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갗을 스치듯 흐르는 청랑한 이른 아침 남도(南道)의 봄바람!~, 넓은 초원이 펼쳐진 대흥사 일주문 앞에서 마고님 따라 관절풀기 체조를 하고~, 일주문 부도전 해탈문을 지나 여유롭고 온화한 대흥사 가람을 품에 안고~, 문재인 전대통령이 고시공부를 하였다는 동국선원을 지나 북미름암 방향으로 오늘 산행(山行)의 들머리에 들어선다(06시 20분)!~,
4월의 신록(新綠)이 싱그럽다!~, 음력으로는 만물이 생동하는 춘삼월(春三月)~, 신새벽 차가운 봄날의 산(山)공기가 심신을 개운하게 열어젖힌다!~,
오백여년의 느티나무 연리근(連理根)을 마주하며 인연과 사랑과 소망을 마음에 담아 두 손 모아 합장(合掌)을 한다!~, 아!~ 인생(人生)의 화양연화(花樣年華)여!~‘’‘
장만옥의 차파오‘,, 좁은 계단길에서 비껴 지나가던 두 사람!~, 그렇게 지나고 나서야 아쉬운 그 시절의 찬란함을 알게된다!~,
젊은시절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별로 화려해 보이지도 않는데 왜 ‘화양연화’ 라고 했는지 공감이 되지 않았었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이제 어렴풋하게 산다는 것이 세상에 빈들의 풀 한포기 마저 ‘화양연화’ 아닌게 없구나 라는 생각이 점점 들게 되더라!~,,,
유서(由緖) 깊은 고찰(古刹)이 자리잡고 있어서인지, 소나무 참나무 등 그리고 동백나무 까지 모두 수령이 오랜 거목들이 깊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수백년 수령을 자랑하는 동백나무 숲의 선홍색으로 붉게 타오르는 동백꽃을 보지못하여 조금은 아쉬웠다!~,
한시간 가량 만만치 않은 비탈을 차고 오르면~, 넓은 너럭바위 옆에 자리잡은 북미륵암에 이른다!~, 암자(庵子) 안에는 마애여래좌상이 모셔져있고~, 마당엔 작은 삼층석탑이 서있다(07 : 30)!~,
잠시 휴식을 취하고~, 20분 가량 파란 조릿대 숲 사이로 또 비탈을 오르면~, 풀밭 고갯마루 ‘오심재’다!~, 좌측에 고개봉 우측에는 노승봉 암반의 기기묘묘함과 가파른 절벽이 절경을 펼쳐놓았다!~,
오심재는 대흥사의 혜장선사가 강진의 다산초당에 유배와 있던 다산 정약용과 교류하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다산은 혜장에게서 ‘차’를 배워 장수하게 되었고~, 혜장은 다산에게서 ‘술’을 배워 단명하였다고 한다!~,
혜장은 훗날 다성(茶聖)이라고 불리우는 자신의 제자 ‘초의선사’를 다산(茶山)에게 소개한다!~,
흔들바위를 지나면(08:00) 짜릿한 암릉 능선이 계속되고 암반의 비탈을 지나~, 철계단을 오르면 첫 봉우리 노승봉이다(08:30)!~
북쪽에서 백두대간이 지리산에서 다시 한번 파고를 높여 큰 폭으로 진동하여 내달려온 산들의 물결이~, 덮칠듯한 기세로 남쪽바다로 첨벙첨벙 뛰어들어 드넓은 다도해(多島海)를 유유자적하게 유영하고 있다!~,
두륜산 정상 가련봉(09:00)에서 부드러운 봄햇살~.. 살랑이는 봄바람의 남해바다를 바라보며, 벽계수 대장님 치타님 솔나리님 두분, 늑대님과 막걸리 타임!~,
꽃몽오리 붉은 못다핀 진달래가 보이고 작은 억새밭도 있어서~, 영남알프스의 간월재는 아니더라도 작은 신불재 같은 ‘만일재’를 지나면(09:30), 자연석의 구름다리(09:45)가 있고~, 마지막 봉우리 두륜봉에 오른다(09:50)!~,
서북쪽으로 진불암 방향의 하산길은 급경사의 이끼낀 돌무지 너덜길과 흙길의 반복으로 관절에 무리가 될 만큼 험하고~, 산그늘에 어둑하고 습하기도 하여서 음산한 기운마저 감돈다!~,
거목(巨木)들의 위압적인 모습에 왠지 주눅이 들고, 그늘지고 습한 숲엔 신령스런 기운이 감도는 둣 하기도 하였다!~,
바위틈 또는 바위 위를 휘감은 거목의 뿌리는~, 마치 폐허의 ‘앙코르와트’ 신전(神殿)을 거대한 나무뿌리가 집어삼키듯 뒤덮은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험하고 깊은 숲을 나오면 진불암 입구의 은행나무가 반갑다(10:30)!~,
암자(庵子)의 개한마리가 평상아래에서 졸고 있고, 작은 석탑하나가 산(山) 아래를 고요히 바라보고 있다!~,
진불암골로 내려가는 하산길을 그만 지나쳐서~, 봄이라 길 위를 가득 덮은 신록(新綠) 사이로 가늘게 햇살이 내리는~, 참나무 갈색낙엽이 쌓인 아스팔트길을 따라 계속 하산하였다!~,
자연스런 산길은 아니지만 숲이 깊어 길 위의 하늘을 다 덮은 한적한 숲속의 아스팔트길도 좋다!~, 북한산의 북한동에서 의상봉 기슭을 따라 대성문을 지나는 아스팔트 하산길과 닮았는데 느낌은 더 좋다!~,
다시 대흥사(11:15)!~,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의 서체(書體)를 감상해 본다!~, 제주도로 유배가던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자신이 쓴 ‘대웅보전’을 걸라고 하였다가~, 유배가 풀려 다시 이곳을 지나던 길에 이광사의 ‘대웅보전’을 다시 달으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원교 이광사는 아들 이긍익과 함께 ‘조선왕조실록’에 버금가는 조선시대의 역사서인 개인이 하기에는 방대한 양의 서적을 참조하여 저술한 ‘연려실기술’의 공동저자로 알려져 있다!~,
혜장선사가 죽은 후 다산 정약용은 젊은 초의선사를 서울로 올라가게 하여~, 농가월령가를 지은 자신의 둘째아들 정학유와 추사 김정희를 만나게 한다!~, 초의, 정학유, 김정희는 동갑의 나이로 30세 전후에 만나~ 평생의 지기(知己)가 된다!~,
또한 훗날 초의선사는 소치 허련을 서울로 보내 김정희의 제자가 되게한다!~, 소치 허련은 초의선사에게서 탱화와 단청 등의 불화(佛畵)를 배우고 김정희에게서 수묵화 등의 문인화를 배워, 우리나라 ‘진도 남종화’의 종주(宗主)가 된다!~ 그는 제주도 유배시절의 김정희를 자주 찾았고~, 정약용의 큰아들 정학연을 인생의 스승으로 삼았다!~,
소치 허련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과 같은 문중 출신인 광해군의 형(兄) 임해군의 5촌처조카의 후손으로, 북인(北人)계열의 이제는 평민화된 몰락한 양반출신이라고 한다!~,
해남(海南)이라는 궁벽한 벽촌에서~, 차와 예술을 매개로하여 종교적 사상적으로는 천주교(정약용), 불교(초의선사) 성리학(김정희) 양명학(이광사)의 화합을 이루었고~, 정치적으로는 당시엔 당색(黨色)이 다르면 술자리도 결혼도 하지않던 시대였음에도, 노론(김정희) 소론(이광사) 남인(정약용) 북인(허련)의 화해를 이루었다!~,
이러한 화합과 화해가 그 때 중앙정계와 사회에서 이루어졌더라면~,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의 불행했던 사건들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무그릇만을 쓰던 일본은 임진왜란이후 조선에서 가져간 도자기 기술과 하얀 도자기로 만든 고품격의 찻잔에 담은 차문화가 융성하게 발달하였지만~, 조선은 왜란과 두 번의 호란을 거치면서 먹고살기에도 버거워 도자기 기술과 차문화가 그 명맥이 끊어질 정도로 급속도로 쇠퇴하였었는데~, 이 땅에 차문화를 다시 살려낸 인물이 바로 ‘초의선사’다!~,
달마(達磨)에 의해 중국(中國)에 선불교(禪佛敎)가 들어온 이후로~, ‘육조(六祖) 혜능’에 의해 돈오(頓悟)라는 중국 고유의 불교가 탄생하게 된다!~, 수많은 윤회(輪回)와 그리고 점수(漸修)라고 일컬어지는 끊임없는 정진수도를 통해 지고지순한 해탈(解脫)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절대절명의 지상명제 만을 던지는 인도불교를 벗어나~, 태어나서 한번 사는 인생(人生)~ 자신의 삶 속에서 누구나 별안간 단박에 깨달을 수 있다는 돈오(頓悟)의 중국불교가 새로이 펼쳐졌다!~,
그의 제자들에 의해 ‘깨달음’은 평상심지도(平常心之道)라는 사상이 더욱 일반화(一般化)하였고~, 결국 ‘구마라집’과 ‘현장법사’에 의해 번역된 방대한 양의 불경을 ‘덕산방 임제할’ 이라는 방망이 한방과 한마디 일갈(一喝)속에 담아 버린다!~,
‘템플스테이’라도 가게 되면~, 명상시간에 졸거나 잡생각에 빠지면 죽비(竹篦)로 어깨를 치거나 귀에 대고 소리치는 것이 바로 ‘덕산방 임제할’의 내력인 것이다!~,
급기야 조주선사의 “밥은 먹고 다니냐?!~,” “끽다거(喫茶去) = 차나 한잔 하시게!~,“로 중국 특유의 멋스러움과 간명함의 극치를 이루게 된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사라진 이러한 선불교(禪佛敎)의 전통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이 다행스럽고 뿌듯하기도 하다!~, 초의선사는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깊게 우려낸 차 한 잔의 향취 속에 녹여내었다!~,
해남에서 해남 가는 길이 멀기도 멀다!~, 50분 쯤 버스로 달려 땅끝마을에서 가성비 만점인 ‘본동기사식당’에서 딸기님 포도님 거북님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발아래가 아찔한 투명의 스카이워크를 걷고~, ‘땅끝모노레일’을 타고 ‘땅끝전망대’에 올랐다!~, 진도 완도 노화도 윤선도의 보길도 그리고 점점이 많은 섬들~,,, 한국인의 부지런함은 쾌속정의 뱃길만을 남겨놓고 바다에도 빈틈없이 밭을 일구었다!~, 김 미역 전복 홍합 등 양식장의 모습도 무척 다채롭다!~,
약 1만 3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이 나고 비로소 세상이 열렸을 때~, 하늘아래 첫동네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미르고원의 초원에 갇혀있던 백인종은 해가지는 서쪽으로~, 파미르의 숲속에 갇혀있던 황인종은 해가 뜨는 동쪽으로 긴 여정을 떠났다!~,
일몰(日沒)=해의 죽움을 향한 백인은 who(누가) what(무엇을) why(왜)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던져서 ‘종교철학’이~, 일출(日出)=해의 탄생을 가슴으로 맞는 황인은 how(어떻게) when(언제) whom(누구를)의 삶에 대한 물음을 던져서 ‘도덕철학이 발달했다고 말하면 나만의 억지일까?!!’‘’
빙하가 녹으며 수천년을 수많은 홍수가 일어났고 기름진 땅들이 수몰되어~, 원주민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그들이 당도하는 곳마다 풍요로웠을 것이다!~,
‘의자왕’을 당나라군대에 넘긴 백제의 매국노 ‘예식진의 형(兄) ’예군‘의 묘비가 몇 년 전 중국(中國)에서 발굴되었는데, 그 비문에 당시에는 일본(日本)에서 일본이라는 명칭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는데~, 일본열도가 아닌 한반도의 남부를 일본(日本)이라고 표기한 문구가 있다고 한다!~,
‘해’를 숭배하던 불의나라 ‘부여’의 왕실(王室)의 성씨(姓氏)는 해씨로~, 해모수(해모습)와 그의 아들이 해부루(해불)이다!~, 기원전후로하여 고구려에 밀린 해씨일파가 김해 진해 남해 해남의 드디어 아시아의 땅 끝에까지 이르렀다!~, 해족의 아류가 왜족(倭族)이 되었고 이곳이 일본(日本)의 기원이 되었다!~,
‘곤륜산’에서 발원한 황하(黃河)를 따라 중류(中流)의 앙소문화(양사오문화)와 하류(下流)의 용산문화(롱산문화)로 대표되는 황하문명이 일어났고~,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 송화강 두만강 일대에서 홍산문화(홍샨문화) 흥륭와문화(싱룽와문화) 하가점문화(샤자뎬문화)로 대표되는 ‘조선문명’이 꽃을 피웠다!~,
그리고 백두산의 ‘두’, 곤륜산의 ‘륜’자(字)의 이곳 ‘두륜산’에서 두 문명의 기운이 모여~, ‘신미국’ 또는 ‘침미다례’라고 일컬어지는 한중일(韓中日)은 물론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고대의 ‘해양문명’이 이곳 해남(海南)에서 발원하여 번성하였다!~,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이집트문명이 바다건너 펠로폰네소스와 아나톨리아 사이에서 만나 '에게해해양문명'이 번성하였던 것과 유사하다!~,
‘조국’이 ‘민정수석’이었을 때~ 위안부문제와 일본의 경제보복이 시작하던 시기에 ‘죽창가’를 sns에 올리고~, 윤석열이 대통령후보 선언을 할 때~ 정부의 대일외교를 비판하면서 ‘죽창가’를 부르다 한일관계를 망쳤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곳 해남(海南)출신(出身)의 민족시인 ‘김남주의 시(詩)’ ’노래’에 가수 ’안치환‘이 ’죽창가‘라는 제목을 달고 노래를 불렀었다!~, 시인 ‘김남주의 시(詩)’ ‘노래’를 감상해 보자!~.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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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해변’에서 기념으로 비석모양의 작은 돌 하나를 주어왔다!~, 천지(天池)에서 이곳 땅끝까지 우리의 삼천리(三千里) 산하(山河)는 아름답지 않고 보석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수백년을 해남(海南) 땅끝의 벼랑 높은 바위 위에 앉아 바다의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노송(老松)이 오늘도 해풍(海風)에 송화(松花)가루를 싣는다!~, ----- 소나무와 바위----- ------- 소 바 우 씀 -------
첫댓글 다녀 온 장소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라 머리에 속속 들어옵니다. 풍부한 배경 설명까지 곁들여 주시니 2번 산행하는 기분입니다.^^
이왕 쓰는 산행기~, 조금이라도 기록물로의 가치가 있기를 바라는 욕심과 강박으로~, 그리고 공부도 할 겸 자료를 찾다보면~, 찾은 자료를 빼기에는 아쉽다보니~, 아직은 자꾸 사족이 길어지네요!~ 점점 좋아지겠지요!~ ^^ 응원해주심에 감사합니다!.'''
후기글 길지만 잘읽고 나갑니다 소바우님ㅎ
좀 더 짧게 쓰도록 노력하겠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