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2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3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4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5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6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7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8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9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10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11편] 참고 인내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 전략과 처세술의 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12편] 참고 인내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전략과 처세술의 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문은 국방tv 토크멘터리전쟁사의 내용을 요약정리한것임을 밝힙니다.
※실제 역사와 다른 각색이 있을수 있습니다
https://youtu.be/U2jwudzG3O4?list=PLXdSlvcMdcutsDFc3msNpq4POgXsX_wNN
여지껏 자신이 일구어놓은 모든 영지를 버리고
호조 가문의 땅으로 가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도쿠가와 이에야쓰.
이건 말이 안되는 처사였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쓰 또한 알고 있었다
지금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붙어도 승산이 없다는 것을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다시 한번 더 인내해야만 했다.
결국. 자신이 그렇게 싸워서 지킨 미카와를 포함한 영역을 모두 내주고
호조 가문이 지배했던 영지로 멀리 밀려나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교토에서 한참 동쪽으로 물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선 자신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을 멀리 추방한 셈이 되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반기를 들어 천하인을 향한 최후의 승부수를 띄우지 않고
순순히 호조 가문의 땅으로 간데에는 모종의 이유가 있었다.
관동의 호조 가문의 영지 바로 옆에는
에도 평원이라 불리는 드넓은 평야가 있었다.
그곳은 지금의 도쿄이다.
이 에도는 당시에 바닷가에 위치해있는, 물론 간간히 사람은 살고 있었지만
갈대밭이 많은 거의 황무지 평야였다.
전국시대에서 평지의 땅은 군사적 가치가 매우 낮은 선호도가 낮은 땅이었다.
적군을 방어하기 좋은 분지나 산악 지형의 선호도가 더 높았다.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을 버리고
이런 곳으로 와서 입지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닌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미래를 본 파격적인 선택을 내린 것이다.
이 에도 평야(간토 평야)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 하게 커서
지금도 기차타고 2시간 정도는 가야 언덕이나 산이 나올정도로 넓은 평야지대였다.
갈대밭이고, 이렇게 물이 들어 오는 곳은
개간에만 성공하면 엄청난 노다지 땅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항구로써도 최고의 입지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바로 이점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이 바뀐 것을 감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마치 오사카를 건설하듯 에도(도쿄)에 자리를 잡고 황무지를 장기투자해 개척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관서의 오사카에 견줄만한 대도시를 건설해
관서에는 오사카 관동에는 에도라는 얘기가 나돌정도로 크게 발전시키게 된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일본의 수도 도쿄를 만든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지역을 개간하는 것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개간이라는 것은 원래 보통 쉬운일이 아닌법.
특히 처음 에도로 가겠다는 결정을 할때
미카와 가신단의 반발이 어마어마했다.
미카와 가신단은 그 자체로 유명세도 있거니와
자신의 영지 '미카와'에 대한 애착도 대단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평생 싸워 지킨 땅을 버리고 간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도쿠가와는 리더십을 발휘해 이들을 타이르고는 미카와 가신단에게 앞으로는 양심적인 관료가 될 것을 요구했다.
개간작업은 반드시 사람들이 모여야 성공을 거둘수 있다.
그러려면, 세금도 싸고 관리들 또한 양심적이고 착해야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과 함께 싸워온 미카와 가신단에게 요구한 것은
"이제부터는 싸움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관료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는 것이었다.
처한 환경에 따라 정확한 대응을 해 변화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처세술이었다.
도쿠가와의 당부에 따라 가신단과 부하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고
농지를 주며 세금을 적게 걷기 시작하자, 전국에 소문이 나 각지에서 에도로 사람이 몰려들었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개간 사업을 굉장히 크게 성공시킨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의 달인이었지만,
아무런 계획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쓰를 관동으로 쫓고 나서
내정에 더욱 신경쓰기 시작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상업과 무역정책을 이어가지만 교묘한 봉쇄정책과 기독교를 견제정책을 사용했다.
도요토미는 과거 전국시대 봉건제와는 다른 새로운 세상의 제도를 만들어낸다.
대표적 정책으로 병농분리 정책을 썼는데
이 병농분리 정책을 쓰면서
병기 몰수령을 내려 농민들의 병기를 전부 몰수하고는
무사 계급은 반드시 칼을 차고 다니게 하여 이를 신분의 상징으로 나타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승려들의 무기도 몰수했는데, 승려들은 극심한 반발을 했다.
이때 사찰에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조총과 무기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이 병농분리제도의 의미는
촌락을 자체방어하는 기존의 봉건제 개념에서 벗어나
무사계급을 사회적 신분으로 만들어 아예 촌락에서 벗어나 도시에서 도시인으로 살으라는 의미였다.
그러면서도 사무라이 계급에게 농민이 될 수 없도록 하였으니,
사무라이 계급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행정관료로써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무인에서 문인으로의 전향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실제로 행정관료로 활동한 사무라이는 극소수뿐이었고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은 떠돌이 낭인이 되었다.
더 이상 전쟁도 없고 자신이 소유한 땅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무라이들의 유일한 자기표현의 수단은 사무라이로써 가진 정체성 뿐이었던 것이다.
이 사태는 훗날 사무라이 정신이라 불리는 문화적 정체성을 만드는데에
큰 역할을 하게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떠돌이 사무라이들이 차고 다니는 칼은 대부분 가짜 칼이었다.
무기가 있으면 휘두르고 싶은게 사람의 심리인데 칼을 함부로 사용했다간 큰일나니
차고다니는 칼은 대나무칼 or 손잡이만 있는 칼로 소위 보여주기 식이었다.
게다가 결투금지법에 의해 싸움을 하지 못하게 되어
이들은 나중에는 골칫거리 신세가 되었다.
한편 농민들은 비로소 제대로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기존의 촌락단위에 세금을 걷는 방식에서
경작자 개개인에게 세금을 걷는 방식으로 대대적인 법 개정을 이루었다.
농민이 생산량의 1/3
영주가 1/3
국가가 1/3 을
가져가는 333 방식으로 새로운 기준이 세워진다.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도시의 구조도 점차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점차 산에서 평지로 성들이 내려오기 시작했고 그런 성들에는 상인 거주지역, 무사 거주지역등으로 분리시켜 놓았다.
전국적으로 통일정권이 세워진 뒤 쌀의 규격화,도량형 통일 등이 이루어졌고
느슨한 법규와 체계들이 바로서기 시작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 광산을 독점하고
나가사키를 직할령으로 만들어 상업 무역 수익을 챙겼다.
이에따라 막부의 재정이 날이 갈수록 튼튼해졌다.
내정으로 빠르게 안정화하는
통일 일본.
이런 시대적 상황속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그러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 임진왜란을 일으켰을까 ?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조차 의견이 분분하게 갈린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은 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들과 , 동맹세력이 된 모리 가문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첫번째 정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봉건제 확립이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부하들에게 나눠 줄 땅이 부족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조선침략을 택한 것이라는 얘기다.
두번째 얘기로는, 일본이 원했던 것은 중국이라는 무역시장을 열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다.
명나라는 당시 쇄국정책을 피고 있었기에 명나라 안에서 활동하는 무역상인, 밀무역자, 해적들은 이미 외국으로 가서 화교가 되거나
본거지를 만들어 활동했다. 조총을 처음 타네가시마에 전파한 왕직의 근거지도 일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중국은 당시에도 서방세계가 탐냈던 최대의 시장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황을 모시고 북경에 가서 성을 짓겠다는 말을 평소에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쳐서 명나라를 압박하자는 의도였을수 있다.
정명가도(명으로가는 길을 빌리다.)를 핑계로 조선을 침략한 히데요시는 조선을 만주와 명을 잇는 루트로 생각했다.
배로 가는 것보다는 육로로 통하는 것이 훨씬 안전한 방법이었다.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한 주요이유도
일본이 만주의 여진족과 합심해서 쳐들어 올 사태를 대비하여 조선에서 막기 위함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대대적인 은광개발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국제무역통화가 주로 은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명나라의 쇄국정책이 답답했을 것이다.
이 밖에도 포르투갈 무기상인들이 뒤에서 자본을 이용해 조작했다는 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쳤다는 썰 등등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적인 욕심도 상당했던 것 같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뿐만 아니라 동남아에도 협박편지를 보낼정도였다.
당시 일본군대가 동아시아를 뒤흔들정도로 강력한 군대였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결국 조선에서 막힌 것을 보면 이는 과도한 야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임진왜란 ~
정유재란을 거치며 병사했고,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게 된다.
아들과 동생이 임진왜란 직전 죽어 후계자가 없었던 히데요시는
후계자 문제를 생각치 않을 수 없었고
누나의 동생 즉, 조카인 히데쓰구에게 관백의 자리를 물려준다.
하지만,
얼마지나지않아 히데요시의 후실 요도 도노가
아들을 출산하게 된다.
뒤늦게 요도 도노가 아들을 출산하자
히데요시는 치밀한 계획을 통해 조카 히데쓰구가
반란을 모의한다는 누명을 씌워 할복시키고
그 일가족까지 몰살시켜버린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요도 도노는
히데요시의 조카가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관백의 자리를 물려주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훗날 일본사 3대 악녀 중 한명으로 평가되어지는 인물이다.)
곧,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게 되는데
죽기전 히데요시는 도쿠가와를 불러 자신의 어린 아들의 안위를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사망한다.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사회는 다시한번 거대한 전쟁의 조짐이 보여가는데 ...
- 다음편에 계속
댓글은 글 작성에 매우 큰 힘이 됩니다.
출처 - 펨코 제트 https://www.fmkorea.com/3507767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