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장안중23회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좋은글방 스크랩 허난설헌의 시집살이를 통해본 여성의 삶
업장소멸(강귀숙) 추천 0 조회 78 07.09.16 17:1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제2발표문>



허난설헌의 시집살이를 통해본 여성의 삶


정 경 숙(강릉대 사학과)

                                    


      

      1. 들어가기

   최근 여성학운동의 성과로 뛰어난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역사적 여성에 대한 발굴과 역사적 재평가가 크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일환으로 허난설헌에 대한 연구도 최근 활발하게 진척되고1) 그 현양사업도 크게 진작되고 있다.2) 그러나 조선시대 여성의 경우 그 사료상의 한계로 말미암아 소수 사료에 집중되어 재인용 혹은 재재인용하는 사이에서 사소한 해석상의 문제가 제기될 시점에 이르렀으니, 이 역시 발전된 양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는 새로운 사료의 발굴이 시급한 단계이다.

   특히 시인인 허난설헌의 경우 그 평가가 지나치게 도식화되고 화석화되어 오히려 허난설헌의 이해를 완성시키기도 전에 식상할 위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허균 중심의 사료에 함몰 되어 허난설헌의 평가를 지나치게 가정 내의 문제로만 한정시켜 사적이고 감상적인 결론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지배적인 경향인 것으로 보여진다.

   최근 허난설헌의 도식적 이해의 단편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허난설헌의 세가지 한3)        

첫째, 왜 조선에 태어났을까?

둘째, 왜 여자로 태어나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서러움을 지녔을까?

셋째, 왜 하필이면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을까?

   첫째 이것은 통시대적인 혹은 근대주의적 내지 식민주의적 사관을 저변에 깐 평가이며, 그 시대 즉 조선 중기 그것도 임란이전에 살았던, 그리고 대외적으로 항상 왜변에 시달리고 대난이 예측되는 위기의식이 충만되었던 시대 인식이 배제된 인간 이해이다. 나아가서 동서붕당으로 인한 당론이 격화되고 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조정의 내분과 제도적 모순으로 인하여 가정 내에 관리인 남편을 안주시키지 못하였던 시대인식을 배제시킨 이해이다. 그리고 인간관계를 남녀간의 애정에만 한정시킨 편협한 인간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천재 허난설헌을 이해함에 있어 친정4)과 아울러 시댁 그 시댁에는 시어머니 한 분만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대가족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그 시대가 양계적 가족공동체가 온전되어 있고, 당론에 의하여 훨씬 폭 넓은 인간관계로 구성되어 있었음에랴.

   둘째 허난설헌은 아이를 갖지 못하였는가? 주지하듯이 허난설헌은 10여년의 결혼 생활 중에 무려 세 아이를 임신하여 1녀 1남 그리고 1회 유산 경력이 있었다. 이 정도면 부부관계도 보통 수준은 될 것으로 볼 수 있다. 함께 아이를 갖지 못하였던 김성립은 어떤 한을 가졌을까?

   셋째 김성립이라는 인물이다. 우리는 그에 대하여는 잘 모르고 있었다. 허균의 평에만 의지해서 알아볼 염도 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난설헌은 국내외에 알려진 문인이다. 친정 오라버니의 초역사적인 사랑과 인정을 받아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만하면 16세기 조선 여인의 사회적 지위는 세계적일 것이다. 그런 세계적인 여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김성립이란 인물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본고에서는 초당에서 태어나 서울 건천동에서 성장한 후 14-15세에 결혼하여 28세에 요절하기까지의 성인으로서의 허난설헌의 삶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흔히 재예가 뛰어난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질시 때문에 난설헌의 수명이 단축되었다는 설에 대한 근거도 허균의 몇 줄의 글에 근거하고 있을 따름이다. 심지어는 역적 집안의 딸이었으므로 자살의 길을 강요당하였을 것으로 보여지기도 하였다. 과연 허난설헌의 시집살이는 어떠하였을까?


 2. 허난설헌을 중심으로 본 가족관계


1) 시댁 가족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1562-1592)은 안동김문 書雲觀正公派 11세손이다.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7세 希壽(愁然齋, 별시문과, 사가독서, 대사헌 무오사화 후 김종직의 신원을 상소), 8세 魯 (東皐, 문과, 사가독서, 직제학 김안로를 논척하다가 유배, 퇴계의 백씨인 李瀣와 조광조의 신원을 상소), 9세 弘度((1524-1557) 南峯, 문과 장원급제, 문인화가, 典翰, 영의정추증, 윤원형 탄핵으로 甲山 유배중 卒), 10세 瞻((1542-1584) 荷堂, 문과급제, 校理, 퇴계문하에서 수학, 율곡을 논하다가 지례현감으로 좌천 임소에서 졸))과, ?((1547-1615) 夢村, 알성문과 급제, 사가독서, 輔國領中樞府使) 11세 誠立(1562-1592, 西堂, 문과급제, 홍문관 著作, 31세 임란시 전사), 正立((1579-1648, 평창군수), 12세 振((1603-1688) 증광문과 이조참의, 부제학. 駱峯. 생부 정립. 성립의 아우인 정립의 3자중 제1남을 양자로 들임, 후처인 남양홍씨 역시 생자녀 하지 못한 듯함. 김성립의 묘비명에는 無育 으로 되어 있음.)을 이어오는 가계 구성원의 일원이다. 5) 즉 법제상, 족보상 振은 허난설헌의 양자로서 아들로 간주되는 것이 조선시대의 관례이다. 그의 후손들은 허난설헌을 조상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다.

   난설헌은 14-15세 되던 해, 한 살 위인 교리 金瞻의 아들인 金誠立과 결혼을 하게 된다.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과 허봉은 같은 시기에 사가독서 하는 등 또한 각별히 사이가 좋았으므로 혼담이 이루어졌다.6) 즉 난설헌은 동인가계에서 동인가계의 이웃집으로 출가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친정은 오늘날의 오장동에 위치하였고, 시아버지의 집은 남소문 앞에 있었다. 그리고 친정의 정치적 비운은 시댁의 정치적 비운과 동시적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實錄』에서 허봉, 김첨의 형제, 송응개의 형제들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자주 발견된다. 이들 세가문은 허난설헌의 혼인으로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고 더욱 돈독하여졌다.

        

2) 시어머니와의 관계

   시어머니 송씨는 이조판서 宋驥壽(1507-1581)의 5녀이었다. 송기수는 을사사화시 사림이 제거되기 직전에 사람들이 “형인 인수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떻게 하겠느냐.”하니 “동산에 가시덤불이 무성한데 그 가운데 한송이 매화가 있다면, 어찌 매화가 상한다고 가시덤불을 없애지 않겠느냐” 라고 하였다. 결국 인수가 처형되자 사람들로부터 형을 모함한 공신이라고 지탄을 받았다.1573년 기로소에 들어가는 등 4조를 섬기며 부귀와 장수를 누렸으나 을사사화에 가담하였다 하여 지탄을 받았다.7) 또한 송기수의 정치적 성향으로 보아 사림보다는 훈구파에 속하는 인물로 주자학주의자로 보기는 힘들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시어머니 송씨의 시아버지인 김홍도는 을사사화시 피화되어 갑산에 유배된 후 그 유배지에서 객사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시댁에서의 송씨의 입지가 세평처럼 ‘현모양처주의’에 입각해서 며느리를 박대할 상황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시어머니 친정의 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世忠   -     麒壽  -     應漑  -     敬祿      -  錫夢    - 之明이다.

        (문, 군수)  (문, 이조판서)(문, 대사간)  (현감)        (감찰)  

                                   


   10세 世忠(1468-1498))의 처(1471-1551))  남편에게 부묘됨. 1남 3녀로 처음 기재된 딸은 閔仁에게 출가하였고, 자녀관계는 기재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는 縣監을 지낸 鄭耆에게 출가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기재된 바는 다음과 같다.

        子 鄭思重

        女 朴應賢

        子 鄭思盆

        女 申?

        子 鄭思元

   즉 출가한 딸의 시댁의 본관을 기재하지 않았고, 딸의 출생 순서를 기재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외손의 벼슬명이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세 번째는 丁應斗(文, 貳相)에게 출가하여 3남4녀를 두었다. 기재순서는 다음과 같다.

        子 丁胤祚 (? ?)

        女 尹仁涵 (參判)

        子 丁胤禧 (監司)

        女 權鵬   (文 牧使)

        女 李堯臣 (郡守)

        子 丁胤福 (副提學?)

        女 趙瑞龍

   이 경우 역시 본관을 기재하지 않고 있다. 외손의 기재는 낳은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다.

   11세인 麒壽(1507-1581)의 처(1510-1583))는 대사헌 蔡枕의 딸로, 應漑, 應泂, 應洵의 3남과 6녀를 두었다. 一女는 韓克昌(벼슬 典簿) 二女는 都事 申承緖에게 출가하였다. 5녀는 金瞻(文 校理)에게 그리고 6녀는 兪對修에게 출가하였다.

 한극창은 5남3녀를 두었다.  그 서술 순서는 다음과 같다.

        子 韓?, (監察)

        子  연 (文 博士)

        女 尹壽民 (文 參判)

        子 진 (進士)

        女 강개 (郡守)

        자 한용 (佐郞)

        자 한익

이녀의 자녀는

        女 任應基(生員)

        女 李應福(坡原 都正)

        子 申欽(文, 領相 諡 文貞公)

        子 申鑑 (文 參判)

즉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되었다.

3녀와 4녀의 경우는 전혀 기재사항이 없다. 추측컨대 출가전 사망자인 것으로 보여진다. 즉 10세 세충의 첫째 기재녀인 민인의 처의 경우는 출가후 미자녀인 것으로 보여지므로 이 경우는 출가전 사망인 것으로 보인다.

   5녀는 허난설헌의 시아버지인 김첨에게 출가한 여성으로 허난설헌의 시어머니의 경우이다. 그 자녀출생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子 金誠立(文 正字)

        女 李慶全(判書)

        子 金正立(郡守)

        女 朴燉

이 역시 출생순서대로 기재하였다. 은진 송씨의 족보는 김정립이 임진왜란시 홀로된 두 누이와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을 하였다는 기사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6녀의  자녀 서술순서는 다음과 같다.

        女 李감(文 判決事)

        女 李尙信(參判)

        女 金善餘(文 察訪)

        子 兪景曾

        子 兪學曾

        女 洪奧

이상에서 살펴본 바 딸의 자녀 즉 외손에 대한 기재 양식은 낳은 순서 대로 혹은 생존한 대로 서술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딸의 경우는 사망으로 인한 결원이 없으면 순서를 기재하지 않고 순서대로 기재하였으며, 결원의 경우 서열을 숫자로 표시하여 결원이 있음을 감지케 하였다.

        13세 敬祚의 경우는 2남 3녀중 1녀는 무기재의 경우이고, 제2녀의 기술 양식(여, 자, 자, 자, 여의 3남2녀)도 태어난 순서이고, 제3녀의 경우(여, 여, 자, 자, 여의 3녀 2남)) 14 세 錫夢의 경우의 3남2녀로 제1녀는 무기재이고 제2녀는 자녀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15세 之明의 경우는 3남5녀로서  제1녀와 제5녀가 출가하였으나 자녀관계는 미기재이다.  이상은 嘉靖(1522-1566)에서부터 崇禎(1628-1644)년간까지의 기록이다. 즉 임난을 전후한 시기까지 허난설헌의 시어머니의 가계는 여전히 태어난 순서에 따른 기재 양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입양이 아직은 일반화되지 않았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물론 이상의 사항은 통혼관계에서만 확인 한 것이나, 기수 주변의 직 . 방계에서도 입양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안동 김씨의 경우 김성립이 양자를 들인 것에 비해 은진 송씨는 근친내에 입양이 없는 것에서 시어머니가 주자학적 여성관 소지자임을 입증하기는 힘들다.

     

3)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김성립에 대하여 ‘28세 되던 해에야 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관직이 정팔품 홍문관저작에 그친 것을 보면, 그리 뛰어난 인물은 아닌 듯 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것 역시 허균의 『성옹지소록』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세상에 文理는 부족해도 능히 문장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나의 매부 김성립은 경사에 대하여 읽도록 하면 제대로 혀도 못 놀리지만, 科文은 주요점을 맞추어서 논책은 여러 번 높은 등수에 올랐다?


   김성립의 문장 솜씨는 뛰어났던 것으로 보여진다. 『實錄』과 안동김문에 그의 글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시 보다는 文과 논리적인 서술에 재주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전하는 바대로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정서와 취향의 차이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김성립의 성품에 대하여 『東史』에 전하는 글을 살펴보자.


    “선조때 장안의 선비들이 벗을 모아 무리를 만들어서 일부러 미친짓을 하면서 괴상한 말을 만들고, 동서로 뛰어다니면서 울고 하며 서로 간에 묻기를 ‘무엇이 우숩고 무엇이 슬퍼 우는가?’하다가 큰 소리로 스스로 대답하기를 ‘문무대신이 사람같지 못하니 우습고, 우는 것은 국가가 장차 망할 것이 슬퍼서 운다.’고 하였다. 한 때 이름하기를 登登曲이라 했는데, 이렇게 부르짖는 우두머리는 鄭孝誠, 白雲民, 柳克新, 金斗男, 李慶全, 金誠立, 鄭協 등이었는데 얼마 안가서 壬辰의 亂이 있었다.”


 위의 글을 보면 당대의 정치와 잦은 왜변에 대한 관심이 높고, 감정이 격하고 표현이 거칠었던 것으로도 보여진다.

  한편 다음의 묘비명을 보면 정서적인 측면도 보인다.8)


    ...성질이 강직하고 방정하며, 자기 물건 외의 것으로 허식하는 것은 마음에 둔 바 없고, 항상 독서만 하면서 강가에 집을 지어 문을 개방하고 정신수양을 하였다...


   김성립이 아둔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는 ‘28세에야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고 하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9) 그렇다면 주변 인물들의 급제 연령을 살펴보자.

   허엽(1517-1580)은 1546년 30세로 식년문과에 갑과 급제한 것을 위시하여, 허봉(1551-1588)은  1572년 22세로 친시문과에 병과 급제, 허성은 36세에 병과 급제, 허균(1569-1618)은 1594년 26세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리고 사돈인 시어머니의 친정아버지인 송기수(1507-1581)도 1534년 28세에 문과 병과 급제 하였고, 아들인 宋應漑(?-1588)는 허봉의 친구로 급제 기록은 발견되지 않지만, 1565년(27세 이상)에 홍문관 정자 .저작을 지냈으므로 급제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아우인 應泂(1539-1592)은 음보를 거쳐 1572년 34세로 문과 병과 급제를 하였다. 참고로 율곡 이이(1536-1584)는 23세에 별시에서 장원하였으며, 퇴계 이황(1501- 1570)은 28세에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과거시험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28세 병과 급제는 평균적인 인재 내지 관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급제 후 김성립이 홍문관에 임용된 것은 그의 학덕이 공인되었음을 의미한다. 홍문관은 옥당이라고도 별칭되는 청요직으로서 그 관원이 되려면 知製敎가 될만한 문장과 경연관이 될만한 학문과 인격이 있어야 함은 물론 가문에 허물이 없어야 하였으며 우선 홍문록에 선발되어야 하였다. 홍문록이란 홍문관원의 후보로 결정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홍문관, 이조, 정부(조당)의 투표를 통하여 다득점자의 순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홍문관원의 결원이 생기면 홍문록 중에서 주의, 낙점된 사람으로 충원하게 되므로 홍문관원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홍문관을 위시한 언론 삼사에서는 과거 등재자가 발표되면 제일 먼저 필요한 인원을 우선적으로 선발할 권리가 주어진다. 따라서 홍문관 정자로의 임용은 가장 우수한 인재임을 뜻하며 가문의 광영을 의미하는 것이다.10)

        芝峯 李睡光(1563-1628)은 거의 동년배인 김성립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은 만사를 지었다. 30세 임진왜란시 경상도방어사 趙儆의 종사관으로 종군하고, 의주에서 北道宣諭御使로 지내다가 김성립의 순국을 듣고 지은 만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1)


        김군은 나의 착한 벗, 그 높은 기개에 재주도 절륜했네

        젊어서는 서로서로 도와왔으니 그 정은 형제같이 친하였어도

        문예는 세상에서 절륜하였고 출발은 청운이 화창했는데

        어찌하여 조물주는 시기를 해서 머나먼 길 천리마 발을 막았나

        임진년에 해적들이 몰아왔을 때 나는 영남병막에 부임해가고

        그대는 때마침 假記注12)이었네

        승정원에 마주서서 하던 이야기 이 어찌 한번 이별 알았으리오

          ....

        아이도 없는데다 수도 못하였으니, 이런 이치 이해하기 아주 어렵네


   안동김씨 문중에서의 허난설헌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발생한 허균에 인한 세평에 크게 좌우되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어 허난설헌의 사망날자와 연령까지 기재하였을뿐 아니라 조선 말기 헌종 철종 년간에 16세손 秀敦의 청으로 양촌허씨 許傳에게 김성립의 묘비명문을 부탁하여 남긴 글이 전한다.13)


     서당공이 몸소 순국하였으니 그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국사에 일성같이 찬란하게 나타나 있으니, 가히 천추에 빛날 것이니 비록 묘도에 비명이 없다 하더라도 오히려  명이 있는 것과 같지 아니하겠는가.구태여 말한다면 세상에는 연고와 어려움이 많아서 그러할 것이다. 공의 7세손 수돈이 변변치 못한 나에게 말하기를 “조상의 묘소에   아직 행적을 나타내는 비각이 없다는 것이 자손의 한이라. 우리 祖?는 자네의 선조이신 초당선생의 끝에 따님 蘭雪齋이라. 나의 조상의 사실과 행적은 자네가 아니고 누구에게 맡길것인가....”


   崇政大夫 吏曹判書 義禁府使 知經筵 春秋館使 同知成均館使 弘文館提學 藝文館提學  經筵日講官 陽川 許傳 撰


        위의 글로 미루어보아 안동김문은 19세기 이후 집권세력의 변동하기까지 김성립의 묘비도 세우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연고와 어려움이 많았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허난설헌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대단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4) 시숙과의 관계

   익히 알려져 있듯이 허난설헌은 1983년 허봉이 갑산으로 유배를 떠날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낸다.


        멀리로 귀양가는 나그네여

        함경도 길 가느라고 마음 더욱 바쁘겠소

        쫓겨나는 신하야 가의와 같겠지만

        쫓아내는 임금은 어찌 패왕같이 아둔할까

        가을비 갠 언덕엔 강물이 잔잔하고

        고개위의 구름은 저녁노을 물드는데

        서릿바람 받으며 기러기 울어에니

        걸음이 멎어진 채 차마 길을 가는구려


   이상은 허난설헌의 시이다. 이에 시숙인 김수는 조카며느리의 운에 맞추어 친구인 허봉에게 보낸다.

         次姪婦韻送許美叔謫甲山

         朝端時論變 嶺外逐臣忙

         用舍闕天數 愛憎豈我王

         悲吟同澤畔 治臥異淮陽

         聞說甲山久 心驚淚萬行


        조정에서 살피는 시대적 논란이 변해서

        영서밖으로 신하 쫓아보내기 바쁘도다.

        등용과 해임은 하는 운수에 관한 것이요.

        사랑함과 미워함이 어찌 우리 인군에게 있으랴

        슬피 읊음은 초나라 굴원의 못 뚝으로 지나던 때와같고

        다스리고 쉬는 것이 회양에서와 다르도다.

        갑산에 귀양가서 오래될 풍설을 들으니

        마음에 놀래서 일만줄기의 눈물이 흐르노라.


   이것은 1557년 할아버지 김홍도가 윤원형이 정난정을 정실로 삼았을 때 비난한 것을 빌미로 갑산으로 유배당하던 때를 비유하여 친구이며 허난설헌의 오라비인 허봉에게 보낸 것이다. 같은 동인으로 그리고 친구인 허봉에게 시를 부칠 수야 응당 있을 수 있는 일이겠으나 구태어 허난설헌의 시에 운을 맞추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허난설헌을 인정하였다는 뜻도 되겠지만 평소에도 더불어 시운을 맞추어 왔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시숙과 질부사이에, 더구나 여성의 시에 문과 급제하여 학문적 세평이 높았던 시숙이 운을 맞추었다는 것은 주자학적 사회에서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5) 허균과 김성립의 관계

   김성립이 처남 허균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에 관한 자료는 없다. 다만 일방적인 허균의 비방만이 전한다. 이에 잠시 허균 연보14)에 의지하여 허난설헌의 친가와 시가의 사건을 중심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정하고자 한다.

1588년 허균의 작은 형이 죽다.

1589년 허난설헌이 죽다.

       같은 해에 김성립은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임용되었다.

1589-1592년 사이에 김성립은 재혼한 것으로 보여진다.

1590년 난설헌의 시 210편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하자 봉심을 명받고, 근무중 31세 꽃다운 나이에 김성립은 전사하고          시신도 찾지 못하여 의복만으로 장례를 치루다.

   반면 허균은 홀어머니 김씨와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피난중 7월 아내는 해산후 사흘만에 죽고 곧 갖난 아이도 죽다. 15세에 시집와서 23세에 허균의 아내도 아들없이 요절하였다. 함경도를 전전하다가 가을에 강릉에 도착하다.

1593년(25세) 『학산초담』을 지음

1594년(26세) 문과 급제승문원 사관에 임용.

1595년(27세) 홍문관에 후보로 올랐지만 낙점을 받지 못함.

1597년(29세) 세자시강원 설서에 임용되자 곧 3월에 파직됨.


   이상의 경력을 비교해 보면, 김성립은 허균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미루어 짐작컨데 허균의 성정에 대한 세평 등등을 감안한다면 허균의 김성립에 대한 인물평은 객관적이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허균은 허난설헌의 죽음을 시댁 탓으로 돌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3. 거내이불언외?


1) 형제와의 교류

   허난설헌은 강릉의 초당을 떠나 서울 처음에는 동인들의 거주지인 건천동(오장동)에 살다가 상동(필동으로 추정됨)으로 이사할 즈음인 14-15세(안동문중에서는 15세로 기재되어 있으며, 경국대전 반포 후 법적으로 15세가 결혼 적년기로 규정됨)에 출가하여 남소문동에 살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허균은 1585년에 17세의 나이로 결혼하여 명동에 살게 된다. 오빠인 허봉은 83년에서 85년까지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곧이어 유랑생활을 한다. 난설헌과 허균, 두 남매는 서로 의지하며 자주 왕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갓 결혼한 남동생의 눈에 비친 결혼 10년차의 누나의 결혼생활이 안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기록에 율곡이 허봉의 집에 가서 보니 김첨이 와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허균도 누이의 집에 드나들었을 가능성은 높다. 출가외인으로 간주되었다면 허난설헌의 시를 허균이 간직한 것을 해명할 도리가 없다.

   사료상에 보면 김첨과 허봉은 늘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하게 되는 장면에서도 허봉은 우성전의 집에서 시간을 허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성전은 허난설헌의 작은 언니의 남편 즉 형부이었다. 후기에는 기피하였을 사돈들이 늘 이해관계를 함께하던 사회가 양계적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후기보다는 지대하였고 함부로 박대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2) 문학수업

  『성옹지소록』중의 기록에 의하면,


     “형님과 누님의 문장은 가정에서 배운 것이며, 선친은 젊었을 때 慕齋 金安國에게 배웠다. 모재의 스승은 虛白堂 成俔인데, 그 형 成侃과 金守溫에게 배웠다. 두 분은 모두 泰齋 柳方善의 제자이고, 유공은 文靖公 李穡의 으뜸가는 제자였다.”


라고 하여 허봉과 난설헌이 모두 가학을 계승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학문적인 전통은 도교에 두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 밖에도 초당의 스승으로는 長吟 羅湜과 화담 서경덕이 있다. 난설헌의 시 가운데 仙界詩가 많은 것과 신선 세계에 관한 책을 많이 읽은 것도 모두 아버지를 통해 내려온 서경덕의 영향이다.”


  난설헌의 詩風은 일찍이 오빠 허봉과 당시 三唐시인으로 유명했던 손곡 이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주위의 사물을 매우 정감 있게 묘사하고, 詩語에 있어서도 평이하고 간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점이 특징이었다. 허봉의 문장은 간결하고도 무게가 있었으며 특히 시는 호탕했다고 전해진다. 허균이 스승인 이달의 유고를 모아 편집한 『蓀谷詩集』서문을 보면 난설헌의 시 공부에 큰 영향을 준 이달이 어떠한 인물인가를 알 수 있다.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益之이며, 쌍매당 이첨의 후손이다. 그의 어머니가 천인이어서 세상에 쓰임 받지 못했다. 원주의 손곡에 살면서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지은 글도 매우 많았다. 한리학관이 되었지만, 합당치 못한 일을 당하여 관직을 내버리게 되었다. 고죽 최경창 ?  옥봉  백광훈 등과 어울리며 서로 마음이 맞아 시 모임을 결성하였다.(…) 이달은 그  이름이 나라에 알려져 그의 신분에 관계없이 그를 중히 여기고 칭찬하는 시단의 3,4명의 거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세속의 소인들 중에는 그를 질투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많아 여러 번 더러운 누명을 씌워 형벌의 그물에 밀어 넣었지만  끝내 그의 명성을 말살시킬 수는 없었다. 이달은 용모가 아름답지 못하고 성품도 호탕하여 절제하지 못했다. 또한 세속의 예법에 익숙치 않아 이로 인해 풍습에 거슬렸다.


   이렇듯 신분이 다른 사람을 어떠한 방식으로 스승으로 삼을 수 있었을까. 엄격히 거내이불언외하던 사회의 소산은 아닐 것이다. 그의 시를 보면 소서문(덕수궁와 서울역을 잇는 뒤쪽 길에 위치함)을 거쳐 서릉(서오릉, 불광동 방향)에 이르는 풍광을 노래하고 있다.15) 그녀의 집과는 상당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거내이불언외하지 않았던 여성의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3) 작품의 내용을 통해본 허난설헌의 참여의식

   허난설헌의 문학세계에 대한 고찰은 허미자 교수의 『허난설헌연구』와 허경진 교수의 『허난설헌시선』, 장정룡 교수의 『허난설헌과 강릉』그리고 김성남 선생의 『허난설헌』등의 문헌에 『난설헌집』에 실린 시는 211편이나 된다. 이 시편들을 그 내용에 따라 대략 분류해 보면 유선사(遊仙詞), 견흥시(遣興詩), 규원시(閨怨詩), 민원시(民怨詩)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선계(仙界)에서 노니는 일을 엮은 유선사(遊仙詞)가 87수로 가장 많다. 중정건치(仲井健治)가 쓴 『일본인이 본 허난설헌 한시의 세계』의 기록에 의하면, 이 유선사는 선인(仙人)의 높은 뜻을 흠모하고 심오한 도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뜻에서 지어진 것으로, 사(詞)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가사(歌詞)로서의 운율을 중시한 점에 특색이 있다고 한다.

   견흥시는 술을 마시거나 시를 읊는 흥에 겨워 지은 시를 말한다. 규원시는 홀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원망과 정겨움이 담뿍 실린 시이다. 민원시는 당시 일에 지치고 부역에 고단한 가난한 사람들과 병사들의 한많은 인생의 단면을 읊은 시이다. 일반적으로 민원시로 분류된 시들 중에 다음의 두 편의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출새곡’이라는 제하에

       “횃불은 긴 강물에 비추어 있고

        군사들은 한가를 떠나 출정하도다

        군사들은 창을 벼게 삼아 베고 눈위에 자며

        말을 달려 사막에 이르니

        삭풍은 진군 징소리를 전해주고

        오랑캐들의 피리소리는 만리장성을 넘어오노라

        가진 신고를 하여 가며

        오랑캐의 병거를 쫓고 있노라“

        ......

    그리고 ‘새하곡’에서는

        “전군은 나팔을 불며 진문을 나오고

         붉은 깃발은 눈에 얼어붙어 펄럭이지도 못하는구나

         구름에 덮여 어두운 사막엔 척후병들의 불빛 신호 번쩍이고

         밤이 깊자 유격 기마대는 벌판을 누비도다 ”

        ......

   규중 여성의 시라고 보기는 힘들다. 암울한 전쟁터로부터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은 서울에 사는 관리가족에게는 낮설지 않은 풍경 이었을 것이다. 직접 보지는 못할지라도 허난설헌의 감수성으로 멀지 않은 전쟁의 예감과 짓밟힐 민중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숙인 김수가 남긴 글에도 전쟁터의 풍광이 특히 많은 것을 보면 내훈에서의 여성규범과는 달리 가정내에서 바깥 정세에 대한 대화가 이성간에도 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4) 과부 재가 문제

   정치정세뿐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문제에 무심할 수는 없다. 시를 통하여서만이 아니라 시밖에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허난설헌의 세계를 시를 통하여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다음의 일례를 들어보자.


        청동이 홀로 지내기 일천 년,

        천수선랑과 좋은 인연을 맺었네.

        하늘 음악 소리 밤 늦도록 추녀 밖 달까지 올리고,

        북궁선녀도 발 앞까지 내려왔다네.


        靑童孀宿一千年

        天水仙郞結好緣

        空樂夜鳴?外月

        北宮神女降簾前


   허난설헌 시에 나오는 이 청동은 하늘의 선녀이며, 천수선랑은 인간 세상에 사는 남자 서생 조욱(趙旭)을 말한다. 북궁선녀가 바로 달로 날아간 항아이다. 이 시는 천 년 동안을 과부로 산 청동이 천수선랑과 인연을 맺자 이를 축하해 주기 위해 항아가 땅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이다. 청동과 천수선랑 조욱의 사랑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난설헌이 이 신화를 이용해서 바로 과부의 재혼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파악되고 있다.16)

   즉 이 시에서 허난설헌이 사용하고 있는 ‘좋은 인연[好緣]’은 재혼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국초에 재가녀의 자녀를 관인으로 등용하지 않음으로서 양반가의 부녀자의 재혼을 금하여왔는데,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풍속이 일반화되기에 이른다. 특히 임난이전에 사대부 출신의 허난설헌 입장에서 과부 여성의 능동적 구애의 모습을 표현한 점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허난설헌은 감히 천 년 동안을 과부로 산 청동의 문제를 제기하여 불행한 과부에 대한 동정과 함께 유교 사회에 대해 분노에 찬 비판을 던진 것은 아닐까?


5) 출가외인?

   앞서 살펴보았듯이 허난설헌의 집 주위에는 본인의 친정과 시어머니의 친정가족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사임당과 허난설헌은 외가에서 혹은 외가의 지역에서 태어나 생장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宋時烈(1608-1689)의 아버지는 司饔院 奉事 甲祚이고, 어머니는 善山 郭氏로 봉사 自防 의 딸이다. 그는 충청도 옥천군 구룡천 외가에서 태어나 26세 때까지 살았으나 후에는 懷德의 宋村 飛來洞 蘇堤 등지로 옮겨 지내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졌다. 1625년에 공주 장기면에 사는 도사 李德泗의 딸과 혼인하였다. 즉 태어나 결혼한 이후까지 외가에서 살았다.

   또한 조선 중기의 열녀들을 살펴보면 친정과 시댁에 의하여 재가의 권유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다음 몇 개의 사료를 살펴보자.

   咸州에 살던 朴召史는 밀양의 良家女인데 의령현감 趙壽儀의 妾이 되었다. 첩이 된지 얼마 안되어 의령현감의 喪을 만났다. 슬퍼하여 살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복을 마치자 부모님을 보살피기 위해 돌아갔으나 부모가 뜻을 빼앗고자함을 알고 즉시 남편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친정에 왕래하지 않았다.17) 열녀 順月은 古春谷 驛吏 朴希貞의 처이다. 19세에 시집을 가 34세에 남편을 잃고 슬퍼함이 지극하여 9년을 복상하였다. 절기가 변할 때마다 망부를 위해 새옷을 지어 헌제한 후에는 태워버렸다. 부모형제가 일찍 과부된 것을 슬퍼하여 뜻을 빼앗고자 하니 불러도 가지 않고 늙을 때까지 수절하였다.18) 朴召史는 正兵 李弘의 처인데 25세에 남편이 죽었다. 시아버지는 개가시켜 쫓아내고자 하였으며 송곳 꽂을만한 땅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송소사가 스스로 당을 팔아 남편 장사지내고 3년복을 입었으며 지성으로 제사지냈다. 나쁜 무리들이 있어 여러번 강제로 욕보이고자 했으나 송사를 제기하여 마침내 뜻을 빼앗지 못했다.19) 晉州에서 살던 黃壽長의 妾 私婢 鳳鶴은 20세에 남편상을 당하여 상복을 벗지 않고 애통해하여 몸을 상하였다. 그 아버지가 그의 나이 젊음을 가엾게 여겨 애통해하여 개가시키고자 하였으나 죽기를 맹세하고 다른데로 가지 않았다.20)

   물론 신분이 낮은 계층에서 집중적으로 보이지만 친정에서 혹은 시댁에서 개가시키려고 하였다. 위의 자료로 볼 때 아직 기층사회민까지 출가외인 내지 개가금지의 풍조는 내면화 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이와 같은 읍지는 대부분 사류중심으로 임란직후의 흩어진 사회풍속과 토착기반을 굳히고자 하는 목적하에 간행된 것이므로 오히려 하층민의 열녀행실을 독려한 자료로써 사료해석은 역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조선 중기 그것도 임진왜란 직전에 살다간 허난설헌의 삶과 작품을 양계적 사회의 특성 하에 설정하여 살펴보았다. 종전의 연구가 허난설헌은 현모양처를 강요하는 주자학적 사회 . 가족윤리관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한 많은 삶을 살았다고 설정하였다. 나아가서 그러한 사회적 한계를 넘어 仙界를 그리는 훌륭한 작품을 남긴 것을 기려왔다.

   그러나 본고는 허난설헌의 소녀시절-완벽한 행복, 시집살이-불행의 시작이라고 도식화 시켜놓은 조선 중기 여성의 구체적인 삶, 생활상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친정가족에 관한 연구는 선행 연구성과를 정리하였고, 시댁 가족에 관하여는 『安東金氏族譜 』와 『恩津 宋氏族譜 』 그리고 안동 김문과 동인계의 문집 등을 발굴하여 재 구성하여 양계의 가족관계에서의 허난설헌의 운신의 폭을 가늠해 보고자하였다. 그 운신의 폭이 허난설헌의 공간이고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활력소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본 것이다. 앞으로 보다 좋은 사료가 발굴된다면 조선시대 여성의 생활사가 보다 투명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1) 『허난설헌연구』, 허미자, 성신여대출판부,1984.

   『허난설헌의 문학』,김명희, 집문당,1987.

   『허난설헌시선』, 허경진 역, 평민사,1993.

   『신사임당.허난설헌』, 강릉시사, 박양자,1996.

   『허난설헌시선』,장정룡 역, 동녘출판기획,1999.

   『평전 허난설헌과 강릉』, 장정룡, 동녘출판기획,1999.

   『허난설헌』, 김석남,동문선,2003.

   『허난설헌 한시의 세계』,중정견치,국학자료원,2003.


2) 허난설헌의 묘소는 경기도 지방문화재90호로 지정됨.

   허난설헌, 박양자, 강원여성역사인물집,강원도,(2004),96쪽.


3) 「허난설헌-여성억압과 불평등에 저항한 시인」, 『여인열전』,(김영사,2002) 306쪽.

   중국이 먼저 인정한 천재 시인 허난설헌, 이문호,한국 역사를 뒤흔들었던 여성들, (도원미디어,2002) 200쪽.

   허난설헌 -불운에 몸부림친 천재 시인, 허미자, (한국 여성개발원, 1998) 111쪽.

   김석남(동문선 2003) 35쪽.


4) “...자신의 피붙이들을 둘러싼 잇단 불운...” 등 친정에 한정된 고찰에 집중되어 있다. 당시 허난설헌을 둘러싼 모든 인물들 -시아버지, 시숙, 남편, 그리고 시어머니의 형제들, 언니의 남편 그밖의 친지들이 모두 퇴계의 문인이었으므로, 동인으로서 정치적 운명을 함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고찰되어져야 한다. 아울러 왜변과 임진왜란의 희생자들로서 작품분석에서 고려되어져야 할 것이다.


5) 부록 1 세계표 참조.


6) 西郭雜錄, ‘宣祖 癸未(1583) 율곡이 병조판서가 되었을 때 허봉의 집에 갔는데, 김첨과 洪迪이 이미 와서 자리에 있었다....’.

   尤庵集, “沙溪(金長生)가 말하길 ‘나는 김첨, 김수와는 世誼가 두터워서 비록 색목은 갈라졌으나, 오히려 글왕래를 하는데, 일찍이 김첨에게 묻기를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송응개의 율곡을 攻駁하는 狀啓는 그대의 손으로 지었다하는데 사실인가, 아닌가?’하자 대답하기를 ‘내가 어찌 그렇게 할 것인가, 그 집은 능숙한 문장가인데, 어째서 나의 손을 빌리겠는가?’하고 대개 송응형을 지목하였다. 이에 대하여 우암이 말하기를 ‘너의 집과 그 집은 族戚이 서로 친하며, 담을 사이에 두고 있으니, 능히 흘러 들어가지 아니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 하였다.”


7) 한국문화대백과사전,12권,911쪽.


8) 사후 200년에 만들어진 묘비명으로 허난설헌과의 인연으로, 이조판서 양천 허씨 許傳이 찬하였다.


9) 문과는 법제상 갑과1-3인,을과는 3-7인, 병과는 20인 가량을 뽑는다. 김성립은 20등으로 병과 급제하였다.


10) 「弘文館의 成立經緯」, 崔承熙, 『,韓國史硏究 5』(1970)


11) 「金正字誠立遷葬挽 二百五十言」, 『芝峯集』.


12) 承政院의 제도에 가관 분관제가 있고, 그 아래에 事變假注官 정7품 1인을 두었다(『 續大典』). 春秋館에는 記注官 정5품직이 있는데 홍문관원의 겸직이다.


13) 『石陵世蹟』, (1996), 364-365쪽.


14) 허경진(2002) 404-406쪽.


15)  시 ‘西陵行’에서 “...蘇小門 앞에 꽃은 활짝 피고...”, ‘竹枝詞’에서 “...영안궁 밖....여울이 겹친 곳 여울 위에 배띄우고....”라는 시 등은 한양성 내의 풍경을 읊은 것으로 보여진다.  


16) 김성남(2003),146-155.

    허경진(1993)


17) 咸陽誌 烈女條.


18) 동상.


19) 동상.


20) 晉州誌 烈女條.

 

 

 

http://kangnung.ac.kr/~inmun/JK.htm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07.09.19 15:53

    첫댓글 여성에게는 이름이 없던 시절에 이름이 있었고, 한문을 읽힐 수 없던 시절에 시를 지어 그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여인 허난설헌! 그녀는 주어진 시대의 모순에 순종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나갔기에, 비난을 감수해야 했으며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