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비우당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9-471)
'비우당'은 겨우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창신동 쌍용2차 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서울시에서 낙산공원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복원하였다
집터에는 이수광이 살았던 집을 복원해 놓고 있는데 부엌 1칸, 방2칸으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전형적인 서민가옥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의 가옥은 최근에 옛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실제 초가집과는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한양에 거주했던 선비들이 소박하게 살았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래 이수광의 외가쪽 인물로 조선 태조 부터 세종까지 4대 정승을 지내고 청백리로 널리 알려졌던 유관이 살았던 집을 이수광이 고쳐지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집이다
유관은 이수광의 외가 5대조 할아버지이다
유관은 받은 녹봉을 길을 넓히거나 동네 아이들 붓과 먹을 사는 데 쓰면서 본인은 담장없는 초가집에 살았다
이수광은 단촐한 비우당에서 조선 최초 백과사전 지봉유설을 지었다
세 차례에 걸친 중국 사신 경험을 토대로 서양 곳곳의 이야기와 천주교 지식을 소개한다
지봉유설 - 천문, 시령, 군도, 병정, 인문, 인사, 종교 등 25부 182항목으로 분류, 구성되어 있다(1614년 간행)
낙산 묘각사 (서울시 종로구 종로63가길 31, 숭인동 178-3)
1930년 5월 태허 대종사가 창건했고, 이후 두 번 증축 및 개축을 했다
그러나 1997년 2월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고, 이후 7년만에 크게 복원된 절이다
즉, 원래 역사가 길지 않은 절인데, 그나마도 1997년 화재때 전소되어 현재 있는 건물의 역사는 매우 짧다
일주문
윗층은 대불보전 아랫층은 원통보전
(그런데 왜 대웅전이 아니고 대불보전이지???)
원통보전 내부
42수 11면 관세음보살
낙산 묘각사는 대한불교관음종의 총본산이다
대한불교관음종은 1945년 김정운(金正雲)이 조직한 대승불교법화회가 계속해서 분열하는 과정에서 1965년 12월 이홍선(李泓宣)이 독자적 종단을 구성하고, 1966년 10월 대한불교불입종포교원으로 문화공보부에 불교단체 등록을 하고, 1972년 10월 대한불교불입종으로 개명한 후, 다시 1988년 8월 대한불교관음종으로 종단 명칭을 변경하고, 이듬해(1989년) 1월 재단법인 대한불교관음종으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기타 등 등
강경대 기념관 (서울시 종로구 종로63길 18, 숭인동 72-198)
1991년 4월 26일 오후 5시 15분쯤 서울 남가좌동 명지대 앞, 전투경찰 10개 중대 1200여 명과 '백골단"으로 불리는 사복검거조가 대학측의 일방적 등록금 인상에 반대해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을 상대로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쏟아지는 최루탄 속에서 학생 500여 명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맞서다 경찰에 밀려 학교로 도망쳤다
경찰은 닥치는대로 진압봉과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이때 정문 앞에서 학생 한 명이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오른쪽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전경들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이 학생을 군홧발로 짓밟고 걷어찼다
경찰이 떠난 뒤 벌견된 학생은 이미 숨이 멎어 있었다
열아홉의 나이에 목숨을 잃은 그는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1학년 강경대이며, 사인은 '전두부 함몰골절에 의한 뇌손상과 심정막 내출혈'이었다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서울시 종로구 종로63길 18, 숭인동 72-198)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래 민주화와 민중의 생존권을 요구하다 스스로 혹은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민주열사의 유가족들이 유가족의 단결로서 자주, 민주, 통일의 구국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그 목적으로 1986년 8월 12일 서울 전태일 기념관에서 창립한 단체이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한울삶 참조
♤ 제33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2020년 6월 10일)날민주화 유공자들에 대해 국민 훈장을 추서한 가운데, 정작 민주화의 주인공으로 불리는 고(故) 박종철, 이한열, 전태일, 강경대, 김상진 등과 같은 열사들은 민주 '유공자'가 아닌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구분되면서 국가 차원의 예우가 이뤄지지 않아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한때 화염병 몇 번 던져 본 것을 평생의 훈장으로 여기며, 정치 입문의 발판으로 삼은, 밥벌이 화순분으로 삼은 수많은 386계 정치인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 강경대열사 아버님인 강민조선생님과 14시 내방하기로 선약이 있었으나 어디에서 착오가 있었는지 만나뵙지 못하였다
상춘원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372, 숭인동 72-12)
상춘원(常春園)은 벅영효의 별장이었으며, 후일 손병희가 거주하였다
박영효의 별장은 귀족들만 드나든다고 하여 귀족회관으로 불렸는데 일제 때 작위(爵位)를 가진 구황실의 귀족이나 일본 관리들만 출입하 고 일반 백성들은 얼씬도 못하였다
천도교는 1914년 3월부터 1916년 9월까지 수차에 걸쳐 동대문 밖 숭인동 낙산 남쪽 자락에 있는 박영효의 소유 100칸 짜리 건물(한옥과 양옥)과 900평 짜리 별장이 있는 10여 필지 10,165평을 매입하였다
이곳을 매입한 후 양관(洋館)은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1915년 9월부터는 여러 채의 한옥을 수리하였고, 서북쪽 언덕 위에 만화정(萬化亭) 을 짓고 정원을 새롭게 꾸며 상춘원이라 이름하고 1915년 11월 17일 낙성식을 가졌다
상춘원은 동망봉이 있는 바위산 뒤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붉은 벽돌담으로 둘러싸고 넓은 뜰은 중앙에 담장을 쌓아 동서로 나누었다
상춘원에는 소나무, 밤나무 등이 울창하였으며 약수터도 있었다
1919년 1월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3인은 이곳으로 손병희를 방문하고 독립운동의 3대원칙인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를 정한 곳이다
손병희는 1919년 3·1운동의 주모자로 붙잡혀 1년여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1920년 10월 22일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이곳에서 치료를 받다가 1922년 5월 19일 사망하였으며 이 부지는 1931년 5월 김성수가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로 넘어갔다
♤ 많은 자료에는 귀족회관(상춘원)이 창신동 157번지로 되어 있으나 구 토지대장을 보면 숭인동 157번지 대지 3,219평의 소유주가 대정 원년(1912)에는 박영효였고, 대정 4년(1915)에는 천도교 대도주 박인호의 명의로 되어 있으며 소화 6년(1931)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로 변경되었다
이를 보면 이곳이 상춘원 자리라는 것이 입증된다
현재는 72번지에 합쳐져서 157번지는 없다
동묘 풍물(벼룩)시장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239-9)
오늘의 마지막 구간 영도교에서
뒷풀이 차 한잔
동묘앞역을 출발하여 영도교까지 오늘도 일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우리 님들 모두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