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에 오롯이 담았네, 참 소박한 소원…제천 민화마을
“액운은 쫓고 복은 불러온다.”
충북 제천에 ‘민화(民畵)마을’이 있다. 집집마다 행운이 오기를 바라며 무병장수, 부귀공명, 다산을 기원하는 그림을 병풍, 족자, 벽에 담았다.
격조나 기품은 없지만 솔직하고 투박해서 정겹다. 민초들의 소박한 희망이 담긴 민화들이다. 오색빛깔이 생동감 넘친다.
민화마을이 생기자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다 쓰러져가던 집과 무너진 담벼락에 온기가 되살아났다.
혼자 사는 노인이 대부분이던 허름한 달동네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제천이 젊어졌다.
민초들의 소망을 담다
충북 제천 민화마을은 교동 향교 앞에서 시작된다. 첫번째 그림은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십장생’이다. 교과서에서 보았을 때는 엄숙했던 것 같은데 벽에 그려진 동물들 표정은 귀엽다. 두 마리 학이 소나무 옆에서 날갯짓을 하고 구름 아래 사슴은 해와 달을 올려다보며 사색에 잠긴다. 십장생을 보니 할머니와 살던 옛집의 풍경이 떠오른다. 안방과 작은 방의 구석엔 새하얀 천이 걸려 있었다. 그 뒤에 이불이며 옷가지들을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옷장 대신 쓰이던 가리개에는 학과 해와 달, 부·귀 등의 글자를 수놓았다. 온가족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오롯했다.
젊은 부부가 닭이 그려진 벽화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새벽을 알리는 닭은 십이지신 가운데 하늘과 통하는 유일한 동물로 재물을 뜻한다. 그림 속의 수탉과 암탉이 꽈리나무 아래서 삐악거리는 병아리들을 품고 마주 보며 웃고 있다. “올해 내집 마련을 하고 싶다”는 그들의 기도가 이뤄졌으면 좋겠다.
나비 동산 앞에 서자 “벌써 봄이 왔나” 싶다. 한 쌍의 노랑 나비가 파랑, 보라 나비와 함께 날아오르고 있다. 나비는 기쁨과 사랑, 평화, 풍요를 의미한단다. 잠자리와 벌들이 모여드는 그림도 정답다. 신사임당의 작품에서 많이 보았던 식물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개구리 한 마리가 울타리 밖으로 도망가고 싶은지 가지와 봉숭아, 수세미, 오이를 비집고 얼굴을 빼꼼히 내민 모습에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꽃밭 그림은 그 색채가 꽃밭보다 화려하다. 수선화와 붉은 열매가 탐스럽게 걸려 있다. 민화 색채는 사찰의 단청처럼 5방색을 쓴다고 한다. 빨강과 노랑, 파랑, 검정, 흰색의 꽃들이 조화롭다.
문자도는 이채로웠다.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儀) 등 글자 한 부분을 동물이나 식물로 그려 문자를 완성한다.
‘효’라는 글자에는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잉어를 구해온 아들의 이야기를 녹였다. 어용도에는 여의주를 품기 전 바다를 차고 오르는 물고기들이 출세가도를 표현하고 있다.
서민들의 희망을 보다
또 다른 민화 골목으로 들어섰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이 담장에 가득했다. 예로부터 연꽃은 사랑채에 많이 그렸는데, 진흙세상에 때묻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는 선비정신을 바란 것이리라.
책거리 그림을 감상하던 대학생들이 “내 방에 그려놓았다면 정말 열심히 공부했을 텐데”라며 웃었다. 비단 표지로 묶은 책 위에 수박과 석류가 풍성하게 올려져 있다. 출세해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자손들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일생을 그린 평생도(平生圖)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병풍에서 시작해 병풍으로 끝나는 게 삶이라는 말이 와 닿았다. 돌잔치에는 책이 가득한 민화 병풍을 치고, 혼례 때는 모란꽃에 암수 한 쌍을 그린 병풍을 놓고 첫날밤을 보내며, 생을 마감하면 누구나 병풍 뒤에서 잠든다.
민화 전문가 박미향씨(64)는 “조선 후기 재능은 있어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무명 화가들이 민화를 그렸다”면서 “건강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소박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말했다.
민화 옆에 일반 벽화들이 그려진 곳도 있다. 어떤 소망이 담겨 있는지 궁금했다. “막걸리나 한잔 합시다”하는 동네 아주머니의 환한 미소 그림이 보였다. 발길이 머문 벽화는 ‘출세 길’이었다. 물고기가 물길을 차고 올라 용이 된다는 민화 ‘어변성룡도’에서 따온 그림이라고 했다. 바다 물결을 표현한 계단을 헤엄치듯 올랐다.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확 트였다.
발아래 지붕을 따라 골목이 이어졌다. 하얗게 페인트칠을 해서인지 골목길이 꽤 넓어 보인다. 초등학생들이 그린 공룡 그림이 천진난만하고, 가족들이 그린 일월 오봉도는 보기만 해도 훈훈하다.
‘추억의 골목’에 들어서면 누구나 유년으로 돌아간다. 어른 어깨 높이의 담벼락에는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부터 말타기, 오줌싸개, 술래잡기, 자치기, 고무줄 놀이 등 벽화가 끝없이 펼쳐진다. 나이를 잊고 숨바꼭질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옆에 있던 교동민화마을협동조합 전영선 대표(32)가 “벽에 쓰여진 천만원, 출세, 로또, 다이어트 성공, 대박이라는 글자 중 한 가지를 골라보라”고 했다. “로또”를 외쳤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이곳은 인적이 드문 외진 달동네였다. 벽화와 함께 활력을 되찾았다. 제천 민화마을에 가면 누구나 액운을 쫓고 복을 부를 수 있다.
ㅡ 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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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0. 3
느리게 걷는 길
제천 민화마을에서...
학습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옛날 서당과 서재에 많이 걸었던 책거리 그림. 책 위에 씨앗이 많은 수박을 올려 출세한 뒤에는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자손들이 번성하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