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무협에서의 중화주의, 대안은 없는가

뭐 제가 무협에 대해서 아주 많이 읽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알 만큼은 알고 있으니 걍 쓰도록 하겠습니다. 간혹 틀린 부분이 있다면 짚어주시길 바랍니다 ^-^** 무협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무와 협에 대한 이야기, 정확히 말하자면 武를 통해 俠을 이룬다는 것, 약자들을 괴롭히는 강자들을 물리치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흔히들 경공술 쓰고 날라댕기면서 검이나 휘둘러 대는 싸구려 이미지를 연상하지만요. 슬프게도. 그 시초는 사마천 사기의 자객열전까지 올라갑니다만, 본격적으로 성하게 된 것은 청조가 망한 이후라고 합니다. 뭐 이것도 이런저런 시대구분이 있습니다만, 과감히 생략하기로 하고.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 시기에 협이 노리는 대상이라는 것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도둑이나 탐욕스러운 부자 등이 되기도 합니다만, 결국 최종 목표는 청조와 같은 이민족 왕조(몽골)이 되기 십상입니다. 주인공이 반청복명을 노리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도 허다하구요. 심지어 요새는 애국주의의 바람을 타고 일본 무사나 러시아 레슬러를 곤죽만드는 개화기 무사의 이야기도 자주 등장합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지금 중국 여러 대학들에서 신파 무협소설의 대부 김용의 문학을 연구하는 것이나, 이러한 학문이 장려되는 것은 중국의 고구려사 탈취 야욕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김용의 소설들을 대체로 보면, "한족 중심의 세계"를 지키자.. 뭐 이런 류의 이야기들입니다. 근대 이후 무협 이야기의 대부분이 몽고(몽골도 아니더군요.)나 청나라에 대한 저항을 담는다는 것 역시 이러한 경향의 일부라고 생각하거든요. 뭐 대만에서 나온 무협을 소재로 한 비디오 게임을 해 보니까 심지어 마지막 보스인 몽케 칸이 괴물로 변하는-_ㅜ 것까지 나오더군요. 참 내, 이 사람들은 몽골인들이 그렇게도 미운가 봅니다.(원작은 중국 대륙 거라나.) 주인공이 중화 사람이 아닌 것은 거의 하늘의 별따기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좀 거칠게 말해서 (역사적으로 애국주의,반청복명 등의 대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해 온) 무협소설의 세계관 = 중화주의의 세계관, 화이 사상이라고 등식을 만들어도 과히 틀리지만은 않습니다. ...이러면 또 "중원은 가상공간이고 어쩌고" 하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합니다만 저는, 사마 모씨의 "중원은 어디까지나 가상공간일 뿐이다." 류의 발언, 이건 더도말고 덜도말고 헛소리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판타지(Fantasy)라는 것은 물론 가상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가상공간은 100% 가상이 아니라, 현실의 변형에 좀 더 가깝습니다. 반지의 제왕이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서 영화로 만들 때 지중해에서 찍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톨킨은 북구학자였고 뼛속까지 영국인이었습니다. 그가 상상한 세계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앵글로색슨 족과 덴마크 인의 신화적 세계입니다. 그래서 프레이가 다스리는 알펜(=Elf)족이 등장하는 것이고 영화에서 드워프 족 전사 김리가 "아 글쎄, 사람들이 드워프들이 구더기에서 태어나는 줄 안다니깐요!!" 하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하는 겁니다. 불의 산의 모델은 아이슬란드의 화산인 것이구요. 한 마디로 불의 산이라고 던져 주면 서역에 있는 진짜 나무들이 불타오르는 산(...) 인지 뭔지 누가 안답니까? 하지만 북구인의 세계관에서 이를 보았기 때문에 말 한마디만으로도 화산이 연상되는 것입니다. 영화에서도 그렇게 갔구요. 아랍 인 거인이 잔뜩 등장하는 터키 민담 읽으면서 몽골 초원을 배경으로 생각하는 사람 있겠습니까? 아마도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성 싶은데요? 이런 점에서 현재 우리 무협소설은 은연중에 공기중에 스며든 중화주의의 망령에 대해 분명히 책임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단지 안 하는 걸 못한다고 죽는 소리나 해대니까요. 그럼 대안은 없는 것일까요? 무협이라는 것이 중국쪽에서 성했던 것이니 우리나라 사람이 어떻게 써도 중화주의에 입각한 이야기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무협소설이라는 것은 무를 통하여 협을 이룬다는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탐관오리등에게 시달려 왔던 그리고 여기에 저항하는 민중적 영웅들의 이야기가 보편적이었던 동아시아 에서는 뭐 넓게 본다면 홍길동전도 무협소설(신마검협소설)의 범주에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은가, 적어도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무협소설가들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무협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권에서의 무시할 수 없는 문화 코드이며, 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봅니다. 윗분께서는 북경 내사랑의 사건은 그동안 무협 등을 통해 알게 모르게 주입되어 온 중화주의가 나타난 것이 아니냐고 하셨는데, 전 확실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들 스스로를 소중화라고 여기면서 중국이 되지 못해 안달을 부린(?) 옛일이 지금 이런 식으로 나타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정말 떨어지지도 않는 중화주의의 망령은 사람 잡아먹는 도깨비보다 더 무서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서로 베껴쓰기에 급급한 우리나라의 많은 무협소설가(판타지소설 역시... 다라는 건 아니고)들에게는 쇠 귀에 경읽기일지도 모르겠군요. 톨킨이 북구학 전문가였다는 것, 김용이 동양의 문화에 대한 진정한 교양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