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발목에 쇠공 차고 발레하는 것" | ||||
박진임 교수, 좋은 시조 10편 평론 선보여 | ||||
| ||||
지난 2011년 USC 교환교수로 LA에 체류하며 관악연대와 교류했던 박진임(국문 82) 평택대 교수가 계간문예지 ‘다층’에 쓴 2014년 좋은 시조 10편에 대한 평론을 아크로에 기고해 주셨습니다. <편집자 주> 그리움과 기다림, 그 거리와 향기와 햇살: 2014년의 한국 현대 시조 박진임 I. 발레와 시조 시조는 발목에 쇠공을 차고 발레를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이가 있다. 시조의 형식적 제약을 구속으로 받아들이는 이이다. 반면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자유시는 “네트도 드리우지 않고 테니스를 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형식적 제약이 있어야 스포츠 경기가 경기답듯이 시에도 적절한 형식적 장치가 있어야 시적 긴장이 형성된다고 본 것이다. 이는 시조 시인에 대한 다른 글을 쓸 때 이미 두어 번 언급한 바 있지만, 현대시조를 떠올릴 때마다 필자는 쇠공, 발레, 테니스를 함께 생각한다. 2014년의 마지막 날, 미국의 보스톤에서 보스톤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보면서 2014년 '다층, 올해의 좋은 시조'를 생각했다. 챠이코프스키의 음악은 그대로인데 그 음악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발레는 안무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나타난다. 2007년에 본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의 공연은 필자가 보았던 것 중 가장 화려한 발레 공연으로 기억된다. 주인공이 눈의 나라로 마차를 타고 들어가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크고 화려한 무대를 배경으로 하여 무한히 내리던 하얀 눈송이들... 2014년에 본 보스톤 발레는 신역사주의적 해석을 시도하여 19세기 차이코프스키의 시대를 재현하는데 주력하였다. 길거리에서 군밤을 구걸하는 아이들의 헐벗은 모습과 주인공의 화려한 옷차림새가 대조를 이루었다.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늘 한 박자씩 늦게 대열에 합류하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를 소품처럼 배치하여 흥미를 더하기도 했다. 발레라는 공연예술이 동일한 서사와 음악을 질료로 하면서도 도시마다, 또 발레단마다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여 안무가는 같은 주제를 놓고서도 서로 다른 춤동작을 만들어낸다. 그 처럼 2014년의 한국 현대 시조단은 다채로운 색상으로 자연과 사회, 그리고 시적 자아를 그려내었다. 더러는 세 줄의 단시조로, 더러는 2연, 3연, 4연의 연시조의 형식으로 그리움, 실존적 고독,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 상호 이해, 역사와 상처, 인종(忍從), 자연의 순리, 생명에 대한 경의와 사랑 등을 선명한 시적 언어와 이미지로 드러내 보였다. 열편의 시편들은 다양한 지면에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들 모두 하나의 시 동호회에 속해 있기라도 하듯 서로의 시세계는 서로 얽혀있다. 그 시편들은 통일성 속의 다양성, 또 변주되면서도 공통된 주제를 드러내며 서로 화답하듯 함께 얼려 넘나든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이 해석된 ‘호두까기 인형’을 보고 그 해의 좋은 시조들을 감상하다. 예술로 한 해를 마감하는, 분에 넘치는 송구영신(送舊迎新)...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정녕 예술가들 덕분이리라. II. 너와 나 사이의 거리 먼저 박기섭 시인의 「오동꽃을 보며」를 읽었다. 9월에 발표된 박시인의 「구급차, 그리고 가을」이 보여준 독특하면서도 묵직한 시적 주제에 압도당해 있던 터이라 그 시편과의 거리가 궁금했다. 여전히 정제되고 명확한 언어로 절절한 그리움을 담백하게 다시 그리는 시인의 모습을 확인하자 일종의 안도감이 찾아왔다. 하현, 낮달, 오동꽃, 뻐꾸기... 이는 박기섭 시인이 이전 시편들에서 자주 찾던 친숙한 이미지들이다. 혹은 한국 현대 시조, 더 나아가 한국 현대시 전반을 통하여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친숙한 소재라고도 할 수 있다. 소재가 독특하다고해서 바로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시의 자물쇠를 여는 열쇠는 그 소재를 다루는 방법의 새로움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도르노(Adorno)는 대중음악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서 “음악적 창의성은 유사 창의성(pseudo- creativity)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진정 창의적인 것은 아주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달라 보이지만 아주 다르지는 않은 ‘유사 창의성’이라는 것이다. 전통의 기반 위에서 약간의 변형이 일어날 때, 그런 창의성만이 생명력을 갖고 받아들여진다는 말이다. 박기섭 시인은 친숙한 시적 소재들을 선택하여 그 위에 그리움과 기다림이라는 오래된 정서로 말(言)의 궁전(寺)을 짓는다. 그러나 그 시적 접근은 매우 새롭다. 시적 자아를 드러내고 감추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오랜 경륜의 장인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는 그런 기술이다. 1연은 대상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기다림의 정조가 ‘이승의 더딘 봄’이라는 시어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오동꽃은 시인의 그리움의 객관상관물이다. 1연에서는 막 피려는 오동꽃을 통하여 부질없고 기약 없는 그리움과 기다림을 노래한다. 1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막상 시적 화자는 오동꽃에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절 가웃 길’은 시적 애매성이 한껏 발현되는 지점으로 보인다. ‘나절’은 ‘한나절’이거나 ‘반나절’일 뿐이다. 한나절 혹은 반나절은 주체의 경험과 심경의 위치에 따라 긴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짧은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일각이 여삼추(一刻 如三秋)’이기도 하고 ‘천년이 한 잠 꿈’이기도 한 상대적 시간을 사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던가...‘더딘 봄’을 이유로 삼아 필자는 이를 ‘긴 시간’이라고 읽는다. 오동꽃 피면 ‘오마지 않은 이’도 올 것 같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가 한 걸음에 내달으면 오동꽃에 반나절이나 한나절에 다다를 수 있으련만 그는 이를 사뭇 거부하고 있다. 주체는 다가가기를 거부하면서 ‘오마지 않은 이’가 다가와주기를 기다리는, 셈이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그런 감정을 두고 그리움이라 하자. 그 막연한 그리움은 2연에서 개화한다. 오동꽃의 개화에 빗대기만 할 뿐 시적 주체는 이를 자신의 감정이라 일컫지도 않는다. 1연에서 등장한 ‘나’는 마지막 3연에서 다시 등장하지만 2연에서는 ‘나’는 부재한다. 후경으로 물러나서 개화의 묘사에만 치중한다. “열어놨네”라는 2연의 종결에 드러나는 ‘네’라는 종결 어미는 시적 자아와 묘사하는 대상과의 거리를 충분히 표현해준다.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감춘 채 바람 기다리는 꽃을 대신 내세운다. “빗장도 아니 지른 채/ 재넘이길 열어놨네”라는 2연의 종장은 박기섭 시인이 일관되게 견지해 온 자세, 즉‘언어를 아껴 쓰는’ 시인의 치열성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재넘이길은 “밤에 산꼭대기에서 평지로 내리 부는 바람”을 뜻한다. 밤에 불어오는 바람은 밤을 타 찾아들 님에 대한 제유로 충분하다. 초장에서 제시된, ‘파일등’이 보여준 등불 이미지가 중장에서 변주하여 “햇전구 갈아 끼워/ 불 켜든” 오동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오동꽃은 밤에 대문밖에 등불을 내 걸고 님을 기다리는 시적 주체를 대신한다. “빗장도 아니 지른 채”라는 표현을 통하여 대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낮이고 밤이고 기다리는 이의 심경이 정확히 표현된 것이다. ‘오마지 않은 이’를 기다리는 것이기에 그 기다림은 더욱 갸륵하고 애절하다. 눈에 띄는 것은 등불 이미지이다. 앞서 언급한 「구급차, 그리고 가을」에서도 ‘가등’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휠체어 사라져간/ 병동 속 환한 고요//무수한 링거병들이/ 가등처럼 떠 있다”는 구절에서 허공에 떠 있는 링거병을 가등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둠을 밝히고 길을 인도하여 한 존재로 하여금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등불이다. 그 이동이 진보이든 소멸을 지향하든 그것을 이끄는 것이 등불이다. 그 등불 이미지가 오동꽃에서도 병실의 링거병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등불로 제시된 시인의 지향점이 다음 시편에서는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하다. 마지막 3연은 1연과 2연에서 제시된 심상들이 하나로 모여들어 통합되는 연이다. 꽃이 지는 날의 설움은 여러 시인이 과장스럽게 반복해 온 시적 소재이다. 영랑 시인은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일년 삼백 육십 오일/ 설움에 우읍네다”하고 노래하여 그 과장의 극단에 서 있었다. 개화란 예사롭지 않은 것이어서 이호우 시인처럼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라고 노래할 일이라면, 그리고 서정주 시인의 표현처럼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고 시인은 잠도 오지 않게 만드는 사건이라면 낙화가 뻐꾸기 울음을 동반해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꽃이 이운 날” “먼데 산 뻐꾸기”가 울었다는 박기섭 시인의 시적 표현은 박재두 시인의 「화병」과의 상호텍스트성 속에서 읽으면 더욱 그 의미가 깊어질 것이다. 화병에 꽂힌 꽃으로 아내를 묘사하며 가난한 지아비를 도와 살림을 꾸려가느라 젊음을 잃어가는 아내를 두고 박재두 시인은 “패물같이 아껴온 젊음/ 성으로 쌓았어도// 꽃잎으로 지는 날/ 먼 산 뻐꾸기도 안 울고”라고 노래한 바 있다. 아름다움이, 순결이, 기다림이 그 절정에 이른 다음 꽃잎 지듯이 이울고 지는 날이라면 “먼 산 뻐꾸기”만이라도 이를 알아차리고 구슬피 울어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뻐꾸기는 꽃의 죽음에 동원되는 곡비가 되기에 적절한 존재가 아니던가? 꽃 피는 시절에 뻐꾸기도 함께 있으므로.,, 박재두 시인의 시에 나타난, 화병속의 꽃이 지는 장면에서는 뻐꾸기조차 그 낙화를 알지 못해서 낙화가 더욱 슬퍼진다. 뻐꾸기조차 울어 주지 않는 낙화의 장면과 그 뻐꾸기가 피를 쏟듯 우는 낙화의 장면! 1975년에서 2014년 사이, 전통의 음계가 변주되는 장면을 본다. 결국 꽃은 ‘이우’는데 시인은 ‘핏기가 가신’(이는 시인의 이전 시편, 「가을 경영학」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존재, 즉 삶의 의미를 상실한 자신의 존재를 ‘하현의 낮달’로 제시하며 공허한 내면세계를 드러낸다. 기다리던 대상의 부재, 그리고 그로 인한 극도의 절망과 상실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는 결단코 거부한다. 먼 데 산 뻐꾸기로 하여금 “피를 쏟듯” 울음 울게 하고 ‘하현의 낮달’이라는 상징 속으로 시적 화자는 소멸하고자 한다. 그러나 연극의 방백을 보듯 시를 읽는 독자는 모두 안다. 그것이 시적 장치이며 시인과 독자 사이의 약속인 것을. ‘하현의 낮달’처럼 무표정하고 욕망도 의욕도 없는 존재로, 또 관조하는 무언의 철학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그리고 있지만 시적 화자는 절망감에 몸을 떨고 있음을.,. 그리고 2연에서 활짝 개화하고 3연에서 이우는 오동꽃은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한 자세를 취하지만 사실은 그 오동꽃이 바로 시적 화자이며 ‘피를 쏟듯’ 울던 뻐꾸기 또한 바로 시인 자신임을... 하필 뻐꾸기가 “헤식은 숭늉 그릇”에 피를 쏟았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헤식은’은 ”차진 기운이 없이 푸슬푸슬하다“는 의미인데 ’헤식은 숭늉‘은 하현 낮달의 이미지와 함께 어울려 시적 화자의 속성을 드러낸다.’하현 낮달‘과 ’헤식은 숭늉‘은 열정의 나이대를 지나쳐 온 시적 화자, 주관을 개입시키지 않고 객관적 묘사로 일관하려는 시인 자신의 상징에 다름 아닌 것이다. 시적 주체가 대상과 맺고 있는 관계나 그 견지하는 거리에 대한 시상의 연장으로 서숙희 시인의 「멀어서 아름다운」과 임채성 시인의 「나도바람꽃」을 읽었다. 박기섭 시인이 보여준 ‘오마지 않은 이’에 대한 기다림의 정은 서숙희 시인에게서는 ‘그리 먼 당신’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임채성 시인은 “물러서면 멀어질까/ 다가서면 또 다칠까”하고 노래함으로써 대상과의 거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야생화 촬영이라는 구체적인 예술 행위를 통하여 구현해낸다. 서숙희 시인의 시조는 시조의 기본 문법에 매우 충실하여 이미지나 수사의 색깔 옷을 벗어던지고도 오히려 시조의 단아한 아름다움이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밤하늘의 별빛이 저리 아름다운 건 얼마나 더 아름다우려고 객관적 사실에 대한 묘사나 설명에서 출발하여 시인의 내적 세계로 이동해가는 시조의 전통적인 형식 속에서 응축적인 시적 언어라기보다는 평이한 일상어를 통하여 한 편의 담백하고도 울림이 큰 시조를 빚어낼 수 있다는 것을 시인은 보여준다. 이 시편은 기본적인 성격에서는 일본의 하이쿠에도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조가 초장에서는 도입, 중장에서 변주 또는 확장을 보여준 다음, 종장에서 전환과 종결을 도모하는 반면 하이쿠는 두 개의 이질적 요소의 병치로 특징 지워진다. 초장과 중장에서 별, 아름다움, 거리가 제시되어 있고 종장에서는 그 별의 자리를 ‘당신’이 대체한다. 그리하여 별을 노래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그 별에 ‘당신’이라는 존재를 병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임채성 시인의 「나도바람꽃」은 카메라를 매개로 하여 피사체인 야생화와 촬영의 주체인 사진작가로서의 시적 화자가 맺고 있는 관계를 노래한 시이다. 무릎을 꿇고 싶다 네온빛 꽃가루가 얼룩진 안경을 벗고 너와 나 눈빛 맞추는 물러서면 멀어질까 줌렌즈 미당기다 몰래 뱉는 바람 한 줄 우주의 파동이 인다 오승철 시인의 「‘셔’」에 등장하는 너도바람꽃이 한반도의 남쪽에 주로 서식하는 야생화임에 반하여 나도바람꽃은 강원도등의 중부이북에 주로 서식하는 꽃이다. 임채성 시인 또한 두겹의 노래를 부르는 솜씨가 탁월하다. “무릎을 꿇고,”“눈빛 맞추는” 행위나 “내 가슴에/ 네 가슴에”가 모두 일차적으로는 야생화를 대상으로 삼은 것이지만 심층적으로는 한 주체가 객체인 다른 주체를 향하는 자세와 마음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물러서면 멀어질까/ 다가서면 또 다칠까”는 관계 맺기와 유지하기의 지난한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마음거리/ 삼십 센티”는 카메라의 렌즈가 피사체와의 사이에 유지해야 하는 거리이면서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두어야 할 적절한 거리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줌렌즈를 밀고 당기다” 그 사이에 스미는 바람 한 줄을 두고 ‘우주의 파동’이라고 노래했다. 꽃과 사진작가 사이에 ‘우주’가 등장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과장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 두 가슴에 파동이 일어야지만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가능한 것이고 생명이란 우주의 파동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너와 나 사이의 거리, 그 멀고 또 가까움... “마음 거리/ 삼십 센티,” 그 완벽한 거리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 현대시조는 앞으로도 다양한 질료와 형식으로 재현의 변주를 계속할 것이다. III. 풍경의 시조, 시조의 풍경 이승은 시인의 「조천 바다」, 박연옥 시인의 「파적」, 홍성란 시인의 「너 앉은 쪽으로」는 모두 풍경의 묘사를 통하여 현대시조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시편들이다. 이지엽 시인의 「그리운 패총」 또한 패총의 풍경을 그리면서 인간의 역사와 생명을 노래한다. 이른 봄볕 촘촘하게 내려앉은 돌담 아래 숨겨둔 푸른 날을 얼마나 뱉었기에 청보리 바람결에 물빛 더욱 짙은 바다 이른 봄 제주도의 조천에서 시인이 본 풍경이 언어를 물감으로 한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내고 있다. 하늘이 그러하고 바다가 그러하고 또 청보리가 그러하므로 그림에는 푸른색이 압도적이다. 청보리의 푸른 빛은 하늘과 바다의 푸른 빛과는 분명 다를 터이지만 우리 말에서는 다행히도 초록과 파랑이 구별되지 않는 동위소(isotrophy)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청보리의 푸른 빛 또한 시인의 심상의 푸른 빛깔을 거스르지 않는다. 푸른 날, 쪽빛 먼 자국, 청보리 바람결, 물빛 더욱 짙은, 그 모든 푸름... 가득한 푸른 빛을 배경으로 거느리고 강렬한 보색 대비를 이루며 “섬동백 꽃송이가/ 멈칫 웃다 떨어진다.” 봄날의 낙화! 겨울동안 푸른 바다를 붉게 호위하다 막상 이른 봄볕이 돌담에 촘촘하게 내려앉자 동백꽃의 생애는 다하는 것인가 보다. 하늘과 바다와 청보리가 그리 푸르른 것은 섬 동백의 붉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러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만연한 푸름의 색채 사이에서는 섬 동백 꽃송이가 ‘멈칫’하는 것이 또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 푸른빛은 결국 지나온 세월의 날들도 푸르게 물들이고 있다. 시인의 풍경화에서는 하늘과 바다로 드러난 자연 속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촘촘하게 쌓아올린 것은 인간이 만든 돌담이지만 자연의 봄볕 또한 그 돌담을 찾아들어 “촘촘하게 내려앉은” 것으로 그려지므로 봄볕은 돌담을 닮고 돌담 또한 봄볕을 품게 된다. 파도가 뱉어내는 것은 “숨겨진 푸른 날”이라 하여 바다와 파도는 인간의 이야기를 품고 또 드러내기도 하는 존재이다. 그 파도가 해변에 밀려와 부딪치며 하얗게 만들어내는 거품들은 “빈말이 된 약속”이라 하여 다시 자연이 시적 주체의 감정을 대신 토로해주는 존재가 된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결한 장면에서 인간의 감정은 숭고해지기 마련이고 그렇게 승화된 마음은 눈물로 표출되는데, 시인은 그리하여 “그 모든 푸름에는/ 눈물 맛이 배어 있다”고 노래한다. 이승은 시인이 제주바다의 봄을 노래한 반면 박연옥 시인은 무논과 올챙이 떼, 개개비와 구름, 돌미나리, 민들레, 바람 등이 조화롭게 서로 얼려 빚어내는 봄의 왈츠를 연주한다. 올챙이 떼 옥자한 다랭이 무논 위로
박연옥 시인의 시편에서는 시각적 요소와 청각적 요소의 넘나듦과 어울림이 쉽고도 자연스럽다. 하늘을 찌를 듯이 날아가는 것은 개개비떼일 것이지만 시인은 “개개비소리”가 날아간다고 보았고 “놀라 흩어지는/ 물에 비친 구름들”이 “봄이다!”하고 소리치면서 흩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소리 내지 않는 정물적인 것들에 소리를 부여하고 생명 없는 존재에게 숨결을 불어 넣어주는 마술사가 시인이다. 그런 시인의 손길이 있어 우리 사는 세상의 봄날이 시가 된다. 박연옥 시인의 여섯 줄짜리 시편 속에는 하늘과 땅이 얼려있다. 날아오르는 개개비가 지상과 천상으로 분리된 광대한 공간을 연결하고 무논에 갇힌 물에 하늘의 구름이 비쳐 있다. 또 그 구름은 생명체처럼 봄의 도래를 알리는 소리를 지르며 “놀라 흩어지”는 것이다. 2연으로 분리되지 않았지만 처음의 초, 중, 종장 세장은 하늘과 땅,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개개비라는 수직적 구조 속에 빚어져 있다. 다음 세장은 수평적 공간으로 이동한다. 돌미나리에 이슬이 내려 앉아 있고 바람은 불어가면서 민들레를 흔들고 간다. 봄은 어리고 여리고 순한 생명과 존재들을 위한 계절인가보다. 박연옥 시인이 그린 봄의 풍경 속에는 생명 있는 것들은 다 어리게 재현되어 있고 생명 없는 자연의 물상도 아이처럼 장난기 많은 존재들로 나타난다. 개구리가 아닌 올챙이 떼가 옥자하게 무논을 채우고 돌미나리는 새순을 낸다. 구름은 개개비소리에 “놀라 흩어지는” 아이들 같은 구름이고 바람은 하릴없이 “민들레 하얀 목덜미/ 흔들고 가는 바람”이다. 초등학교에서 목덜미가 하얀 여학생이 있으면 슬쩍 만져보고 가는 개구쟁이 소년 같은 모습의 바람이다. 겨울이 적막한 계절이라면 ‘파적’은 적절한 봄의 대명사일 것이다. 시인이 그린 봄 풍경은 제목 ‘파적’으로 적절히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승은 시인의 시편이 바다라는 광대한 물의 이미지로 봄을 그렸다면 박연옥 시인의 시에 나타난 물은 구름을 되비추는 거울 같은 무논의 물로서 갇힌 물이다. 이어 홍성란 시인은 가을, 양재천의 흐르는 물을 노래한다. 해마다 이맘때 양재천은 양재천이나 고마리 물미나리 모여드는 물기슭 망연히 바라보는 조릿대 귀룽나무 바뀌고 바뀌는 것, 그런 줄은 알지만 홍성란 시인의 풍경 속에는 변화와 항상성 사이의 거리와 긴장이 다시 등장한다. 시인은 변화도 승인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도 긍정한다. “일색一色이 아니어서 좋고/ 같지 않아 고맙고”는 변화가 가져다주는 다양성에 대한 긍정의 표현이다. 또 “항시 바뀌지 않는/ 너는 나의 대세였으니”하고 노래함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한결같은 존재에게 한층 깊은 경의를 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해마다 이맘때/ 양재천은 양재천이나”로 시작한 첫 연의 초장은 양재천의 항구적인 모습을 묘사한다. 그런 다음 “들판을 점령한/ 세력은 바뀌었으니”하고 잇따르는 중장을 통하여 초장과의 대비를 준비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을 통하여 들판은 다양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양재천은 한결같음을 보인다. 갈대숲, 고마리, 물미나리, 왜가리, 조릿대, 귀룽나무 등 변주되어 드러나는 심상을 따라가다 보면 들판이 보여주는 변주곡이 완성된다. 마지막 연은 시인의 서정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바뀌고 바뀌는 것”이라 하여 ‘바뀜’이라는 어휘를 반복하여 들판으로 제시된 인간 세상의 변화무쌍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런 다음, “항시 바뀌지 않는 너”가 “대세”라고 단정 짓는다. 이어서 “대세”의 ‘세’음을 변주하여 “판세”라는 종결어를 이끌어낸다. ‘너’는 ‘대세’로, ‘나’는 그런 ‘너’쪽으로 “기우는/ 가느단 이 판세”라 노래함으로써 항상성의 견지자에게로 동화되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욕망을 드러낸다. 풍경 뒤에 숨은 서정의 시편들과 풍경이 이끄는 서정의 시편들, 모두 현대시조의 스펙트럼에 나타난 다양한 색깔들이다. 이지엽 시인의 「그리운 패총」은 익숙하지 않은 고고학적 유적지 백포만의 풍경으로 독자를 이끈다. 하얗게 뼈만 남아 육탈된 시(詩)를 보러 이미 화석 되어 켜켜이 쌓인 퇴적층 속 고인돌과 독무덤 사이 흘러간 수세기를 껍데기가 집이 되고 나라가 되는 동안 원시시대 인류의 조상들이 남기고 간 흔적에서 역사를 읽고 삶을 읽으며 세월을 되새김질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이 시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적 화자의 눈앞에 펼쳐진 패총의 풍경은 하나의 텍스트로 제시된다. 시인은 조개껍질 더미를 “육탈된 시”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4연을 통하여 전개되는 노래를 통하여 뼈와 껍데기로 남은 패총이라는 텍스트에 살과 물을 보태는 해석 작업을 시도한다. ‘책’과 ‘말씀’은 재구성된 온전한 텍스트에 대한 시인의 갈망을 상징한다. 즉, 수세기 전 인류의 선사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재구성함으로써 그들의 삶과 사랑을 이해하고 지워져버린 그들의 역사를 복원시키며 결국에는 ‘말씀’으로 상징되는 그들 삶의 총체성과 진리를 복원하고자한다. 그런 시인의 염원이 텍스트로 드러난 것으로 이 시편을 이해할 수 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식물만이 물기 잃으면 시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도 탈수로 설명된다. 시편 전편을 관통하는 것은 생명을 이루는 근간인 물이 사라지고 없다는, 탈수의 이미지이다. 그리하여 4연의 종장에 나타난 ’논물‘은 중요하고도 각별한 의미로 부상하게 된다. 논물이 등장하기까지 시인이 패총을 묘사하는 데에 동원한 시어들은 모두 물기가 사라진 건조한 것들이다. 뼈, 육탈된 시, 정을 비운 몸, 껍데기, 깡마른 음계... 그 뼈에 살을 붙이면 육탈되기 이전의 온전한 시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몸, 혹은 물기 사라진 몸의 흔적으로 남은 존재들이 삶을 되찾는 것은 정을 다시 채우는 작업을 통하여 가능할 것이고 그것은 “원시의 숲/눈 먼 책들”을 다시 쓰는 일이 될 것이다. 껍데기가 모이고 모여 “집이 되고/ 나라가 되는 동안” 사라져버린 “바람 같은 말씀”을 찾는 시적 화자의 간절함이 연을 바꾸어가며 반복됨을 볼 수 있다. 패총에서 발견한 원시인의 뒷모습, 지워지고 잊힌 선사 시대인의 기억이 문득 그리운 것도 “재두루미 입술 묻는,”“논물이 그리운 봄날”이라는 풍경으로 인하여 더욱 간절할 것이다. 봄은 얼고 굳고 묻힌 것들이 부활하는 계절이므로... VI. 식물성 상상력과 동물성 상상력 김진길, 정용국, 김영순 시인의 시편들은 나무와 봄동이라는 식물성 대상과 말이라는 동물성 대상을 통하여 인간의 삶과 상처, 인종의 미덕과 생명의 강인함,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는 삶의 긍정과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먼저 「봄동」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삶의 가능성이 실현된 것을 발견한 시인이 그 생명에게 보내는 찬탄으로 가득하다. 늦동지 시린 밤을 고스란히 받아 이고 할머니 단속곳에 꼬깃꼬깃 접힌 채로 질기고 시퍼렇게 두벌잠을 털어내고 모든 생명을 얼어붙게 하는 겨울의 냉혹함은 ‘동지’, ‘시린 밤’, ‘대한 머리’, ‘두벌잠’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속도 들지 못했구나”는 표현에서는 불우한 처지에 놓인 존재들에게 보이는 시인의 동정심을 발견할 수 있다. 우호적인 계절에 자란 알찬 배추들과는 달리 엉성하게 속 못 채우고 익은 봄동의 모습에서 시인은 생명 가진 것들의 다양한 존재 방식들을 본다. 그리고 부족한 그들의 이지러진 존재방식을 이해하고 긍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시인의 상상력이 가장 재미있게 발현된 부분은 “할머니 단속곳에/ 꼬깃 꼬깃 접힌채로// 뒷심만 눌어붙은/ 천원짜리 지전 같이”일 것이다. 보잘 것 없고 비루한 모습으로나마 모질게 들러붙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증명하는 생명체의 모습이 이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마침내 봄동 오른 아침밥상을 “개똥쑥 잠꼬대가/ 쌉싸름한 아침 밥상”이라 하여 봄동과 개똥쑥이 가져다 준, 회복된 입맛을 소개한다. 그 봄동은 물리적 삶의 자양분을 시인과 독자에게 제공할 뿐만 아니라 고난을 참고 이기는 인종의 윤리학도 함께 선사할 것이다. “두벌잠을 털어내고”에서 볼 수 있듯, “한 번 들었던 잠이 깨었다가 다시 드는 잠”의 깊고 달콤한 유혹도 결연히 떨쳐낼 수 있는 강인한 삶을 독자들이 맛보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김진길 시인의 「벌목 1」은 짧고도 강한 인상으로 삶의 한 단면을 잘라 보여준다. 울울창창 솔숲에서 결국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상처가 깊은 길섶은/ 그 향기도 깊다”에 있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둥지 째 잘려나갈 때 풍기는 강렬한 향기! 그 향기는 수명을 다하고 말라 죽은 나무에서는 결코 나지 않을 것이다. 시조는 응축된 시편인 만큼 이 시편의 종장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초장이나 중장에 준비된 복선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 옛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늘 그럴듯한 복선이 준비되었다가 마지막에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다시 등장하기 때문이다. 초립동이가 길 가다 만난 도사가 쥐어 준 무명실은 종종 밧줄이 되어 주인공을 위기에서 구한다. 무 뿌리는 인삼이 되어 생명을 건져 주고 뼈다귀는 막대기로 변하여 요긴하게 쓰이기 마련이다. 이 시편에서는 초장의 ‘간벌’이 그 복선의 구실을 한다. 사전을 찾아보니 간벌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베어내는 대상에 따라 나쁜 형질의 나무를 베어내는 하층간벌과 큰 나무를 대상으로 하여 베어내는 상층간벌로 나눈다. 그 외 우세목을 솎아내는 택벌식 간벌, 남겨진 나무 간의 거리를 미리 정해놓고 기계적으로 솎아내는 기계적 간벌이 있다. 한국에서 흔히 사용하는 간벌방법으로는 앞으로의 미래목을 선정해 놓고 이를 방해하거나 미래목의 생장에 불필요한 것을 제거해내는 도태간벌 등이 있다.” 벌목이 단순히 나무를 베어내는 것을 뜻한다면 간벌은 선택적으로 베어낸다는 의미이다. ‘불필요한 것을 제거’해내는 것이 간벌의 주목적이라면 간벌이란 결국 경쟁과 승자독식을 원리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의 역학에 대한 비유로 비약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잘려나간 나무밑동/ 낭자한 유혈들”이라고 노래한 대목이 제대로 이해가 된다. 미래목의 생장에 불필요하다고 분류되어 잘려나가는 존재들... 그 낭자한 유혈들... 그래서 상처인가 보다. 그리고 향기인가 보다. 소나무 잘려 나간 길섶에서 짙은 솔향기 맡을 때 이제 독자로서 기억하게 되리라. 잉여로 간주되어 간벌당한 약한 존재들, 그 흘린 피의 향기가 저리 강하다는 것을...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생명과 사랑과 소망을 노래하자는 속삭임을 보여주는 시편이 김영순 시인의 「갑마장길 3」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는 씌어지고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생명은 다시 태어나고 모든 생명은 축복받아야 한다고 시인은 나직히 노래한다. 3연의 짧은 시편을 통하여 한 생명의 탄생을 위한 준비와 협력의 과정, 어린 생명체가 비틀거리고 일어서는 장면, 그리고 마침내 그를 위한 축원의 서사가 펼쳐진다. 새벽 산마장에 산기가 긴박하다 아마 ‘수고했다’ 그 말을 건네는 거다 이제 경마장도 네 길일 수 있겠다 유념할 대목은 “가고픈 길이 아니라/ 불러야만 가는 길”이다. 자유로운 야생마로 살지 못하고 권력의 지배를 받아야하는 무력한 존재로 태어난 갑마장의 어린 말에 대한 측은지심이 시행의 저변에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 조선 시대에 최고 등급의 말을 갑마(甲馬)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말들만 모아서 기르던 곳이 갑마장이다. 갑마장의 말들은 조정의 부름에 따라 주어지는 임무들을 수행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 갈 길을 선택할 수 없고 부름에 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갑마장 어린 말에게 주어진 운명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형 같은 생애에도 사랑이 있고 행복이 있고 보람이 있을 것이다. “햇살,” 그것도 “생애 첫 햇살 오거든”이라고 하여 어린 말이 경험하게 될 축복의 시간을 기원하는 어머니의 심경이 종장에 잘 드러나 있다. 3, 5, 4. 3이라는 친숙한 종장의 리듬 속에 알맞게 부린 어휘들의 음악성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즐겨 암송하는 구절이 될 것이라는 강한 예감으로 다시 읽는다. “생애 첫 햇살 오거든/ 눈 감아라 사랑아.” * 필자 약력: 200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평택대학교 미국학과 교수.
| ||||
|
첫댓글 김경옥 선생님 잘 보았습니다 나눔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조 평론 감사합니다.
긴장감으로 허리를 다시 곧추세우며
읽고 또 봅니다.
좋은 자료를 올려주셔서 고맙게 읽습니다
앞으로 자주 들러 지혜를 구하려합니다~^^
섬세하고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좋은 우리 시조를 아름답게 읽고 진한 감동으로 평하여 주신,
박진임교수님 감사합니다.
시조의 마당에 등 기대고 산다는게 너무 눈부셔,
생애 첫 햇살 오거든 눈 감아라 사랑아!
김경옥 선생님 좋은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