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함을 지키고 세속에 물들지 않다
담양 독수정과 물염정
무등산 정자문화의 효시가 되는 독수정
정자란 본래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다.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주택이랄 수 없고 양반들이 놀아나던 별장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곳은 어느 곳보다 많은 사람들이 머물렀던 장소이고 유서 깊은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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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하면 우리는 양반들이 음풍농월 하던 여흥의 장소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정자는 그런 소극적인 의미의 풍류의 산실뿐만 아니라 도학과 문예를 겸비한 선비들의 도량으로 당대 지식인들의 총체적 문화활동의 장소였다.
특히 이곳의 정자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는 향촌 사회에서 성장한 호남사림의 정치적 거점으로까지 발전했다. 무등산 자락의 정자는 바로 그 시절을 증언하는 문화유산이다. 16세기 이후 호남 사림파가 일구어 낸 학문과 드높았던 문풍은 바로 이들 정자에서 싹트고 완성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월이 흘러 이젠 주인마저 없는 쓸쓸한 빈 집으로 남아 있지만 이곳을 거쳐간 기라성 같은 인물들의 발자취가 곧 우리 지성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무등산 자락의 수많은 정자 중에서 최초의 불씨가 된 것은 담양군 남면 연천리에 위치한 독수정이다. 광주호 주변의 저 유명한 정자와 원림인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소쇄원을 둘러보고 화순 방면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담양군 남면 소재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독수정 원림'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독수정은 고려말 공민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서은 전신민이 살았던 곳으로 그 역사가 무려 6백년이나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왕조를 창업하자 한 나라에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남하해 몸을 숨긴 선비이다.
정자는 몸을 감춘 옛 주인처럼 나지막한 언덕배기 소나무숲에 묻혀 있다. 훗날 그의 은둔을 기리는 뜻에서 사람들은 이곳을 산음동이라 부른다.
독수정의 건축적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중앙에 작은방 한 칸이 딸려 있는 단촐한 모습으로 마을을 등진 북향인 것이 특징이다. 전신민은 아침마다 이곳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배례하고 망국의 한을 달랬다고 한다. 이는 망해버린 고려 왕도 개경을 향한 그리움이었으리라.
홀로 지키는 집이라는 이름의 독수정. 당호는 "백이숙제는 누구인가 홀로 서산에 절개를 지키며 죽어갔다네." 라는 이백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변절의 시대를 흔들림없이 살다 간 한 선비의 꿋꿋한 절의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 편의 시로 남겨 놓았다. 이 애틋한 시가 걸려 있는 독수정. 오랫동안 나그네의 마음을 떠나질 않는다.
자욱이 이는 티끌 시름도 하도 할사
그 어느 구름 숲에 늙은 몸을 숨길고.
머나 먼 천릿길에 흰 머리를 나부끼고
한평생 눈물 지은 하늘은 싸늘해라.
님은 이미 가셨어도 한 많은 봄풀은 돋고
두견은 꽃가지 사이로 달빛을 부르짖네.
이 산골 푸르름 두르고 묻힌 백골 죽어도
두 나라 아니 섬기리 홀로 지킬 집을 짓자.
'독수정술회 '
독수정에서 연천리로 내려와 구비구비 무등산 자락을 넘어가면 화순군 이서면에 이른다. 이곳에 기암절벽과 푸른 물줄기가 어우러져 천혜의 승경을 자랑하고 있는 적벽이 있다.
화순 적벽, 지금은 그 명성이 빛을 바랬지만 무등의 갈메빛 봉우리를 가슴에 안고 옥빛 물줄기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이 명승은 호남의 선비들이 사랑했던 최고의 풍류지였다. 또한 방랑 시인 김삿갓이 병든 몸을 이끌고 찾아와 "이곳에서 잠들고 싶다"며 닳아빠진 대지팡이를 품에 안고 한 많은 생을 마쳤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토록 아름다웠다는 적벽의 모습은 동복댐이 들어서면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반은 수장되고 반은 수원지를 보호하기 위해 철조망에 둘러쳐져 있다. 다만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높다란 언덕에 고색 짙은 정자 한 채가 살아 있어 옛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이름하여 세속에 물들지 않고 청정함을 지키겠다는 물염정(勿染亭).
정자가 들어선 자리는 언제 가 보아도 운치가 있다. 바람소리, 물 흐르는 소리 그윽하고 고색창연한 자태는 날아갈 듯 처연하다.
그 이름도 산이나 강 달 구름 나무 바위가 어우러진 자연의 정취에 흠뻑 젖어 있다. 풍류를 아는 길손이라면 누군들 그곳에 머무르며 세상사 시름을 달래보고 싶지 않을까.
옛 사람들의 마음을 쫓아 속세의 번잡함을 잠시 묻어두고 정자에 오르면 지난 시절 이곳에 머물다간 사람들의 향기로운 자취가 완연하다. 기둥마다 청류재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흔적으로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 있는 것이다. 하나 하나 살펴보니 30여 개가 족히 된다. 그 이름들도 김인후 김식 권필 김창협 김창흡과 같은 당대의 거유들이다.
마룻장에 앉아 산천풍경을 바라본다. 눈앞으로 들어오는 바위절벽이 티끌 하나 물들이지 말라는 옛사람들의 호방한 기개를 그대로 전해준다. 저 강물처럼 휘휘 돌아간 붉은 암벽이 다름아닌 적벽이리라.
1778년 화순현감인 아버지를 따라와 남도 땅에 살았던 17세의 다산, 그도 이곳 물염정을 찾아와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술을 따르고 시를 읊은 적이 있었다. 그날 다산 선생이 머물렀을 때는 정자 주변에 대나무숲이 가득 차 그 사이사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적벽의 풍치가 무척 아름다웠노라고 기행문에 적고 있다. 그러나 울창했던 대나무숲은 흔적도 발견할 수 없고 적벽의 물줄기는 메마를 대로 말라 있다.
적벽이란 이름은 소동파가 뱃놀이를 하며 천하의 명문 '적벽부'를 지었던 중국 양자강의 적벽에 견주어 호남 사림의 태두였던 신재 최산두가 붙였다. 그런데 화순에는 이 적벽이 두 군데나 있다. 이서면 창랑리의 물염적벽과 장항리의 장항적벽이 그곳.
물염적벽은 암벽보다 강가와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답고 장항적벽은 백 길이 넘게 깎아지른 암벽이 일품이다. 태고적 신비를 간직한 듯한 장엄함을 보여주었던 장항적벽. 하지만 10여 년 전 광주 시민의 식수원인 동복댐을 확장하면서 물 속에 수장되어 옛모습을 잃고 말았다.
물염정은 16세기 중엽, 담양 출신의 정자 주인인 송정순이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송정순은 중종ㆍ명종 때 성균관 전적, 춘추관 박사 및 구례 영암 금산 등지의 군수를 역임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은둔, 후학들을 가르친 학자로 물염(勿染)이 그의 호.
그러나 일설에는 송정순의 부친 청심헌 송구가 물염정을 지었다고도 한다. '물염정원운'등의 시문이 송구의 작품이라는데 근거한다.
물염정 정자에 걸려 있는 '물염정원운' 시문에는 작자가 송정순의 외손자인 창주 나무송으로 새겨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원운이란 창건을 전후한 시기에 씌여지기 때문에 송구의 작품일 가능성이 많다.
어쨌든 창건주가 누구인지 정확히 단정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국화잎을 따 술독에 띄운다' 는 이 시에는 이곳에 머물며 살던 옛 선비의 풍류가 얼마나 멋스런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몇 칸 띠집을 동쪽 언덕에 짓고 보니
문밖 풍광이 마음에 들어 도연명에 감사한다
강가에 밤비 내려 고기잡이배는 젖고
골짜기 구름 흩날리니 아침 옥봉이 높구나
아이는 낙엽을 모아 붉은 밤을 굽고
아내는 국화잎을 따 술독에 띄우는구나
숲에서 사는 재미 진즉 알았던들
무엇하러 수고롭게 관직에 몸 담았으리
'물염정원운'
물염정에 담긴 뜻은 티끌에도 물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정자는 빈 집의 퇴락함으로 남아 있지만 수묵처럼 어둠이 번지는 밤, 정자의 마룻바닥에 앉아보라.
거기 천년 그대로의 뭇별이 쏟아져 내리고 풀벌레소리 귓가에 가득할 때 옛모습 그대로 정자는 살아서 숨쉬고 있다.
벼슬길을 물리치고 향리에 물러앉은 은일자적하는 선비의 일상이 절로 눈앞에 그려진다.
우리 시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거래사가 아닐른지.
이뿐인가 묵수자 유성운이 쓴 '물염정기"를 읽어보면 경외의 마음까지 불러일으킨다.
"이 아름다운 정자가 소문이 나면 구경오는 자 한둘이 아닐진대 만일 누군가가 이곳에서 가무(歌舞)를 즐긴다면 색깔과 소리에 물드는 것이요, 뱃놀이를 한다면 유랑에 물드는 것이요, 잔치를 벌이며 떠들면 공명에 물드는 것이요, 종복을 거느리고 으리으리하게 지나가는 것은 권세로서 이 순결을 물들게 하는 것이 된다. (중략)
마땅히 그 맑은 물결과 안개와 달무리들로 사방이 고요하여 한오라기 티끌도 이르지 못해야만 실로 물들지 않는 정자라 할 것이니 이때 한 사람이 이곳에 오면 마음이 담연해지고 온 생각이 다 비어 맑은 연못의 거울 같은 고요함이 어릴 것이다."
청정하고 고졸했던 선인들의 풍모가 수묵처럼 번져오는 말이다. 이렇게 물염정기를 써 내려간 유성운은 그 말미에 기문(記文)을 짓는 일 또한 글로써 이 순수함을 물들이는 것이 되어 사양했더니 주인이 말하기를 "앞의 네 가지가 속됨에 물든 것이지만 글을 남기는 것은 깨끗함에 물드는 것이니 어찌 같을 수가 있으리오" 하여 삼가 붓을 들어 이 글을 쓰노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이 얼마나 멋스러운 정경인가. 이래서 옛집을 찾아가는 발길은 향기롭기 마련이다.
ㅡ 이형권
마음이 먼저 가는 고향이야기
'그리운 곳에 옛집이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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