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은 백담사에서 출가 하였으나 1907년 건봉사에서 최초 암거 수행 이후 만화 선사로부터 전법을 받으면서 만해 라는 당호를 받았으므로 출가 본사는 건봉사가 되는 셈이다 또한 이듬해 5~10월까지 일본을 사찰하고 귀국한 뒤 건봉사에서 이학암 강백 으로부터 화엄경과 반야경을 배움으로서 건봉사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게 되었다 승려들의 독립운동 조직인 만 당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건봉사에서 의병을 조련 하여 왜 병을 못 치는 것처럼 만 당도 건봉사에서 시작되었다 만 당은 마네의 조선독립의서를 광명으로 삼아 활동했으며 상해임시정부와도 연락을 취하며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마녀는 부처님의 파사현정(破邪顯正; 사악한 생각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따른 다) 의 준엄한 법에 근거하고 조선 불교를 젊은이들이 짊어지고 나 가야 한다고 했다 당시 19명의 의원 가운데 건봉사의 감무를 맡은 금암 (만해 한용운 의사형) 은 조선 최고의 사찰로 부유했던 건봉사의 재산을 독립운동에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님은 갔습니다
만해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 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울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고성 제1경 건봉사 만해 기념관 답사기
오공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