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위한 공간창조- 건축가 김수근
방송일시 : 2005년 2월 18일 (금) 1TV 밤 10시
담당연출 : 홍현진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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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타임」紙 선정- 한국의 가장 경탄할만한 훌륭한 건축가
미국의 「타임」紙에서 '한국의 가장 경탄할만한 훌륭한 건축가' 라고 평한 건축가 김수근은 이 땅에 현대건축의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건축도 예술임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만큼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건축가도 없다. 부여박물관의 왜색논쟁을 비롯해 유럽 건축의 모방이라는 논쟁까지, 그의 건축은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은 김수근 개인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당시 한국의 건축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건축을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 여겼던 김수근. 그가 이 회색의 도시에 창조하고자 했던 공간은 무엇이었나.
서울올림픽 주경기장, 서울법원청사 등을 설계한 김수근
그의 국회의사당 설립계획은 왜 취소되었나?
1959년 5월, 국회의사당 설계도안 현상모집 공고가 난다. 당시 이 현상설계는 그 규모와 건물이 상징하는 의미 때문에 국내 건축계에 초미의 관심사였다. 여기에 동경예대에 재학 중이던 김수근도 응모, 당선된다. 남산에 세워질 국회의사당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회의사당 설립계획은 중단되고 작업은 무산되었다.
그 후, 군사정권에 의해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건축물의 건설은 늘어갔다. 1968년, 국회의사당의 새 부지가 정해지고 설계경기가 실시된다. 여기에 겨우 8명의 건축가가 응모, 국회의사당 건물 중앙 상부에 얹힌 돔은 국회 측의 요구로 최종단계에서 지금과 같이 결정되었다. 여러 압박에 의해 여러 차례 변경되면서 시공된 돔은 한국 현대건축사의 대표적인 졸작으로 꼽힌다. 그리하여 세 명의 건축가가 공동 설계한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건축가들 중 누구도 자신의 작품력에 올리기를 꺼려하게 되었다.
결정적 전환점- 부여박물관 왜색논쟁
1967년, 그의 건축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는 시련이 닥친다. 김수근이 설계한 부여박물관이 왜색풍이라는 지적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지붕의 모양이 일본 신사의 '지기'와 정문은 신사의 '도리'와 비슷하다"
당시 국내에서는 친일파의 부류에 해당되면 완전히 사회에서 매장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바로 김수근이 그 덫에 걸려든 것이었다. 왜색작가라고 굴레가 씌워지면 누구든 끝장이던 시절이었다. 결국 논쟁은 확대되어 급기야 '박물관을 철거하라' 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한국 건축계를 일대 혼란 속에 빠뜨렸던 부여박물관 논쟁은 조사위원회까지 꾸려지며 확대되어 가다가, 결국은 과도하게 일본느낌이 나지 않도록 한다는 선에서 타협되었다. 부여박물관 논쟁은 김수근 개인으로도 자신의 건축에 대해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했고, 김수근에게 새로운 건축언어를 찾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건축혼의 찬란한 구현- 한국미의 본질을 터득함
부여박물관 논쟁 후 방황하던 김수근은 훗날 그의 건축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한 스승을 만난다. 바로 최순우였다. 그는 한국 전통예술에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김수근은 최순우를 통해 우리문화 예술의 우수성과 매력에 눈뜨게 된다. 그 후, 김수근이 1979년 설계한 청주박물관은 현대건축이 한국의 전통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주박물관을 비롯, 1970년대는 김수근의 건축혼이 본격적으로 꽃피는 시기였다. 그는 이 시기에 전통을 재창조한 주옥같은 건축작품을 남겼다.
문화의 르네상스를 창조한 '공간'
김수근의 건축혼은 1971년 설립한 공간사옥에 담겨있다. 이 건물은 탄생 직후부터 지금까지도 건축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건축물로 꼽힌다. 결코 크거나 높다가 할 수 없는 건물이지만 '보이는 것'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데 '공간'의 가치가 있다. 그는 이 곳에서 한국적 건축언어의 모든 것을 집약해 보여주고 있다. 김수근 건축의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볼 수 있는, '둘러싸여 있으나 결코 막히지 않은 공간'으로 지칭한 독특한 공간 구성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공간'은 문화의 불모지였던 1970년대, 문화예술을 꽃피운 메카이기도 했다. 공옥진의 병신춤과 김덕수의 사물놀이가 첫 선을 보인 곳, 김수근은 건축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문화 기획자이자, 문화 운동가였다.
건축의 문화로서의 역할에 가장 충실했던 김수근. 가장 한국적인 것을 끊임없이 연구했던 그는 '공간'을 통해 자신의 뜻을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분명 일반적인 건축가의 범주로는 해석할 수 없는, 한국에서 가장 열정적인 문화 엔터테이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