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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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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표기 |
(Szent) István Ⅰ |
공식칭호 |
성 이슈트반 1세(Szent István Ⅰ) |
별칭 |
헝가리의 건국 王 |
지역 |
초기 헝가리 왕국 |
재위기간 |
997년 ~ 1038년 |
출생 - 사망 |
975년 ~ 1038년 8월 15일 |
가족관계 |
부친 : 게저(Géza) |
계보 |
전임자 : 게저(Géza) |
성 이슈트반 1세는 전대의 통치자 게저의 아들로 975년에 출생하였다. 게저가 죽고 난 후, 대공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의 대공 지위는 꼽빠니라는 인물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된다. 꼽빠니는 아르파드 왕조의 공신이었던 따르 제린드의 아들이자 성 이슈트반 1세의 삼촌이었다. 형이 죽으면 형수와 결혼한다는 유목민의 전통에 의해 게저의 미망인인 셔롤떠와 결혼한 꼽빠니는 대공의 권한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순조로운 왕위계승이 불가했던 성 이슈트반 1세는 곧 반란 진압에 나서게 된다.
성 이슈트반
1세와 그의 아내 기젤라는 베스프렘 근처에서 꼽빠니의 반란을 제압하였다. 그 후, 성 이슈트반 1세는 꼽빠니의 시신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먼저 세 부분을 북부 헝가리의 중요 지역인 에스테르곰, 베스프렘, 줴르의 성문에 걸어두었고, 나머지 부분은 트랜실바니아로 보냈다.
성 이슈트반 1세가 이와 같이 시신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각 지역에 보낸 이유는, 자신의 통치 지역에 살고 있는 귀족들과 권력자들에게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어 그들을 복종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에스테르곰, 베스프렘, 그리고
줴르 지역들은 이미 게저 시대부터 아르파드 가문의 견고한 바탕이 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트랜실바니아는
통치력이 강하게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꼽빠니의 시신을 보내서 경각심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트랜실바니아의 통치자였던 쥴러는 꼽빠니의 아내인 셔롤터와 남매간이었다.
꼽빠니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성 이슈트반 1세는 서기 1000년 12월 25일
실베스터 2세 로마 교황이 하사한 왕관을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왕으로 대관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후대의 연구에 의하면 성 이슈트반 1세가 실제로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하사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성 이슈트반
1세는 서기 1000년경 왕으로 대관된 후, 헝가리에
교계 제도와(주교구)와 광역 지방행정 단위인 주(megye)로 이루어진 행정 체계를 도입하였다. 이와 같이 성 이슈트반 1세가 최초로 정립한 국가 행정 체계는 후에
더 많은 주로 분화되어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유지되었다.
성 이슈트반 1세는 자신이 통치하는 기간에 약 50여
개의 주와 10개의 교구를 만들었다. 이 10개 교구의 주교좌는 비허르, 처나드, 에게르, 에스테르곰, 줴르, 쥴러페헤르바르, 껄러쳐, 떼취, 다츠, 그리고 베스프렘이었다. 이
지역들 중 에스테르곰 교구는 설립 당시부터 대교구로 설정되어 대주교의 주교좌가 있었고, 껄러쳐는 성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주교가 착좌한 도시가 되었다. 행정 구역을 정비한 성 이슈트반 1세는 바이에른의 선례를 따라 화폐(주화) 제도를 도입하여 경제생활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후 성 이슈트반 1세는 내치를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법령을 선포하였다. 이 법령의 내용은 주로 사유 재산 보호와 교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반부에는
교회의 재산에 대한 왕의 보호와 주교의 의무, 타국의 국민들과 관련된 권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 교회 구성원에 대한 소유와 그들의 업무, 사유 재산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권과 왕의 재산에 대한 불가침성도 규정했다. 일요일(주일)과 기독교의 축일을 준수해야 하는 법령도 있어 기독교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후반부에는 살인자에 대한 처벌과 신체를 상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칼을 휘두르는 것은 어떻게 처벌할지 등 범죄 행위에 대한 법률을 정해놓았다. 또 이단, 처녀 강간, 간통, 납치, 방화, 마녀 의식과
미신 숭배 등의 악습을 금지했다. 특이한 것은 농노에 대한 부분으로 꽤 여러 가지 법령을 살펴볼 수
있다. 해방된 농노를 보호하고 농노 사냥(인간 사냥)을 무효화 했으며, 타인의 농노를 불법적으로 해방시키는 것도 금지했다. 더불어 다른 기사와 귀족의 농노를 강탈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조항도 만들었다.
성 이슈트반 1세는 자신이 제정한 법령을 통하여 중세 헝가리가 법에 의해 통치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성 이슈트반 1세 통치하에서 기독교의 전파도 급속도로 확대되어, 1001년경에는 이미 게저 시대에 착공된 펀논헐머의 대수도원이 완성되었다. 이
수도원의 운영은 베네딕토 수도회에 맡겨졌고 지금까지도 헝가리 기독교 교회의 정신적 성지로서 굳건히 서있다.
이와 같은 성취에도 불구하고 1002년경부터 성 이슈트반
1세의 통치에 저항하는 크고 작은 반란이 발생하는 등 국내 정세는 위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머로쉬 지역의 토호였던 어이또니 대공이었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나, 다음 해인 1003년 트랜실바니아를 통치하고 있던 쥴러 대공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도 진압되었고, 쥴러와 그의 가족은
투옥되었다. 이후 1008년경 어이또니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처나드 장군을 보내어 패퇴시켰다.
헝가리가 유럽에 정착해나가자 주변 슬라브 민족들은 강력한 위협을 느끼며 더 이상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동맹을 결성,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헝가리가 카르파티아 분지에 정착했을 당시, 그곳에는 이미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이 넓게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아시아에서 온 이민족인 헝가리가 나라를 세운 것은 대단히 위협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슬라브족을 중심으로 하는 반헝가리 동맹이 결성되어 11세기 초반부터 중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쟁과
전투가 이어졌다.
1018년경 모라비아 지역에서 시작된 폴란드인과 헝가리인의 전쟁이 시작되자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헨리 2세가 조약을 맺어 공동으로 대항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헝가리가
승리함으로써 헝가리는 비잔틴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전쟁에서 획득한 보물과 전리품들은 왕실의
소유가 되었고, 세케슈페헤르바르의 바실리카 성당을 건축하는 재원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1018년부터 1026년까지의 기간은 헝가리와
서유럽 국가가 평화로운 공존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성 이슈트반 1세는
서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는 순례자들을 위하여 헝가리를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도 하였다.
통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성 이슈트반 1세는 서유럽의 복잡하고 유혈이 낭자한 왕위계승 과정을 지켜보며 헝가리의 왕권 강화를 위해서 제도적 정비가 필요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왕위 계승권자들이 왕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과 행동에 대한 규범집을 작성하고, 왕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였다. 더불어 로마 가톨릭과
더불어 기독교 세계의 양대 산맥인 비잔틴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도 공을 들여, 그의 아들인 임레
왕자를 비잔틴제국의 공주와 결혼시켰다. 또 새로 맞은 며느리를 위하여 베스프렘의 계곡에 그리스정교의
수도원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헝가리는 점점 안정화 되었고, 1020년경 베네치아의 주교인 성 겔레르트를 초청하여 가톨릭의 전파를 강화하였다.
이후 1030년부터 1038년까지 성 이슈트반 1세는 두 번째 법령을 발표하고 헝가리에 완전한 교계 제도(교회 성직의
계급 제도)를 확립시켰다. 두 번째 법령에는 헝가리의 열
개의 마을 당 하나의 교회를 설립할 것, 개인 소유권 보장의 강화, 농노를
죽였을 경우의 처벌 등과 함께 왕과 왕의 가족에 반하는 행위를 저지른 경우, 귀족 혹은 성주를 죽인
하인과 군인에 대한 처벌 등을 확정하였다. 성 이슈트반 1세는
이러한 법령을 제정함으로써 헝가리가 공고한 국가로 성립할 수 있도록 기초를 다진 것이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그동안 갈등 관계에 있었던 신성로마제국의 콘라드 2세와 평화 조약을 맺어 헝가리의 서부 국경을 안정화시켰다.
원래 성 이슈트반 1세 왕은 자신의 후계자로 아들인 임레 왕자를 지목하고, 그를 훌륭한 군주로 만들기 위하여 학식이 높은 외국 신부들을 초청하여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1032년 9월 2일 임레 왕자가 야생 멧돼지 사냥 도중에 불의의 사고로 사망함으로써 헝가리는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 이슈트반 1세와 기젤라 왕비는 오르세올로 가문으로 시집간 성 이슈트반 1세 누이의 아들인 페테르를 헝가리 왕가의 후계자로 삼았다.
성 이슈트반 1세는 1038년 8월 15일 서거하였다. 그는 자신이 세운 세케슈페헤르바르의 왕실 바실리카(교황으로부터 특권을 받아 일반 성당보다 격이 높은 성당)에 안장되었다. 8월 15일 이후 성 이슈트반의 조카인 페테르 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의 통치 기간은 1041년까지 계속되었다.
• 배우자 기젤러 왕비(995년 ~ 1038년경)
• 자녀
- 오토(Ottó), 알려지지 않음
- 임레(Imre), 멧돼지 사냥 중
사망
성 이슈트반 대성당의
종탑
성 이슈트반의 오른쪽 손이
미라로 보관되어 있는
성 이슈트반 대성당
한 번에 8,5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고
50 종류 이상의 대리석을 사용해 건축한
성 이슈트반 대성당
성 이슈트반 대성당 근방의
기념품 가게에서 구입한
류머티즘 크림
성 이슈트반 대성당 근방의
기념품 가게에서 구입한
비타민 C 영양제
성 이슈트반 대성당 근방의
기념품 가게
성 이슈트반 대성당 근방의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서정님
성 이슈트반 대성당
성 이슈트반 대성당 근방의
오벨리스크 앞에서
서정님
성 이슈트반 대성당
성 이슈트반 대성당 근방의
기념품 가게
2016년03월04일(금요일) 여행기
06:00~08:00 기적의 성모자상을 모신 성당이 있는 마리아 비스트리차(Marija Bistrica)에 있는
Bluesun Hotels & Resorts Marija Bistrica 120호 객실에서 기상하여 세면 후 호텔 부속식당에서 아침식사
08:00~13:05 전용 버스로 크로아티아(Croatia)의 마리아 비스트리차(Marija Bistrica)에 있는
Bluesun Hotels & Resorts Marija Bistrica 을 출발하여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Budapest)에 있는
한식당인 한국관으로 이동 (5시간5분 소요)
13:05~13:40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Budapest)에 있는 한식당인 한국관에서 비빔밥으로 점심식사
13:40~13:50 전용 버스로 한식당인 한국관을 출발하여 페스트 지구에
있는 영웅 광장으로 이동 (10분 소요)
13:50~14:00 페스트 지구에 있는 영웅 광장을 탐방 (10분 소요)
14:00~14:25 전용 버스로 영웅 광장을 출발하여 도나우 강을 건너서 부다지구에 있는 겔레르트 언덕으로 이동 (25분 소요)
14:25~14:55 부다 지구에 있는 겔레르트 언덕을 탐방 (30분 소요)
14:55~15:15 전용 버스로 겔레르트 언덕을 출발하여 어부의 요새로 이동 (20분 소요)
15:15~16:15 부다 지구에 있는 어부의 요새, 마차시 교회, 부다 왕궁 등을 탐방 (1시간)
16:15~16:25 전용 버스로 부다 왕궁을 출발하여 성 이슈트반 대성당으로 이동 (10분 소요)
16:25~16:45 헝가리의 초대 국왕인 성 이슈트반을 기리기 위해 1851~1906년 사이에 세운 성당인 성 이슈트반 대성당을 관람
(20분 소요)
16:45~17:15 성 이슈트반 대성당 근방의 기념품 가게에서 류머티즘 크림과 비타민 C 영양제를 구입
17:15~17:30 전용버스로 성 이슈트반 대성당을 출발하여 유람선 선착장으로 이동 (15분 소요)
17:30~18:20 유람선을 타고 부다페스트 야경 관광 (50분 소요)
18:20~18:40 전용버스로 유람선 선착장을 출발하여 헝가리 전통음식 레스토랑인 Red Pepper로 이동 (20분 소요)
18:40~19:15 헝가리 전통음식 레스토랑인 Red Pepper에서
야채에 후추와 파프리카를 첨가한 헝가리 전통 스프인 굴라쉬를 곁들인 요리로 저녁식사 (35분 소요)
19:15~19:45 전용버스로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Budapest)에 있는 IBIS Hotel Budapest로 이동 (30분 소요)
19:45~22:30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Budapest)에 있는 IBIS Hotel Budapest 116호 객실로 체크인하여 샤워 후 휴식
22:30~ 부다페스트(Budapest)에 있는 IBIS Hotel Budapest 116호 객실에서 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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