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8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우리은행 500억 횡령사건 발생
2016년 시리아 최대도시 알레포의 알쿠즈병원 공습당해 사망 27명
2014년 노승열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취리히 클래식 우승
2009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 비스타 서비스팩 2가 발표되다.
2009년 '러시아 발레의 전설' 막시모바 타계
'러시아 발레의 전설'로 불렸던 예카테리나 막시모바(Maximova·70)가 2009년 4월 28일 모스크바 자택에서 타계했다. 1958년 세계 최정상인 볼쇼이발레단에서 '호두까기 인형'의 여주인공 마샤 역으로 무대에 첫발을 내디딘 뒤 1988년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30년간 무대를 날아다닌 그녀였다.
지젤과 돈키호테,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발레 주요작품의 여주인공 역할 중 막시모바가 해보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고, 1960~70년대를 대표하는 발레리나로 자리매김했다.
무대 파트너이자 평생의 반려인 동료 무용수 블라디미르 바실리에프(Vasiliev·69)와 1961년 결혼한 후에도 꾸준한 활약을 펼쳐 1973년 인민예술가의 반열에 올랐다.
2004년 네이처誌, 범고래 신호음이 70~80년대 보다 15% 길어졌다.
미국 북서부 연안에 서식하는 범고래(killer whale)들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예전보다 긴 신호음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나가는 선박들이 내는 소음 때문에 자신들의 ‘노랫소리’ 가 잘 안 들리게 됐기 때문이다.
과학전문지 네이처는 영국 더럼 대학과 미국 프라이데이 하버 소재 고래박물관 소속 학자들이 이 지역 범고래들을 1977년부터 200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조사한 결과, 2001~03년의 신호음이 70~80년대 조사 때보다 약 15% 길어졌다고 28일 보도했다.
영화 ‘프리 윌리’ 로 유명한 검은색과 흰색 얼룩의 범고래는 짝짓기와 사냥, 위험 경고 등의 의사소통을 위해 서로에게 노래를 부르는 듯한 신호음을 내왔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고래관측선 등 선박 통행량이 부쩍 늘어나면서 워싱턴주 연안의 범고래 수가 크게 감소했고 소음으로 인해 교신능력까지 크게 떨어진 것.
이 해역에 범고래들을 관찰하기 위해 뜨는 고래관측선은 하루 평균 90여척에 달한다.
2004년 광주광역시 지하철1호선 개통
광주광역시에 지하철 1호선이 착공 7년 8개월여 만에 부분(1구간) 개통돼 광주에도 본격적인 지하철시대의 막이 올랐다. 1구간은 차량기지 1개(용산)와 정거장 13개를 포함하고 있으며, 차량은 1편성에 4량씩 모두 13편성(52량)이 운행한다. 지난 1996년 8월 착공돼 1조 443억원을 들여 7년 4개월여 만인 지난 해 말 토목과 기전분야 공사가 마무리됐다.
광주 지하철은 쾌적한 지하환경을 위해 모든 역사에 냉방시설을 갖췄다. 또한 모든 역사에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지하철 내에 화재 등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자동으로 운전사령에게 통보되며, 환기설비가 제연모드로 자동 전환되도록 했다. 객실 내장재와 바닥재는 국제 수준의 난연성 내장재를 사용했다. 도청역과 금남로4가역에는 국내 처음으로 스크린도어를 설치, 고객의 안전을 확보하고 소음과 열차풍·분진 등을 차단해 쾌적성을 높일 수 있도록 했다.
광주 지하철 전동차는 (주)로템과 조달계약을 맺어 주요 핵심장치를 100% 국산화해 설계·제작했다. 이에 따라 고장 발생 때 신속한 대응과 조치가 가능하며, 외국의 기술과 고가의 부품에 의존해야 했던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또 전동차 차체를 국내 최초로 알루미늄합금으로 제작, 타도시의 기존 전동차보다 중량을 20% 가량 줄였다. 이에 따라 승차감과 소음차단 효과를 향상시키고 운행동력비도 절감할 수 있게 됐다. 열차 사이에 문이 없는 ‘일체형 통로(Gangway)’는 방음·단열효과가 우수하며, 4량의 전동차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만약의 사태 발생 시 신속한 대응과 대피가 가능하다
2003년 애플의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가 출시되다.
2003년 남해 5개섬 잇는 ‘연륙연도교’ 개통
육지와 큰 섬 사이 작은 섬을 중간다리 삼아 연결한 ‘연륙연도교’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경남 사천시(육지)와 남해군 창선도(큰 섬)를 잇는 총길이 3.4㎞의 ‘창선~삼천포간 다리’ 가 8년 공사 끝에 28일 개통식을 가졌다.
이 다리는 육지와 큰 섬 사이에 놓인 늑도·초양도·모개섬 등을 활용해 삼천포대교·초양교·늑도교·단항대교·엉개교 등 5개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를 아우르는 다리의 이름은 전국 공개 모집을 통해 결정할 예정.
건설교통부 관계자는 “다리 모두가 각각 다른 공법으로 만들어져 다리 제작 기술의 전시장과 같다.”며 “특히 삼천포대교는 순수 국내 기술로 처음 만든 사장교”라고 말했다.
경남 사천시 이정일 공보관은 “기존의 남해대교를 이용하면 창선도에서 사천까지 가는 데 2시간 정도 걸리던 것이 이 다리 덕분에 5분으로 단축됐다.”며 “한려해상국립공원인 이 지역이 관광 산업으로 인해 더욱 발전할 것”이라 기대했다.
2003년 박세리, 미국 LPGA투어 통산 20승
‘연장 불패’. 무려 4차례나 연장전을 벌이는 대접전 끝에 박세리(26·CJ)가 통산 20승 고지에 올랐다.
박세리가 28일(한국시간) 미국 조지아주 스톡브리지의 이글스랜딩CC(파72·6187야드)에서 벌어진 LPGA(미국여자프로골프) 투어 칙필A 채리티 챔피언십(총상금 135만달러) 마지막 라운드서 8언더파 64타를 쳐 합계 16언더파 200타로 샤니 와(호주)와 동타를 이룬 뒤 4차례 연장전을 벌인 끝에 올시즌 2승을 달성했다.
지난달 세이프웨이 핑에 이어 한달여만에 감격을 맛본 박세리는 20만2500달러의 상금을 보태며 51만1618달러로 올시즌 상금랭킹서도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을 제치고 단독 선두로 떠올랐다.
지난 98년 LPGA에 진출한 뒤 6시즌만에 20번째 우승 트로피를 손에 넣은 박세리는 지금까지 벌어진 4차례의 플레이오프서 모두 승리하는 승부사의 면모를 과시했다. 역전 우승도 이번이 9번째.
2003년 자오쯔양(趙紫陽) 중국 전 총서기 사망
2003년 한국ㆍ미국ㆍ프랑스 공동개발한 우주망원경 갤렉스 우주공간에 발사
국내 연구진이 참여해 만든 최초의 우주망원경이 2003년 4월 28일 우주공간에 발사됐다. 연세대학교 자외선우주망원경연구단(단장 이영욱)은 미 항공우주국(NASA), 프랑스 우주천문연구소(LAS) 등과 함께 개발한 자외선 우주망원경 갤렉스(GALEX ·Galaxy Evolution Explorer)를 이날 오후 9시(한국시각)쯤 미국 플로리다의 케네디우주센터에서 페가수스 XL 로켓에 실어 발사했다고 밝혔다.
갤렉스는 당시 세계에서 유일한 자외선 우주망원경으로, 우주의 역사를 탐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갤렉스는 지구 대기권의 오존층의 방해를 받지 않아 70억~80억광년 이상 떨어진 고온의 별에서 나오는 자외선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시야도 허블 망원경 등 기존의 가시광선 우주망원경의 수백 배에 달한다.
갤렉스는 앞으로 28개월 동안 지구 상공 690km 궤도에서 지름 50cm의 반사경을 사용해 주로 먼 외부 은하의 별들을 관측할 예정이다. 관측 결과를 처리할 자료센터는 캘리포니아공대, 존스홉킨스대학, 연세대학교 등 세 곳에 설치된다. 자외선우주망원경연구단은 갤렉스의 관측자료를 국내 학계와 공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갤렉스 망원경은 1998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공대를 주축으로 미국·프랑스·한국 3개국 연구팀이 함께 참여해 제작했으며, 한국은 15명의 과학자가 개발에 참여했다.
2002년 제4차 이산가족 상봉
2002년 4월 28일 북한 금강산에서는 2001년 2월의 서울·평양에 이어 남과 북의 부모·자녀, 형제들이 부둥켜안고 반세기 이산의 한(恨)을 풀었다.
이산가족 상봉은 동년 4월 3일 임동원 특사 방북을 통해 이루어졌다. 장소가 협소해 남북한 이산가족들이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상대측 가족들을 만났다. 남쪽 이산가족 100명이 먼저 금강산에 가서 2박3일 동안 북한의 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북쪽 이산가족 100명을 만날 남한의 가족들이 다시 금강산으로 가서 상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날 오후 금강산여관에선 이틀전인 26일 숨진 어머니 어병선(93)씨 대신 상봉단에 포함된 이부자(62)씨를 비롯해 남측 이산가족 99명이 북한의 가족 183명과 단체상봉을 가졌다. 남북 이산가족들은 이날 저녁 북한 적십자회 주최로 금강산여관에서 만찬을 가진 뒤 금강산에서의 첫 밤을 보낸 후 30일 오전 금강산여관에서 북측 가족·친척 183명과의 작별상봉을 끝으로 2박3일간의 짧은 상봉일정을 마치고, 장전항을 떠나 속초로 돌아왔다. 또 5월 1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북측 이산가족 100명을 만날 남측 가족·친척 468명이 금강산으로 떠났다가 3일 돌아왔다.
2001년 미국 억만장자 데니스 티토, 세계최초로 우주 관광
미국의 억만장자 기업인 데니스 티토(60)가 2001년 4월 28일 세계에서 최초로 우주관광객이 됐다. 티토를 태운 러시아 우주선 ‘소유즈-TM32’호는 이날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바이코누르 우주선 기지에서 발사됐으며, 30일 국제우주정거장(ISS)과 도킹에 성공했다.
미 항공우주국 엔지니어 출신으로 캘리포니아주에서 투자금융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티토는 5월 6일까지 8박9일간 우주여행을 위해 무려 2000만 달러(약 260억원)를 지불했다. 사상 첫 우주관광객이 된 티토는 발사 전날인 27일 기자회견에서 “우주여행을 향한 내 필생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감격해 했으며, 28일 우주를 향해 날아오른 뒤 첫 마디로 ‘좋다’는 뜻의 러시아어 “하라쇼”를 연발했다.
10대 때인 1957년 소련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가 처음으로 우주비행에 성공했을 때 이미 우주여행을 꿈꾸기 시작했다는 티토는 10년 전부터 모스크바 당국에 우주정거장 ‘미르’호로의 우주여행을 허락해달라고 졸라왔으며, 미르가 2001년 3월에 폐기돼 남태평양에 수장되자 ISS 여행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탈리아 이민 후손인 그는 키 164cm에 체중 63kg의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의지와 각고의 노력으로 꿈을 이루었다. 티토는 우주여행 전에 900시간의 훈련을 받았다.
200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가 2000년 4월 28일 개막됐다. 영화제는 12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이며 5월 4일 막을 내렸다. 영화제는 당초 우려를 불식하고 기간 내내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받으며 170편 상영작 중 80%가 매진을 기록하는 성과를 거뒀다. 유료객석 9만4000석의 매표율도 85%에 달했다.
부산과 부천에 이어 국내에서 세번째로 개최된 국제영화제라는 핸디캡을 딛고, `대안영화`를 내세운 전주영화제의 전략도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국제영화제가 3개나 열릴 필요가 있는가"하는 의문에 대해 전주는 잠재 관객을 `개발`해냄으로써 답을 던졌다. 하지만 영화제 운영에선 많은 시행착오들이 빚어져 다음해 행사의 과제로 남았다. 관객들은 이구동성으로 북새통을 이룬 매표창구를 문제점으로 꼽았다. 티켓발매업무 혼란으로 표를 사기 위해 1시간 넘도록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속출했고, 전산망이 수시로 다운되는 소동도 잦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프린트 배달사고로 상영이 1시간 지체되는 등 상영사고도 적잖았다.
1999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22년 만에 새단장 공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작 `최후의 만찬`이 22년간의 복원 작업을 마치고 1999년 4월 28일 일반에 공개됐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홀 벽면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12제자와 식사를 하는 모습을 담은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 최고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다빈치가 1494년~1498년에 걸쳐 완성한 이 그림은 수백년이 지나면서 습기와 먼지등으로 손상돼 왔으며 이에 따라 수백년간 걸쳐 수차례 작업을 했다. 그러나 보수 작업에도 불구하고 작품 색상이 어두워지고 표면이 떨어져 나가는 등 오히려 훼손이 심해지자 1977년부터 전문가들을 동원, 본격적인 복원 작업을 시작해 이번에 완성을 보게됐다.
1997년 청주국제공항이 개항
1995년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 사고.
1995년 4월 28일 대구 지하철 공사장에서 가스가 폭발, 국내 지하철공사 사상 최대 규모의 참사가 발생했다. 이날 오전 7시50분쯤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영남중고 앞 네거리 대구 지하철 1-2공구 부근에서 도시가스관이 폭발, 등교길 학생과 출근길 시민 등 총 1백1명이 숨지고 2백2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고로 차량통행을 위해 공사장 위에 임시 설치한 복공판 4백여m가 무너졌고, 차량 1백50대와 건물 3백46채가 무차별 폭탄공격을 받은 듯 파손됐다. 이로 인한 재산 피해액이 5백40억원에 다다랐다.
사고가 나자 경찰 소방대원 민방위대원 군인 등 3천3백여명이 투입돼 사체 발굴과 부상자 구조작업을 벌였으나 가스 대량 누출과 파열된 수도관에서 쏟아진 물로 구조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고는 인부들이 굴착중 실수로 도시가스 배관을 파손하고서 방치하는 바람에 일어난 사고였다
1994년 불교 태고종 우백암 종정 입적
불교 태고종 우백암 종정(78)이 1994년 4월 28일 오전 9시 전남 승주군 선암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64세인 우백암 종정은 13세 때인 1930년 대구 동화사에서 출가한 후 대구 관암사 주지와 태고종 경북 종무원장, 중앙총무원장을 거쳐 1993년 9월 태고종 14대 종정에 취임했다. 우백암 종정은 고요한 성품과 투철한 수행정신으로 종도들의 신망이 깊은 선지식으로 평가받았다.
태고종 발전을 위해 외형적인 노력도 아끼지 않아 경북 종무원장 시절 대구 시내에 태고종 불교회관을 사재를 털어 지은 뒤 헌납하고 총무원장 시절에는 서울 태고종 불교회관을 건립, 종단의 위상을 올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백암스님의 다비 결과 최고 직경 3㎝ 크기 등 사리 37과가 수습됐다. 이들 사리는 대구 팔공산 관음사에 옮겨져 봉안됐다.
1993년 천상의 시인 천상병 별세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떠돌이 괴짜 시인 천상병씨(63)가 1993년 4월 28일 오전11시 자신의 시처럼 하늘로 돌아갔다.
일본 관서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후 귀국, 마산중학을 거쳐 서울상대에 진학했던 전도양양한 젊은이였다. 뒤늦게 모국어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학업보다는 시쓰기에 골몰했고 4학년 2학기에는 대학을 중퇴해 버렸다.
줄담배와 폭음, 숱한 기행과 일화를 남기며 시를 쓰던 그는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베를린 유학생 친구와의 관계를 고백하라`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고 거기서 세차례나 모진 전기고문을 당했다. 6개월간 정보부에 갇혀있다 나오자 극심한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인해 거리를 헤매이는 행려병자가 되었다.
그런 세월이 이어지면서 그의 소재를 파악할 수 없었던 문단에서는 행려병으로 인한 사망으로 판단. 1971년 말 유고시집 `새`를 발간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의 초기 시는 우주의 근원과 죽음의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을 노래했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수식없이 동화풍의 맑고 간결한 시들을 발표했다.
1986년 서울대학교 교정에서 서울대생 김세진(5월 3일 사망) 과 이재호(5월 26
일 사망) 가 전방입소거부투쟁 중에 분신.
1982년 영국, 포클랜드 봉쇄 발표
1981년 한국평생교육기구 창립
1981년 국무회의, 노인-장애자 복지법안 결의
1980년 아프리카 통일기구(OAL), 아프리카 공동시장 창설을 결의
1978년 싱글러브 소장,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반대로 인책 퇴역
1978년 고흥 근해 간첩선 사건
1976년 보사부, 임신중절을 합법화하는 모건복지법안 결의
1976년 그레나다의 에릭 매튜 게이리 수상 내한
1973년 전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 징역 15년 선고
1969년 샤를 드골이 프랑스 대통령직을 사임하다.
프랑스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샤를 드골이 1969년 4월 28일 사임했다. 이날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그가 제안한 지방자치제 개혁과 상원 개혁안을 52.42%의 국민들이 반대한 것이 사임 이유였다. 부결이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보장된 대통령직의 사임을 강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10여일전 한 TV인터뷰에서 "그의 제안이 국민투표에서 거부된다면 사임하겠다"는 공언이 그를 사임하게 했다.
1890년에 태어나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드골은 1차 대전 때 일선 장교로 참전했다 부상당해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2차 대전때는 기갑사단장, 국방차관직을 수행하다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자 런던으로 망명, 그곳에서 대독항전을 독려하며 레지스탕스를 조직했다.
1958년 6월 총리가 된 드골은 그 해 9월 28일 마침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킨 제5공화국을 발족시켰다. 1958년과 1965년 연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드골은 NATO 탈퇴 등 `위대한 프랑스`를 기치로 내걸며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섰고, 캐나다에서는 퀴벡의 독립을 부추겼다. 사임 1년뒤인 1970년 11월 9일 세상을 떠났다.
1969년 현충사 중건 준공
1969년 미군 전면 개혁
1967년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 징병 거부
세계헤비급 챔피언 캐시어스 클레이가 텍사스주 휴스턴 징병국의 육군입대명령을 거부했다. 1967년 4월 28일 휴스턴 징병국에 출두한 클레이는 신체검사에서 합격했지만, `자신은 아랍 모슬림의 선교사`라며 정부가 일반 목사의 병역을 면제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징병을 거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WBA는 즉각 클레이의 타이틀을 취소하는 등 클레이의 병역거부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6월 휴스턴연방지구재판소는 클레이에게 5년의 금고와 1만달러의 벌금형을 판결했다.
한편 클레이는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반전운동과 흑인해방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또한 클레이라는 이름 대신에 이슬람교도로 1964년부터 사용해온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됐다.
1965년 라만 말레이시아 수상 내한
1960년 이기붕 부통령 가족 경무대에서 함께 권총으로 자살
1960년 4월 28일 새벽 5시40분경, 이승만 정권 시절 제2인자로 군림했던 이기붕 부통령이 가족과 함께 리벌버 38구경 6연발 권총으로 집단자살했다.
이날 경무대 제36호 관사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시신은 이기붕과 부인 박마리아,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장남 강석, 차남 강욱 등 일가족 네명이었다.
이기붕은 미국 유학 후 미군정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다 당시 군정청 민주의원 의장을 지내던 중 이승만의 신임을 받아 그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자신의 장남을 이승만에게 양자로 줄 정도로 이승만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 자유당 정권의 제2인자로 군림했다. 1956년 자유당의 공천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고 그 후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4ㆍ19혁명의 발발로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3ㆍ15 부정선거의 표적이 되었고 이기붕의 집앞은 연일 시위대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4월 25일 교수단 데모로 학생 시위가 재개된 후 시위대가 서대문 자택을 포위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기붕은 잠시 경기 포천의 한 군단으로 피신했다. 그러던 중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로부터 이틀 후. 4월 28일 경무대로 돌아와 당시 육군장교였던 장남 강석이 권총을 쏘아 전 가족이 자살했다. 피신 직전까지 그가 살던 서대문 집은 현재 4·19 혁명 기념 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1954년 동남아시아 5개국 수상회의(콜롬보회의) 개최
1952년 휴전회담 본회담 재개. 중립국 감시단 구성에 합의
1952년 대일강화조약-미일안보조약 발효, 연합국의 일본 점령이 끝나다.
1951년 9월 8일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수상이 대일강화(조약을 맺어 평화로운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연합국 49개국과 일본과의 대일강화조약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하우스에서 조인됐다.
미국은 일본을 반공거점으로 삼아 소련과 중국에 대항할 반공벨트를 구축하려고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일본을 하루속히 전범국의 족쇄에서 풀어주어야 했고 일본은 경제재건을 위해 강화가 필요했다.
일본 정부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전면강화 요구를 무시하고 단독강화를 선택했다. 전면강화는 일본과 전쟁을 선포했던 모든 나라와 강화 조약을 맺는 것이고, 단독강화는 공산국가를 배제하고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국가와 강화조약을 맺는 것이다.
강화조약 조인 후 곧이어 요시다 수상은 별도로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위한 미일안전보장조약에도 서명함으로써 일본은 자연스럽게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태평양 반공군사동맹에 편입됐다.
1951년 10월 26일에는 일본 중의원이, 1952년 3월 20일에는 미국 상원이 조약 비준안을 승인했으며 1952년 4월 28일, 이 조약들이 정식 발효됐다. 이와함께 6년 8개월간 계속됐던 연합군의 일본점령도 끝이 났고, 일본은 자유주의 진영의 일원이자 주권국가로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그러나 쿠릴열도와 남사할린 등은 일본의 영토에서 제외됐으며 오키나와는 미국의 군사점령지로 계속 남아야했다. 대신 일본은 안보를 미국에 맡긴 채 경제 발전에만 매달려 기적적인 경제성장과 아시아의 대국으로 부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950년 풀브라이트 한국장학재단(한미교육위원단 KAEC) 창립
1950년 4월 28일 한미간의 교육교류를 위한 풀브라이트 한국장학재단이 창립됐다. 1945년 `전쟁수익금으로 타 국가와 교육교류를 하자`는 법안을 제출한 미국 아칸소주 상원의원 윌리엄 풀브라이트의 이름을 딴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은 현재 전세계 1백30여국에서 운영되고 있다.
한국장학재단은 1950년 창립됐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1960년에서야 1기를 선발할 수 있었다. 풀브라이트는 1942년 초선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국제연합 창설의 모태가 된 국제평화유지기구의 창설을 제안하였으며, 1945년 상원에 진출해 1974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냈다. 1959년 이후 15년간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미국의 대외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1950년 북한비행사 이건순 귀순
1926년 송학선, 제등(사이토) 조선총독 암살 미수
1924년 잠비아의 초대 대통령 케네드 카운다 출생. 잠비아 독립운동 주도.
1920년 영친왕이 일본왕족 나시모토의 장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한국이름
이방자)와 일본 도쿄에서 정략결혼식을 올리다.
1920년 4월 28일, 조선조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이 일본 왕족 나시모토(梨宮)의 장녀 마사코(方子)와 일본 도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일제가 왕실규정을 고쳐가면서까지 둘의 결혼을 고집한 것은 양국간 잡혼(雜婚)을 통한 내선융합(內鮮融合) 정책 때문이었다.
고종과 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영친왕 이은(李垠)은 조선조 마지막 왕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1900년에 영왕(英王)으로 봉해지고 1907년에 황태자로 책봉됐으나 그해 말 이토(伊藤) 조선 통감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가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왕세제로 격하됐다
마사코는 원래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裕仁)의 비로 간택됐으나 임신불능 판정을 받아 조선 왕실의 절손(絶孫)을 노린 일제에 의해 조선 왕족의 세자비로 자리바꿈했다. 히로히토는 4년 뒤 마사코의 사촌인 나가코(良子)와 결혼한다.
영친왕이 결혼한 이날, 서울에서는 한 여인이 눈물짓고 있었다. 1904년에 영친왕의 비로 간택됐으나 일제의 회유와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1918년에 강제파혼당한 민갑완이라는 여인이었다. ‘왕세자의 약혼녀’로 정절을 지키던 민씨는 영친왕이 서거(1970년)한 뒤 못다 이룬 사랑의 한을 품고 1973년 쓸쓸히 생을 마쳤다.
1916년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 `대각(大覺)`
1906년 수학자 쿠르트 괴델 출생
1900년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 출생
1896년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출생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양반 관료의 딸로 태어났다. 국내 첫 여성 서양화가, 문필가, 페미니스트, 독립운동가 등 다양한 이력이 설명해 주듯 그는 한국 근대 여성사와 궤적을 함께 할 만큼 활동범위가 넓었다. 진명여학교를 평균 99점의 우등성적으로 졸업하고 1913년 동경여자 미술전문학교에 입학,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가 된 나혜석은 유학중 조선여자 친목회를 조직, ‘여자계’ 를 출간하는 등 활발한 문필활동을 했고, 페미니즘 운동에도 참여했다. 1918년에 열었던 국내 첫 서양화 개인전은 당시로서는 큰 화제가 됐다.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열린 이 전시에는 당시 5천명의 인파가 몰렸고 평균 월급이 20원에도 미치지 못하던 시절에 작품 ‘신춘’ 이 3백50원에 팔리는 등 성황을 이뤘다. 3·1운동에도 가담해 옥고를 치렀고, 의열단 사건에도 연루되는 등 그는 독립운동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문학분야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보여 1918년에 발표한 자전소설 ‘경희’ 는 국내 첫 페미니즘 문학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화가나 여성운동가로서의 족적보다는 자유연애와 이혼으로 이어지는 파란의 삶이었다. 후일 1920년 외교관이 된 김우영과 결혼해 유럽과 미국 등지를 여행했던 그는 파리에 체류하며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배우는 등 화풍의 변화를 겪었지만 최린과의 염문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1931년 35살의 나이로 이혼당한 나혜석은 1934년에 발표한 ‘이혼고백서’ 와 최린 상대의 제소장으로 사회적 이단아로 몰려 산사를 오가는 생활 끝에 1948년 12월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사회의 냉대와 경제적 어려움이 원인이 된 신경쇠약증세로 고생하다 서울의 한 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서 52세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둔 것이다.
1894년 동학군 전주 점령
1886년 미국 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튼, 여성교육기관 설립
1886년 독일의 사진작가 잘로몬 출생
1884년 한-영 수호통상조약 비준서 교환
1876년 영국 의회,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황제 칭호를 줌
1871년 대원군 전국 서원 철폐
1788년 메릴랜드 주가 미국의 7번째 주가 되었다.
1758년 제임스 먼로 미국 대통령 출생
1686년 뉴튼, 만유인력 법칙 발표
1545년 충무공 이순신 탄생
이순신(李舜臣)은 1545년 음력 3월 8일 자시(子時)에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李貞)의 세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맏형은 희신(羲臣), 둘째 형은 요신(堯臣), 아우의 이름은 우신(禹臣)으로 그들 4형제의 이름은 모두 중국 전설상의 인물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온 것이다. 이순신의 출생지인 건천동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1가의 중심부였다.
이순신(李舜臣)이 태어나고 자랄 무렵 그의 가세는 매우 궁핍했다. 갈수록 형편이 곤궁해지자 아버지 이정(李貞)은 식구들을 데리고 현재 현충사 자리인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의 처가로 낙향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32세에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보냈다
이순신은 그의 나이 20세 때에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방진(方震)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순신이 32세 때까지 청년기를 보낸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의 옛 집터에는 전국 각지에 있는 이순신의 사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현충사(顯忠祠)가 있다. 현충사는 본래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지 108년이 지난 1706년에 이곳에 이순신의 사당을 세우고 그 이듬해에 숙종(肅宗)이 친필 액서 '현충사(顯忠祠)' 석 자를 내린 것이 최초였다. 그리고 200여년 간 추모의 향화가 이어졌으나 1910년 일제(日帝)가 대한제국을 병합한 뒤에는 이곳 땅이 모두 일본인에게 넘어가고 사당도 헐려 없어질 위기에 빠졌다. 이에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와 이충무공유적보존회(李忠武公遺蹟保存會)가 나서서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벌여 1932년에 현충사를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45년 광복 이후 해마다 양력 4월 28일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에 제전을 올리고 있다. 그 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대대적인 현충사 성역화작업을 벌여 사당을 중건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충사 경내에는 본전, 옛 집과 궁술장(弓術場), 이순신 장군의 셋째 아들 이면의 묘, 충무정, 구본전과 유물관, 정려와 가묘 등이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이순신 장군의 두 자루 대장도(大長刀), 옥로와 허리띠, 난중일기(亂中日記) 및 교지와 비석 탁본 등 문헌, 거북선 모형과 각종 무기류, 한산해전도(閑山海戰圖) 등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이순신의 전과 등 활약은 다음 편에)
1467년 원각사 13층탑 완성
1406년 덕수궁 준공(태종 6년)
B.C.57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위에 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