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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금강무적 7권 6. 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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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사
“이건 또 웬 다 죽어가는 폐물인가?”
혼세마왕등과 함께 폐허가 된 수라검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만독혈왕은 수라마왕이 자신 앞에 던져놓은 다 죽어가는 늙은 거지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는 도중에 정신을 잃을까 그러네. 고통만 느끼지 않도록 조치해주게.”
만독혈왕이 삼족개의 덜렁거리는 사지를 보더니 말했다.
“모조리 부러졌군. 혹시 이놈이 흉수인가?”
“개방의 인물일세.”
수라마왕의 대답에 만독혈왕은 즉시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우선 부러진 팔, 다리 부근의 혈도를 점한 후,
두 손으로 뼈를 간단히 맞추었다. 부목을 대지는 않았지만 혈도를 점해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으니 당분간 고통은 느끼지 않을 터였다.
만독혈왕이 그의 뼈를 모두 맞추는데 촌각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보통의 의원들이 보았으면 화타나 편작이 살아 돌아왔다고 감탄을 할만 한 솜씨다.
“자, 되었네. 반 시진 정도는 끄덕 없을 걸세.”
수라마왕은 고맙다는 뜻으로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삼족개 진용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러자 삼족개는 신음성과 함께 즉시 깨어났다.
“으으…….”
그는 힘겹게 눈을 뜨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 여기는…?”
삼족개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죽을 것만 같았던 고통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내가 죽어 저승에 왔나…….”
그때 수라마왕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러진 뼈는 모두 맞추어 놓았다. 제대로 이야기만 해 준다면 무사히 분타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삼족개는 뼈를 모두 맞추어 놓았다는 수라마왕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지에 힘이 없을 뿐 별다른 통증은
느껴지지 않아, 그의 말이 사실임을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는 즉시 고개를 조금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자신이 있는 곳이 바로 폐허가 된 수라검문임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혹시 수라검문과 관련이 있는 분이시오?”
그의 물음에 수라마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의 신분을 알게 되면 너를 살려줄 수가 없다. 그러니 너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수라검문이 멸문하게 되었는지만 이야기 하라.”
삼족개 진용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우선 수라검문이 진주언가와 세력다툼에서 지는 바람에 멸문하게 되었다는 것에는 조금의 이견이 있을 수 없소.
물론 그 원인은 당시 수라검문주의 갑작스러운 행방불명으로 인한 검법의 절전때문이었소. 수라검문주였던 사인후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라마왕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 이야기는 아는 것이다. 그 후를 이야기해보라.”
삼족개 진용은 수라마왕의 아들이자 당시 수라검문주가 된 사무정이 치열한 싸움 끝에 진주언가의 정예인
언가십팔위의 포위망에 갇힌 상황과 그들의 연수합격에 장렬히 산화하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사무정이 죽자 대부분의 수라검문 고수들도 죽음을 당했고, 살아남은 가솔들은 장원 내에 유폐를 당했다고 말해 주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수라마왕의 표정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자만이 살아남는 곳이 바로 강호가 아닌가.
힘이 모자라 적에게 패했다면 상대보다 강하지 못했던 자신 말고 누구를 탓하겠는가. 비록 수라검문이 자신의 가문이기는 했으나
이러한 도리를 잘 알고 있는 수라마왕이었기에 그다지 원통해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를 듣게 되자 그로서도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라마왕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정말 언가놈들이 수라검문의 무공을 빼내려 했느냐? 그 과정에서 후손들이 모두 죽음을 당했고?”
삼족개 진용은 수라마왕의 눈에서 불길이 뿜어지는 듯 느껴졌다. 벌겋게 충혈된 두 눈이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삼족개는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건 확실하지는 않소. 다, 단지 정황을 미루어보아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외다.”
수라마왕은 개방의 정보력을 믿었다. 그들이 그랬다면 정말 그런 것이다. 그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불끈 쥐었다.
“쳐 죽일 놈들…….”
삼족개는 수라검문의 마지막 후예인 사강룡이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마대위와 함께 다니고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다그치는 이 노인이 수라검문과 친분이 있어 사강룡에 대해 이야기해 주어도 상관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잠시 갈등했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굳이 자청해서 그까지 알려줄 필요도 없었거니와
마대위에 관한 정보는 소방주인 홍소미가 직접 관장하기에 기밀에 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결정이 얼마나 처참한 참극을 가져올지에 대해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만약 수라마왕이 사강룡의 존재에 대해 알았다면, 복수를 하기에 앞서 그를 먼저 찾으려 했을 것이다.
물론 복수는 그 후에 어떤 방식으로든 이루어졌겠지만, 진주 혈사라 불리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수라마왕은 한동안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혼세마왕등이 그를 불러보았지만
수라마왕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각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멍하니 앉아있던 수라마왕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마치 서리가 내린 듯 차가운 기운이 그의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는 듯 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본 혼세마왕등은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성을 흘렸다. 적어도 자신들이 아는 한, 수라마왕이 저러한 표정을 지으면
그야말로 피의 축제가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수라마왕은 갑자기 대종사와 북해성모를 태우고 있는 가마 앞으로 가더니 일배(一拜)를 올렸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않은 채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혼세마왕등은 수라마왕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그가 살기를 풀풀 날리며 갈 곳이라고는 진주언가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점차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비천마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자만 보낼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머지 마왕들도 모두 일어섰다. 그러자 비천마왕이 안색을 찌푸렸다.
“모두 다 가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대종사님은 누가 지키지?”
순간 혼세마왕등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자청해서 나서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모두 수라마왕을 도와주기위해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작은 한숨소리와 함께 혈영마왕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대종사를 지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혼세마왕등은 혈영마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수라마왕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으…, 게 누구…, 누구 없느냐? 누구…? 헉!”
지독한 악몽이었다. 이미 수 년 전에 죽어 땅 속에 파묻혀 있는 시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유령이 되어 무덤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꿈이었다.
게다가 유령들은 원한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에게 다가오기까지 했으니 기겁을 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폭풍신권 언철심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소매로 대충 훔치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마치 고수와 밤새 용호상박(龍虎相搏)의 혈투라도 벌린 듯 하다.
“하아! 하아!”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을 쓰다듬었다.
‘내공이 경지에 올라 내식이 균형을 찾고, 안정을 이룬 후에는 악몽 따위는 꾸어본 적이 없었다. 헌데 이 무슨 불길한 꿈이란 말인가…….’
언철심은 손을 뻗어 침상 머리맡에 놓여진 주전자를 들고는 입에다 쏟아 부었다. 소매로 입을 대충 닦은 그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독한 놈들…….’
참혹한 고문에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던 수라검문도들의 목소리가 뇌리에 울리는 듯 하다. 그들은 고통에 못 이겨 자신들이
알고 있던 수라검문의 무공비결들을 모두 실토했다. 그 무공들은 언가 고수들의 손에서 다시 정리되고 재구성되어 전혀 새롭다시피 한 언가의 절기로 탄생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수라검문 최고의 절기를 익힌 고수들은 그만큼 사로잡기가 어려워 대부분 죽음을 당했다.
그나마 사로잡힌 몇몇은 무공의 성취만큼 정신력도 대단해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무공들을 무덤 속까지 가져가벼렸던 것이다.
폭풍신권 언철심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여명(黎明)을 뚫고 언철심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흐읍! 하아!”
그는 폐부 깊숙이 공기를 빨아들였다가 다시 내쉬었다. 서늘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머리까지 뻗치는 듯 하다.
하지만 조금도 상쾌해지지 않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바닷바람에 실린 염분처럼 새벽공기에 섞여 있는 듯 했던 것이다.
@@@
“저기로군.”
나지막한 언덕 위에서, 음산한 느낌을 주는 회갈색의 거대한 장원을 바라보며 수라마왕이 중얼거렸다.
휘익!
그때, 한 줄기 바람이 스치는 듯 하더니 세 개의 인영이 더 나타났다. 바로 수라마왕과 함께 태현을 떠나 밤새 달려온 혼세마왕등이었다.
그들은 굳은 표정으로 진주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특히 수라마왕의 얼굴은 지극히 차가워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제 아무리 초절정고수가 네 명이나 있다고 할지라도, 진주언가 전체를 상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인 이상 진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비천마왕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일단 먼저들 가게. 금방 정리하고 따라가지.”
그의 말에 수라마왕이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혼세마왕과 만독혈왕도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고,
동시에 비천마왕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희미한 잔영을 남긴 채 언덕 주변을 한바퀴 돌아 다시 원래의 위치에 도착하기까지 숨 몇 번 쉬었을 정도의 짧은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10여리 전부터 그들의 뒤에 따라붙어 은밀히 미행해 온 무사들을 모조리 제압해버린 것이다.
비천마왕은 즉시 신형을 날려 혼세마왕등을 따라잡았다.
잠시 후, 그들은 언가장이라는 거대한 현판이 달려있는 정문 앞에 도착했다. 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정문을 바라보자 좌우에 서 있던 호원무사들이 다가왔다.
그들 모두 새하얀 백의를 입은 사내들이었는데 이마에 검은색의 영웅건을 질끈 둘러맨 것이 무척 깔끔하고 멋있어 보였다.
다소 나이가 들어 보이는, 수뇌인 듯한 자가 나서서 포권을 하며 말했다.
“본가를 방문하신 듯한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깍듯이 예의를 갖추되 결코 비굴해보이지 않는 적당한 선에서 인사를 하는 것이 과연 세가의 인물다웠다.
수라마왕은 그의 입에서 조금이라도 불손한 언사가 나왔다면 곧바로 베어버릴 생각이었지만 상대가 예의를 갖추니 검을 뽑지는 않았다.
하지만 피의 복수를 하러 온 그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산서성에서는 진주언가가 가장 강하다는 헛소문이 강호에 만연하고 있더구나. 그래서 노부는 이 소문이 사실인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찾아왔느니라.”
대놓고 도전을 하겠다는 말에도 호원무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살짝 숙이며 여유롭게 말했다.
“본가는 단 한번도 그러한 소문을 강호에 퍼뜨린 적이 없습니다. 단지 하늘을 우러러 단 한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살라는
본가의 가훈을 충실히 따른 결과, 몇몇 강호인들이 이에 감복하여 그런 소리를 지껄인 모양입니다.”
수라마왕이 그가 한 말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뭐라, 하늘을 우러러 단 한점의 부끄러움이 없어? 허허허…….”
그가 기가 찬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자 곁에 있던 비천마왕이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대단한 가훈이로군, 그래.”
순간 호원무사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처음 그들을 보았을 때, 무공을 익힌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고, 종복들이나 입는 허름한 마의를 입고 있었기에
노망이 난 노인네들이 단체로 유람이라도 다니는 줄 알았다.
반경 십여 리 이내에는 이미 세가의 눈과 귀가 깔려있기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었으면 벌써 기별이 왔으리라.
즉, 외곽 경비무사들이 이들을 통과시킨걸 보면 별다른 위험요소가 없다는 판단을 했다는 뜻이 된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갑자기 나타난 이 노인들을 살펴보았다. 햇빛을 많이 보지 못했는지 피부가 다소 하얗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특이한 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에게 처음 말을 건넨 노인의 허리에는 검도, 도도 아닌 괴상한 형태의 쇠몽둥이가 걸려있지 않은가.
‘강호에는 여자와 어린아이, 그리고 노인을 조심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함부로 판다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가 관도를 가리키며 더욱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르신들께서 가셔야 할 길은 저쪽인 듯 합니다. 살펴가도록 하십시오.”
수라마왕이 그와 곁에 있는 그의 동료들을 쭉 둘러보더니 말했다.
“네놈들의 나이를 보니 그때에는 한창 무공을 익히느라 강호에는 나오지도 못했겠구나. 비켜서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말을 마친 수라마왕이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
순간 호원무사들 모두 흠칫 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는데, 한결같이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쇠몽둥이로만 보았던
그것에서 붉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았는데, 그건 검강의 초기단계라는 검사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게다가 나머지 노인들의 몸에서도 무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와 온 몸을 꽁꽁 얼리는 듯 느껴졌다. 이는 절정고수들만이 뿜어낼 수 있다는 무형지세임이 분명했다.
“머, 멈추시오.”
예의 그 수뇌인 듯한 사내가 다시 수라마왕의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 붉은 빛이 번뜩이는 듯 하더니 그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뿌려졌지만,
마치 무형의 장벽이 쳐져 있기라도 하듯 수라마왕의 옷에는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수라마왕의 으스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노부는 두 번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다시 전진하자 호원무사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사실 그들의 실력이나 가문에 대한 충성심으로 보아,
차라리 수라마왕의 검에 죽는 한이 있어도 이렇게 물러설 인물들은 아니다. 하지만 수라마왕등의 기세가 워낙 대단했기에,
자신들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물러서기만 했던 것이다.
수라마왕이 정문을 열고 문턱을 넘어서려다 멈추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신형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는 언가장이라는 현판을 단칼에 베어버리고는 냉소를 쳤다.
“흥, 곧 망할 가문에서 이런 게 왜 필요해!”
현판은 두 조각이 즉시 바닥에 떨어졌다.
이 모습을 본 호원무사들은 이성을 되찾았다.
“이, 이게 무슨 짓…?”
“쳐, 쳐라!”
그들은 일제히 주먹을 휘두르며 수라마왕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제법 사나운 권풍이 일어나 수라마왕에게 몰려갔는데,
그들의 두 팔은 거무튀튀하게 변해 있었다. 바로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강시권이 펼쳐진 것이다.
수라마왕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검을 한 차례 휘둘렀다.
순간 검의 궤적에 걸려든 다섯 개의 손이 그대로 잘려나가 땅에 떨어졌다. 비명은 그 다음이었다.
“크아아악!”
모골이 송연힌 비명이 장원 전체를 울렸다.
그러자 장원 곳곳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내 장원내의 연무장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대부분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상태였다.
아마도 이들 중 태반은 잠을 자다가 비명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모양이다.
그들은 붉은 검사가 꿈틀거리는 검을 들고 있는 수라마왕과, 그에 못지않은 기세를 가진 세 명의 노인들을 보고는 경악했다.
하지만 손이 잘려 피를 뿌리고 있는 제자들을 발견하자, 이내 분노로 몸을 떨었다.
“가, 감히 본가 안에서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웬 놈들이냐? 정체를 밝혀라.”
언가의 고수들이 제각기 소리치며 소란을 떨었지만 수라마왕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그가 내공을 실어 소리쳤다.
“언가의 가주는 지금 당장 나서도록 하라!”
장원 전체가 떠들썩할 정도의 진력이 실린 목소리에 언가의 무인들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그들 중, 단정한 문사풍의 중년인이 나섰다. 바로 언가의 총관인 운중신룡(雲中神龍) 언연심이다. 그가 준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수라마왕이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운중신룡 언연심은 상대가 대답은커녕 자신의 정체를 묻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냉소를 친 후 다시 말했다.
“흥, 본가를 찾아와 사람을 상하게 하고서도 살아남을 듯 싶었더냐? 좋다. 오늘 본가에도 검이 있음을 보여주리라. 용검대는 즉시 나서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십여 명의 중년인들이 수라마왕 앞으로 다가섰는데 그들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수라마왕이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천마왕 또한 이를 이상하게 여겼는지 수라마왕에게 말했다.
“언가에 검법도 있었는가? 내가 알기에는 주먹질 하는 것 외에는 변변한 절기가 없다고 들었는데…….”
비천마왕의 모욕적인 말에 언가의 무인들 모두 분노에 찬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수라마왕 앞으로 나선 십여 명의 검수들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고만 있을 뿐 감정의 기복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검을 쓰는 무인이 갖추어야 할
첫 번째 덕목인 냉정함을 제대로 체득한 듯 했다.
검수들 중 먼저 세 명이 나섰다.
수라마왕 또한 관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주시했는데, 언가의 검법은 그로서도 처음 접하는 것이라 무인으로서의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챵!
맑은 쇳소리와 함께 세 개의 검이 뽑혀져 나왔고, 매서운 검광을 뿌리기 시작했다.
피빗! 핏!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그들의 검은 은밀한 검망을 형성한 채 수라마왕을 향해 다가왔다.
합벽검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형태가 바로 검망이다. 주로 강한 상대 한명을 다수가 합공할 때 쓰는 수법으로,
적극적으로 상대를 공격해 제압하기 보다는 수비를 철저히 함으로서 제풀에 지쳐 포기하도록 만들 때 사용한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수비초식이니만큼 검법의 근간을 이루는 검의가 가장 잘 나타나 있기도 하다.
즉 이 초식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 무공의 뿌리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검이든 사람이든 검강으로 사그리 쓸어버리려던 수라마왕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왠지 모르지만 이들이 펼치는 검법이
눈에 익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수라마왕은 시선이 그들의 발을 향했다.
‘안쪽부터 밟으며 발끝을 살짝 벌려 사선으로 밟아간다? 게다가 앞쪽 무릎을 살짝 굽혀 언제든 치고 나갈 수 있는 공세를 형성하며…….’
검법의 칠할은 보법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자신과 상대를 놓는 각도, 그리고 운신은 전적으로 보법에 의지하니 말이다.
수라마왕은 이들의 밟아가는 족적을 바라보다가 한 가지 보법을 떠올렸다.
‘수라탄영보(修羅彈影步). 설마 놈들이…….’
그는 수비에 치중하는 듯 하던 검망이 일순간에 풀리더니 자신을 뒤집어씌울 듯 덮쳐오는 것을 보고는 확신했다.
‘탄망추혼까지…, 쳐 죽일 놈들…….’
두 가지 무공 모두 수라검문의 독문절기다. 초식의 형태를 다듬는다고 해서 그 근간까지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라마왕은 이 무공들을 어려서부터 익혀왔고, 따라서 형태가 조금 바뀌었다고 해서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수라마왕은 단번에 그들을 쓸어버리려다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우선 사위에서 덮쳐오는 검망을 향해 검을 횡으로 휘둘렀는데,
수라마왕의 신형은 검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한바퀴 회전하게 되었다.
츄아악!
검망은 수라마왕의 단 일검에 중단이 길게 갈라지더니 소멸해버렸다.
언가의 검수들은 그가 이처럼 간단히 검망을 파훼할 줄 몰랐는지 무척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귀에 수라마왕의 비웃음이 가득실린 목소리가 들렸다.
“진정한 탄망추혼은 이런 것이다. 언가의 개들아!”
수라마왕은 갑자기 신형을 다시 한번 빙글 돌렸는데, 그 와중에 검을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동시에 검의 궤적을 따라 새끼손가락조차 빠져나가기 어려운 촘촘하고 붉은 색의 검망이 나타났다.
언가의 검수들이 만들어낸 것과 거의 비슷했지만 수라마왕의 것은 더욱 촘촘하며, 세상을 삼켜버릴 것 같은 붉은 광망을 뿌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달랐다.
붉은 검망은 삽시간에 퍼져 나가더니 검수 세 명의 온몸에 감겨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그들의 몸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세 명의 검수들은 두 눈을 부릎 뜨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에 있던 동문들도, 그리고 수라마왕을 비롯한 마왕들도 석상이 된 듯 서 있을 뿐이었다.
어느 순간, 붉은 검망에 감싸였던 검수 세 명의 얼굴, 손에 가느다란 붉은 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옷에서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투두두둑!
곧이어 그들의 몸은 수백조각이 되어 허물어져 내렸고, 잘게 썰어진 육편조각에서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우웩!
어디선가 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가의 고수들 몇이 끔직한 장면을 보다 못해 고개를 돌리고는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있었다.
도산검림(刀山劍林)을 제집처럼 드나들 듯 하던 그들로서도 이렇게 처참한 광경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언가의 무인들을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문 세 명이 순식간에 어육으로 변해버린 충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들을 참살해버린 검법이 붉은 혈광을 발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가문의 검법과 무척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은 운중신룡 언연심과 몇몇 가문의 수장들을 힐끔거렸다. 10여년 전 가문의 수뇌부들이 오랜 기간동안 고심하여 몇 가지 무공을 창안해서
제자들에게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위력이 강한 것이 바로 검법인데, 머지않아 경지에 이르게 되면 언가가 천하로 눈을 돌리게 되리라고 자못 기대가 컸었다.
따라서 이 검법은 세가에서 가장 자질이 출중하고 기초가 잘 닦인 제자들에게 전수했는데, 지금은 팔성 이상의 성취를 보아 웬만한
검법의 명가와 대결해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한 노인의 손에 너무도 간단히 파훼되었을 뿐 아니라
상대 또한 이 검법과 비슷한 무공을 익힌 듯 하니 어찌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운중신룡 언연심과 가문의 수장들은 겉으로는 별다를 표를 내지 않았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 수라검문과의 혈전에 직접 참여했고,
또 그들의 무공을 훔쳐다 새롭게 개정하여 언가의 무공으로 재편성한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앞의 이 허름한 마의를 입은 노인이
펼친 검법이 바로 수라검문의 독문검법중 하나인 수라단심인(修羅斷心刃)임을 즉시 알아차렸다. 물론 이 노인이 수라검문의 전대기인이거나 아니면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가 짐짓 치가 떨린다는 듯 이를 갈며 말했다.
“으드득! 지독하게 잔인한 손속이로구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마검공으로 본가의 제자들을 죽이다니…….”
언연심은 ‘천인공노할 마검공’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 이 노인의 검법이 대라검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인식시키려 했던 것이다.
언가 무인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많이 누그러졌다. 천하에는 수 없이 많은 검법이 있으며, 그 중에는 비슷한 것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라마왕은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가문의 무공을 훔쳐가 그럴 듯 하게 꾸민 후, 자파의 절기라 우기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검법의 모태가 되는 수라단심인을 마검공이라 모욕하지 않는가.
그의 입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놈들! 그러고도 네놈들이 정파라 자청한단 말이냐? 네놈들이 펼친 그 검법은 바로 본문의 수라단심인(修羅斷心刃)임을 부정하겠다는 것이냐?”
순간 언가의 제자들에게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라단심인은 수십 년 전 세가의 손에 멸문한 마도 문파인 수라검문의 독문절기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라마왕은 이들의 반응을 보고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라검문의 무공을 빼내어서 언가의 절기로 둔갑시키는 행위는
몇몇 수뇌부들의 손에 은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사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자파의 절기에 대한 자부심은 물론,
협의심도 강한 정파의 혈기왕성한 젊은 기재들에게 그 무공을 전수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이 무공의 근본이
수라검문의 수라단심인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언가의 제자들은 익히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운중신룡 언연심은 내심 당황했지만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본문이라고? 네놈은 지금 수라검문을 본문이라 칭했느냐? 흥! 삼십년 전에 깨끗이 쓸어버린 줄 알았더니
마도의 잡졸 하나가 더 남아있었구나. 뭣들 하느냐? 어서 이놈들을 모조리 제압하지 않고.”
그로서는 빨리 수라마왕등을 제압하는 게 급선무였다. 일단 그들을 제압하거나 죽여 버리고 난 후에 정신
나간 마두들이 객쩍은 소리를 지껄였다고 둘러대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는 이 두서 없는 명령이 얼마나 큰 희생을 가져오게 될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언가의 무인들은 총관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수라마왕등을 향해 다가왔다. 한편, 이 모습을 본 만독혈왕이 수라마왕에게 말했다.
“어떻게 할 텐가? 모두 죽여야 하나?”
그의 말에 수라마왕은 순간 고민했다. 예전의 그였더라면 이미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겠지만,
금마동에서 수십 년 간 참오하며 무학의 깊은 경지를 엿본 다음부터는 살기가 많이 누그러졌던 것이다.
수라마왕이 머뭇거리자 혼세마왕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는 다짜고짜 언가의 무인들을 향해 적양멸천장을 날리며 말했다.
“뭘 고민해? 일단 몇 놈 쳐 죽이고 나면 함부로 달려들지 않겠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명과 함께 살이 타는 듯한 노린내가 피어났다. 선두에 있던 언가 무인 둘의 가슴이 적양멸천장에 적중되어 그대로 녹아버린 것이다.
동시에 만독혈왕의 두 손에서 지독한 비린내와 함께 진녹색의 경력이 퍼져나갔고, 비천마왕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크아악! 악!
모골이 송연한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언가의 강시권은 강맹하기로 치자면 천하에서
손꼽힐 만큼 대단한 무공이었지만 이미 탈마의 경지에 들어선 오마왕들을 막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들이 각자 일초씩 펼쳐낼 때마다 한두 명의 목숨은 꼭 사라지고 말았다.
숨 몇 번 쉴 사이에 언가의 연무장은 시신으로 뒤덮였다. 적어도 삼십 여명이 일순간에 죽어버린 것이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심후한 내공이 실린 고수의 일갈이 터져 나온 것은.
“멈추어라!”
오마왕들과 언가의 무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 소리에 맞추어 물러섰다. 오마왕들로서도 무의미한 살생을 계속 할 생각이 없었고,
언가의 무인들도 인간을 초월한 듯한 무위를 보이는 그들에게 달려들다 죽을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언가의 가주인 폭풍신권 언철심은 연무장에 드러난 참상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연무장에 깔린 단단하기 그지없는 청석이
처참하게 파여 작은 피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고, 형체를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시신들이 즐비했다.
바로 적양멸천장과 지존독황공의 가공할 위력이 만들어놓은 결과였다.
가주의 등장에 때맞추기라도 하듯, 머리가 허연 원로고수들까지 모습을 드러내었다.
총관인 운중신룡 언연심이 즉시 그들에게 상황을 이야기하자 언철심은 다소 놀란 듯한 표정으로 수라마왕을 바라보았다.
그가 쓰는 검법이 수라검문의 검법이라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백발이 성성한 원로고수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수라마왕과 가주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가주인 폭풍신권 언철심을 향한 그들의 눈빛에는 질책의 빛이 가득 들어있었지만 이내 서로를 바라보며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수라마왕의 차가운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애꿎은 아이들의 목숨은 필요가 없다. 과거 본문을 멸문시키고 무공을 빼앗느라 후손들의 목숨까지 앗아간 자들만 나서라.”
순간 연무장은 바늘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듯 침묵에 휩싸였다. 언가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가주인 폭풍신권 언철심을 향했다.
언가의 수뇌부들이 모두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는데 모두 침울한 표정이었다.
원로들 중 한 사람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휴! 가주. 이 모두가 자업자득(自業自得)이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모든 사실을 밝히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언철심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숙부. 도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본가가 밝힐 것이 무어가 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제발 입 좀 다물고 계세요.”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그의 노갈에 언가의 호법원주이자 한때 단장신권(斷腸神拳)이라는 협명을 떨쳤던 노고수는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정의를 근본으로 삼아 협의를 실천해 왔던 진주 언가의 수백년 전통이 지금 와서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호법원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탄했다.
“가주. 태상호법께서 삼년 전 세가를 떠나 돌아오지 않은 것도 결국 이 때문이 아니었소이까. 아! 이 숙부도 진작 세가를 떠났어야 했나 보오.”
폭풍신권 언철심이 인상을 확 구겼다.
“그만 좀 주절거리세요. 그리고 세가를 떠나고 싶으면 당장 떠나세요. 말리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호법원주를 비롯한 원로들을 향해 냉소를 친 후, 찬바람이 나도록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수라마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마도의 잔당 주제에 무슨 객쩍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냐? 긴 말 필요 없다. 네놈들의 질긴 목숨을 모조리 거두어
정도가 살아있음을 만 천하에 알리리라. 뭣들 하느냐? 모두 쳐라!”
가주의 명령은 곧 법, 언가의 무인들은 일제히 생사를 도외시한 채 오마왕들을 향해 다가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언철심과 측근 몇 사람을 제외한 수뇌부들까지 모두 나섰기에 그 기세가 조금 전과는 사뭇 달랐다.
폭풍신권 언철심이 원로들을 슬쩍 바라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원로들이 자신의 명에 따르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서있기만 했던 것이다.
“가문을 위해 싸우지 않으려거든 들어 가셔서들 쉬세요.”
호법원주가 다시 나서서 설득하듯 말했다.
“가주, 불가하오. 본가는 지금까지 불의(不義)한 주먹을 사용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소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이다.
진상을 모두 밝힌 후 용서를 구할 것은 구하고, 힘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정당한 비무를 통하면 될 것이외다.
자고로 잘못을 저지른 후에도 이를 반성하고 올바르게 고치기만 한다면 그건 죄가 아니라는 말도 있소이다. 그러니 가주께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언철심이 또다시 소리쳤다.
“닥치시오! 그따위 망발이나 할 요량이거든 썩 물러들 가시오!”
아무리 가주라고는 하나 명색이 숙부인 자신에게 이처럼 막돼먹은 말을 퍼붓는 언철심에게 호법원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터져 나오는 비명이 언가를 울린 것은.
크악! 크아악!
연무장을 향해 시선을 돌린 폭풍신권 언철심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뜨였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장력을 용암처럼 쏟아내는 혼세마왕, 일장 내에 다가서기만 해도 픽픽 쓰러져버리는 지독한 독장을 퍼붓는 만독혈왕,
그리고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로 신형을 옮기며 언가의 고수들을 폭풍처럼 몰아치는 비천마왕.
이들 모두 평생 한번 만날까 말까 할 정도의 고수였지만 그가 가장 놀란 것은 바로 수라마왕의 검에서 솟구친 석자 길이의 붉은 검강이었다.
“저, 저건…….”
자신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건 분명 수라혈검법에서 발휘되는 검강이 분명했다. 그
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토록 몸서리쳐지는 지독한 살기를 뿜어낼 수 있겠는가.
“그, 그때와 또…, 똑같아…….”
그는 과거 수라검문과 일대 혈전을 벌이다가 당시 수라검문주를 포위 속에 몰아넣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그의 검에서도
저러한 붉은 검강이 솟구쳐 있었다. 물론 지금의 것과 비교한다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 붉은 혈광을 동반한 지독한
살기는 당시의 그 검법과 동일함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언철심은 주변에 있던 여덟 명의 검수들에게 모두 피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어어’하는 사이에 붉은 검강이 가느다란 실처럼 풀려나오며 사방을 휩쓸었다.
피를 토할 듯한 언철심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도 그때였다.
“머, 멈춰!”
번쩍! 슈아아악!
비명도 없었다. 붉은 검사(劍絲)가 한바탕 휘몰아치고 난 뒤,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언가에서 십여 년 넘게 공들여
키워온 승천검대(昇天劍隊) 소속 열 한명 검수 전원이 수라마왕의 손에 검하고혼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짙은 혈향과 함께 죽음의 기운이 연무장 전체를 감도는 듯했다.
“모두 물러서라!”
가주의 명에 따라 언가의 고수들은 일제히 물러섰고, 연무장에는 또다시 스무 구의 시신이 더 쌓였다.
언가 고수들은 두려움 반, 분노 반이 섞인 눈빛으로 수라마왕등을 바라보았다. 숨결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마왕들은
그들의 눈에 괴물로 비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라마왕이 언철심을 노려보며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놈을 더 죽여줄까? 이미 멸문한 수라검문처럼 개, 돼지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몰살시켜야 네놈이 나서겠느냐?”
언철심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원로고수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들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인간 같지 않은 이 괴물들을 상대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원로들도 사태를 더 이상 좌시할 수만은 없음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칫 세가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원로고수들이 침묵을 깨고 나서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폭풍신권 언철심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원로고수들을 이끌고 수라마왕의 앞으로 다가왔다.
진주 언가의 진정한 힘과, 네 명의 마왕들간의 생사를 가르는 혈전이 막 벌어지려는 참이었다.
제 목: 금강무적 7권 7. 맹룡과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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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룡과강(猛龍跨江)
맹룡과강(猛龍跨江)이라는 말이 있다. 맹룡이 아니면 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맹룡이 네 마리씩이나 나타났다면
산서제일세력이라는 진주언가로서도 멸문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용을 잡느라 힘을 다 빼버리고 난 후에는, 뱀에게 물려죽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진주 언가의 호법원주이자 가문에서 세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공을 지닌 단장신권 언중호의 백염이 부르르 떨렸다.
산서성 제일이라는 자신의 가문에 단 네명의 인원만으로 찾아와 한 편의 지옥도를 만들어놓았을 때 짐작하기는 했지만,
막상 본격적인 싸움을 앞둔 상황에서 끌어올린 그들의 기세는 정말 대단했다. 아마도 조금 전 그들이 가문의 제자들을
상대할 때에는 힘의 반도 채 쓰지 않았던 게 분명하리라.
‘가히 천외천의 인물들이로다. 과거에 보았던 무림맹주와 견주어도 조금도 못하지 않구나. 어디서 이런 인물들이 네 명씩이나 나타났단 말인가…?’
그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대문파의 수장이 되어도 모자랄 사람들이 네 명씩이나 무리를 이루어
다닌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가 곁에 있는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는데 얼굴 전체에 주름이 가득하여
도무지 눈이나 제대로 뜨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의 노안(老顔)이었다.
호법원주인 단장신권 언중호가 무척 공경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저들의 무공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오늘 이 싸움의 결과가 어찌되었던 본가는 앞으로 수십 년간 강호에 나서기가 어려울 듯 합니다.”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가주 언철심에게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는 잠시 이쪽으로 오시게.”
막 수라마왕등을 향해 달려들려던 폭풍신권 언철심은 눈앞에 적을 둔 상황에서 머뭇거리는 원로고수들에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이 주름이 가득한 노인에게만은 호법원주인 단장신권 언중호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가 즉시 다가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큰 숙부님.”
주름이 가득한 노안의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내 보아하니 오늘의 일전은 피하기 어렵게 되었소, 가주. 하지만 상대가 너무도 막강하니 이들을 물리치자면 본가로서도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외다.”
그의 말에 가주 언철심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 명의 마두들이 비록 대단하다고 할지라도 세가의 고수들이 모두 모였는데 어찌
그들을 제압하지 못할까하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데 한때 강북제일권이라 불리었을 만큼 대단한 무공을 지닌 세가의 최고 고수인
권치 언중강이 싸우기도 전에 꼬리부터 말 생각을 하니 어찌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상대는 고작 넷이다. 신이 아닌 이상 어찌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권치 언중강이 다시 말했다.
“가주. 오늘의 이 대국을 주제함에 있어 결코 감정이 앞서서는 아니 될 것이오.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우리 원로들만 나서서 저들과 싸워 생사를 결하는 것이. 어차피 수라검문에 관련된 일은 과거에 이 숙부들이 주관하지 않았소.”
“하지만 어찌 숙부님들께서 그 일을 모두 책임지시겠다고…….”
언철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권치 언중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말할 필요 없소, 가주. 오늘 일은 이 숙부들에게 맡기도록 하시게.”
말을 마친 그는 곁에 있던 일곱 명의 원로고수들을 둘러보았다. 원로고수들은 언중강과 눈이 마주치자 모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폭풍신권 언철심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수뇌부들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권치 언중강이 원로고수들을 이끌고 수라마왕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주위에 널린 시신들을 쭉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수라검문의 고인이신 듯 한데, 그 마음은 이해가 가나 아이들에게 손을 너무 심하게 쓰신 것 같소.”
수라마왕이 으스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대뜸 튀어나온 하대에 언중강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노부는 언중강이라 하오. 헌데 그쪽은…?”
수라마왕은 대답대신 냉소를 쳤다.
“흥! 분뢰수(奮雷手)라 불렸던 아이로구나.”
순간 언중강은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놀랐다. 분뢰수라면 자신이 약관을 막 벗어났을 무렵 불렸던 명호가 아닌가.
그렇다면 상대는 자신보다 한 배분이 더 높은 인물이 되는 것이다.
당시 언중강은 산서 무림의 청년고수들 중에서는 최고로 꼽히고 있었기에 수라검문주였던 수라마왕이 그의 이름을 듣고는 즉시 알아보았던 것이다.
‘나, 나보다 한 세대 전이라면…….’
권치 언중강은 수라검문의 전대고수들 중, 살아남은 이들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과거 자신들의 손으로 그들을 하나하나씩 친히 죽이지 않았던가.
‘지금 저 정도의 무위를 갖추었다면 그때도 대단한 고수였음이 분명하리라. 하지만 수라검문의 고수급 인물들은 모두 죽지 않았던가…….’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돌연 뭔가 생각나기라도 한 듯 두 눈을 번쩍 떴다. 신음성처럼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서, 설마 지옥마검(地獄魔劍)…?”
지옥마검 사인후. 이것이 바로 수라마왕이 강호에서 활동할 당시의 명호였다. 수라마왕이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아직까지 노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그래. 본좌가 바로 지옥마검이다.”
가주 언철심을 비롯한 언가의 무인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수라마왕이 바로 과거 수라검문의 문주로 있다가
마성이 발작해 문파를 뛰쳐나갔다는 그 인물임을 알고 경악했다.
당시 지옥마검 사인후는 산서성 제일고수로 알려졌고, 따라서 그가 온전히 문주직을 수행하고 있었더라면 언가가 수라검문을 칠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수라검문의 멸문은 지옥마검 사인후의 갑작스러운 실종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수라마왕 자신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깊은 자책감 때문에 오늘의 일이 점차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지도 몰랐다.
권치 언중강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료. 당신이 그였다니…….”
수라마왕이 분노를 담은 눈길로 가주 언철심과 수뇌부들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노부의 손속이 잔인하다고 탓하지 말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검에서 붉은 검광이 솟구쳤다. 세 자에 육박하는 길이의 검강이었다.
이 모습을 본 언가의 무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붉게 타오르는 검강만 보아도 도무지 덤빌 엄두가 나지 않는데,
그만한 고수들이 셋이나 더 있으니 어찌 두렵지 않으랴.
권치 언중강이 급히 나섰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수라마왕의 검에서 솟구쳤던 검강이 눈에 띠게 줄었다.
“아직까지 할 말이 남았느냐?”
“그렇소. 당시 본가는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수라검문과의 싸움에서 정당하게 이겼소이다. 물론 이에 대한 복수를 원하는 귀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때 본가의 수뇌부들은 모두 우리 노물들이외다. 그러니 이 싸움은 귀하와 우리들만의 것으로 한정하는 것이 어떻겠소? 애꿎은 아이들의 목숨까지 뺏을 필요는 없지 않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라마왕이 노갈을 터뜨렸다.
“닥쳐라! 네놈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 본문의 무공을 훔쳐가기 위해 후손들을 모두 죽였다는 사실을 내 모를 줄 알았더냐?”
수라마왕의 말에 언중강등 원로들은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비록 자신들은 반대하였다고는 하나 가주가 직권을 이용해 저지른 일에 대해
언가의 원로들로서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그때, 놀랍게도 언중강이 머리를 숙였다.
“용서하시오. 그 모두가 우리 원로들이 부덕한 소치외다.”
순간 물러나 있던 언가의 무인들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주를 바라보았고, 언철심은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언중강을 향해 소리쳤다.
“숙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권치 언중강이 가주를 향해 소리쳤다.
“닥쳐라!”
“수, 숙부…….”
가주 언철심은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세가의 가장 큰 어른이라고는 하나 가문의 수장인 자신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던 것이다.
언가의 제자들 모두 굳은 표정으로 가주와 권치 언중강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강적을 앞에 두고 힘을 합쳐도 이길까 말까한
상황에서 내분까지 일어난다면 어찌 되겠는가.
권치 언중강이 또다시 소리쳤다.
“가주는 작금이 이 사태가 누구 때문에 야기되었는지 모른단 말인가? 내 직접 조목조목 이야기 해 주어야 알아듣겠는가?”
가주 언철심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이러다가 가주자리를 지키는 건 고사하고 잘못하면 가문의 반도로 낙인찍혀
도망자로 살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자 의혹에 가득 찬 가솔들의 눈길이 모두 자신에게 솔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안색이 살짝 찌푸려지며
두 눈에 악독한 빛이 순간적으로 흘렀다.
가주 언철심이 즉시 원로고수들에게 다가갔다. 언가의 무인들이 일순 긴장했고, 원로고수들도 안색을 굳혔다.
그리고 수라마왕등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언철심은 의외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숙부님. 잘못했습니다. 본가의 힘을 더욱 강하게 키우겠다는 욕심이 앞서…….”
언가의 제자들은 언철심의 말을 듣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가 수라검문의 무공을 훔치기 위해
그 후손들을 모조리 도륙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원로고수들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가 이처럼 순순히 고개를 숙이자 다소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수라마왕조차 다소 이채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철심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의 이 일만 해결된다면 그동안 제가 잘못했던 부분을 모두 밝힘은 물론, 가주직도 승계토록 하겠습니다.”
원로고수들은 한동안 언철심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침울한 그의 표정을 보니 거짓은 아닌 듯 느껴졌다.
권치 언중강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주. 그 마음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오. 하지만 과정이 잘못되었다면 결과가 아무리 좋더라도 그건 마도에 지나지 않소이다.
이제라도 가주께서 잘못을 알고 이를 뉘우치게 되었으니, 이 숙부는 기쁘기 그지없소이다.”
말을 마친 언중강이 이번에는 그를 이끌고 수라마왕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수라마왕이 손만 한번 휘두르면 권치 언중강과 가주 언철심의 목숨을 단번에 취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언중강은 마치 수라마왕이 가만히 있을 것이란 걸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전혀 거리낌 없이 말했다.
“가주. 여기 사선배에게 사과를 하도록 하시오. 잘못한 점에 대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사과부터 하는 게 옳소.”
그의 말에 따라 언철심이 즉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사선배. 제가 잘못했소. 용서해 주시오.”
이 모습을 본 언가의 제자들 모두 경악했다. 가주가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세가 전체가 그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차라리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모습을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가주! 안됩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가주!”
몇몇 제자들이 분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그때 권치 언중강이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 치욕스러우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일이라면 용서를 빌어야…….”
언중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안색을 회복한 후 수라마왕에게 말했다.
“사선배. 본가의 가주께서 친히 무릎을 꿇었소이다. 비록 선배의 후손들의 억울한 죽음에 비한다면 사소한 것이기는 하나
본가 전체가 선배에게 이렇게 용서를 빌고 있지 않소이까. 부디 사선배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바라오.”
권치 언중강은 말을 마치자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수라마왕은 두 눈을 감고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과거의 그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지금 그의 마음속에서는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후손들을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지만 얼굴도 보지 못한 이들도 많았으리라.
그들 중에는 아들과 딸, 그리고 친 자식처럼 기른 제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에 10년만 더 그들을 가르쳤더라면
언가가 감히 수라검문을 넘볼 생각은 하지 못했으리라.
아니 마성에 빠질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수라혈검의 진정한 오의가 집약된 후삼초를 그들에게 전해주었다면 최소한 남의
손에 맞아 죽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자신처럼, 언젠가 마성에 빠져 사랑하는 사람들을 세상에서 가
장 잔혹한 방법으로 베어버리고 싶은 강렬한 욕망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문파를 뛰쳐나가버리겠지만 말이다.
수라마왕은 과거에 알았던 모든 얼굴들이 순간적으로 눈앞에 스쳐 지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운 얼굴들이었지만 이제는 모두 부질없었다.
이미 땅 속에 묻혀 백골조차 남아있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는 한가지 중요한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언가의 무인들 모두를 죽이더라도 그들을 되살리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휴!”
긴 한숨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수라마왕은 자신 앞에 허리를 숙이고 있는 언가의 가주와 노영웅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들이 부러웠다. 최소한 그들에게는
지킬 것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가문의 식솔, 가족, 그리고 명예. 수라마왕에게는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들을 그들은 모두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때, 그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선배. 우리들의 사과를 받아들이시겠소?”
수라마왕이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사과는 받아들이마. 하지만 복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구나. 지하에 잠든 문도들의 흐느낌을 그대들의 피로 달래주어야겠다.”
그의 말에 권치 언중강의 안색이 다소 밝아졌다. 이후의 싸움이 어떻게 전개되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를지는 모르지만 피해
당사자가 사과를 받아들였으니 이제 마음의 거리낌은 깨끗이 사라졌던 것이다. 이는 언중강에게 있어 명예와 관련된 부분이기에 생사보다 더욱 중요했다.
권치 언중강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우리가 잘못했던 일은 사과를 했고, 이를 사선배께서 받아들이셨으니 이제는 싸우는 일만 남았구료.”
그가 수라마왕에게 포권을 한 후, 동료들에게 돌아가려는 순간 갑자기 가주 언철심의 주먹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수라마왕의 명치를 향해 뻗어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두 사람의 등에 가려져 있었기에 언가의 무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볼 수가 없었다.
중단전에 일격을 맞은 수라마왕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고, 언철심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언가의 무인들이 보기에는 갑자기 수
라마왕이 검을 휘둘러 가주를 상하게 한 것처럼 보였다.
권치 언중강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언철심을 바라보았다.
“가주!”
그때 삼장을 격하고 순식간에 달려온 비천마왕이 수라마왕을 안아들었고, 거의 동시에 혼세마왕의 적양멸천장이 밀어닥쳤다.
용암처럼 뜨거운 경력이 두 사람을 집어삼킬 듯 몰려왔지만 권치 언중강은 언가 제일의 고수답게 즉시 내공을 끌어올려 두 주먹에 경력을 끌어 모았다.
구릿빛으로 변한 그의 두 주먹이 적양멸천장을 향해 부딪쳐가려는 순간, 언철심이 외쳤다.
“숙부. 조심하세요!”
그가 마치 언중강을 구하기라도 하려는 듯 등을 슬쩍 미는 것이었다. 언가의 무인들의 눈에는 가주가 목숨을 걸고 숙부를 구하는 듯 보였지만
그의 손에 막강한 경력이 실려 있었고, 그 힘에 언중강의 척추가 가루가 되어버린 것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언중강의 동작이 그대로 얼어붙은 듯 멈추었고, 곧이어 적양멸천장이 그의 가슴에 작열했다.
푸악!
뜨거운 기운과 함께 언중강의 가슴이 반이나 녹아버렸다.
“숙부님!”
언중강 뒤에 교묘히 숨어들며 적양멸천장을 피한 언철심이 목이 터져라 외치며 그를 안고는 뒤로 신형을 날렸다.
원로고수들이 즉시 나서서 권경을 발출해 언철심의 앞으로 가로막았지만 더 이상 날아온 장력은 없었다. 혼세마왕도 수라마왕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그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수라마왕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는데 얼굴이 붉게 상기되더니 갑자기 검붉은 피를 맹렬히 토하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혼세마왕등은 의외로 안도하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수라마왕이 토해낸 피의 색으로 보아 내상으로 생긴
어혈을 토해낸 것이라 회복되는 조짐이었던 것이다.
“휴!”
가벼운 한숨과 함께 탁한 기운을 뽑아낸 수라마왕이 눈을 떴다. 동시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언철심 이놈!”
혼세마왕등도 두 눈 가득 분노를 담고 언가의 무인들을 노려보았다.
한편, 언가의 원로고수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언철심의 수법이 워낙 교묘한 탓도 있었지만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던 언중강의 처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언철심이 언중강을 부둥켜안으며 울부짖었다.
“숙부님! 크흑!”
그야말로 부모형제가 죽었어도 더 슬퍼할 수 없을 정도라 언가의 모든 가솔들은 깊은 슬픔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원로들과 수뇌부들이 가장 먼저 분노를 떨쳐냈다.
그들은 무서운 기세로 수라마왕등을 향해 달려들었는데, 수십년간 갈고닦은 내공을 모두 발휘하자 마치 산과 바다를 뒤엎을 듯 대단한 기세를 뿜어내었다.
“와!”
“쳐라!”
동시에 언가의 제자들 백여 명이 한꺼번에 함성을 지르며 수라마왕등에게 달려들었는데, 이들 모두 어린시절부터 기초를 철저히 다지고
명가의 무공을 깊이 있게 수련해왔기에 일류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일류고수 일백여명, 절정고수 십여명,
그리고 무공의 깊이를 재기 어려울 정도의 원로고수들 여섯 명까지 합세하니 수라마왕등은 거센 풍랑에 떠다니는 일엽편주(一葉片舟)와도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산서성 제일의 세가라는 진주 언가 전체의 전력이 동시에 달려들고 있음에도 수라마왕등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수라마왕의 검에서 붉은 검강이 다시 솟구쳤고, 혼세마왕의 두 손에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온몸으로 번져나가
화인(火人)이 되기까지는 촌각도 걸리지 않았다.
비천마왕의 신형이 수십 개의 잔영을 남긴 채 허공으로 흩어졌고, 진녹색의 독장이 만독혈왕의 두 손 주위에서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언가의 무인들과 가장 먼저 충돌한 사람은 비천마왕이었다. 그는 몸을 바람개비처럼 회전시키며 정면으로 다가드는 언가의 무인들을 쓸어 찼다.
강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풍각(旋風脚)이라는 수법이었지만 비천마왕이 펼치자 그 위력이 대단했다.
순식간에 서너명의 무인들이 그에게 얻어맞아 널브러졌는데, 누군가 각영(脚影)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이를 피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두 팔을 교묘히 뻗어 반격을 가하기까지 했는데 그 경력이 워낙 강력해 비천마왕으로서도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즉시 신형을 멈추어야 했다.
비천마왕이 그를 살펴보니 안색이 대추처럼 붉고, 매부리코를 가진 위맹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바로 언가의 원로들 중 한명으로
대마권(大魔拳)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고수다. 그는 적어도 내공에서 만큼은 언가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로,
따라서 정면으로 장을 교환한다면 강호백대고수 안에 들어간다고 할 정도다.
비천마왕은 그가 정면으로 달려들며 우권을 뻗어내는 것을 보았다. 조금의 변화도 가미되지 않은, 정직한 일권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실려 있는 경력은 마치 도도히 흐르는 대하(大河)의 물줄기만큼 웅장했다.
‘대단하구나!’
금마동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어 초절정의 반열에 올라선 비천마왕조차 감탄할만한 내공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신법에 의지해 일단 피하고 볼 일이었으나 내공에 있어서도 큰 성취가 있었기에 이제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천마왕이 가볍게 냉소를 친 후, 권경을 향해 정면으로 장력을 쳐냈다.
순간 둔탁한 격타음이 한차례 울렸고, 두 사람 모두 움찔 한 걸음씩 물러서며 백중지세를 이루었다. 그때였다.
비천마왕이 자세를 다시 가다듬기도 전에 산을 허물고 바다를 메워버릴 것 같은 경력이 또다시 밀어닥친 것은.
비천마왕이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장을 쳐내 이를 막아내었지만 두 걸음 더 뒤로 밀려나 버렸다.
전력을 다한 강시권을 두 번 연속으로 쳐 낸 대마권 언중현은 곧바로 좌수로 우수의 손목을 잡은 채 크게 한번 원호를 그렸다.
이 모습을 본 비천마왕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서, 설마 세 번 연속으로…?”
그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대춧빛을 띤 대마권 언중현의 얼굴이 피처럼 붉게 상기되는 순간 원호를 그린 우권이 힘차게 앞으로 뻗어 나왔다.
우웅!
마치 공간이 짜부라드는 듯한 압박감이 비천마왕을 향해 몰려갔다. 비천마왕은 기겁을 하고 옆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러자 권경은 간발의 차이로 비천마왕을 스쳐지나간 후, 삼장 뒤쪽 연무장 바닥에 굉음과 함께 웅덩이를 만들었다.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강맹한 경력이었다.
비천마왕은 그의 권경이 스치며 지나간 왼팔의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기공으로 보호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느껴지니 만약 제대로 맞았다면 완전히 뭉개지고 말았으리라.
그의 얼굴에 감탄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경지에 이른 현문정종내공의 위력은 제 아무리 대단한 마공을 익혀도 따라가기 힘들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때마침 언가의 제자 둘을 한꺼번에 구워버린 혼세마왕이 여유롭게 혀까지 차며 말했다.
“쯧쯧, 무슨 곰 두 마리가 싸우는 것 같군, 그래. 그래가지고서야 힘센 놈이 이기는 게 당연하…, 헉!”
혼세마왕이 갑자기 말을 하다말고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언가의 원로고수 한 명과 수뇌급 고수 셋이 한꺼번에 달려들며 주먹을 날렸기 때문이다. 그가 다급히 장을 휘둘러 막아내는 것을
본 비천마왕이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도 한가하게 혼세마왕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자신에게 무지막지한 권경을
날리 언가의 노고수가 또다시 주먹을 뻗어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비천마왕은 이번에는 정면으로 그 권경을 막지 않았다. 그는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경력의 미세한 단락 사이를 파고
들었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정확하고 절묘했는지 상대의 권경을 타고 흐른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였다.
권을 쳐낸 대마권 언중현은 점차 확대되어오는 비천마왕의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언가의
고수들 역시 손 쓸 사이가 없었다. 뭔가 거뭇한 그림자기 스치는 듯 하더니 비천마왕의 우측 발끝이 언중현의 좌측 관자놀이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빠직!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언중현의 얼굴이 기괴하게 짜부라졌다. 동시에 그의 칠공에서 붉은 피가 분출했고, 언중현은 그대로 쓰러져 죽어버렸다.
“숙부님!”
“형님!”
여기저기서 피를 토하듯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수많은 분노의 주먹이 비천마왕을 향해 뻗어나갔다. 하지만 비천마왕은
다시 그림자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곧이어 그림자가 된 비천마왕이 스쳐 지나가는 곳곳에서 격타음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언가의 고수들은 필사적으로 그를 따라잡으려
했지만 항상 간발의 차이로 놓치기만 할 뿐이었다. 비천마왕은 마치 사신이라도 된 듯, 죽음을 몰고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한편 혼세마왕은 원로고수 한 명과 몇몇의 수뇌부들에게 둘러싸여 협공을 받고 있었는데, 그가 전력을 다하지 않아서인지
인명의 손실이 거의 없이 비슷한 형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가의 고수급 인물들이 가장 많이 달라붙은 사람은 바로 만독혈왕이었다. 원로고수 네 명과 일곱 명의 장년인들이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채 그를 포위하고 있었는데, 기세들이 대단하여 모두 언가에서 내로라하는 고수급 인물들이 분명했다.
만독혈왕은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 그의 주위에는 핏물이 질펀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멋모르고 그에게 달려들던
언가의 무인들이 중독되어 떼죽음을 당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에 크게 당황한 언가의 고수급 인물들이 급히 달려들어
내공으로 무형의 장막을 쳐 독기운이 더 이상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언가 내에서 가장 치열하고, 혈향이 물씬 풍기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바로 수라마왕과 가주 언철심이 이끄는
언가의 고수들이 맞닥뜨린 곳이었다.
수라마왕은 무시무시한 적색의 검강을 뿌리며 무차별적으로 사방을 휩쓸고 있었는데, 수십 명의 언가고수들이 인해전술로 이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언철심은 몇 명의 수뇌부들에게 둘러싸여 철저하게 호위를 받으며 제자들을 독려했는데, 아마도 수라마왕이 지칠 때를 기다리는 듯 했다.
그로부터 약 일각의 시간이 흘렀고, 근 이십여 명의 언가 고수들이 도륙당하고 난 뒤 언철심과 수뇌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라마왕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강이 눈에 띠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해 언철심의 암습으로 입은 내상이 다시 도졌음을 알 수 있었다.
언철심이 눈짓을 하자 그의 곁에 있던 장년인 한 명이 소리쳤다.
“모두들 물러서라.”
그의 명에 따라 살아남은 스무명 가량의 제자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뒤로 물러섰다. 그들 모두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곳곳에 상처를 입어 피를 줄줄 흘러내렸지만 새파랗게 빛나는 두 눈만은 여전히 싸우고 있는 듯 했다.
수라마왕은 검을 아래로 내려뜨린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그의 신형이 좌우로 조금씩 흔들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수라마왕을 지켜보던 가주 언철심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후후, 내가 속을 줄 아느냐? 예전에 수라검문주를 처치할 때도 지금의 상황과 비슷했지. 그때는 겁도 없이 달려들다가
죽을 뻔 했지만 이제는 속지 않는다.’
폭풍신권 언철심이 수뇌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수뇌급 고수들 다섯 명이 일제히 나섰다. 그들은 즉시 수라마왕을 포위하고는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수라마왕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군가가 언철심을 슬쩍 쳐다보았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곧이어 언철심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도 알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장 주먹을 뻗어냈다.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나머지 네 명의 고수들도 일제히 권을 쳐냈는데,
모두들 고수급 인물들이라 경력이 강하기 그지없었다.
폭풍신권 언철심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이 언가의 고수들에게 훨씬 유리해 보였지만, 그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그때였다. 열 개의 주먹이 모두 수라마왕의 지척에 이르는 순간, 수라마왕의 두 눈이 번쩍 뜨이고 그의 검에서 눈이 멀 것 같은 붉은 섬광이 폭발한 것은.
“저것이다!”
폭풍신권 언철심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수십 년 전, 언가의 후기지수들로 구성된 언가18위의 한 사람으로서
수라검문과의 싸움에 출전하여, 당시 수라검문주였던 사무정을 포위한 후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달려들었을 때 보았던 그 혈광이었다.
잠시 후, 혈광이 걷히고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는데, 놀랍게도 언가의 수뇌부들 다섯 명 모두가 피바다에 누워 있었다.
아마도 절정고수 다섯을 일검에 베어버렸다고 한다면 강호의 그 누구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수라마왕이 크게 한번 휘청거리더니 한쪽 무릎을 꿇음과 동시에 검을 땅에 박아 넣었다. 그는 간신히 검에 지탱해 쓰러지지 않았을 뿐
이미 탈진한 듯 보였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막대한 내공이 소모되는 수라혈검의 후삼초를 연이어 펼쳤으니 어찌 무사할 수 있겠는가.
언철심이 손짓을 하자 수많은 언가의 제자들이 다시 수라마왕을 포위했는데, 조금 전 그 무서운 수라혈검법의 위력을 보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죽은 제자들이 가장 많았기에, 언가의 무인들은 수라마왕을 향해 내심 이를 갈고 있었던 것이다.
“쳐라!”
언철심의 명에 따라 십여 명의 언가 무인들이 수라마왕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며 권을 뻗어냈다. 하지만 혼세마왕등이 이 모습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연무장 전체를 휩쓸며 다니던 비천마왕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리기라도 하듯 수라마왕의 곁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는 언가의 무인 한 명을 허리에 끼고 있었는데, 혈도가 제압당한 듯 두 팔과 다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비천마왕은 그를 대충 바닥에 내팽개친 후 다시 신형을 날렸다.
파바바밧!
크윽! 큭!
연이언 격타음과 비명이 울려퍼졌고, 수라마왕을 향해 달려들던 언가의 무인들 모두 부상을 입은 채 물러났다.
동시에 혼세마왕과 만독혈왕이 있던 연무장 한쪽에서 굉음과 함께 대여섯명의 언가 무인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혼
세마왕과 만독혈왕이 전력으로 무공을 펼치며 포위망을 빠져나왔던 것이다. 두 사람은 즉시 수라마왕에게 달려왔는데,
그 기세가 워낙 대단해 언가의 무인들은 분분히 물러서며 길을 열어주고야 말았다.
가주 언철심이 안색을 찌푸리며 원로고수들을 둘러보았다. 원로고수들은 언중강을 포함해 두 명이 죽어 다섯 명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들의 옷은 여기저기 찢겨 있었고, 안색이 창백해 격전을 치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쓸모없는 노친네들……. 고작 두 놈도 막지 못해 길을 열어주다니…….’
그로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수라마왕만은 꼭 처치하고 싶었다. 수라검문의 당사자인 그만 죽여버린다면 사태가 진정된 후,
그의 말이 모두 날조된 거짓이라고 우긴다면 누가 감이 자신의 말에 토를 달겠는가. 원로들 중 가장 고령자이며,
언가 내에서도 깊은 존경을 받고 있는 권치 언중강을 죽인 것도 대국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한 그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수뇌부들 반 이상의 희생으로 수라마왕의 기력을 빼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의 숨통을 끊어버리려는 순간
그의 동료들이 포위를 뚫고 순식간에 모여들 줄 어찌 알았으랴.
만독혈왕이 두 손을 뻗어 손바닥을 수라마왕의 등에 붙였다.
심후한 그의 내력이 경맥 속으로 들어가 내상을 돌보자 창백했던 수라마왕의 안색이 다시 돌아왔다. 수라마왕은 검붉은 피를 한 차례
울컥 토한 후 두 눈을 번쩍 떴다.
“괜찮은가?”
만독혈왕의 물음에 수라마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언철심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았다. 수라마왕은 급히
내공을 끌어 모았다. 그러자 가슴에서 은은한 통증이 느껴졌고, 모여들던 진기가 일순 흩어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진기를 끌어 모았다. 하지만 단전에 모여든 진력은 평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가지고는 내공의 소모가 극심한 수라혈검법을 제대로 펼치기 어려웠다.
만독혈왕이 수라마왕의 어깨를 짚은 후 살짝 토닥였다. 수라마왕이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을 그가 눈치 챘던 것이다.
비천마왕이 가주 언철심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대신 저놈을 죽여 버릴까?”
수라마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손으로 간악한 언철심을 직접 베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비천마왕이 잡아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내가 언철심을 향해 말했다.
“가주, 살려주시오.”
순간 언철심은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았을 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이를 한 차례 으드득 갈아붙인 후, 비천마왕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살려주시오.”
비천마왕이 마치 벌레 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힐긋 바라보았다.
“닥치고 있지 않으면 네놈부터 먼저 지옥구경을 시켜주마.”
비천마왕이 그에게 눈을 부라린 후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수라검문의 후예들이 모두 죽은 건 아니오.”
순간 수라마왕이 두 눈을 부릅떴다. 수라마왕이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며 소리치듯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본문의 후예가 살아남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나를 살려주시오.”
그의 입에서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수라마왕이 비천마왕을 바라보았다.
“이놈은 도대체 뭔가?”
비천마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싸우는게 하도 비열해보여서 상판이라도 보려고 잡아왔네. 조금 전, 내가 놈에게 다가가니 동료들 뒤로 교묘히 숨어버리더군.
그러다가 세 번이나 암습을 해왔는데 그 수법이 워낙 악독해서 산 채로 잡아왔지.”
사실 그는 바로 수라검문의 마지막 후예인 사강룡이 광서생을 태현에 살고 있을 당시 그를 감시하던 언호심이라는 자였다.
그는 원래 천생이 비열하여 온갖 악독한 짓을 저지르며 다니다가 언가로부터 파문을 당한 적도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언철심이 가주가 된 후, 그를 중용하여 수라검문의 후예인 사강룡을 감시하도록 하는 일을 맡겼는데,
사강룡이 마대위에게 구함을 받아 떠난 후, 언가에 돌아와 가주 밑에서 일을 보던 중이었다.
그러니 언가에서도 극비로 취급되던 수라검문에 관한 일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는데, 생명의 위험에 처하자 이를 순순히 실토하고 목숨을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수라마왕이 다시 물었다.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본문의 후예가 살아있다는 게 정말이냐?”
언호심이 언철심을 힐긋 바라보더니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태현에서 수라검문의 마지막 후예를 감시하는 일을 맡았었소.”
순간 수라마왕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미 대가 끊어져버린 줄 알았는데 실은 후손이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그때 언철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목숨을 구하기 위해 무슨 객쩍은 소리를 지어내는 것이냐? 본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더냐?”
그러나 언호심은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수라마왕에게 더욱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수라검문의 전대가주인 사무정의 자식이온데 가주께서 수라검문의 비전을 얻고자 유일하게 살려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왠 파락호 같은 자가 나타나 그를 데려 갔습니다.”
수라마왕은 그가 파락호 같은 자가 데려갔다는 그의 말을 듣자 즉시 알아차렸다. 마대위가 나타나 그를 구해갔음을.
수라마왕의 온몸이 격동으로 부르르 떨렸다. 마치 세상천지에 홀로 남아 있다가 아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생긴 듯 했다. 그에게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의 행방은 어찌되었느냐?”
언호심이 순순히 대답했다.
“하남성 방향으로 갔는데 본가에서 고수를 보내 추적했지만 놈의 무공이 갑자기 높아져 모두 따돌렸소이다. 그 후로는 소식을 알 수 없소.”
많은 걸 알수는 없었지만 수라마왕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세상천지에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 만나지 못한들 어떠하리. 자신의 핏줄이 살아남아 대를 이어가리라는 생각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듯 했으니 말이다.
그는 오늘 진주언가와 사생결단을 내어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후손이 살아있다는 말을 들으니 생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
남은 여생동안 그를 찾고,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수라마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마. 그때는 목을 빼놓고 기다리도록 하라.”
수라마왕의 엄포에 언가의 무인들 모두 이를 갈았다. 가문이 망하는 한이 있어도 순순히 보내줄 의사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로고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호법원주인 단장신권 언중호가 가주 언철심을 대신해 나섰다.
“이대로 떠나겠다면 붙들지는 않겠소.”
순간 가주 언철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숙부. 그 무슨 망발이십니까? 본가의 가주는 숙부가 아니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언중호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닥치시오!”
순간 주위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정적에 휩싸였다.
언중호가 깊이 심호흡을 한 차례 하더니 언철심에게 조용히 말했다.
“오늘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오. 만약 더 싸웠다가는 본가도 수라검문처럼 멸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외다.”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미 세가의 전력 반이 나자빠진 상황에서 더 싸웠다가 전력을 더 잃게 된다면, 언가는 백년 이내 다시 성세를 찾지 못할 것이다.
원로들 모두 그와 같은 의견이었는지 동조하는 분위기였고, 이미 위신이 땅에 떨어진 가주 언철심의 눈치를 보는 제자는 거의 없었다.
가주 언철심은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언중호의 말을 수긍이라도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오늘이 이대로 끝내도록 하지요. 하지만!”
그가 수라마왕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네놈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여 오늘 죽은 본가의 식솔들의 원한을 갚아주마.”
그의 말에 수라마왕이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노부가 할 말을 네놈이 대신 하는구나. 머지 않아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게다.”
수라마왕은 말을 마친 즉시 신형을 날려 언가를 빠져나가 버렸는데, 혼세마왕등이 두 눈을 부릅뜬 채 그의 배후를 지키고 있어
언가의 무인들 그 누구도 덤벼들지 못했다.
곧이어 혼세마왕등도 모두 신형을 날려 사라져버렸고, 진주 언가는 시산혈해의 끔찍한 참상만이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제 목: 금강무적 7권 8. 기사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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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회생(起死回生)
진주 언가를 쑥대밭으로 만든 수라마왕등은 세가의 세력을 벗어나 한걸음에 태현까지 달려갔다. 혈영마왕 홀로 지키고 있는 대종사와
북해성모의 안위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언가는 자신들을 추적할 틈조차 없을 것이다. 시신들을 수습하고 세가 안에서
벌어진 처참한 싸움과 그 결과에 대한 정신적인 충격을 벗어나기도 버거울 테니 말이다.
게다가 가주인 언철심이 수뇌부들과 함께 수라검문의 무공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원로들과 강직한 협의심을 가진 제자들이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날 테니, 가주인 언철심과 수뇌부들이 직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어렵게 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언가 내에서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내분이 일어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수라마왕등과 싸웠던
이상의 희생이 있을 테고, 결과적으로 진주언가는 강호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으리라.
태현에 도착한 수라마왕등 일행들은 즉시 옛날 수라검문 있던 폐가로 달려갔다. 대종사와 북해성모를 태운 가마는
한쪽에 잘 놓여져 있었고, 혈영마왕은 한때 연무장이었던 넓은 공터 가운데 작은 모닥불을 피운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왔는가?”
혈영마왕은 수라마왕의 안색이 다소 창백하다는 잠과 혼세마왕등의 옷에 격전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여 안도해했다.
“모두들 무사해서 다행이군. 그래. 어떻게 되었나?”
수라마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한켠에 가서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태현까지 달려왔으니
급히 운공을 해서 내상을 치료하는 것이 급했던 것이다.
비천마왕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언호심을 바닥에다 팽개치며 말했다.
“깨끗이 쓸어버렸지. 아주 생똥을 싸더군, 그래. 크크크.”
원래 성격이 해학적인데다 허풍을 치는 경향도 다분히 있었기에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혈영마왕은 바닥에 나뒹구는 사내를 슬쩍 바라본 후 혼세마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혼세마왕이 모닥불 주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비슷하긴 했지. 아마 앞으로 50년 이내에는 강호에서 언가의 무인들을 찾아보기 어려울 게야.”
혈영마왕이 머리를 끄덕였다. 혼세마왕의 말대로라면 적어도 언가의 전력 반은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 정도라면 혼세마왕등의
능력을 생각해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이번에는 비천마왕이 잡아온 사내를 가리키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은 또 뭔가?”
이번에는 비천마왕이 대답했다.
“언가에서 잡아왔네. 자네에게 선물로 주려고 말이야.”
말을 마친 그가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혈영마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언호심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별로 신통치 않군. 꽤나 질기겠어.”
순간 언호심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강호에는 식인을 하는 마두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고, 또 전대의 거마(巨魔)인 지옥마검과
같은 인물의 동료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가 사색이 된 채 소리쳤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 저는 원래 목욕을 거의 하지 않아서 냄새가 고약합니다. 게다가 피부병이 있고,
또 콜록 콜록…. 으! 보, 보시다시피 해소병까지 있어서…….”
혈도가 짚여 움직이지도 못한 채 억지로 기침까지 해대는 그의 모습이 조금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간악함을 잘 아는 비천마왕은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흥! 내 보다보다 저렇게 악독한 놈은 처음 보았네. 같은 가문의 가솔이면, 모두 형제거나 친인척들일 텐데 제 한목숨 구하기 위해
그들을 방패막이로 이용하더군. 게다가 우모침을 얼마나 교묘하게 쏴대던지 나도 몇 번은 깜짝 놀랐다네.”
잠시 언호심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혈영마왕이 입맛을 다셨다.
“쩝! 아쉬우나마 오늘은 이놈으로 만족 해야겠군. 가만있자…, 오늘은 내장탕이나 한번 먹어볼까…?”
혈영마왕이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서자 언호심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살려주십시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제, 제게는 은자도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오십만 냥은 됩니다.
그거 모두 다 드리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은자를 오십만 냥이나 가지고 있다는 그의 말에 혈영마왕등은 깜짝 놀랐다. 그만하면 대단한 거부가 아닌가.
사실 그 돈은 과거 언호심이 태현에서 큰 도박장을 하던 양씨 부부를 살해하고 훔친 것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한때 언가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는데, 새로 가주가 된 언철심이 그를 복귀시킨 것이었다.
물론 언호심이 그에게 자신이 훔친 금액의 절반인 오십만 냥을 바쳤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울부짖던 언호심이 잠잠해졌다.
비천마왕이 그의 혼혈을 짚어버린 것이다.
“시끄럽군. 나중에 수라노괴가 운공을 마치면 놈을 깨우지. 그만큼 겁을 줬으니 가만히 놔둬도 모든 걸 술술 불게야. 그건 그렇고…….”
그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이젠 어디로 가야 하겠나? 언가에서 일도 저질렀는데…, 대종사님을 저렇게 모시고 다니다가는 정파놈들에게 금방 발각될 게 분명해.”
“내가 모시지.”
혼세마왕등의 시선이 일제히 만독혈왕을 향했다.
“신독문으로 가세.”
비천마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겠나? 과거에 그곳에서 뛰쳐나올 때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니라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면서?”
“상관없네. 자네 말대로 대종사님을 이렇게 모시고 다닐 순 없어. 신독문에라도 가세.”
비천마왕이 혼세마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혼세마왕이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만 괜찮다면 신독문도 좋지. 그쪽으로 가도록 하세.”
이렇게 해서 오마왕들은 신독문으로 가기로 합의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신독문조차 이미 멸문해 사라지고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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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겨울은 정말 추웠다. 특히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원 한가운데서 뼈를 깎아내는 듯 한 강풍을 만날 때면 한기가 온 몸의 신경을 따라 헤집고 다니는 듯 하다.
이 매서운 한기를 뚫고 은밀히 전진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눈처럼 하얀 방한복을 입은 채, 설원 위를 미끄러지듯 질주했는데,
그 뒤에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달섭무흔의 초절한 신법을 펼치고 있는 이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요동의 패자인 천외패황궁이었다.
천외패황궁. 오백여 년 전, 천하제일인이었던 패존(覇尊) 연리무가 세운 궁이다. 패존 연리무는 전형적인 무도를 추구하는 무인이었다.
세력을 만들거나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욕심도 전혀 없었다. 단지 무도에 증진하여 무(武)의 극단을 경험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이자 삶의 의미였던 것이다.
하지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그의 무위를 경외한 무림인들이 떼로 몰려들었는데, 그렇게 되자 자연히 세력을 이루게 되었고,
그 힘이 너무 커져서 정파를 위협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무림대전이 일어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자청해서 수하가 된 사람들에게 그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패존 연리무가
처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중원을 떠나 요동으로 가자고. 천외패황궁은 이렇게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점차 세월이 흐르자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무의 궁극을 깨닫는 목적, 그 한가지만을 바라보며 요동에 갇혀 있기에는 궁이 너무 커버렸다.
아마도 이번에 중원으로 진출하고자 하지 않았다면, 그 힘이 내부로 표출되어 스스로 대폭발을 일으키고 말았으리라.
그렇게 되었다면, 통제력을 잃은 미증유의 거력이 일시에 중원으로 쏟아져 들어와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을 게 분명하다.
어쨌든 천외패황궁은 그렇게 세외의 하늘로 군림해 왔고, 오늘도 변함없이 요동의 넓은 설원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었다.
사사삭!
어두운 밤. 파란 달빛 아래 삼장 높이의 거대한 성벽이 나타났다. 곧이어 다섯 개의 인영이 아른거리더니 성벽아래 달빛이 미치지 못하는 그늘진 곳에 몸을 멈췄다.
그들은 입고 있던 흰색의 두터운 방한복을 모두 벗었는데, 그러자 모두들 몸에 착 달라붙는 백의 경장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머리와 얼굴 전체를 덮는 두건을 하고 있어 신원은 도저히 확인할 수 없었다. 단지 경장을 입은 몸의 굴곡으로 보아
여인이 한명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성벽 주위에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음이 분명했지만, 그들의 신법은 극도로 은밀하고 빨라 아직까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섯 개의 인영들은 소리 없이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얼음처럼 매끄러운 석벽에 두 손과 다리를 거침없이 찔러 넣었다.
그러면 아무 소리도 없이 석벽이 두부처럼 파여 나가는 것이었다. 실로 가공할 내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성벽에 오르자 그곳은 횃불이 대낮처럼 밝혀져 있어, 근처 망루에 있던 천외패황궁 무사들의 눈에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여인으로 보이는 잠행인이 두 팔을 양쪽으로 뻗어 그곳에 있던 망루를 가리켰다.
피빗!
순간 공기를 가르는 작은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소매에서 암기가 발사되었고, 망루에 있던 천외패황궁 무사들 다섯이 비명한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곧이어 복면인 다섯은 즉시 성안으로 뛰어들어 빽빽이 들어찬 전각들 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그들은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였고 복잡한 궁의 내부 길을 익숙하게 찾아내며 중심부를 향해 전진했는데, 혹 들키기라도 하면
암기를 발사해 상대를 그 자리에서 제압해버렸다. 만약 그들이 자객들이라면 대담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약 반각 후, 그들은 마침내 패황전이라는 편액이 걸린 거대한 전각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패황이 거주하는 패황전은
작은 성처럼 지어져 있었고, 많은 고수들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어 숨어들어가기는커녕 근처에 접근하기도 용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대담하게도 경비가 가장 허술해 보이는 측면 어느곳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경비무사 둘에게 종적을 발견 당했지만
그들 또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일견해 보기에도 경비무사들의 무공은 대단했지만 암중 여인의 손에서 발사된
암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아마도 천하에 이런 암기를 만들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으리라.
그런데 암중인들이 멈춘 곳은 석벽으로 지어져 있어 견고하기 그지없었고, 창문조차 없어 도저히 건물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때 그들 중 호리호리한 체격에 키가 큰 인물이 나섰다. 그의 허리에는 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길쭉한 물건이 걸려있었는데,
천을 풀자 무척 고풍스러워 명가의 것이 분명해 보이는 검이 나타났다.
그는 천천히 검을 들어올리더니 수직으로 곧추세웠다. 그리고는 숨을 두어 번 고르고 난 다음 검을 석벽으로 찌르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검에서 두자가 넘는 푸른색의 검강이 쭉 뻗어 나왔다.
검은 검강을 매단 채 석벽 깊숙이 박혀 들었고, 그가 크게 원호를 한번 그리자 석벽에 둥근 자국이 생겼다. 검수는 즉시 검을 뽑아 갈무리한 후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다른 사내가 나섰는데, 체격이 무척 작고 야위어 보였다. 그는 검수가 베어놓은 석벽 앞에 서서 두 손을 단전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깊은 심호흡을 한 차례 한 후, 두 팔을 앞으로 서서히 내밀었다.
둥!
순간 가벼운 진동과 함께 검에 파인 부분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그그그그!
동시에 뭔가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석벽의 잘린 부분이 서서히 밀려나오는 게 아닌가. 상황을 보면 이는 분명히 격공섭물의 수법이 분명한데,
네자 두께의 석벽을 끌어당기는 내공이라는 것은 일반 강호인들이라면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것이리라.
잠시 후, 석벽은 둔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쿵!
작지 않은 소리임에도 경비무인들은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암중인물들 중 또 다른 사내 한 명이 근처에 가부좌를 한 채 앉아있었다.
아마도 그가 내공으로 무형의 벽을 쳐 소리를 차단한 것이 분명했다.
석벽에는 직경 다섯 자(1.5미터)가량의 둥근 구멍이 났고, 다섯 사람은 지체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은 천외패황궁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패황전 안으로 숨어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패황전 안 넓은 대전에는
이미 대낮처럼 밝혀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열을 지어 모여 있었다.
다섯 명의 암중인들은 이 뜻밖의 사태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위를 한번 스윽 둘러본 후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천외패황궁측에서 위맹한 인상의 흑의장년인이 나서며 소리쳤다.
“멈추시오!”
침입자들이 대전 한가운데 멈춰 서자 흑의장년인이 굳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누구시오?”
한밤중에 패황전까지 침입한 자객들에게라면 당장이라도 호통을 치고도 남을 일인데, 의외로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그건 이들이 침입한 경로와 방법을 보아 일방의 패주라 하여도 모자람이 없는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라 감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침입자들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잠시 이들을 노려보던 흑의장년인이 뒤로 물러서며 명령했다.
“쳐라!”
순간 주위에있던 흑의인 20여명이 일제히 이들을 향해 달려들었는데, 패황전을 지키는 호위무사들답게 개개인 모두가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달려들었어도 복면인 한 명을 당해내지 못했다. 복면인들 중 체격이 가장 큰 사내가 두 팔을 크게 한번 휘돌렸는데,
그의 손에서 자색의 기운이 구름처럼 일어나 그들을 휩쓸어버렸던 것이다.
퍼버버벙!
잇다른 격타음과 함께 흑의인들 모두는 태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사방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이건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힘이 어느 정도 비슷하기라도 해야 초식이라도 써볼게 아닌가. 거대한 눈사태 앞에서 그 어떤 행동도 무의미한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다행히 쓰러진 흑의인들은 곧장 일어섰는데,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이 모습을 본 흑의장년인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짐작을 하고는 있었지만 침입자들이 이만큼 강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방금 보여준 이 한수만 하더라도, 천외패황궁 내에서 그 정도의 신위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궁내 최고수라는 십패천밖에 없었던 것이다.
십패천.
마교에 구마존이 있다면 천외패황궁에는 십패천이 있다. 이들 모두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고수들로 모두 초절정의 반열에
들어선 인물들이다. 이런 고수들이라면 천하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어려울 텐데 한꺼번에 다섯 명이나 나타났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다시 자세를 가다듬은 흑의인들이 이들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흑의장년인이 소리쳤다.
“멈춰라!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다.”
흑의장년인이 즉시 검을 뽑아들었다. 패황전 수석호위검주이자 천외패황궁 서열30위 이내에 들어가는 실력을 지닌 그가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만한 고수와 겨루게 된 것을 내심 기뻐했다. 고수와의 대결 한번이 십년간의 폐관수련보다 낫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한 손에 검을 든 채, 투지를 불태우며 나서려던 순간, 흑의장년인의 두 눈에 이채가 흘렀다. 가장 왜소해 보이는 체격을 지닌
또 다른 복면인 한 명이 자신을 향해 진지한 태도로 주먹을 뻗어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흑의장년인은 적어도 삼장의 거리를 떨어져 있는 자신에게 백의복면인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달밤에 체조라도 하겠다는…, 헉!’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막강한 경력이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빠앙!
압축된 공기가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그의 가슴 한 치 앞에서 터져 나왔다. 동시에 흑의장년인은 뒤로 퉁기듯 물러섰다.
“으음!”
묵직한 신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비록 상대의 경력이 정확하게 적중한 것은 아니지만 그 충격은 작지 않았다.
가슴 전체가 얼얼해 순간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던 것이다. 아마도 백의복면인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면,
그는 채 일초도 펼쳐보기 전에 심장이 파열되어 죽었을 것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백의복면인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알기에 삼장을 격하고 이토록 강한 경력을 전달할 수 있는
무공이란 단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서, 설마 그건…….”
그때였다. 패황전 안쪽에서 칼칼한 노인의 감탄어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역시 백보신권(百步神拳)은 대단하외다. 그래, 소림의 공상대사(空想大師)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 예까지 찾아오신 게요?
그것도 복면까지 하고 말이오.”
흑의장년인과 백의복면인들은 패황전 안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대여섯 명의 노고수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패황 연무종의 모습도 보였다.
패황전 내에 있던 천외패황궁 무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패황을 뵈옵니다!”
패황 연무종은 우수를 슬쩍 휘둘러 그들에게 일어서라고 한 후, 강렬한 눈빛으로 복면인들을 바라보았다.
백의복면인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전음을 나누는 듯 하더니 일제히 복면을 벗어던졌다.
여섯 개의 계인이 머리에 뚜렷이 찍힌 노승 한명, 한림원의 노학사처럼 보이는 단아한 인상의 노인 두명, 강맹한 인상에 장대한 체격을 한 노인 한명,
그리고 끝으로 꽃처럼 어여쁜 여인이 한명이었다.
패황 연무종 곁에 서 있던 창백한 안색의 노인이 예의 칼칼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클클클, 이게 누구들이신가. 소림의 공상대사로도 모자라 무당의 청진동주이신 청명진인, 화산 운현궁주이신 영운진인,
게다가 무림맹의 장로이신 번천장(?天掌) 진사부가 아니신가. 헌데 이 아가씨는…, 노부도 잘 모르겠군, 그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일한 여인, 개방의 홍소미가 생긋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천외패황궁 십패천의 한분이신 귀견수 오선배를 뵈옵니다. 후배는 개방의 홍소미라 하옵니다.”
홍소미가 다시 한번 깊숙이 읍을 했다.
“패황의 존안을 직접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인가 하옵니다.”
귀견수 오진량이 감탄을 했다.
“오호라! 개방의 만리신개 홍방주의 무남독녀인 취옥선녀구먼. 클클클, 그래. 무림맹의 꾀주머니가 되었다더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일세.”
“감사하옵니다.”
“그건 그렇고. 정파의 수뇌부들께서 도대체 무슨 염치로 이곳을 찾아오셨나? 설마 죽여주십사하고 목들을 디밀진 않았을 테고.”
귀견수 오진량은 상대가 모두 각 문파를 대표할만한 최고수들인지라 그들 중 가장 연장자라 할 수 있는 소림의 공상대사에게 말한 것이지만
이번에도 홍소미가 다시 대답했다.
“만약 공상대사님을 비롯한 저희 정파의 여러 선배님들이 친히 오시지 않았다면 패황님을 뵐 수 없었겠지요.
물론 저희는 악의를 가지고 오지도 않았구요. 그 점은 저희가 잠입할 때 경비무사들에게 살수를 쓰지 않았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겁니다.”
귀견수 오진량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공상대사. 이 아이의 말이 사실이오?”
공상대사가 합장을 하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그렇소이다. 오늘 우리들은 패황을 만나러 온 것이외다.”
“흥! 특사라……. 그대들이 저지른 짓거리를 생각한다면 당장 갈아 마셔도 모자랄 판에 감히 본궁의 지존을 만나겠다고?
그 전에 목숨이나 제대로 간직할 수 있을지 걱정도 안해보셨나? 이거 원, 순진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알 수가…….”
귀견수 오진량이 말을 하다말고 멈추었다. 패황 연무종이 우수를 휘저으며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팽황 연무종이 입을 열었다.
“나를 만나겠다고 했는데, 이유는 무엇인가?”
“아미타불. 조용히 말씀드리고 싶소이다만.”
순간 천외패황궁 측 무인들 모두 얼굴에 분노의 빛을 띠었다.
하지만 패황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패황 연무종이 주위에 있는 수하들에게 말했다.
“이들을 패룡각에서 만날 것이다. 준비하라.”
“존명!”
패황의 한 마디는 바로 법이었다. 그의 간단한 명령에 모두들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무림맹에서 온 손님들을 패황전 안쪽으로 데려갔다.
이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바로 천외패황궁의 태상장로인 유문회였다.
그는 눈을 반개한 채 공상대사 등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머리를 연신 갸웃거리는 것이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했다.
패황 연무종은 천외패황궁측 수뇌부들 모두와 함께 무림맹에서 온 특사들과 회의를 하게 되었는데
일종의 평화회담과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갑론을박만을 반복할 뿐 합의점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회의는 모두 끝나고 밤이 찾아왔다. 정파의 특사단이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각자 방으로 올라가 쉬고 있을 무렵,
놀랍게도 패황 연무종이 소림의 공상대사의 방으로 직접 찾아왔다. 그것도 정문이 아닌 창문을 타넘어서.
공상대사는 즉시 홍소미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고, 세 사람은 깊은 밀담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그 내용은 너무도 은밀하게 논의되었는지라 이 세사람 말고는 천하에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이와 같이 무림맹 특사단과 천외패황궁의 평화회담은 아무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특사단 일행은 모두 침울한 표정으로 천외패황궁에서 쫓기듯 떠나게 되었는데, 요동성을 막 벗어나려 할 무렵
홍소미는 개방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게 되었다. 바로 오마왕들이 저지른 진주 언가의 혈사에 관한 일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깊이 생각하더니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라도 했다는 듯 다소 밝은 표정으로 특사단과 헤어졌다.
그녀의 신형은 하북성 당산, 지금은 폐허가 된 신독문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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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대위가 영촌의 강가 높은 바위위에 침식을 잊고 앉은 지 벌써 칠일이 지나가 버렸다. 검게 탄 얼굴. 풍상에 시달려 걸칠대로 거칠어진 피부.
게다가 그동안 얼마나 깊은 심마와 싸웠는지 얼굴은 마치 해골에다 가죽을 씌워놓은 것처럼 야위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아니,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한발 벗어나 스스로를 관조(觀照)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옳다.
물론 처음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온갖 잡생각들이 떠오르면 거기에 마음이 빼앗겨 심력을 다 소모시켜버리곤 했다.
하지만 황노인이 곁에서 이따금씩 내뱉는 지나가는 말들이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황노인의 이야기는 과거의 위대한 성인들의 가르침은 아니었다. 단지 계절에 따라 강의 모습이 바뀌어가는 모습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 숨쉬는 온갖 동식물들의 이야기였다.
시골에 가면 흔히들 들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내용은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마대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 했다.
그렇게 해서 마대위의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황노인은 그에게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다.
[옛날에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고행을 하던 승려가 있었다. 오랫동안 불도를 닦은 그에게 어느 날 해탈의 깨우침과 함께
석가세존께서 나타나셨지. 세존께서는 고승에게 불도를 깨우친 것을 축하하며 큰 능력을 주셨다.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능력을 말이다. 그런데 그 다음날, 고승은 동굴이 무너져 깔려죽고 말았지. 그는 ‘만약 이 동굴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고, 그의 생각대로 동굴이 무너져 죽어버린 게야. 이처럼 마음을 다스리는 것보다 세상 천지에 더 어려운 것은 없다.
불현듯 떠오르는 온갖 생각들을 어찌 막을 수가 있겠느냐?]
이야기를 마친 황노인은 마대위에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마치 무심히 흐르는 강물이라
생각하고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생각을 바라본다.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이다. 내가 있어야 생각을 하고, 생각하는 주체가 바로 나인데,
거기서 어떻게 나를 배제시킬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말 온 힘을 다해 생각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했다.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바라보아야 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마대위는 마침내 어떠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도록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황노인이 그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대답해버렸던 것이다.
그는 결국 억매임을 버리지 못했다. 그의 온 마음과 정신이 오직 하나,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의지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탈한 마음에 세상을 다산 것 같은 노인의 헛웃음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버리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새로운 억매임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대위는 모든 걸 포기하는 심정으로 가부좌를 풀고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에라, 씨팔……. 내가 언제부터 부처가 되었다고……. 마음은 무슨 놈의 얼어 죽을 마음이야! 캬악, 퇘!”
고개를 돌려 신경질적으로 침을 한 차례 뱉은 마대위는 여전히 자신의 곁에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황노인을 바라보았다.
‘혼자서나 실컷 바라보슈…….’
마대위는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는 게 더 쉬우리라고 생각했다. 도무지 그 의미도 해석이 불가능한 마음을
닦는 공부만큼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공허한 두 눈에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들이 보였다.
‘구름 한 조각, 구름 두 조각, 구름 세 조각, 구름…….’
하나 둘씩 지나가는 구름들을 새다 보니 어느 듯 잠이 쏟아졌다.
“아함!”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마대위가 흐르는 눈물을 손을 슥 닦았다.
“젠장, 멍하니 구름만 보고 있으니 잠밖에는……. 가만!”
마대위는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는지 했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뜻 모를 말들이 흘러나왔다.
“사념은 단편적인 구름과 같다. 구름을 깨끗이 걷어내지 않고서는 태양을 볼 수 없듯이, 사념을 없애지 않고서는 진정한 영혼의 빛을 밝힐 수 없다.
하지만 사념은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그 힘이 더욱 강해진다. 사념은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라. 그리하면…….”
마대위의 안색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가 읊은 이 구절은 태극해검의 후반부에 나오는 부분으로 황노인이 말했던 부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무공구결들을 다시 되새겨보았다.
모두 있었다. 물론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오마왕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고 넘어갔던 부분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당시 오마왕은 이 부분에 대한 깨달음이 명확하지 않았고, 설사 깨닫고 있었다고 해도 글이나 말로서는 전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대충 해설만 한 차례 하고는 넘어갔던 것이다.
마대위는 그때 들었던 내용들을 다시 기억해 보았는데, 당시에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던 내용이 지금은 어렴풋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감이 잡히는 게 아닌가.
만류귀종이라 했던가. 결국 무학의 최고 경지는 자연을 벗 삼아, 그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수십 년 간 평온하게 살아온 촌부의 삶과 정확히 일치되는 것이었다.
마대위가 자신의 생각에 휩쓸리지 않고, 관조하는 능력을 얻은 것은 바로 이 깨달음이 찾아온 직후부터였다.
다시 가부좌를 하고 앉은 그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나는 순간, 곁에 있던 황노인이 마침내 눈을 떴다.
그는 마치 넋이라도 나간 듯 마대위의 옆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는데, 단순히 환자를 대하는 의원의 눈빛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마치 친할아버지가 손주를, 혹은 사부가 제자를 보는 듯한 모습이다.
황노인이 다시 고개를 돌린 후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의 미간에서 좁쌀만한 크기의 빛이 나타났다.
그 빛은 점점 자라나더니 사람 주먹만 한 크기의 오색찬란한 구슬이 되었다.
그 구슬은 황노인의 미간에서 툭 튀어나와 천천히 마대위의 얼굴쪽으로 날아갔다. 그러더니 마대위의 미간 두치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곧이어 그 구슬에서 눈부신 광휘가 솟아나와 사위를 비추는 가운데 마대위의 미간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한편 마대위도 이러한 상황들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상단전이라 할 수 있는 미간으로 스며드는 이 힘은 분명히 내공과 같은 기(氣)와는
다르다는 것을. 그건 바로 황노인이 평생을 두고 닦은 마음의 힘이 선천지기로 구체화된 것이었다.
마대위의 온 몸이 한 차례 부르르 떨리는 듯 하더니 잠시 후,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간을 통해 들어온 황노인의 영혼이
한 말을 모두 듣고 난 직후였다.
마대위는 곁에 있던 황노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어 유일한 사숙임을 알았다. 한 여인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사형을 암습하고 말았던 죄인이기도 하지만,
뼛속 깊이 파고드는 후회와 자책감에 평생을 고통속에서 보내야만 했던 불쌍한 인간이기도 했다.
한 인간이 순간의 실수로 저지른 잘못 때문에 짊어져야만 할 죄악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는 당사자가 아닌 한 알 수는 없지만,
마대위는 그가 받았던 마음의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 것이었다.
아마도 마대위가 작으나마 깨달음을 얻어 마음의 평정을 찾기 전이었다면, 사숙의 선천지기에 실린 고통을 체험하는 순간
그의 정신은 완전히 파괴되고 전신의 심맥이 일시에 파열되어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으리라.
그러고 보면 황노인이 마대위에게 마음의 평정을 그토록 요구했던 것도, 자신이 얻은 평생의 심득을 마대위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마대위의 눈물은 금방 말랐고,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결국 사숙과 관련된 생각도 마대위에게 있어서는 한 조각의 구름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어느 사이엔가 너와 나의 구분이 사라지고,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는 깊은 대도의 세계로 침잠되어갔다.
제 목: 금강무적 7권 9.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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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復活)
싸늘한 바람이 휭하니 불어와 누런 황토먼지를 피워 올렸다. 여기저기 잡초까지 덤성덤성 나 있는 이 시골길위에는 지나가는 이도 하나도 보이지 않아
그 황량함을 더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관도 한쪽에 큰 가마 하나가 나타났는데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르던지 마치 관도 위를 날아오는 듯 했다.
바로 대종사와 북해성녀를 모시고 가는 오마왕 일행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한 사람의 일행이 더 생겼는데, 바로 진주언가에서 잡아온 언호심이란 자였다.
그는 진주언가가 수라검문의 무공을 빼돌리기 위해 했던 모든 악독한 짓에 깊숙이 관여했었고, 수라마왕에게 모두 이실직고를 했다.
수라마왕은 언호심의 말을 모두 듣고 보니 그 모든 일의 원흉이 가주인 언철심임을 알고는 통탄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도 그만은 죽였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사강룡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큰 위안이 되었다. 언호심은 사강룡이 태어났을 때부터 자라온 과정까지 모두 소상히 알고 있었다.
수라마왕은 시도 때도 없이 사강룡에 관해 이야기해 달라고 요구했고, 언호심은 이 때문에 그야말로 입이 아플 지경이었다.
사강룡에 대한 언호심의 이야기들 중 수라마왕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사강룡이 처음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검을 잡았다는 내용이었다.
별것 아닌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수라마왕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언호심으로서는 귀찮기 그지없었지만 이 때문에 그의 목숨이 아직까지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죽음을 당했거나,
아니면 무공이 전폐당해 버려졌을 것이다.
지금도 언호심은 수라마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면서 사강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거운 가마를 들고
달리는 수라마왕에 비해 빈손으로 신법을 펼치는 언호심이 더욱 힘들어 보였다. 벌써 반나절 가까이 한번도 쉬지 않고
전력으로 달려왔으니 결코 낮지 않은 무공을 지닌 그로서도 힘겨웠던 것이다.
하지만 수라마왕등은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고, 호흡도 전혀 거칠어지지 않았다. 언호심은 내심 오마왕들의 심후한 내공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마왕들이 쉬지 않고 달려 하북성 당산 부근에 도착할 무렵, 그곳에는 홍소미가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홍소미는 개방 제자들로부터 수시로 보고를 받으며 오마왕들의 행적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당산 인근에 있는 동리라는
마을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고 예측했다.
동리는 바로 그녀가 마대위, 북궁웅비를 호남성에서 처음 만난 후, 암중세력에 의해 멸문한 천약문의 후예인 두사빈을 우연히
만나, 함께 신독문으로 가다가 마지막으로 들린 곳이었다. 당시 두사빈이 지니고 있던 만년옥장을 지키기 위해 신경이 곤두서 있던
그들이 신독문주의 딸인 제강희를 만나 작은 다툼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오마왕들이 이곳 동리에 도착한 순간 홍소미는 이미 개방의 제자들로부터 보고받고,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두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던 혼세마왕이 관도 한가운데 턱하니 서있는 홍소미를 발견하고는 가마를 멈추게 했다.
수라마왕등은 가마를 땅에 내려놓은 채 경계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혼세마왕이 으스스한 눈빛으로 홍소미를 노려보며 물었다.
“웬 계집이냐?”
철석담장을 지닌 호한이라도 혼세마왕의 눈빛을 보면 오금이 저릴 텐데 홍소미는 가벼운 미소까지 지으며 깊숙이 읍을 했다.
“혼세마왕 노선배님을 뵙게되어 영광이옵니다. 소녀는 개방의 홍소미라 하옵니다.”
혼세마왕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가 수라마왕등을 바라보았다. 언가에서 혈사를 일으켰을 때, 이미 정체를 드러낼 각오를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행로까지 파악되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지라 다소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태원에서의 일을 따지고자 왔느냐?”
그는 수라마왕이 태원에서 이성을 잃고 개방도 한 명을 심하게 고문했던 일을 상기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개방에서 길을 가로막고
나선 줄 알았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내공을 끌어올려 주변의 기척을 살펴보아도 눈앞의 여인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에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홍소미가 그들의 내심을 알아차렸는지 두 팔을 살짝 벌려 보이더니 다시 말했다.
“저 혼자 왔습니다. 본방의 태원분타주에게 손을 좀 심하게 쓰시긴 하셨더군요. 하지만 응급치료 또한 워낙 훌륭하게 해 주셔서
한두 달만 정양을 하면 완치될 수 있겠더군요. 그 점 감사드려요.”
말을 마친 그녀는 만독혈왕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혼세마왕은 그녀가 이미 오마왕들의 신상내력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천하제일방이라는 명성이 무색치가 않구나. 역시 개방이야.’
그때 홍소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혹시 목적지가 신독문이라면 가실 필요가 없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만독혈왕의 신형이 마치 그 자리에 있기라도 한 듯 홍소미의 코앞에 나타났다.
“그게 무슨 소리냐?”
홍소미가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서며 대답했다.
“신독문은 이제 그곳에 있지 않아요.”
“그곳에 있지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한줌 핏물로 녹여주마.”
“신독문은 몇 년 전에 신비세력과 싸우다가 큰 타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는데 그곳이 어딘지는 저희들로서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어요.”
만독혈왕이 한동안 홍소미의 두 눈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아마도 신독문으로 직접 달려가 확인해보려는 듯 했다.
다행히 그곳에서 신독문까지는 작은 산하나만 넘으면 되는 거리였고, 만독혈왕의 무공을 생각한다면 한식경 정도면 충분히 갔다 올 수 있었다.
홍소미는 만독혈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목을 길게 빼고는 가마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혼세마왕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시선을 가로막으며 눈을 부라렸다.
홍소미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혹시 가마에 계신 분이 비천신룡 선배님…, 헉!”
그녀는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혼세마왕의 몸에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감히 그분의 명호를 함부로 입에 담다니…, 간이 배밖에 나왔나 보구나.”
홍소미가 급히 머리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그럼 혹시 저분이 마대위소협에게 대력금강기를 전해주신 대종사님이신가요?”
혼세마왕은 그녀의 입에서 마대위의 이름이 나오자 안색이 다소 풀렸다.
“그 녀석을 아느냐?”
홍소미가 생긋 웃었다.
“물론이에요. 아마 마소협이 처음 강호에 나와서 사귄 친구 두 사람 중 한명이 바로 저예요.”순간 수라마왕이 갑자기 나서며 물었다.
“오, 그래? 그럼 지금 그녀석이 어디 있는지 알겠구나.”
수라마왕은 마대위가 사강룡을 데리고 갔다는 말을 들었는지라 마대위의 행방만 알면 손자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소미의 얼굴은 갑자기 침울해졌다.
“그건……. 자세한 이야기는 만독혈와 노선배님께서 오시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혼세마왕등은 그녀의 표정에서 마대위에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마대위가 크게 잘못되었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마대위가 대종사의 대력금강기를 전수받은 한, 아무리 큰 위기에 빠진다고 해도 목숨 하나만은 건사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라마왕은 사강룡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당장이라도 홍소미에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잠시 참기로 했다.
만독혈왕도 없는데다가 길거리에 서서 나눌 내용의 대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홍소미의 예측대로 만독혈왕은 한식경이 지나자 돌아왔다. 그의 표정은 붉게 상기되었고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가 다짜고짜 홍소미의 맥문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어떻게 된 것이냐? 당장 말하지 않는다면 팔을 뽑아버리마.”
“아아…, 이 팔 좀…….”
홍소미가 고통에 찬 신음성을 흘리자 혼세마왕이 나섰다.
“이보게. 그러다 애 잡겠네. 일단 팔부터 놓고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세. 설마 우리들 앞에서 거짓말이야 하겠는가?”
만독혈왕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수라마왕까지 나서서 만류하자 그제서야 이성을 찾고는 홍소미의 맥문을 놓아주었다.
홍소미는 자신의 손목을 어루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빨간 손자국이 그대로 나 있었을 뿐 아니라 내공에서 만큼은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그녀로서도 만독혈왕 앞에서는 조금도 힘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객잔을 예약해 두었어요.”
혼세마왕이 만독혈왕 대신 가마를 졌고, 만독혈왕은 홍소미와 함께 터덜터덜 걸어갔다.
잠시 후, 이들은 동리에서 가장 큰 객점으로 들어갔는데, 이미 홍소미가 손을 써놓았는지 손님이라고는 단 한명도 없었다.
게다가 널찍한 탁자 하나만이 객잔 한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었을 뿐 다른 공간들은 텅 비어 있어 가마를 내려놓기 충분했다.
오마왕은 가마를 내려놓은 후 홍소미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그녀가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오마왕과 홍소미가 하나밖에 없는 탁자에 가서 앉자 경장을 입은 앳된 여인 두 명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에
발걸음이 무척 가벼운 것으로 보아 한눈에 보기에도 무림인이 분명했다.
그녀들은 홍소미와 오마왕들을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인 후, 조심스러운 태도로 탁자위에 차를 내려놓았다.
홍소미가 말했다.
“수고했다. 너희들은 이제 밖에 나가서 기다리거라. 그리고 내가 명령할때까지 그 누구도 이곳에 들어와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예, 소방주님.”
두 여인은 홍소미와 오마왕들에게 다시한번 허리를 숙인 후 총총히 물러갔다.
한편 오마왕들은 홍소미가 개방의 소방주임을 깨닫고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개방의 제자들 중 여자도 흔치않게 있기는 했지만
방주의 직위에 오른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러니 홍소미가 정말로 개방의 소방주라면 머지않아 역사상 처음으로 여자 방주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홍소미는 자신이 먼저 차를 마신 후, 오마왕들에게 같이 마시도록 권했다. 하지만 비천마왕만이 차를 홀짝였을 뿐 모두들 홍소미의 입만을 뚫어져라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가 가볍게 미소를 지은 후, 가마 옆에 엉거주춤 서있는 언호심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가의 선배님도 이야기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언호심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혼세마왕등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가벼운 파공음과 함께 그가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수라마왕이 지력을 날려 그의 혼혈을 제압해버린 것이다.
마루바닥에 꼴사납게 널브러져있는 언호심을 바라보며 홍소미는 내심 혀를 찼다. 명문세가의 선배라면 저런 모습을 보일 바에야 차라리
깨끗이 죽음을 맞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홍소미는 즉시 마대위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이르는 모든 일에 대해서 비교적 솔직히 말해주었다. 근 한시진에 이르는 이야기였지만
오마왕들은 조금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대위가 위기에 빠졌을 때는 마치 자신이 직접 겪기라도 했다는 듯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오마왕들은 홍소미의 이야기를 모두 듣자 당금 무림의 혼란이 바로 사마들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고는 이를 갈았다.
그런데 혼세마왕이 사마들 중 한명인 광운마가 금마동까지 찾아왔다가, 자신들의 협공에 죽었다는 말을 듣자 더욱 놀라워했다.
천마존조차 쩔쩔매게 만들었다는 광운마를 죽인 오마왕들의 무위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혼세마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지금 대위와 강룡이란 아이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본 방으로서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라마왕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꼭 찾아야 한다. 천하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야 해. 아니지. 개방만 믿고 있을 수는 없지. 내가 직접 나서야겠구나.”
사실 수라마왕으로서는 당장이라도 사강룡을 찾아야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사강룡은 그에게 있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친인이자 문파의 유일한 전인이 아닌가.
홍소미가 위로하듯 말했다.
“노선배님. 그 일은 저희 개방에 맡겨주세요. 저희가 꼭 찾아내겠습니다.”
수라마왕은 잠시 홍소미를 바라보았다. 천하에 개방에서 찾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는 지금으로서 최선의 방법은 홍소미를 믿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 수라마왕이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꼭 찾아주게. 자네만 믿겠네.”
홍소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비록 수라검문의 후예를 찾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오마왕들이 정파에 뿌리 깊은 원한을 갖고 있기에 서로 힘을 합치기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마라는 공동의 적을 공유하는 이상, 그 점에 있어서만은 충분히 협력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홍소미는 곧이어 사마들이 오마왕과 정파의 공동지적(共同之敵)이라는 전제를 바탕에 두고 짜온 일련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마왕들의 거부감을 최대한 줄여가면서, 합리성을 강조하느라 유려한 수사까지 섞어가며 다소 장황하게 말했다.
한동안 이어지던 그녀의 말이 끝나자 오마왕들 중 그나마 계략에 가장 밝은 비천마왕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놈들은 아직 만년옥장인가 뭔가 하는 영약을 노리고 있을 게 분명하고, 따라서 독충노괴의 뒤를 밟아 신독문의 비밀
거점을 찾으려 할 게 뻔하다는 말이렷다. 그러면 정파의 고수들이 그곳에 모여 있다가 놈들이 습격했을 때 되받아쳐 일망타진을 한다?”
“그래요.”
비천마왕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연 사마놈들이 직접 그곳으로 올까? 수하들만 보내도 충분할 것 같은데.”
홍소미가 가마쪽을 슬쩍 스쳐본 후 말했다.
“만약 대종사님께서 깨어나셨다는 말이 그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순간 오마왕들 모두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녀의 말대로 대종사가 깨어난다면 사마들로서는 친히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종사야말로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마왕들은 대종사를 미끼로 쓴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사마들을 일망타진 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계획은 없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당장 거절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것이리라.
혼세마왕이 말했다.
“자네는 잠시 나가 있게. 우리들끼리 이야기를 좀 해야겠네.”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밖으로 나갔다.
홍소미는 객점 밖에서 오마왕들을 기다렸다.
오마왕들의 이야기는 길어져 근 반 시진 넘게 밖에 서 있어야 했다. 하지만 홍소미는 조금도 지겨워하지 않았다.
오마왕들의 결정이 향후 무림정세에 끼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이틀 밤낮을 기다린다 해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니 말이다.
마침내 오마왕들의 의논이 모두 끝났고, 그녀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들 굳은 표정이어서 홍소미는 내심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혼세마왕이 말했다.
“일단 우리들은 신독문의 비밀거처로 갈 거네. 물론 사마놈들이 우리들을 찾아올 수 있도록 정보를 흘리는 일도 허락하겠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홍소미가 벌떡 일어나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용단에 감사드립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지만!”
혼세마왕이 돌연 우수를 들어올려 그녀의 말을 멈추게 한 후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신독문의 비밀거처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대국을 우리들이 주제하겠네. 그리고 사마놈들을 일망타진하는 즉시 정파와는 깨끗이 헤어지겠네.
두 번 다시 뒤통수 맞기는 싫으니 말이야. 알겠나?”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요. 노선배님들의 말씀에 따르도록 하겠어요. 그럼 신독문의 비밀거처의 위치는…?”
만독혈왕이 즉시 전음으로 홍소미에게 뭔가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러자 홍소미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랬었군요. 그렇게 멀리까지 갔다니……. 본방이 찾지 못했던 것이 납득이 가는군요. 그럼 노선배님들께서는 먼저 그곳으로 가시도록 하세요.
저희 정파에서는 소수 정예로만 움직여 은밀히 그곳으로 가겠어요.”
그녀는 즉시 일어나 오마왕들에게 포권을 한 후, 신형을 날렸다.
오마왕들은 홍소미가 사라진 객점 문을 잠시 바라본 후,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잘못되어 대종사와 북해성모의 신상에
해가 갈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36마군을 자결토록 하고, 대종사에게 위해를 가한 사마들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제 단 한번의 싸움만으로 모든 은원을 종결지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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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있었지만 주위의 경물은 마치 심상에 아로새겨지듯 맺혔다. 그건 단순히 눈으로 ‘본다’는 것과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누군가 옮겨주지 않으면 꿈적도 하지 못하는 차가운 돌덩어리에 불과한 바위에게도 존재를 향한 의지가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동식물들이 양분이나 먹이를 섭취하며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모든 움직임들이 생존을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면, 바위에게는 단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자신만의 생존의 몸짓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존재의 문제만 따진다면 어느 쪽이 더 훌륭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건 단순히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굳이 가치를 따진다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수천, 수만 년을 존재할 수 있는 바위가 오히려 동식물보다 더 효과적인 생존방법을 체득하고 있다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마대위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바위조차 이처럼 훌륭한 생존법을 터득하고 있는데 그보다 더 오래 존재해 온 산,
아니 자신이 딛고 있는 이 땅에는 얼마나 위대한 영혼이 깃들어 있겠는가.
그는 만물이 하나의 모태에서 태어난 형제요 자매임을 깨달았고, 그 속에서 자신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결국 마대위의 깨달음이 여기까지 이르자 굳이 내공을 운용하지 않아도 순리를 찾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 기운은 마대위의
온 몸을 휘감아 돌기도 하고 돌연 밖으로 나가 공기 속에 섞여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내공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몸에 가장 조화로운 기운이 저절로 흘러들어와 온 몸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 기운들은 움직임에 있어 장애가 전혀 없었다. 마대위가 그냥 머리에 떠오르는 데로 적양신공을 운공하거나,
월음진기, 심지어는 지존독황공을 운공해도 각각의 내공에 가장 적합한 기운으로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었다.
마대위의 몸은 허공으로 반장 가량 떠오른 채,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차갑게 얼어붙기도 하고, 또 때로는 칠흑과 같은 검은 빛을 띠기도 했다.
그건 바로 이 세 가지 내공을 운공함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오마왕이 보았더라면 세 가지 신공 모두가 대성을 이루었다고 감탄할만한 성취였지만 마대위는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무공이 몇 성을 이루었느냐 하는 것은 상대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 사람의 마음의 한계에 따라 동일한 성취가 10성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1성밖에 이루지 못한 것이 되기도 한다.
즉, 현재 마대위가 보여줄 수 있는 무공의 위력만 따지자면 오마왕들과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오마왕들은 자신들의 성취를
11성으로 생각하는 반면 마대위는 이제 1성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뿐인 것이다.
그건 오마왕들에게는 무학의 성취가 한계에 다다라 더 이상 뻗어나갈 수가 없지만, 마대위는 무한한 대자연의 세계를 보았기에
성취가 가능한 폭이 비교할 수없을 만큼 더 넓은 것이다.
마대위는 현재의 상태 그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고 싶었다. 대종사처럼 자신도 생존에 필요한 기를 자연속에서 얻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고,
운공만으로도 더 바랄나위 없는 만족감을 항상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향아가 찾아와 그를 깨우지 않았다면 마대위는 그 바위위에서 돌이 되어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저씨!”
향아의 목소리에 마대위의 두 눈이 마침내 뜨였다.
“아저씨, 할아버지는요?”
마대위는 황노인의 영혼이 이미 육신의 탈을 벗고 대도의 세계로 날아가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향아에게 그대로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향아는 갓난아기일 때 부모가 역병으로 죽었고, 황노인이 우연히 그녀를 발견해 주어다 길렀던 것이다.
마대위는 이미 황노인의 기억과 깨달음을 상당부분 공유하고 있었기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대위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향아. 할아버지는 멀리 가셨어. 아마 돌아오시려면 오래 걸리실 거야. 그러니까 이제 이 아저씨하고 같이 있자.”
향아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정말이야? 그럼 할아버지는 언제 돌아오셔?”
“글세……. 향아가 이 아저씨 말을 잘 듣고, 착하고 예쁘게 크면 빨리 돌아오시겠지.”
향아는 마대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눈물을 닦고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응. 알았어. 그런데 아저씨 얼굴이 너무 달라진 것 같아. 보기만 해도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걸?”
마대위가 시익 웃으며 향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그럼 향아는 이 아저씨하고 여행이나 좀 다녀올까?”
“여행? 좋아! 정말 좋아! 나도 그런거 꼭 해보고 싶었어. 그럼 언제가? 오늘? 내일?”
“오늘은 짐을 좀 챙기고 내일 아침에 떠나도록 하자.”
“좋아.”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나란히 강가를 걸어갔다.
마대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뭉게구름 속에 황노인의 웃는 얼굴이 보이는 듯 하다.
‘사숙님…….’
그의 눈가에 반짝이는 물기가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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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소미를 비롯한 무림맹의 특사단이 비밀리에 천외패황궁을 방문하고 패황을 만난 후 돌아온 후에도 두 세력간의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소림과 무당은 정예 무인들을 계속 내보내 요동의 천외패황궁 본진의 힘이 제령의 세력과 만나지 못하도록 갈라놓고 있었다.
그 가운데 산발적인 싸움은 계속 일어났고, 서로 밀고 당기는 접전의 형세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있었다. 처참한 참극으로 이어지는 싸움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죽거나 크게 다치는 무인들의 수가 눈에 띠게 줄었다는 점이다.
그건 양 측의 수뇌부들이 서로의 힘의 균형을 생각해가며, 전장의 상황을 교묘하게 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 가운데, 마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운남성을 벗어나 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파에서는 그들을 제지할 생가조차 하지 않았다. 천외패황궁과의 사활을 건 싸움 때문에
그들을 막을 여유가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마교도들이 사천성의 중심부를 관통하여 감숙성으로 진입할 때까지
정파에서 쥐죽은 듯 고요히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교는 감숙성 남부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한 후, 그곳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게다가 운남성으로부터 새로운 고수들이 속속 도착했고,
아예 큰 마을 하나를 완전히 장악하다시피 했다.
누군가 이들을 막지 않는 한 감숙성에 조만간 마교의 분타라도 하나 생겨날 상황이었다. 이처럼 정파가 가만히 있으니 감숙성의 패자임을
자처하는 신흥 문파인 혈사방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동파를 봉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힌 막강한 힘을 가진 혈사방이었지만 그곳에 진출한 마교도들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놀랍게도 마교도들 중에는 마존급 인물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고, 그 휘하에도 고수가 아닌 자들이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마교 전체 전력의 삼분지 일이 감숙성으로 온 듯 했다.
결국 마교도들은 야금야금 혈사방의 세력권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고, 혈사방은 공동파와 마교도들 사이에서 웅크려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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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어찌된 일인가! 마교 놈들이 갑자기 감숙성으로 쳐올라가다니! 은영대 아이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런 정보 하나 제대로 파악치 못하고.”
천외패황궁의 태상장로이자 사마의 수괴인 광뢰마 단벽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자신들이 수십년 간 키워왔던 최후의 힘이
숨어있는 곳이 바로 감숙성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혈사방이라는 껍질을 쓰고 있지만 때가 무르익으면 순식간에 사천성으로 밀려내려가 정파들을 쓸어버릴 작정이었는데,
마교도들이 갑자기 나타나 턱하니 가로막고 있으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광뢰마 단벽의 두 눈에서 순간 푸른 전광이 일렁였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흉악하여 지옥의 마왕이 현신한 듯 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온 세상을 태워버리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동시에 두 손에서 전광이 흘러나와 탁자를 강타하자 새카맣게 타서 재가되어버렸다.
“음!”
그가 신음성을 흘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단벽은 뭔가 깊은 근심이라도 있는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상광천뢰공을 대성하는 순간 이 같은 인간적인 감정들은 이미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성을 잃을 만큼 강한 흥분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광뢰마 단벽은 한동은 깊이 생각하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그게 필요 한가…?”
천하최강의 무공인 무상광천뢰공의 극강한 기운을 식혀줄 유일한 것. 바로 만년옥장이다. 그는 무공을 대성하는 순간
더 이상 만년옥장 없이도 자유자재로 무상광천뢰공을 발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물론 수많은 시험도 해 보았고, 따라서 확신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위력이 강한 무공을 익힌 만큼 그 해악도 적지 않다. 처음에는 거의 보이지 않던 해악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만년옥장부터 구해야겠군…….”
새파랗게 빛나는 그의 두 눈에서 또다시 전광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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