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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고등학교와 대우아파트 사이 철조망에 가로막힌 한용운 선사 선친 묘소. |
만해 한용운의 첫 부인 전정숙은 1904년 홍성에서 한보국을 낳았다.
한용운은 서울에서 유숙경과 두 번째 결혼, 1932년 딸 한영숙을 낳았다.
한용운은 해방 전 해인 1944년에 사망하고 부인 전정숙은 1946년에 사망했다.
한보국은 6.25 전쟁 때 북한으로 가서 일생을 마쳤다.
한영숙은 현재 서울에 살고 있다.
1976년 평양시 대동강변 전망 좋은 아파트에 사는 한보국이 향년 72세로 숨을 거두며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나는 이렇게 떠나지만… 남북통일이 되면 내 대신 너희들이 조상님들께 성묘하라”
그런데 홍성읍 오관리 홍주고등학교와 대우아파트 사이에 있는 한용운 선사의 부모 묘는
철조망 속에 완전히 갇혀있다.
홍성읍 오관리 한보국이 살던 집은 그가 홀연 떠난 뒤 홍성군수를 지낸 박흥양 소유로 돼 있다가
홍주고등학교에 매각돼 최근 홍성읍사무소 신축을 위해 헐어냈다.
독서회 사건 후 사회주의로 기울어
한보국은 1930년 서울중동학교 재학시절 판매 금지된 책 <제2 가난에 대한 이야기> 등을
민중서원에서 구입해 친구들과 독서회를 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3년간 옥살이를 하면서 ‘인간 해방을 꿈꾸는 사회주의’로 기울었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홍성읍 오관리에서 철물점 및 동아일보 지국을 하던 한보국은 1945년 해방되면서 홍성군자치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건준이 해체돼 인민위원회로 바뀌면서 위원장을 맡았다.
한보국은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으로 홍성경찰서를 습격하고
서울로 피신했다가 1950년 3월 체포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있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 석방돼 홍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실질적인 좌익 지도자 전명재와 사상의 틈새가 생겨
그해 8월 15일 인민위원장 선출 투표에서 탈락돼 충남도직업동맹위원장이라는
외곽 단체로 전출되면서 한보국은 홍성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만해 손녀들 가족 평양에 30명 거주
6.25전쟁 후 남한에서는 한보국의 생사를 모르고 있었다.
재미 동포 작가 홍정자 씨가 북한에 들어가 한보국의 자녀들을 만난 인터뷰 글을
월간지 <말> 1996년 1월호에 발표함으로써 43년 만에 알려졌다.
홍정자 씨는 평양에서 1994년 10월 한보국의 딸 5명중 명숙, 명계, 명신 3명을 만났다며 상세하게 썼다.
4명은 홍성에서 낳고 막내 명신은 북한에서 낳은 딸로 추정된다.
한보국은 1949년 먼저 가족들을 강원도 연천으로 이동시킨 후 조직으로 돌아가 활동했다.
한보국은 1953년(전쟁 중) 국군의 추격을 받아 자강도 강계로 갔다.
중공군의 도움을 받아 평남 영원읍으로 옮겨 4년 동안을 지내며 가족들과 소식이 단절됐다.
그후 황해도 영예전사자병원에서 3년 동안 중환자로 입원 치료중 정신이 회복되면서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당에서 각 군에 수소문한 결과 덕천 제사공장에서 일하는 맏딸 한명숙과 연결돼 1956년 상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보국은 회복이 불가능한 반신불수의 몸 되어 있었다.
당에서는 몸이 성치 못한 그였지만 평양시 피복관리소 명예 부지배인 직함과
대동강변 아파트를 한 채 주어 소일하게 했다.
김일성은 1964년 환갑상을 차려주고 노동신문에 독립운동가의 후손에 대한 기사를 쓰게 해
존재를 알리게 됐다는 것이다.
다섯 딸들은 평양공산대학 혹은 제사공장 공장대학, 고등전문 피복과 학교 등을 졸업하고
모두 김일성 종합대 출신 남자들과 결혼 해 약 30명의 자손이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고 홍정자는 기록했다.
한보국의 큰 딸 명숙이 홍성에서 떠나던 때는 13세였다. 그는 홍정자 씨와 인터뷰에서
홍성에 대해 몇가지를 기억하며 아버지가 남겼다는 “통일 후 조상묘에 성묘하라”는 유언을 전했다.
한보국의 집, 전 홍성군수가 차지
홍성읍 오관리 474의 3번지에 한보국이 벽돌을 쌓으며 직접 지어 살았던 집이 있었다.
담배인삼공사 홍성지점과 경성회관 식당 사이다. 1970년 초부터 2년 5개월 동안
이 집에서 거주했던 홍주향토문화연구회 전병준 씨에 의하면 두칸 정도 크기 방 3개,
3칸 크기 대청과 부엌이 있었다는 것이다.
같은 번지 등기부등본에는 22평 3홉 8작 목조 기와 주택이 등재돼 있다.
이 집은 전용갑 홍주고등학교 이사장이 박흥양으로부터 매입했으나 뒤늦게 전병준을 시켜 이전 등기를 했다.
전용갑 이사장은 당시 전병준씨에게 “이 집은 원래 한보국의 소유로 알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그런데 왜 박흥양 소유로 등기 돼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박흥양은 1959년 1월부터 1960년 5월까지 홍성군수를 지낸 사람이다.
그 집터인 오관리 474의 3번지 175평 대지는 한보국이 1944년 8월 9일에 구입한 것으로 등기부등본에 나와 있다.
이 토지는 1964년 7월 6일 박흥양 전 군수가 한보국으로부터 매입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1964년은 한보국이 평양에서 환갑상을 받던 해였다.
실제 매입과 등기 이전 날자가 달랐던 것은 보통 있는 일이지만
1953년 국군의 추격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공무원에게 집을 팔고 갔을지는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한용운의 종손 한수만 씨는 “남의 재산관리를 맡은 사람들이 주인이 없자
부동산특별조치법을 이용해 자신의 것으로 돌려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토지와 집은 1970년 홍주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월곡학원으로 팔리고
최근 홍성읍사무소 신축을 위해 헐어 터를 정비했다.
인근의 경성회관 양의진 사장은 “얼마 전까지 비어있는 그 집을 보았으나
한보국의 집인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홍주고등학교 본관 3층 건물과 대우아파트 사이 105평 잔디밭에 6기의 묘소가 줄지어 자리잡고 있다.
한용운의 종손 한수만 씨는 이 묘소들이 한용운의 부모와 한용운의 친형 부부 등이 묻힌 가족묘라고 확인해 주었다.
이 묘소는 홍주고등학교와 민가 양쪽에서 각각 사람 키보다 높은 파란색 철조망을 쳐 놓아
들어가는 길 없이 완전히 막혀있다.
만해 한용운 선사 부모가 갇혀있는 것이다.
이규용 홍주고등학교 이사장은 “묘소가 도시 중심지에 학교와 붙어있어 서로 불편하기 때문에
감정가격으로 팔고 좋은 곳으로 이장하라고 권고했으나 팔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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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용운의 종손 한수만 씨. |
종손 한수만 “연좌제로 힘든 세월 보내”
올해 84세인 한수만 씨는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 한용운 생가에서 태어나 52세까지 집을 지키며 살았다. 한용운 선사의 종손 즉 한용운의 친형의 손자다.
한수만 씨는 1983년 광천으로 이사왔다. 앞, 뒤, 옆이 산으로 둘러쌓인 결성면 생가에서 논 3마지기로 농사 지으며 살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광천고등학교 뒷담과 광천 천주교 성당 사이 약 25평 크기 단독주택에서 두 살 아래인 부인과 두 아들 가족들이 함께 살고 있다. 한수만 씨는 광천에서 건설현장 미장일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 무연묘지 중 관계자들에게 신고를 하라고 했습니다. 묘지 깎는 인건비를 지원해준다고요. 그래서 홍성 오관리 증조부모(한용운 부모) 묘지를 다시 찾았죠. 가보니 아카시아 나무와 덤풀 속에 봉분도 무너지고 형편 없더라구요. 봉분을 새로 만들고 결성에 우리 부모, 가족 묘소 모두 옮겨 두분씩 합장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들어갈 수 조차 없어 문제입니다”
한수만 씨는 당숙 한보국이 좌익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연좌제 피해를 입어 숨어 살다시피 했다.
그래서 전에는 산소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남 모르게 벌초를 하곤 했던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시대에 살았답니다. 통일이요? 그야 되면 좋지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우리가 얼마나 많이 불렀습니까? 그런데 돼야 말이죠”
한수만 씨는 지금 노환으로 건강이 좋지 않다. 그의 일생을 짓눌린 짐을 벗게 해 주고
통일의 희망을 안겨주는 일이 홍성군민들의 과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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