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김희자 선생님의 자녀 결혼식에서 溪松( 李寬浩 )선생을 만나서 중국 장가계에 다녀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 본 까페 쥔장 晶山( 洪基潤 ) 선생이 까페에 글을 좀 올리라고 말하였다. 마땅한 것이 없고 마침 중국을 다녀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메모와 기억을 되살려 기록을 하고 있던 차에 올려 보기로 하였다. 어쭙잖은 글이지만 이미 다녀오신 분들은 다시 한번 되새겨 보시고 다음에 가실 분들은 약간의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잘 못된 곳이 있으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분(화려한 백수님)이 올리신 것과 중복이 되어 죄송합니다.
八中 선생님과 초연회 화백들이 갈 때 같이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때는 시간을 내지 못하고 뒤늦게 일반 여행자들을 따라가서 스케치도 못하고 사진만 몇 통 찍어왔다. 관광을 떠나기 전에 책과 인터넷을 뒤져서 많은 자료를 뽑아 가지고 갔지만 현지에서는 여행사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그래도 사전에 준비를 해 가지고 가야 한다. 모든 것은 아는 것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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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는 三不이라는 말이 있는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 첫째 중국의 명소를 다 가볼 수 없고,
- 둘째 중국의 음식을 다 먹어 볼 수가 없고,
- 셋째 중국의 명문장을 다 읽어 볼 수가 없다." 는 말이라 한다.
중국에 태어난 사람도 그러한데 7박8일의 짧은 일정으로 상당히 넓은
지역을 돌아다녔으니 그야말로 주마간산이요 수박 겉 핥기였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제대로 된 문화여행을 해 볼 생각으로 여행 중에
메모했던 것을 토대로 책에서 보고 또 남에게 들은 바를 보충하여
기록 해 보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은 ※로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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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발 3월20일
3월20일 부터 3월37일 까지 중국을 여행하게 되었다. 3월20일 먼동이 틀 무렵 버스를 타고 아침 8시경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는 여행사 사장과 일행들이 나와 있었다. 한시간 남짓 출국절차를 마치고 일행 40명은 아시아나 항공 비행기에 올라 9시 50분 인천공항을 이륙하였다. 마침 광주와 홍콩에서 발생한 급성호흡기 질환으로 중국여행을 취소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30년 생활전선에서 달련 된 용감한 일행들은 마스크를 쓰고라도 가자고 우겨서 가까스로 성사되었다. 더구나 그 날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시작한 날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창 밖을 보니 비행기는 구름 위를 날고있었다. 날씨가 맑아서 구름사이로 안산 시화호 방조제와 대부도가 선명하게 보였다. 중국과 우리나라는 1시간의 시차가 있다. 잠시 후 오전 11시경 북경공항에 도착하였다. 입국절차를 마치고 시내에 들어가면서 차창 밖으로 펼쳐진 거리의 모습을 보았다. 북경은 도시계획이 잘된 대도시 같았다. 길은 넓고 대형고층건물이 줄지어 서있는데 우리나라의 건물과 달리 외형이 고풍스럽게 잘 꾸며져 있었다. 시내 가운데 있는 간선도로는 끝이 안보이게 쭉쭉 뻗어 있다. 한국인이 경영한다는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는데 한식, 중국식, 일식, 혼합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북경 시내관광에 나섰다.
◆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은 사회주의국가다. 국토 면적은 면적이 약 960만 평방km 한반도의 44배이며. 전 세계 육지면적의 15분의 1이다. 56개 종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인데 그 중 한족(漢族)이 94% 이상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55개의 소수민족은 10%도 안 된다. 조선족(朝鮮族)도 그 중의 하나다. 소수민족은 장족(莊族 17%), 만족(滿族 11%), 회족(回族 10%), 묘족(苗族), 위구르족(uygur) 순이며, 조선족(2.1%)은 200만 명으로 12번째다. 소수민족은 중국의 민족정책에 따라 각자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그대로 사용하고 문화와 풍습을 보존하며 생활한다. 인구는 13억으로 세계제일이며, 남북한의 20배가 넘는데 13억 인구 중 8억이 농민이다. 13억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4억 정도로 추정된다. 행정단위가 너무 커서 조사를 제대로 할 수 없고 통계는 늘 뒷 북을 친다는 것이다.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아이를 한 명밖에 못 낳게 되어있지만(농촌지역, 소수민족은 2명까지 허용) 남아선호사상이 강하여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계속 낳다 보니 호적 없는 딸이 많고,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아이를 낳아서 시골의 임시 호적에 올려 두었다가 나중에 벌금을 내고 본 호적에 올린다. 그러니 인구 조사가 제대로 될리가 없다.
중국 국기(國旗) 오성홍기(五星紅旗)는 1949년 공산당정부 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결정했다. 큰 별이 중국공산당을 상징하고, 나머지 4개의 작은 별은 인민(노동자, 농민, 도시소자산계급, 민족자산계급)을 상징한다. 표준시는 북경을 기준으로 국토가 넓은 만큼 2시간 이상차이가 있다. 중국의 문자인 한자(漢字)는 선과 획의 조화로 이루어진 상형문자(象形文字)이며 약 6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현존하는 갑골 문자만 하더라도 3000년이 됐으니 세계최고이다. 상형문자를 기초로, 회의(會意), 형성(形聲)문자로 발전하였으며 이 중 형성문자가 6만 자다. 그러나 한자는 복잡하고 사용하기 불편하기 때문에 1956년 이후 한자를 간소화시킨 2225자의 간체자(簡體字)를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어는 한족이 사용하는 한어를 4가지로 음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성조가 있어 음악적으로 들린다. 화폐는 인민폐(人民幣)로 단위는 원(元, 위엔) 지폐는 5원, 10원, 50원, 100원 각(角), 분(分)이 있다.
1949년 공산혁명 후 잠자던 거인 중국은 1980년대 등소평(鄧小平)이 개혁개방정책 노선을 채택하여 인민을 혁명에서 개혁개방으로 끌어내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 개방개혁을 의미하는 등소평의 유명한 말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는 우리나라의 60년대~80년대 발전이 자극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은 개혁개방이후 20년 동안 많은 발전을 하였다. 세계 화교 자본 유입과 값싼 노동력으로 세계의 공장을 유치하면서 고도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와는 1993년 수교이래 해마다 교역량이 늘어나고 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우리나라 대중문화를 좋아하는 한류(韓流)열풍도 그 같은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2008년 올림픽과, 2010년 상해세계박람회를 유치해 놓고 있기 때문에 21세기에 가장 떠오르는 나라로 주목받고 있다.
◆ 북경 (北京)
2003년 3월 20일 (북경1일)
북경이 처음으로 수도가 된 것은 금나라 때이며, 원(元)나라 때는 대도(大都)라 했고, 연경(燕京)이라고 했다. 지금의 도시는 주로 명(明)나라 때 건설된 것이다. 1420년에 영락제(永樂帝)가 북경(北京)이라 하였는데, 1644년 청(淸)나라가 만리장성 밖 심양(瀋陽)에서 수도를 옮겨왔다. 현재우리가 보는 고궁이나 천단은 거의 이때에 완성된 것이다. 1949년 공산당이 중화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고나서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북경의 면적은 1만 7800 km2. 인구는 약 1천 만이다. 차창 밖으로 외국 대사관들이 모여있는 외교가 거리가 보인다.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오기 위해서 대사관 진입 소동을 TV에서 본 곳인데 오늘은 대체로 한적하다. 도로 주변에는 허름한 복장의 사람들이 다니기도 하고 담벼락 주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뭔가를 먹고 있다. 북경의 교통수단은. 전기 기차와 지하철, 버스가 있다. 버스를 기차(汽車)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이미 없어진 전차와 같은 전기버스, 트롤리버스가 있다. 버스(公共汽車)종류는 일반, 좌석, 쌍둥이버스 2층 버스, 플러스버스(두칸)가 있으며, 관광버스는 '여유버스(旅遊汽車)'라고 한다. 지하철은 지철(地鐵)이라 하는데 타 보지는 못 하였다. 택시(出租汽車)는 거의 빨간색인데 택시강도를 방지하기 위해서 운전사와 객석 사이가 철망으로 막혀있다. 중국의 치안상태가 좋지 않다는 증거다. 택시와 승용차는 독일(폴크스바겐)제와 일본(닛산, 도요다)제가 많다. 국산 승용차를 거의 볼 수 없는데 중국진출이 늦었기 때문이다. 독일이 중국에 진출한 것은 청나라 말기부터였다. 북경을 자전거 천국이라 하는데 일반 서민들은 자전거를 많이 탄다. 모든 자전거에는 등록된 고유 번호가 있다. 아침 출근 시간에 수 천대의 자전거가 물 흐르듯 움직이는데 마치 검은 파도와 같다. 도로 양편에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잘 되어 있고 도시 전체가 평지이기 때문에 자전거 통행이 용이하다. (서울은 길이 좁고 경사가 많아서 자전거 통행이 맞지 않는다.) 수(脩)나라 때 건설한 세계최대규모 경하운하(1,800km)는 운하기능은 상실되었지만 하천으로 활용되고 있다. 북경은 도시 전체가 문화재인 만큼 대충 돌아본다고 해도 최소한 5일은 필요하다. 자금성, 만리장성, 이화원, 천단, 명13릉을 북경 관광 5대 명소라 한다.
◆ 천단 (天壇)
중국에서 첫 번째 관광으로 천단(天壇)을 보게 되었다. 북경의 남쪽에 있는 천단은 명, 청조 황제들이 오곡풍양(五穀豊穰)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사직단과 원구단(圓丘壇)을 합친 것과 같다. 주위는 6km, 273평방M, 87만평, 자금성의 3배 넓이다. 명의 영락제 때(1406년)에 세워졌고, 청의 건륭제 때(1420년)에 개축되었다. 천단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내벽과 외벽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북쪽의 벽은 원형으로서, 하늘을, 사각형은 땅을 상징한다. 이것은 중국 고대의 '천원지방'(天圓地方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사상에 부합하는 것이다. 북쪽 벽은 남쪽 벽에 비해서 높은데, 이것은 '천고지저'(天高地低: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의 의미다. 천단은 다시 내단과 외단으로 구분하는데, 주요 건축물은 내단에 있다. 입구에서부터 엄청난 인파다. 조선족 동포인 가이드는 일행을 잃어 버리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으라고 당부한다. 정문은 정양문(正陽門)인데 돌로 만든 조각이 뛰어나 볼만하다. 황제가 다니던 문을 지금은 아무나 다닐 수 있으니 민주주의가 좋긴 좋은 것이다. 천단은 3구역으로 나누어 저 있는데 첫 번째가 환구단(환丘壇)이다. 평지에 백옥석 난간으로 둘러싼 3층 석조 원대로서 상층에 한가운데 천심석(天心石)이 있다. 동지날 황제가 친히 이 곳에 와서 하늘에 국태민안을 기원하였다. 도중에 회음벽(回音壁)이 있는데 벽에 대고 말을 하면 둘러쳐진 담장을 따라 반사되어 메아리처럼 들린다 고 하며 중국인들이 벽에다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서 분간할 수 없었다. 황궁우(皇穹宇)는 신주를 모셔놓는 사당인데 높이 19.5m, 직경 15.6m, 목조건물이며, 지붕은 1단으로 8개 기둥에 천정이 웅장하고 화려하다. 마지막 제단이 기년전(祈年殿)인데 황제가 풍년을 빌던 곳이다. 삼중 처마로 된 원형 건물인데 높이는 38m이다. 둥근 원형의 대리석 월대는 '天圓''地方'을 나타낸다. 전각 내부의 천정의 단청은 붉은 색 바탕에 황금빛으로 문양을 새겨 화려하게 치장해 놓았다. 중앙의 '용정주(龍井柱)'는 일년 사계절을, 가운데 12개의 기둥은 12개월을, 바깥쪽의 12개 기둥은 12시진(2시간)을, 내외 처마 기둥 24개는 24절기를 각각 상징한다. 기년전 앞 좌우양쪽 건물에는 제사 때 쓰였던 물품과 가마와 고전악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 볼 수가 없다. 나오는 길에 긴 복도에서 한 무리의 노인들이 비파와 비슷한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화투보다 좁고 길다. 돈 한푼 안 걸고서도 하루종일 재미있게 즐긴다고 한다. 중국도 노인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의학과 사회주의 때문에 장수하기 때문이다. 천단 주변에는 수목이 울창하다. 우리나라의 나무와 같은 수종인데 고목 나무 한 그루까지도 잘 보호를 하고 있어서 색다른 정취를 느끼게 한다.
◆ 유리창 (琉璃廠) 거리
유리창(琉璃廠)은 300년의 전통을 지닌 골동품 거리로서, 원래 유리창은 유리 기와 등을 굽던 공장이 밀집해 있던 곳이었는데 점차 전국 각지의 진귀한 물건들이 이곳에 나와서 팔리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서울의 인사동(仁寺洞)처럼 전통물품과 골동품, 도서, 화첩을 파는 거리가 되었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 중 하나인데 50여 개의 상점들이 고서, 도자기, 나침반, 화첩, 붓, 벼루, 연적 등 골동품과 역사, 예술 서적을 팔고 있다. 골목입구에 서서 바라보니 길 양측에 고전미(古典味)가 물신 풍기는 청조대의 건물들이 정연하게 처마를 맞대고 줄지어 있다. 면적을 늘리기에 바빠 누더기가 되어버린 인사동과는 대조적이었다. 유리창 거리는 우리나라의 문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곳이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구 한말까지 새로운 선진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창구였다. 연행사절들이 북경에 오면 이 유리창거리에서 책과 화첩 등을 구입했는데 허균(許筠)은 1614년 이곳에 왔을 때 한꺼번에 4000권의 서적을 사 갔다 한다. 조선시대 제일의 이단아(異端兒)의 사상적 배경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점포에는 조선시대 학자들과 필담(筆談)한 글씨를 간직하고 있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 없다. 가게 몇 곳을 들어가 보았지만 말이 안 통해서 붓 한 자루 사지 못하고 구경만 하다가 나왔다. 이 거리 어딘가에서 이국의 풍물을 접하고 관찰하는 조선 선비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일행들이 유리창 거리를 빠져나오는데, 허름한 차림의 50대 남자가 뒤 따라 오면서 일행중의 한 사람의 얼굴을 조그만 접시 속에 그려 가지고 3천 원에 사라고 졸졸 쫓아다닌다. 사지 않겠다고 뿌리치고 면박을 주어도 막무가내로 따라 다닌다. 자존심 같은 것은 이미 없다. 보다 못해서 그림을 보니 사장님과 얼굴이 닮게 잘 그려졌으니 사 주라고 말해 주었다. 3천 원을 받아들고 몇 번인가 나에게 까지 인사를 하며 좋아한다.
◆ 잡기 (雜技)
기예 쇼(서커스)를 관람하러갔다. 우리나라는 곡예(曲藝)라 하고, 북한은 교예(巧藝)라 하는데, 중국에서는 잡기(雜技)라 한다. 극장은 아주 오래된 건물이다. 접시돌리기, 자전거 타기 기둥 오르기 등 수준이 높다. 출연자들이 모두 어리다. 어린 나이에 그런 재주를 부리니 기특하다기보다는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는 생각음을 지울 수 없다. 열심히 공부해야 할 나이에 관광수입을 위해서 저런 공연을 하는 아이들을 보니 사회주의 체제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공연이 끝나고 길을 건너는데 중국사람들은 차가 오건 말건 건너간다.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인 조어대 (釣魚臺) 호텔에 도착했는데 시설이 훌륭했다. 외국 유명인사들이 다녀간 유명한 고급 호텔이다.
◆ 만리장성 (萬里長城)
2003년 3월 21일 (北京2일)
6시에 모닝콜, 7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호텔을 출발하였다. 오늘은 만리장성을 관광한다. 만리장성은 유네스코 인류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중국 제일의 관광 코스다. 호텔 앞에서 관광버스에 올라 북경시내를 벗어나 한참을 가도록 차창 밖으로 끝없이 넓은 평야만 보인다. 한 시간쯤 더 갔을 때 오른쪽으로 큰 바위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북경에 와서 처음으로 보는 산이다. 이 부근 어딘가에 명13릉이 있을 텐데 우리의 관광 예정에는 들어있지 않다. 만리장성에 앞서 먼저 가 보려던 용경협(龍慶峽)과 빙등제(氷燈祭)관광은 현지 사정으로 취소되었다. 호수에 어름이 떠다녀서 배를 탈수가 없기 때문이라 했다. 용경협은 북경 외곽에 위치한 팔달령에서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다. 가파른 기암기봉(奇巖奇峰) 봉우리 사이에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가 남방 산수의 부드러움과 북방 산수의 웅장한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다. 리강(離江)의 경치를 축소해 놓은 것과 같다하여 "작은 계림(小桂林)"이라 불리는 명소다. 북경에서 수 천리 떨어져 있는 계림에 갈 수 없는 황제를 위해서 계곡의 물을 막아서 만들었는데 중국 정부가 최근에 관광명소로 개발한 곳이라 한다. 차창 밖으로 가파른 바위산 위로 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만리장성은 발해만(渤海灣)의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다. 중앙 아시아 서쪽 가욕관(嘉 關)까지 지도상 총 연장은 2,700km이나, 실제는 6,400㎞로 만리가 넘는다. 춘추전국시대 인 기원전 5세기 제(齊)나라 때부터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여러 나라들이 쌓았던 것을 진시황이 기원전 3세기경에 중국을 통일하고 각 지역의 성을 연결 한 것이 오늘날의 만리장성이다. 만리장성은 6개 구역으로 나누는데 첫째, 북경 팔달령에 있는 장성과, 천진, 화북성, 산시성, 내몽고 자치주, 감숙성에 있는 장성이다. 북경의 관문인 거용관을 보고 싶었지만 우리는 그곳을 그냥 지나왔다. 차창 밖으로 말을 탄 장군 석상과 바위에 새긴 붉은 글씨가 보였는데 서달의 동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만리장성의 관광코스는 여러 곳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가는 곳은 중국정부가 많은 관광객을 소화하기 위하여 케이블카 시설을 해놓은 곳이다.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 보면 이곳을 지날 때 노숙을 하면서 술로 먹을 갈아 만리장성 벽에다 글을 썼다는 내용이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다 지워져 흔적도 없겠지만 그 장소라도 알 수 있으면 한번 보고싶었다. 연암은 그 때의 일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무령산을 따라 배로 광형하를 건너 밤에 북구를 지났는데 때는 이미 삼경이었다. 겹으로 된 관문을 나와 장성아래 말을 세우고 그 높이를 헤아려 보았다. 십여 길은 될성싶었다. 붓과 벼루를 꺼내어 술을 부어 먹을 갈고 성을 어루만지며 글을 썼다. 건륭 사십오년 경자 팔월칠일 조선 박지원 이곳을 지나다.」
(余循霧靈山/ 舟渡廣 河/ 夜出古北口/ 時夜已三更/ 出重關/ 立馬長城下/ 測其高/ 可十餘丈/ 出筆硯/ ?酒磨墨/ 撫城而題之/ 建隆四十五年/ 庚子八月七日/ 朝鮮 朴趾源 過此/ (燕岩集卷14 : 夜出古北口記)
주차장에 도착하니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차들과 사람들로 넘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보니 주변의 산은 생각보다 가파르고 높아 거의 40도 경사는 되는 것 같다. 이 정도의 산이면 성을 쌓지 않아도 적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적으로 성이 견고함과 상관없이 망할 나라는 모두 망했다. 무모한 장성의 축조는 어김없이 민초들의 곤궁과 분노로 이어 지고 천하를 다시 대란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는지 모르지만 진시황이 죽고 2대를 넘기지 못하고 3년 뒤에 망했다. 장성이 허술 하여 외적의 침입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진승(陳勝), 오광(吳廣), 항적(項籍)등 민중의 지도자들이 폭정에 대항해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장성을 훌륭하게 개축했던 명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명 태조(洪武帝: 朱元章)는 북쪽 오랑캐와 동북지방의 만주족이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였지만 명나라 마지막 황제는 반란군 때문에 자살하고 결국 만주족인 청나라에 망했다. 수많은 돈대와 봉화대가 있었지만, 봉화를 올리는 사람이 없었고 반란군이 코앞에 나타나도록 황제와 측근들은 알지 못했다. 만리장성과 자금성으로 반란군을 막지 못한 것은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임을 몰랐던 것이다. 성벽을 바라보며 부질없는 역사를 짚어보고 있는데 십분도 못되어 장성 위에 도착했다. 3월 중순인데도 날씨도 쌀쌀하고 산비탈에는 아직 잔설이 하얗게 남아 있다. 계단을 올라 성벽에 기대어 건너편 망루를 바라보았다. 천년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장성은 거의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있다. 장성이 지금까지 잘 보존된 것은 관리를 잘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축조기술 때문인 것 같다. 장성을 쌓은 바위는 한 개가 1톤씩 된다. 상층부 난간과 망루는 벽돌(塼)로 쌓고 위를 덮었는데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정교하다. 장성의 높이는 아랫부분이 9m이며, 윗 부분이 약 4.5m, 넓이가 약 9m다. 총구(銃口)가 뚫려 있는 톱날 모양의 성벽이 위쪽에 설치되어 있고 약 100m 간격으로 망루(돈대: 墩臺)가 설치되어 있다. 계단을 따라 성벽을 위를 걸어서 망루 앞에까지 올라갔다. 바닥은 비탈이고 곳곳에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워서 벽을 잡지 않고는 걸어 갈 수 없는 곳도 있다. 많은 관광객들은 모두들 좋은 위치에서 구경을 하며 사진을 찍느라고 북적거린다. 정상의 망루 앞에는 사람 키 높이의 자연석에 "장성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남아가 아니다. "부도장성 비호한 (不到長城 非好漢)이라는 모택동의 글씨가 새겨있는데 글씨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돈을 받고 있었다.
어느 책에서 보니 이런 말도 있다 "장성에 올라서 한쪽 면만 본다면, 대장부가 아니지" (도장성지간 일면비호한 到長城只看 一面非好漢) 만리장성의 거대한 구조물에 감탄만 할 뿐 숨겨진 이면(裏面)의 사실을 살필 줄 모르고 찬탄하는 단순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말이다. 만리장성은 옛날 군주들의 부도덕하고 무자비한 학정의 상징적 유물이다. 맨손으로 오르기도 만만찮은 산꼭대기에다 그 옛날에 이처럼 큰돌을 날라서 성을 쌓은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축성할 때 중국의 죄수와 농민 외에 변방국가들의 장정들까지 동원했다. 한번 끌려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하니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한이 서려 있는지 모른다. 아무리 보아도 만리장성은 국토 방어에 크게 유용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곳이 점령되면 성으로 이어진 곳이 모두 점령당할 수가 있고 병사 한 두 명을 매수하면 많은 군사가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이 인공위성에서도 보인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거짓말이라고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축조물이라서 생겨난 허풍에 불과하다. 그리고 장성 위를 마차를 타고 다녔다고 하는 말도 그렇다. 다른 곳에는 넓고 평탄한곳이 있는지 몰라도, 이곳에서 보니 불가능한 이야기다. 또한 장성을 세계에서 가장 길고 거대한 무덤이라고 하는데 공사를 하다가 사람이 죽으면 그 자리에 바로 묻었으니 맞는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성을 쌓느라고 피, 눈물 흘리며 죽었고 지금은 매년 수백만의 국내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관광으로 먹고 살고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중국 사람들도 자식 교육을 위해 방학 때면 자녀들을 데리고 만리장성 구경을 많이 온다고 한다. 건너편 먼 산을 보니 세월은 아득한 과거로 되돌아간 듯, 장성은 흰눈이 쌓인 가파른 산 능선을 따라 굽이굽이 파란하늘 속으로 아스라이 뻗어있다. 중국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한 마리의 용의 모습으로..................
登 萬里長城 (拙作一首)
萬里遊客 今日登 (만리원객 금일등) 만리 밖 나그네 오늘에야 와보니
高峰峻嶺 一帶天 (고봉준협 일연성) 높고 험한 봉우리 하늘로 이어져 있어
千載去國 興亡史 (천재거국 흥망사) 천년간 흘러간 나라의 흥망사를
三月雪中 朔風傳 (삼월잔설 전삭풍) 삼월 잔설 속에 찬바람이 전해주네
遼東山海 西嘉 ? (요동산해 서가욕) 요동 산해관에서 서쪽 가욕관까지
堅壁高壘 萬里連 (견벽고루 만리연) 견고한 성벽, 높은 망루, 만리에 이어져
去歲荒民 血淚處 (거세황민 혈루처) 지난 세월 거친 백성 피눈물 흘린 자리에
今世人民 得小錢 (금세인민 득소전) 오늘은 인민들이 잔돈을 벌고 있네
※山+谷= :골 욕
※ 만리장성 이야기............................................................
만리장성에는 이야기도 많다. 우리 속담(俗談)에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는다"는 말이 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지만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좋은 뜻인데 정작 중국에서는 하루 밤의 일로 남에게 평생 짐을 떠넘기는 나쁜 뜻으로 쓰이는 것 같다. 같은 말을 두고 한국과 중국의 쓰임이 전혀 다르다. 만리장성에는 여인들의 한이 서린 재미있는 이야기(民譚)가 많은데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민담(民譚: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
민담(民譚) 1.............................................................
어느 산촌 마을 외딴집에 에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부부는 열심히 일하여 살림도 늘어나 어느 정도 살만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관청에서 만리장성 공사장에 갈 차례가 되었다고 통보하였다. 젊은 부부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관의 명령을 거절할 수도 없고 한번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으니 영락없이 생이별이다. 예정된 날은 하루하루 다가와서 내일이면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기약 없는 먼길을 떠나야한다. 내외가 이 생에서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별의 슬픈 밤을 보내고 있는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벌써 관원들이 왔는가 하고 문틈으로 밖을 보니 남루한 행색의 사내가 서있다.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하루 밤 쉬어가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 잠시 후 여인은 문을 열고 여인이 혼자 사는 집이라 남정네를 들일 수 없다고 말하였다. 사내가 다시 말하기를 날씨는 춥고 밤이 깊었으니 헛간이나 부엌이라도 좋으니 하룻밤 재워 달라고 말했다. 잠시 후 여인은 사내를 집안으로 들이고 따뜻한 저녁밥까지 차려 먹이는 것이었다. 여인은 사내에게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사내는 고향에서 사소한일로 관원과 싸우고 잡히면 만리장성 공사장에 끌려가게 될까봐 쫓기는 신세가 되어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나섰다고 말하였다. 이번에는 사내가 여인에게 혼자 사는 연유를 물었다. 저의 남편은 몇 해 전에 만리장성 공사장에 갔는데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이곳에서 나와 같이 부부가 되어 사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이게 웬 떡" 오랜 유랑생활에 지친 사내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였다. 여자와 집과 재산까지 생겼으니 호박이 넝쿨 채로 굴러온 샘이었다. 여인은 사내에게 목욕을 하게 하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고 방으로 들게 하였다. 난생처음 행복하고 편안한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사내가 문을 열고 나가 보았더니 관원들 이였다. 당신이 이 집 주인이냐고 물었다. 사내는 "그렇소 내가 이 집 주인이이요"하고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관원들은 양쪽에서 에워싸듯 사내를 데리고 갔다. 사내는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듯 여인과 꿈같은 하룻밤을 보낸 집을 몇 번인가 뒤 돌아보았다. 이들이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것을 바라 보고있던 여인은 집으로 돌아와서 대문을 닫아걸고 다락에 숨어있던 남편을 나오게 하였다. 어리숙한 나그네는 하룻밤을 자고 만리장성 쌓으러간 셈이고 영리한 여인은 하룻밤 에 남편을 사지에서 구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民譚 2.............................................................................................
어느 젊은 남녀가 결혼하여 한달 여 만에 남편이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에 징용을 당하게되었다. 한번 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젊은 부부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며 그 일이 언제 끝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죽은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편을 부역에 보낸 여인이 혼자 살고 있는 외딴집에 어느 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찾아와서 하룻밤만 묵어 가게 해 달라고 하였다. 여인네가 혼자 살기 때문에 과객을 받을 수가 없다고 했지만 날은 이미 저물었고 이 근처에 인가라고는 이 집밖에 없으니 헛간이라도 좋다고 하여 마지못해 허락하게 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보아하니 이 외딴집에 혼자 살고 있는 듯 한데 무슨 사연이 있나요?" 여인은 남편이 장성 쌓는 일에 가게 된 그 동안의 사정을 말 해 주었다. 밤이 깊어지자 나그네가 여인을 보고 말하기를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을 기다린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당신의 평생을 책임질 테니 나와 함께 멀리 도망가서 행복하게 삽시다. 이렇게 살다가 늙어 죽는다면 인생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잠시 후 여인은 사내의 뜻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뒤, 그대신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하였다. 나그네는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말해보라고 했다. 여인이 말하기를 "제가 새로 지은 남편의 옷을 한 벌 싸 드릴 테니 내일아침 날이 밝는 대로 제 남편을 찾아가서 갈아입을 수 있도록 전해주시고 그 증표로 글 한 장만 받아오라는 부탁입니다. 잠시라도 함께 산 부부간의 의리가 있는데 만리장성 부역장에 가서 언제 올지 모르는 어려움에 처한 남편을 버리고 그냥 당신을 따라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어차피 살아서 만날 수 없는 남편이지만 옷이라도 한 벌 지어 입히고 나서 당신을 따라간다면 마음이 좀 홀가분해질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저는 평생을 당신을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사내는 여인의 말대로 하기로 하였다. 두 남녀가 같이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었다. 여인은 장롱 속에서 새 옷 한 벌을 꺼내 보자기에 싸더니 사내 앞에 내놓았다. 나그네는 하루라도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와서 여인과 함께 살 마음으로 서둘러 길을 떠났다. 장성 부역장에 도착하여 감독하는 관리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아무게 에게 옷을 갈아 입히고 글 한 장을 받아 가야 한다는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옷을 갈아 입히려면 공사장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한 사람이 작업장을 나오면 그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면서 잠시 교대를 해 줘야 한다고 말을 한다. 나그네는 여인의 남편에게 옷 보따리를 건네주며 말하였다. "이 옷을 갈아입고 빨리 편지를 한 장 써 주시오." 나그네는 여인의 남편이 옷을 갈아입을 동안 관리가 시키는 대로 별 생각 없이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옷을 갈아입으려고 보자기를 펼치자 옷 속에서 편지가 한 장 나왔다. "당신의 아내입니다. 당신을 공사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하는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것을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시면 이 옷을 갈아입는 즉시 집으로 돌아오시고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거나 허물을 탓하시려면 그 남자를 다시 보내주십시오." 라고 써 있었다.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서 빼내주기 위해서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일을 용서하고 사는 것이 좋지, 어느 바보가 평생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만리장성 공사장에 다시 들어가겠는가? 옷을 갈아입은 남편은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와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民譚 3................................................................................................
한 사내가 관리와 싸우고 신변에 위험을 느껴 정처 없이 유랑의 길을 가고 있었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들을 걷다 보니 어느덧 해는 지고 밤이 되었다. 지친 몸으로 한 마을에 이르러 한 줄기 빛을 발견하고 가까이 가보니 어느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었다. 나그네는 주인을 불렀다. 한참만에 문을 열고 그 앞에 나타난 사람은 젊은 여인이었다“여인이 혼자 있는 집에 방이 한 칸 뿐이라 재워 드릴 수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보십시오”라고 말하고 들어간다. 사내는 부엌이나 헛간이라도 좋으니 하룻밤 재워 달라고 간청했다. 잠시 후 다시 나온 그 여인은 사내를 방안으로 들이고 따뜻한 밥까지 지어 먹이니, 온 종일 먼길을 걸어 지친 나그네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잠시 후 곤한 잠에서 깨어난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희미한 등잔불 밑에 여자혼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깊은 밤 외딴집에서 남녀가 한방에서 밤을 보내게 된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부부가 되어 같이 살기로 언약을 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한 몸이 되었다. 한바탕 운우의 정을 나누고 나서 여자는 "이제부터 이 집 주인은 당신이요" 하면서 다시 사내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정성껏 차린 아침상을 물리고 여인과 한께 살아갈 행복한 나날을 생각을 하고있는데 대문을 흔드는 소리가 났다. 여인은 "이제부터 당신이 이 집 주인이니까 당신이 나가 보라 "고 말했다. 아침부터 어떤 잡놈이 남의 집에 와서 시끄럽게 하나 싶어 나 가보니 관원들이었다. "당신이 이 집 주인이냐?’하고 묻는다. 영문도 모르는 사내는 "그렇소 내가 이 집 주인이요" 하고 턱을 내밀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것으로 그 사내의 인생은 끝이었다. 찍소리 못하고 장성 축조현장으로 끌려간 것이다. 젊은 여인이 자기의 남편을 지키기 위해서 그 사내를 유혹한 것이었다. 그 날 이후부터 "하룻밤 자고 만리장성 쌓으러 간다" 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불쌍한 사내는 하루 밤 자고 평생 헤어나지 못할 구렁텅이에 빠지고 여인은 나그네를 죽음의 부역에서 구해 낸 것이다.
民譚 4.................................................................................................
낙양성에 살고있던 한 젊은이는 과다한 세금과 탐관오리의 횡포에 못 견디어 고향을 등지고 정처 없는 유량의 길을 나서게 되었다. 무작정 걷고 또 걷다보니 어느덧 해는 저물고 밤이 되었다. 깊은 산중에서 산짐승 소리에 겁에 질려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저 멀리에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한걸음에 그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에 도착하니 작은집 몇 채가 있는 산촌이었다. 작고 초라한 초가집에서 불빛이 가늘게 새어나오는데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간에 애처로운 여인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젊은이는 무슨 사연인지 한번 알아나 보자는 심정으로 사립문을 밀고 들어섰다. "주인장 계십니까? " 몇 번을 부르니 방문이 열리면서 소복을 단정히 입은 처녀가 나왔다. "길가는 나그네인데 날이 저물고 허기에 지쳐 찾아왔으니 하룻밤만 묵어 가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처녀는 "저희 집은 우환이 있어 그러하오니 다른 집으로 가 보십시오" 하고는 돌아서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젊은이는 다시 "그럼 헛간이라도 좋으니 하룻밤 이슬이라도 피하도록 도와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처녀는 젊은이를 방으로 들게 했다. 젊은이가 방으로 들어가 보니 늙은이가 자리에 누워있었다 젊은이는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사연을 물었다 노인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 갈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더니 "내가 나이 60에 첫딸을 얻어 고생고생 20살이 되도록 키웠는데 이 고을 관리가 자기의 첩으로 달라고 해서 거절을 하였더니 나를 장성을 쌓는 부역에 차출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만리장성 축조장으로 끌려가는데 필경 먼 길을 가다가 죽을 것이요, 내가 없는 동안 누가 저 아이를 지켜줄 것이며, 내 나이 이미 80인데 어찌 부역기간 10년을 마치고 살아 돌아와 내 딸과 다시 만날 수 있겠소" 라며 이야기했다. 부녀의 사연을 듣고 있던 젊은이는 자신도 탐관오리의 횡포에 시달려 고향을 떠나 고달픈 세상살이를 하고있는 것을 생각하며 기왕 자기야 할 일없이 떠도는 인생 내가 저 노인 대신 부역에 가면 저 두 부녀는 행복하게 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대신 부역을 대신 가겠으니 두 분께서는 그전처럼 사시라고 말했다. 그러자 두 부녀는 " 아무런 인연도 없는 젊은이를 사지로 가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나는 살만큼 살았으니 죽더라도 자기가 가는 것이 옳다"고 했다. 그때 처녀가 말하기를 "그럼 당신과 제가 부부의 인연을 맺으면 우리 아버님이 당신아버님도 되니 당신이 대신 부역을 가도 되겠군요. 미천하나만 저의 청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밤이 깊도록 세 사람이 등불아래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첫닭이 울었다. 처녀와 혼인의 예를 치른 젊은이는 다음날 아침 십 년 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장인을 대신하여 만리장성 공사장으로 떠났다. 착한 젊은이가 복을 받았음인지 떠난 지 몇 달만에 공사가 끝나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서 착한 아내와 함께 장인을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다.
※ 강녀(姜女) 이야기 .......................................................................
박지원의 열하일기 강녀묘기(姜女廟記)에 보면 이렇다. 강녀의 성은 허씨요, 이름은 맹강(孟姜)인데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사람으로 범기량(范杞梁)이란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남편이 사소한 시비로 죄인이 되어 산해관(山海關)부근 만리장성 축조장으로 끌려갔다. 그가 간 곳은 북쪽이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추운 곳이었다. 겨울이 되자 남편이 걱정되어 방한복을 지어 가지고 장성 축조장을 향해 북쪽으로 떠났다. 기나긴 여정을 여자의 몸으로 고생 끝에 공사장에 도착했지만 남편은 이미 죽은 뒤였다. 축성노역을 하다가 사람이 죽으면 그대로 성채 속에 묻어버렸다. 그녀가 성벽 앞에 옷을 바치고 며칠을 엎드려 통곡을 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성벽이 스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남편의 유해가 나타났다. 그녀는 남편의 유골을 거두어 묻고 나서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 이야기는 연극과 노래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돈황에서 발견된『곡자사집(曲子飼集)』에 '강녀'가 나오는걸 보면 이미 당(唐)나라 때에도 이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요동의 산해관에는 강녀의 무덤과 사당이 있는데 강녀의 사연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가묘이다. 사당 옆에는 성벽을 바라보고 있는 강녀의 석상(石像)이 있다. 중국인들은 이런 고사 하나도 놓치지 않고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는 것이다.
※ 왕소군 (王昭君) 이야기...............................................................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중국인들의 이야기에 오르는 또 한사람 왕소군(王昭君) 이라는 여자가 있다. 한(漢)나라 때 북쪽의 오랑캐 흉노(匈奴)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만리장성은 조약문 한 장 정도의 힘도 없었던 것이다. 그 후 흉노와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으로 발전하여 두 나라 사이에 정략결혼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나라 원제(元帝)때 흉노의 왕 선우가 한나라에 왔는데 한나라에 여자에게 장가들기를 원했다. 당시 황제는 화공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궁녀들은 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화공에게 뇌물을 주어서 예쁘게 그리도록 했지만, 용모에 자신이 있었던 소군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제일 못나게 그려져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모두들 북쪽 오랑캐에게 시집가기를 원치 않으므로 황제가 궁녀들 중에서 한 여자를 고르게 되었다. 결국 소군이 흉노왕 에게 시집 보낼 못난이 여인으로 선정되었다. 떠날 때 황제가 소군의 실제 얼굴을 보니 뜻밖에 천하의 미인이었다. 황제는 통탄하였으나 이미 돌이킬 수는 없었다. 소군이 떠난 후 황제는 화공을 처형했다고 한다. 오랑캐 땅에 시집간 소군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는데 그녀의 무덤은 청총(靑塚) 이라고 부르며 현재 만리장성 밖 내몽고의 관광명소가 되어 있다. 이일을 두고 이백(李白)·백거이(白居易) 등 많은 시인들이 시를 읊었다.
" 소군의 아름다운 자태는 궁중에 광채를 일으키는 듯 하였다."
" 소군은 비파를 타며 상심한 가슴을 달래며 오랑케 땅으로 떠났다."
" 소군은 삭풍이 불어오는 북녘 땅으로 눈물을 훔치며 시집을 갔다. "고
표현하고 있다. 그녀의 비운을 노래한 이백의 시는 소군이 한나라 궁을 떠나 흉노의 땅으로 출발하는 때의 정경을 묘사하였고, 동방규의 시는 흉노 땅에 살면서 황량한 풍토에서 상심과 슬픔으로 나날이 수척해 가는 소군의 가련한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昭君怨1 (소군원) Ⅰ 李白
漢家秦地月 (한가진지월) 한나라 시절 진나라 땅에 떠 있던 달은
流影照明妃 (유영조명비) 그림자를 내려 명비(소군)를 비추네
一上玉關道 (일상옥관도) 한 번 옥관의 길에 올라
天涯去不歸 (천애거불귀) 하늘가로 떠나간 후 다시 못 오네.
漢月還從 東海出 (한월환종 동해출) 한나라 달은 돌아와 동해를 따라 오르건만
明妃西嫁 無來日 (명비서가 무내일) 명비(소군)는 서쪽으로 시집가고 돌아올 기약 없네.
燕地長寒 雪作花 (연지장한 설작화) 연나라 땅의 긴 겨울에 눈이 꽃을 만들었으니
娥眉憔悴 沒胡沙 (아미초췌 몰호사) 고운 아미는 초췌해져 오랑캐 모래에 쓰러 졌네.
生乏黃金 枉畵工 (생핍황금 왕화공) 살아서 황금이 없어서 화공을 얻지 못하고
死遺靑塚 使人嗟 (사유청총 사인차) 죽어서 청총을 남겨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케 하네.
昭君怨2 (소군원) 李白
昭君拂玉鞍 (소군불옥안) 소군이 옥 안장을 떨치며
上馬涕紅頰 (상마체홍협) 말을 타더니 붉은 뺨에 눈물이 흐르네
今日漢宮人 (금일한궁인) 오늘날 한나라 궁녀가
明朝胡地妾 (명조호지첩) 내일 아침 오랑캐의 첩이 되는구나.
昭君怨3 (소군원) 東方規
漢道今全盛 (한도금전성) 한나라 힘 이제는 강력하고
朝廷足武臣 (조정족무신) 조정에 무신도 충분하건만
何須薄命妾 (하수박명첩) 박명한 첩이 무슨 필요 있어
辛苦遠和親 (신고원화친) 고생스럽게 화친의 먼 길을 가나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 (자연의대완) 자연히 옷 띠가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 (비시위요신) 이는 허리 몸매 위함이 아니라네.
만리장성 관광을 마치고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큰 로타리가 있는데 잔디밭 광장 한 가운데 말을 탄 장군의 석상이 보인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이자성의 동상이라 한다. 이자성은 명(明)나라 때 섬서성(陝西省) 연안(延安)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가세가 기울어 목동·역졸(驛卒)로 전전하다가 굶주린 무리들을 이끌고 반란에 가담하여 두각을 나타내었다. 명나라 말기의 중국은 정치의 부패, 군사비 증가와 가혹한 수탈로 백성들은 시달림을 받아왔는데 흉년이 들자 재정난으로 전국의 역참(驛站)을 폐지하였는데, 생계를 잃은 역졸(驛卒)들과 군량미를 받지 못한 군인들이 합세하여 무리는 수 만 명에 이르러 섬서성, 하남성(河南省)으로 진출하였다. 1636년 수령 고영상(高迎祥)이 전사하자 이자성이 수령이 되어 스스로 틈왕(闖王)이라 칭하였다. 1641년 낙양(洛陽)을 점령하고 빼앗은 재산을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들은 군기가 엄중했고 균전제(均田制) 실시와 조세(租稅)의 철폐 등을 반란 명분으로 내걸어 농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1643년 서안(西安)을 점령하여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하였으며, 관제를 정비하고 화폐를 발행하였다. 이자성이 명나라의 수도 북경(北京)을 노리고 있을 때 명나라의 주력부대 오삼계(吳三桂)군은 산해관(山海關)에서 만주족(淸)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자성은 1644년 농민군을 이끌고 팔달령(八達嶺)의 거용관(居庸關)을 제압하고 백 오십리 길을 단숨에 달려와 자금성에 들어왔다. 명나라 마지막황제 숭정제(崇禎帝)는 반란군에 쫓기다가 가족들을 죽이고 자금성 뒤 경산에서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17대 277년으로 망하였다. 청나라 장군 오삼계는 내부의 적부터 잡는 다는 구실로 청군에게 항복하고 북경으로 처 들어갔다. 이자성은 두 달만에 청군에 패하여 서안으로 후퇴하였다가 추격을 받고 호북(湖北)으로 달아나 자살하였다. 결국 청군에 산해관을 열어준 것은 오삼계였다. 중국인구의 0.03%에 불과한 무식한 만주족 30万명이 유식한 한족 1억5000万명의 중국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런 지배 구조는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것이다. (任桂淳 "淸史 " 만주족 帝國의 흥망")
일개 유적(流賊)에 불과한 실패한 영웅 이자성이 중국 민중들에게 인기가 좋은 이유는 모택동이 좋은 평가를 했기 때문이다. 농민출신으로서 군주의 폭정에 대항했고 그의 정책이 가난한 백성위주였기에 중국공산화 과정에서 이용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오늘의 사회주의이념과 부합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또 한족출신인 이자성이 만주족인 청나라에 패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한족둘의 보이지 않는 심리도 깔려있는지 모른다.
이자성 이야기를 했으니 오삼계의 이야기도 추가하자 (이해를 돕기위해서) 오삼계 정예병 50만이 산해관에서 청군과 대치하고 있는데 전령이 달려왔다. 북경에 유적 이자성이 들어와서 자금성이 합락되고 황제가 자살했다 는 것이다. 잠시후 다른 전령이 도착했는데 북경에 있는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이자성 장군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너도 새 국가에 동참하라는 내용 이었다. 오삼계의 대군을 무력화 시키기 위하여 이자성이 가족을 인질로 한 것이었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알고 항복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지고 있었는데 또 하나의 소식은 북경에 두고온 애첩 진원원의 안부였다. 이자성의 부하장군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놈이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여자하나 못 지키면 어찌 남자라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이자성과 전쟁을 선언하였다.그리고 청군에게 성문을 열어줄테니 함께 이자성을 치자고 하였다. 이자성의 정예군 20만은 청군과 오삼계군의 협공을 받고 괴멸되었다. 이자성은 북경으로 돌아와 오삼계의 가족을 모두죽이고 도망을갔다.황제에 즉위한지 3일만의 일이었다. 오삼계는 이자성을 추격하여 궁지에 몰린 이자성은 자살했다. 청나라의 장군으로 공을 세우고 지방에 토호로 세력을 떨치다가 결국 청나라 강희제 때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하여 죽었다. 그러나 여자 하나 때문에 가족을 모두 죽게 하고 나라를 이 민족에게 넘겨준 결과가 되어 역사적으로 욕을 먹고 있다.
◆ 한방약국
버스는 다시 얼마를 달려 넓은 주차장이 있는 한방약국으로 갔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필수 쇼핑코스'다. 중국에서 가이드의 안내를 받는 모든 관광객은 하루 2-3곳씩 국가가 지정하는 국영상점에 들려야 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당국의 지시이기 때문에 가이드들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구매 여부는 본인의 마음에 달려 있지만 일단 들어가면 소파에 앉아 쉬더라도 30분 정도는 그곳을 나오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가이드는 사인을 받을 수 있고, 가이드 자격을 유지하는 것이다. 모든 관광버스가 경유하는 것 같은데 대부분 한국 관광객이다. 약국에는 많은 방들이 있는데 일행이 한 방으로 들어가니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는 조선족 안내원이 흰 가운을 걸치고 나와서 파스와 연고를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 연고는 화상에 특효가 있는데 자기가 불에 달군 쇠막대를 손으로 잡아 화상을 입고 연고를 바르는 시범을 보이겠단다. 일주일 정도 그 약을 바르면 낫는다고 큰소리치면서 난로에다 쇠막대기를 달군다. 이런 끔찍한 쇼가 있나? 우리 일행들이 말려서 그만 두었지만 무서운 상술이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장터에서 맨손으로 맥주병을 깨고 이마로 각목을 격파하면서 약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앞으로 중국은 무서운 나라가 될 것 같다. 공산당 조직에 돈맛을 알아 놨으니... 한국관광객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식들이 준 용돈을 탈탈 털리고 있는 것이다. 약은 아무것도 사지 않겠다는 당초의 결심은 간 곳 없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파스와 무좀 약을 한 통씩 샀는데 아무래도 약값이 비싼 것 같다. 다시 버스에 올라 점심 식사하러 들어간 식당의 규모가 엄청나다. 한번에 1000명을 수용가능 하다는데 식사는 입맛에 맞지 않지만 그런 데로 먹을 만 했다. 식사를 마치고 같은 건물에 있는 쇼핑 센터를 대충 둘러보았는데 역시 규모가 크다. 말이 통하지 않고 값도 비싼 편이었다. 마당에 나와서 경비원에게 멀리 보이는 산 이름을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팔달령(八達嶺)이라고 써준다. 팔달령은 四通八達에서 나온 말로 교통의 요지인 곳이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창 밖을 보니 집들은 모두 벽돌과 기와로 이었는데 처마가 짧고 용마루가 없다. 길가에 과일을 파는 노점상이 많다. 처음 보는 약 뿌리와 작년의 과일(자두)을 싱싱한 체로 팔고있었다. 저장방법이 궁금하였다.
◆ 이화원 (?和園)
버스를 타고 서태후(西太后)의 별장 이화원에 도착했다. 북경의 서북쪽 16km에 위치하고 있는 이화원은 금나라 때(1153년)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명, 청 시대 황족들의 휴식처로 사용되었던 것을 1750년 청나라 건륭황제(乾隆皇帝)가 확장하였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 불 연합군의 북경 침략으로 파괴되었는데, 서태후가 아침에 일어나면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해서 청일전쟁 중에도 10년간(1888-1897) 해군의 군함 건조비를 유용하여 공사를 감행하고 이름을 이화원으로 바꾸었다. 이( )는 양(養)으로서 노인들이 보양(몸조리),휴양한다는 뜻이고 화(和)는 마음이 평온하고 기운이 화평(온화)하다는 뜻으로써 정신을 수양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평온하고 태도가 온화하게 한다는 뜻이다.
정문인 동궁문(東宮門)을 지나 인수문을 들어서면 서태후가 정무를 보던 인수전(仁壽殿)이 있다. 인수전 앞에는 기린상(麒麟像)이 있고 온갖 나무와 괴석이 즐비하다. 서태후가 사용하던 각종 집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는데 공사 중이라 볼 수 없었다. 인수전(仁壽殿) 뒷면(북쪽)은 바로 옥란당(玉瀾堂), 의운관(宜蕓館)과 락수당(樂壽堂)으로 조성된 생활거주 구역이다. 이 구역은 모두 우회곡절(迂廻曲折)한 유랑(游廊)으로 연결되어있다.
작은 동산을 돌아서 호수 가로 나가니 호수의 규모가 엄청나다. 저 건너 아득히 많은 전각들이 호수 가를 빙 둘러서 있다. 3천여 칸의 누각과 전당, 회랑, 석주, 석교 등 하나 하나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이화원의 호수는 북경의 자금성과 물길로 연결하였다. 항주의 서호를 본떠 만든 호수(곤명호: 昆明湖)는 이화원 총면적의 3/4를 차지하는데 호수에서 파낸 흙으로 만든 산이 만수산(萬壽山)이다. 인수전 북쪽의 덕화원(德和園)의 3층 건물 대희루(大戱樓)는 서태후의 전용극장이었다. 서태후가 즐겼던 경극(京劇)이 거의 매일 연출되었는데 악대 1200명이 한꺼번에 연주를 할 수 있는 규모였다. 서태후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70만냥을 들여 만들었다. 그녀는 경극에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는데 하루 저녁 가무연회에 무려 4만냥을 쓰기도 했다. 만수산 가장 높은 곳에 흰색 성벽을 쌓고 지은 불향각(佛香閣)은 서태후가 불공을 드리던 곳이다.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 침공 때 불에 탄 것을 원상태로 재건하였다. 불향각을 중심으로 모든 건물이 좌우로 펼쳐져 호수를 안고 있다. 호수 가에는 거대한 대리석으로 만든 루옥형석선(樓屋型石船)이 있는데 물에 뜨는 배가 아니라 돌로 배 모양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서태후는 이 석주(石舟)에 올라 달맞이를 했으며, 보름달이 뜰 때는 수천명이 촛불을 들고 춤을 추며 서태후의 흥을 돋우었다고 한다. 낙수당(樂壽堂)은 서태후의 침전이다. 서쪽으로 이어져 있는 장랑(長廊)은 천간랑하(千間廊下)라고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긴 회랑이다. 원래는 건륭제 때 건설된 것이다. 총 길이 728m 모두 273칸이다. 햇볕을 싫어했던 서태후 전용 복도였다. 60년대 중국정부가 중국각지의 명승지와 고전을 묘사한 그림으로 장식한 채화회랑(彩畵回廊)인데 그림이 1만4천 점이 넘는다고 하니 보는데 며칠은 걸릴 것이다. 호수의 동쪽 제방과 인공 섬인 남호도를 연결하는 대형 석교(17공교)는 총 길이 150m이다. 교두와 난간 기둥에 도합 544마리 돌사자가 모두 다르게 조각되어있다. 유물전시관에는 서태후가 외국에서 받은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독일에서 받은 자동차도 있다. 이화원은 서태후의 호화 사치한 생활을 보여주는 표본으로 후일 공산당이 인민들을 설득하는데 좋은 구실을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망해 가는 나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불살랐던 현장이라는 점에서 중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역사 교육의 현장이 되고있다. 후문 밖에는 기념품을 파는 잡상인들이 우리말로 "천원, 오천원" 한다. 남녀노소 거의가 검은색의 남루한 옷차림이다. 공산주의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닌 중국사회의 양면을 보는 듯 하였다.
자희태후(慈禧太后)서태후(1835~1908)는 함풍제(咸豊帝)의 궁녀였으나 아들을 낳고 황비가 되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당돌하게도 황후가 되는 꿈을 갖고 있었다. 혼인을 언약한 남자가 있었지만 욕망을 위하여 1851년 15세 때 자금성 수녀(秀女)로 황궁에 들어갔다. 자금성엔 궁녀가 수 천명이 있었는데 그녀는 늘 어떻게 하면 황제의 눈에 띌까 궁리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만주족 출신 하급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비교적 공부를 많이 했고 미모에 영리했다. 내시들을 매수해서 황제가 지나가는 날과 장소를 알아내어 궁녀들과 노는 척하면서 손수건을 떨어뜨려 황제의 주의를 끌기도 했다. 어느 날 황제가 우울한 일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인근에서 황제의 마음을 달래는 노래를 불렀다. 황제 앞에 불려간 그녀는 황제의 아들을 낳아 드리겠다 고 말했다. 정실황후(安皇太后)가 소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그녀의 말대로 황제의 아들을 낳고 황비가 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거짓말에 능하고 욕망으로 가득한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는 후환을 염려하여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1860년 영국군이 중국을 침략하자 함풍제는 열하의 별장으로 도망가서 다음해(1861년) 병들어 죽었다. 서태후가 낳은 6살 난 아들이 등극(동치제: 同治帝)하여 서태후는 황비에서 25세 어린 나이로 태후가 되었다. 함풍제의 정실 황후인 안황태후(安皇太后)가 자금성내 동쪽 궁에 살았기 때문에 동태후라 하고 동치제의 생모인 자희태후는 서쪽에 살았기 때문에 서태후라 했다. 처음에는 동태후(東太后)와 손잡고 반대파를 일소하고 섭정을 하였으나 동태후를 독살하고 권력을 독점하였다. 서태후의 명칭은 자희우강이소예장성수공흠헌숭희황태후(慈禧佑康?昭豫莊誠壽恭欽獻崇熙皇太后)라는 긴 이름이었다.
아들인 동치제가 19세 나이로 죽자(187년) 여동생의 3살짜리 아들(광서제:光緖帝)을 즉위시켜 계속 집권하였다. 서태후는 자기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 황제를 핍박해서 죽게 했다는 죄명으로 황후(며느리)까지 죽였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어 친정을 하려고 했지만, 서태후는 실권을 놓지 않았다. 1898년 광서제가 개혁파인 강유위(康有爲)와 손잡고 급진적 입헌군주제를 추진하자, 보수파를 부추겨 100일만에 쿠데타(戊戌政變)를 감행하여 광서제를 유폐하고 실권을 빼앗았다. 서태후의 성정은 아주 잔혹했는데 광서제의 아버지(동생의 남편)는 자기의 아들을 황제로 올려놓는다는 말에 기뻐하지 않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내시들이 머리를 빗겨 주다가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났다. 식사는 한끼에 주식이 60가지, 점심이 30가지의 각종 산해진미로 만들었고 두개의 식탁에 차렸는데 한 식탁은 먹는 것이고 한 식탁은 구경만 하는 것이었다. 서태후는 사람의 젖을 먹었는데 매일 저녁 두 여인이 목욕을 한 후 붉은 천을 온몸에 감고 무릎을 꿇고 젖을 먹이도록 했다고 한다. 서태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 입었는데 옷이 3,000여 상자가 있었다. 서태후는 이화원에 전화를 설치하지 못하게 했는데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48년 동안 청나라의 실질적인 주인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던 중국 역사상 가장 욕심이 많았던 여자였다. 의화단(義和團)의 반(反)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되자, 서구 열강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여 위기를 조성하였지만 오히려 8개국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서안(西安)으로 피신하였다.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와서 정치개혁을 받아들이고 신정(新政)을 실시하였으나 혁명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1908년 광서제가 죽은 다음날 죽었다. 광서제(光緖帝)와 서태후가 죽은 후 광서제의 동생(순친왕: 醇親王)의 아들 부의(溥儀1906~1967)가 황제(선통제: 宣統帝)가 되었는데 그때 나이 3살이었다. 부의는 1912년 손문(孫文)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7살에 퇴위함으로써 청나라는 망하였다. 이 이야기는 마지막황제라는 영화로 유명하다.
◆ 발 마사지
이화원 관광을 마치고 간 곳은 발 마사지하는 곳이다. 따뜻한 약물에 잠시 발을 담갔다가 꺼낸 후 발에 크림을 바르고 발바닥과 주변을 지압과 안마를 반복하는 것이다. 중국 황실에서 하던 것을 이제는 동남아로 전체로 퍼졌다. 나이는 대부분 20대로 보이는데 여자 손님은 총각이, 남자 손님은 여자(小姐) 들이 마사지를 한다. 한국인들을 많이 상대해서 그런지 한국말도 조금씩은 알고 있다. "아파요?" "시원해요?" 하고 물어본다.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안마를 하여 미안하게 느껴진다. 요금은 7천 원 인데 피로가 다소 풀리는 것 같다. 한국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 천안문 광장 (天安門 廣場)
3월22일(北京3일)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천안문과 자금성 관광에 나섰다. 마침 출근시간이라 연도에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한다. 대체로 남녀 모두 검은 옷 일색이라 수백명의 자전거 행렬은 마치 검은 파도가 움직이는 것 같다. 인민대회당 앞에서 버스에서 내려 천안문 광장으로 갔다. TV에서만 보던 천안문 광장을 보니 과연 규모가 놀랍다. 천안문은 원래 승천문(承天門)이었으나, 불에 타고 1651년에 개축할 때 천안문이라고 개명하였다. 청나라 때 천안문은 황제가 조령을 발포하던 곳이며 1949년 10월 1일 모택동(毛澤東) 주석은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하였다. 북경의 중심에 위치한 천안문광장은 남북길이가 880m, 동서의 넓이가 500m, 면적이 44만 평방미터이다. 광장 북쪽에 천안문이 우뚝 솟아 있다. 천안문에는 모택동의 대형초상화가 중앙에 걸려 있고 혁명 구호들이 붙어 있다. 높은 깃대에는 붉은 오성기가 펄럭이고 동쪽은 중국역사 박물관과 혁명박물관, 서쪽은 우리의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전국인민회의 대회당이다. 도시가운데 있는 광장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천안문 광장은 100만 명의 군대가 행사를 할 수 있는 규모다. 중앙에 37.94m의 인민영웅기념비에는 모택동이 쓴 '인민영웅은 길이 빛나라'라는 글씨가 金도금으로 새겨져 있고 반대편은 주은래(周恩來)의 글씨가 새겨져있다. 기념비 남쪽 모택동 주석 기념관에는 모택동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광장에는 전국 각 지에서 올라온 중국인 관광객이 많은데 서로일행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도록 빨간 모자를 쓰고 다닌다. 예전에는 잡상인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물건을 팔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공안들이 곳곳에 서서 이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광장에서 사진을 찍고 자금성으로 향했다.
※ 천안문사건 (天安門事件)............................................................
1989년 4월 15일 온건노선 주의자였던 호요방(胡耀邦)이 사망하자 지식인을 중심으로 호요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학생들은 노동자, 지식인들과 5월 13일 북경대학과 북경사범대학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학생대표들과 함께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연좌시위를 계속했다. 5월 15일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북경에 도착했으나, 17일 발생한 100만 명이 넘는 대규모 시위로 일정을 변경해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당국은 북경시에 계엄을 선포했다. 학생들의 요구에 유연한 대응을 보이던 공산당 총서기 조자양(趙紫陽)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그의 해임 설이 나도는 가운데, 등소평의 후계자들 중 양상곤(楊尙昆), 리붕(李鵬)등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6월 3일 밤 인민해방군 27군을 동원, 6월 4일 미명에 천안문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을 탱크와 장갑차로 해산시키면서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시내 곳곳에서 수천 명의 시민, 학생, 군인들이 시위 진압과정에서 죽거나 부상했다. 이 사건은 당시 중, 소 회담 취재 차 입국했던 외국 기자들에 의해 전 세계로 보도되었으며, 미국 등 서방 자유진영의 여러 나라는 이와 같은 비인도적 처사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방려지(方勵之) 등 천안문 사건의 주요인물들은 서방에 망명하였다.
◆ 자금성 (紫禁城)
자금성의 고궁박물관(古宮博物院)관광이 시작됐다. 지하도를 건너 천안문을 지나 오문(午門)을 통해서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자금성이라는 명칭은, 북두칠성의 북쪽 별자리 이름(紫金星)에서 따왔다. 자금성(紫禁城)은 자색은 황실의 색이므로 황실 이외는 자색을 사용하지 말라(禁)는 뜻이라 한다. 자금성은 명나라 영락제가 북경으로 도읍을 옮긴 1406년에 짓기 시작하여 20여 년 만에 완성하여 1911년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황궁으로 사용되었다. 24명의 황제들이 이곳에서 옥좌에 올랐다. 자금성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이다. 총면적은 72만 평방 미터. 남북 1,000m, 동서 750m의 장방형인데, 자금성의 건물 칸수가 9999칸인 것은 하늘을 거역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만개를 채우지 않았다. 갓난아이가 방 하나에 하루씩 잔다고 하면 27살에나 각방을 거쳐 나올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의 경북궁과 규모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각 건물의 현판은 한자와 만주족의 글씨가 함께 써있다. 자금성의 중앙은 황제를 위주로 한 행정기능을 하고 양측의 동, 서 6궁은 황후, 비빈들이 거처하는 생활공간 이다. 성벽 주위 4곳에 궁문이 있는데, 남쪽의 오문(午門)이 정문으로서 동쪽을 동화문(東華門), 서쪽을 서화문(西華門), 북쪽은 신무문(神武門)이라 부르며 네 모퉁이에는 각루(角樓)가 있다. 주요 건축물은 크게 남쪽 외조, 북쪽 내정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오문에서 북쪽으로 3층 백옥석 기초 위에 건조된 태화전(太和殿)·중화전(中和殿)·보화전(保和殿) 3대전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文華殿)·무영전(武英殿) 등의 전각이 배치되어 있다. 그 중 정전(正殿) 태화전(太和殿)은 남북 약 33 m, 동서 60 m의 당당한 건물로서 자금성의 정전(正殿)이며, 황제가 권력을 행사하고 모든 전례를 거행하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 해당되는 건물이다. 계단 입구에 당긴 활(弓) 모양의 도랑(城壕)을 파 놓았는데 자금성의 물길은 이화원과 연결되어 있다. 계단 한가운데에는 백옥석에 용을 조각해 놓았는데 그 규모가 너무 커서 발달된 현대의 장비로도 설치가 쉽지 않을 듯 하다. 보화전 북쪽에 있는 건청문(乾淸門)으로부터 건청궁(乾淸宮)·교태전(交泰殿)·곤녕궁(坤寧宮)등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데 우리나라 고궁의 전각들과 이름이 비슷하다. 외조(外朝)의 북쪽은 황제의 사적인 생활을 위한 내정(內廷)이다. 자금성의 규모는 필요 이상으로 크고 웅장하다. 곳곳에 세워진 거대한 성채와 전각들은 황제의 권위와 힘을 과시함으로써 전쟁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었을듯하다. 변방의 약소국들의 사신이 북경에 도착해보면 우선 건물의 규모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모든 전각의 지붕은 주황색 기와로 덮여있어서 햇볕을 받으면 황금색으로 변한다. 자금성에는 거대한 향로와 방화수통이 30 여 개가 있는데 모두 순금으로 도금을 했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긁어간 흔적이 남아있다. 청조 마지막황제 부의(溥儀)가 어린 나이에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황금색이기 때문에 노란색 공포증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자금성에는 다양하고 희귀한 역사 유물과 예술품들이 소장되어 있지만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둘러볼 수가 없다. 가이드의 재촉에 따라 앞으로 앞으로 계속 걸었다. 한곳에 이르러 가이드가 한문을 아는 분은 이걸 읽어 보라 한다. 무언가 하고 보았더니 1미터쯤 되는 입간판 에다가 페인트로 保持淸潔 이라고 한자로 써서 세워 놓았다. 청소를 잘해서 청결을 유지하라는 말인데 우리말로는 차마 읽을 수는 없는 것을(여자들도 있는데) 가이드들이 농담을 한 것이었다. 이곳을 제대로 보려면 3일은 잡아야할 것 같다. 고궁의 후문인 신무문(神武門)은 10미터 높이 성벽 위에 문루가 2층으로 되어있는데 종과 북을 설치해 놓았고 아래에 3개 아치형 문이 있다.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글씨는 현대 중국의 사상가 곽말약(郭末若)이 쓴 것이다. 후문 앞 해자(垓字)는 넓이가 50m가 넘는데 탁한 물이 흐르고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이 경산(慶山)공원이라 하는데 자금성을 건축하면서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 산이다. 경산 공원의 산 위에는 큰 누각이 있는데 누각에 올라 자금성을 내려다보아도 맑은 날이 아니면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경산공원에는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살한 나무가 지금도 있다고 한다. 후문 앞에는 사진첩을 파는 잡상인들이 우리말로 "만원, 팔천원" 하는데 만원 하던 것이 자꾸 내려간다 관심을 보이면 찐드기 같이 쫓아온다. 나중에는 엽서를 끼워서 5천원 내라고 하면서 버스가 떠나려는 순간까지 값이 더 내려가는데 중국 상술은 참 황당하다.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가 심심했던지 중국말을 가르켜 준다면서 운전기사에게 중국말로 밥 먹었습니까? 를 '츠판러마' 라 한다. 우리말로 '쓰팔넘아(?)'와 비슷하다. 이 사람들은 그 후에도 버스만 타면 그런 장난끼가 발동한다. 어른들 앞에서 욕을 하니까 재미있는 모양이다 점심식사를 하고 어름축제와 수족관을 보았는데. 수족관은 어종이 다양하고 볼만했는데 어름 축제는 대단치 않은 수준이었다. 이것으로 2박3일 북경 관광을 끝났다. 일행은 국내선 비행기로 장가계로 향했다. 북경공항은 휴대물품 검색이 삼엄했다. 중국의 국내선은 소형 여객기를 운행하고 있었는데 작은 쇠붙이는 물론 음료수도 기내에 휴대 할 수 없었다. 사회주의국가이지만 사고가 자주 난다고 한다. 83년 중국민항기가 납치되어 한국에 착륙했던 사건이 생각난다.
◆ 장가계 (張家界)
장가계는 중국의 남쪽 호남성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에서 북경 가는 것 보다 훨씬 더 먼 거리다. 장가계 공항에 도착하니 이미 밤이다. 현지 가이드가 마중을 나와있었다. 시내에서 우선 저녁식사부터 하였다. 식당을 나와 다시 버스를 타려는데 6~7세 미만 조그만 여자아이들이 꽃을 사라고 하며 엉성한 화분을 내미는데 꽃 파는 것 보다 구걸이 목적인 듯 하다. 버스로 장가계 시내에서 30km 거리에 있는 무릉원 관광지구 긍립 국제 호텔에 도착하였다. 장가계는 중국에서 첫 번째로 지정된 국가삼림공원이며 세계적인 관광지다. 면적 9,563㎢, 인구는 1백55 만 명인데 소수민족인 토가족(土家族), 바이족, 묘족이 60%를 차지한다. 원래이름은 대용시(大庸市)였으나 1944년에 장가계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이 관광지로 개발된 것은 어느 화가가 그림으로 그려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대대로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바깥 세상을 접할 기회가 없어서 이 곳의 경치가 다른 곳 보다 좋은 줄을 몰랐다고 한다. 홍사암, 석영사암, 석회암으로 이루어 진 돌기둥은 꼭대기와 밑 부분의 크기가 비슷하고 쌓은 듯이 분명하여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는 특이한 지질이다. 가장 높은 곳은 망월봉은 해발 1,264.5m, 가장 낮은 곳은 해발 320m. 이니 900m 정도 차이가 난다. 장가계시의 주요 명소로 무릉원, 풍경구, 천문산, 옥황동, 오뢰산, 팔대공산, 모암동, 구천동, 보광사, 원가계, 보봉호, 황룡동굴 등이 유명하다. 자세히 보려면 한 달이 걸려도 모자랄 것 같다. 1982년 "장가계 중국국가삼림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88년에는 국가급 중점풍경 명승구로서 지정하였고, 1992년 유니세프에 의해 "세계의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무릉원을 일명 "대자연의 미궁"과 "지구기념물"이라 부른다고 한다.
◆ 천자산 (天子山)
3월 23일 (장가계 1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날씨가 좋다.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창 밖을 보니 멀리 우뚝우뚝 솟은 바위산이 보인다. 로비에 내려가 보니 가이드가 벌써 와있다. 일행들은 버스를 타고 무릉원(武陵源)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은 최첨단 지문인식 시스템까지 갖추어 놓고 출입관리를 하고있었다. 무릉원 입구에서 소형버스로 갈아타고 천자산(天子山)으로 갔다. 건너편 산비탈에 매화와 복숭아꽃이 막 피기 시작했다. 산 비탈길을 올라가는 도로변에 작은 마을이 보이는데 우리나라의 기와보다 작은 기와를 다닥다닥 이어 덮었다. 집 주위에 몇 기의 무덤이 보이는데 비석에는 천당(天堂)이라고 써있다. 북경주변의 산에서는 무덤을 전혀 볼 수 없었는데 이곳에 와서 무덤을 처음 보았다. 산 입구에 댐이 있는데 생활용수와 발전을 위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언덕을 올라 호수 가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길은 몹시 협소하고 턴널은 중형버스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정도로 좁고 일방 통행 인데 자연훼손을 적게 하기 위함인 듯하다, 우리나라 같으면 산이야 망가지건 말건 2차선으로 크게 뚫었을 것이다. 건너편 산비탈에 드문드문 하얀 꽃이 피고 있다. 푸른 호수 물 위로 하얀 물새들이 떼를 지어 날고 있었다. 강이 푸르니 새는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은 불타는 듯하다. 江碧鳥愈白 (강벽조유백) 山靑花欲燃 (산청화욕연) 두보(杜甫)의 시가 생각나는 풍경이다. 진달래가 피면 산이 불타는 듯 보이겠다. 호수가를 한참 달리던 버스는 산길로 접어들어 케이블카를 타는 곳에 도착했다. 우리일행 말고 중국인 관광객들도 많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상해에서 왔다고 한다. 케이블카는 6명씩 타는데 산을 올라가면서 밖을 보니 눈길이 닫는 곳마다 거대한 단애(斷崖)와 기암괴석이 장관을 연출한다. 수 만년의 세월동안 풍상을 견디며 다듬어진 산봉우리와 수 십 개의 돌기둥들이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서있는데 중간 중간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마침 산아래서 피어오르는 자욱한 안개와 어울려 수묵화처럼 유현한 경치가 끝없이 펼쳐진다. 천자산 케이블카는 홍콩의 자본가가 100억을 투자해서 건설했는데 1년여만에 투자원금을 거의 뽑았다고 가이드가 말해준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산 아래를 보니 수많은 봉우리가 구름 위에 떠있는 것 같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산굽이를 돌아 하룡 공원으로 갔다.
◆ 하룡공원 (賀龍公園)
버스에서 내리자 시야가 넓어지고 눈길이 닿는 곳마다 별천지가 펼쳐진다. 공원 한가운데 하룡공원(賀龍公園)이라고 쓴 강택민(江澤民)의 글씨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하룡(賀龍)은 이곳 출신으로 산적이었는데 모택동을 따라 중국 공산혁명에 공을 세웠지만 60년대 문화 혁명 때 죽음을 당했다. 그 후에 복권이 되어 이곳에다 공원을 만들고 하룡 공원이라 했다. 이렇듯 중국인들은 최근의 역사인물도 관광지와 연결하여 기리고 있다. 하룡의 동상은 특이하다. 높이는 6m, 황동 9톤으로 만들었는데 머리부분은 사실적으로, 몸은 이곳의 자연석 형상으로 거칠게 만들었는데 말(馬)이 옆에 서 있다. 멀리 전망이 좋은 곳에 정자가 있고 시야는 멀리 확 트여 라노마파 처럼 펼쳐진다. 너무 많아서 셀 수 없는 산봉우리의 바다 이곳이 서해(西海)인가 보다. 안개 속으로 꽃바구니를 안고있는 여인상(선녀헌화: 仙女獻花)과 붓을 여러 자루 세워놓은 듯한 어필봉(御筆峰)이 아주 절경이다.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원가계로 향했다.
◆ 원가계 (袁家界)
하룡공원 에서 버스를 타고 산중턱을 돌고 돌아 한시간 쯤 달려 원가계에 도착했다. 원가계는 지대가 높은 곳 이어서 모든 경치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마치 밀림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이 빽빽이 들어선 기암 절벽과 협곡의 연속이다. 발 아래는 아찔한 천길 낭떠러지가 이어져있고 멀리 건너다보면 아물아물 끝없이 절경이 펼쳐져 있는데 그중 에서도 미혼대(迷魂臺)가 절경이다. 아찔한 낭떠러지에 설치한 난간을 잡고 아래를 보며 심호흡을 해 보았다. 이곳의 경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가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경치도 좋지만 절벽의 끝을 다리와 철책 난간으로 이어진 관광로를 따라가는 재미가 일품이다. 험준한 암벽 사이로 최소한의 자연만을 훼손하면서 관광로를 개설한 이곳 사람들의 자연보호 의식은 우리나라의 관광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마지막 절경 천하제일교(天下第一橋)는 두 봉우리가 서로 마주 의지하고 있는 형상인데 상단이 건너갈 수 있게 천연의 다리가 되었다. 아래를 보니 가물가물하여 높이를 알 수가 없다. 다리 위에는 이곳에 다시 온다는 언약을 하는 연인들의 이름을 새겨 놓는 열쇠를 팔고 있다. 몇 일을 보아도 부족할 명승지를 이렇게 대충 한바퀴 돌아 버스 타는 곳으로 왔다. 고지대 산간 마을인 원가계는 옛날에는 오지중의 오지였을 텐데 지금은 국제적인 관광지가 되어있다. 가던 길을 되돌아서 케이블카를 타고 천자산을 내려왔다. 소형버스를 타고 무릉원 입구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상가가 있는 큰 마을로 돌아왔다.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는 것은 공원 내에서 관리 구역이 서로 다르고 공원 밖에서는 또 일반 관광버스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 금편계곡 (金鞭溪谷)
점심식사를 하고 버스를 타고 무릉원으로 다시 들어갔다. 오전과는 반대로 왼편계곡으로 물줄기를 따라 들어가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좌우의 경치는 머리를 아무리 숙이며 보아도 바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금편계곡 입구에 도착해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나무로 만든 작은 가마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지방의 소수민족인 토가족(土家族) 사람들인데 모두 체격이 왜소하다. 가마에 한사람씩 올라타라고 한다. 가마타기를 주저하자 이미 요금을 지불했다면서 가마를 타는 것이 이 사람들을 도와 주는 것이라고 하며 끝나고 팁을 천 원씩 주라고 한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이 타고 앉았고 명태 같이 삐쩍 마른 사람이 메고 비척비척 가는 것을 보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불편하다. 마지못해 나도 가마를 타긴 했는데 두 사내는 자주 어깨를 바꾸면서 뭐라고 자기들 말로 떠드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다. 40대의 가마가 한꺼번에 출발하니 삐걱 삐걱 가마소리에 산골이 분주하다. 가이드와 가마꾼 까지 120명이 넘는 대 행렬이다. 한참을 가다가 보니까 계곡 한편에 우뚝 서 있는 붉은 바위기둥이 있는데 글씨가 새겨진 것을 보니 금편암(金鞭岩)인가 보다. 잠시 후 일행 중 젊은 여자 분들이 나이가 많은 사람이 메고 가는 가마를 타는 것이 불편하다 하며 가마에서 내렸다. 일행들은 모두 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오는데 팁을 못 받을까봐 그러는지 자꾸만 다시 타라고 쫓아다닌다. 일행들은 튼튼한 다리를 걷어 보이면서 계속 걸어서 내려왔다. 차라리 가마가 없었으면 사진 찍기가 더 좋았을 것을, 너무 빨리 되돌아 나온 아쉬움이 남는 계곡이어서 다시 한번 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입구에 도착하여 팁으로 천 원을 주고 종이 팩 소주를 하나씩 주었더니 한사람은 그 자리에서 한번에 마셔버린다. 계곡입구에 "張家界" 라고 쓴 강택민(江澤民)의 글씨가 새겨져 있고 두 계곡의 물이 합치는 지점인데 수량도 많고 계곡이 넓다. 이곳이 장가계 에서 가장 사람이 살만한 곳 같다. 일행 중에 누군가 암벽을 보며 말하기를 " 세상에 너무 불공평해 이렇게 많은 봉우리 중에 10개만 서울 변두리에 갔다놓으면 좋을걸" " 다섯 개만 있어도 세상이 달라 질 꺼야, 왜 여기에만 이렇게 모여 있는 거야 " 하면서 조물주의 불공평한 처사를 탓하였다. 다시 버스를 타고 십리화랑으로 향했다.
◆ 십리화랑 (十里畵廊)
십리화랑은 그림 같은 풍경이 십리에 걸쳐 있다는 의미인데 과연 이름에 걸맞게 절경이다. 버스에 내리니 잡상인들이 귤과 깨엿, 땅콩을 사라고 벌떼처럼 몰려들어 "두 개에 천원, 몽땅 천원" 하며 졸졸 따라다닌다. 우리나라 돈을 그대로 받는 것은 좋지만 천원이 기본 단위가 되어 있어 유쾌하지 않다. 모노레일을 타고 들어가는데 계곡은 물이 거의 말라 있지만 양편의 산들이 절경이었다. 모노레일 반환 점에 도착하니 기념품 상점들이 진을 치고 있다. 수많은 기암괴석의 무리 중에서 삼자매봉(三姉妹峰)바위가 특히 뛰어났다. 사진을 찍고 다시 계곡을 나오는데 산 중턱에 약을 캐는 노인형상(採藥老人)의 바위가 보이는데 근엄한 표정에 약초 한 뿌리를 등뒤에 지고있는 것처럼 나무가 자라있다. 하루쯤 머물며 구경하고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계곡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人生不到張家界, 白歲豈能稱老翁)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장가계가 어떤 곳인지 말로는 설명을 할 수 없다. 바위기둥이 수 백개가 수직으로 서있다고 하면 비슷한 설명이 될까?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거리를 둘러보았다. 호텔 주변의 상점에는 한글로 간판을 써 놓았고 한국 돈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음식을 먹거나 놀고 있는데 노인들이 기다란 대나무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다니면서 먹는데 사탕수수였다. 이색적인 것은 처녀들이 대로변에서 버젓이 마작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곳 장가계를 도연명(陶淵明)의 명문장(名文章)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실제의 현장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직 두루 다녀보지 않아서 그런지 작품 속의 이미지는 느낄 수 없다. 평화롭고 풍족한 생활을 하려면 우선 외부와 단절되고 안에는 넉넉한 땅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무릉도원은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적인 선경(仙境)을 말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理想鄕(유토피아)이다. 우리나라에도 경치가 좋은 곳에는 무릉(武陵)이라는 지명이 많다.
도연명이 살던 시대는 정부와 지방 호족과 귀족과 군벌의 반란과 이민족간의 싸움으로 민생고는 극에 달했다. 그래서 도연명은 짧은 문장으로 지친 민초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이상향을 그려보았다고 할 수 있다. 무릉도원은 도연명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희망의 땅이었던 것이다. 도연명은 도화원기에서 무릉도원을 이렇게 쓰고 있다.
※도화원기 (桃花源記)......................................................................
「진(晋)나라 태원(太元) 연간, 즉 효무제(376-396) 때, 무릉에 사는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길을 잃었는데 문득 복숭아꽃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로 더 올라갔다. 강이 끝나는 막다른 산골짜기에 이르러 보니 온 산이 복숭아꽃으로 덮여 있는데 산기슭에 작은 굴이 뚫려 있었다. 어부가 배를 묶어 놓고 굴로 들어갔더니 처음에는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굴이 몇 걸음 더 들어가자 활짝 밝아지면서 드넓은 벌판에 번듯한 집들과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별천지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웃는 얼굴이었고 색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어부를 보고 크게 놀라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어부가 이 곳이 어디냐고 물어본 즉, 옛날 그들의 조상이 진(秦)나라 때 전란을 피하여 들어 왔다고 말하면서 지금 바깥은 어떤 세상이요 하고 묻는데 한(漢), 위(魏), 진(晋)에 걸쳐 수 백년 세월이 흐른 것을 전혀 모른다. 서로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진귀한 음식을 내온다. 극진한 환대 속에 며칠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많은 선물을 주면서 이와 같은 곳이 있다는 사실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부는 참지 못하고 결국 발설을 했다. 이 소문이 고을 태수에게 들어갔다. 태수가 사람을 풀어서 찾아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 후에 남양(南陽)의 고사(高士) 유자기(劉子驥)가 이 말을 듣고 찾아보았지만 역시 병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로는 무릉도원을 묻는 이가 없었다. 」
◆ 보봉호 (寶峰湖)
4월24일(장가계 2일)
오늘도 날씨가 좋다. 이곳은 년 중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는 날이 많아서 관광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날씨 복이 많다고 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버스로 보봉호로 갔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버스에서 내리자 협곡 사이로 시멘트로 된 비탈길이 있다. 협곡에 댐을 막은 인공호수인데 주변의 산세와 아주 잘 어울린다. 댐의 길이가 짧고 눈에 잘 보이지 않게 공사를 했기 때문에 자연호수 와 같다. 비탈길을 올라가니 유람선을 타는 선착장이 보인다. 보봉호는 둘레가 2.5㎞이며, 제일 깊은 곳 수심이 72m이라 한다. 호수 안에는 작은 섬이 있고 바깥쪽으로는 산봉우리가 잔잔한 수면을 둘러 싸고있어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산 속에 초록색 비취 알맹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무릉원의 수경(水景) 중의 제일로 꼽힌다. 우리일행을 태운 유람선은 호수 가운데로 나아갔다. 아침햇살을 받은 호수는 금붕어의 비늘처럼 반짝거리며 뱃전에 부서진다. 호수가운데에서 엔진을 멈추자 호수 한편 산기슭에 떠 있는 작은 배에서 이 지방의 소수민족인 토가족(土家族) 아가씨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내용은 모르지만 낭낭한 목소리가 호수와 산의 그윽한 경치와 어우러져 청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호수 가운데에서 배를 돌려 돌아오는데 가이드의 사회로 일행들의 끼가 또 발동했다. 번갈아 나가서 핸드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끝나면 만원자리 한 장씩 놓고 나오는 것까지 잔치집에서 많이 보던 모습이다. 조용히 경치를 감상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중에는 "쾌지나 칭칭나네" 까지 나온다. 잠시 후 유람선이 호수 가에 도착해서 유흥을 멈추었다. 배에서 내려서 가파른 협곡으로 난 길을 따라서 한참 내려오는데 마지막 부분은 밖에서 보면 정자인데 정자 내부는 계단을 만든 것이다. 자연훼손을 최소화하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중국사람들이 관광지 개발을 잘한다고 모두들 말한다. 산을 뚫고 호수의 물이 빠지게 했는데 폭포는 지나치게 인공적이어서 옥의 티였다. 길가 매점에서 사진 책을 샀다. 시내보다 조금 싼 것 같다.
◆ 북한상품전시관
다음은 필수 코스로 북한물품 전시관을 가게되었다. 북한이 이곳에다 전시장을 마련하고 한국관광객을 맞는다하니 궁금하였다. 건물 입구에서부터 붉은 색과 푸른색 페인트를 길게 칠해 놓아서 북한의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강당은 20평 남짓한데 벽면은 색실로 수를 놓은 그림들이 전시되어있다. 안내원이 홍삼을 한쪽씩 돌리더니 북한의 어려운 경제실상을 말하고 수예품과 홍삼과 우황청심원 등 약재를 선전했다. 설명하는 북한 안내원은 미모에 말도 잘하는데 물품이 조잡하고 중국제품에도 한참 뒤진 것 같아 사는 사람이 거의 없다. 북한 사람들은 세상물정을 너무 모른다. 한국사람들 가운데 김정일 화(金正日花) 그림을 살 사람이 있을까? 지금이 어떤 세월인데 이런 물품을 사라고 하는지 실망스러웠다.
◆ 황룡 동굴 (黃龍 洞窟)
다시 시내로 나와 점심식사를 하고 황룡동굴 관광에 나섰다. 황룡동굴은 시내에서 동쪽으로 8㎞ 떨어진 곳에 있다. 석회암 용암동굴로서 상하 4층으로 아래 2층에는 4계절 물이 흘러내리는 동굴이다. 수직고도는 160m, 동굴길이는 15㎞이며, 이미 개발되어 있는 면적이 20㏊에 이른다. 동굴 내에 물을 막아서 유람선을 운행한다. 폭포 안에는 시내 2갈래, 지하폭포 3개, 연못 4개, 큰 광장이 여러 곳에 있고 관광할 수 있는 동굴 길은 96갈래나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동굴보다 규모가 월등히 웅장하고 아름답다. 어떤 곳은 5~6층 빌딩이 들어갈 정도로 높고 넓다. 동굴 안에는 기이한 종유석들이 천태만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완벽하고 보행 코스가 잘 개발되어 있다. 중간에 휴식도 할 수 있게 되어있다. 동굴을 한바퀴 돌아 나오는데 2시간 가량 소요된다. 입구에는 이곳을 다녀간 인사들이 글을 써서 새겨 놓았는데 유명인사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동굴 관광이 끝나고 다시 마을에 와서 점심을 먹고 장가계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십리협(十里峽)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버스가 한참을 달리는 동안 도로의 양편의 풍경이 아주 좋다. 잠시 내려서 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노란 유채 꽃이 핀 언덕에 농가주택이 드믄 드믄 있고 털빛이 흰 소가 풀을 뜯고 있는데 뿔이 앞으로 휘어있는 모습이 중국 남방의 이국적인 풍경이다. 도중에 한 마을 매점에서 잠시 쉬어 차를 마시고 장가계 에서 관광일정을 찍은 비디오를 감상했다. 창 밖으로 이국적인 농촌풍경이 보이고 멀리 천문산(天門山)의 아름다운 자태가 시야에 들어온다. 창문에 기대서서 스케치를 몇 장 해보았다. 다시 버스에 올라 장가계 공항에 도착 해 보니 천문산이 멀리 보인다. 이틀 전. 올 때는 밤이라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매우 웅장한 모습이다. 산 정상 부근에 커다란 구멍이 있는데 그 때문에 천문산 이라는 이름을 얻었나보다. 관광책자에서 보니 전투기 편대가 빠져나는 사진이 있다. 천문산을 보려면 하루로는 부족할 것 같다. 그냥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 할 수밖에 없다. 장가계 공항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향했다.
過 張家界空港 (拙作)
前日暫登 天子山 전날은 잠시 천자산에 올랐고
今日遙看 天門山 오늘은 멀리 천문산을 바라본다
來日惜別 張家界 내일은 장가계를 떠나니
何日再見 兩名山 언제나 두 명산을 다시 찿으리
◆ 소주 (蘇州)
3월25일
아침 식사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일요일인데도 차들이 많지 않다. 도심을 벗어나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논과 밭, 산은 보이지 않는다. 들에 노란 유채 꽃이 피었는데 중국인들이 많이 먹는 식용유 재료인 것이다. 상해에서 소주까지는 한시간 반정도 걸리는데 소주가 가까워질수록 운하가 많이 보인다. 소주는 기원전 5세기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오(吳)나라의 도읍이었던 곳이다. 당, 송(唐, 宋)때에는 고도로서 중요시했으며, 이때부터 비단의 산지로 이름났다. 시내에 들어가니 고전 풍의 정원과 다리가 많이 보여서 운치가 있다. 옛날부터 시내에도 주택가 밑으로 운하가 흐르고, 구석구석까지 수로가 연결되어있어 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택가에 있는 운하의 물은 검게 오염되어있다. 버스정류장에 있는 공중 화장실을 가보니 옆에 칸이 막혀 있지 않고 바닥에 구멍만 여러 개 뚫어 놓았다.
세상에 어찌 이런 황당한 일이, 갑자기 미개한 나라에 온 듯 하였다. 같은 볼일 보면서 휴지도 나누어 쓰고 이야기도 하는 것이 중국의 화장실 문화인 모양이다.
올림픽을 개최하려면 화장실부터 고쳐야 될 것 같다.
※소주운하 (蘇州運河).................................................................
蘇州는 예로부터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라는 말이 있을 만큼 살기 좋은 곳이다. 또 "정원의 도시" "동방의 베니스"라고 불리었다. 소주에는 천년고운하(千年古運河)라는 말이 있는데 중국의 운하는 역사가 길다. 사통팔달로 물길이 발달해서 옛날부터 수향(水鄕)이라고 했다. 한, 당, 송 때의 많은 시인들이 소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모든 운하가 양자강(陽子江)까지 연결 되었다하니 그 편리함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수(脩)나라 때 많은 운하를 건설했는데 운하를 만드느라고 국력을 소진해서 수나라가 망했다는 말이 있다. 수많은 하천을 준설하고 운하를 만들고 다리를 놓았는데 모든 운하의 다리는 밑으로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아치형이어서 아름답다. 다리(石橋)는 모양이 저마다 독특하며 다리마다 이름이 새겨 있어서 다리 하나하나가 문화재 급이다. 소주 시내에만 이런 석교가 300개가 넘는다고 하니 몇 일이 걸려야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보대교(寶帶橋)는 교각이 53개이고 길이가 300m가 넘는 중국에서 가장 긴 석교라는데 계획에 없으니 가보지 못하였다. 운하를 따라서 늘어선 집들, 안개처럼 피어오르듯 굴뚝의 연기,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배들을 한 줄로 연결해서 기차모양 운항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 졸정원 (拙政園)
졸정원은 명나라 관리였던 왕헌신(王獻臣)이 중앙 정계에서 뜻을 얻지 못하고 1522년 고향에 돌아와서 축조한 정원이다. '졸자지위정(拙者之爲政) "어리석은 자가 정치를 한다." 라는 시의 한 구절에서 이름을 따왔다. 북경의 이화원, 승덕의 피서 산장, 소주의 유원과 함께 중국의 4대 명원 중의 하나이다. 총면적은 5㏊로 東園, 中園, 西園으로 나뉜다. 이 정원은 호수(湖水), 축산(築山), 건축(建築) 3가지의 조화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졌다. 중원의 원향당(遠香堂)에서의 전망이 가장 좋다. 모든 전각에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글씨가 좋다. 남쪽과 북쪽 모두 연못을 사이에 두고 있고 인공 산이 있다. 남과 북으로 크고 작은 대비로 조화시켰으며 북쪽의 인공 산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걷다보면 꽤 넓은 정원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한편에 기이한 분재들을 진열해 놓았는데 모두 품격이 높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왕헌신은 이 정원을 2년밖에 즐기지 못했고 그의 외아들이 하룻밤 도박으로 날렸다한다. 후문을 나오니 기념품 상가가 즐비한데 현판의 글씨가 모두 뛰어나다 두루 돌아보고 싶지만 가이드의 재촉을 받고 버스에 올랐다. 점심식사를 하러 갔는데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이었다. 부산에서 왔다는 여주인은 한국 소주가 있으면 중국 술과 바꾸어 주겠다고 했다. 우리나라 소주는 중국에서도 인기가 좋은 것 같다.
◆ 호구탑 (虎丘塔)
높이 40m의 작은 언덕 호구의 정상에는 소주의 상징인 호구탑(雲巖寺塔)이 있는데 높이 47.5m인 이 탑은 961년에 완성된 7층8각 벽돌(塼)탑인데 무너질 듯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호구는 춘추시대에 소주를 도읍으로 했던 오(吳)나라의 왕 합려(閤閭)의 묘다. 합려는 생전에 좋아하던 보검 3천 자루와 함께 이곳에 묻혔는데 3일째 되는 날 백호 한 마리가 나타나서 무덤을 지켰다는 전설이 있다. 산 전체의 모습이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을 닮아서 그렇게 불렀다는 말도 있다. 호구탑에는 날씨가 좋은 탓인지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이곳은 소주성에서 서북쪽으로 3㎞에 위치하고 있으며 풍경이 아름답고 고적이 많아서“吳中第一名勝”이라고 한다. 호구의 정문을 들어가니 오른쪽으로 시검석(試劍石)이 있는데 합려가 명검을 시험하기 위해 내려쳐서 두동강 났다는 바위 (책상 정도 크기)는 단칼에 벤 듯 두 조각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마당처럼 여럿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가 있는데 천인석(千人石)이다.“別有頭天”虎丘劍池등 글씨가 새겨있고 주위에는 白蓮池, 点頭石, 云厓砂, 冷香閣, 第三泉, 孫武子亭, 소동파가 즐겨 마셨다는 제3천(第三泉)이 있고 오왕 합려의 유체와 함께 3000여개의 검이 묻혀 있다고 하는 검지(劍池)가 있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검지 앞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吳王之墓何處"라고 써 보였더니 "在水下"라 고 써 준다. 가이드는 탑 아래가 묘지라 하고 현지 사람은 연못의 물밑이라고 하니 누구의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사진을 찍는데 가이드가 위에서 부른다. 올라갔더니 한참 찾았다고 하면서 유치원생 단속하듯 한다. 호구를 나와서 간 곳은 실크 공장이었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것을 보니 옛날 고향에서 어머니가 명주실을 뽑으시는 옆에서 번데기를 먹었던 생각이 난다. 실크 제작과정과 패션쇼를 구경하고 매장을 둘러보았는데 실크를 소재로 한 의류라서 그런지 생각했던 것보다 비싸다. 다시 버스에 올라 도자기 공장을 견학했다. 차를 마시는데 필요한 도자기들이었는데 물건은 좋지만 값이 비싸서 사는 이가 거의 없다. 우리나라 차 문화가 중국에 비해 생활화되지 않은 탓이다.
※ 호구탑(虎丘塔)과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故事)...........
2500년전 춘추시대(春秋時代)때 오(吳)왕 합려(闔閭: 광(光)는 적장자였고 뛰어났지만 궁중의 세력에 구도에 의해 왕위는 사촌동생인 요(僚)에게 돌아간다. 마침 초(楚)나라에서 망명객 오자서(伍子胥)가 찾아왔다. 합려는 오자서와 요를 살해하고 (BC 515)왕위에 올랐다. 이 변란을 주도한 오자서와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孫武)를 중용하여 국위를 떨친다. 그 후 합려는 월왕(越王) 구천(勾踐)과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상처가 악화되어 (BC 496)죽었다. 합려는 임종 때 아들 부차(夫差)에게 월왕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유언(遺言)했다. 부차는 부왕의 유언을 잊지 않으려고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는 와신(臥薪)을 실행하며 절치부심으로 준비하였다. 매일 시종에게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게 하고 그때마다 "예, 결코 잊지 않고 3년 안에 꼭 원수를 갚겠나이다." 임종 때 부왕에게 말한 그대로 대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월왕 구천은 참모인 범려(范黎)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오나라 군사에 대패하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갔으나 오나라 군사에 포위되어 항복하고 속국이 되었다. 가까스로 인질에서 풀려난 구천은 회계산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항상 곁에다 동물의 쓸개를 걸어두고 쓴맛을 보며 [상담(嘗膽)] 마음을 다지면서 부국강병에 힘썼다. 구천(勾踐)은 부차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많은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바쳤다. 그 중에 서시(西施)라는 미인이 있었는데 서시는 충신 범려(范黎)의 애첩이었다. 복수를 위해서 특별히 훈련시킨 여자였다. 결국 부차는 서시의 미색에 빠져서 정사를 게을리 했다. 재상 오자서가 구천을 죽이고 월나라를 멸망시켜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부차는 서시의 말을 듣고 오히려 오자서에게 자살할 것을 명했다. 오자서는 자살하면서 자기의 눈을 성문에 걸어둘 것을 유언하였다. 죽어서도 월나라를 감시하겠다는 뜻이었다. 12년이 지난(BC 482) 봄, 부차가 천하에 패권(覇權)을 선언하기 위해서 기(杞)땅의 황지(黃地): 하남성기현(河南省杞縣)]에서 제후들과 회맹(會盟)하고 있는 사이에 구천은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로부터 7년 만에 오나라의 도읍 소주(蘇州)에서 구천은 부차를 굴복시켰다. 부차는 절강성 정하(定河)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구천의 호의를 사양하고 고소산(姑蘇山)에서 자결했다. 이제 구천은 천하의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오, 월 두 나라의 대를 이은 전쟁은 미인계를 쓴 월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도 이때부터 생겼고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말도 이때에 생겼다. 일등공신 범려는 "구천과는 환난(患難)은 같이 할 수 있지만 영화(榮華)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서시를 찾아 정처 없이 배를 타고 떠났다. 요즘 우리나라의 높은 사람들과 측근들이 본 받아야 할 것 같다. 이 사실은 사마천(司馬遷)의 [吳越春秋 闔閭內篇]에 기록되어있다. 최근 2~3년 전에 호북성(湖北省) 강릉(江陵)의 망산일호초묘(望山一號楚墓)에서 월왕구천자작용검(越王勾踐自作用劍)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아름다운 동검(銅劍)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2천년이 넘는 중국의 역사기록이 허구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한산사 (寒山寺)
한산사는 六朝 시대 양(梁)나라 (519)때 세워진 고찰(古刹)이다. 당나라 때 한산, 습득(寒山, 拾得)이라는 두 고승이 함께 머물렀는데 그 중에서 한산이 유명해서 한산사 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한산과 습득의 목상이 모셔져 있었다. 그러나 한산사가 유명해 진 것은 풍교야박(楓橋夜泊: 풍교에서 밤을 보낸다)이라는 당나라 사람 장계(張繼)의 시(詩) 한 수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시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한문을 중요시하지 않는 잘못된 어문정책 때문인데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이 시가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버스에 내리기 전에 가이드가 이 시 이야기를 하다가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만 둔 적이 있었는데 "풍교야박"을 모르면 한산사 관광의 의미는 반감되는 것이다. 한산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런 시가 있는 것도 모르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을 반감시킨다. 단순히 사찰관광이 목적이라면 라면 중국이나 한국이나 어디에도 이 정도의 절은 흔하기 때문이다. 법당 뒤편에 목탑이 있는데 계단이 협소하여 3층까지 올라가다가 내려왔다. 장계의 시심을 울렸던 1400년 전에 만든 종은 일본인들이 약탈해 갔는데 일본에서 없어지고 현재 종루에 있는 종은 청나라 말(1907년)에 다시 만든 것이다. 문화동물 일본인들은 중국에서도 못된 짓을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 일본인들이 사죄의 뜻으로 만들어 보내온 종이 하나 더 있다. 절 입구에는 운하의 쌓인 흙을 치우는 준설공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보고싶었던 다리는 공사장 한가운데 있는 있었다. 20여 미터까지 접근하여 사진을 찍었는데 오랜 풍상을 거친 다리는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가이드에게"저 앞의 다리가 강교(江橋) 풍교(楓橋) 인가"하고 물어보니 가이드생활 8년인데 그걸 물어보는 분을 처음 본다 하면서 비석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 그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서둘러 사진을 찍고 버스에 올랐다. 중국의 관광지에는 고전 시문학과 관련된 곳이 많은데 모두들 그냥 지나친다.
※ 한산사와 풍교야박 ....................................................................
당나라 사람 장계(張繼)가 천보(天寶) 말년에 과거에 낙방하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강남을 유랑할 때 소주에 와서 지은 시이다. 이 시에서 작자는 풍교 주변의 경치와 한산사의 종소리를 빌어 자신의 객수(客愁)를 묘사하고 있다. 이 시는 "쓸쓸하다, 외롭다" 는 글자를 쓰지 않고 나그네의 고독한 여수를 나타내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시중에 하나다.
楓橋夜泊(풍교야박) - 張 繼 -
月落烏啼 霜滿天 달은 지고 까마귀 울고, 하늘에 서리 가득한 밤
江楓漁火 對愁眠 강교, 풍교 에서 고기잡이 불빛 보며 수심에 잠드는데
姑蘇城外 寒山寺 고소성 밖 한산사
夜半鐘聲 到客船 한밤중 종소리가 나그네 뱃전에 들려오네
- 1구(起)에서는 배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작자가 처음 대하는 현장에 대한 표현이다. 달은 지고 까마귀 울고 서리 내리는 밤, 나그네의 쓸쓸한 심정을 나타내고, 작자의 객수(客愁)와 청냉(淸冷)한 밤 풍경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 2구(承)에서는 1구에 이어 주변에 대한 사경(寫景)이다. 작자의 여수(旅愁)가 직접 토로(吐露)된다. 강풍(江楓)은 강가에 흐릿하게 보이는 강교, 풍교(江橋, 楓橋) 두 다리를 말한다. 작자가 탄 배와 고기잡이배들의 불빛이 몽롱한 밤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대수면(對睡眠)은 배에 몸을 실은 작자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과 주변 야경의 서술적 표현이다.
- 3구(轉)에서는 고소성(姑蘇城), 한산사(寒山寺)라는 실제의 지명이 역사적, 문화적 색채와 실제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고소성은 지금의 소주를 말한다. 서남쪽에 고소산(姑蘇山)이 있다.
- 4句(結)에서는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다. 고요한 정적을 뚫고 들려오는‘한산사’의 종소리는 시인의 객수와 적막감을 부각시키며 마무리한다.‘4구의 한산사의 종소리는 불교적 색채와 한산사 라는 고찰이 주는 전통의 이미지와 신비감을 나타내고 있다.
- 전체적으로 4행시의 전형적인 기법(起承轉結)이다. 1구는 하늘을, 2구는 땅으로 대상을 전개한다. 1, 2구에 나타난 경물(景)들은 작자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것들이다. 3구에서는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4구에는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시의(詩意)를 전개한다.
- 한산사의 종소리가 실재 있었는가 하는 논란이 있다. 절에서는 밤중에 종을 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新曉)이라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종소리의 실재 여부를 떠나, 이 시의 전체적 분위기는 작자가 하루 밤 야박을 하며 느끼는 온갖 감회가 한산사의 종소리에 기탁(寄託)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明나라말의 문인 진계유(陳繼儒)가
(唐詩三集合編)에서 "이 시의(詩意)는‘수면(愁眠)’으로부터 일어난다". 그 묘미는 말로 표현하지 않는데 있다". 라고 쓰고있다. 종소리의 파장만큼 긴 여운이 느껴진다. 실제로 한산사에 와서보면 풍교야박(楓橋夜泊)의 시정(詩情)이 반감(半減)된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의 느낌도 그렇다. 절 앞에 있는 강교와 풍교는 석조 예술품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다운 다리다. (우리나라의 책에는 강가의 단풍나무라고 번역한 것이 많은데 명백한 誤譯이다. 이곳에는 강이 없고, 단풍나무도 없다.)( 李丙疇 敎授 여행기) 그 밑을 흐르는 수로는 좁고 수량도 많지 않다. 장계의 시에서 "강가에 고기잡이 불빛을 보며 수심 속에 잠을 자는데 깊은 밤 한산사의 종소리가 나그네의 뱃전에 들려온다" 는 그런 유연(幽然)하고 그윽한 시정(詩情)을 느끼기에는 어딘가 부족했다.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위 환경이 많이 변한 것인가? 장계의 심금을 울렸던 종은 없어진지 오래이다. 한산사에는 풍교야박 시를 새긴 비석이 많은데 탁본을 하지 못하게 유리상자를 씌워 놓았다. 그 중에서 청(淸)의 유월(兪越: 1821~1906년)의 글씨는 몇 년 전 스승이신 노촌(老村) 李九榮 선생이 중국여행에서 사오신 탁본을 본적이 있었다. 비석 앞에서 사진을 찍고 나오다가 가이드에게 풍교야박이 중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가? 하고 물어보았다. 중국에서 나서 자랐지만 한시는 잘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가 알기로는 "중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는 "명월광" 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백의 시인데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시는 이백의 정야사(靜夜思)다.
정야사 (靜夜思) - 李 白 -
牀前明月光 (상전명월광) 침상 앞에 달빛이 밝게 비치니
疑是地上霜 (의시지상상) 땅위에 서리가 내린 듯 하네.
擧頭望明月 (거두망명월) 머리 들어 산 위의 밝은 달을 바라보고
低頭思故鄕 (저두사고향) 머리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소주 시내에서 발 마사지를 마치고 항주(杭州)를 향해 출발했다. 고속도로 연변 넓은 들에 노란 유채 꽃이 피어있고 운하에는 가끔 배가 다니는 것이 보인다. 들 한가운데 마을의 집들은 모두 2층이다. 아래층은 창고로 쓰고 이층에서 사람이 산다고 한다. 지대가 낮은 평지이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빠지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또 집들은 처마가 짧은데 비가 오면 벽이 빨리 마르게 하기 위함이라 한다. 몇 시간을 달려 저녁 8시경 항주에 도착하였다. 항주는 절강성(浙江省)의 성도인 큰 도시였다.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 오주 호텔(五洲 大酒店)로 왔다. 뉴스를 보려고 TV를 켜 보았다. 뉴스는 미국 이라크 전쟁이 소강상태다. 중국 방송은 알아들을 수 없고 자막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 대체적으로 중국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상당히 비판적인 것 같았다.
◆ 항주 (杭州)
(3월26일)
오늘도 날씨는 쾌청하다 중국에 온지 5일째다.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서호 관광에 나섰다. 항주(杭州)는 (五代十國)의 터전이었고 오.월(吳. 越)의 흥망성쇠가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수(脩)나라 때 운하를 크게 개발하면서 항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남송(南宋)도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고 지금은 절강성(浙江省)의 성도(省都)이다. 북경 보다 상해에 미인들이 많다고 하는데 근처의 소주, 항주 에 미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13세기에 이곳을 방문하였던 이탈리아 사람 마르코폴로는 그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서 "항주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하였다. 차창 밖으로 운하가 보이는데 큰 운하를 중심으로 작은 운하들이 시골의 작은 마을까지 연결되어 있고, 항주, 소주, 북경, 양자강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늘엔 천당 땅에는 항주"라는 말은 중국인들이 항주의 아름다움을 자부하는 말이다. 항주에 서호가 없었다면 항주를 갈 이유가 없을 것이라 할 정도로 서호는 항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볼 만한 곳이 많다. 또한 백락천(白樂天)과 소동파(蘇東坡), 왕희지(王羲之)와 연고가 있는 중국 고전문학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 서호 (西湖)
서호는 항주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이라는 말도 있고, 양귀비와 함께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는 서시가 항주 출신이어서 서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말도 있다. 배를 타려고 가는데 "악비 장군 탄신900주년"이라고 쓴 현수막이 보인다. 호수가에 2층으로 된 건물이 악왕묘(岳王廟)인가보다. 악왕묘는 남송(南宋)의 악비(岳飛 1103-1142)의 사당인데 金나라와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지만 간신들의 음모로 소환되어 38세에 옥사했다. 악비가 없는 남송은 결국 1126년 패망을 하고 왕과 백성들은 고통을 겪는다. 악비는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같다) 악비는 서민출신으로 농민군을 이끌고 싸웠기 때문에 서민의 영웅으로 추앙 받는다. 여기까지 와서 악왕묘를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쉽다. 서호의 면적은 5.6㎢, 둘레 15㎞의 타원형인데 평균 수심은 1.8m이며, 깊은 곳은 3m정도 된다. 중국의 호수치고는 크지는 않지만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 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즐겨 찾았다. 아침과 저녁, 비 오는 날과 개인 날, 각각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호수의 풍경, 구릉과 정자와 누각, 사원과 탑 등 주위의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10가지 경치(西湖十景)를 제일로 꼽는다. 특히 송나라 때의 시인 소동파는 서호를 월나라의 미인 서시(西施)에 비유해서 서자호(西子湖)라고 불렀다. 멀리 반짝이는 물결 위를 배들이 떠있는데 정자를 얹은 듯한 루선(樓船)도 보인다. 서호는 백락천(白樂天)과 소동파(蘇東坡)의 이름을 딴 백제(白堤)와 소제(蘇堤)라는 두 제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외호(外湖), 내서호(內西湖), 악호(岳湖), 서리호(西里湖), 소남호(小南湖)로 나누는데 역시 내려서 돌아볼 시간이 없다. 유람선에 올라 잔잔한 호수 가운데로 가로질러 가는데 도중에 또 노래가 시작된다. 말 타면 견마(牽馬) 잡히고 싶다더니 배만 타면 노래가 나온다. 처음에는 가요를 부르더니 누군가 유식하게 유산가(遊山歌)를 뽑는다. "화란춘성(花爛春城)하고 만화방창(萬化方暢)이라. 때 좋다, 벗님네야, 산천 경개(山川景槪)를 구경가세. 죽장망혜(竹杖芒鞋) 단표자(單瓢子)로 천리강산을 들어를 가니, 만산 홍록(滿山紅綠)들은 일년 일도(一年一度) 다시 피어 춘색(春色)을 자랑 노라 색색(色色)이 붉었는데,"...... 그러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둔다. 수준을 너무 높게 잡은 것이다. 아무리 명곡이라도 알아듣는 사람이 있어야지, 서호의 경치가 너무 좋아서 모택동, 강택민이 몇 번을 찾아 왔었다는 가이드의 안내 말을 들으며 우리가 탄 배는 호수를 가로질러 버스가 대기하고있는 반대편 언덕에 닿았다. 그곳에는 많은 중국의 단체 관광객들이 보인다. 서호를 제대로 둘러보려면 하루는 잡아야 할 것 같다.
※ 서호십경 (西湖十景)
① 蘇堤春曉(소제춘효) - 北宋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쌓은 제방으로
봄의 새벽을 제일로 친다고 했다.
② 平湖秋月(평호추월) - 白堤 서쪽 끝에 수면과 거의 같게 만든 조망대
③ 斷橋殘雪(단교잔설) - 눈이 녹으면 마치 다리가 끊어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④ 曲院風荷(곡원풍하) - 서북쪽 비정(碑亭)을 중심으로 펼쳐진 호수에 연꽃
향기 그윽하다
⑤ 花港觀漁(화항관어) - 5백여 그루의 모란을 비롯한 수만 그루의 꽃나무가
가득한 곳에서 잉어가 헤엄치는 것을 봄.
⑥ 柳浪聞鶯(유랑문앵) - 서호의 동남쪽에 버드나무 가지사이로 고운 꾀꼬리
소리를 듣는 것
⑦ 雙峰揷雲(쌍봉삽운) - 호수 남서쪽의 남고봉(南高峰)과 서북쪽의 북고봉
(北高峰)의 구름이 산수화처럼 보인다.
⑧ 三潭印月(삼담인월) - 서호 안에 섬이 있고, 그 섬 안에 호수가 있는데 달밤에 배를 타고 보면 특히 아름답다.
⑨ 南屛晩鐘(남병만종) - 남병산(南屛山) 중턱에 있는 정자사(淨慈寺)와
영은사(靈隱寺)에서 울려오는 저녁종소리.
⑩ 雷峰夕照(뇌봉석조) - 뇌봉산(雷峰山) 꼭대기에 있던 뇌봉탑(雷峰塔)에
석양이 비치는 광경. 지금은 탑이 없다.
◆ 영은사 (靈隱寺)
영은사(靈隱寺)는 항주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불교 10대 사원 중 하나다. 절 입구는 숲이 어우러져 있었으며 계곡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비래봉(飛來峰)은 인도에서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326년에 인도에서 온 스님이 창건하였는데 석회암으로 된 바위산의 석질이 인도 그르흐라쿠타 (Grdhrakuta)산과 같아 인도에서 온 산이라고 여기고 비래봉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래봉 에는 72개의 동굴과 송, 원대에 걸쳐 만들어진 330개가 넘는 석굴조각상이 양각 되어있다. 작은 산 전체가 문화재인 것이다. 영은사는 입구에서부터 관광객으로 북적거렸고 참배 객들이 태우는 향연(香煙)으로 매캐하다. 중국 사람들은 향을 한 묶음씩 한꺼번에 태운다. 천왕전(天王殿)에는 운림선사(雲林禪寺)라고 쓰여진 편액이 걸려 있는데, 청나라 강희(康熙)황제의 글씨다. 강희제가 남쪽 지방을 순찰하던 중 항주의 북고봉(北高峰)에 올랐는데, 구름이 자욱하고 안개가 덮인 곳 속에 절이 있는 것을 보고 이 네 글자를 생각해 냈다고 한다. 또한 영은사는 동진(東晉)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걸작 난정서(蘭亭序) 진본(眞本)을 왕희지의 손자의 제자가 당태종에게 빼앗긴 곳으로 알려저 있는데 (어떤 책에는 절 이름이 다르게 나와있는 곳도 있다) 북적거리는 관광객 중에서 이를 아는 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천왕전(天王殿)안에는 남송 목조예술의 걸작인 보살상이 있고 천왕전 뒤 본전에는 높이 33.6M의 세계최대의 석가여래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최근에 만든 것이다. 경내를 대충 돌아 나오는데 나한전(羅漢殿)에는 석가(釋迦)의 제자들인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이 있는데 실제 사람크기로 황동(黃銅) 1톤씩을 들어서 최근에 만든 것이다. 한 가운데 별도로 4대 보살(菩薩)이 약간 크게 조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김교각(金喬覺)의 상이 있다. (보살은 부처님 아래 이고 나한보다는 위의 품계이다.) 김교각은 신라의 왕자로 태어나 당나라에 와서 보살(菩薩)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중국에서는 지장보살(地藏菩薩), 또는 김지장(金地藏)이라고 부른다. 영은사의 모든 전각의 벽과 천정에는 수많은 현판이 걸려 있는데 필체가 모두 독특하고 뛰어나서 마치 서체(書體)의 전시장 같다. 비래봉 산자락 오솔길을 걸어 나오는데 맑은 물이 흐르는 바위에 침류대(沈流臺)라는 각자가 보인다. 침류대는 물가에서 시를 짓던 곳인데 우리나라에도 침류대가 몇 군데 있다. 북적거리는 인파를 피해서 시원한 그늘 길로 입구까지 걸어 나왔다. 영은사를 한 두시간에 돌아본다는 것은 맹인이 코끼리다리 만지는 격이다. 버스를 타고 간 곳은 항주명산(杭州名産) 용정차(龍井茶)로 유명한 차 농장이었다. 아가씨들이 차를 한잔씩 주어서 마시며 앉았는데 역시 한국말이 유창한 조선족 안내원이 나와서 항주에는 용정차를 많이 마셔서 안경 쓴 사람도 없고 살 찐 사람도 없다고 자랑한다. 아무도 반응이 없자 이 조선족 아저씨는 용기에 얼마든지 꾹꾹 눌러 담아서 사라고 온갖 정성를 다 하지만 한 두 사람 밖에 사는 이가 없다. 그냥 나오자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우리 일행은 이미 다른 곳에서 선물을 많이 샀기 때문에 이미 실탄(현금)이 떨어진 것 같다. 강당 벽에다 차에 대한 글(康熙帝, 蘇東坡)을 써 놓은 액자가 보이지만 읽어볼 시간이 없다.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육화탑으로 향했다.
※ 김교각(金喬覺)............................................................................
김교각(金喬覺)은 신라 사람으로 중국 안휘성 (安徽省)의 구화산(九華山) 화성사(化城寺)의 육신보전(肉身寶殿)에 등신불(等身佛)로 모셔져있고 지장보살(地藏菩薩)로서 중국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김교각에 관한 우리나라의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언제 태어나고 언제 출가하였는가 하는 것은 중국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구화산 역사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는 당나라 원화(元和) 8년(813)에 저술된 구화산 화성사기(化城寺記)에 입적한 때를 794년(정원 10), 99세라고 기록, 이를 기준으로 출생 년대를 산출하면 696년(신라 효소왕 5년)이다. 그러나 988년에 저술된 (宋高僧傳)에는 입적 년도를 80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교각은 신라 왕자이며 24세에 출가하여 구화산에서 99세까지 정진하다가 정원 10년(794년) 여름에 제자들과 이별을 고하고 홀연히 열반하였다.(開元末年時有僧地藏 則 新羅國王子 金氏近屬 時年 九十九歲 貞元 十年夏 忽召徒衆告別)
그가 열반할 때 "산이 울리고 돌이 소리 없이 굴러 내렸으며 대지에 신광이 번쩍이고 새들이 구슬피 울었으며 법당의 서까래가 무너져 내렸고 화성사의 종은 아무리 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석함 속에 육신을 넣고 닫은지 3년 후에 열어보니 용모가 생전과 다름이 없었고, 근골(筋骨)을 건드리니 쇠 소리가 나서 불경에 있는 지장보살의 내용과 같은 현상이므로, 사람들이 지장보살(地藏菩薩)의 현신으로 여겨 육신보전탑(肉身寶殿塔)을 세우고 등신불(等身佛: 실제 사람의 몸에 옻칠과 금을 입힌 불상)로 모시게 되었다." 그로부터 화성사가 더욱 번창하게 되어 구화산은 중국 4大 불교 명산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교각(金喬覺)이 친구 오용지(吳用之)에게 써 주었다는 시(詩)가 한 수 전해져 오는데 자신이 왕자였음을 밝히고 있다.
酬 惠 米 (은혜로운 쌀을 받고)
- 金喬覺 -
弁劫金 納布依 비단옷을 베옷으로 갈아입고
浮海修身 到華西 바다건너 도를 구하려 구화산을 찾아왔네.
原身乍是 尊王子 본래 나는 잠시 왕자였다오.
慕道相逢 吳用之 수행의 길에서 오용지를 만나
來散敲門 求他語 가르침을 주는 것만도 고맙거늘
昨? 送米 續農炊 어제는 이렇게 쌀까지 보내왔네
而今餐食 黃精飯 이제반찬을 준비하고 쌀로 밥을 지어
腹飽忘思 前日饑 배부르게 먹고 나니 지난날의 배고픔 모두 잊어 버렸네
김교각의 다음 시를 보면 그의 자상한 인품이 나타난다. 수행이 힘들어 하산하는 동자를 보내면서 쓴 시다.
送 童子下山 (동자를 보내며)
金喬覺 (金地藏)
空門寂寬汝思家 절간이 쓸쓸하여 네가 집 생각하더니
禮別雲房下九華 절 방을 하직하고 구화산을 떠나는구나
愛問竹欄騎竹馬 대 난간의 죽마 타기를 즐겨 묻더니
懶於金地聚金沙 불문에서 수행하기에 힘들어하였지
添甁澗底休招月 돌 샘물 길으며 달 보기도 이제 그만
烹茗 中罷弄花 차 달이며 꽃을 희롱하기도 이제는 마치고
好去不須頻下淚 잘 가거라 부디 눈물은 자주 흘리지 말고
老僧相伴有煙霞 노승은 이제 안개와 노을을 벗하리라
◆ 육화탑 (六和塔)
육화탑(六和塔)은 전당강(錢塘江)이 내려다보이는 월수산(月輸山)중턱에 970년에 강의 역류를 막아 달라는 기원으로 세운 탑인데 국보이다. 높이 59.89m의 8각 탑은 겉으로 보기에 13층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7층이다. 104개의 풍경이 각 층마다 매달려 있어 바람이 불면 은은하게 울린다고 한다. 탑의 외부는 벽돌이고 내부에는 목조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위에 올라가면 전당강을 바라볼 수 있다는데 시간이 없어서 그만두었다. 마당에 있는 돌로 만든 문은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을 찍고 계단을 내려와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전당강은 양자강의 지류인데 서울의 한강처럼 큰 강이다. 강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다니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상해를 향해 출발하였다. 차창으로 보이는 농촌의 풍경은 광활하다. 운하가 보이고 운하를 따라 배들이 마을로 돌아온다. 땅이 넓은데 비해서 트렉터 같은 현대화된 장비는 보이지 않는다.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은 자루가 긴 호미로 꼿꼿이 서서 일한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도 연변지역의 조선족은 한국처럼 호미자루가 짧아 쪼그리고 앉아서 일한다 하는데 이것은 오랜 농경방식의 전통이다. 쪼그리고 일하는 것은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모습이다.
◆ 상해 (上海 shanghai)
상해에 도착하니 늦은 시간이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동금강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상해는 1천7백만 인구를 자랑하는 국제도시답게 상당히 활기가 있다. 거리는 넓고 고층 건물은 서방의 어느 나라 못지 않게 발달되어 있다. 도시 한가운데로 고속도로와 같은 규모의 간선도로가 사통팔달로 나 있었다. 황포강을 가로지른 남포대교(南浦大橋)는 세계최고다. 길이가 8344 m이며 수면으로부터 46 m 의 높이로 5.5만 톤급의 선박이 아래로 통행이 가능하게 했다.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현수교이며 넓이는 30.35m이고 양측에 2m넓이의 보행로를 만들어 놓아 여행객들로 하여금 황포강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지면보다 다리가 높게 건설되어 있어서 다리 양안의 진입로는 루프 식으로 돌아서 올라가게 되어있었다.
◆ 황포강(黃浦江)의 야경
황포강은 상해의 관문이다. 상해의 밤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옛날에는 부두가 상, 하(上, 下) 두 곳이 있었는데 위에 있는 상해가 더 유명해지고 발달하여 지명이 되었다. 청나라 말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이 이 황포강을 통해 들어와서 세계 최대의 항구도시인 상해가 만들어 졌다. 유람선에 오르자 네온 불빛이 아름다운 빌딩들을 왼쪽으로 하고 출항한다. 밤이라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강에는 여러 종류의 크고 작은 배들이 오가는데 바다와 연결되어있어서인지 큰배도 보인다. 자료에 보니 황포강 하류 오송구(吳淞口)에는 삼협수(三挾水) 현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시내에서 흘러나오는 더러운 물이 섞인 황포강의 검은 물과, 양자강의 진흙이 잔뜩 섞인 커피 색 탁류, 동지나해의 푸른 해수가 만날 때 볼 수 있는 현상으로 각각의 물의 비중이 틀려 서로 섞이지 않고 뚜렷하게 삼색(三色)경계가 나타나는 광경을 말한다. 지금은 밤이라서 볼 수가 없다. 상해는 개혁 개방 바람으로 국제적인 도시의 면모를 갖춘 대도시다. 황포강을 사이에 두고 외탄 건너편 포동 개발지구에 세워진 금무빌딩(金茂大厦)은 높이 420.5 미터에 88층으로 중국에서는 가장 고층이며 세계에서 3위를 차지하고 있는 빌딩이다. 동양 전통의 멋과 현대과학기술을 접목시킨 건축물이라 한다. 동방명주(東方明株)탑은 강변에 우뚝 솟은 방송관제탑이다. 타워의 높이(468m)가 아시아 1위, 세계 3위에 해당하는데 마치 하늘에서 내려앉은 밝은 기둥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에 수려하고 웅장하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10초만에 263m 높이의 원형 전망대에 다다를 수가 있고 상해를 관람할 수 있고 한다. 밤 8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야경을 보러 나온 주민들과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빈다. 이쪽 외탄의 구 시가지는 어둡고 건너편 푸동 신 시가지는 밝은 것이 대조적이다. 푸동은 아직도 개발중인데 면적은 여의도의 몇 배라고 했다. 김정일이 와서 보고 깜짝 놀라 천지개벽이라고 극찬하고 북한에서도 경제특구를 만들게 되었다. 세계적 기업들의 광고선전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다. 그 중에 우리나라 기업 (LG, SAMSUNG, SK)의 전광판도 보인다. 1시간 반 정도를 항해 하다가 뱃머리를 돌려 선착장으로 돌아온다. 갑판에서 내려오다가 2층에서 라이브 쇼를 하는 곳이 있는데 우리일행들이 무대를 독차지하고 노래를 부른다. 이상하게도 배만 타면 노래가 나오는데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하여간 노는데는 용감하고 소질 있는 대단한 한국인들이다. 한바탕 놀고 나서 마무리는 언제나 " 짝 짝 짝~짝 짝 대~한 민 국 "이다. 중국인, 일본인, 서양인들이 멍하니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눈에는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밖에 나와서도 기죽지 않고 활동하는 것은 국력신장에서 오는 자신감이라 생각한다.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 왔다. 오늘이 중국에서 마지막 밤이다.
◆ 임시정부청사 (臨時政府 廳舍)
(3월 27일)
아침 7시 모닝콜 소리에 일어나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오늘이 중국관광 마지막 날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관광하기로 되었다. 오늘 우리가 찾아온 곳은 마영로(馬營路)의 낡은 연립주택 단지 입구에 있는 허름한 3층 건물인데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임시정부가 사용했다고 한다. 주변은 한눈에 보아도 빈민가였다. 낡은 주택의 창 밖으로 빨래를 널어놓은 것이 보인다. 당시 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租界) 안에 있었다. 임시정부는 일본의 탄압을 피해서 이곳 상해에서 항주, 중경(重慶)등 으로 옮겨 다녔다. 그래서 중경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가 또 한곳이 보존되고 있다. 청사에 들어서니 안내인들이 일행들을 정렬시킨 다음 애국가를 부르고 묵념을 하니 숙연해진다. 아래층에는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들이 전시 되어있고 2층에는 생활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소품들의 진위(眞僞)는 확실치 않다. 좁은 계단에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방명록이 게시되어 있는데 알만한 사람들의 이름도 보인다.
◆ 홍구공원 (虹口公園)
홍구 공원은 상해 중심부에서 약 4km 떨어진 곳에 있다. 지금의 명칭은 노신 공원이다. 공원에는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는 2층 누각 매정(梅亭)이 있는데 너무 협소하고 전시물도 빈약하다. 1932년 4월29일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했던 현장에는 중국의 근대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인 노신(魯迅)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노신묘는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을 지금의 장소로 옮겨왔다. 공원에는 노인들이 맹물로 땅 바닥에다 글씨를 쓰고 있었는데 필체가 대단했다. 노인들이 운동 삼아 하는 것이라 한다. 버스에 올라 차창 밖을 보니 골동품 거리가 보인다. 한번 둘러 보고싶지만 시간이 없다. 윤봉길 의사의 유적을 보는 것으로 중국에서의 관광을 마치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 노신 (魯迅:1881-1936)..................................................................
1881년(光緖7) 절강성 소흥(紹興)에서 출생했다. 22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를 하였으나 의학으로는 중국인의 정신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닳고 의학도의 길을 접고 문학을 길을 걷게 된다. 노신은 죽을 때까지 상해에서 살았다. 그가 문학을 선택하게 된 목적은 '국민정신의 개조'에 있었다. 41세(1921년)에 발표한 그의 대표작인 아큐정전(阿Q正傳)을 통에서 중국민중들의 잘못된 의식구조를 고발하였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전후한 농촌을 배경으로, 자기의 성명도 정확히 모르는 최하층의 날품팔이 농민 '아큐(阿Q)라는 사람의 일생을 전기 형식으로 쓴 소설이다. 혁명당원을 자처하며 활동했으나 도둑으로 몰려서 싱겁게 총살되어 죽는 아Q의 운명을 그렸는데 혁명의 소용돌이에서도 끄떡없이 마을 사람들을 지배하고 위에 군림하는 악덕 지주(地主)와 대조적으로 그렸다. 모욕을 받아도 저항할 줄 모르고 오히려 머리 속에서 '정신적 승리'로 안주해 버리는 중국인들의 나약한 정신구조를 희화화(戱畵化)함으로써, 중국 민중들의 무의식, 무기력을 지적하고 분발을 촉구하였다. 중국 현대문학의 출발점이 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윤봉길 의사 (尹奉吉 義士 1908-1932)...................................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덕산 보통학교를 마치고 오치서숙에서 수학하였다. 19세에 야학을 열고 독서회를 조직, 농촌계몽운동을 했으며, 20세때 농민독본을 제작했다. 22세 때에는 월진회(月進會)라는 체육회를 조직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인 1930년 3월 사나이 집을 나서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장부출가 생불환: 丈夫出家 生不還)이라는 글을 써놓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해에 도착하여 백범 김구 선생이 지휘하는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1월 28일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이 천장절(天章節: 일황의 생일)겸 상해 점령 전승경축 기념식을 홍구 공원에서 거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윤의사는 특공작전을 감행할 것을 자원하고 1932년 4월 29일 도시락에 폭탄을 감추고 공원에 들어가서 일본군정 수뇌들에게 폭탄을 투척하였다. 윤의사는 현장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5월 25일 현지의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에 일본으로 이송되어 그 해 12월 19일 2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국제도시인 상해에서 일어나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지만 일본의 탄압을 불러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야했다. 중국 군 총사령관 장개석은 "중국의 백만 대병도 불가능한 거사를 한사람의 조선인 용사가 단행하였다"고 윤의사의 의거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후부터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중국인들이 협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 귀로 (歸路)
상해공항에서 면세상점을 둘러보고 4시30분 비행기(아시아나)에 올라 두시간 후(오후 6시40분경)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이것으로 7박8일 중국 여정이 모두 끝났다. 공항버스 승강장에서 일행들은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일주일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친 안도와 아쉬움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여행사 사장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전했다. 떠나기 전에 호흡기 질환으로 여행을 연기하자고 요청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사장은 여행기간 좋은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고 관광지를 한군데라도 더 보여주려고 노력하였고 어른들에게 겸손하고 하고 사업상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일행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노원, 도봉 방향 공항버스를 타고 창동에 내려 집으로 돌아왔다.
- 글을 마치면서 -
너무 긴 글을 띄워서 읽는 분들이 지루하였을 것입니다. 미리 써 두었던 것을 그대로 복사해서 띄운 것이기 때문이었음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서적이나 인터넷을 통하여 구성하였기 때문에 모든 분들이 거의 알고 있는 진부한 내용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