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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을 쫓아내심(눅8:26-39)
◈ 원문강해 ◈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귀신을 제어하심
귀신까지도 예수께 복종하는 것은 주님의 권세가 현상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계에까지 미침이다. 본 장에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4가지의 기적이 소개된다. 축귀 사건은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적으로 귀신들도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1.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26-29절)
1)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
(oujk ejneduvsato iJmavtion kai; ejn oijkiva/ oujk e[menen ajll! ejn toi'" mnhvmasin.우크 에네뒤사토 히마티온 카이 엔 오이키아 우크 에메넨 알르 엔 토이스 므네마신;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7절)
예수님의 일행이 거라사인의 땅에 내렸을 때, 거기서 귀신들린 자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평행 구절인 마8:28은 귀신들린 '두 사람'을 만났다고 하여 차이점을 드러낸다. 이 문제는 누가가 현저히 귀신들린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Augu-stine, Calvin, R.Earle).
본문은 귀신들린 자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 '옷을 입지 아니하며'(oujk ejneduvsato ijmavtion우크 에네뒤사토 히마티온)라 했으니, 히마티온(ijmavtion옷)은 겉옷을 말한다. '입지'라는 뜻의 뜻을 동사 에네뒤사토(ejneduvsato)는 직설법 단순과거 중간태로 자신을 위하여 옷을 입는다는 말이다. 이를 우크(oujk)라는 부정어가 부정하고 있다.
둘째, '집에 거하지 아니하며'(ejn oijliva oujk e[menen엔 오이키아 우크 에메넨)라 했다. 에메넨(e[menen거하지)은 메노(mevnw머물다, 남다, 잔존하다)라는 동사가 직설법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되어 있다. 이는 귀신들린 자가 오래전부터 집에 거하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 말은 누가복음에서만 특별히 나타난다.
셋째,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ejn toi'" mnhvmasin엔 토이스 므네마신)라고 했다. 귀신들린 자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정상적인 모습을 잃는 것이 특징이다.
2) 귀신들린 자의 외침
(ajnakravxa" prosevpesen aujtw'/아나크락사스 프로세페센 아우토;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28절)
예수님을 본 귀신들린 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동을 취했다. '부르짓으며'(ajnakravxa"아나크락사스)라 했는데, 이는 괴로워 울부짓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리어'(prosevpesen프로세페센)라 했다. 이는 프로스핍토(prospivptw앞에 던지다, 부딪히다, 앞에 부복하다)가 단순과거 능동태로 쓰여진 것이다. 주님 앞에 경배드림으로의 엎드림이 아니다. 두려움의 표시로서 굴복하지 않을 수 없어서 엎드린 것이다. 귀신들린 자는 두려워하며 주님을 향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말한다.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표현임에 분명하다(눅9:20마6:16요6:69). 그러나 예수님을 지적(知的)으로 정확히 안다는 것이 곧 그분을 믿는 것은 아니다.
3) 귀신들린 자에게 명령하심
(parhvggeilen...ejxelqei'n ajpo; tou' ajnqrwvpou...eij" ta;" ejrhvmou".파렝게일렌…엑셀데인 아포 투 안드로푸…에이스 타스 에레무스;이는 예수께서…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29절)
귀신이 예수께 엎드리어 두려워하며 간구한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도록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행16:16-3919:18-34). 본문에서 '명하사'(parhvggeilen파렝게일렌)는 파랑겔로(paraggevllw명령하다, 지시하다)가 단순과거 능동태 3인칭 단수로 쓰인 것이다. 이는 주님의 명령이 권위있게 일회적으로 내려진 사실을 말하고 있다.
'∼로부터 나오도록'(ejxelqei'n ajpo엑셀데인 아포)은 엑세르코마이(ehxevrcomai나가다, 떠나가다)라는 동사가 단순과거 부정사로 쓰여 서술적인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몰려 나갔더라'(elauvneto엘라우네토)는 미완료 과거로서 이전에도 계속해서 여러 번 몰려 나갔음을 암시한다.
2. 군대 귀신이 쫓겨남(30-32절)
1) 귀신의 이름
(ejphrwvthsen...oJ de; ei&pen, Legiwvn,에페로테센…호 데 에이펜, 레기온;물으신즉…군대라 하니, 30절)
귀신들린 자에게 물으시는 것은 자기 의식을 불러 일으키려는 것이다(A.Plummer). '물으신즉'이란 말은 에페로테센(ejphrwvthsen)으로 이는 에페로타오(ejperwtavw묻다, 심문하다)의 직설법 단순과거 능동태 3인칭 단수이다. 주님께서 권위있게 심문하듯 일회적으로 물으신 사실을 말한다.
귀신들린 자는 그 이름을 레기온(Legiwvn군대)이라고 대답하였다. 군대란 로마의 군단에 해당하는 병력인데 아구스도 가이사 때에 1레기온은보병 6100명과 기병 726명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이순한). 그러니 이 귀신들린 자에게는 그만큼 다양하고 잡다한 악한 영들에 잡혀있었다는 것이며, 또 엄청나게 강한 힘으로 이 불쌍한 사람을 짓누르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2) 두려워하는 귀신
(kai; parekavloun aujto;n i{na mh; ejpitavxh/ aujtoi'" eij" th;n a[busson ajpelqei'n.카이 파레칼룬 아우톤 히나 메 에피탁세 아우토이스 에이스 텐 아뷔쏜 아펠데인;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1절)
귀신은 28절에서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했다. 이 말은 헬라의 관용어로서 '나를 가만히 두어라'라는 의미이다(삿1:9왕상17:18대하35:21). 그런데 여기서는 귀신이 두려워하는 중에 예수께 부탁하고 있다. 곧 무저갱은 아뷔쏜(a[busson)으로 부정어 아(a[)와 뷔도스(buqov"바닥)의 합성어이다. 곧, '바닥이 없는 장소'를 나타내는(창1:27:11;사51:10계9:1,20:3) 고대어로 70인역에 자주 나오는 말이다(A.T.Robertson).
'간구하더니'(parekavloun파레칼룬)는 파라칼레오(parakalevw요청하다, 간구하다)가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인칭 복수로 쓰여진 것이다. 이는 귀신이 반복하여 간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하지 마시기를'(i{na mh; ejpitavxh/히나 메 에피탁세)은 가정법으로 쓰여졌다. 에피탁세(ejpitavxh/하지)는 단순과거 가정법 능동태로 있을 수 있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귀신이 예수께 간구하였다는 것은 예수께서 심판의 주가 되신다는 점을 잘 알려주는 것이다. 귀신들도 그분의 권세를 거역할 수는 없다. 곧 예수님의 통치하에 있는 것이다.
3)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구함
( parekavlesan aujto;n i{na ejpitrevyh/ aujtoi'" eij" ejkeivnou" eijselqei'n: kai; ejpevtreyen aujtoi'".파레칼레산 아우톤 히나 에피트렙세 아우토이스 에이스 에케이누스 에이셀데인 카이 에페르렙센 아우토이스;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32절)
'허하시대'(ejpevtreyen에피트렙센)은 단순과거 가정법 능동태로 사용되었다. 이는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의 개연성을 포함하는데 '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뜻을 함축한다. 기본형은 에페트레포(ejpitrevpw맡기다, 위임하다, 허락하다)이다. '이에 허하신대'(kai; ejpevtreyen aujtoi'"카이 에페트렙센 아우토이스)에서는 에피트렙포 (ejpitrevpw허하신대)라는 동사가 단순과거 능동태 3인칭 단수로 사용되었다. 이는 주님의 권세로 간단히 허락하였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도록 한 것은 귀신들렸던 자에게 시각적으로 보여 줌으로 확신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Barclay). 또 2000마리나 되는(막5:13) 돼지 떼가 몰사한 사실은 남의 재산을 손상시켰다는 부정적 시각 이전에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 자유하게 되었고 구원받은 것을 더 가치있게 여겨야 한다. 이것이 문제되지 않음은 돼지 떼의 주인이 이 사건을 문제삼지 않음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3. 거라사인의 간청(34-39절)
1) 온전해진 환자
(swfronou'nta para; tou;" povda" tou' !Ihsou', kai; ejfobhvqhsan.소프로눈타 파라 투스 포다스 투 예수, 카이 에포베데산;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5절)
예수께서 귀신을 축출하심으로 인하여 마을로부터 사람들이 오게 되었다. 그들은 귀신이 쫓겨 나갔다는 점과 돼지들이 몰사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예수께 왔을 때에 본 것은 귀신에 잡혔던 자가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정신이 온전하여'(swfronou;nta소프로눈타)는 소프로네오(swpronevw정신을 차리다, 온전하다)라는 동사가 현재 능동태로 쓰였다. 현재 분사를 쓴 것은 마을 사람들이 보려고 나왔을 때에 그가 온전한 상태로 있었음을 나타낸다. '발 아래'(para; tou;" povda"파라 투스포다스)는 발 옆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온전하여 예수의 곁에 앉은 모습을 보고 두려워했다. '두려워하며'(ejfobhvqhsan에포베데산)라는 말은 단순과거 수동태로 쓰였으므로 이 사건으로 인해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려워진 것은 귀신을 축출한 놀라운 능력 때문일 것이다.
2) 떠나기를 구하는 마을 사람들
(a{pan to; plh'qo" th'" pericwvrou tw'n Gerashnw'n ajpelqei'n ajp! aujtw'n, o{ti fovbw/ megavlw/하판 토 플레도스 테스 페리코루 톤 게라세논 아펠데인 아프 아우톤 호티 포보 메갈로;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37절)
'근방의 모든 백성'(a{pan to; plh'qo" th'" pericwvrou하판 토 플레도스 테스 페리코루)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듣고 몰려나온 사람들을 일컫는다. 플레도스(plh'qo"백성)는 '무리, 회중, 큰 떼'를 나타낸다. 페리코루(pericwvrou근방)라는 말은 페리(periv∼에 대하여, ∼주변에)와 코라(cwvra지방, 경계, 마을)의 합성어이다. '떠나가시기를'(ajpelqei'n ajp j aujtw'n아펠데인 아프 아우톤)에서 아펠데인(ajpelqei'n)은 단순과거 부정사 목적격으로 사용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 달라고 한 것은 일상의 혼란을 염려하였기 때문이고, 생명의 문제보다는 재산을 더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W.Barclay, L.Morris, J.V.McGee).
3) 귀신들렸던 자의 일
(kai; ajph'lqen kaq! o{lhn th;n povlin khruvsswn o{sa ejpoivhsen aujtw'/ oJ !Ihsou'".카이 아펠덴 카드 홀렌 텐 폴린 케뤼쏜 호사 에포이에센 아우토 호 예수스;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39절)
귀신의 억압에서 자유하게 된 사람은 마을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를 원했다. 다만 그에게 한 가지 할 일을 일러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마을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온 성내에'(kaq o{lhn th;n povln카드 홀렌 텐 폴린)라는 문구에서 '온'(o{lhn홀렌)의 기본어는 홀로스(o{lo"완전한, 전부 갖춘)라는 말이다.
폴린(povlin성내)은 폴리스(povli"도시)의 목적격 여성 단수 명사이다. 귀신에게서 놓인 사람은 예수의 명령대로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전하며 온 성내를 다녔다. 아펠덴(ajph;lqen가서)은 직설법 단순과거 능동태 3인칭 단수로 그가 주님의 명령대로 단번에 간 사실을 보도해주고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조치는 기적을 행하신 후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 했던 종전의 태도와는 대조를 이룬다(눅5:14마8:49:30;17:9). 이는 이방 지역이기 때문에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이 우려될 만한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이다(L.Morris).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귀신들린 자를 고침(26-33절)
26절 이하의 설화에서 보이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축귀하신 것은 성령과 악귀의 싸움을 나타낸다(J.M.Robinson). 옛날 사람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정신적, 신체적 질병은 귀신때문이라고 생각했다(S.M.Gilmour). 아마도 이 사건은 갈릴리 바다 남동쪽으로 주변의 30마일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현대의 쿠르시(kursi) 근처의 비탈에서 일어난 사건일 것이다(V.Taylor).
27절의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는 35절의 영향을 받아 편집하여 꾸민 것이다. 전래의 민속에서 무덤은 귀신들린 자들의 특징으로서 언급되고 그런 것들은 이 설화의 분위기에 맞는 표현이다(S.M.Gilmour, C.F.Eva-ns). 귀신들린 사람의 행동은 랍비가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특징을 평가하는 것과 일치한다. 그는 밤에만 나가서 묘지에서 밤을 보내고 옷을 찢는 자이다(S.T.Lachs).
28절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귀신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상대가 누구인지 그 신분을 밝힘으로 자신의 더 강한 힘으로 상대를 압도하려는 귀신들의 대적을 암시한다(Robinson). 이름과 지위를 안다는 것은 싸움 당사자들에게 결정적인 무기였다. 때때로 그것은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안다'라는 형식으로 소개된다(4:34). 이 말은 신약에서 본문과 막5:7에만 있는데 이방 종교 형식을 사용한 기독론적 고백이다(C.F.Evans).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자'로 표현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구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뜻하는 경건한 유대인의 완곡적인 표현 방법이다(눅6:361:32;76). 70인역에서 그것은 주로 야훼를 뜻하는 비어스라엘사람들의 말이다(창14:18이하;민24:16사14:14단3:26). 그리고 그것은 헬라적 마술제문에서 발견된다(J.M.Hull). 이 구절은 헬라적 마술의 개념들과 언어로 만들어진 것이다(C.F.Evans).
29절의 '예수께서…명하사'는 시제가 미완료로서 반복적인 명령을 말하는데, 이것은 축귀의 어려움을 가리키는 것이다(C.F.Evans).
30절에서 예수는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주도권을 갖게 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혹자는 원래의 설화에서는 억지로 이름을 말하게 했던기록이 있었을 것이지만, 이 구절에서는 순순히 묻고 대답하는 것으로 나타냈다(R.Bultm-ann)고 주장하는데, 귀신은 온순하게 이름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J.Wellhausen, C.F.Evans). 군대(ajfevwntavi레기온)는 약 6,7천명에해당되는 숫자이다(S.M.Gilmour). 그 모습은 군대의 모습으로 힘과 사나움을 강조한다(C.F.Evans).
31절의 '무저갱'은 끝없는 심연이다. 이것은 깊은(깊은 바다) 또는 악한 영들이 종말까지 갇혀있게 될 지하의 감옥을 뜻하는 말이다(에녹1서 18-21절;계9:1계20:1,C.F.Evans C.F.Evans). 돼지가 뛰어 든 물은 종종 심연과 결합된다(E.E.Ellis). 귀신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명령하지 말기를 간구하는 것은 자신이 벌써 패배자가 되었음을 인정한 것이다(S.M.Gilmour). 축귀의 특별한 말씀이나 움직임은 없다. 뒤따르는 것은 요술의 일반적인 특징의 한 예로서, 그것의 외적 현상들을 보면 성공한 것 같다(M.Dibelius, R.Bultmann, J.Wellhausen).
32절 이하에서는 돼지 떼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 탈무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돼지를 기르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다. 돼지는 유대인에게 부정하고 금지된 짐승이었다. 갈릴리 호수 주변과 요단 건너편에는 이방인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그들이 키웠을 것이고 그들이 돼지의 주인이었을 것이다(S.M.Gilmour, C.F.Evans).
33절의 '비탈'은 절벽 내지는 급경사의 언덕이었을 것이다(S.M.Gilmour). 돼지들이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로 들어가는데 거라사는 게넷사렛 호수에서 약 30마일이상이 되는 거리이기 때문에, 돼지의 줄달음은 상당이 긴 것이었을 것이다(C.F.Evans).
2. 거라사 사람들의 반응(34-37절)
34절의 이하부터는 축귀의 결과에 대한 반응이다. 다른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이것의 결과는 축귀 사건만큼이나 길다. 만일 이것이 후대에 예수에게 전가된 세석 이야기의 장황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것은 그 사건의 이방 기원 때문일 것이다(M.Dibelius, Harnack).
35절의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는 누가의 편집자적 덧붙임으로 이것은 치료받은 귀신들렸던 자가 선생의 발 아래 있는 제자의 모양새이다(J.A.Fitzmyer). 이 모습은 그 사람이 가르침받는 데 개방되어 있음을 보이는것이다(E.Schweizer). '정신이 온전하여'는 사람의 원래 상태에 대한 재미있는 언급이다(J.A.Fitzmyer). 36절의 '구원받은'은 그 사람을 괴롭혔던 귀신으로부터 예수가 구원한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누가가 좋아하는 단어이다(J.A.Fitzmyer). 37절의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사람이'는 누가의 특색있는 과장된 표현으로, 일어난 일의 분위기는 공포 분위기이다. '크게 두려워하여'는 마가에 나오지 않는 말이다. 그것은 일의 결과를 나타내는 일상적인 표현이다(S.M.Gilmour). 사람들이 예수의 떠나기를 구한 이유는 그들의(경제적)손실 때문이다(막5:17).
3. 귀신나간 사람의 증거(38, 39절)
38절은 막5:18의 말이다. '보내시며'는 문자적으로 '그를 떠나게 했다'이다(J.A.Fitzmy-er). 39절의 '온 성내'는 어느 성인지 그것에 대한 정체를 누가는 밝히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거라사인의 땅 그방일텐데 마가는 데가볼리(막5:20)라고 지명을 밝힌다(S.M.Gilmour).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본문과 풍랑을 잠잠케 하신 기사와의 연결은 22, 23, 26절의 내용이 시간적 연속선상에 있음을 보여 주는 구절에 의해 입증된다(W.Hendriksen). 거라사 지역에서는 귀신들린자를 구원하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예수가 거라사로 가신 이유가 귀신들린 자를 고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W.L.Liefeld). 이러한 문맥 배역, 즉 자연에 대한 능력을 나타내는 사건과 사람을 회복시키는 기적의 사건을 나란히 언급하면서, 누가는 구약적 개념-하나님이 바다의 노도와 사람들의 고뇌를 잠잠케 하신다-을 예수에게 적용시키려고 한다(H.Marshall).
1.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26-29절)
거라사는 마8장에서는 '가다라'로 언급된다. 거라사는 이방인의 땅인데 호수의 동남쪽 약40km지점에서 위치하고, 가다라는 호수에서 동남쪽으로 약 9km지점에위치한다. 그런데 이 두 지명이 호수와 멀리 떨어진 것이 27절의 내용(상륙하자마자 광인을 만난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고 오리겐(Origen)은 호수 부근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이 무대이며, 그곳의 지명을 몰라서 근처의 큰 마을의 이름을 언급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거라사 지역의 지배가 미치는 곳으로 보면 무리가 없을것이다(C.L.Morris). 이곳의 현재 위치는 케르자(Kerzha)라는 곳으로 알려졌다(J.Ma-rshall, Lang). 한편 이 지역이 이방인 지역이라는 점이 누가에게는 좀더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누가 자신의 이방인 선교가 예수의 행위에 의 해서 정당화되는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Liefeld). 귀신들린 자는 예수 앞에 굴복한다. 하지만 이것은 경외함이 아니라 단순한 두려움에 의한 행동이다(Hendriksen). 누가는 귀신들린 자의 상황을 정확히 묘사한다. 자신이 의사였기에 정신 질환자와 귀신들려 미친 자를 정확히 구별하고 있다(Liefeld).
광인은 예수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29절). 이러한 고백은 제자들도 아직 모르고 있는 사실이라는 점에서 놀라움을 준다. 하지만 누가는 교묘하게 귀신들의 고백을 25절에 나타난 제자들의 의문에 비교시켜 예수의 정체에 대한 답변을 하고자하는 모습을 시도한다(Hendriksen).
2. 광인의 치유(30-33절)
귀신들은 자신의 이름을 군대(legiwvn레기온)라고 밝히는데, 그것은 연대급 내지는 사단급의 병력을 의미하는 군대 용어이다(H.Ma-rshall, Morris). 하지만 이것이 실제 6,7천명이나 되는 귀신들이 그의 몸 속에 있다기보다는 귀신들이 매우 많이 있다는 것과 그 귀신이 매우 포악하고 파괴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Hendriksen, J.Marshall). 이방인의 마을 세계에서는 귀신의 이름을 알아야만 귀신을 축출할 수 있었다(Liefeld). 하지만 예수가 귀신의 이름을 물어 본 것은 추방을 위한 준비 작업이 결코 아니다. 예수는 다른 권위나 주문에 속박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의 이름을 물은 것은 오히려 자아 의식을 돌이키도록 하신 행위였다(Hendriksen).
귀신들은 예수의 허락하에 돼지 떼에게 들어가 호수에 뛰어 들었다. 귀신은 추방되었고 광인은 치유되었다. 하지만 많은 짐승을 죽게 한것과 한 개인의 재산을 잃게 했다는 점에서 예수의 도덕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할진대(마6:26), 2천 마리의 돼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귀한 것임을 감안할 때(Liefeld, J.Mar-shall), 예수의 도덕성 운운하는 것은 개인적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광인이 마을 전체에 미치는 악영향에 비하면 돼지 2천 마리 정도는 적은 손실이라고 보기도 한다(Farrar).
3. 거라사인들의 반응(34-39절)
34절에서 돼지를 치는 자들이 이 사실을 마을에 알린 것은 놀라운 사건을 대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며(H.Marshall), 한편으로는 주인의 재산을 잃은 것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없음을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보여진다(Hendriksen).
35-37절에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나와서 진상을 확인할 때, 그들은 귀신 들렸던 자가 단정한 모습으로 예수 앞에 앉은 것을 보고 더욱 놀랐다. 예수의 놀라운 모습 앞에 모든 주민들이 두려움을 느껴 예수를 동네에서 추방한다. 예수는 귀신을 추방하고 사람들은 예수를 추방한다. 그리고 예수는 무력하게 승복한다. 이 대목에서 예수의 복음 전도와 치유 사건이 실패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38,39절의 내용으로 보아 결코 실패한 것은 아니다.
38절에서 귀신들렸던 자의 동행을 만류하면서 그 지방에서의 선교를 전파하도록 하셨다. 그는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므로 결구 복음의 빛을 비추므로 예수의 승리를 보여 준다(H.Mars-hall). 그리고 이 사건도 8:16-18의 등불 비유와 잘 연결된다. 마귀의 축출과 전도는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Hendriksen). 하지만 본문에서는 정반대의 효과를 나타냈다. 거라사인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에 미신적인 두려움과 경제적 손실을 염려하여 예수를 거절한다(Morris), 그들 스스로 문을 닫고 거절하는 모습은 예수가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을 기억나게 한다. 그들은 들어도 듣지 못하며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39절에서 예수는 갈릴리나 유대에서는 병을 치유하신 후에 이를 전하지 못하도록 금하셨는데(5:14;마8:49:30;17:9), 이방인 지역에서는 적극적으로 전도를 명하셨다. 이는 이방인 지역에는 전도자가 거의 없기 때문으로 풀이되며(이상근), 그는 매우 열심히 증인의 삶을 살았다. 마가에 의하면 10개의 도시(데가볼리의 의미, 막5:20)에 전하였다고 한다.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거라사의 군대 귀신들린 사람 치유
예수는 논쟁을 통하여 율법과 전통에 대한 교훈 비유를 통한 천국의 복음과 이적을 행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련성계시 등 다양한 방법을 구사하여 자신의 하나님 되심과 구세주이심을 밝히고 있다. 신적능력의 현존을 목격하였을 때 공포심을 갖는 기득권층과, 경외심을 품는 경건한 자들과 눈앞의 유익과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무리들, 갖가지 다른 반응이 제시되는 가운데 본문에서 자신이 하나님 이심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39절).
1. 신앙 아닌 지식의 고백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28절)라는 호칭으로 자신의 지식을 부르짖어 고백한 귀신들린 거라사의 도시인은 예수 앞에 엎드림으로 순종 아닌 굴종을 보이고 있다. 이 더러운 군대 귀신(legiwvn레기온, 30절) 때문에 이 사람이 쇠사슬과 고랑에 매인 채 감시 감독을 받던 중 뛰쳐나가 옷을 입지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서 거하고 있었다. 신앙으로 순종함과 지식만으로 굴종하는 자세는 천사와 마귀의 차이만큼이나 현격한 것이다.
2. 노도를 재우신 뒤 고뇌를 잠잠케 하심
자연을 제압하사 광풍노도를 잠재우신 예수의 권세와 인간을 괴롭히던 귀신을 명하여 나가게 하시고 그의 발작을 잔잔케 하는 능력은 예수께서 전능자이심과 그가 자애로우심을 드러내 보이셨다(시65:7).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풍부한 영물(귀신)은 지옥(무저갱)에 던지울 존재임을 스스로 알고 있다(31절). 귀신의 고백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영계의 지배권자임을 알게 했고 군대 귀신에 의하여 돼지 떼를 잃게 된 자로 하여금 달음질하여 읍내와 촌에 이사건을 증거하게 하였고 귀신나간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낱낱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39절)'을 온 읍내에 전파하게 하였다. 등불을 켜서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시는 진리이었다(눅8:16).
3. 능력 행하시는 능력자
능력 있음으로 그 능력을 사랑의 목적으로 행하신 주님께서는 악령의 세력이 실재하고 있음을 인정하셨고 또 제압하셨다. 이는 제자들이 교훈받는 대로 순종하고 실행토록 독려한 것이다.
돼지의 사육과 사용 용도(8:26-39)
◈ 세계배경 문화사 ◈
돼지는 소·말·개와 함께 아마도 인간과 가장 친근한 동물일 것이다. 선사 시대에 인류가 동물의 무리를 찾아다니면서 사냥하던 것에서 벗어나 직접 기르는 단계에 접어들면서 친해진 돼지는 음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특유의 모습과 성질로 인해 인간을 풍자할 때 상징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근동/팔레스틴
근동 지역에는 고대에 돼지를 가축으로 사육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돼지라면 집돼지가 아닌 산돼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 돼지는 음식으로 거부되었다. 굽이 갈라져서 쪽발이고 새김질을 전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셈족이 신성시 여기는 동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이라는 면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돼지는 파멸, 침입, 미련함, 이방인, 불결한 존재 등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이집트에서도 먹는 것이 금물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특별한 축제 때에만 허락되었다. 평소에는 주로 잡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등 어느 정도 신성시 여긴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평소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거친 성격으로 인해 농민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귀족들에게는 사냥 대상으로 좋은 동물이었다.
서양/희랍
근동 지역과 달리 서야에서는 돼지는 영양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흔히 제사때 쓰이는 희생 동물이었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아도니스(Adonis)는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았으나 사냥 중에 멧돼지에 물려 죽었다. 이때 몸에서 흘러 나온 피가 아네모네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멧돼지는 헤파이스토스 혹은 아세스신이 아도니스와 아프로디테 사이를 질투하여 멧돼지로 변신한 것이라고 한다. 로마에서도 음식으로 가장 각광받았던 것 가운데 하나였다. 다만 귀족들의 경우에는 값비싼 물고기를 좋아하고 돼지의 경우는 가난한 서민이 양고기와 함께 가끔 먹을 수 있는 영양원이었다. 서민들은 주로 빵·올리브·포도·꿀과 함께 곁들여 먹었던 것이다
시칠리아에서 발견된 로마 시대의 모자이크에는 산돼지 사냥에 대한 장면이 나오고 있어 흥미롭다. 여기에서는 산돼지가 한 사람을 쓰러뜨리고 있는데, 그 옆에는 다른 한 사람이 창을 겨냥하고 다른 한 사람은 돌을 집어던질 태세를 취하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상당히 힘든 사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잡은 돼지는 주로 먹지만, 사나운 돼지는 생포해서 원형경기장으로 보내져 투기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동양/중국
중국에서는 돼지를 나타내는 글자만 해도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있을 정도로 귀하게 생각한 동물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저(猪), 시(豕), 돈(豚), 해(亥), 체 등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돼지가 중국에서 사육된 시기는 대략 B.C. 8700년으로 보고 있다. 또한 돼지뼈가 무덤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제물로 많이 이용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 중국의 돼지는 야생 돼지가 많아 성격이 매우 사나웠다. 그러나 거세하면 유순해진다고 한다. 즉「주역(周易)」에 보면, '거세된 숫돼지의 이빨은 상서롭다.'라 하고 있다. 또한 '집에 돼지가 한 마리 들어오는 것은 가난의 증거가 되고 개가 한 마리 들어오는 것은 부자가 되는 증거가 된다(猪來窮狗來富).'라는 격언도 있다. 이는 돼지는 놀고 먹기만 하지만 개는 가족을 지킨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또한 중국인들은 돼지를 '코가 긴 장군(長喙將軍)'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한국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의「삼국지(三國志)」의 부여 관계 기사에서 저가(猪加)라는 관직명이 나올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가축이었다. 가축으로서 사육된 것은 적어도 2000년전이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 나라 재래의 돼지는 생김새가 흑색에 몸이 작고 주둥이가 긴 것이 특징이었고, 강건한 체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잔병에 강한 면을 보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구려 본기(高句麗本紀)'편 유리왕(琉璃王) 19년(B.C.1년)에 "8월에 성 밖 돈사에 있던 돼지가 달아났다. 왕은 탁리, 시비로 하여 쫓아서 잡게 하였는데 장옥(長屋) 못에 이르러 이를 붙잡았지만 칼로 돼지의 다리를 그어 버렸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하늘에 제사를 지낼 희생물을 어찌 상하게 할 수 있으랴'하고 두 사람을 드디어 구덩이 가운데 던져서 죽여 버렸다"라는 기사로 보아 돼지가 희생제물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동왕(同王) 21년(A.D.2년)에 "돼지를 놓쳤으므로 왕은 제사돼지를 맡아보는 설지에 명하여 붙잡게 했는데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 잡았다. 그 돼지를 그곳 사람의 집에 가두어 놓고 설지는 돌아와서 왕께 아뢰기를, '신이 그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곳 산수를 보니 옮기자고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돼지는 지신(地神)의 상징으로 되어 풍년을 기원하는데 머리가 자주 사용되었고, 복과 재수가 좋은 동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성경적 접근
성경에 언급된 돼지는 굽이 갈라져 부정하며(레11:7), 식용으로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신14:8). 그리고 돼지는 더러운 것을 상관하지 않는 동물이다(벧후2:2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돼지고기를 먹었다(사65:4). 따라서 성경은 가증하며 분별력이 없는 자에 돼지를 비유하여 말씀하고 계신다(잠11:22). 성도들은 깨어서 돼지와 같이 분별없는 자들이 되지 않토록 주의해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돼지의 생태(8:26-39)
주님의 거라사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신 사역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시각을 조금 달리 하여 생각해 보자. 본문에서는 '더러운 귀신'(29절)이 등장하고 또 '돼지'(32절)가 등장한다. 이 두 사물이 우리에게 무언가 암시해준다.
1. 돼지는 더러운 장소를 좋아함
돼지는 성경에 '부정'의 상징이다. 그래서 먹는 것도, 또 재물로도 금해진 육축이다(레11:7신14:8). 돼지는 더러운 장소를 좋아한다. 그 몸에 붙은 더러운 기생충을 없애고자 진훍탕에 뒹굴기를 좋아한다(벧후2:22). 더러운 귀신들도 또 귀신들린 자도 정상적인 주거지보다 더러운 무덤 사이를 주거지로 삼은 것을 본다(27절).
2. 저급한 의식으로 살아감
육축 가운데 돼지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개, 소, 닭처럼 인간에게 일상의 유익을 주는 것이 없다. 그저 먹는 것만 탐하고, 생리적인 욕구만 가지고 산다. 귀신들은 주님께 그 소원을 다시 돼지 떼로 들어가는 것을 삼았고, 거라사인들은 죽은 돼지만 생각하고 주님이 떠나는 것을 소원으로 삼았다. 그 의식들이 돼지를 닮은 것이다. 거룩하고 영원한 가치보다 저급한 본능에 지배되고 또 그것을 탐하는 불신 세계의 상태를 대변해 준다.
3. 주인에 대한 애정이 없음
돼지처럼 '친화력'(인간을 따르는 본성)이 없는 동물도 드물다고 한다. 몇 년을 길러도 주인 자체보다 먹이만 생각한다. 고대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는 주인의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로 주는 일로 있었다고 한다. 야만적인 풍습이지만 별난 것이다. 귀신들과 돼지 주인들은 주님의 신적인 권능을 알고 보았음에도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28절)라며 주님을 배척했다. 세상만 사랑하고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께 애정없는 사람들의 일면을 본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원칙(8:26-39)
무슨 일에도 어떤 원칙과 원리가 있다. 그 원칙을 파악하면 그 일의 성질과 내용도 알기가 쉽다. 거라사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신 주님의 사역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한 원칙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1. 구속할 자를 찾아가심
귀신들린 자는 사람의 왕래가 없는 무덤가에서 살고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과 동정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는 사회에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만난 것이다. 아니 주님이 찾아가신 것이다. 주님이 일부러 그곳 무덤가를 찾아가셨기에 거라사 광인은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주예수는 자기가 구원할 자들을 구하시고자 그들이 거하는 세계로 찾아가셨다. 하늘에서 땅으로 인간의 형상을 빌어 오신 것이다.
2. 죄의 근원을 물리쳐 주심
귀신들린 자를 만나 하신 일은 먼저 그를 속박하고 있는 귀신들을 물리쳐 주신 일임을 알수 있다.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들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29절)고 성경은 증언해 준다. 이처럼 주 예수는 인간을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그 죄의 근원이 되는 사단을 제압하셨다. 십자가의 대속은 사단의 권세와 활동 영역을 빼앗으시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단지 인간만을 대상으로 논해서는 모자란다. 인간의 죄에선 그 죄의 근원이 되는 사단의 활동사도 알아야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온전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3. 구속받은 자를 사용하심
주님은 자신이 구원한 자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37, 38절)고 명하셨다. 구속하신 자로 하여금 구원 복음 진리의 사역자로 삼으시는 것이 주님의 구속 사역의 백미다. 우리도 이와 같은 구속 원리 안에 선택된 자들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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