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9일 오늘의 역사
2023년 가수 피프티 피프티(FIFTY FIFTY)의 ‘CUPID‘가 영국 ‘오피셜 싱글차트 톱 100’에 18위로 진입 신기록 작성.
영국 ‘오피셜 싱글차트 톱 100’에 피프티 피프티(FIFTY FIFTY)의 ‘CUPID‘가 18위에 올랐다. SINGLE TOP 100’은 빌보드의 ‘HOT 100’에 해당하는 영국의 권위 있는 차트로, 금번 피프티 피프티(FIFTY FIFTY)가 기록한 18위는 케이팝 걸그룹곡이 오른 최고 순위(솔로곡 기준)다.
피프티 피프티(FIFTY FIFTY)는 지난 31일 ‘오피셜 싱글차트 톱 100’에 96위로 첫 진입하며 ‘오피셜 싱글차트 톱 100’에 최단 기록으로 입성한 케이팝 아이돌의 기록을 새로 썼다. 이후 61위, 34위에 이어 26위까지 순위가 수직 상승했고 이번 주 18위에 오르며 차트 진입 후 5주 연속으로 순위가 상승한 최초의 케이팝 그룹이 됐다.
2022년 풍속 265㎞/h 이상 초강력 토네이도로 미국 중부 캔자스주 건물 300~400채가 완전히 파손
2022년 중국 주상복합건물 붕괴 23명 사망 39명 실종
2021년 이스라엘 종교축제장 계단 무너져 최소 38명 사망 100여명 부상
수만명이 몰린 이스라엘 유대인 성지순례 행사에서 29일 밤(현지 시각) 최소 38명이 압사 당하고 100여명이 다쳤다
이날 사고는 유대정교회 명절인 라그바오메르(Lag B’Omer)를 기념하기 위해 이스라엘 북부 메론산에 수만 명의 초정통파 신도들이 몰린 가운데 일어났다. 이 행사는 약 1900년 전 유대인 랍비 시몬 바 요차이가 사망한 것을 기리는 축제다.
행사에 참석한 신도들은 무대 앞에서 밤 늦게까지 다같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다가 참변을 당했다. 사건 발생 초기 현지 매체들은 현장의 관람석이 무너지면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도했지만 구조당국은 “단순히 지나치게 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 생긴 압사 사고”라고 밝혔다.
2020년 이천 물류창고 대형화재 발생
2020년4월29일 경기도 이천의 한 물류창고 공사현장에서 불이 나 최소한 38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불은 이날 오후 1시 32분께 이천시 모가면의 물류창고 공사현장 지하 2층에서 시작됐다.
소방당국은 신고 접수 이후 진화작업에 나서 화재 발생 5시간여만인 오후 6시 42분에 불을 모두 껐다.
불이 진화된 뒤 본격적으로 진행된 인명수색을 통해 오후 9시 현재 사망자는 38명으로 파악됐다. 중상자는 8명이며 경상자는 2명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지하 2층 화물용 엘리베이터 주변에서 우레탄 작업과 엘리베이터 설치 작업을 하다가 불길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지하 1, 2층과 지상 2, 3, 4층에서 작업하던 근로자들이 출구로 몰리면서 사망자가 늘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이곳에서는 전기, 도장, 설비, 타설 등 분야별로 9개 업체 70여명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샌드위치 패널 등 가연성 소재에 불이 붙어 불길이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퍼졌고 연기가 많이 발생한 점도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소방당국 관계자는 "발화 직후 폭발적 연소 및 연기 발생으로 근로자들이 탈출 시간을 상실했기 때문에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며 "사망자들의 옷이 모두 탄 사례가 많아 연소가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엄청난 유독가스가 뿜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015년 중국 상하이 윤봉길기념관 재단장
1994년 중국 정부가 65㎡(약 20평) 남짓한 부지를 제공해 설립된 매헌기념관은 그간 전시물이 낡고 자료가 부족해 윤 의사의 정신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보훈처는 훙커우구 측과 협력해 2014년 말부터 1억5000만원을 들여 개·보수에 나섰다. 공원 입구부터 ‘윤봉길 기념관’이란 한국어 안내판을 걸고, 윤 의사의 업적과 일대기를 다룬 영상물과 옥외 전시물을 제작했다. 중국 정부 역시 기념관 주변 부지를 2500평까지 늘려주었다.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 겸 상해사변 전승축하 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에 장착한 폭탄을 던져, 참석한 주요인사들을 폭살했다.
참석자중 상해 파견 일본군 시리카와 대장, 상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이 즉사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타,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총영사 무라이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직후 체포된 윤의사는 5월25일 상해 파견 군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1월 18일 일본 오사카의 한 형무소로 옮겨졌고 12월 18일 가나자와 형무소로 옮겨져 이튿날 총상형에 처해져 순국했다. 본명은 우의, 아호는 매헌이었다
2012년 6·25 마지막 승전 전투영웅 故 김한준 대위 육군장 별세
6·25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승전(勝戰)해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고(故) 김한준(83) 예비역 대위의 장례가 육군장(葬)으로 엄수된다.
육군은 지난달 29일 노환으로 별세한 김 예비역 대위의 장례를 1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육군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육군은 작년 10월 육군장 대상 중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중 전사(戰死)한 자'를 '태극무공훈장 수훈자'로 개정했다. 개정 후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중 육군장을 치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중 육군 출신은 총 64명으로, 이 중 15명이 생존해 있다.
고 김 예비역 대위는 1947년 자원입대했다. 6·25전쟁 당시 7사단 8연대 소속으로 평양입성작전에 참가했고, 1950년 11월 15일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했다. 7사단 8연대 1중대장으로 1953년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강원도 화천(당시 철원) 북방 425고지 전투에 참가했으며, 60㎜ 박격포를 이용해 1개 중대 병력으로 중공군 1개 대대를 섬멸하는 대전과를 거뒀다. 이 전투는 6·25전쟁사(史)에서 마지막으로 승리한 전투로 기록돼 있다. 정전 후 1953년 12월 9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김 예비역 대위를 경무대로 초청해 직접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2012년 4성장군출신 이한림 前 건설부 장관 별세
軍의 정치개입에 반대했던 창군 주역
1961년 5·16 당시 1군 사령관으로 군의 정치개입에 반대하다 강제 예편됐던 이한림(李翰林·91) 전 건설부 장관(예비역 육군 중장)이 29일 0시30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함경남도 안변 출신인 이 전 사령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만주 신경군관학교,일본 육사 동기생이다. 그는 해방 이후 국방경비대 중대장 등을 역임하며 창군(創軍)에 기여했다.
6·25전쟁 때엔 9사단장으로 금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격퇴, '철의 삼각지대' 확보에 큰 공을 세워 우리 군 최고 훈장인 태극무공훈장과 미군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9사단장 시절 한 번 결심하면 그대로 밀고 나간다 해서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수도권 북단의 전략 요충지를 책임지는 6군단장에 임명됐다. 고인은 여당의 이기붕 후보가 낙선한 당시 부통령 선거에서 엄정중립을지킨 것(6군단 이기붕 득표율 35%)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보복 인사조치로 현직 군단장이 국방대학원에 입교하게 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절인 1960년 3·15 부정선거 때에도 상부와 기관의 집요한 협조 요청을 거절했다. 당시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육사교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라"는 전화를 받은 이 전 사령관은 "육사에 계속 머물게 하거나 군복을 벗기거나, 군사령관으로 보내거나 셋 가운데 하나 외에는 응할 수 없다. 내가 정도를 걸었는데도 교장직을 해임한다면 사관생도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송 총장에 맞섰다고 한다.
1960년 10월 1군사령관으로 부임한 고인은 1961년 5·16을 맞아 일본 육사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던 박 전 대통령과 맞서게 된다. 당초 쿠데타군을 진압하려 했던 이 전 사령관은 진압 과정에서 자칫 내전으로 번지면 북한의 남침을 불러올 것을 우려해 진압을 포기했다. 고인은 결국 '반혁명 주범'으로 구속돼 61년 8월 24일 강제 예편된다. 그의 체포 과정에서 쿠데타군 장교가 권총을 들이대며 '항복'을 강요하기도 했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고 호통을 치는 기개를 보였다.
고인은 그 뒤 미국으로 추방됐다가 귀국 후 감금생활을 했고, 박 전 대통령의 회유 등에도 굴하지 않고 한동안 군사정권 동참을 거부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거듭된 간곡한 요청에 따라 1963년 수자원개발공사 사장을 맡아 설립에 기여했다. 이어 진해화학 사장(1968년), 건설부 장관(1969년), 관광공사 사장(1972년), 터키·호주 대사(1974~80년) 등을 지낸 뒤 모든 공직을 떠났다.
2011년 영국 왕실 세기의 결혼식
2011년4월29일 치러진 윌리엄 왕세손과 캐서린 빈의 결혼식은 단순한 왕실 결혼 이상이었다. 찰스 왕세자와 고(故) 다이애나 결혼 이후 30년 만에 세계인의 이목이 영국왕실에 집중된 순간이었다.
이날 오전 10시 15분 붉은 군복을 입은 신랑 윌리엄 왕세손이 동생 해리 왕자와 함께 벤틀리 승용차를 타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향하면서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영국 왕족, 세계 50여 개국 정상 등 하객 1900명은 오전 8시 15분부터 식장에 입장해 신랑 신부를 기다렸다. 이들은 이 귀한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휴대폰을 꺼내 결혼식장 주변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전 11시 결혼식이 시작됐다. 캐서린은 주례를 맡은 영국 성공회 수장 로완 윌리엄스 대주교 앞에서 "윌리엄을 사랑하고 위로하며 존경할 것"이란 '결혼서약'을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주례의 성혼선언이 끝난 후 캐서린은 성당 입구에 있는 무명용사 묘비를 지나 윌리엄 왕자와 함께 사륜마차에 올라탔다. 이 마차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국빈을 맞이할 때 쓰는 '스테이트 랜도'로 1902년 제작됐다. 1981년 찰스 왕세자와 고(故) 다이애나 빈도 결혼식 후 퍼레이드를 할 때 이 마차를 탔다.
12시 23분 신랑 신부를 태운 마차가 버킹엄궁으로 들어가고 1시간 뒤, 신랑 신부가 버킹엄궁의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자 힘찬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첫 키스가 너무 짧다며 사람들이 "다시 한 번!"을 외치자 부부는 좀 더 길게 입을 맞춘 뒤 환하게 웃었고, 결혼식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발코니 키스가 진행되는 사이 영국 공군기들이 버킹엄궁 상공을 축하 비행하는 이벤트로 결혼식은 끝났다.
2004년 박태영 전남지사 투신자살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재직 시절 인사 및 납품 비리 연루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아오던 박태영 전남지사가 2004년 4월 29일 낮 12시48분쯤 서울 반포대교 중간 지점에서 한강에 투신, 사망했다.
박 지사는 이날 변호사 등과 검찰 조사에 대비한 회의를 마치고 동부 이촌동 자택으로 가기 위해 반포대교를 건너던 중, 남단에서 북단 방향 630m 지점에서 운전기사 임모씨에게 차를 세우게 한 뒤 한강에 뛰어들었다. 운전사 임씨는 경찰조사에서 “반포대교 중간 지점에서 박 지사가 ‘토할 것 같다. 바람 좀 쐬고 싶다’고 해 차를 세웠다”며 “난간에 잠깐 기대는가 싶더니 사라졌다”고 말했다.
박 지사는 2000~01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인사·납품 비리에 연루된 혐의로 서울남부지검에서 지난 이틀간 조사를 받았으며, 이날 오전 11시 사흘째 조사가 예정돼 있었다.
박 지사는 그러나 이날 오전 내내 심한 구토 증세로 검찰 출두를 오후 3시로 연기한 뒤 집을 거쳐 병원에 들를 계획이었다. 박 지사의 자살 소식에 박 지사가 입당을 추진했던 열린우리당은 ‘개인적인 비극’이라는 반응인 반면, 박 지사의 전 소속 정당인 민주당은 ‘노무현 정부의 분열적, 파괴적 리더십이 낳은 희생양’이라는 반응이었다.
2004년 애국지사 장봉숙 선생 별세
애국지사 장봉숙(張鳳塾·84) 선생이 29일 오후 8시 5분 담도암으로 별세했다.
경북 울진 출신인 선생은 1941년 11월 울진에서 독립단체인 창유(暢幽)계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부산에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발언을 하다 1943년 12월 일경에게 체포됐다.
1986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04년 윤봉길 의사 의거 72주년 맞아 자작한시(漢詩) 번역서 출간
매헌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왕 생일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진 의거가 72주년을 맞는 2004년 4월 28일 윤 의사가 자작한 한시(漢詩) 번역서가 출간됐다.
윤 의사가 의거 하루 전인 1932년 4월 28일 의거 장소를 사전답사하고 지은 한글시 ‘훙커우 공원을 답청(踏靑)하며’는 그 같은 대사를 앞둔 스물네 살 청년의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에 더해 서정이 가득하다.
“처처(凄凄)한 방초(芳草)여/ 명년에 춘색(春色)이 이르거든 왕손(王孫)으로 더불어 같이 오세// 청청(靑靑)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방초여/ 금년 4월 29일에/ 방포일성(放砲一聲)으로 맹세하세.”
‘시인 윤봉길과 지인(知人)의 서정시 340수’(역사공간, 진영미·김승일 역)가 의거 기념일을 맞아 출간돼 서정 시인으로서의 윤 의사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 번역서는 보물 568호로 지정돼 충남 예산의 윤 의사 생가인 충의사에 전시 중인 시문집 다섯 편 중 ‘명추(鳴椎)’ ‘임추(壬椎)’ ‘옥타(玉唾)’ ‘한시집(漢詩集)’에 수록된 한문 시들을 처음 우리 말로 번역한 것들이다.
2004년 다목적 실용위성 `아리랑 2호` 본체 핵심부품 국산화 작업에 성공, 세계 최고 수준의 고정밀 관측 가능
2003년 근무중 얼굴흉터 남녀보상 똑같도록 국무회의 시행령 개정
앞으로 근무 중 사고로 생긴 얼굴 흉터에 대해 남자와 여자 모두 같은 장애등급(7급)과 보상을 받게 된다. 지금까지 산업재해로 얼굴에 똑같은 흉터가 남아도 여성은 7급, 남성은 12급의 장애등급이 인정돼 남녀 간 보상액수가 4배 차이가 났다.
정부는 29일 청와대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이 내용을 골자로 한 ‘산업재해 보상보험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개정안은 또 2000만원 미만의 소규모 건설공사라 해도 면허 소지자에 의한 공사이거나 각종 법인이 상시 5인 미만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농업·임업·어업·수렵업에 대해선 산업재해보상보험의 적용을 받도록 했다.
국무회의는 또 각 부처가 운용하고 있는 총 7520개 규제의 존폐 여부를 전면 재검토하고, 내년부터 부처별로 1개 분야를 선정, 해당 분야 규제를 일괄 폐지한다는 ‘2003년도 규제개혁 추진 지침안’ 도 채택했다.
2003년 ‘제2건국위원회’ 4년 6개월 만에 해체
2003년 4월 29일 제2건국위원회가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제8차 전체회의를 열고 ‘활동마감’을 공식 결의했다. 1998년 10월 김대중정권하에서 출범한 이후 4년6개월 만에 깃발을 내린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 광복절 축사에서 ‘제2건국운동’을 주창한 뒤, 그해 10월 창립된 제2건국위는 전국 205곳의 추진위와 1만명의 추진위원을 두고 있으나 성과가 없어 존폐 기로에 몰렸었다. IMF환란 극복에 온국민이 힘을 쏟고 있던 1998년 9월, 대통령 말 한마디로 제도·의식·생활 등 3대개혁을 하겠다며 제2건국위가 출범했다. 그러나 곧 제2건국위는 정책 과정 수행 중 관(官)을 뒤에 두고 민(民)을 앞세우는 대중쇼의 대표적인 단체라는 비판을 들어야했다.
이날 회의는 각계 원로와 주요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당당하게 출범하던 때와는 달리, 교수들과 시민운동가들이 대거 불참하는 등 참석 대상 500여명의 위원들 중 300여명만 참석했다. 제2건국위의 해체를 두고 4년 반 활동 내역에 대해 철저한 감사와 엄정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1999년 여성산악인 지현옥, 안나푸르나봉 등정 후 하산 중 실종
여성산악인 지현옥이 1999년 4월 29일 안나푸르나봉을 등정하고 하산하다 실종됐다.
지현옥은 1959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청주 서원대 미술교육학과에 입학하면서 산과 인연을 맺었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전문 산악인의 길로 들어서 1988년 한국 여성 최초로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를 등정했고, 1989년 안나푸르나(8,091m), 1990년 캉첸중가(8,586m) 원정에 참가했다.
1991년에는 서원대 산악부 원정대장으로 나서 우리나라 산악인 최초로 중국 쿤룬산맥의 무즈타그아타(7,546m)를 등정했으며, 1993년 5월 10일에는 ‘한국여성 에베레스트원정대’의 등반대장을 맡아 최오순, 김순주 대원과 함께 마침내 히말라야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에 올랐다.
1997년 가셔브룸1봉(8,068m)을 등정한 데 이어 1998년에는 세계 여성 최초로 가셔브롬2봉(8,035m)을 단독 등정했다. 이때까지 그녀는 한국 여성 산악인으로서 히말라야 고산등반에 관한 한 독보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1999년 4월 29일 엄홍길 대장과 함께 캠프3을 떠나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랐으나 하산 도중 해발 7,800m 지점에서 실종됐다. 그녀의 나이 40세였다.
지현옥이 실종되기 이전까지 국내 여성 산악인 가운데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고산 등반을 해본 사람은 있지만, 그녀처럼 지속적으로 고산 등반을 추구해 온 여성 산악인은 없었다. 그녀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실종 후인 1999년 가을 ‘올해의 산악인상’을 수상하고, 2000년엔 체육훈장 백마장을 받았으며, 2012년엔 대한민국 산악계를 빛낸 50인에 선정됐다.
서원대학교 내에는 그녀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으며 충북산악연맹은 그녀의 뜻을 기리고 추모하기 매년 추모제를 열고 있다. 그녀가 대학 산악부 시절 주로 훈련한 장소였고, 가장 좋아했던 문경 조령산 정상에는 그녀의 추모비가 있다. 이 비는 서원대 산악부에서 세운 것이다.
1997년 화학무기 금지협약(CWC) 발효
1992년 LA 흑인폭동으로 58명 사망, 2천383명 부상
LA 폭동은 ‘로드니 킹 사건’이 촉발했다. 흑인청년 로드니 킹을 백인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현장이 TV로 공개되면서 피소된 사건이다. 하지만 흑인은 한 명도 없이 백인 10명을 포함한 배심원 12명은 4월 29일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을 냈다.
이날 저녁부터 흑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주방위군 6000명과 연방군 1000명이 사태를 장악하기까지 58명이 사망하고 2,383명이 부상했으며 3010명이 연행됐다. LA 폭동은 근본적으로 백인 주류사회에 대한 증오의 폭발이었다. 인구 12%를 차지하는 흑인들은 열악한 생활여건에 시달려왔다. 흑인 가구당 수입은 미국 평균치의 60%밖에 안되고, 실업률은 2배를 넘었다. 25년 동안 공화당 행정부 아래 지속된 ‘가진 자만을 위한 보수적 인종정책’이 갈등을 부채질했다. 그로인해 교포들만 애꿎게 집중적인 화를 입었다. 재산피해 3억달러로 총 피해액 5억500만달러의 절반을 넘었다.
흑인촌도 불사하는 억척스러움이, 그리고 흑인촌에 코리아타운이 인접한 게 ‘죄’였다. 코리아타운은 폭도들에게 초토화됨으로써 북쪽 백인 주택가에 불똥이 튀지않게 하는 방화벽 구실을 했다. 미국 언론은 경찰력이 보호해주지 않는 가게를 지키려고 총격전도 불사하는 한인들을 클로스업하면서 사태를 한-흑갈등으로 보도하려는 경향마저 보였다.
1991년 방글라데시, 시속235Km태풍 강타 20여만명 사상
1991년 남북단일팀,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
1991년 4월 29일 남북이 하나 되어 세계를 제패했다. 이날 일본 지바현(千葉縣) 닛폰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결승전. 최초의 남북 단일팀인 `코리아`가 7000만 동포의 관심 속에 녹색테이블의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대는 대회 9연패를 노리는 중국이었다. `마녀` 덩야핑이 버티는 `철옹성`이었지만 출발은 상큼했다.
제1, 2단식에 나선 유순복과 현정화가 덩야핑과 가오준을 각각 꺾어 2-0으로 앞서 나갔다. 다음은 환상의 복식조 이분희-현정화. 남북 단일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믿었던 현-이 조는 덩야핑-가오준 조에 2-1로 역전패했다. 이어 현정화도 제4단식에서 패해 2-2로 승부는 원점.
마지막 단식에 나선 유순복의 어깨에 `코리아`의 우승여부가 걸렸다. 유순복은 변칙공격의 명수 가오준과의 첫 세트를 과감한 백드라이브로 21-19로 이겼다. 유순복은 2세트도 13-17로 끌려가던 경기를 21-19로 뒤집으며 승리, 코리아팀에 감격적인 우승을 안겼다.
단체전 우승은 1973년 사라예보 승전보 이후 18년 만이었다. 시상식서 한반도를 그린 `단일기`가 오르고, 단일팀 단가인 아리랑이 연주되자 1000여 응원단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코리아팀 우승은 남북이 하나되어 이룩한 쾌거였고, 남북청소년축구 단일팀 출전으로 이어져 한반도 화해무드 조성에 큰 몫을 했다.
1989년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세르지오 레오네 사망
1987년 시화지구 간척사업 착공
1986년 고리원자력발전 4호기 최초 발전
1985년 서울서 태평양경제협력회의 개막
1982년 폴란드, 구속자 1천명 석방
1981년 언론중재위원회 업무 개시
1980년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사망
히치콕은 독창적 영상기법으로 현대인들의 불안·공포 심리를 세련되게 다뤄온 영상의 마술사다.
몇 가지 점만 유념하면 대번에 그의 영화임을 알 수 있는 것도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카메오와 맥거핀)MacGuffin) 기법이 등장하는 서스펜서 스릴러, 게다가 미남배우와 금발의 여배우가 주연을 맡고 흑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100% 히치콕 작(作)이다. 히치콕은 150kg의 거구이면서도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는 것을 즐겼고, 줄거리를 좇는 관객들이 헛다리를 짚도록 속임수를 쓰는 맥거핀 기법도 보편화시켰다.
1899년 영국에서 태어난 히치콕은 1925년 ‘기쁨의 정원’ 으로 데뷔해 1976년 ‘가족의 음모’ 를 찍을 때까지 52년 동안 53편의 장편 극영화를 남겼다. 무성에서 유성영화로, 흑백에서 컬러영화로 20세기 영화계를 풍미한 당대 최고의 감독이었다. 그는 배우에 대한 거침없는 독설로도 유명하지만 히치콕 영화에 대한 논문의 제목을 모아놓은 책이 발간될 정도로 영화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21세기까지 이어오고 있다
1980년 부산 동국제강 종업원 1000여명 임금, 상여금 인상 요구 농성 끝에 방화, 파괴
1980년 동양 최대의 대웅전 `설법보전` 충북 단양 구인사에 세워져 낙성
1979년 서울서 제8회 세계여자농구대회 개막
1978년 고리원자력발전 1호기 상업운전 시작
국내 첫 원자력발전소인 부산 기장군 한국전력 고리원자력본부의 고리원전 1호기가 1978년 4월 29일 상업운전에 들어갔다.
고리원전 1호기는 87개월에 걸친 공사끝에 1978년 7월 20일 준공됐으나 당시 심각한 전력난 해소를 위해 준공전인 이날부터 상업운전을 시작하게 됐다.
외자 8백40억원 등 총 1천5백60억원의 공사비가 든 고리원전 1호기는 발전 시설용량 58만7천kw의 가압경수로형으로서 당시 국내 기술이 전무해 미국의 웰코사가 전반적인 건설책임을 지고 원자로 설비와 연료공급을 맡았고 영국의 제너럴일렉트릭사가 터빈 발전기 공급과 토건공사의 감독을 맡았다.
우리나라는 고리원전 1호기 가동으로 세계에서 22번째 원전보유국이 됐다.
1975년 주월(駐越) 한국대사관 사이공 철수
1975년 3월 월맹군이 베트남에 대해 총공세를 감행한다. 티우 대통령이 하야(4월21일)하고 베트남 전역이 무법천지로 돌변하면서 주월(駐越) 한국대사관도 철수준비를 서두른다.
4월26일, 한국에서 파견한 2척의 LST함에 교민들을 실려보내 1차 고비는 넘겼지만 상황이 급박해지자 4월28일, 한국 대사관은 전원철수를 결정한다. 국기를 내리고 통신기기와 비밀서류를 소각했다. 100여 명이 탄손누트 공항을 통해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전해져 희망을 주었으나 곧 공항도 파괴돼 의지할 것이라곤 미군 헬기 뿐이었다.
29일 날이 밝았다. 집결지는 미 대사관 후문 헬기장. 이미 3000여명의 각국 난민들로 통제불능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다행히 오후 4시부터 미군 헬기가 난민들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것이 목격됐다. 교민탈출을 위해 미국측과 만반의 준비를 다 갖췄다고 판단한 김영관 대사 일행은 오후 6시경, 헬기를 타고 미 대사관을 떠났다.
월남 패망일인 4월30일 새벽 4시15분, 밤샘한 일부 교민이 헬기로 미 대사관을 벗어나고 마지막 남은 9명의 공관원과 165명의 교민들이 마음을 조아리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4시30분, 이륙하는 헬기만 보일 뿐 착륙하는 헬기는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생명선이 끊긴 것이다. 사이공에 내버려진 교민들은 1년 안에 모두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들의 철수를 도왔던 이대용 공사와 서병호ㆍ안희완 영사 세 사람은 현지 감옥에서 5년간을 더 보내야 했다. 이들은 1980년 4월 12일에야 마침내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았다.
1972년 남북직통전화 비공식 개통
1969년 나시루딘 말레이시아 국왕 내한
1968년 미국, 흑인들의 `빈자(貧者)의 행진` 시작
1967년 김일, 레슬링 세계 헤비급 챔피언 등극
전남 고흥의 섬마을에서 태어난 김일(1929~2006)은 젊어서 유명한 씨름꾼이었다. 체구도 183㎝, 90㎏이나 되어 당당했다.
1956년 어느 날, 김일은 여수에서 우연히 본 일본의 한 잡지에서 역도산(1924~1963)과 관련된 기사를 읽고 그의 제자가 될 것을 결심했다. 김일이 아내와 아이들을 집에 남겨둔 채 시모노세키로 건너간 것은 1956년 10월이었다.
김일은 역도산 도장 문하생 제1기 제자로 입문했다. 훈련은 온 몸이 매일 상처투성이가 될 정도로 힘들었다.
김일은 1958년 5월에 데뷔했다. 초반 성적은 좋지 않았다. 일찍부터 평양 박치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던 역도산은 “너는 조선 사람이니 박치기 기술을 익혀라”라며 박치기를 권했다. 야구광이었던 김일은 일본 프로야구의 강타자 왕정치의 외다리 타법을 보고, 한 손으로 머리를 잡고 한쪽 다리를 들었다가 상대의 머리를 내리찍는 박치기 자세를 완성했다. 기술 종류도 늘려 박치기 외에 헤드시저스와 드롭킥을 익혔고 상대 선수를 만(卍)자로 감는 ‘코브라 트위스트’도 연마했다.
1963년 9월 김일은 역도산의 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열리는 WWA 세계 태그챔피언대회에 도전장을 냈다. 시합 하루 전인 12월 9일 일본에서 역도산이 칼에 맞았다는 전화가 미국으로 걸려왔으나 다행히 경미하다는 말을 듣고 시합에 나가 일본의 모토와 조를 이뤄 WWA 세계 태그챔피언이 되었다.
김일은 1965년 6월 일본이 아닌 한국으로 귀국했다. 8월 11일 장영철, 천규덕 등과 함께 극동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전에 출전했다. 국내파 장영철이 2회전에서 패해 그동안 국내에서 쌓아 온 70연승에 제동이 걸린 것과 달리 김일은 챔피언이 되었다. 그것은 한국 레슬링의 맹주가 장영철에서 김일로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일은 1966년 12월 도쿄에서 아시아 태그챔피언에 오른 뒤 여세를 몰아 마크 루인 WWA(세계레슬링연맹)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게 도전장을 냈다.
루인은 1966년 10월 루 테즈를, 1967년 3월 복면의 디스트로이어를 물리친 세계 최고 선수였지만 김일은 1967년 4월 29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대회에서 박치기로 그를 물리쳐 세계 정상에 올랐다. 한국 프로레슬링 사상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탄생한 것이다.
김일의 프로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이면 사람들은 너나 없이 동네에 하나뿐인 흑백TV 앞에 모여들었다. 초반엔 늘 상대편의 잔악무도한 반칙에 당하다가도 꼭 막판 박치기 한방으로 내로라 하는 거구의 서양 선수들을 일거에 거꾸러뜨리는 김일의 모습에 국민들은 환호하고 열광했다.
김일은 1980년 5월 제주도에서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그동안 3,000여 회의 경기를 치르고 세계 타이틀을 20차례나 방어했다. 은퇴 후 김일은 레슬링 후유증과 스트레스 때문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 2006년 10월 26일 운명했다.
1965년 도미니카의 쿠데타, 내란으로 발전
1964년 한국-인도 무역협정 조인
1961년 충주비료공장 준공
1961년 4월 29일 충주비료공장이 착공 5년8개월 만에 준공됐다. 정부수립 이후 비료공장을 건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는 지난 1955년 5월 13일 미국 맥크로 하이드로 가본회사와 ICA(미국국제협력기구)차관자금 1천9백55만달러와 내자 15억환을 들여 한해에 요소비료 8만5천t을 생산하는 공장을 짓기로 계약을 체결했으나 완공하는데 든 건설비는 외자3천1백54만3천달러와 내자 27억5천만환이다.
이는 계약 당시보다 외자 56%, 내자 54%가 늘어난 것이다. 이밖에도 30개월을 기한으로 한 기술용역 계약체결로 인건비 2백만달러를 포함한 계약상의 경비 5백13만5천달러가 더 들었다. 이 때문에 요소비료 t당 생산비가 시가 7만9천환을 훨씬웃돈 13만2천환으로 올랐다.
1956년 프랑스군, 인도차이나서 완전 철수
1951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사망
논리학과 언어 분석을 통해 난해하고 사변적인 전통 철학을 폐기하고자 한 이단아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이면서 이론과 개인적 삶 모든 측면에서 수수께끼와 신비로 가득찬 인물이었다.
오스트리아 철강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점, 자신이 설계한 누나의 집이 오늘날 건축사 교과서에 소개될 정도로 건축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점, 음악가 집안의 자식답게 음악에도 전문가였던 점, 자신의 연구에 몰두할 때는 노르웨이와 아일랜드 등의 시골에 묻혀 은둔자로 보낸 점, 철학에 방해가 된다고 막대한 유산을 형과 누나에게 준 점, 그의 저서 `논리철학 소고`에서 모든 철학적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해 직업 철학자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에 귀향해 6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생활한 점 등 어느것 하나도 신비롭지 않은 삶이 없었다.
러셀은 철학적 능력에 대해 자신을 갖지 못했던 비트겐슈타인을 철학으로 인도하고 가르친 스승이었지만, 후에는 자신이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웠음을 고백할 정도로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 지성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독특한 철학자였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계를 떠났다가 두번째이자 마지막 책인 `철학적 탐구`를 통하여 자신의 초기 이론을 비판하면서 영국 케임브리지로 되돌아 올때 경제학자 케인즈는 "신이 도착했다"라고 환영할 정도였다. 단 두권의 책으로 두 철학적 조류, 그것도 상충하는 두 조류를 구성했다. 전통적인 사변철학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이론 자체는 어느 철학적 이론보다도 난해했다.
1950년 국립극장(서울특별시의회 의사당)에 창설
1950년 4월 29일 미군이 오락장으로 사용하던 1천9백97석의 옛 경성부민관(舊 경성부민관 : 현 서울시의회 의사당)건물에 국립극장이 개관됐다. 광복이후 줄기차게 이어진 무대예술인들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였다.
첫 무대에 오른 작품은 유치진의 `원술랑`. 1주일간 무려 5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국내 최초의 창작 오페라인 현제명의 `춘향전`도 이 시기에 초연됐다. 영화 관람료의 3배나 될 정도로 비싼 관람료에도 공연마다 표를 사려는 인파가 광화문 네거리와 덕수궁까지 뻗칠 정도였다.
그러나 문을 연지 채 두달도 못돼 발발한 6.25와 계속된 공연 실패는 국립극장의 위상을 흔들어 놓았고 국립극장은 문화예술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3년 10월 17일 현재의 장충동으로 자리를 옮겨 장충동시대의 막을 열었다
1944년 포루투갈의 대통령(1915~1917, 1925~1926) 마샤두 사망
1932년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공원서 일왕 생일 경축식에 투탄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 겸 상해사변 전승축하 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에 장착한 폭탄을 던져, 참석한 주요인사들을 폭살했다.
참석자중 상해 파견 일본군 시리카와 대장, 상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이 즉사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타,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총영사 무라이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직후 체포된 윤의사는 5월25일 상해 파견 군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1월 18일 일본 오사카의 한 형무소로 옮겨졌고 12월 18일 가나자와 형무소로 옮겨져 이튿날 총상형에 처해져 순국했다. 본명은 우의, 아호는 매헌이었다.
1908년 광무 신문지법 개정
1901년 히로히토 일왕 출생
1899년 빅 밴드 재즈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미국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듀크 엘링턴 출생
1886년 미국-일본 범인인도조약 조인
1864년 캐나다 열차 탈선 사고로 60명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