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정순(定順)왕후 생애와 발자취
정순(定順)왕후 태생지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동편마을)
1440년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현 칠보면)에서 태어났으며,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영돈녕부사로 추증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 송현수를 따라 한성부로 이사하였다
1454년 2월 19일(음력 1월 22일)에 열 다섯의 나이로 한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일임하고 상왕이 되자 왕대비가 되어 의덕(懿德)의 존호를 받았다
그러나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의덕왕대비는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친정마저 풍비박산 난 상태였던 그녀는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청룡사 (서울시 종로구 동망산길 65, 숭인동 17-1)
922년(고려 태조5) 태조 왕건의 명으로 창건하고 비구니 혜원을 입산시켜 안주하게 한 곳이다
고려 건국에 대한 예언을 한 도선이 이 씨 왕조가 일어날 한양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지으라고 한 절 중 하나다
1457년(세조3)에 영월에 유배되었던 단종이 죽자,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는 이 절에 머물며 매일 절 북쪽 산봉우리(동망봉)에 올라 영월 쪽을 향해 단종을 추모하면서 수 십년의 여생을 보냈다
1771년(영조47)에 영조는 정순왕후가 머물던 이곳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우고 절 북쪽 산봉우리에는 동망봉(東望峰)이라는 친필 표석을 세웠다
영조가 절 내에 ‘정업원구기’라는 비석을 세운 뒤부터 절 이름을 정업원이라고 불렀다
1813년(순조13)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수하였고, 1823년 순원왕후의 병세가 깊어지자 부원군인 김조순이 이 절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왕후의 병이 나은 뒤 김조순이 이름을 청룡사로 바꾸었다
1853년에(철종4)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이 중창하였다
삼각산 청룡사 현판
(여기까지 삼각산이 연결되나 보다?)
대웅전
심검당
명부전
산령각
바깥쪽 현판은 청룡사이고,
안쪽 현판은 우화루이다
우화루(雨花樓)는 유배지로 떠나는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가 마지막 밤을 보냈다는 곳이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히 이별한 장소라는 뜻으로 영리정(永離亭)으로도 불렀다
정순왕후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자주동샘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9-471)
단종비 송씨(정순왕후)는 영월로 귀향간 단종을 애절하게 기다리며 세 시녀와 함께 정업원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명주를 짜서 댕기, 저고리 깃, 옷고름 등울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정업원에서 서쪽으로 300여 미터 떨어진 화강암 방위 밑에 샘물이 흘러 나오길래 이 물에 명주를 담갔더니 자주색물이 들었다고 한다
자주동샘 바로 옆에는 자줏물이 든 명주를 널어 말리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자지(紫芝)'란 자줏빛을 띄는 풀이름을 말한다
여인시장 (女人市場)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58길 30, 숭인동 242-1)
정순왕후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은 조정의 눈을 피해 먹을거리를 건네주고자 감시병 몰래 금남의 채소 시장을 열어 정순왕후를 돌봤다
신설동 동묘의 벼룩시장을 끼고 나오면 도로 한쪽에 옛 숭신초등학교(2015년 하왕십리동으로 이전, 현 다솜관광고등학교)가 보이는데 이곳이 조선시대에 여인들만 출입한 여인시장이 있던 곳이다
영도교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귀양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이다
당시 청계천에 놓인 다리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던 다리로 정순왕후로서는 자신이 나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까지 귀양 가는 낭군을 배웅한 셈이다
두 사람은 이후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단종이 끝내 유배지인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영도교를 건너면 더 이상 사랑하는 임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전해져 사람들은 '영원히 이별하는 다리'라는 뜻의 '영이별교'라고도 불렀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영도교를 궁궐 공사에 쓰려고 가져갔다
대신 그 자리에는 나무로 만든 다리가 놓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돌다리보다는 덜 튼튼해서인지 정마때마다 무너져버려 나중에는 사람들이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다니면서 한때는 ‘띄엄다리’로도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나무다리를 헐고 콘크리트로 새로 지었으나 1960년대 즈청계천 복개공사때 사라졌다
지금의 다리는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지은 것으로 2005년 9월 30일 준공되었다
부군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송씨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큰 바위를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하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이후 세조는 그녀에 대해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려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정업원 터 (서울시 종로구 동망산길 65, 숭인동 17-1)
조선 제6대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단종의 명복을 빌면서 살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자 이곳에서 단종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안녕을 빌었다
단종이 죽은 후 1521년(중종 16)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종의 명복을 빌며 평생을 보냈다
훗날 영조가 이곳이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게 되어, 1771년(영조 47)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워 표지로 삼도록 하였다
정업원의 이승(尼僧:비구니 스님)들은 대부분 사족(士族)들이었고, 주지는 왕족이었다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정면에는 “前峯後巖於千萬年 歲辛卯九月六日欽涕書(전봉후암어천만년세신묘구월육일흠체서) ”라 새긴 현판을 달았다
비각은 무익공계 양식으로 팔작지붕이다
실제 정업원은 동대문 밖에 아니라 궁궐 내에 있었다
이는 1771년(영조 47), 지금의 자리인 동대문 밖 연미동 청룡사를 영조가 과거 정업원 터라고 보고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고 친필로 써 정순왕후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기 때문인데, 이는 잘못된 정보였다
훗날 경혜공주 분재기도 발견되면서 당시 관련 여성들이 궁궐 내에서 공주직을 유지하며 지냈음이 공식적으로 재확인되었다
후일, 영조가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동망봉 근처 지역이 채석장으로 쓰였으며 그 바위는 깨어져나가버렸다
2011년 현재, 서울 종로구 낙산 근처인 이곳 동망봉 남쪽에는, 동망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들어서 있다
♤ 동망봉, 동망각, 동망정 (서울시 종로구 동망산길 150 일대, 숭인근린공원 내)
예전엔 봉우리 였겠지만 지금은 모두 깍여 운동장으로 변해 가늠 하기가 쉽지 않다
더더욱 영조임금의 친필로 새긴 동망봉이란 글씨를 일본사람들이 채석장을 하며 파괴해 버려 흔적도없이 사라져버렸으니 여기쯤 이겠거니 할 뿐이다
조선 말의 문장가이자 역사가인 김택영은 자신이 지은 야사에서 "신숙주가 그녀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아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정순왕후는 세조의 증손이자 단종의 종손뻘인 중종 (中宗) 16년인 1521년 7월 7일 (음력 6월 4일) 82세의 나이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1698년 12월 7일(숙종 24년 음력 11월 6일), 단종과 그녀는 복위되어 시호를 받고 종묘 영녕전에 신위가 모셔졌다
그녀의 별세 때에는 대군부인의 격에 따라 치러진 장례로 경기도 양주군(楊州) 군장리(群場里, 현재의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매장됐다
단종과 그녀의 복위로 종묘에 배향되면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했는데 이는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사모(思慕)한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그녀의 묘소 뒤편에 심은 나무들이 단종의 능안 장릉쪽을 향해 고개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한 때 전해졌다
사릉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 진건읍 사능리 108)
조선 6대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장릉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영흥리 1090-1)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왕릉
이전에는 노산군 묘(墓)로 불려왔다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이 추존복위됨에 따라 노산군 묘에서 장릉으로 승격되었다
남양주문화원에서 1999년 4월 9일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의 능(思陵)에서 가져와서 심은 정령송(精靈松)이 있다
이 정령송은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의 애절하고 슬픈사연으로 인해 두 영혼을 합치자는 뜻으로 심은 소나무이다
한때는 장릉과 사릉을 한 곳에 합치자는 방안이 추진되기도 했으나 지방자치단체 간의 이해가 엇갈려 무산되었다
장릉 주변의 소나무 모습이 그러하듯이 정령송도 장릉(莊陵)을 향해 고개 숙이듯 비스듬해 지고있다
¤ 순서는 탐방코스를 따르지 않고 정순왕후 삶의 여정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