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년 07월 23일 왕건 고려건국
[ 사진1. 태조 왕건 ]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년~943년, 재위 918년~943년)
왕건(王建)은 개성일대의 호족세력 출신으로 신라 말엽 후백제와 후고구려 등의 후삼국이일어났을 때
철원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태봉의 궁예 예하에 들어가서 공을 세워서자리를 굳히고 시중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궁예가 민심을 잃으면서 신숭겸, 배현경,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고려를 건국하였습니다.
그러나 후백제가 신라를 침공하자 이를 지원하다 대구의 팔공산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해어려운 지경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창(지금의 안동지역)전투에서 반격을 가하여승리함에 따라서 대세를 잡았고,
935년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자진해 935년 항복하고 견훤의부자간 내분으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어 통일을 달성했습니다.
그는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수하게 자력으로 달성한 민족통일이였습니다.
이어서 거란에 의하여 멸망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명신상부한 민족통일을달성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왕권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세력을 형성하며 호족세력을 연합하고 이를유지하기 위하여
외척과의 통혼정책을 취하여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식을 두었으며
근친혼을 선호하였습니다. 이에 따라서 호족세력의 비대화와 외척세력의 대두,
근친혼의성행은 필연적으로 왕위세습과정에서 호족세력과 자식들간의 왕위를 차지하기 투쟁을야기 할 수밖에 없어
왕권의 위협으로 대두되었습니다. 이러한 치열한 혼란은 5대 광종을거쳐서 성종대에 가서야 안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 사진2. 태조 왕건 ]
- 왕건의 출생 -
왕건(王建)은 신라말엽이던 877년 한주 송악군에서 사찬(沙湌)인 융(隆)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탄생에도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서해의 용왕의 딸과 혼인하여 왕건을낳았다고 하며 이런 이유로 왕씨일족의
겨드랑이에는 대대로 용의 비늘의 돋아났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나중에 유학이 들어오며 윤색이 가해져 당나라 황제(숙종)가 왕자 시절에 한반도를유람하던 중에
아들을 얻은 것이 바로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라는 전설도 왕건의신성화를 위해 덧붙여진 것일 겁니다.
왕건의 탄생과 관련하여 <<고려사>>에는 풍수도참설에관한 전설이 전하여 옵니다.
융이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송악산의 남쪽기슭에 집을 짓고 살고 있을 때 마침 당대에도참설의 최고권위자이던
도선(道詵)국사가 이곳을 지나가다가“음, 기장을 심을 터에 어찌하여 삼을 심었는가?”
이 말을 들은 융의 부인이 남편에게 달려가서 이 말을 전하여 융은 급히 도선을 찾아달려가 다시 듣기를 청하니,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아이를 얻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 이라고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 사진3. 도선국사 영정 ]
그리고 이어서 융은 도선이 주는 봉투를 받고는 한 번 절하고 그가 시킨대로 집을 짓고살자
10달 후에 낳은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지었으니 877년 1월 이였습니다.
그리고 민지가 지은 <<편년통록>>에 의하면 도선은 왕건이 17세 때에 다시 송악산을 찾아와
“당신은 혼란할 때에 상응하여 하늘이 정한 명당에 태어났으니 삼국 말세의 백성들은
당신이구제하여 줄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고 알리고,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병법과유리한 지형을 선정하고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법과 산천형세를 보고
이치를 아는 법 등각종 술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외모에 대해 언급하면서 “눈이 부리부리하고, 이마는 넓고 툭 튀어나왔으며,
턱의 살이 쪘다, 목소리가 우렁찼다” 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 후삼국 시대 -
후삼국 시대(892년~936년)는 892년 견훤이 전라도 광주를 점령하고 왕을 칭한 때부터936년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기까지의 44년동안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10세기 초에 이르면서 농민불만의 폭발로 신라는 완전히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어서궁예가 세운
태봉과 견훤이 세운 후백제가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신라는 경주의 주변만을간신히 유지하는 형세가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를 “후삼국시대” 라고 부릅니다.
호족을 중심으로 한 지방세력은 각자 커다란 토지, 사병을 거느리고 백성과 토지를지배하고 조세와 부역을
징발해 독립적인 세력을 키우고 중앙에 도전하여 무질서와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농민들은 신변의 안전도 보장을 받지 못하고 착취의 대상이
될 뿐인 국가에 숭종하기 보다는 반란군이나 초적, 군도 등에 가담하게 됩니다.
그리고 변방을 지키던 군진(軍鎭)세력도 무장을 갖춘 상태이다 보니 관병이 아닌사병으로
해상세력으로 변질되어서 지방세력의 군사적인 배경이 됩니다.
후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써는 기훤, 양길, 견훤, 궁예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사벌주에서 태어난 견훤은 이씨라고 알려져 있으나,
견훤의 후손이 지었다는<<이비가기>>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즉, 진흥왕의 증손자인 각각작진이 왕교파라는 여성을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이고 이 사람이 아자개입니다.
아버지인 아자개는 경북 상주 가은현의 농민이었으나 후에 장군이 되었는데 견훤은그의 장자입니다.
견훤은 체구가 장대하고 무예가 출중한 그는 혼란한 정국을 이용하기위하여 무장이 되고
서남해의 변방에서 비장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나갑니다.
궁예는 애꾸눈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월래 신라의 왕족 출신입니다.
그는 제47대 헌안왕이나 제48대 문경왕과 궁녀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두가지 전설이전해집니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5월5일 단오날 태어났는데당시에
지붕에 긴 무지개 같은 흰빛이 하늘까지 닿았다고 합니다.
이에 일관이 “ 중오일에 태어난 것이 이상하고 이상한 빛이 하늘에 서려 있으니
장래 국가에 화근이 될 아이입니다. 절대 살려두어서는 안됩니다.” 하여 왕은 자객을보내 죽이게 하였습니다.
왕의 명을 받은 자객은 포대기에 쌓여진 아이를 빼앗아 마루아래로
던져 버립니다. 이때 아이를 기르던 유모가 몰래 숨어 있다 받아
궁예는 간신히 사는데 받으면서 잘못해 실수로 눈을 찔려서 애꾸눈이 되었다고 합니다.
유모는 궁예를 안고 신분을 감추고 몰래 숨어서 사는데 궁예가 장난이 심하자
하루는궁예를 부른 뒤 정색을 하고는 궁예의 전력을 그 내력을 이야기 하자.
이에 궁예는사람의 눈을 피하여 영월에 있는 세달사에 들어가서 중이 되어 살았습니다.
궁예는 승려생활을 하며 자신의 꿈을 펴려고 궁리를 하던 어느날 절에 제사가 있어바리떼를 들고
법당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어 입에물고 가던 것을
바리떼 속에 떨어 뜨리고 날아갑니다. 주워 이를 자세히 살펴보니점을 치는 물건이였습니다.
이상하여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임금 왕(王)자가 씌어져 있어 이를 본 궁예는 “이것이하늘의 뜻이구나” 하며
불경대신 무예닦기에 열중하여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성여왕이 즉위하였는데 정부인 위흥 각간과 놀아 나고 정사를 맡기어 백성들의원성이 높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반란세력이 준동하자 자신의 꿈을 세우기 위해 891년 죽주(지금의 안성)에서세력을 가지고 있던
기훤을 찾아가서 의탁을 하나 기훤이 거만하고 부하들을함부로 다루고 홀대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궁예는 기훤의 부하들과 함께 양길에게 투항을
하니 양길은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후대를 하여 자신의 군사를 궁예에게 내주어승려생활을 하여
지리적인 지세를 잘 아는 복원동쪽의 지역을 공략하게 하였습니다.
궁예는 승려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치약산 석남사에 진을 치고 주천.내성 등 10여성을차지하고
894년 명주(지금의 강릉)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고 군사의 수가 3천5백명 정도되자 양길로부터 손을 끊고
철원을 거점으로정하고 다음해 관직을 정하여
국가체계를 갖춥니다. 그리고 이즈음 개성뿐만 아니라 예성강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호족인왕건부자가
896년에 궁예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궁예는 왕륭을 금성태수로 삼고 맏아들왕건에게는 발어참성을 쌓게 하고는 그곳 성주로 삼습니다.
이들이 궁에 밑으로 들어가면서 궁에는 송악을 비롯한 황해도 일대를 장악하였고,
898년에는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깁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양길과 싸워 물리치면서충청, 경기, 황해, 강원 등을
아우르는 신라북부지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901년 고구려는 부흥과 신라타도를 외치면서 후고구려라 칭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그러나 궁예는 국력이 강화되면서 “후고구려”라는 이름대신 마진을 택하고
905년도읍을 다시 철원으로 옮기고 911년 국호를 “태봉” 으로 바꿉니다.
이리하여 완산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견훤이 후백제를 칭하고 양길의 부하에서홀로 선 궁예가
후고구려를 내걸면서 한반도는 구세력인 신라와 함께 후삼국시대를열어 장패에 돌입하여 나중에 궁예 밑에 있던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세나라를 통일하기까지 무려 35년간 삼국간 대립기간을 거칩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주도권을 가진 것은 후백제인데 후밷제는 정규군 중심으로써나주지역을 제외한 전라도
전 지역과 경상도 진주, 합천 서남부지역, 동으로는 상주,북으로는 청주와 공주를 석권할 정도로 영토를 확장시킵니다.
후백제는 주로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데 비해 태봉은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충청도 북부 등 주로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펴는데 이는 그의 무리들이 호족세력과 초적의 무리가 연합을 해
결성되다가 보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것입니다.
견훤(甄萱)은 전라도 전 지역과 충청도의 일부지역을 평정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수립하여
궁예와는 화친을 하면서 신라를 공략해 통일을 이루겠다는 구상이었으나 그의생각은 번번히 궁예의 부하장수이던
왕건의 해상세력에 의하여 좌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당시 왕건은 궁예의 부하가 되어 광주, 청주, 당선(경기 남양), 괴양(괴산) 등을평정하여 아찬으로 승진을 하고
903년에는 수군을 거느리고 금성(후에 나주)으로가서 10여 군현을 공략하고 보루를 쌓아 방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고
진도마저확보합니다. 특히나 그는 전함들을 이끌어서 나주를 근거로 하여 서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며 궁예세력의 확장에 크게 이바지하게 됩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서 궁예는 북으로는 대동강유역, 동남으로는 낙동강유역, 서남쪽으로는나주를 거쳐 멀리
진도까지 판도를 넓힙니다. 당시 궁예는 한반도의중심인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왕건의 해상활동에
힘입어 한반도를평정하루 수 있는 길을 선점하기에 이르릅니다.
- 왕건의 고려 건국(918년) -
그런데 궁예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자신의 세력을 과신하고 주위를 의심하기 시작하는데
시하들은 모반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죽이고, 궁녀와 후궁은 간통을 저질렀다면서죽이고,
자신의 부인과 아들까지 죽이는 지경에 이르자 신하들은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여야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미륵보살이라고 하면서 아들을 청광보살, 인광보살이라고 부르게 하고관심법이라면서
사람들을 죽이는 행위가 거듭되면서 부인이 이를 나무라자 궁예는부인 강씨도 음행을 저지른 것으로 몰아붙입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을 저지르다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
부인은 어이가 없어서, “어찌 제가 그러한 일을 하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네 마음을 궤뚫어 보아 알수가 있느니라”
하면서 불에 달구어진 무쇠 방망이를 가지고 와 음부에 넣어서 죽이고 그래도 분이안풀려서
자신의 두 아들까지 데려와 죽이었는데 이때가 915년이였습니다.
궁예가 이처럼 죽인 것은 자신의 권력을 반대하거나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하는데이용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 모두 불안에 떨었는데 왕건도 이에 불안을 느껴 914년 나주로 내려가서 이를 피하고나주지역을 다시 확보합니다.
그런데 궁예가 왕건을 궁에 부릅니다.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데 이 말이 사실인가?”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마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궤뚫어 볼수 있다.
금 곧 정신을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궤뚫어 보리라” 궁예는 눈을 감고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이때 최응이 짐짓 붓을 일부러 떨어뜨리고는 이를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귀속말로속삭입니다.
“장군! 복종하기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와집니다.”이어 왕건은 역모를 인정하였습니다.
“사실은 제가 역모를 꾸몄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궁예는 웃는 낯으로 말하길.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 다시는 나를 속이려 들지 마라”
궁예는 왕건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 왕건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더욱 자신의 사람으로만들어 반역할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궁예의이러한 행동은 왕건과 주위 사람들의 위기감을 더욱 자극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왕건의 예하 장수들 복사귀(지겸), 홍술(유), 백옥(배현경), 삼능산(신숭겸) 등 4기장이 권하자왕건이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자
부인유씨가 갑옷을 찾아 왕건에게 옷을 입혀 주면서출정하도록 하자 왕건은 비로소 왕성을 향하여 진군하였씁니다.
왕건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궁예는 길게 탄식을 하면서 혼자말을 하였다고하는데,
“왕건이 그렇게 하였다면 나의 명은 끝났구나!”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왕건과 싸워보았자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는 변복을 하고 궁성을 몰래
빠져나가 목숨을 건졌으나, 민심을 잃은 그는 강원도 포천 명성산 등을 전전하면서숨어 지내다가 배가 고파 남의
보리이삭을 잘라먹다가 들켜서 강원도 평강에서살해되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습니다.
왕건은 918년 6월 왕위에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搜)라고 하니이것이 후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건국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나라를 세움에 따라새나라는 정치적인 안정과
민심수습을 착수하였으니, 그를 찬동하는 세력도 있었으나 잇달아환선길 등 불만세력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다음해에 왕건은 궁예의 연고지인 철원에서자신의 연고지인 개성으로 천도를 하였습니다.
▶ 2009년 폴크스바겐, 포르쉐 인수
▶ 2005년 동해 총기탈취사건 검문하던 임종민 병장 무면허차량에 치어 사망
▶ 2002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가자시티 공습. 15명 사망·150명 부상
▶ 2001년 대한변호사협회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법치주의에서 후퇴했다"는 결의문 채택
▶ 2001년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탄핵으로 대통령직 정지
▶ 2001년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제5대 대통령에 취임
▶ 1999년 주가 사상최대 71.70포인트 폭락
▶ 1995년 유조선 씨프린스호, 전남 여천군 해상에서 좌초
▶ 1985년 남북국회회담 첫 예비접촉(판문점)에서 서울-평양간 직통전화 가설 등에 합의
▶ 1985년 미국-중국간 핵협력협정 승인
▶ 1984년 관보 제1호 발행
▶ 1983년 바이타브락 제2봉 세계최초 등반 성공
▶ 1982년 국제포경위원회, 포경전면금지를 결정
▶ 1982년 일본정부, 방위력증강 5개년계획(83-87) 확정
▶ 1978년 서울 시내버스 한강대교서 추락 33명 사망, 13명 부상
▶ 1974년 그리스 군사정권 붕괴 7년 만에 민정복귀
▶ 1972년 미국, 최초의 실험용 지구자원탐사위성 랜드새트 1호 발사
▶ 1967년 미국 디트로이트서 사상 최대 흑인폭동
▶ 1967년 터키에 연 2일 대지진 사상자 수천명 발생
▶ 1962년 미국 텔스타통신 위성통해 첫 TV 우주중계
▶ 1961년 한국-코트디부아르 국교 수립
▶ 1956년 바둑인 조치훈 출생
▶ 1952년 이집트서 쿠데타 발생, 나기브준장 실권장악
▶ 1951년 페탱 옥중 사망
▶ 1951년 기록영화의 선구자 로버트 플라어티 사망
▶ 1938년 총독부, 교원-관공리에게 제복 착용 지시
▶ 1936년 "홍도야 우지 마라" 초연(初演)
▶ 1931년 소파 방정환 별세
▶ 1930년 이탈리아, 나폴리서 대지진. 2534명 사망, 4264명 부상(6000여 사상)
▶ 1926년 항일투사 박열의 일본인 애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옥중 자살(의문사)
▶ 1925년 일제, 한국서의 좌익운동자 대량 검거
▶ 1916년 영국의 화학자 램지 사망 - 네온·아르곤·크립톤·크세논 등 4가지 비활성 기체를 발견
▶ 1907년 도쿄 유학생팀과 기독교청년회원팀의 우리나라 최초의 농구 공식경기 훈련원에서 열려
▶ 1906년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제3회 범미(汎美)회의 열림
▶ 1904년 현대 공중보건 서비스의 기초를 세운 영국의 의사 사이먼 사망
▶ 1903년 포드자동차 첫 판매, "모델 A"
▶ 1894년 대원군, 입각해서 국정참여
▶ 1885년 미국 남북전쟁 말기에 북군 총사령관을 지낸 미국의 장군, 미국 제18대 대통령(1869-77 재임) 율리시스 그랜트 사망
▶ 1856년 인도의 사회운동가 발 간가다르 틸라크 출생
▶ 918년 왕건, 고려 건국
자료제공☞출처:http://bitly.kr/hP4B
▮ 오늘의역사(1900년대) 7월23일
🌻오늘의역사(1900년대)7월23일
1995년 태풍 페이호, 남해안과 경남 내륙 강타 (50여명 사망)
1995년 유조선 씨 프린스호(8만여t의 원유 적재) 가 전남 여천군 해상에서 좌초 최악의 해양오염 사고 발생
1994년 20개 대학총장들, 간담회서 `주사파 폭로' 로 파문을 일으킨 박홍 서강대 총장의 발언을 지지 키로 결의
1993년 한국과학기술원, 프레온가스(CFC)의 대체 물질인 HFC 134a를 연구착수 3년만에 개발
1993년 총무처, 임시정부 관련문서 유관순판결문 등 주요 문서와 사진등 희귀자료 800여건을 선별 공개결정
1993년 경찰청, 8월 1일부터 외국 영주권 가진 해외 교포들에 대해 국내 카지노업소 출입을 금지키로
1992년 서울지검, 정보사 부지 매각사기 사건은 660억 원을 사취한 단순 사기 사건이고 배후는 없다고 발표.
1992년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범국가 투쟁본부 , 서울 등에서 단식 농성 시작
1991년 정부, 폴리아세탈수지 국내 덤핑한 듀퐁과 일본의 아사히케미컬 3사 덤핑방지관세 4.0~9.7% 부과.
1991년 국회, 본회의를 열고 4조1985억원 규모의 91년도 제2차 추경안을 정부 원안대로 통과
1990년 평민당 소속의원 70명, 민주당 소속 5명과 무소속의 김현 서경원 의원 국회의원직 사퇴서 제출.
1990년 정부, '8ㆍ15범민족대회'에 우리측 단체. 인사 들의 참가를 허용키로
1990년 연형묵 북한 총리, '7ㆍ20민족대교류' 제의를 협의키 위한 실무회담개최를 거부
1990년 여자양궁 김수녕선수(19·고려대)는 태릉 훈련원 에서 3개의 한국 및 세계신기록을 수립
1990년 시멘트 품귀 가수요 악순환-10개 시멘트공장, 3470만톤
1990년 북한 조선 고고연구, 방형준원분이 발굴 보고
1990년 부산시 해운대 반송동 주민, 일주일째 동네에 산업쓰레기 매립장 건설 반대를 외치며 국도 점거 농성.
1990년 방송구조 법안등 날치기통과-평민-민주등 의원직사직서 제출
1989년 해운대등 전국의 피서지에 300만명의 인파가 몰려, 48명 익사
1988년 일본 공동통신, 박철언 보좌관이 6월 노태우 대통령의 특사로 소련과 중국을 방문 했다고 보도
1988년 인천지법 형사2부, 성고문 문귀동 피고 에게 징역 5년 자격정지 3년 선고
1987년 북한, 남북한및 미국이 참가하고 중립국 감독 위원회 대표가 옵서버로 참가하는 다국적 군축협상 제의
1985년 남북국회회담 첫 예비접촉(판문점), 국회 회담 위한 서울∼평양간직통전화가설등에 합의
1981년 전국민주학생연맹 전국민주노동연맹 사건 발표
1978년 정비불량 서울 시내버스 한강 추락 (승객등 33명 사망, 13명 중경상)
1973년 수원 팔달산에 홍난파 노래비 세움
1966년 중부지방 큰비(7월23-7월26) 67사망 116 실종
1965년 전북 옥구에 농협 최대의 도정공장 준공
1965년 이승만 전 대통령 유해, 하와이에서 돌아옴
1960년 전국 은행 노조 연합회 결성.
1950년 국민병 소집
1942년 김두봉, 조선독립동맹 조직
1938년 총독부, 교원·공무원 12만명에게 제복 착용 지시
1931년 아동문학가 방정환 세상 떠남
1904년 정부, 국민들의 황무지 개간권 반대 시위에 호응. 한 치의 땅도 외국인에게 대여하지 않겠다고 고시.