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좌를 튼 다음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명상지도사 송영경씨가 명상을 이끈다. 장소는 범어사 등나무 군락지인 등운곡 옆 아름드리 편백나무가 빙 둘러선 작은 쉼터. 이윽고 금정 계류가 흐르는 소리, 조릿대 일제히 바람에 아우성 치는 소리, 더하여 오색딱다구리가 목탁을 두드리듯 나무결을 파는 소리, 그리고 내 속에 고여 있는 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매월 둘째 수요일이면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금정산을 찾는다. 이들은 (사)걷고싶은부산이 주최하고 새세상여성연합이 주관하는 ‘명상과 함께하는 금정산 갈맷길 걷기’에 참가한 사람들이다. 주말 이 산중에서 명상은 어렵다. 너무 방문객이 많아 조용하고 그윽한 상태에서 마음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명상을 위해 인원도 스무 명을 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이 즐겨 찾는 코스를 따라가 보자. 대체로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범어사역에서 집결한 다음 범어사 어귀 교차로로 이동한다. 도로변에는 신리마을 당산나무 한 그루가 동민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 서 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 주는 것이다.
신리마을은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1940년대 북면 사무소가 기찰(부곡동)에서 팔송으로 이전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팔송정은 현대자동차학원자리로서 여덟 그루의 소나무가 정자와 함께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범어사 어귀 교차로까지는 약 5분 거리. 방향을 좌회전해 경동아파트 쪽으로 이동한다. 모퉁이에 옛날 찐빵집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입소문을 타고 번지더니 제법 유명해졌다.
어느 비 내리는 날 불현듯 금어동천을 찾았을 때 첫 목적지는 금어동천(金魚洞天)이다. 경동아파트 방향과 범어사 순환도로 쪽 둘 다 이용이 가능하다. 초하의 볕을 피해 그늘이 있는 순환도로 쪽을 타고 오른다. 약 10분쯤 언덕길을 휘감아 오르면 성불사와 원효사 안내표지판이 서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들머리로서 입구에서 10m 정도 들어서면 좌측 능선 오솔길이 열린다. 노폭은 1.5m 정도이며 리기다소나무가 참나무류와 어울린 길이다. 5분 정도를 다시 걸어가면 네 갈래 길이 나온다.
숲바닥은 거지덩굴과 마삭줄, 덩굴딸기가 군락을 이루고 무덤가에는 엉겅퀴가 피기 시작했다. 가끔씩 뻐꾸기가 울었다. 누군가 낫을 들고 오솔길을 다듬으며 온다. 길 위로 줄기를 뻗어 영역을 확장하는 덩굴성 풀들의 가지를 쳐내고 있었다. 의외로 금정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했으나 그는 손사래를 치며 사라졌다. 여름 숲은 사람의 길을 호시탐탐 노린다. 조금만 사람의 발길이 뜸해도 숲은 사람의 길을 감추어 버린다. 그리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다.
실제 금정산은 너무도 많은 등산로가 나 있다. 너무 많아 헤아리기도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금정산의 전체면적은 42.98㎢로 꽤나 넓은 크기이지만 산자락 주변은 금정구를 비롯해 동래구, 북구, 양산지역의 도심에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달리 갈 곳이 마땅찮은 시민들은 자연히 금정산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보니 길은 사방팔방 생겨나는 것이다. 금어동천길 역시 예외가 아니다. 불과 2km 남짓한 거리인데 갈림길을 비롯해 샛길은 10여 개나 된다. 어찌 보면 산과 숲이 몸살을 앓는 것이다. 아무튼 이 달갑지 않은 현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속 가능한 이용을 위한 지혜가 요구되는 것이다.
숲의 평화를 기원하며 내쳐 걷는다. 금어동천에 이르기 전 거쳐 가야 할 지장암으로 가는 길이다. 수런수런 푸른 대숲이 다가선다. 대(竹)의 굵기가 어른 팔뚝보다 굵은 맹종죽이다. 누가 먼저 뿌리를 내렸는지 모르지만 산벚나무 서너 그루 몰골이 말이 아니다. 맹종죽 무리에 포위당해 한창 잎 내고 열매 달아야 할 시절에 빈 가지다. 숫제 말라서 고사한 녀석들까지 있다. 삼밭에 쑥을 떠올렸다. 쑥이 심처럼 줄기를 세운다고 했던가.
대숲을 돌아 내려서자 식나무가 두 줄로 식재되어 있고 서어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아치를 이룬다. 계단을 딛고 올라서자 지장암 마당이다. 펴다만 우산대 같은 수형의 메타세쿼이아 한 무리가 일렬로 도열하여 서 있는데, 절집 처마와 묘한 각을 이루고 있다. 묵언 정진 중이다. 종무소 앞에는 오래된 살구나무 한 그루가 연분홍 화사했던 봄날의 기억을 노란 열매 속에 담고 있다. 침이 고인다.
절마당을 가로 질러 다시 순환도로 옆 자붓한 오솔길을 탄다. 마치 누가 더 좋은 길이냐는 듯 한동안 나란히 달린다. 아니 순환도로는 달리고 오솔길은 걷는다. 흰빛 수피의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서어나무들이 마중이라도 나온 듯 금어동천 입구에 서성인다.
얼마나 좋았으면 금어동천이라 했을까. 특히 동래부사 정현덕은 이곳을 즐겨 찾았다 하니 그이의 눈에 비친 그 시절 이곳의 풍광이 새삼 궁금하다. 바위(가로 3m x 세로 2m) 중앙에 ‘금어동천’이라 음각하고 그 옆에 김철균(金撤均)의 이름을 명시했다. 앞 바위에 정현덕, 그 밑에 윤필은, 건너편에는 김교헌 동래부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름을 새긴 사람들은 세대를 달리 한다. 그렇다면 이미 오래 전부터 명소로 회자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비 내리는 날 불현듯 금어동천을 찾았고 그때 계명봉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계류들이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놀라움이란-. 우중의 금어동천은 별천지와 같았다. 비탈에 선 나무들 사이 안개가 승천하느라 춤을 추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 역시 잠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금어동천, 금어동천 노래했지만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 맛을 알 수 없다.
비석골의 비석들이 말해 주는 것 오솔길을 비스듬히 이어가다 보면 다섯 기의 비석(정현덕, 홍길우, 조엄, 정현교, 장호진)이 서 있는 비석골이다. 피폐한 사찰구제와 보시로 은덕을 베풀었던 부사들의 마음씀에 대한 고마움을 범어사는 불망비로 대신했다. 특히 영조시대의 조엄(趙 , 1719~1777)과 범어사는 각별한 인연으로 전해진다. 비문은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비(巡相國趙公 革祛寺幣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다. 요점만 이야기 하자면 그가 조선시대 초 낭백(浪佰) 또는 만행(萬行) 수좌로 불렸던 낙안선사(樂安禪師)의 현신이라는 것이다.
선사는 갖은 선행과 보시로 삶을 일관했다. 입적을 앞두고 그가 머물던 방 앞에 ‘문을 여는 사람이 바로 이 문을 닫는 사람(開門者是閉門人)’이라는 유필을 남겼는데, 훗날 조엄이 그 문을 열고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 아래 만연했던 폐해를 척결했다는 이야기다. 그 인연 새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또 한 명의 이름이 눈길을 끈다. 고종 시절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 1810~1883)이다. 대원군의 심복으로 쇄국정책을 주도했지만 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 척족정권에 의해 파면되어 유배당했다. 동래부사 재임 중에 동래부의 인정과 경치를 노래한 시 ‘동래별곡(東萊別曲)’이 전한다.
동래부사는 1546년 초대부사 이윤탁으로부터 시작해 1895년 사임한 정인학에 이르기까지 349년간 모두 255명이 거쳐 갔다. 그 시절 부산은 작은 포구에 불과했고 동래가 부산의 중심으로 동래부사는 국방과 외교를 책임지는 자리인 만큼 국왕의 신임이 두텁고 강명한 인사들이 많이 발탁되었다. 부산 곳곳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래부윤 출신으로 대한제국 임시정부 재무차관을 지낸 독립운동가 윤필은(尹弼殷 1861~ ?) 역시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아무튼 그들은 거기 늘 서 있다.
배흘림 기둥으로 아름다운 범어사 일주문 모퉁이를 돌면 범어사 매표소다. 그에 앞서 남산봉과 의상대가 그림처럼 걸려 있다. 이제 범어사로 발길을 옮긴다. 범어사는 금정산 자락이 동쪽으로 완만하게 흐르면서 계명봉과 만나는 두 산세가 맞부딪히며 이루는 Y자형 계류 사이 넓은 경사지대에 자리를 틀었다. 대부분의 건물이 동쪽을 주향(主向)으로 배치했고 절 입구로부터 대웅전까지의 동선은 상승감과 더불어 공간적 위계를 가지게 했다.
일반적 가람의 배치는 회랑식(回廊式)이 주류를 이루지만 범어사는 종열식으로 하여 하단의 경우 속진(俗塵)을 걸러내는 통과의례 수단으로 금정 계류와 어산교를 건너게 하고, 중간 단은 법회와 불재, 신참스님의 강학과 수행거처로, 상단은 화장세계(華藏世界)의 중심이자 가람세계의 중심으로 편재했다. 그 흐름을 따라가 본다. 먼저 금정팔경 중 제1경인 어산노송(魚山老松)을 만난다. 언급했듯 속세와 사찰의 경계를 어산교가 구분하는데, 어산교에서 일주문으로 향하는 주위 낙락장송이 그 풍경이다. 큰비 오는 날 어산교는 굉음을 울리며 거침없이 돌진하는 금정계류의 장쾌한 맛을 보여 준다.
일주문까지는 약 150m. 배흘림 둥근기둥으로 무거운 지붕을 이고 있는 일주문은 범어사에서만 볼 수 있는 뛰어난 건축물로 공학적인 면에서나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어떤 절집의 일주문보다 아름답다. 좌우 편액은 ‘금정산 범어사’와 ‘선찰대본산’이 걸려 있다. 일찍이 의상대사가 화엄십찰의 하나로 창건한 이후 구국승 서산의 법맥을 이어오다 근대에는 경허, 용성, 동산을 거치며 선찰로 거듭났다. 1970년대 어느 해 범어사를 찾았던 시인 고은(당시에는 스님이었음)은 화엄에서 선종으로의 변화가 ‘덧없다’고 했던가.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천왕문이지만 얼마 전 누군가의 방화로 소실되고 주춧돌만 남았다. 거기서 뒤돌아보면 계명봉이 우뚝하다. 금어동천은 계명봉의 솔숲이 미끄러져 내린 계곡에 들어앉았다. 20보 정도 앞에 불이문이 있고, 거기 어칸 좌우에 동산스님이 쓴, 신광불매만고휘유(神光不昧萬古煇猷)와 입차문래막존지해(入此門來莫存知解), 곧 ‘신광의 밝고 오묘한 뜻을 알기 위해서는 이 문을 들어서면서부터는 속세의 지식을 버려야 한다’는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하기사 그 오묘한 뜻을 진즉 깨우쳤다면 나 역시 속세를 버렸을 것이나 아직은 미몽일 뿐이다.
계단을 오르면 보제루, 미륵전, 비로전이 있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보물 제434호)을 비롯해 관음전, 지장전 등이 있다. 범어사를 관통한 셈이다. 화재로 천왕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범어사는 여전히 호국사찰로 선찰대본산으로 한국 절집의 맏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등나무 500그루 밀집, 천연기념물 지정 범어사를 주마간산 돌아보고 다시 어산교에서 등나무 군락이 있는 등운곡(藤雲谷)으로 들어선다. 목재데크로 만든 다리를 통해 계류를 건넌다. 등운곡은 등꽃이 구름처럼 모여 핀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등나무군락지는 1966년 1월 13일 천연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으며 범어사에서 소유, 금정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등나무 군락지에는 약 450~500주가 있다. 다양한 형태의 등나무가 자라고 있다. 등나무 숲에 뿌리내린 서어나무며 팽나무가 등나무 등살에 힘겹다. 등나무 군락지를 벗어나면 조릿대 밭이다. 바람이 불자 떼지어 소리치며 아우성이다. 숲 지붕은 팽나무며 삼나무, 편백, 서어나무, 상수리나무가 하늘을 덮어 한낮인데도 어둑하다. 잠시 내리막을 내려와 상마마을로 향한다.
상마마을은 청룡동 자연마을 중에 하나다. 상마·하마는 청룡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이곳에 마(麻)를 많이 심었던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원래 마을은 범어사의 창건 이래의 잡역에 종사한 사람과 목수의 가족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는 닭백숙 등을 판매하는 음식점이 즐비하다. 안타깝게도 특색이 없다. 국적불명의 건물과 제주 돌하르방 등이 무분별하게 설치되어 있다. 이왕에 존재하는 시설이라면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마을이기를 희망한다.
만성암과 청초집 사이에 난 데크길을 따라 부산외대운동장으로 향한다. 만성암 일원은 봄날이 압권이다. 거기 목련이 일제히 피면 마치 구름이 낀 듯하다. 길섶에는 노각나무를 비롯해 병꽃나무, 생강나무, 가막살나무 등이 키재기를 하고 이른 봄이면 길 좌우로 노루귀며 현호색, 얼레지, 족두리풀이 피어 반갑기 그지없다.
남산봉 일대의 산자락은 남산동 시가지로 연결된다. 남산동은 옛날 범어사 사전(寺田)을 소작하던 농민들이 많이 살았던 곳으로 범어사에서 볼 때 남쪽 산등성이라 하여 남산이라 했다. 모퉁이를 돌아설 즈음 범어사 경계석이 있다. 길은 좌우 숲정비를 통해 자연스러움이 다소 떨어지긴 하나 그 나름 횡하니 또는 사행하며 걷는 맛을 더 한다. 외대운동장까지는 약 1km 거리다.
옛날 사기그릇을 굽던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사기점이라 불리던 골안에 일제강점기 때 못를 축조하며 사기점못(남산소류지)이라 했다. 골안이 죄다 밭이다. 최근 각광받는 유기농 도시농법으로 작물을 재배했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화학농법이 대세라 바람일 뿐이다.
밭을 가로지르면 외대운동장이다. 예전에 공동묘지터였던 곳을 정지해 운동장을 조성했다. 휴일이면 시민들의 방문이 많은 곳이다. 외대운동장 맨 위에 130여 년 전 문지성화란 이름을 가진 보살이 선몽을 한 뒤 지은 불광사가 있다. 원래 극락암이라 했으나 중창불사를 하며 불광사로 개명했는데 전망 하나는 끝내 준다.
이제부터 하산길이다. 하산이라고 할 것도 없는 높이지만 어쨌든 내리막길 아래 도시가 있다. 외대 두 번째 운동장을 가로질러 콘크리트 길을 따라 가다 구서동 방향으로 내려선다. 구서동은 조선시대(1580) 동래군 북면 구세리로 불렸고, 동래부지에서는 ‘관문에서 12리에 있다’고 소개하는 곳으로 일제 강점기 구서, 금단, 두실 3개 마을을 묶어 구서리로 개칭했다. 예부터 굿을 하는 동네라는 뜻에서 그 이름이 연유하고 있으며 금정산 변우암이 이 동네 위에 있어 기우소로 치성을 드리던 장소였다.
이 구간은 제7등산로와 6등산로 사이 구서동 산자락 가장자리 솔숲을 걷는 길이다. 마른계곡을 건너 어린이쉼터를 지나 소나무 사이에 설치해 놓은 끈을 따라 반송치고는 곧게 뻗은 다섯 줄기 반송을 거쳐 우성아파트 입구로 내려선다. 약 1.5km의 거리다. 크게 4개의 골짜기를 지나며 중간 중간 3망루며 의상봉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다수 있다. 명상은 두세 곳, 너무 덥지도, 너무 그늘도 아닌 숲에서 이루어졌다. 참 나를 만나 마음의 평화를 얻었는지 참가자들의 얼굴이 흡족하다. 고정멤버가 되겠다고 하여 다음을 기약한다.
INFORMATION 길잡이 범어사역~범어사 어귀 교차로~옛날 빵집~경동아파트삼거리~성불사 입구~죽순대밭~지장암~금어동천~비석골~범어사매표소~어산교~일주문~대웅전~보제루~어산교~등운곡~상마마을~만성암~범어사경계비~사기점골~외대운동장~어린이쉼터~미끈반송~우성아파트 입구~두실역 12km 교통정보 자가용 차량은 경부고속도~노포IC~범어사 어귀 사거리 순으로 찾아간다. KTX로 갈 경우는 서울역~부산역~도시철도 1호선 부산역~범어사역의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