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원흥사(元興寺) 터 (서울시 종로구 지봉로 73, 창신동 128-32)
현재의 창신초등학교 자리는 원래 원흥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1902년(광무 6) 11월에 대한제국 황실의 내탕금으로 순종의 별장인 창신소학교 부지를 매입하고 조선 전체의 사찰을 총괄하는 총본산으로 창건되었는데 대본산원흥사(大本山元興寺)라는 액(額)을 하사하였다
이듬해 봄 황실 내탕금과 전국 승려의 헌금으로 대웅전, 나한전, 시왕전(十王殿), 자복전(資福殿), 축화전(祝華殿) 등을 세워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관리하였고 대법산국내수사찰(大法山國內首寺刹) 이라 하였다
이와 동시에 각도에는 중요한 고찰(古刹)을 선택하여 중법산도내수사찰(中法山道內首寺刹)로 하였다
1908년 11월에는 원흥사에 있던 사사관리서 역할을 대신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이곳에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립하여 친일 승려 이회광을 종정, 일본의 극우인사인 조동종의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고문으로 추대하며 정치적인 한일병탄에 앞서 한국불교를 일본 불교에 종속시키는 사전 작업을 펼친다
1911년에는 이곳에 자리 잡았던 원종 종무원마저도 폐지되고 그 자리에 31본산회의소가 설치됐다
이듬해인 1912년에는 ‘조선불교선교양종 종무원’이 만들어져 현 조계사 자리에 세워진 각황사를 중앙포교당으로 하면서 원흥사가 10여년 동안 갖고 있던 ‘한국 불교의 중심’ 역할이 각황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원흥사는 각황사의 개설과 더불어 능인보통학교(1912년 개교)로 운영되다가 1916년 창신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
능인보통학교는 이능화와 관련된다
이능화 본인이 직접 능인보통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즉, 원흥사 터는 능인보통학교까지는 기존의 불교 종단과 관련이 있다가 결국 1916년에는 사찰의 기능을 마감한 뒤 그 자리에 일제가 창신보통공립학교를 개교하여 오늘날의 창신초등학교로 이어졌다
♤ 1970년 당시 창신국민학교는 무려 122학급 1만166명의 학생 수를 기록했다
이듬해(1971년) 학생 일부를 떼서 명신국민학교로 분리했다
제목은 "원흥사의 건물과 창신공립보통학교"이고, 내용에는 이 건물이 원흥사 건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대정 9년경에 촬영된 사진이라 했으니 1920년까지는 원흥사 건물이 남아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 사진 왼쪽에도 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근대 불교의 출발점이었던 원흥사는 1910년 현재의 조계사 인근으로 불교의 중심이 옮겨지면서 이제는 그 흔한 표지석 하나 남기지 않고 학교(창신초등학교)로 변해 있다
안양암 (서울시 종로구 창신5길 61, 창신동 130-1)
안양암 대문이다
일주문이라 하지 않고 대문이라 하는 이유는 일주문이란 절집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기둥이 하나씩 서있는 건물을 말한다
절집 앞에 있다고 모두 일주문이 아니라는 거다
대문에는 문수보살(청사자를 타고 있다)과
보현보살(흰코끼리를 타고 있다)이 그려져 있다
대웅전
지장보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다
아미타불이 주불이고요, 보통 아미타불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 부처로 모신다
뒤의 아미타후불탱화는(일명 아미타 구존도九尊圖)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5호다
대웅전 닫집과
닫집 안 위쪽의 그림
그외 신중도
팔상도
극락왕생도도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관음전
관음전 앞의 동자상
관음전 안에는 1909년에 만들어진 마애관음보살상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2호)이 있다
영각
영각 안에는 판등당 성월대사(좌)와 양학당 태준대사(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명부전
천오백불전
천오백불전 안의 여러 그림들
갑자기 고구려 벽화(천상도?)가 생각 나는것은 무슨 까닭일까?
대웅전 뒤 바위를 오른다
감실에 또 한 분의 부처가 있다
석감마애아미타여래좌상으로 미륵전의 마애관음보살좌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뒤쪽 바위에는 굴 입구가 2개가 있다
굴 안에서 바라본 밖깥 모습
♤ 안양암(安養庵)
1899년 성월대사가 창건하였으며, 2000년 6월 한국불교미술박물관장 권대성 앞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으며
조선시대 후기의 전각과 불화, 불상 등이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사찰 전체가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2004년 5월 한국불교미술박물관 별관 사찰박물관 으로 서울시청에 등록되기도 하였다
안양암 마애관음보살좌상, 아미타괘불도, 안양암 지장시왕괘불도 등 서울시 지정 유형문화재 7점과 문화재자료 12점을 소장하고 있다
♤ 궁중의 상궁 나인들이 나이가 들어 궁궐을 나올 때 거처하는 곳이 현재 창신동 롯데캐슬 아파트 부근인데 예로부터 이곳은 궁터라고 한다
상궁나인들이 평생을 살며 안양암에서 기도를 하였는데 별세하기 전 또는 별세 후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유물들을 안양암에 기증, 희사하다보니 현재 안양암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자료는 1,700여 점에 이른다고 한다
서울과 근교를 통틀어 이만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은 가히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2005년 안양암 소장 불교미술품 700여 점으로 "안양암에 담긴 중생의 염원과 꿈"이라는 주제의 특별기획전이 한국불교미술박물관에서 개최된 바가 있다
♤ 안양암과 배정자
안양암 입구 좌측 자물쇠 없는 창살로 막아 둔 곳에 비석 몇 개가 서 있다
그 중 커다란 오석에 한자로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이라고 적혀 있는 정체모를 비석 왼쪽에서 뚜렷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삼화부인회10주년기념비(1939년)로 이름 붙은 이 비석에 배 씨는 삼화부인회 고문으로 돼 있다
배정자(裵貞子, 다야마 사다코 田山貞子, 아명 裵紛男, 裵紛南)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이 되면서 밀정교육을 받고 고종에게 접근하는 등 대표적인 여성 친일파였다
1920년 독립신문 논설을 보면 배 씨의 죄상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배정자는 작년 하얼빈에서 다수의 동포를 적에게 잡아주고, 협잡을 하고 봉천으로 도망하여 와서 봉천 동포의 사정을 적 영사관에 고하야 동포의 밧는 곤난이 막심하외다. 아아 이 가살의 요녀 배정자는 ’나는 만주에 잇는 백만의 조선인의 모(母)라 함니다. 아아 언제까지나 져 호(妖女)의 슈(生命)을 그대로 두겟슴닛가.’
1924년 배정자가 은퇴하자, 총독부는 그녀에게 600평 짜리 땅을 선물했다
1940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배정자는 70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남양군도로달려갔다
당시 배정자는 전선에서 자신의 조국 일본 장병들이 고생하는것이 가슴 아프다하여 일본군의 후원으로 조선인 여성 100여 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끌고 갔다
배정자는 같은 조선인 여성들을 성욕에굶주린 일본군들의 노리개감으로 바치면서 까지 일제의 승리를 위해 충성을다했던 것이다
해방이 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반민특위가 가동됐다
서울 성북동 집에서 체포된 배정자는 재판을 받던 중 1949년 8월 28일 병보석으로 풀려나 1952년 2월 27일 성북동 집에서 죽었는데, 그때 나이 여든 두살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