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백남준 기념관 (서울시 종로구 종로53길 12-1, 창신동 197-33)
백남준이 해외유학 전까지 유년시절 13년간(1937년 ~ 1950년)거주했던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위치하는 생가 터 중 일부를 서울시가 매입하여 서울시립박물관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곳이 백남준 기념관이다
대상지의 건축물은 50여 년이 지난 도시형 한옥으로 백남준 생가의 흔적은 없고(1950년대에 이미 헐렸음) 필지의 일부를 점유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장소는 주민공동체와 서울시립미술관이 공존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카페는 주민공동체가 운영하며 공간은 주민들의 사랑방의 역할을 하며 기념관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운영한다
마당은 두 협의체의 공유공간이다
한옥을 기념관으로 만들며 세운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한옥의 목조 주요 부재를 드러냄을 우선으로 한다
창호나 실내 칸막이 등 필요 기능에 의해 형성된 과거의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다
도시형 한옥의 생명은 마당을 구심점으로 이루어짐으로 마당과 내부와의 연계에 집중하여 단면 계획에 섬세한 정성을 기울인다
내외부 공간은 신발을 신고 다니므로 재료의 연계 및 구법을 통일시킨다
지역의 오랜 기억을 가진 도로 측에서 보이는 외부공간의 변화를 최소화하고 실내는 목적에 효과적인 구법을 구사하여 최대한 개방감을 만든다
마당과 하늘 사이에 사람의 모습을 아름답게 만든다
♤ 지금은 백남준기념관이 아담하게 들어서 있지만 과거에는 대로에 있는 대문에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본채가 나왔을 정도의 큰 집이 있었다
창신동 197번지 지역 대지 9917㎡(3000평)에 한옥을 짓고 살았으니 크기를 짐작하고 남는다
백남준기념관 지번이 197-33이니 한 필지 땅이 33개 이상으로 쪼개져 팔렸다는 의미다
♤ 백남준(白南準)
백남준은 조선 직물업계의 큰 손이었던 굴지의 기업인이자 친일파인 백낙승자의 3남2녀 중 막내아들로 1932년 7월 29일 경성에서 태어났고,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집에는 피아노나 전축은 물론 당시에 서울에 딱 2대 밖에 없었던 캐딜락도 있었고, 해방 전에 유치원(애국유치원)에 다녔으며 한국전쟁의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파인애플을 먹을 정도의 부자였다
194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으로 무기구입을 위해 홍콩으로 간(설이 있는) 부친 백낙승의 통역으로 따라가 홍콩의 로이덴스쿨로 전학한다
백남준은 이때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여권과 일본 비자가 있었던 백남준은 도쿄로 건너가 도쿄대학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 백남준의 아버지의 이름은 백낙승
매우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여 기업을 키운 인물로 친일사전에 민족반역자로 올라가있는 인물이다
백남준은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 일본에 유학을 갈 수 있었고 한국전쟁 중에도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일본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원을 당시 현대음악의 메카 독일 뮌헨대학교로 진학하여 철학 석사와 음악학 석사를 취득했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현대음악 쪽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독일에 있을 때쯤 존 케이지나 조지 마치우나스 등의 영향을 받아 행위예술을 접한 뒤, 행위예술가로 변신하게 된다
머리카락에 먹을 묻혀 선을 그리는 것도 사실 백남준이 했던 퍼포먼스다
이후 플럭서스의 일원이 되고, 미국 뉴욕과 독일을 오가면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오노 요코 때문에 잠깐 존 레논과 약간의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백남준은 그 당시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으나 요코는 존을 선택해 그와 결혼했고, 백남준은 꽤 충격 받았던 듯 1977년 자신과 같이 행위예술 작업을 했던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1937.8.2 ~ 2015.7.23)와 결혼했다
암 투병중이던 구보타 시게코는 2015년 7월 23일 만 77세로 작고했다
한국 대중들에게 '백남준'이라는 예술가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비로소 한국에 알려지게 된다
사실상 한국은 백남준에 대해서 역수입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백남준이 일본에서 뉴욕에 가기까지는 한국에서도 무명이었고, 그가 현지에서 악평을 들을 때도, 유명해지고 세계적인 수준에 오를 때 까지도 한국에서는 잘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사실 백남준보고 세계적인 예술가라고 해도 한국에서는 실감이 안나기 마련이다
그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랴부랴 일본으로 출국하여 독일과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를 떠돌다 34년만인 1984년에 다시 고국을 찾았을 때 한 기자가 '왜 한국 무대를 놔두고 외국 무대에서만 활동하는가?'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해요.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한류열풍을 생각하면 당시로선 선견지명이다
2006년 1월 29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아파트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직전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한국, 미국, 독일에 분산되어 안치되었으며, 한국에 있는 유해는 봉은사에 안치되어 있다
♤ 1998년 예술계에 기여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수상했다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 괴테 메달 수상자이다
(1995년 윤이상 첫 번째 수상, 2007년 김민기 세 번째 수상)
♤ 괴테 메달(독일어 : Goethe-Medaille)은 독일 문화원이 1955년부터 매년 예술 부문 인사에게 부여하는 독일 최고의 문화 훈장이다
수상 대상이 독일 국민으로 한정되어 있는 괴테상과는 반대로, 괴테 메달은 비독일 국민을 대상으로 메달을 부여한다
이름의 유래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이며, 2008년까지는 그의 기일인 3월 22일에 시상했고, 2009년도 괴테 메달부터는 그의 생일인 8월 28일에 시상한다
처음 시상인 1955년부터 현재까지 총 57곳의 국가에서 342명이 수상했다
국내 김민기의 수상 연도인 2007년까지는 수상 인원이 들쑥날쑥해서, 2004년에는 총 7명이 한 해에 수상했다
이후 2008년부터는 한 해에 고정 3명 시상으로 원칙이 바뀌었다
배호 집터 (서울시 종로구 지봉로5길 8, 창신동 81-8)
1945년 해방 이후 부모를 따라 고국에 귀국한 이후 인천의 수용소에서 생활하다, 1946년 4월부터 아버지가 죽어 부산 이모네로 가기 전인 1955년까지 살던 적산 가옥이다
배호는 1942년 4월 24일, 광복군 제3지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배국민(1946년 3월 6일 대한광복군 중사 전역)과 어머니 김금순의 장남이자 첫째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이름은 배만금(裵晩今)이며, 중학교 1학년생 때 배신웅(裵信雄)으로 개명하였다
1963년 김광빈(외삼촌) 악단과 김인배 악단에서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때 예명을 배호(裵湖)로 하고 가수로 데뷔했다
데뷔곡 : '굿바이', '사랑의 화살' (오리엔트 레코드) 발표
♤ 부산 괴정동 집터 (부산시 사하구 괴정4동)
1955년 8월부터 1956년 7월 서울 막내외삼촌(김광빈)을 찾아갈때까지 잠시 머물던 곳으로 이모가 운영하던 '희망원'이 있던 곳이다(자세한 번지수는 미상이다)
♤ 회현동 집터 (서울시 중구 소공로3길 29-8, 회현동 1가 146-1)
1956년 7월 부산에서 학업을 멈추고(부산 삼성중학교 2학년 1학기) 서울의 막내외삼촌(김광빈)의 집(회현동 1가 146)으로 온다
♤ 청량리 집터 (청량리 위생병원 뒷골목)
1962년 가을쯤 청량리 위생병원(구 성바오로병원) 뒷쪽(지번은 없다)에 단간셋방을 마련하여 어머니, 동생이 합류하였다
1967년 무명의 작곡가 배상태가 '돌아가는 삼각지' 악보를 가지고 아파 누워있던 배호를 찾아온 곳이다
♤ 성바오로병원 터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180, 전농동 620-56)
성바오로병원은 제기동에 있었으나, 2019년 3월 22일 폐원 후 은평구로 이전하여 가톨릭대학교 은평성모병원이 되었다
지금은 오피스텔 신축공사로 뒷골목의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다
청량리 위생병원이 현 삼육서울병원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삼육서울병원은 휘경동 배봉산 자락에 있어 그 뒤쪽에 민가가 형성되기가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구 성바오로병원 터가 더 설득력이 있다
♤ 미아리 집터 (서울시 강북구 도봉로57길 18-10, 미아동 215-103)
1971년 7월, 배호가 죽기 3개월 전에 이사하였던 집(당시 2충 양옥)으로 마지막 거주지이다
배호가 죽은 뒤 어머니와 여동생은 또다시 미아3동 단간셋방(전세 300만원- 지번 미상)으로 이사했다
♤ 배호 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 33-1)
1966년 신장염에 걸렸으며 1967년 배상태가 작곡한 <돌아가는 삼각지>를 발표했다
그 후 1971년 10월 라디오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 출연 후 집에 가는 길에 비를 맞고 가면서 감기가 걸려 신장염이 재발, 병원에 입원했다가 1971년 11월 7일 세브란스병원에서 ‘가망이 없다’ 는 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미아리고개를 넘지 못하고 앰뷸런스 속에서 막내 외삼촌 김광빈의 무릎을 베고 세상을 떠났다
묘지는 경기도 양주시 신세계공원묘지에 있다
1971년 11월 11일 예총회관 광장에서 거행된 영결식은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소복 입은 수 많은 여성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흐느꼈다
♤ 배호가 서울에 주거지를 마련했던 곳은 대략 4군데 이상으로 보이지만 창신동의 집터에만 표지판이 있다
어머니(김금순)와 여동생(배명신)은 배호가 죽은 뒤 집(미아동의 2층 양옥)담보로 보증 선게 잘못(옷공장하는 이웃사람의 부도로 집이 압류)되어 또다시 미아3동 단간셋방(전세 300만원 - 지번 불명)으로 이사했다
실의와 비탄 속의 나날을 보내던 가족은 어머니가 1993년에, 여동생은 2003년에 각각 한많은 세상을 떠나 그리던 아들과 오빠 곁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