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에서 / 김응상
빠른 속도로 여름이 다가온다. 초록의 물결이 뒤덮이고 농사철로 접어든다. 들판에 논들이 물을 받아들이고 있다. 충만한 마음으로 나들이를 간다. 성안은 조용하고 인기척도 없이 한가롭고 편안하다. 망루로 향한 부드럽게 굴곡진 계단이 발걸음을 끌어당긴다.
1976년 여름, 한낮의 매미 소리가 여기저기서 길게 이어지며, 햇빛이 눈이 부시도록 내리쪼이던 날. 가방은 늘어져 무게를 더하고, 땀으로 흰색의 교복이 젖어간다. 읍내 급우들이 삼년산성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 나만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다. 그 기분을 다시 갖고 싶지 않아 친구들을 따돌리고 혼자서 산성길을 올랐다.
삼년산성은 세월의 풍파에 성벽의 돌이 늘어진 옷자락처럼 흘러내렸다. 빛바랜 휴지 조각이 날리고, 주변의 이름 모를 작은 들꽃이 무너진 성곽 돌 틈을 비집고 조그만 얼굴을 내밀었다. 털이 많아 거칠게 보이는 칡 줄기의 커다란 이파리 사이에 존재감을 드러낸 굵은 대공이 보라색 꽃을 달고 있었다.
성안에는 조그만 샘터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왔다. 아래로는 습지가 형성되어 미나리꽝이 있었다. 작은 나무와 풀이 무질서하게 자란 연못 아미지(蛾眉池)는, 사람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옛날 승전의 영화는 사라지고 쓸쓸함만 가득했다. 두 채의 집과 작은 암자가 고즈넉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담 밖에는 작고 여린 가지 버섯이 햇빛을 피해 숨어있었다. 잡초가 무성한 관심 없이 버려진 폐허 같아서 허허로운 마음이었으나, 조용하고 아늑한 정경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편안했다.
보은은 사방 백리에 동으로 상주, 서로 대전, 남으로 영동, 북으로 청주가 있다. 삼국시대 세 나라의 교차점이자 선점의 대상이었다. 지배국이 수시로 바뀌고 백성들은 치욕과 수난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속마음을 쉽게 내보일 수 없는 상황에 억울한 호소를 표현도 하지 못하고, 방에서만 울부짖고 벼름빡을 치며 감정을 표출했을 것이다.
성이 만들어지고 신라의 지배가 확고해졌다. 가족을 잃고 지배자가 바뀌며 겪는 고통이 사라진다. 생활이 안정되고 평화의 날들이 길어지며, 본래의 순박한 심성을 되찾게 되었으리라.
사적 제235호. 면적 22만 6,866㎡.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성주길 102번지.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마립간 때인 470년에 축성되었다. 3년 만에 완성되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졌으나, 유홍렬이 지은 국사대사전에 의하면 보은의 지명에 삼년산이 있었다고 수록되어 있다.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더 고증이 필요할 듯하다.
성벽은 주위의 능선을 따라 웅대하게 구축하였는데, 가장 높은 곳이 22m이고, 너비는 5∼8m이며, 길이는 1,680m이다. 내외면 모두 석축으로 수직에 가까운 벽면을 이루게 하여 견고하게 만들었다.
정문으로 사용한 서문은 성벽이 안쪽으로 휘었고, 성 밖에서 문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적을 일찍 관측하고 가까이 접근을 막는 시설인 치성을 남북으로 2개 배치하였다. 동, 남, 북문도 치성을 설치하였고, 동문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자연을 이용한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였다.
진흥왕은 554년 이곳에서 조련한 군대를 몰고 관산성(옥천)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잡았다. 무열왕은 신라와 당나라 간 동맹을 위한 국제회의를 이곳에서 열었는데, 당나라에 무력시위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후백제가 충청을 장악한 928년에 고려 태조 왕건도 삼년산성을 빼앗으려다 크게 패한 바 있다. 승전의 기록만 알려져 온다.
충청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치열하던 시대에 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삼국통일을 이루는 발판으로 북진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
성내 암벽에는 옥필(玉筆), 유사암(有似巖), 아미지(蛾眉池)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명필 김생의 필체로 전해온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성은 분지를 둘러싼 천지의 축소판이다. 지금은 진입로가 잘 정비되고 이정표가 안내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다. 성곽을 복원하여 성이 제모습을 갖추니 말끔한 신사 같은 모습이다. 남문에서 보는 넓은 들과 파란 하늘이 아름답게 어울린다.
평화는 힘이 있어야 가능하며 안정을 누릴 수 있다. 민초들의 안정된 생활에 공이 큰 산성이, 주변 자연과 어우러져 편안함을 선물한다. 비석에 낀 이끼가 세월의 깊이를 알려주며 친근하게 느껴진다.
탁 트인 망루에 올라 눈을 감고 햇살과 바람을 맞는다. 승전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 같다. 백성들의 안도하는 표정과 흥겨운 춤과 가락이 오랫동안 이어졌으리라. 이제는 아름답고, 힐링하기에 너무나 좋은 곳에서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고요하고 한적한 삼년산성이 아늑하다. 옛 선조들의 삶을 그려보며 승전의 기운을 받고 싶다.
첫댓글 선생님 글속에 향수가 어립니다. 더불어 역사도 공부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글도 써 볼께요.
고요한 산성이 흔치 않아요. 삼년산성은 조용한 산성입니다. 전투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요. 혼자만의 사색을 위한 여행지로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