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떠나는 평창 여행(상원사, 월정사, 봉평, 팔석정)
가을의 초입에 오대산 상원사에서 월정사에 이르는 길을 걷고,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의 무대인 봉평과 양사언이 그 풍경에 반해서 하룻밤을 머물려다가 여드레를 머문 팔석정 일대를 찾아갑니다.
“적멸보궁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석가모니의 정골 사리 곧 머리뼈 사리를 모신 곳으로서 오대산 신앙을 한 데 모으는 구심점으로 나라 안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다섯 보궁 중의 한 곳이다.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인데 어디쯤에 석가모니의 머리뼈인 사리가 모셔져 있는지 알 길이 없으며 불상조차 놓여있지를 않다. 건물 뒤쪽 석단을 쌓은 자리에는 50cm 정도 크기의 작은 탑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이것은 진신사리가 있다는 ‘세존진신탑묘’이다. 신앙심이 깊은 불교신자들이 오대산이라면 월정사나 상원사보다 적멸보궁을 먼저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적멸보궁에 서서 바라보면 동서남북으로 적멸보궁을 에워싼 오대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 오대산五帶山을 두고〈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설악산의 남쪽에 있는 오대산은 흙산으로 바위와 골짜기들이 겹겹으로 막혀져 있다. 가장 위에는 다섯 개의 대가 있어 경치가 훌륭하고 대마다 암자 하나씩이 있다. 그 중 한 곳인 중대(中臺)에는 부처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상당부원군 한무외(韓無畏)가 이곳에서 선도를 깨닫고 신선으로 화했는데, 연단할 복지를 꼽으면서 ‘이 산이 제일이다’
예로부터 이 산은 전란이 침입하지 않았으므로 국가에서는 산 아래 월정사 옆에다가 사고를 지어 역조실록을 갈무리하고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예로부터 신령한 산으로 이름이 높은 오대산은 여러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두 왕자인 보천, 효명이 중대 비로봉에서 1만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오대산은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가장 신령스러운 산으로 삼신산에 들었다. 옛 사람들은 이곳을 ‘삼재가 들지 않는 명당 터‘라고 여겼던 곳이고 “어떤 재앙이 닥쳐도 안전한 땅”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성지로 발전하게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대산의 중심을 이루는 줄기인 비로봉 아래 용머리에 해당하는 자리 잡은 적멸보궁 터는 조선 영조 때 어사 박문수가 명당이라 감탄해 마지않은 터이다. 팔도를 관찰하다. 오대산에 올라온 박문수는 이곳을 보고 “승도들이 좋은 기와집에서 일도 않고 남의 공양만 편히 받아먹고 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했다는 곳이다.
“월정사 들머리에서 차에서 내린 일행들은 전나무 숲길을 걸어간다. 죽죽 뻗은 전나무 사이로 사람들이 오가고 나무사이로 보이는 붉은 단풍 아직도 월정사 부근은 가을이 많이 남았구나. 생각하며 월정사에 접어든다.
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인 월정사의 창건유래가《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 오대산(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히 보았으나 범계梵戒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한 노승이 찾아와 범계를 가르쳐주고, 또 불사리를 주면서, “신라 하서부河西府에 일만 문수文殊가 있으니 그곳에 봉안하라.”하므로 귀국하여 봉안할 곳을 찾는 중에 이곳을 보니, 중국의 오대산과 비슷하므로 오대산이라 이름 짓고 탑을 세우고 가지고 온 불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한 민지(閔漬)가 쓴 《봉안사리 개건사암 제일조사 전기(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에 인용한 《대산본기(臺山本記)》에는 이때 그가 머물던 곳이 바로 현재의 월정사 터이며, 자장은 훗날 다시 8척(尺)의 방(房)을 짓고 7일 동안 머물렀다고도 전하고 있어 이 절은 643년 자장이 건립했다고 볼 수 있다.
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스러운 땅으로 신앙되고 있는 이 절은 한국전쟁 당시에 깡그리 불타버리고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별로 없다.
월정사에는 대적광전 앞 중앙에 서있는 팔각구층석탑(국보 제 48호)과 그 탑 앞에 두 손을 모아 쥐고 공양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석조보살 좌상(보물 제 139호) 뿐이다.
적광전 앞 석탑은 자장율사가 건립 하였다고 전해오지만 고려 양식의 팔각 구층석탑을 방형 중심의 삼층 또는 오층이 대부분이었던 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보기에는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고 고려 말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자장율사가 월정사를 세웠다는「월정사 중건 사적비」(이휘진 1752년)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고려시대에 와서야 다각다층석탑이 보편적으로 제작되었으며, 하층 기단에 안상(眼象)과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층기단과 피임돌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만주를 비롯한 북쪽 지방뿐만이 아니라 묘향산 보현사에 팔각 십삼층석탑이 있고 여러 곳에 팔각다형탑이 있는 것을 보면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으며, 탑의 양식으로 보아 탑을 세웠던 때를 아무리 올려 잡아도 10세기 이전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것 같다.
그 앞에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1930년대 우리 문단에서 가장 참신한 언어 감각과 기교를 겸비한 작가’라는 평을 받았던 이효석(李孝石)은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에서 태어났다. 1930년 경성대 법문학부 영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25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봄>이 뽑혔으나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8년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초년 작가시절 유진오(兪鎭午)와 함께 도시유랑민의 비참한 생활을 고발한 작품들을 썼기 때문에 카프(KAPF) 진영으로부터 소위 동반작가라는 호칭을 듣기도 했던 그는 「노령근해」와 같은 정치적 경향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경제적인 곤란을 견디다 못한 이효석은 스승의 주선으로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한다.
하지만 주위의 지탄과 자괴감에 2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었으며, 1931년 결혼한 뒤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하여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찾았다. 그 후 초기의 경향 문학적 요소를 탈피하여 다양한 서정의 세계로 들어서서 「메일꽃 필 무렵」 「돼지」 「산」 「들」과 같은 단편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1938년 이후에는 허무주의적 요소가 가득 담긴 「개살구」 「장미 병들다」 「화분」 등을 썼다. 1940년 아내와 둘째아이를 잃고 극심한 실의에 빠져 만주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건강을 잃은 그는 끝내 뇌막염으로 병석에 누운 지 20여 일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柳宗鎬)는 적요(寂寥)의 아웃사이더라는 글에서 이효석이 「메밀꽃 필 무렵」을 쓰게 된 동기와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효석의 집안과는 한 마을에 살면서 아주 가까이 지내던 성공여라는 사람이 있었다. 성씨 집에는 스무 살쯤 된 옥분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봉평서는 제일가는 일색이었다.
뒷날 집안 형편이 기울어 이웃고을인 충북 제천으로 이사를 갔다. 영에서 뜨는 달과 잔약한 메밀꽃과 머루 다래 같은 산과와 청밀을 고향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던 효석은 서른 살 나던 해, 어릴 때 알았던 ‘곰보 영감’과 조봉근과 충주집과 성옥분의 심상에 상상의 허구를 곁들여 명작 메밀꽃 필 무렵을 써서 고향에 대한 최대의 헌사를 바친 셈이다.”
한편 이곳 평창군 봉평면 평촌리 흥정계곡에 팔석정八石亭이 있다.
팔석정(八石亭)은 그 이름 때문에 건축물인 정자(亭子)로 오해하기 쉽지만 실은 정자가 아니라 여덟 개의 바위를 가리킨다. 물 맑은 흥정계곡의 물길을 따라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이루고 있다.
조선 전기의 문인이자 조선 전기 4대 서예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이곳 경치에 반해 여덟 개의 바위에 이름을 붙였다 하여 팔각정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각각의 바위에는 전설 속 삼신산을 가리키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라는 글씨와 석대투간(石臺投竿; 낚시하기 좋은 바위), 석지청련(石池淸蓮; 푸른 연꽃이 피어있는 듯한 바위), 석실한수(石室閑睡; 낮잠을 즐기기 좋은 바위), 석요도약(石搖跳躍; 뛰어 오르기 좋은 바위), 석평위기(石坪圍碁; 장기 두기 좋은 바위)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하는데 세월이 흘러 지금은 글씨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다
이곳에서 가까운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白玉浦里)의 '판관대(判官垈)'는 신사임당이 율곡선생을 잉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율곡의 아버지인 이원수가 재직한 수운판관(水運判官)을 따서 '판관대(判官垈)'라 이름지었는데, 수운판관이란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는 일을 하는 관직이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월정사에 이르는 전나무숲과 <메밀꽃 필무렵>의 무대인 봉평, 그리고 양사언이 여드레를 머물렀던 팔석정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하시는 분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1. 일시: 2023년 9월 16일(토요일)
2. 출발 시간 및 장소: 서울 아침 7시, 양재역 12번 출구 서초구청 앞
전주 아침 4시 30분 전주 월드컵경기장 싸우나 입구,
3. 참가비: 6만원
4. 어디로 가나요: 오대산 상원사, 월정사, 봉평, 팔석정 봉산서재
5 안내 도반. 신정일(문화사학자, 우리 땅 걷기 대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신 택리지( 강원도의 저자)
6. 신청방법: 댓글로 신청하고 참가비 입금해야 완료(코로나 접종을 마친 사람)
7. 참가비 입금계좌: 국민은행 754801-01-479097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8. 참가비 입금 후 취소 시 환불 규정
(1) 행사일 5일전 인지: 은행 수수료를 공제 후 전액 환불
(2) 행사일 4일전부터 3일전까지: 참가비 50%를 공제후 환불
(3) 행사일 1일전부터 당일까지(미참가 포함): 환불액 없음
위와 같이 행사 참여 취소 시 행사비 환불을 명심하시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비를 입금하시고 대기자로 기다리셨다가 참여를 못하시는 회원님들의 불편함을 없게 하고자 함이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9. 문의전화: 010-9144-2564
10. 주의사항: 모든 걷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참석자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카페나 진행자는 안전사고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첫댓글 전주출발 2명. 고진희/ 박소현
입금했어요~
정안상휴게소 2명 . 박경주/ 한경탁
입금했어요~~
신청합니다 / 전주출발/ 입금완료
전주출발. 2명 이소영 이재만
입금했어요~
신청합니다/서울출발/여1/입금완료
신청합니다/서울출발/여1/입금완료
허남숙.정은하/전주출발
서울출발/나영선, 민복례/여2
신청합니다/전주출발/여1/입금완료
신청합니다/전주출발/송금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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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이연미 참가하겠습니다.
신청합니다/입금완료
2명(사니짱/한정희)
서울출발
신청합니다.
전주출발 박선자, 이영자, 김규자
입금완료
서울 양재 3명 신청합니다!
장미경 외
입금 완료, 모두 여성
신청합니다 서울 입금완료
임제식1 서초 임제식2 정안
감사합니다
신청합니다, 한정숙, 오희환, 서울, 입급완료
신청합니다
서울 양재
차형로님과 동행입니다.
이은주.김병호신청합니다.입금 완료.서울출발
다마네기팀과 가까운 좌석 부탁드립니다.
이승범, 하정임 신청합니다.
서울 출발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