아니라 에서는 하나님의 영적인 복에도 관심이 없었다. 사울왕도 이스라엘백성들의 요구대로 키와 용모가 최고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세워진 왕인 사울은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사람의 인기에 관심을 두고 백성들 중심으로 살다가 망하게 되었다. 키와 용모를 가진 사람들의 대표적인 사람들은 가인의 후예들이다. 그들이 바로 고대의 용사들이라고 했다. 그들이 성을 쌓고 사람들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고 춤을 추었다. 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셋의 후손들이 그들과 통혼함으로 세상에 홍수 심판이 다가온 것이다.
다윗 역시 세월이 지남에 따라 키와 용모 즉 세력이 커졌다. 그러자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기도 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백성을 계수하기도 했다. 솔로몬도 보자 솔로몬은 자신이 힘이 없고 정치기반이 약할 때는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러나 정치 기반과 자기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즉 키와 용모가 좋아짐에 따라 하나님을 떠나고 결국 하나님이 세운 나라를 우상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키와 용모라는 말은 내용보다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관을 뜻한다. 다른
여기서 ‘용모’는 ‘외관, 모양’이며 ‘키’는 ‘카보아흐’로 ‘높은, 높여진, 지위가 높은 자, 교만한 자’를 뜻한다.
또 ‘그를 이미버렸노라’에서 버린다는 ‘마아스’로 ‘거절하다. 멸시하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외모 보는 자,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는 자, 그렇게 스스로 높아진 자, 높여진 자를 버린다고 하신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다. 속에는 썩은 것이 가득하고 겉으로 치장하기에 바쁜 사람이라는 말이다. 아마도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올 때 이미 기별을 했을 것이다. 그때 다윗을 제외한 이새의 아들들은 더 멋지고 깨끗하게 치장하였을 껏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과는 더욱 구별되어 보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는 사람은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쓰지 않으시지 않은가 싶다. 또 키와 용모가 수려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님으로 삼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아는 어떤 형제는 고대 법대를 졸업하여 십여 년간 고시 준비를 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는 고시와 상관없이 살고 있다. 그의 형편을 들여다보면 굳이 고시 준비하지 않아도 살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서산에 땅이 수십 만평을 유산으로 받았다. 그러기에 굳이 직장 생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키와 용모가 좋은 사람인 것이다.
우리가 이웃에게 전도해도 잘 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헤롯과 빌라도 같이 키와 용모가 준수한 사람들인 것이다. 재산과 직장, 연금 등이 있기에 지금 누리고 사는 것이 천국인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필요가 없기에 전도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
지금 교회의 문제도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어떤 목사님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유산이 너무 많아서 목회를 그만두고 낚시하며 즐기며 산다고 한다. 또 어떤 분은 은퇴를 하면 국가연금, 교단 연금 합하여 한 오백정도가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매달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적인 키와 용모가 준수한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비록 사울 왕과 같이 사용하였을지라도 또 그는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키와 용모, 외관 외형적인 것에 치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다윗과 같이 힘이 없고 여린 사람은 사자와 곰을 만나면 하나님이 필요했다. 그러기에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라고 시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80이된 모세도 자신의 힘과 능력이 없어지고 의지할 곳이 없을 때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하나님이 보신 것은 바로 키와 용모가 아니라 그 중심에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라고 말씀하신다.
2.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사무엘이 감동을 받아 다윗을 보니 ‘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윘다.고 말씀한다. 여기서 ‘눈이 빼어나고’는 눈이 아름답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떤 눈이 아름다울까?
‘눈은 마음의 거울이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네 마음의 맑고 흐림이 네 눈에 다 나타나니 마음을 늘 깨끗하게 하라”라는 교훈이 있다. 즉 가장 아름다운 눈은 가장 아름다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눈을 아름답게 하려면 마음가짐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람들을 접하면서 눈을 본다. 어떤 이는 눈이 흔들리고 탁하다. 어떤 이는 자꾸 시선을 피하고 시선이 흔들린다. 또 어떤 눈은 핏발이 서 있고, 어떤 눈은 살기와 독기가 흐른다. 또 술에 취한 사람의 눈을 보면 핏발이 서고 게슴츠레 한 것이 마치 사자의 눈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눈에는 여러 가지 느낌들이 있다.
여기서 말씀하는 아름다운 눈은 어떤 눈일까? 초롱초롱 빛나고, 선하게 보이는 눈이 아닐까 싶다. 다윗이 이런 눈을 가졌다는 것이다. 거짓이 없고 감출 것도 없고, 또 두려워하지도 않은 정직한 눈, 진실 된 눈이 빛나고 아름다운 눈이다. .
눈 이야기를 하니 나의 청년시절이 생각난다. 나는 장항 제련소 뒤 77분초라는 해안소초에서 방위생활을 했다. 그때 나의 후임병들은 당시 나의 눈빛이 제일 싫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살기가 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만난 고향친구들은 내 눈이 너무 선해져서 아름답다고 했다. 그냥 듣기 좋은 말이라고 생각해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당시에는 마음에 분노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눈빛이 그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니 나의 눈빛이 달라진 것 같다.
또 사무엘이 보니 다윗이 ‘얼굴이 아름답다.’고 했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토브’이다. 토브는 ‘좋은, 즐거운, 선한 얼굴’을 말한다. 사람의 마음이 얼굴에서 나타난다. 몇 년 전에 고향동창들을 40년 만에 만날 기회가 있었다. 20세 전후로 만난 몇몇을 제외하고는 초등학교 이후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들을 만나보니 그 동안의 삶에 얼굴에 쓰여져 있었다. 어떤 이는 아름답고, 선한 얼굴을 가졌고, 어떤 이는 다른 얼굴들을 가졌다. 그 얼굴에 그의 삶이나 마음이 배인 듯 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처음 만나서 그들을 알아보셨다. 무엇을 아셨을까? 물론 하나님이시니 미리 아셨겠지만 얼굴을 보지 않았을까 싶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았을 때 처음 보자마자 ‘간사함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다윗의 얼굴에는 땀과 먼지, 그리고 양 냄새가 풍겼다. 광야의 뜨거운 햇빛이 그을린 구리빛 얼굴, 그것을 빨갛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실제 다윗의 얼굴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일하고 땀을 흘리는 얼굴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이새는 잘생기고 건장한 아들을 앞세워서 사무엘에게 자랑스럽게 내놓았다. 그러나 다윗은 그 틈에 끼지 못했으니 사람의 시각으로는 그렇게 아름다웠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 하나님의 시각에서 아름다운 얼굴이요 총기 있는 눈이었을 것이다. 모세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도 그 어머니의 눈에 모세가 준수하였다고 말씀한다. 자식을 낳은 부모치고 자신의 아들이 예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쁜 법이다. 모세의 어머니 뿐 아니라 모든 어머니에게 아들은 소중하고 준수할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얼굴이 준수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어머니의 눈에 특별하게 준수하게 보이도록 역사하셨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지금 다윗을 보는 사무엘의 눈에 바로 그 눈일 것이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다윗을 아름답게 보신 것일까?
다윗의 얼굴이 붉었다고 했다. 그 모습은 뜨거운 태양빛이 그을린 빛이 붉은 모습이다. 달리 말하면 뜨거운 열정의 모습이다. 열심히 사는 모습인 것이다. 내가 다윗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다윗의 얼굴이 밝은 것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았나 싶다. 다윗이 얼굴이 밝았다는 말은 이렇다.
내가 어렸을 때 손님이 오면 다른 형제들은 남겨 놓고 나가서 심부름하라고 하면 화가 나고 심통이 난다.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다른 형제들은 잔치하는데 혼자 일하라고 한다면 어떨까? 그것도 만만한 게 막내다. 내가 아들로서 막내로 자라보니 그 마음은 조금 알듯하기도 하다. ‘조그만 게 뭘 알아 꺼져, 나가 있어!“이런 말은 흔히 들었던 말이다.
18세에 아버지가 운영하는 배에 선원이 없을 때가 많았었다. 그래서 줄곧 내가 선원을 대신해서 바다에 나가야 했다. 밤바다에서 꽃게잡이 배를 탄다는 것은 당시 나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하고 밤새 그물질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날도 배에 나가야 하는데 너무나 나가기가 싫었다. 다른 형들도 있는데 왜 나만 나가야 하는지 심통이 난 것이다. 그러자 둘째형이 윽박을 지르면서 강제로 배에 태웠다. 나는 오기가 나서 배에서 뛰어 내려서 항만으로 나왔다. 그러자 형이 내 멱살을 잡았다. 평소에는 둘째 형이라면 벌벌 떨었지만 화가 폭발하니까 형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서 휘둘러 형을 때리고 도망쳤다.
이런 일은 비단 나만 일까? 다른 이들은 축제 가운데 있는데 자신만 소외 된다면 좋은 얼굴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의 눈에 비친 다윗은 눈이 아름다웠다고 했다. 이 말은 심통이 난 눈, 화가 난 눈, 원망하는 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화나고 짜증날 상황임에도 다윗의 얼굴은 밝았다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긍정적이고, 시기와 질투가 없는 마음, 또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일 때 이런 모습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자라는 말이다.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는가하고 질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혼자 있을 때 그 모습이 평소의 모습이다. 라고 말이다. 다윗은 기름부음 받고 나서 수많은 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동행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또 왕이 되어서 태평성대를 맞이했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지 못해서 괴로워한 사람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만을 의지한 소년이었을 확률이 높다.
우리가 교회에서 성도들을 보면 누가 아름다운가? 키가 크고 몸매가 좋은 성도인가? 십일조와 헌물을 잘 내는 성도인가? 체격이 우람한 성도인가? 아니면 높은 지위에 있거나 학력이 높은 성도 인가? 목사의 시각이나 성도의 시각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 했다. 말씀대로 사는 성도,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건 다윗과 같은 성도,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같은 성도, 죽으면 죽으리라고 한 에스더와 같은 성도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눈에 누가 아름다운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가슴에 새겨지는 자,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성도가 가장 아름답지 않겠는가?
우리의 아이들이 누가 더 예쁜가? 물론 편애를 하면 안되지만 말이다. 말하면 무엇하겠는가?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자녀가 바로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번에 군에 있는 큰 아들이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조금 장애를 가진 목사님의 아들에게 생일케잌을 보냈다고 한다. 그 사모님이 전화를 해서 아들이 얼마나 좋아하는 지 너무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나는 아들이 자신도 쓰기에 부족한 물질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는가?
3. 그(내)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고 하십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일곱 아들을 둘러 본 후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것은 완전 숫자이다. 일곱 아들을 돌아본 것은 인간에게는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원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이새의 일곱 아들이 건장하고 용맹하다 할지라도 사람의 아들에게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온전하게 세울 수가 없다는 뜻이다. “작은 부자는 사람이 내고,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는 말이 있듯이 오직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다. 머리가 모든 사람보다 하나가 더 있고 제일 준수한 사울 왕이 백이 있다고 할지라도 블레셋 골리앗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고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다. 실제로 나중에 다윗의 형들과 사울 왕과 다른 병사들이 창칼을 들고 모여 있어도 골리앗 하나를 당하지 못했다. 이것은 영적으로 육신으로 아무리 건장하고 수가 많아도 사단을 결코 당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그가 오기까지 식사자리에 앉지 않겠다고 했다. 이 말은 기름부을 자가 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와서 기름부음을 받아야 위태로운 이스라엘을 구원시킬 수가 있기 때문에 그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하나님은 사무엘이 그가 오기까지 식사자리에 앉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결코 쉴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타락한 그 후부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쉬지 않으셨다.
[창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을 자, 그 실로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주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은 쉴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결코 이 세상에서 발을 뗄 수가 없으셨다는 것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그가 오기를 기다리며 쉬지 못하신 것이다. 물이바다 덮음 같이 라는 찬양에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노래하신다. 오늘 사무엘은 그렇게 다윗을 오기까지 기다린 것이다.
소돔성에 있던 롯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인생을 사랑하시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롯은 아브라함의 은혜를 배반하고 타락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간청하여 롯을 구원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사자가 롯에게 속히 이 성을 떠나라고 했다. 그러나 롯은 죄악의 도성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롯이 소돔성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천사가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었다. 그리고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롯은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라고 말하면서 소알성으로 피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하고 말씀하셨다.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그가 오기까지 나는 식사자리에 앉지 못하겠노라.”
내가 천국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편하지 못하시다 하신다.
내가 안전하기 될 때까지 하나님은 쉴 수가 없다고 하신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객지로 나가 모두 탕진할 때 아버지는 고갯마루에서 날마다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키우면서 작은 아들을 성품을 너무나 잘 알았을 것이다. 아들의 성품을 보면 그 돈이 주면서 아들이 이 재산을 가지고 어떻게 살 것이며, 언제쯤 돈이 떨어져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마음 편히 식사자리에 앉지 못했던 것이다. 설령 식사를 할지라도 입에 모래알이 들어간 것과 같고 자신이 재물을 주지 말 것을 하면서 후회의 날도 보냈을 런지 모른다. 아버지는 그렇게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리고 기다린 것이다. 편히 자지 못하고 앉지 못하고 서서 기다린 것이다.
(눅15:20)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얼마나 기다렸으면 거리가 먼데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하신다.
이 또한 식사 자리에 앉지 못하는 것은 바로 나를 기다림이 아닌가 싶다. 세상에서 방황하며 세상에 빠져 있던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모습을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다.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을 때 처음 교회에 나갔지만 며칠이 되지 않아서 성령세례를 내게 베푸셨다. 이것은 거지꼴이 되어서 돌아온 나에게 입을 맞추고 몸을 씻기고 옷을 입혀주신 것과 같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기다리게 했던가 싶다.
오늘 내가 혹시 하나님을 떠난 탕자가 되어서 세상을 향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때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나를 기리시며 그가 오기까지 자리에 앉지 못하겠노라 하실 것이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용모와 키를 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시선이 하나님께로 돌릴 때 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고 하실 것 같다.
다윗을 기다림이 바로 예수님의 기다림이다. 이새의 일곱 아들로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룰 수 없었던 것처럼 이 세상의 힘이나 과학이니 지혜로도 되지 않은 일을 예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하신다. 그 예수님은 마치 사무엘이 식사 자리에 앉을 수 없었던 것처럼, 롯이 안전한 곳에 이르기까지 쉴 수 없었던 것처럼 내가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못하신 것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날마다 예수님이 필요한 곳으로 가서 구원을 이루셨다. 마지 막 밤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람 사랑하시기를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이다. 마지막 구원을 받지 못할까 해서 발을 씻어주시는 일까지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구원의 사역을 마태복음 8장에서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못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가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못하신 것이다. 지금도 성령으로 임하셔서 끊임없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성도를 깨우치고 가르쳐서 구원으로 인도하고 계신 것이다.
4. 내가 그라고 하십니다.(기다리던 자, 바라던 자, 택한 자, 기름부을 자)
양치다가 급히 돌아온 다윗을 보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택한 자, 내가 기다리던 자, 내가 찾던 자, 기름부음을 받을 자, 나를 대신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 나의 이름을 둘 자 인 것이다.
세례요한은 침례를 받으려고 나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로다.”라고 말했다. 바로 내가 기다리던 “이가 그니라.”라고 외친 것이다. ‘이가 그니라.’ 한나가 보고 경배하고, 동방박사가 보고 경배했다. 마침네 십자가 아래에서 로마 병정의 입에서 “이가 바로 그니라” “이가 바로 메시아였다.”라고 고백하게 했던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기다리시는 것일까?
요한복음1장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고 즉시로 ‘그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나를 아느냐의 질문에 내가 이미 너를 알고 있고 기다렸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내 자신을 돌아보면 부족한 것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거름도 되지 못한 고약한 개똥도 약에 쓸 일이 있다고 한다. 개똥과 같은 내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쓸모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윗이 광야에서 더럽혀진 모습으로 사무엘에게 나간 것처럼 비록 내가 세상에서 먼지와 땀과 오물로 더럽혀 졌음에도 나를 보고 “이가 그니라.”하시고 내게 귀한 일을 맡겨 주셨다. 세상에서 아무 가치 없는 나를 가치 있는 일을 맡겨 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5. 하나님께서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십니다.
-기름 부음이란?
‘기름을 붓다’에 해당하는 영어단어는 ‘Anoint’이다. ‘기름을 붓다(anoint)’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크리오(chrio)’이고, ‘기름부음(anointing)’에 해당하는 단어는 ‘크리스마(chrisma)’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구세주’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그리스도(christ)가 chrio에서 파생되었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자를 의미한다. 기름부음 은 직임을 위해 부어진다. 즉 하나님의 종들을 택하여 직임을 맡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특별한 임명이 필요하다. 그것을 행하는 것이 기름부음이다. 기름부음의 대상자는 구약의왕, 선지자, 제사장을 기름부어 세운다. 기름부음의 의식은 그들에게 사역자의 권위를 외적으로 천명하는 행위이다. 또한 이렇게 기름부음을 받으면 형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위에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의 권능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성도의 삶을 살고,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기름을 부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거룩히 성별된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야(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또 요단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위로부터 임했다.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다.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고 “이가 그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하셨다.
-택한 자에게 기름을 부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에게 기름을 부어주신다. 사사들도 기름을 부어주셨고, 사울왕도 기름을 부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예언을 했다. 다윗에게 기름이 부어지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것이다. 제자들도 위로부터 능력이 임함으로 능력 사역이 펼쳐진 것이다.
그래서 요한1서 2장 27절에서는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구원을 받고 40일 철야 중 21일차 되는 날 강력한 성령이 임하셨다. 그 당시 기름부음이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후로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살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금도 강력한 기름부음이 있기를 원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성도에 직임에 따른 기름을 부어 주고 계신 것이다. 성도가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기름을 부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삶을 살게 하는 성결의 영을 부어주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