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경인 요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몸이 피곤한 건 분명한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위에 누워 스탠드를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몸을 뒤척였다.
눈꺼풀도 무거운데 왜 잠이 들지 않는 것인지… 호경이를 괴롭게 했다.
얼마 전부터 재유를 보고 있는 자신이 분명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안 쓰러운 감정을 떠나 이젠 그 이상의 감정이 들기 시작한다는 것을…
며칠 동안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호경이의 감정은
어느 순간, 결론 지어지고 있었다.
‘나는…재유를 좋아하고 있었어.’
호경인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재유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했는데 아무 기척이 없었다.
재유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호경인 그런 재유 곁에 다가가 침대 아래 앉았다.
그리고 가슴 위에 올려져 있던 재유의 손을 잡았다.
재유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내가…너희집에 오게 된 것이 운명이었을까…?
난 내 의지로 온 거였어. 내 선택에 따라 난 너를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어.
이게 내 운명이라면 너무 가혹하지 않아?
내 인생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산적은 없었지만 말야.
그래도 남들처럼 어느 때가 되면 결혼도 하겠지…라고 막연한 생각은 가지고 살았는데 말야.
이 무지막지한 감정을 도대체 모르겠어서 너무 당황스러워..
내 미래에 자꾸 끼어드는 너를…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차라리 너에게 고백을 하고 미친놈 소리를 들을까?”
호경인 재유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널 좋아해…신재유…”
바다에 한번 가고 싶었다.
남들에겐 별거 아닌 여행일지도 모르겠지만
푸른 바다를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며 바다내음을 맡던 열 살의 호경이는
열 살을 훌쩍 넘긴 지금도 바다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큰소리 치며 말하면서도
가족끼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볼 때면 부러움에 몸서리 치며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원망하지 않는다면서 원망하고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좋아하고
왜 항상 거짓말 같은 말을 하는 것일까.
호경인 재유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파도가 넘나드는 갯벌을 떠올리며 재유와 함께 뛰고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호경인 재유의 손을 잡은 채 잠이 들었다.
아침 해가 유난히도 눈부시게 비치는 아침, 재유는 잠에서 깼다.
어젯밤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은 있는데 달콤한 잠에 빠져 꿈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시험도 끝났고 오늘은 더군다나 휴일이었으니까.
왠지 모를 행복감에 재유는 침대에 계속 누워 있었다.
재유가 눈을 뜨자, 자신의 옆엔 호경이가 손을 잡은 채 침대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살짝 놀라기도 했지만 재유는 호경이를 깨울 수가 없었다.
요즘 불면증에 시달리는 호경이를 재유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는지라,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자는 호경이를 깨우고도 싶었지만
혹시라도 깨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할 까봐 걱정이 되었다.
잠시 후 재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호경이의 손 안에서 자신의 손을 슬며시 빼냈다.
그리고 자신의 베개를 침대 아래로 살며시 떨어뜨리고 호경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이불을 끌어내려 호경이의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조심스러운 재유의 행동에 호경인 잠에서 깨지 않고 계속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아침 9시.
재유는 간단한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1층으로 내려갔다.
휴일이라 아주머니도 오시지 않는 날이고,
재유는 현관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크지 않은 정원이었지만 정원에 심어놓은 몇 가지 유실수들이 봄을 지나 여름을 맞으며
제법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재유는 감나무 옆에 있는 원목 흔들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재유가 눈을 뜨고 바라보니 아버지였다.
“아버지…”
“일어났구나.”
아버지가 재유의 곁으로 다가왔다.
“시험은 모두 끝났니?”
“네. 어제 다 끝났어요.”
“그 동안 공부하느라 힘들었지?”
“아니요.”
“호경인 아직 자니?”
“네. 아버지, 커피 한잔 드릴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
아버지가 웃었다.
재유도 기분 좋게 웃으며 현관문 쪽으로 뛰어갔다.
가볍게 뛰는 재유의 뒷모습을 보니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재유의 아버지는 흐뭇한 얼굴로 대문 가까이에 가서 신문을 집어 들었다.
잠시 후 재유가 따뜻한 커피한잔과 차가운 오렌지주스 한잔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초여름의 아침날씨가 제법 괜찮았다.
햇빛도 뜨겁지 않았고 바람도 적당했다.
아들이 가져다 준 커피잔을 손에 들고 그 향기를 맡으며 어느 날보다 맛있는 커피 한잔에
재유의 아버지는 행복해했다.
“시험도 끝났는데, 오늘 호경이랑 놀러 라도 가지 그래.”
“호경이 그 동안 잠을 충분히 못 잤어요.”
“시험 때문에 그렇구나.”
“네. 시험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런….”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줄곧 1등만 했다고 들었어요.”
“그래…나도 듣긴 들었다.”
“오랜만에 깊이 자는 것 같아서 깨우고 싶지 않아요. 오늘은 집에서 이렇게 쉬려구요.
아버진 오늘 어디 가세요?”
“그래. 오후에 선약이 있다.”
“저녁 먹고 오세요?”
“응. 너희 둘이 맛있는 거 사먹으렴. 용돈 주마.”
“아니에요. 지난번에 주신 것도 충분히 많아요.
아, 그리고…술 너무 많이 마시진 마세요.”
재유가 말했다.
재유의 아버진 이것저것 묻는 재유가 반가웠다.
“그래…많이 안 마시마.”
주스를 마시는 재유의 모습을 보며 아버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여보, 이만큼 자란 재유….대견하지…
내가 챙기지 않아도 이젠 이 녀석이 날 챙겨.
우리 걱정은 하지마.
당신, 살아있어서 이만큼 큰 재유 봤다면 얼마나 좋아 했을까.
우리 지유도 시집갈 나이가 다 됐는데…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예뻤을까.
당신 닮아서 우리 지유 오죽 예뻤어?
갑자기 딸과 아내 생각에 재유의 아버진 눈물이 났다.
재유가 좋아진 모습을 보니 기쁘기도 하였지만 이렇게나 커버린 재유의 모습을
아내와 딸이 볼 수 없다는 슬픔의 감정이 교차하여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
눈물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재유의 마음도 아팠다.
“아버지가 아들 앞에서 눈물이나 보이고, 참 못난 애비다.”
재유의 아버지가 웃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뭐가 죄송해.”
“아버지의 슬픔을 이해 하지 못 한 거요.”
눈물을 감추려던 재유의 아버진 또 한번 눈물을 흘렸다.
의젓한 아들의 말 한마디에 이젠 현실을 받아들이고 걱정 없이 살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번 주에 엄마랑 누나한테 갈까? 호경이도 데리고.”
“네.”
재유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현관문이 ‘덜컥’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호경이가 기지개를 펴며 다가왔다.
“아저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호경이 일어났구나.”
재유의 아버지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동안 피곤 했을 텐데 좀 더 자지 않구.”
“많이 잤어요.”
호경이가 멋쩍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
“너도 주스 갖다 줄까?”
재유가 호경이에게 물었다.
“응.”
재유가 의자에서 일어나 또 다시 현관 쪽으로 걸어 갔다.
“모처럼…좋구나.”
재유의 아버지가 재유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니가 없었다면 저 녀석… 이렇게 나와 마주 하는 일 없었겠지…”
“아니에요. 아저씨. 슬픔이 깊어지면 옆에 누가 있더라도 변하지 않아요.
재유에겐 의지가 있었으니까요. 저야 말로 아저씨와 재유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공부를 계속한다는 건 꿈도 못 꾸고 고아원에서 방황만 했을 거에요. 정말 감사 드려요.”
호경이의 의젓한 말에 재유의 아버진 갑자기 호경이가 측은해졌다.
“이렇게 잘 큰 널…친 부모님이 보시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호경아…니가 원하면 친부모님 내가 찾아보겠다.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
재유의 아버진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호경이도 당신아들만큼이나 아끼는 아이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우는 사람들이 많이도 있겠지만
재유의 아버진 그 어떤 사람들 보다 더 호경이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다.
“처음엔…널 내 호적에 올릴 생각이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발언에 호경인 깜짝 놀랐다.
“널 내 호적에 올려서 정말 친 자식처럼 키우고 싶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난 그러지 않기로 했다. 너에게 엄연히 친 부모님이 있고, 핏줄은 끊을래야 끊을 수도 없어.
훗날 너의 부모님이 나타나서 널 데려가겠다고 하면 난 아무 말도 못하고 널 돌려줘야 해.”
“아저씨….”
호경인 감격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언제든 말해줬으면 좋겠어. 부모님을 만나고 싶다고….”
“그런 일은 없을 거에요. 전 지금이 좋아요.”
호경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난 너의 의견을 존중한다.”
재유의 아버지도 웃으며 말했다.
재유의 아버지와 호경이의 대화가 마무리 될 때 쯤 재유가 현관문을 열고 양손에 쟁반을 들고 조심스레 걸어 나왔다.
쟁반 위엔 호경이의 주스와 노릇노릇 구워진 식빵 여섯 장과 버터 잼이 놓여 있었다.
“아침 대충 떼 울까 해서…”
재유가 멋쩍은 듯 웃었다.
푸른 잎들이 화사하게 반짝거리는 일요일 아침.
그들은 정원 한가운데 놓여진 원목 테이블과 그 테이블 위의 간단한 아침식사와 함께
소소한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사람에겐 늘 불행과 행복이 교차하며 찾아 든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점차 지워진다.
결국 고통스러운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누군가가 밝혀주는 촛불….그 누군가에게 주저 없이 사랑을 표현하라.
그 사랑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열쇠일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