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7일 오늘의 역사
2021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정진석 추기경 선종
정진석 추기경 향년 90세.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 추기경은 1961년 사제품을, 1970년 주교품을 받고서 청주교구장에 취임했다. 2006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로부터 추기경에 서임됐으며 1998∼2012년 서울대교구장을 지냈다.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뒤로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신학대학) 주교관에 머물며 집필활동에 매진해왔다.
2018년 판문점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 실시
2018년 4월27일 판문점 남쪽 ‘평화의 집’에서 3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다.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 이후 18년만이고,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11년만의 회담이었다.
회담 의제는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 평화 정착, 남북관계 발전 등이었으며, 그 결과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총 3개항)이 발표되었다.
이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미국과 북한과의 정상회담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2015년 평창올림픽 한국 국적 선택한 노르웨이 스키 스타 김마그너스
크로스컨트리 스키 기대주 김마그너스(17·노르웨이명 마그너스 보어·사진)가 태극 문양을 달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나선다.
그의 소속사인 브리온컴퍼니는 27일 “김마그너스가 한국 스키 발전에 대한 강한 포부와 어머니의 나라에 대한 애정으로 한국 대표를 택했다”고 밝혔다. 마그너스는 1998년 부산 선박회사에서 일하던 노르웨이인 아버지 오게 보어(59)씨와 한국인 어머니 김주현(55)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을 부산서 보내 지금도 부산 사투리를 쓴다. 그는 크로스컨트리 시작 1년 만인 2012년 노르웨이 전국스키선수권에서 남자 15세 클래식 및 스프린트 우승을 차지한 차세대 유망주이다.
노르웨이는 ‘스키의 마라톤’이라 불리는 크로스컨트리에서 올림픽 최다 금메달(31개)을 딴 이 분야 최강 국가다. 반면 한국의 크로스컨트리 스키는 올림픽 30위 안에 든 적이 없다. 마그너스는 최근 3차례의 전국체전에서 무려 11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며 압도적 기량을 과시했다.
2012년 80~90년대 가요 황금기 연 이호준 별세
조용필의 '친구여' 등 1980년대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냈던 작곡가 겸 음반연주자 이호준(62)씨가 27일 오전 폐암으로 별세했다. 클래식 음악을 공부했던 고인은 재즈 피아노에 흥미를 가지며 대중음악에 심취한 뒤 팝 피아니스트와 가요 작곡가의 길을 걸었다. 1973년 가수 이장희와 함께한 밴드 '동방의 빛' 건반 연주자로 대중 음악계에 입문했다.
이씨는 1980년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 건반 주자로 합류했고, 특히 '친구여'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등 조용필의 대표곡을 써 작곡가로도 명성을 쌓았다. '어젯밤 이야기'(소방차), '토요일은 밤이 좋아'(김종찬), '인디안 인형처럼'(나미) 등 지금까지 애창되는 댄스 명곡들도 그의 작품이다. 이 때문에 1980~90년대 가요 황금기를 연 주역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011년 4·27 재보궐선거
한나라당이 4.27 재보선에서 텃밭인 분당을을 내주고 강원도지사 탈환에 실패하는 등 사실상 완패했다.
한나라당은 경기 성남 분당을과 강원, 경남 김해을 등 ‘빅3’ 지역 중에서 분당을과 강원을 야권에 내주면서 ‘1:2’라는 저조한 성적표를 거뒀다.
그나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서가 짙은 김해을에서 김태호 후보가 승리를 거둬 화려한 재기를 하게 됐고 영남권 민심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여권으로서는 수도권 ‘텃밭’ 인 분당을에서 패하면서 패닉에 가까운 충격 속에 내년 총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집권 후반기를 맞아 각종 현안을 마무리 해야 할 청와대도 상당한 부담감을 안게 됐다.
2010년 오은선, 여성 산악인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 논란
2010년 4월 27일 오후 6시 16분(이하 한국시간) 대한민국의 오은선(44·블랙야크) 대장이 안나푸르나(해발 8091m) 정상에 태극기를 꽂았다. 여성 산악인 세계 최초로 8000m급 고봉(高峰)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지난 1997년 갸셔브롬 2봉(8035m) 등정 이후 13년만에 이룬 쾌거였으며 이중 12개봉은 무산소 등정이다. 1985년 수원대학교 산악부에서 처음으로 산악계와 인연을 맺은 오은선은 1993년 故 지현옥 대장을 중심으로 한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참가를 시작으로 세계적인 여성 산악인으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오은선은 이날 오전 1시 40분 라이벌이었던 고(故) 고미영 대장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서 캠프 4(해발 7200m)를 출발했다. 고미영은 2009년 7월 낭가파르바트(8126m)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다가 추락해, 결국 사망했다.
캠프4를 출발한지 18시간이 지난 오후 6시 16분, 드디어 정상에 오른 오은선은 태극기를 들고 두 손을 흔들었다.
지구상에서 해발 8000m가 넘는 산은 에베레스트(8848m), K2(8611m), 캉첸중가(8603m) 등 모두 14곳으로, 모두 히말라야 산맥에 있다. 지금까지 1986년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66)가 세계 최초로 14좌 완등에 성공한 이후 24년 동안 14좌를 완등한 19명은 모두 남성 산악인이었다. 우리나라 산악인으로는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등 3명이 포함돼 있다.
오은선의 강력한 경쟁자인 에두르네 파사반(스페인·Pasaban·37)은 5월 17일 오후 11시30분쯤 마지막 시샤팡마 정상을 오르며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성공했다. 스페인 바스크족 출신인 파사반은 2001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9년만에 14좌를 완등했다.
파사반은 오은선이 2009년에 오른 칸첸중가 등정에 의문을 제기하며 오은선의 하말라야 14좌 완등에 국내외에서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4년 한국 로봇 ‘롭해즈’, 세계로봇경진대회서 1위 입상
한국과학기술원 휴먼로봇센터 김문상 박사팀이 개발한 위험지역의 불규칙한 지형을 헤쳐나갈 수 있는 원격제어로봇 ‘롭해즈’. 2004년 4월 27일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로봇이 세계 로봇경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강성철 지능로봇연구센터 박사팀이 제작한 위험작업 로봇인 ‘롭해즈(ROBHAZ)’가 이날 미국 뉴올리언스대학에서 열린 세계 로봇경진대회 구조로봇 부문에서 우승한 것이다.
롭해즈는 지형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두 개의 트랙을 로봇 몸체 양쪽에 설치, 계단이나 울퉁불퉁한 길에서도 최대 시속 5km로 이동할 수 있어 폭발물 탐지와 화재 현장에서의 인명 구조 등 위험한 작업을 위해 제작됐다.
세계 로봇경진대회는 97년부터 시작한 권위 있는 대회로 강 박사팀 외에도 구조로봇 부문에만 미국 카네기멜론대, 뉴올리언스대, 독일 브레멘대, 캐나다 마니토바대 등이 참여해 경쟁을 벌였다. 이번 구조로봇 부문은 지진 상황을 연출한 모의현장에서 20분 동안 어느 로봇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얼마나 많은 모의 희생자를 탐지하는가를 측정했다. 경기 결과 강 박사팀은 대회 사상 가장 높은 점수(123점)로 우승했다고 KIST는 밝혔다.
2004년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 15년 만에 유럽 방문
‘국제 테러국’의 오명을 씻고 개방을 가속화하려는 리비아의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가 2004년 4월 27일 15년 만에 첫 유럽 방문에 나섰다. 카다피 국가원수는 27일 가장 먼저 유럽의 심장부인 EU 본부를 찾았다.
서 벨기에 브뤼셀에서 로마노 프로디(Prodi) 유럽집행위원회(EC) 위원장과 회담을 갖고 관계 정상화에 의견을 같이 했다.
그는 이어 프로디 위원장과 회담 후 합동 기자회견을 갖고, 리비아가 유럽과 아프리카의 가교 역할을 맡아 세계 평화 증진에 있어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또 유럽·미국 기업들이 리비아의 석유산업에 투자·개발해줄 것을 요청했다.
카다피의 브뤼셀 방문은 리비아의 ‘회개’의 대가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18년 만에 경제 제재를 완화한다고 발표한 지 사흘 만에 이뤄졌다. 미국은 1986년 미군 관리들이 주로 드나드는 서베를린의 디스코텍이 리비아 테러범에게 폭파된 이후 경제 제재 및 여행 금지 조치를 취해 왔다.
그러나 최근 리비아는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를 포기하고 팬암 등 서방 항공기 폭파사건을 배상키로 합의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였고, 서방의 경제 제재 해제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2004년 제5회 광주인권상에 미얀마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 선정
(재)5·18기념재단은 27일 광주인권상심사위원회를 열고, 제5회 ‘광주인권상’ 수상자로 미얀마의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59) 여사를 선정했다.
아웅산 수치는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아웅산 장군의 딸로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한 뒤 88년 귀국, 군사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여왔다. 그녀의 저항운동은 미얀마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이로 인해 7차례의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녀는 지난해 5월 이후 현재도 억류상태에 있다. 국제사회는 수치 여사의 투쟁에 지지를 보냈으며, 지난 91년엔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광주인권상은 지난 2000년부터 5·18정신을 선양하고 민족분단 극복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공헌한 국내·외 인사를 선정·시상해왔다. 수상자에게는 1만달러가 주어진다.
2004년 민주당 당직자 일괄사표, 사무처 해단식
2004년 국가보훈처, 이애라 선생 2004년 5월 독립운동가에 선정
국가보훈처는 27일 여성 독립운동가인 이애라(李愛羅·1894∼1922)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 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선생은 3·1운동 직후 남편이 ‘비밀 독립운동본부’ 를 결성하자 이를 돕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국민대회와 비밀회의를 개최토록 해 한성 임시정부 수립에 크게 공헌했다. 선생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고, 1920년 출옥 후 수원·공주·아산 등지의 교회를 돌아다니며 여성부인회를 결성해 모금운동을 벌인 뒤, 1921년 러시아 망명을 시도하다 체포됐다.
선생은 일본 경찰의 감시 소홀을 틈타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1922년 9월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02년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확정
2002년 수원 영통동 여성 연쇄살인사건 발생
카드 빚에 쪼들린 20대 2명이 승용차를 택시처럼 위장해 몰고 다니며 사흘간 20대 여성 5명을 납치·살해하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들은 승용차에 택시 표시등을 훔쳐 달고 수원 시내를 돌아다니며 2002년 4월 27일 오후 11시쯤 영통동에서 박모씨를 태운 뒤 목졸라 숨지게 하는 등 29일 새벽까지 20대 여성 5명을 차에 태워 살해했다. 이들은 현금 255만원을 빼앗고 일부 피해자를 성폭행하기도 했으며, 범행 후 승용차 뒷좌석에 3구, 트렁크에 2구 등 시체 5구를 싣고 다녔다.
경기 용인경찰서는 4월 30일 범인 허모씨를 구속하고 공범인 김모씨를 수배했다. 이들은 이날 0시40분쯤 용인시 기흥읍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 주차된 엘란트라 승용차 번호판을 훔치다 출동한 사설경비업체 직원들에게 붙잡혔다. 이들은 이후 현장에 도착한 경찰관의 감시 소홀을 틈타 순찰차를 몰고 150여m 가량 도망쳤으며 경찰은 이 과정에서 허씨만 붙잡고 김씨는 놓쳤다. 김씨는 5월 1일 포항에서 경찰에 다시 붙잡혔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찰은 수사중 5명 외에 용인에서 여성1명을 살해한 뒤 암매장한 사실도 추가로 밝혀냈다.
2002년 부산 동의대사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
2002년 4월 27일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1989년 부산 동의대 도서관에서 농성 진압 도중 화재로 경찰관 7명이 사망한 동의대 사건 관련자 46명에 대해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키로 결정했다. 찬성 5명, 반대 3명, 기권 1명의 다수결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경찰과 유족들은 공권력에 폭력으로 대항해 인명을 살상한 것도 민주화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5·3 동의대 사건`은 1989년 3월 입시부정을 폭로한 한 교수의 양심선언과 44일간의 총장실 점거투쟁 과정에서 일어났다. 학내 분규가 계속되는 와중인 그해 5월 1일 노동절 집회를 마친 학생들은 인근 가야3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공포탄 20여발을 발사하며 일부 학생들을 연행했고, 학생들도 다음날인 2일 가두 항의집회에서 전경 5명을 납치했다.
이에 경찰은 3일 새벽 구출작전을 벌였으나 농성 학생 100여명은 도서관 복도에 시너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화재가 나 경찰관 7명이 숨지고 11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당시 검찰은 학생 70여명을 살인죄 등으로 기소했으나 법원은 살인죄 대신 방화치사상죄 등을 인정해 이들에게 최고 무기징역까지 선고했다.
2001년 페루, 미주 대륙 최초의 고대문명 새로 발견
남미의 페루에 잉카 문명을 앞서는 고도의 문명사회가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의 과학 전문지 사이언스 2001년 4월 27일자에 따르면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북쪽으로 약 200㎞ 떨어진 카랄 유적의 연대를 정밀 측정한 결과 약 4000년 전인 B.C 260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판명됐다.
당초 고고학자들은 카랄 유적의 연대를 B.C 1000년으로 추정했었다. 미국·페루 공동연구팀은 카랄 유적에서 발견된 식물 샘플에 대해 탄소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 측정을 해 이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이같은 결과는 아메리카 대륙에 고도로 집단화된 도시문명이 형성된 시점을 800년 이상 앞당긴 것으로, 이에 따르면 페루의 카랄이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도시문명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성립하는 것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건설하고 메소포타미아, 중국, 인도에서 초기문명이 시작되고 있을 당시, 남미의 페루에서는 대규모 석조물과 피라미드 주거지가 건설되는 등 문명이 융성하고 있었다. 연구팀은 또 당시 카랄에 이미 농어업 및 수공업 문화가 있었으며, 중앙집권적 정부나 조직이 주민들을 동원해 60피트 높이의 피라미드를 6개나 건설했다고 말했다.
2000년 삼성자동차, 르노자동차에 매각
삼성자동차가 프랑스 르노사에 매각됐다. 삼성자동차 채권단과 르노사는 2000년 4월 27일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에서 삼성자동차 자산 양수도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삼성자동차는 사실상 삼성그룹의 손을 떠났다. 삼성그룹의 집요하고 조직적인 로비와 부산정세에 굴복한 김영삼 정권의 설립허가로 1995년 4월 기공된 삼성자동차는 공장이 가동되면서 적자의 늪에 빠져들었다.
삼성자동차 55만평 공장부지를 조성하는 데 뿌려진 돈은 6000억원. 타사의 부지비용에 비하면 4배나 비싼 비용이었다. 르노-채권단-삼성이 합작 설립한 삼성-르노자동차(가칭)는 자본금 3600억원에 자산이 1조원 이상이며 르노 70.1%, 삼성 19.9%, 채권단 10%의 지분을 갖기로 했다. 대안 부재로 매각이 불가피했다는 점에서는 관계자 모두가 인정했지만, 건설비용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팔려 국부 유출과 헐값 시비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2000년 헌법재판소, 과외교육금지 위헌 결정
2000년 4월 27일 `과외교육 금지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졌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이날 서울지법이 과외를 금지한 학원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3조와 제22조 1항 1호에 대해 위헌제청한 사건 등 2건에 대해 "자녀 교육권 등 국민의 기본권을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침해한 것"이라며 재판관 9명중 6명의 찬성으로 위헌 결정했다.
이에따라 이 법률조항은 이날짜로 효력을 상실했으며 1980년 7월 30일 이후 금지돼 온 과외교육이 사실상 전면 허용됐다. 헌재의 결정에 대해 학부모, 교사, 학교당국, 교육관련단체, 법조계 등은 `학교밖 교육영역`에 관한 한 부모의 교육권을 우선시한 법리성은 이해하지만 빗장풀린 사교육 팽창과 공교육의 붕괴에 대해 우려하는 반응을 보였다.
1993년 이만섭 국회의장 피선
1993년 소설가 황석영씨,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1989년 밀입북한 뒤 해외에 체류하다 귀국한 소설가 황석영씨가 1993년 4월 27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1962년 월간 ‘사상계’에 ‘입석부근’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탑’과 희곡 ‘환영의 돛’이 당선되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민중의 어두운 현실을 그린 사실주의 소설 ‘객지’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198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운영위원·민중문화운동연합 대표를 거쳐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989년 북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초청으로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본부’ 남측 대변인 자격으로 평양에 들어가 여러차례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이어서 독일에서 체류하다가 1993년 귀국하여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작품으로는 ‘한씨연대기(1972)’ ‘삼포가는 길(1973)’ ‘장길산(1984)’ ‘무기의 그늘(1989)’ 등이 있다. 1994년 국제 펜클럽의 ‘박해받는 작가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2년 한국-타지키스탄, 국교 수립
1989년 분당-일산 신도시 건설 발표
1983년 소련, 우주무기 금지협정 제의
1981년 한일은행 민영화 발표
1978년 아프가니스탄에 군부쿠데타, 칸 대통령 피살
1977년 일본 중의원, 한일대륙붕협정 비준안 통과
1975년 부산 동래 침투무장공비 검거사건
부산시 동래구 석대동 거주 민간인이 산에서 거동 수상자 2명을 발견 신고, 출동한 군·경은 간첩 1명 체포, 5월 3일 간첩 추가 검거
1972년 아프리카 가나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 사망
1972년 미국 우주선 아폴로 16호 지구 귀환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당선
1971년 4월 27일 실시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6백34만2천8백28표를 획득,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얻은 5백39만5천9백표보다 94만6천9백28표를 앞질러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초 7명의 후보가 난립했으나 통사당의 김철 후보와 민중당 성보경 후보가 중도 사퇴, 5명이 경쟁했다.
이번 선거는 사실상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의 각축전이었다. 선거때 박 후보는 공화당이 주도한 경제성장의 비전을 제시했고, 김 후보는 박대통령의 영구집권 기도를 규탄하고 향토예비군제를 폐지하겠다고 공약해 상당한 반응을 얻었으나 조직의 열세로 득표로 연결되지 못했다. 또 5월 25일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총 2백4석 중 민주공화당이 전국구 의원 27명을 포함해 1백13명, 신민당은 전국구 의원 24명을 포함 89명이 당선돼 양당체제로 돌입했다.
1969년 김대만 부산시장 수뢰혐의로 구속
1968년 광화문 네거리에 충무공 동상 제막
충무공탄신 4백23주년을 하루 앞둔 1968년 4월 27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 네거리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 제막됐다. ‘애국선열 조상(彫像)건립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각계인사가 참석, 선열의 열을 되새겼다.
구리로 만든 충무공 동상은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고(故) 김세중씨가 13개월에 걸쳐 만든 작품으로, 좌대(座臺) 높이 12m, 동상 높이가 9m에 달했다. 30평 화강석 좌대에 세워진 동상의 전면양쪽에는 청동주물의 독전고가, 좌대 하충부분에는 청동주물의 길이 3m 되는 거북선이 놓였고 좌대뒷면에는 이은상씨의 명문이 새겨졌다.
당초 세종로에 세워지는 동상이니 만큼 세종대왕을 세우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일제가 훼손한 조선왕조의 축(=정기)을 되살리는 데는 이순신 장군이 최고라는 의견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져 충무공 동상을 세우게 됐다고 한다.
그로부터 36년간 우리들은 각 시대마다 다른 표현과 방법으로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동상 주변에 모여 이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며 입을 모아 민주주의를 갈구해왔다.
2004년 2월, 서울시의 광화문~세종로 네거리의 광장 조성 계획이 발표되면서 한 때 이순신 장군 동상이 시청 앞 광장으로 옮겨질 뻔 했으나 점증하는 시민과 전문가의 반대 여론과 서울의 대표적인 기념물이라는 점 등이 고려돼 당초 시의 계획이 사실상 백지화됐다. 오늘도 충무공 이순신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1966년 페루여객기 안데스산맥에 추락. 49명 사망
1966년 소련 타시겐트 지방 대지진
1962년 혁명재판소, 통사당-통일민전사건 선고
1961년 시에라리온,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0년 토고,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0년 허정 외무장관, 대통령직 대행
1959년 유소기, 중국 주석에 선출
중국의 전국인민대표회의가 1959년 4월 27일 만장일치로 유소기를 국가 주석으로 선출했다. 1921년 공산당 창당이래 강경파인 유소기는 저명한 노동조직가로 알려져 왔다.
그는 1927년에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1934년에는 정치국원으로 승진했다. 1943년 중앙서기처 서기, 인민혁명군사위 부주석, 1949년 중앙인민정부위 부주석을 거쳐 1954년 중국공산당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헌법 초안의 제안설명을 하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에 선출됐다. 1956년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그는 공산당의 조직과 이론 정립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정치권력 면에서도 모택동 다음에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그의 기술 우선, 엘리트 존중 등의 사고방식이 점차 모택동의 사상과 차이를 보여, 1966년 모택동이 주도하는 문화대혁명의 1차 표적이 되었다. 결국 1969년 10월 제8기 중앙위 확대 제12차 총회에서 `당으로부터 영구 제명과 당 내외의 일체 직무 해임`이 결의되어 축출됐다.
1957년 중국, 정풍운동에 관한 지침 공포
1949년 농지개혁법 국회 본회의 통과
1945년 이탈리아 무솔리니 애인과 함께 처형
서쪽과 동쪽에서 각각 진격해 들어온 미군과 소련군이 독일 엘베강 중류 토르가우 부근에서 감격적인 악수를 교환함으로써 2차대전도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1945년 4월 25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가 정부(情婦)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밀라노를 탈출한다.
목적지는 스위스. 그러나 둘은 스위스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탈출 이틀 만에 이탈리아 북부 코모 호수 근처에서 파르티잔에 체포돼 좀더 살아보려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살려만 주면 제국을 주겠다”며 목숨을 구걸했으나 용서받기에는 그가 인류에 끼친 악행이 너무 컸다.
27일 약식재판을 거쳐 총살형에 처해졌고 시체는 28일 밀라노의 로레타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군중 앞에 공개됐다. 이틀 뒤에는 히틀러도 애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을 선택한다. 무솔리니·히틀러에 앞서 4월 12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도 세상을 떠 2차대전의 주역 네 사람 중 처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2차대전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모두 세상을 떠났다.
1935년 손기정, 서울에서 개최된 마라톤에서 2시간25분14초로 세계신기록 수립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 개막
제4회 올림픽 경기대회가 1908년 4월 27일부터 10월 31일까지 영국 런던서 개막됐다. 21개국 2059명의 선수가 모여 제1회 아테네올림픽 이후 가장 성대하게 열린 대회였다. 이전과는 달리 국가대항전의 성격을 띤 올림픽 대회로, 국가간 경쟁이 이루어지면서 올림픽 경기대회의 급속한 양적 성장을 이루는 계기가 됐다.
제4회 런던올림픽은 올림픽사에 여러 진기록들을 낳았다. 그동안 40km전후로 밖에 통일되어 있지 않았던 마라톤 코스가 이 올림픽부터 42.195km로 정해졌다. 당시 마라톤 출발지인 윈저 궁전에서 올림픽 스타디움까지의 거리를 실측한 결과 42.195km였다는 사실. 이것은 향후 마라톤 코스의 정식거리가 됐다. 또한 100m 단거리 육상경기에서 처음으로 11초대를 끊는 진기록이 일어나기도 했다. 남아프리카 워커선수가 10초 8을 기록한 것이다. 또 이 대회에서는 수영경기가 처음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런던올림픽에서는 웃지못할 여러 진기록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탈리아 피에트리 선수가 골인지점 앞에서 의식을 잃어 운영요원의 부축을 받아 골인한 것이 문제가 돼 실격처리되기도 했다고.
1906년 영국-청 티베트조약 조인
1882년 미국 시인, 철학자 에머슨 사망
1822년 미국 제18대 대통령(1869-1877 재임) 율리시스 그랜트 출생
1794년 청나일강 원류에 도달한 스코틀랜드 탐험가 짐 브루스 사망
1791년 미국 무선부호(전신기) 발명가 모스 출생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 필리핀 막탄섬에서 전사
포르투갈 출신의 스페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1521년 4월 27일 필리핀 막탄섬에서 원주민과 전투중 전사했다. 대탐험을 시작한 지 5개월 만이었다.
마젤란이 역사상 최초의 세계일주를 위해 스페인의 세빌랴를 출항한 것은 1520년 11월 28일이었다. 탐험 앤티워프 출신 상인의 경제적 지원과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의 허락을 받고 시작한 탐험에는 다섯척의 선박과 270명의 승무원이 동원됐다. 이듬해 11월 28일 남미 남단과 푸에고 제도 사이를 통과해 태평양에 이른 마젤란은 수개월동안 서진을 계속해 1921년 3월경에 괌섬과 필리핀을 발견했다. 필리핀 세부에서는 군주와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스페인 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그러나 마젤란은 이날 섣불리 막탄섬을 공격하다가 부하 12명과 함께 전사했다. 나머지 선원들이 세빌랴에 도착한 것은 1522년 9월 8일이었고 생존자는 18명이었다. 비록 마젤란 자신은 세계일주를 하지 못했지만, 그는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의 지휘자였다.
399년 소크라테스 독배 마시고 사망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 4월 27일 독배를 마시고 숨을 거뒀다. 70세였다. 죄명은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믿는 신을 믿지 않았다는 불경죄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혐의였다.
소크라테스는 첫 배심에서 500명의 아테네 배심원들 가운데 280명이 그의 유죄를 인정해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아테네 재판 방식에는 유죄가 인정된 사람에게 항변의 기회를 준 후 다시 형벌을 정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제도가 소크라테스에게는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 소크라테스는 항변의 기회가 주어지자 "자신은 죄가 없다", "배심원들이 자신의 공을 인정하고 광장에서 향연을 베풀어줘야 한다"며 공격적인 항변을 한 것이다. 결국 유죄라고 인정한 280명에 다시 80명이 보태진 360명이 사형 지지자로 돌아섰다. 한달 뒤인 이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국외로 도망치라는 친구와 제자들의 설득을 거절한 채 독배를 마셨다.
소크라테스의 비극은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요인들의 우연적인 결합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아테네는 30년동안 지속되다가 기원전 404년에야 끝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게 패배해 사회 전체가 어수선했으며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고 간 두 차례의 전염병과 시칠리아 침공 실패 등으로 사회 분위기는 극도로 암울했다. 더구나 아테네 시민들이 극도로 불만스러워 했던 `30인 참주제`에 참여한 참주 가운데 악덕하기로 소문난 몇몇 사람과 적국인 스파르타에 전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전쟁과 폭정에 대한 쓰라린 기억이 들 때마다 소크라테스를 원망했다. 이때 우연히 찾아온 그에 대한 고발은 희생양를 찾고 있던 사회 분위기와 정확히 맞아 떨어졌고 결국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셔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