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1일 [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요한 3,31-36
선과 악의 싸움에 중립은 없다
스케일이 어마어마한 책 ‘삼체’(Three-Body)의 앞부분 줄거리입니다.
이야기는 심각한 사회적,ㅈ정치적 격변기였던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1976) 중에 시작됩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이 자본주의적 잔존 세력을 숙청하여 중국 공산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사회 정치적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수백만 명의 박해, 중국 교육 시스템의 혼란, 심각한 경제적, 문화적 피해를 포함하여 광범위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격변을 가져왔습니다.
이때 예 원지에(Ye Wenjie)는 천재 물리학 교수인 아버지가 반동분자로 처형되는 것을 봅니다.
미국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가르쳤다는 이유입니다.
아버지를 신고한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반동분자의 딸로서 수용소에서 지내던 그녀는 또한 마음을 주던 유일한 남자 과학자에게까지
배신당합니다.
최고의 과학자로서 우주에 신호를 보내는 일을 담당하게 된 원지에는 자신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발전한 문명을 지닌 평화주의자 계인으로부터 이상한 메시지를 수신하게 됩니다.
신호를 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치가 발각되고 자신들의 문명이 그들을 파괴하러 갈 것인데, 자신들이 도착하면 문명의 차원이 다른 자신들의 종족이 지구를 식민지로
만들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세상에 환멸은 느끼던 예 원지예는 잘됐다 싶어 그들에게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태양이 세 개인
행성에 사는 그들이 메시지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세 태양이 합쳐질 때 문명이 파괴되고 마는데 태양이 하나뿐인 지구는 그들이 원하는 가장 완전한 행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구까지 오는 데는 400년이 걸립니다.
그동안 지구가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 원지에와 그녀를 추종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지구의 문명이 더는 발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작전을 수행합니다.
지구는 그들의 작전에 말려들어 과학 혼돈의 늪에 빠지게 되고 매우 발전이 매우 느려지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외계인들이 도착하게 될 무렵 그들을 무력화시킬 인물이 나타납니다.
바로 평화를 위해 지구인들이 냉동인간으로 그때 깨어나게 만든 루오 지(Luo Ji)입니다.
루오 지는 트리솔라리안들이 자기들을 공격하면 그들의 좌표를 온 우주에 다시 날려 보낼 것이고
그러면 그들보다 더 높은 차원의 존재들이 와서 또 그들을 몰살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으로 트리솔라리안들과 거래하고 그들을 물러나게 합니다.
‘삼체’는 SF 소설이지만, 사실 우리 삶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누군가를 위해 일합니다.
원지에는 자신도 지구인이지만, 지구인들에 대한 환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를 파괴해 줄 대상을 찾고 그들의 뜻에 순종하여 그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지구인들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을 지연시킵니다.
반면 루오 지는 지구인들 편에 서서 어떻게 하면 그들을 저지시킬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기술로는 도저히 되지 않기에 깨달음을 통해 이 일을 이뤄냅니다.
정글 숲속에 병아리 한 마리가 있지만,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누군가 자기를 잡아먹게 되면 다른 누군가가 또 그놈을 잡아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게 만들면 된다는 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구원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치 원지에와 같은 일당인데,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면 안 되게 하는 세력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들어주는 이들의 뜻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 자기들이 은혜를 받는 이들에게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한량없는 은혜인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적들은 또한 악의 세력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들을 고마워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들의 말을 하고 그들의 뜻을 따라줍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에게 은혜를 받고 있고 은총과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 은혜를 주는
이의 말을 하고 뜻을 따라줍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빛과 어둠, 두 곳에서 옵니다.
지구를 침공하러 오는 이들이 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고, 또 지구를 지키려는 이들에게도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은 중립일까요?
그 사람은 지구 파멸의 문제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외계인과 그 일당의
편입니다.
어머니를 거부하면 중립일까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머니를 거부하면 그냥 악에 머물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은총을 원하느냐에 따라 내가 따라주는 뜻이 결정됩니다.
은총과 뜻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11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요한 3,31-36
골고타 언덕에서의 참혹한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참된 승리라고 볼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스런 유치원생들과 지구 살리기 운동에 헌신해오신 수녀님을 모시고 생태 환경에 대한 소중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지구 살리기가 얼마나 중요한 테마인지에 대해서 이론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실천을 하지 않았던 지난 삶을 깊이 성찰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말씀 중에 제 가슴을 크게 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십니까? 자라나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현재 지구는 생태 용량이 초과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후손들이 쓸 용량을 앞당겨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이 세상을 인간이 쓰기에 좋은 세상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각한 환경 위기 앞에서 가장 큰 피해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동식물들입니다.”
“지구는 우리 인간의 끝도 없는 욕망을 실현시키는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과도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담대한 생활 양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를 아껴야 합니다.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명확합니다. 에너지 재생, 자원의 순환, 미니멀리즘의 삶!”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요한 복음 3장 35~36절)
공생활 기간 동안 계속된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다보면 예수님 역시 몹시도 지구를 사랑하셨으며, 친환경적인 삶, 미니멀리즘의 삶을 살아가셨다는 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지상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 하늘의 새들처럼 자유롭게 살라는 당부, 전도 여행길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여벌옷도 지니지 말라는 지침 등등.
부활하신 예수님의 노선 역시 공생활 기간 동안 지속된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활 이후 제자들 앞에 발현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휘황찬란한 복장을 한 황제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던 소박하고 청빈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부활 기간 내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화두 하나가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궁극적인 승리를 확증하고 선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승리는 세상의 승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승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인한 승리였습니다.
영광스런 부활을 통한 예수님의 승리와 관련해서 늘 유념해야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패배요 부활은 승리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골고타 언덕에서의 참혹한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참된 승리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언제나 십자가 상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삶은 시종일관 승리의 삶이었습니다.
부활을 통한 영광스런 승리의 삶은 결정적인 순간 골고타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목숨까지 내건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영광스런 부활을 확증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셨고, 우리의 영생을 위해 부활하셨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안에서 또 다시 죽고, 부활하고, 승리하는 삶을 되풀이하고 계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2주간 목요일 강론>
(2024. 4. 11. 목)(요한 3,31-36)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1-36).”
1) 이 말씀은,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복음서 저자의 설명(증언)입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하늘에서 오시는 분”)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34절).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35절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에 대한 ‘모든 권한’을(‘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증언입니다.>
“땅에서 난 사람”이라는 말은, 자연 상태의 인간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라는 말은, 신앙과 상관없는 ‘인간의 지식이나 학문이나
예술 같은 업적들’은 모두 땅에 속한 것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는 허무하게 사라질 먼지 같은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입니다(34절).
이 말은, 베드로 사도의 다음 신앙고백에 연결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이 말은, “주님의 말씀은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성전 경비병들의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라는 말도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다.” 라는 간접적인 증언입니다.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 있는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 루카 4,32).” 라는 말도, ‘예수님 말씀의 힘’에 대한 증언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힘이 들어 있는 말씀이다.” 라는 증언입니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 힘은,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힘이기도 합니다(마르 1,27).
마귀들의 힘은 ‘죽음의 힘’인데, 그 ‘죽음의 힘’은 예수님 말씀의 ‘생명의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합니다.>
3)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증언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에 연결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복음서를 쓴 목적’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0-31).”
<이 말은, 36절의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를 쓴 목적’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믿고 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현세적인 복이나 얻자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인생살이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비는 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있는,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도 하느님 나라까지 잘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4) 36절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어서 생명을 얻으라는 권고입니다.
여기서 ‘순종’이라는 말은, “실천하는 믿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거나,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생명을 보지 못한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입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바로 ‘지금’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상태로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지금 무슨 벌을 받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으면서 은총과 사랑과 자비를 받지 못하는 것은, 벌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은총과 사랑과 자비를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쪽에서 받기를 거부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